묵상구절

1월 7일 수요일 묵상구절 합1:12-17 <하박국이 다시 호소하다>

Joy in Grace 2026. 1. 7. 14:38

맥체인성경읽기

창세기 7, 마태복음 7, 에스라 7, 사도행전 7

묵상구절

1:12 <하박국이 다시 호소하다> 선지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

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1:14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1:15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1:16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

1:17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1. 본문 핵심 요약 및 구조적 이해
하박국 1:12–17절은 하나님의 첫 응답(1:5–11)을 들은 이후, 선지자가 다시 하나님께 드리는 두 번째 질문이자 항변이다. 이 단락에서 하박국은 더 이상 “왜 침묵하시는가”를 묻지 않는다. 대신 “왜 더 악한 자를 사용하시는가”라는 문제로 질문의 깊이를 옮긴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원성을 분명히 고백하면서도, 갈대아의 잔혹함과 교만이 하나님의 성품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본문은 신앙이 하나님의 응답으로 즉시 평안을 얻지 못할 때, 오히려 더 깊은 신학적 갈등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질문은 불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진지하게 붙들고자 하는 믿음의 몸부림이다.

 

2. 원문 해설 요약
(1) 12절: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반석이시니이다
- 히브리어 원문은 하나님을 '추르(Tsur, 반석)'라고 부른다. 이는 제국들이 파도처럼 요동칠지라도 신자가 딛고 선 근거는 하나님의 '불변성'에 있다는 고백이다. 하박국은 흔들리는 역사 속에서 유일하게 흔들리지 않는 지점(The Unshakable)을 붙잡고 탄원을 시작한다. 하박국은 질문으로 시작하지 않고 고백으로 시작한다. 그는 하나님을 영원하신 분, 거룩하신 분, 언약의 하나님으로 부른다.
(2) 12절: 우리가 죽지 아니하리이다
- 이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 때문에 자기 백성이 완전히 진멸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언약적 확실성'의 표현이다. 심판의 목적이 파멸이 아니라 정결(징계)에 있음을 신앙으로 선포하는 대목이다. 즉 갈대아의 침공이 궁극적 멸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임을 인정하는 신앙 고백이다. 선지자는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먼저 붙든다.
(3) 13절: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 '정결하다'는 단어 '타호르(Tahar)'는 제사법적으로 '전혀 오염되지 않은 순결함'을 뜻한다.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듯, 거룩하신 하나님과 악이 한 역사적 공간에 공존하는 것 자체가 선지자에게는 형이상학적인 고통으로 다가온다.
(4) 13절: “어찌하여 악인을 방관하시며”
- 하박국의 갈등은 하나님의 정결하심과 하나님의 침묵 사이에서 발생한다. 그는 하나님이 악을 보실 수 없는 분임을 고백하면서, 동시에 더 악한 갈대아가 의로운 자를 삼키는 현실을 하나님께 그대로 토로한다. 이는 신앙이 의문을 억누르는 태도가 아니라, 의문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는 행위임을 보여준다.
(5) 13절: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 '잠잠하다'는 뜻의 '하라쉬(Charash)'는 '귀를 막다' 혹은 '벙어리가 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하박국의 눈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입을 닫고 무력해진 것처럼 보였다. 특히 바벨론(절대 악)이 유다(상대적 의)를 '삼키는(Bala)' 행위는 약육강식의 공포를 극대화한다.
(6) 14절: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
