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1월 26일 월요일 묵상구절 슥6:9-15 <면류관을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다>

Joy in Grace 2026. 1. 26. 07:38

맥체인성경읽기

창세기 27, 마태복음 26, 에스더 3, 사도행전 26

묵상구절

6:9 <면류관을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6:10 사로잡힌 자 가운데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어갔나니 너는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받되

6:11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6:12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6:13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으리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6:14 그 면류관은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스바냐의 아들 헨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 안에 두라 하시니라

6:15 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진대 이같이 되리라


1. 본문 요약
스가랴 6:9–15절은 여덟 환상 이후 주어지는 하나의 상징적 예언 행위로,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포로 귀환자들이 바친 은과 금으로 관을 만들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라고 명하시는 장면이다. 이 행위는 단순한 격려나 의식이 아니라, 앞으로 오실 한 인물, 곧 “싹”(순, 가지)이라 불리는 메시아를 예표한다. 본문은 이 “싹”이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며, 영광을 얻고 왕위에 앉아 다스릴 뿐 아니라 제사장으로서 보좌에 앉아 평화의 도모를 이룰 것을 선언한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철저히 분리되었던 왕권과 제사직이 한 인물 안에서 결합될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성취될 것이며, 먼 데 있는 자들도 성전에 참여하게 될 것을 말한다.
2. 원문 해설 요약
1) 9-11절: 포로들의 예물로 만든 면류관을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움
◦ 바벨론에서 돌아온 헬대, 도비야, 여다야가 가져온 은과 금을 취하여 면류관(Atarot, 복수형)을 만들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운다.
◦ 원래 대제사장은 관(Miter)을 쓰고 왕이 면류관(Crown)을 쓰지만, 여기서는 제사장에게 왕의 관을 씌운다. 이는 장차 오실 메시아가 왕과 제사장의 직분을 한 몸에 통합하실 것을 상징한다.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으로, 왕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이 그의 머리에 씌워진 것은 그가 왕이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를 통해 다른 이를 가리키는 예표적 행위다. 여기서 관은 실제 통치권이 아니라, 장차 오실 분의 신분과 사역을 시각적으로 선포하는 도구다.
삼중직의 깊은 묵상
: 이 행위는 그리스도의 삼중직(왕, 제사장, 선지자) 중 왕직과 제사직이 하나로 결합되는 결정적 지점을 보여준다. 인간 역사 속에서 권력은 쉽게 폭력이 되고, 종교는 쉽게 형식이 되어 분리되기 일쑤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통치가 곧 은혜이며, 중보가 곧 권세다.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우리를 다스리시되 제사장의 심장으로 다스리시고,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되 왕의 권능으로 중보하신다. 이는 타락한 통치와 죽은 종교를 넘어서는 완전한 통치자의 등장을 예표한다.
◦ 우리 삶의 '은과 금'(자원과 재능)은 결국 우리 왕이신 그리스도의 면류관을 장식하기 위해 드려져야 한다. 나의 소유가 주님의 영광을 위한 '기념물'이 되고 있는지 돌아보자.
 
2) 12-13절:
(1)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과 성전 재건
◦ "보라 순(Tsemach)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는 영광을 얻고 왕위에 앉아 다스리며, 그 왕위에 제사장이 함께 있을 것이다.
◦ “싹(순)”은 다윗의 집에서 끊어진 듯 보였던 왕권이 다시 자라날 것을 암시한다. 이는 겉보기에는 미약하고 눈에 띄지 않으나,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반드시 자라나 열매 맺는 존재를 뜻한다. 포로기 이후의 초라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은 화려한 언어가 아니라 생명의 은유로 메시아를 계시하신다. 이 '싹(순)'은 메시야의 칭호다. 그는 스스로 돋아나는 생명력을 가졌으며, 참된 성전(교회)의 건축자이시다. "두 직분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는 두 직무가 충돌 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룸을 뜻한
다. ◦ 내 영혼의 성전을 재건하는 분은 내가 아니라 내 안의 '순'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왕으로서 내 삶을 다스리시고, 제사장으로서 나를 하나님께 중보하실 때 내 삶에 참된 '평화의 의논'이 임한다.
◦ 여기서 성전 건축은 건물의 개보수를 넘어선 하나님 임재 방식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한다. 이제 하나님의 임재는 더 이상 정지된 건물에 국한되지 않는다. 참된 성전은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분과 영적으로 연합된 백성들(교회)이다. 이는 신앙의 중심이 '특정한 장소'에서 '그리스도라는 인격'으로 이동했음을 뜻한다. 우리가 건축해야 할 성전은 돌과 나무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서 성령으로 하나 된 거룩한 공동체다.
(2) 왕권과 제사직의 결합
”그가 왕위에 앉아 다스릴 것이요, 제사장이 되어 그 보좌에 앉을 것이라”는 선언은 구약 전체에서도 매우 이례적이다. 이는 율법 체계 안에서는 불가능한 구조로, 오직 새 언약 안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

