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1월 27일 화요일 묵상구절 슥7:1-7 <여호와께서는 금식보다 청종을 원하신다>

Joy in Grace 2026. 1. 27.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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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8, 마태복음 27, 에스더 4, 사도행전 27

묵상구절

7:1 <여호와께서는 금식보다 청종을 원하신다> 다리오 왕 제사년 아홉째 달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7:2 그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의 부하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7:3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매

7:4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7: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7:6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7:7 예루살렘과 사면 성읍에 백성이 평온히 거주하며 남방과 평원에 사람이 거주할 때에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으냐 하시니라


1. 본문 요약
성전 재건이 시작된 지 2년이 지난 다리오 왕 제4년, 벧엘 사람 사레셀과 레겜멜렉이 예루살렘으로 사람을 보내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질문을 던진다. 그들의 핵심 질문은 "과거 예루살렘이 함락되던 5월에 행해왔던 애통과 금식을 성전이 재건되는 지금도 계속해야 하는가?"였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스가랴를 통해 형식적 종교 행위의 본질을 꿰뚫는 질문으로 응답하신다. 지난 70년 동안 행한 5월과 7월의 금식이 과연 "나(하나님)를 위하여" 한 것이냐는 물음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금식할 때뿐만 아니라 먹고 마실 때조차도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행했음을 지적하신다. 본문은 과거 예루살렘이 번성했을 때 옛 선지자들이 외쳤던 진정한 순종의 메시지를 상기시키며, 종교적 관습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중심과 실천적 순종임을 강조한다.

 

2. 원문해설 요약
1) 1절: 다리오 왕 제4년 아홉째 달
◦ 성전 재건이 시작된 지 2년이 지난 시점이다(슥 1:1은 다리오 2년). 첫 환상을 본 후 2년이 흘러 공사가 본궤도에 올랐을 때, 신앙의 '매너리즘'이 찾아올 수 있는 시기다.
◦ 하나님은 역사의 구체적인 시간 속에서 말씀하신다. 성전이라는 외형이 갖춰져 갈 때, 하나님은 백성들의 외적 열심이 아닌 '내면의 성전'을 점검하기 위해 이 메시지를 주신다.
◦ 사역이 안정되고 신앙의 형식이 자리 잡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 껍데기만 남은 경건이 아닌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2) 2절: 벧엘 사람이 보낸 사절단과 ‘얼굴을 부드럽게 함’
◦ '벧엘 사람'(Bethel)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기 위해 사람을 보낸다. 여기서 '은혜를 구하다'의 원어 **'레할로트 에트-페네'(lechallot et-pene)**는 직역하면 "여호와의 얼굴을 부드럽게 하다" 또는 "달래다"라는 뜻이다.
◦ 이 용어는 종종 하나님을 인격적 대상을 넘어,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분의 마음을 돌리려는 '종교적 술수'로 쓰일 위험이 있다. 벧엘 사람들은 하나님 자체를 구하기보다, 금식이라는 무거운 짐을 벗겨줄 '허락'을 얻고자 그분의 안색을 살피고 있는 것이다.
◦ 나의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가, 아니면 내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하나님의 얼굴을 '달래는' 중인가?
3) 3절: "내가 울며 재계하리이까" - 습관이 된 눈물
◦ "내가 울며(ha-ebkeh) 재계하리이까(hinnazer)." '재계하다'의 원어는 나실인을 뜻하는 '나지르'와 같은 어근으로, 거룩을 위해 자신을 구별하고 절제하는 행위를 뜻한다. 그들은 이 행위를 "여러 해 동안"(zeh kam-mah shanim) 해왔다고 강조한다.
◦ 70년 동안 행해온 금식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는 의식이었다. 하지만 성전이 완공되어 가니 이 '슬픈 의무'가 거추장스러워진 것이다. 그들에게 경건은 기쁨이 아니라 '처리해야 할 과제'였다.
◦ "언제까지 이 봉사를 해야 하나?", "꼭 이만큼 헌금해야 하나?"라는 질문이 든다면, 이미 내 안의 경건은 생명력을 잃고 습관적인 고역이 된 것이다.
4) 4-5절: 하나님의 강력한 반문 - "나를 위하여(Ani) 한 것이냐"
◦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hatsom tsamtuni ani) 한 것이냐"라고 묻는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아니'(Ani, 나)**라는 1인칭 대명사가 반복되며 강조된다.
◦ 5월(성전 파괴)과 7월(그달리야 총독 암살)의 금식은 국가적 비극을 기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 금식의 대상이 '하나님의 상실'에 대한 애통이 아니라, '자기 처지의 불쌍함'에 대한 자기 연민이었음을 지적하신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파서 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망해서 울었던 것이다.
◦ 회개할 때 내가 지은 죄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이 모독당하신 것 때문에 아픈가, 아니면 죄의 결과로 내가 겪을 손해와 수치 때문에 아픈가?
5) 6절: 먹고 마심의 독점적 자기 중심성
◦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원어상 **'아템'(atem, 너희들)**이 강조된다.
◦ 청교도들은 이를 '자기 숭배'라고 불렀다. 금식할 때는 자기 연민에 빠지고, 먹고 마실 때는 자기 즐거움에 빠진다. 금욕과 향락이 모두 '자기'라는 우상을 향해 있다. 하나님은 경건의 시간뿐 아니라 일상의 식탁에서도 소외되어 계셨다.
◦ 내 삶의 소소한 즐거움과 일상의 루틴 속에 하나님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주님과 함께 먹는가, 아니면 주님을 문밖에 세워두고 홀로 배를 채우는가?
5) 7절: 옛 선지자들의 말씀 - 잊혀진 본질
◦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평온히 거주하며 번성했을 때를 언급하신다. 그때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금식의 횟수가 아니라 '말씀을 청종하는 것'이었다.
◦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금식을 안 해서가 아니라, 공의를 행하라는 옛 선지자들의 말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본질(순종)을 버린 자들이 비본질(금식 여부)을 가지고 하나님께 묻는 모순을 지적하신다.
◦ 삶의 현장에서 순종하지 않으면서 예배의 형식에만 집착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신앙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종교 형식을 취할까' 고민하기보다 '오늘 이웃에게 어떻게 공의와 자비를 행할까' 고민하기를 원하신다.