- '어족(Dag)'과 '기어 다니는 것(Remes)'은 통치자가 없는 상태의 생명체들을 뜻한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치 '통치 부재(Anarchy)'의 상태로 인간을 내버려 두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임의로 유린하게 방치하신다는 탄식이다. 즉 하박국은 갈대아의 폭정을 비인격화의 언어로 묘사한 것이다. 갈대아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지 않고, 포획의 대상, 이용의 대상으로만 본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잔혹함이 아니라,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는 죄다.
(7) 15절: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 바벨론의 침략 기술과 잔인함을 세 가지 도구(낚시, 그물, 투망)로 나열하여 심판의 '철저함'을 강조한다. 한 사람을 낚는 낚시부터 민족 전체를 휩쓰는 투망까지, 바벨론의 폭력은 틈새 없이 치밀하며 조직적이다.
(8) 16절: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 이것은 '수단의 우상화'를 의미한다. 바벨론은 승리의 원인을 하나님의 허락이 아닌 자신들의 군사 기술과 무기(그물)에 돌리며, 자신들의 능력을 신격화하는 극도의 교만을 저지른다. 인간이 성공의 도구에 절하는 순간, 그 도구는 인간을 삼키는 우상이 된다. 이는 하나님 없이 번영을 누리는 모든 제국의 전형이며, 인간 능력을 절대화하는 우상숭배다.
(9) 17절: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살육함이 옳으니이까”
- '그물을 떨다(Riq)'는 잡은 물고기를 비워내고 다시 살육을 위해 그물을 던지는 행위를 말한다. 하박국은 바벨론의 탐욕이 일회성이 아니라 ‘순환적인 광기'임을 꿰뚫어 보았다. - "이것이 옳으니이까"라는 질문은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에 대한 최종적 답변을 촉구하는 외침이다. 하박국은 질문으로 이 단락을 끝낸다. 아직 답은 없다. 그러나 이 질문은 무질서한 항변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반드시 최종적으로 드러날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3. 영적 교훈 요약
(1) 하나님의 거룩성과 악의 허용 문제
개혁주의 신정론은 "하나님은 거룩하시나 악을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한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이 악의 창조자는 아니시지만, 악인의 악한 의지를 제한하거나 특정 방향으로 흐르게 하여 자신의 선한 목적을 이루시는 '섭리의 경륜'을 강조한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근거로 악의 허용을 질문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에 가장 깊이 천착하는 신학적 태도를 보여준다.
(2) 상대적 의와 절대적 타락
하박국이 유다를 바벨론보다 '의롭다'고 표현한 것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되는 과정에서의 도덕적 형평성을 묻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역사를 심판하실 때 더 큰 악을 징벌하기 위해 덜 악한 자를 보존하시거나 징계의 수위를 조절하시는 비상 섭리를 사용하신다.
(3)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질문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함은 신자가 질문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벽이 아니다. 오히려 그 거룩하심이 있기 때문에, 악의 번성과 하나님의 침묵은 더 큰 신학적 긴장을 낳는다. 청교도들은 참된 신앙이란 하나님의 성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의 모순을 숨기지 않는 태도라고 보았다.
(4) 하나님은 악을 사용하시되, 악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갈대아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지만, 갈대아의 교만과 폭력을 승인하지 않으신다. 이는 섭리가 죄를 선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죄 위에서 선을 성취하는 방식임을 보여준다. 신자는 이 섭리 앞에서 설명을 요구하기보다,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신뢰하도록 부름받는다.
(5) 권력은 언제나 자기 신격화의 위험을 내포한다
갈대아는 힘을 소유했을 뿐 아니라, 그 힘을 자신들의 신으로 삼았다. 이는 모든 시대의 인간 권력이 반복하는 죄다. 영적 교훈은 분명하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성공은 반드시 우상이 된다.