 

3) 14-15절: 기념물과 먼 데 사람들의 참여
◦ 그 면류관은 성전 안에 두어 기념하게 하고, "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고 선언한다. 이 면류관은 인간의 공로를 기리는 것이 아니라, 소망 없는 포로들에게 메시아의 통치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게 하는 장치다.
◦ 이는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될 것을 예표한다. 성전 재건은 유다 지파만의 과업이 아니라 열방이 참여하는 우주적 사건이다.
◦ 하나님은 '먼 데 있는 자들'(영적으로 소외되었던 자들)을 불러 자기 사업에 동참시키신다. 나 같은 이방인이 은혜의 성전 건축에 부름받았음을 기억하며, 순종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4) ‘그가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히라라’의 반복 : 성전 건축의 주체
본문은 반복적으로 “그가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리라”고 말한다. 이는 스룹바벨의 성전 건축을 넘어서는 말로, 궁극적인 성전 건축자가 따로 있음을 분명히 한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임시적 표지이며, 참된 성전은 메시아 자신과 그 안에서 세워질 공동체다.
◦ '먼 데 있는 자들'의 등장은 복음의 보편성과 이방인의 참여를 암시한다. 교회의 구성 원리는 혈통이나 지역, 계급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장벽이 허물어진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예시한다.
 
5) 평화의 도모
◦ 왕과 제사장 사이의 평화가 아니라, 한 인물 안에서의 조화가 말해진다. 통치와 속죄, 권세와 중보가 충돌하지 않고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상태다.
 
6) 순종의 조건성
◦ "삼가 들을 때"라는 조건절은 인간의 행위가 은혜를 창출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은혜의 실현 방식이 순종의 통로를 통해 역사됨을 말한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일하시지만, 그 은혜를 백성들의 자발적이고 인격적인 순종이라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흘려보내신다. 순종은 은혜를 얻기 위한 대가가 아니라, 이미 임한 은혜를 실제 삶에서 경험하고 누리는 유일한 방식이다.
 