 

3. 영적 교훈 요약
(1) 형식은 예배가 될 수 없고, 동기 없는 열심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개혁주의 전통에서 예배는 인간의 고안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와 뜻에 의해 규정된다(예배의 규정적 원리, 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 본문에서 벧엘 사람들의 질문은 "우리가 이 관습을 계속해야 합니까?"라는 형식 논리에 머물러 있다.
종교적 열심의 변질: 하나님 중심성을 상실한 열심은 아무리 뜨거워도 결국 자기 목적을 위한 의식(Ritual)으로 전락한다. 70년이라는 세월은 경건을 증명하는 훈장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없는 종교성에 길들여진 내면의 타성을 상징할 수 있다.
자기 위로로서의 금식: 본래 금식은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통로다. 그러나 회개 없는 금식은 "나는 이만큼 고행을 견뎠다"라는 자기 확인과 "슬퍼하는 나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라는 자기 위로의 도구가 된다.
분별의 기준: 참된 예배와 가짜 예배를 가르는 시금석은 '행위의 성실함'이 아니라 '동기의 신적 지향성'에 있다.
(2) 죄는 행위보다 '방향'의 문제다
개혁주의 죄론의 정수는 죄를 단순한 '도덕적 일탈'이 아니라 '존재적 반역'으로 이해하는 데 있다. 본문이 제기하는 날카로운 질문은 금식의 여부가 아니라, "나를 위하여(Ani) 한 것이냐?"라는 방향성에 있다.
자아를 향해 굽은 마음: 마틴 루터의 통찰처럼, 타락한 인간은 모든 선한 행위조차 자기 자신을 향하게 만든다. 금식이라는 지극히 거룩해 보이는 행위조차 '나를 위해' 소비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전적 부패(Total Depravity)다.
방향의 전도: 본문 6절에서 먹고 마시는 행위가 "너희를 위한 것"이었듯, 그들의 금식 또한 방향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틀어져 있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께 마땅히 가야 할 영광의 방향을 자아라는 블랙홀로 돌려버리는 데 있다.
영적 분별: 행위의 거룩함이 마음의 거룩함을 보증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룩한 행위가 위선의 가면이 되어 죄의 본질을 더 깊이 숨길 수 있음을 경고한다.
(3) 계시론과 언약 책임: 이미 주어진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영적 혼란을 낳는다
하나님은 새로운 종교적 지침을 구하는 벧엘 사람들에게 이미 주어진 과거의 계시를 상기시키신다. 이는 영적 침체와 혼란의 원인이 하나님의 침묵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적 청종에 있음을 보여준다.
계시의 충분성: 언약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영적 처방전'이 아니라,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들려주신 "공의와 자비"라는 명백한 말씀에 대한 항복이다.
언약적 책임의 회피: 사람들은 순종하기 힘든 말씀(사회적 공의, 긍휼)은 무시한 채, 비교적 수행하기 쉬운 종교적 형식(금식의 폐지 여부)에 집착하며 자신의 영성을 증명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언약적 책임을 회피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영적 침체의 진단: 영적 어둠은 종종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듣고 싶은 말씀만 골라 듣는 선택적 불순종의 결과다. 하나님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를 과거에 이미 주셨던 약속과 명령의 자리로 다시 소환하신다."하나님의 침묵은 종종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분의 마지막 명령을 무시하고 있을 때 발생한다."