 

4. 예수 그리스도
(1) 악인에게 삼켜진 진정한 의인
하박국은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킨다"고 탄식했다. 이 탄식의 완벽하고도 처절한 성취는 십자가다. 이 질문은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른다. 가장 의로우신 분이 가장 불의한 방식으로 죽임당하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불의를 통해 구원을 이루셨다. 가장 사악한 자들이 결합하여 죄 없으신 '절대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삼켰다. 하나님은 그때에도 '잠잠히' 계시는 듯 보였으나, 그 침묵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가장 거대한 하나님의 일하심이었다. 하박국이 이해하지 못한 하나님의 방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공의가 동시에 성취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신자는 하박국처럼 모든 답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자리로 부름받는다.
(2) 정결하신 눈이 외면하신 고통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셔서 죄를 보지 못하신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죄를 짊어지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성부 하나님은 아들을 외면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그리스도의 외침은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속적 답변이 된다.

 

존 오웬, ‘Of the Providence of God’ “섭리는 종종 성도의 눈에 혼란으로 보이나, 그 끝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로 수렴된다.”
존 오웬, ‘The Grace and Duty of Being Spiritually Minded’ - 제 18장 중,
"하나님의 섭리는 때때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심연 속에 감추어져 있다. 악인이 번성하고 의인이 고통당하는 것을 볼 때, 우리의 이성은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기 쉽다. 그러나 기억하라. 우리가 보는 것은 직조기 뒷면의 엉킨 실타래뿐이나, 하나님은 앞면에서 완벽한 무늬를 짜고 계신다. 하나님의 침묵은 악에 대한 승인이 아니라, 그분의 지혜로운 작정 안에서 악인의 잔이 차기까지 기다리시는 인내이며, 동시에 자기 백성을 정련하시는 거룩한 수단이다."
칼빈 주석 중,
“선지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붙든 채 질문한다. 이는 하나님을 의심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반드시 스스로를 변호할 것이라는 확신의 표현이다.”
매튜 헨리 주석 중,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성품과 '반석' 되심을 선포함으로 기도를 시작한다. 이것이 신앙의 위대한 처방이다. 상황이 요동칠 때 우리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 안으로 도망쳐야 한다. 하박국은 하나님이 악을 보지 못하시는 정결한 눈을 가지셨음을 믿었기에, 역설적으로 그 거룩함에 근거하여 현실의 불의를 고발할 수 있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결코 악인의 그물에 영원한 승리를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매튜헨리/옥스퍼드

●예언자의 호소 (하박국 1:12-17)

이 예언자는 백성에게 전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연후에, 이제는 하나님께로 돌이켜 다시, 자기가 본 중한 경고의 짐에 눌린 자신의 심령을 편하게 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한다. 아직도 그는 불평으로 가득차 있다. 만일 그가 주위를 돌아 본다면 그는 오직 이스라엘이 행한 강포를 볼 뿐이다. 만일 그가 앞을 본다면 이스라엘에게 행하여 진 강포를 볼 뿐이다. 또한 어느 것이 더 우울한 광경인지를 말하기가 어렵다. 그는 이 두 가지에 대한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쏟아 놓는다.

하나님의 교회에 임한 재난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장소에 임한 재난, 그리고 패역를 보면 우리도 분기하는 것이 의무이다. 그러나 우리는 후회 중에 불평하기에 너무 지나쳐서 하나님께 대한 완고한 생각을 품거나 그와의 교제를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은 악하니 항상 악하였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세상을 개조하는 일은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며 만유로부터 그에게 영광를 돌리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으므로, 세상에 대해 최선을 다할 결심을 하고 우리 자신을 더 선하게 하여 복락된 세상을 바라야만 한다.

갈대아인의 놀라운 번성이 이 예언자로 하여금 기도의 무릎을 꿇게 하였고, 그래서 그는 이 일에 대해 하나님께 호소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 탄원 속에서 우리가 살필 것은 다음과 같다.

Ⅰ. 갈대아인들이 갈수록 위협적으로 되어가는 권세 밑에서, 그가 설정하고 준수하기로 결정하며, 그 자신과 그의 동료들을 위로하는 데 필요로 하는 참된 사실들이 있다.

이것들은 이와 비슷한 경우에 처할 우리를 지지해 줄 기쁜 생각을 제공할 것이다.

1. 아무리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 이시며, "우리의 거룩한 자" 이시다.

승리에 찬 갈대아 사람들은 그 힘으로 자기들의 우상을 삼지만, 우리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라" (렘 10:10, 11)고 말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1) 그는 "여호와" 이시니, 곧 모든 존재, 권세, 그리고 완전의 기초이시다. "우리의 반석은 그들의 것과 같지 않도다."

(2)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 백성의 이름으로 말씀하신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비록 우리가 이처럼 심히 멸망했으며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임했으나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지 않았으며 그와의 관계를 끊지도 않았다. 우리가 그를 부인하지 않았고 그가 우리를 부인하시지도 않았다(시 44:17). 우리는 허물진 백성이며 그는 멸시받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우리의 소유이며, 우리는 그에 대해, 그의 예배에 대해 강퍅한 생각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3) "그는 나의 거룩한 자이시다." 이는 예언자가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사랑하며, 거룩하심을 인하여 그를 사랑했음을 암시한다. "그는 거룩한 자이므로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나의 성결자이시며 나의 구원자이실 것이니, 그가 나의 거룩한 자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은 거룩하지 않으나 나의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2. 우리의 하나님은 영원부터 계신다.

그는 이렇게 호소한다.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시여."