3. 영적 교훈 요약
(1) 하나님의 일은 성령의 ‘주권’적 생명력으로 이루어진다
본문에서 메시아는 '순(Branch)'으로 묘사된다. 순은 인위적으로 제작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에 의해 스스로 돋아난다. 성전 재건은 인간의 카리스마나 정치적 협상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적 공급에 의해 자라나는 유기적 역사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모든 외적 사역을 실현하시는 주권자이시다. 우리가 성령을 의존한다는 것은, 성전 건축의 설계와 완성이 인간의 '열심'이 아닌 성령의 '생명력'에 달려 있음을 인정하고 그분께 주도권을 내드리는 신학적 결단이다.
(2) 교회의 빛은 직분의 조화로운 공급에서 나온다
여호수아에게 씌워진 면류관은 왕권과 제사장권의 결합을 보여준다. 교회의 생명력은 이 두 직분의 조화, 즉 '평화의 의논'에서 나온다. 교회가 제도와 전통(왕적 질서)에만 치우치거나, 감상적인 위로(제사장적 긍휼)에만 치우칠 때 기름의 흐름은 막힌다. 청교도들이 교회를 "은혜가 흘러드는 통로"로 보았듯이, 스가랴 6장은 왕이신 그리스도의 통치와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중보가 만나는 지점에서 교회가 진정한 빛을 발함을 가르친다.
(3) 작은 예물은 언약의 영광을 예표하는 방식이다
포로들이 가져온 작은 은과 금이 메시아의 면류관이 된 것은 "작은 일의 날을 멸시하지 않으시는" 언약적 방식이다.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하나님의 약속이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실현됨을 강조한다. 돌아온 포로들의 미약한 헌신이 결국 온 세상을 통치할 메시아의 면류관으로 승화되듯, 우리의 작은 순종은 언약의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 성화 또한 이러한 작은 순종들이 쌓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긴 언약적 과정이다.
(4) 멀리 있는 자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배치
"먼 데 사람들이 와서 건축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섭리가 이스라엘의 지리적 경계를 넘어 온 우주를 포괄함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장애물을 평지로 만드실 뿐 아니라, 예상치 못한 자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신다. 청교도들은 섭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더 분명히 드러내는 배치"로 이해했다. 지금 내 곁에 없는 자원이나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먼 데서' 불러오셔서 성전을 완성하게 하시는 것이 주권적 섭리의 신비다.

 

4. 예수 그리스도
-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싹”이다. 나사렛이라는 작은 동네, 초라한 시작, 십자가의 수치 속에서 그는 자라났다.
-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 그 자체다. 그는 자신의 몸을 가리켜 성전이라 하셨고, 부활로 그 성전을 다시 세우셨다.
-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자 제사장이다. 그는 다스리시되 피 흘림으로 다스리셨고, 중보하시되 권세로 중보하신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는 타협이 아니라 완성이다. 정의와 자비가 십자가에서 충돌하지 않고 하나로 만났다.
- 성도는 이 왕의 통치 아래 있으나 두려움이 아니라 안식으로 순종한다. 그의 멍에는 쉽고, 그의 짐은 가볍다. 그리스도는 다스리기 위해 멀어지지 않으셨고, 구원하기 위해 권세를 내려놓지도 않으셨다. 그는 왕이시기에 우리를 지키시고, 제사장이시기에 우리를 끝까지 붙드신다.
(1) 참된 등불이자 ‘순’이신 그리스도 스가랴 6장의 '순'은 요한복음의 "참 빛"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수렴된다. 교회는 스스로 빛을 내는 근원이 아니라, 돋아나는 순처럼 생명력을 공급하시는 그리스도께 연결될 때만 존재할 수 있다. 그리스도라는 뿌리가 없으면 성전의 화려한 외형(면류관)은 공허한 장식에 불과하다.
(2)성령을 보내어 성전을 건축하시는 그리스도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을 것이요"라는 선언은 오순절 이후 성령을 보내셔서 자기 몸 된 교회를 세워가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열심에 사역을 맡기지 않으시고, 성령을 통해 친히 교회의 머릿돌부터 끝돌까지 주관하신다.
(3) 비천한 ‘순’에서 영광의 왕이 되신 분
그리스도는 세상의 화려한 면류관을 쓰고 오지 않으셨다. 그분은 땅에서 돋아나는 연약한 '순'처럼 말구유와 나사렛의 '작은 시작'을 선택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낮은 곳의 순종을 통해 온 구속 역사를 완성하셨고, 결국 그에게 만유의 면류관을 씌우셨다. 스가랴 6장은 십자가의 낮은 길(순)이 영광의 보좌로 이어짐을 미리 보여준다.
(4) 보좌에 앉은 제사장,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
왕위에 앉은 제사장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 항상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의 궁극적 실체다. 교회가 꺼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신실함 때문이 아니라, 왕의 권세와 제사장의 자비함을 동시에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의논" 가운데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존 오웬, ‘The Priesthood of Christ”
"그리스도는 보좌에 앉으신 제사장이시다. 그분의 왕관은 중보의 가치를 높이고, 그분의 중보는 왕권의 엄함을 부드럽게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법(Law)은 복음이 되고, 권세(Power)는 사랑이 된다. 이 평화의 의논이 당신의 영혼을 통치하게 하라.”
존 오웬, ‘그리스도의 영광’ 중,
”그리스도의 왕적 권세는 결코 그의 제사장적 긍휼과 분리되어 행사되지 않는다. …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피로 구속을 성취(Acquisition)하셨다면, 왕으로서는 그 구속을 자기 백성에게 적용(Application)하신다. 만약 그리스도가 제사장일 뿐 왕이 아니셨다면, 우리를 위해 대속하셨을지라도 우리를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실제로 건져낼 힘이 없으셨을 것이다. 반대로 그분이 왕일 뿐 제사장이 아니셨다면, 그분의 통치는 죄인인 우리에게 두려움과 심판의 대상일 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좌에 앉으신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왕의 권능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제사장의 자비로 우리를 용납하신다.”
토마스 왓슨, ‘신학의 체계’ 중,
"하나님의 은혜는 순종이라는 통로를 통해 흐른다. 순종이 은혜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순종이 없는 곳에 은혜의 열매도 없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신 안에 성전을 짓기 위해 망치를 드는 것과 같다. 성령의 생명력이 당신의 순종을 통해 성전을 완성하실 것이다.”
칼빈 주석 중,
”그리스도 안에서만 고대의 직분들이 화해되어, 통치와 화목이 하나의 사역이 된다.”
스티븐 차녹,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중,
- 차녹은 스가랴 6:13에 명시된 '평화의 의논'을 성부와 성자 사이의 '구속 언약(Covenant of Redemption)'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왕직과 제사장직 사이에 흐르는 '평화의 의논'은 영원 전부터 계획된 신적 조화다. 그리스도의 왕관(Crown)은 그분이 흘리신 피(Blood) 위에 세워졌다.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명령하실 때, 제사장으로서 자신이 친히 담당하신 연약함을 기억하신다. 그분은 공의의 규(Scepter)를 휘두르시되, 그 끝에는 제사장의 향기로운 향이 묻어 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엄격한 율법으로 느끼지 않고,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주신 이의 부드러운 인도로 느끼게 된다.”
토마스 굿윈, ‘그리스도의 마음’ 중,
"그리스도께서 왕의 보좌에 앉으셨다고 해서 그분의 심장이 제사장의 자비를 잊으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왕의 권세를 얻으심으로써, 자신의 자비로운 마음이 원하는 모든 것을 자기 백성에게 행하실 수 있게 되었다. 제사장으로서의 그분의 '마음'은 우리를 동정하고, 왕으로서의 그분의 '손'은 우리를 구원한다. 보좌에 앉은 제사장은 성도가 고난당할 때 왕의 권능으로 천군천사를 움직이시고, 제사장의 자비로 성도의 눈물을 닦아주신다.”

매튜헨리/옥스퍼드

●여호수아를 존귀케 함 (스가랴 6:9-15)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시대들" 뿐만 아니라, "여러 방식으로," 과거에 예언자들을 통해 교회에 말하셨다. 본장의 앞 부분에서는 환상에 의해 말했다. 이것은 오직 예언자 자신만 볼 수 있었다. 여기, 이 후반부에서는 표적, 혹은 모형을 많은 사람이 보았다. 그의 교회의 제사장과 왕으로서의 메시야의 현격한 예언을 통해 말씀하신다. 여기서,

Ⅰ. 하나님께서 정하신 중요한 의식. 그리고 그것은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의 대관식" 이었다(10,11절).

여호수아라고 이름하는 그리스도의 두 뛰어난 모형이 구약 성서에 있다는 것은 잘 아는 일이다("예수" 와 같은 이름이다. 70인 역에 의하면 신약 성서에서 "예수" 를 가리켰다. 행 7:45). 대장, 즉 우리 구원의 대장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인 여호수아, 그리고 우리 신앙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인 대제사장 여호수아, 이 둘은 각기 그들의 시대에 있어서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구원자요, 지도자였다.