이 현세의 생활에서 환난 아래 놓여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들의 하나님이 만세 전부터 계시다는 사실은 크나큰 계속적 위로가 된다. 이것이 암시하는 것은

(1) 그의 본성의 영속성.

만일 그가 만세 전부터 계신다면 그는 영원까지 계실 것이며, 우리는 일시적이며 가시적인 것들이 우리를 실망시킬 때 불가시적이며 영원하신 하나님 속에서 충분한 소망과 도움를 가진다는 이 첫 원칙을 의지해야 한다. "주는 영원으로부터 계시지 않나이까? 그렇다면 주는 주의 영속적인 뜻을 이행하기 위해서, 주님 자신께 영원한 이득이 돌려지게 하기 위해서 주의 영원한 팔을 드러내지 않으시리이까?"

(2) 그의 언약의 유구성.

"주는 예로부터, 주의 백성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이시며(어떤 이들이 이렇게 이해한다), 우리가 귀로 듣고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들려 준 위대한 일들을 옛날에 행해졌으며, 과거 어떤 때와 같이 아직도 동일하신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주는 하나님이시며 변하시지 않으시니이다."

3. 세계가 존속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 교회를 보유하실 것이다.

주는 영원부터 계시며, "우리는 죽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근절되지 않을 것이며, 이스라엘의 이름이 때로는 위태로울지라도 멸절하지 않으리라. 사도들과 같이(고후 6:9), "경책당해도 죽지는 않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도 붙이지 아니하셨도다" (시 118:18).

예언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속성으로부터 교회의 영속성을 추리하는가 보라. 그리스도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살았고" 그러므로 내가 사는 한 "너희도 살겠음이라" (요 14:19)고 했다. 그는 교회가 견고하게 세워진 반석이시니 "지옥의 권세가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며,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죽지 않으리라."

4. 교회의 원수들이 그에게 어떠한 일을 행하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르며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계획되며 방향이 정해진다.

"주께서 그를 두셨나이다. 주께서 그를 세우셨나이다." 갈대아인들에게 힘을 주셨으며 그들로 강한 백성으로 삼아 그의 계획 속에서 그들이 해야 할 것을 결정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의 이스라엘에게 어떠한 적대 세력도 행사할 수 없으며, 단지 "위로부터 그들에게 주어진" 것을 할 뿐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탈취하며 노력하도록" 허락하였다(사 10:6).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시니, 힘센 사람의 힘이 그로부터 나오며 그를 의지하고, 그의 견제 아래 놓여 있다. 그는 그것에 대하여 "여기까지는 올 것이나, 더 이상은 아니다" 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시는 자는 그 제정하신 것 이상을 행하지 않으리니, 이는 고통받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큰 위로가 된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손이며 그의 손이 막대기이다(시 17:14). 그리고 그는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으며, 경계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다." 하나님의 백성은 징계를 요하며 그것을 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그것을 기대해야만 한다. 그들은 그것을 받으리라. 악인들이 그들을 대적하도록 풀어 놓아질 때, 그것은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며, 그들을 개혁하여 바로잡기 위하여 된 것이다. 그들은 죽이는 검이 아니라 마음에 깃든 어리석음을 몰아내기 위한 막대기로 쓰여진다. "그의 뜻은 이 같지 아니하며 그 마음의 생각도 이 같지 아니하다" (사 10:7). 인간이 어떤 재난을 꾀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로부터 선을 끌어내시며, 우리는 "그의 계획이 선" 것을 확신한다. 이 사실은 교회의 환난과 재앙을 참작해 볼 때,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5. 악인의 사악함이 잠시 승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하나님이시니 악을 시인하지 않는다(13절).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도다." 이 예언자는 갈대아인이 지극히 약탈하고 불경함에도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큰 승리를 이룬 사실을 살핀 후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헛되며 인간의 처지가 하나님께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이 일어남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곧 그의 제일 원칙인 "하나님께서는 죄의 후원자나 조성자가 아니시며 그럴 수도 없다" 는 사실을 믿고 그 생각을 누른다. 하나님이 스스로 패역을 행하실 수 없듯이, 그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신다." 오히려 그것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가증한 일이다." 그는 세상에서 범해지는 모든 죄를 보시니, 그것은 그에게 득죄요 그의 눈에 가중한 것이며, 그것을 행하는 자는 그로 인해 그의 공의에 저촉되기 쉽게 된다. 하나님의 품성에는 그의 거룩한 법에 위배되는 저 악성과 악행에 대한 증오가 있다. 그리고, 비록 그가 죄인들과 화해할 방편을 즐거이 찾으셨으나, 결코 죄와 화해하시지 않을 것이며, 그럴 수도 없다. 그리고 이 원칙을 준수할 결심을 해야만 한다. 비록 그의 섭리의 백정이 잠시, 그리고 어떤 경우에 그것과 상치하는 것 같더라도 그리해야 한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묵과는 그것을 장려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기" 때문이다(시 5:4, 5). 본문은, 하나님께서 간과하시는 패역은 특히 압제자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해진 재난을 뜻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할 이유를 발견하시나, 그것을 시인하지는 않으신다. 이것은 발람의 경우와 부합되니(민 23:21),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인간의 분노에 의한 재앙 속에서도 큰 위로를 받는 원인이며, 그들은 그로부터 하나님의 진노를 추측해내지 않는다. 환난의 도구가 자기들을 증오한다 하여,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도 그리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그렇지 않으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징계하시는 그 중에 사랑을 나타내신다.