그리고 이것은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에게 특수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모형, 즉 왕이며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시라는, 하나님의 의도적 치정에 의해 그에게 행해지는 일이다. 여호수아는 결코 면류관에 대한 야망이 없었고, 백성들이 면류관을 쓴 머리를 그들 위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예언자는-그 둘도 크게 놀랐다-마치 여호수아가 왕인 것처럼 그에게 관을 씌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스룹바벨의 신중함과 경건이 이를 자기에 대한 어떠한 모욕이 결코 되지 않도록 하였듯이(그와의 경쟁자를 세우는 것으로서), 또한 하나님의 섭리는 바사 왕들이 그들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여겨 그 일에 성내지 못하도록 했다. 여기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확신하는 것을 함에 있어서는, 인간들의 못마땅히 여김을 무릅쓰는 용기를 내어도 좋을 것이다.

1. 여기에 바벨론으로부터 하나님의 집에 제물을 가져온 몇몇 유대인들이 있었다.

여기서 명명된 "포로 중 몇 사람" 은 영예스럽게도 예루살렘을 방문하러 "바벨론에서부터 돌아 왔다." 그들은 바벨론에 대해 최종적 작별 인사를 마쳤어야 했고, 그들 자신의 고향에서 형제들과 함께 거주하러 왔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행한 부주의와 무관심 때문에 그들은 이 방문이 그들을 용서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아마 그들은 바벨론에서 평안하고 충족히 살고 있던 유대인 집단의 사절들로 왔던 것 같다. 그리고, 성전 건축이 자금의 부족으로 서서히 진척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은 하나님의 집에 대한 예물로서 금과 은의 헌물을 함께 보내왔다. 거리가 멀거나, 또는 다른 이유 때문에 그들의 인적 자원으로 선한 사업을 도울 수 없는 자들은, 가능한 대로 그들의 지갑으로 그 일을 도와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만일 누가 손이 모자란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채울 것이다.

2. 예언자가 그들을 만나기 위한 시간과 장소가 약속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예물을 하나님의 정규적 사역자인 제사장에게 가져올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그것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특수한 사람인 한 예언자를 마련하셨다. 이는 포로 중에 처하여 "우리는 우리의 표적을 보지 못하니, 더 이상 예언자가 없도다" 라고 자주 불평했고, 예언의 영이 그 안에서 다시 일어났을 때 그들과 다른 이들을 초청하여 당시 그처럼 보이기 시작했던 성지와 같은 그들 자신의 고향에 재정주시켰던 자들에게 격려가 되었다. 스가랴는 그들이 온 "이 날에" 집회를 열라는 명령을 받았고(그들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즉시" 그들의 헌물을 내 놓았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재물을 이제 받으신다고 확신시킴으로써 환영을 표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아마 성전의 제물 수령의 대표였고 그것을 보고에 간직했던, 스바냐의 아들 요시야의 집에서 그들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금과 은을 가져와서 성전에 사용되기를 원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의 명예를 위해 쓰여질 것을 명령했다(마 12:6).

3. 면류관이 "만들어져서,"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워졌다" (11절).

제공된 면류관은 두 개로서, 하나는 으로, 또 하나는 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전자는(혹자의 생각에) 그의 제사장으로서의 위엄을 뜻하고 후자는 그의 왕으로서의 위엄을 뜻한다. 혹은, 오히려, 그가 이미 제사장으로서(제사장으로서의 영예와 능력을 보이기 위해) 금면류관을 받았으므로, 이 은과 금으로 된 면류관은 "왕의 위엄" 을 뜻하니, 은면류관은 아마 메시야가 이 땅 위에 오실 때, 그의 왕국을 상징하려고 고안된 것 같으며, 그 때 그는 "이스라엘 왕이기 때문" 이며(요 1:49), 금면류관은 그가 들려진 상태에서의 그의 왕국을 뜻하니, 그 영광이 금이 은에게 그러하듯이 전자의 (은)면류관보다 훨씬 뛰어났다. 태양은 "힘있게 나아갈" 때 금처럼 빛난다. 그리고 달의 빛은 "밝게 걸어갈" 때, 우리가 "은빛" 이라고 부른다. 해와 달을 숭배하던 자들이 이제 들려진 구속자의 금과 은으로 된 면류관 앞에 엎드릴 것이며, 그 두 분 앞에 태양은 부끄러워하고 달은 당황하여, 그 빛을 잃는다.

Ⅱ. 하나님께서 이 의식에 부여하신 의미를 보자.

모두가 "이처럼 여호수아가 관을 쓰게 된 것은 무슨 뜻인가?" 하고 기꺼이 물을 것이다. 그리고 예언자는 그들에게 기꺼이 그 뜻을 말할 것이다. 이 말하는 표적 위에 예언이 새겨지며, 표적은 예언을 더욱 더 주목되게 하고 더 잘 기억되도록 하곤 했다.

1. 하나님께서 때가 찰 때, 여호수아와 같은 큰 대제사장을 일으키실 것이다.

여호수아에게 그가 단지 오실 이의 모형, 곧 그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라(12절).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리라고 그에게 말하라." 그는 그의 출생지로 예정된 곳인 다윗성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비록 그 가족이 마른 땅에 내린 뿌리이지만, 이 순(가지)이, 마치 태양이 돌아오는 봄에, 꽃들이 묻혀서 모이지 않고 마음에서도 사라진 뿌리들에서 뻗쳐 나오듯이, 그것으로부터 솟아 나오리라. 그는 "홀로 자랄 것이요" (혹자는 그렇게 읽는다), propria virtute - 즉 그 자신의 활력에 의해 그 자신의 힘을 키워나가리라.

2. 여호수아가 성전 건축에 있어서 활동적이며 유용한 도구였듯이, "그 사람, 그 순" 은 훌륭한 건축의 대가, 영적 성전인 복음의 교회의 유일한 건축자가 될 것이다. 그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리고 이 말은 되풀이 되니(13절),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는 자라서 선을 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가 되며 인류에게 큰 축복이 될 것이다. 복음의 교회는 "여호와의 성전, 영적 집(벧전 2:5), 거룩한 성전이다" (엡 2:21). 성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을 그의 백성에게 나타내셨고, 거기서 그는 그의 백성의 예배와 존경을 받았다. 그처럼 복음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빛은 말씀에 의해 빛나고, 기도와 찬양의 영적 희생이 바쳐진다. 이제 그리스도는 기초일 뿐만 아니라, 그의 성령과 은총에 의해 이 성전의 건축자(창설자)가 되신다.

3.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누릴 것이다.

영광은 짐이지만, 모든 것들을 떠받치시는 이에겐 감당하기에 너무 무거운 짐이 아니다. 십자가는 그의 영광이며, 그는 그것을 졌다. 그와 같이 면류관은 "영광의 큰 무게" 이지만, 그는 그것을 감당한다. "정사(政事)가 그의 어깨에 있고," 그 안에서 "그는 영광을 누린다" (사 9:6). "그 아비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라." (사 22:24). 그것은 그에게 걸리고, 그는 par negotio-즉 그것을 지기에 합당하다. 제사직과 왕위의 영광이 아론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서 갈라졌다. 그러나 이제 그는 홀로 양자의 영광을 모두 누릴 것이다. 그가 감당할 것, 그가 누릴 것은 참으로 "이스라엘의 영광" 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를 기다려야 하며, 그에 대한 기대 속에서 그것들이 전에 가졌던 외적 영광의 부족 속에서도 만족해야 한다. 그는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큰 나중 집의 영광을 낳는 그러한 영화를 누릴 것이다. 그는 "영광을 높이리라" (이것은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이스라엘의 영광은 던져져 침체되었으나, 그는 그것을 티끌로부터 올릴 것이다.

4. 그가 보좌를 누릴 것이며, 그의 보좌 위에서 동시에 제사장이며 왕이 될 것이다. 보좌는 위엄과 통치, 그리고 확대된 세력과 함께 높여진 영예를 뜻한다.