Ⅱ. 그는 이 참혹한 현실이 다음과 같은 사실과 부합되기 어려움을 발견한다.

즉 "주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신줄 우리가 확신하온데, 왜 무신론자들은 주께서 그러하신지 아니신지를 알려는 유혹을 받나이까? 어찌하여 주는 자기 백성을 궤휼한 갈대아 사람들에게 방관하시며, 그들이 우리에게 행하는 일에 승리를 주시나이까? 왜 주는 주의 이름을 참람되게 하며, 주의 이름을 경외하고자 하는 주의 서원한 백성들을 이처럼 잔인하게, 불신적으로 취급하는 주의 철천지 원수들을 놔두시나이까? 우리는 이에 대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이것은 욥에게(욥 21:7; 24:1), 다윗에게(시 73:2, 3), 예레미야에게(렘 12:1, 2) 임한 유혹이었다.

1. 하나님께서 죄를 용납하시며 죄인들을 참으셨다.

그는 "그들을 방관하셨다." 그는 그들의 사악한 행동과 계획을 전부 보셨으나 그들을 억제하거나 벌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들의 의도를 촉진하며 잘되어 번성하도록 그들 앞에 모든 것을 날라오도록 놔두셨다. 아니다. 그가 그들을 방관한 것은 그들에게 견제와 책망을 안했다는 사실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그가 마치 그들에게 미소를 짓고 호의를 베풀어 주는 듯이 격려와 원조를 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는 그들이 사악한 길로 행할 때 "잠잠하셨으며," 그들에게 아무 말도 안하시고 그들에게 멈추라고 명하시지도 않았다. "이 일들을 당신이 행하셨으며 나는 잠잠했나이다."

2. 그의 인내는 악용되었으며, 이 악한 행사와 행사자들에게 "선고가 신속히 시행되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마음은 악을 행하는 준비를 더욱 더 충분하게 하였다."

(1) 그들은 거짓되며 속이기를 잘했으니, 아무도 그들을 신용하지 않았고 그들을 확신한 자도 없었다. 그들은 "궤휼히" 행한다. 평화와 우호의 깃발 아래 그들은 가장 사특한 계획을 시행하며, 어떤 일도 양심에 거리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 그들은 자기보다 낫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학대하기를, 마치 카인이 아벨을 증오하듯 "그의 행함이 악하고 그의 동생의 행함이 의롭다고" 하여 그러한 것과 같이 한다.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그가 그를 부끄럽게 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리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악의를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선한 사람들을 삼키니, 이는 선한 자들이 그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많은 유대인이 갈대아인들 자신만큼 악하거나 더 악하였지만, 그들 가운데 훨씬 더 의로운 자가 있어서, 갈대아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3) 그들은 사람을 죽이기를 물고기를 잡듯하였다. 이 예언자는 불평하기를, 하나님의 섭리가 약한 자를 건져내어 강한 자의 먹이가 되게 하였으니, 사실상 그들은 "바다의 어족 같게" 되었다고 했다(14절). 그래서 그들은 서로 서로 잡아 먹기를, 큰 생선이 작은 생선에게 하듯하며(3절), 그리하여 결국 공통적인 원수에게 당하였다. 그들은 "주권자 없는 곤충, 또는 헤엄치는 동물" (이 단어는 "물고기" 를 가리킬 때 쓰인다. 창 1:20) 같아서, 그들을 서로 잡아 먹지 못하게 하거나 그들의 원수들로부터 보호해 줄 주권자가 없었다. 그들은 마치 물고기가 어부에게 맡겨지듯이 갈대아인에게 넘겨진다. 저 교만한 압제자들은 양심없이 그들을 죽이되, 사람들이 생선을 물 밖으로 끌어내는 것 못지 않게 인간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리한다. 갈대아인들은 아무 어려움없이 그들을 죽이며, 사람들이 생선을 잡듯이 매우 쉽게 잡으니, 저항하지 못하고 보호되지 않으며 무장 안한 고기를 잡듯하며, 그들을 잡는 것을 수고스럽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오락으로 여긴다. 그들은 그물에 가까이 오는 고기를 닥치는 대로 모두 다 잡는다. 그리고 그들은 손을 대는 것은 모두 다 자기 것으로 여긴다. 사람들이 고기잡는 방책을 알고 있듯이, 그들도 약탈하고 파멸시키는 다양한 방책을 알고 있다. 어떤 것은 하나하나 "낚시로 취하며," 어떤 것들은 종류별로 "그물로 잡으며 초망으로 모은다." 그와 같은 다양한 방법을 써서, 그들은 그들을 통하여 부하게 되리라고 바라던 자들을 오히려 멸망시킨다.

(4) 그들은 취한 것으로 영광을 삼고 그것으로 스스로를 즐겁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직하게 얻어진 것이었다. "그들의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됨이니이다." 그들은 착취와 사기에 의해 번성한다. 그들은 많이 소유하며 최상의 것을 가진다. 그들의 땅은 비옥하여 거기서 많은 소산을 얻는다. 그러므로,

[1] 그들은 스스로 큰 자만에 빠져 매우 즐거워한다. 그들은 즐겁게 산다(15절). 그것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의 부가 막대하고 그들의 계획이 성공하여 그것을 증대시켰기 때문이다(욥 31:25). "영혼아 평안히 쉬라" (눅 12:19).

[2] 그들은 스스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서로 대단히 좋아하며, 자신의 재간과 경영을 서로 찬양한다. 그들은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 앞에 분향한다." 그들은 그처럼 많은 돈을, 비록 부정직하게 취했지만, 모은 것에 대해 스스로 박수를 친다. 우리 속에 우리의 외적 번영을 자신에게로 영광 돌리려는 경향이 있으며,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신 8:17)고 말하기 쉽다는 점을 명심하자. 이것이 우리 자신을 우상화하며, 우리 자신의 것인 초망 그물에 희생을 바치는 것이니, 이는 넵둔이나 다곤에게 희생을 바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우상 숭배의 하나이다.

그들로 이처럼 그들의 그물을 받들게 하는 것은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소득이 풍부해" 졌기 때문이다. 자기들의 재물로 신을 만드는 자는 만일 그물로 재물을 획득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초망 그물을 신으로 삼을 것이다.

Ⅲ. 끝으로, 예언자는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이 인류의 파멸자들을 항상 놔두어 이처럼 번성하도록 하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표현하고, 그에 관해 하나님께 아뢴다(17절).

"그가 그물을 떨겠습니까? 그들이 스스로 배불러 강포와 압제로 그들의 이웃으로부터 갈취한 것으로 그들 자신의 그릇을 채울 것입니까? 그들이 잡은 것을 그들의 그물에서 떨어내고, 다시 바다에 던져 더 잡을 것입니까? 그리고 당신은 그들이 계속 이 악한 길로 가도록 놔두시겠습니까? 그들은 연하여 늘 열국을 살륙함이 옳으니이까? 열국의 많은 사람과 재산이 그들의 그물에 희생되어야만 합니까? 마치 사람에게서 그들의 영토를 강탈하는 것이 작은 일인 것처럼,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그 영광을 도적질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열국의 왕이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또 그는 그들의 침해된 권리를 옹호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투기하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시지 않겠습니까?" 예언자는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자신은 물러났다. 마치 시편 기자가 했던 것과 같다(시 74:22).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주의 원통을 푸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