(1) 이 제사장은 왕이 될 것이며, 제사장으로서의 그의 직책은 왕으로서의 그의 위엄을 감소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 보좌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다."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중보하기 위해 항상 사신다. 그러나 그는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서 그는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서 그리하신다(히 8:1). 우리는 이스라엘에 일찍이 없었던 "그러한 대제사장" 을 모시는 것인데, 그 까닭은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오른 편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중재에 중대한 미덕을 부여한다. 휘장 안에서 우리를 위해 나타나신 자는 거기서 앉아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를 위해 희생을 드리도록 임명받은 그리스도에게는 우리에게 율법을 줄 권위가 있다. 그는 만일 우리가 그의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그에게 보좌를 준비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에 의해 어떤 유익을 얻으려면,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그를 위한 보좌를 준비하며, 그가 "그 보좌에서 앉으사 다스리시기를" 원하고 즐거워하게 해야 한다. 또한 그에게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생각이 순복하게 되어야 한다.

(2) 이 왕은 제사장일 것이니, "그의 보좌 위에 계신 제사장" 이시다. 왕의 위엄과 능력과 함께, 그는 "사람 가운데서 취해지고, 사람들을 위해 임명되어 무식한 자에게 동정하실 수 있는" 제사장의 온유함과 단순성을 가지실 것이다(히 5:1, 2). 왕으로서의 그의 정사의 각부분에 있어서, 그는 제사장으로서의 그의 은총의 의도를 수행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소유인 자들로 하여금, 비록 영광의 보좌요 심판의 보좌이지만, 그의 보좌를 공포와 경이로 보지 말게 하라. 왜냐하면, "보좌 주위에 무지개" 가 있듯이, 그는 "보좌 위의 제사장" 이기 때문이다.

5. "평화의 의논이 그들 사이에 있으리라." 즉,

(1) "여호와" 와 "순이신 사람 사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이다. 그리스도의 중재에 의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평화에 관한 의논은 구속의 언약 속에 있는 무한한 지혜에 의하여 협의될 것이다(즉, 협의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 문제에 있어서 완전하게 충분히 서로를 이해한다. 혹은 오히려,

(2) 제사장과 보좌 사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격인 직임과 왕격인 직임 사이이다. "순이신 그분" 은 "평화의 의논" 을 수행하러 자라나리니, 땅의 평화와, 그것을 위하여 하늘과의 평화를 의논해야 한다.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평화의 생각" 이며, 그것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그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왕이며 동시에 구세주" 로 들어 올렸다. 그는 그에게 보좌를 주셨는데, 그가 그의 보좌 위에 제사장이 되어야 하며, 제사장과 왕의 두 직임을 수행함으로써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되고 그 안에서 복을 누리도록 하는 위대한 작업을 초래해야 한다는 조건 아래서 그렇게 하였다.

혹자는 그것이 왕과 제사장의 분리된 직임자들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지금 그러하듯이, 교회와 국가에 있어서의 평화와 번영을 유지할 목적으로 서로 의논을 하는 유대 국가의 이전 정사를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그들을 돕는다" 는 말을 덧붙일 수 있다. 그처럼 복음의 교회와 모든 신도들의 평화와 복지가, 비록 두 분리된 사람들에 의해서는 아니지만, 하나에서 만나는 두 분리된 직임 덕택에 시행될 것이니-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사직에 의해 모든 평화를 사시며 그의 왕국에 의해 그것을 유지하시고 수호하신다. 펨블(Pemble)씨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예언자직은 이 위대한 계획 속에서 양자에게 봉사한다.

6.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복음의 교회 안에서 서로 행복한 연맹을 가질 것이며, 그들은 양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 그들의 일치의 중심으로서 그의 보좌 위에 제사장이 될 것이다(15절).

"먼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혹자는 그것을 포로생활 뒤에 있는 바벨론에 멀리 떨어져 있는 유대인들도 이해하는데 이는 돌아와서 성전을 짓는데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형제들에게 큰 실망이 되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 다수와, 유대교로 개종한 다른 나라들도 들어와서 성전 건축에 돕는 손을 빌려 주고, 많은 손들이 가벼운 일을 할 것을 약속하신다. 바사의 왕들도 성전 건축에 기여했고(스 6:8), 그 장식을 도왔다(스 7:19, 20). 그 후대에 헤롯 대왕과 이방인들이 성전을 아름답고 풍부하게 하는 일을 도왔다.

그러나 이것은 나아가서 장차 "순인 사람" 이 지을 "여호와의 성전" 을 가리켰다. "먼 데 사람" 인 이방인들이 그 건축을 도우리니, 그 이유는 그들 중으로부터 하나님께서 그 건축에 대해 그리스도와 함께 할 일꾼들이 될 사역자들을 일으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방인 개종자들 모두는 이 건물에 부착되는 돌들이 되어 "거룩한 성전으로 성장할" 것이다(엡 2:20).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져야 할 때 그는 먼 데 있는 자들로부터 데려올 것이며 그 건축에 그들을 기용할 것이다.

7. 이 뜻의 성취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대한 강한 확신이 될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그 약속, 먼 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성전 건축에" 있어서 그들을 도와 주리라는 약속은 소위 "그들에게 표적을 주었다." 이에 의해 그들은 다른 약속들도 때가 되면 이루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는 이제 매우 신속히 이루어져야 했다. 그것은 그렇게 되었으니, 그 까닭은 왕의 칙령에 순복하여서, 그들의 원수요 고소자들이었던 사람들이 그들을 돕는 자가 되었고, 그 일의 진척을 위해 명령받은 일을 신속히 행하였고, 그에 의해 그 일이 계속되었고 끝마쳐졌기 때문이다(스 6:13, 14 참조).

이제, 그들은 성전 건축에 있어서 멀리로부터 감행된 이 놀라운 도움에 의해, 자기들이 이전에 들었던 것, 곧 스가랴가 하나님에 의해 보내졌고, 그리하여 "순" 이신 그 사람에 관한 그의 말이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8. 이 약속들은 순종에 대한 의무를 요한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청종할진대 이같이 되리라(너의 성전 건축을 돕게 되리라). 너희는 만일 선한 열심을 스스로 품고 그 일을 하면 성전 건축에 있어서 이 외국인들의 도움을 얻을 것이다." - 타인의 도움은, 우리의 나태에 대한 핑계가 되는 대신에, 우리의 근면에 대한 박차가 되어야 한다.

"만일 네가 너의 의무를 양심적으로 행하면 저 모든 약속들의 유익과 평안을 향유하게 되리라." 그들은 선한 행실 위에 거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비록 그들의 하나님께서 긍휼의 방식으로 그에게 오시지만, 그들은 만일 그들이 그의 율법에 순응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계속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은혜에 합당하게 만들기 위해서 요구하시는 것은 계시된 그의 뜻에 대한 순종이다. 그리고 그것은 근면한 순종이어야 한다. 우리는 많은 주의와 고통없이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할" 수 없고, 우리의 순종은 우리가 애쓰지 않고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Ⅲ. 이에 대한 기억을 위하여 행해진 준비를 보자.

이 의식 속에서 사용된 "면류관들" 은 여호수아에게 주어지지 않고, "여호와의 전에 기념하기 위해 보존되어야" 했다(14절). 그들이 교회 보고 안에 간직되든지,(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모든 사람이 보도록 성전의 창문 위에 걸어야 했다. 즉 in perpetuam rei memoriam - 즉 영속적인 기념을 위해, 메시야의 약속에 대한 전통적인 증거를 위하여 또한 그 약속의 확인에 사용되는 이 전형적인 처리를 위하여, 그 재료를 찾아낸 자들에게 전해져서(혹자는 그들의 이름이 면류관 위에 새겨졌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경건한 봉헌에 대한 공적 증거와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집에 예물을 가져오도록 타인을 권면하는 뜻에서 보존되었다. 다양한 수단들이, 정해진 시간, 그때까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던 구약의 성도들이 믿음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되었음을 주목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