 

4. 예수 그리스도
스가랴 7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참된 금식과 예배를 조망하게 한다. 예수께서는 외식적인 금식과 사람에게 보이려는 경건을 강하게 책망하셨다. 그리스도는 금식을 폐하신 분이 아니라, 금식의 목적을 회복하신 분이다. 그분의 전 생애는 “아버지를 위하여” 드려진 완전한 순종의 삶이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드리던 모든 종교 행위의 공허함을,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과 대조하여 드러내신다.
또한 그리스도는 예배의 방향을 인간의 질문에서 하나님의 질문으로 전환시키신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보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라는 질문으로 신앙을 재구성하신다.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자기중심적 경건이 무너지는 자리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참된 예배가 시작되는 자리다. 그러므로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참된 회개, 참된 금식, 참된 예배를 갈망하게 한다.
(1) 참된 금식의 실체이자 유일한 표본이신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40일 금식은 벧엘 사람들처럼 형식을 준수하거나 종교적 공로를 쌓기 위함이 아니었다. 주님께 금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양식"을 취하기 위해 육체의 양식을 잠시 내려놓은 것이었다(요 4:34).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하지 않으셨으며(마 6:16-18), 오직 하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사셨다. 주님은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위선까지도 담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진실한 순종"을 바치신 분이다. 인간은 금식 중에도 "나의 고통"에 집중하지만, 그리스도는 금식 중에 "아버지의 영광"에만 집중하셨다. 그분은 전 생애를 통해 "나를 위하여"가 아닌 "아버지를 위하여" 사신 유일한 인류이자, 참된 동기의 완벽한 표본이시다.
(2) 십자가: 모든 위선의 폭로와 근원적 치유
스가랴 7장에서 하나님이 던지신 날카로운 질문("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가장 극명하게 대답된다.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자기중심적 경건(Religious Self)이 낱낱이 파헤쳐지고 죽임당하는 자리다. 그리스도는 겉만 번지르르한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책망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십자가에서 우리의 오염된 동기와 거짓된 경건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셨다. 그분의 보혈은 단순히 외적 행위를 닦아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깊은 위선까지도 정결케 하시는 '위선의 치료제'다.
(3) 성령을 통해 동기와 방향을 재설정하시는 왕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주권을 쥐신 왕으로서, 성령을 통해 우리 내면의 나침반을 재설정하신다. 본래 인간은 금식할 때도 '나를 위해' 울고, 먹을 때도 '나를 위해' 즐거워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는 이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게 되는 새 마음을 얻는다(고전 10:31).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율법적 질문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라는 사랑의 질문으로 신앙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키신다.
(4) 모든 날을 '주를 위한 날'로 만드신 분
그리스도 안에서는 금식의 날과 먹고 마시는 날의 구분이 사라진다.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사로 바꾸셨다. 우리는 이제 어떤 형식을 지킬까 고민하는 포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시는 잔치의 자녀로 부름받았다.
 
토마스 왓슨, ‘회개’ 중,
“금식은 회개의 껍질일 수 있으나, 마음이 찢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향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장식이다.
토마스 왓슨, ‘팔복’ 중,
금식은 단지 위장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죄를 비우는 것이다. 위선자는 육체를 괴롭게 하지만 정욕은 그대로 둔다. 그러나 참된 금식은 마음을 찢는 것이다. 하나님은 배고픈 몸보다 상한 심령을 더 귀히 보신다. 만약 당신이 음식을 끊으면서도 죄를 끊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룩한 금식이 아니라 단지 식사를 거르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스도 없는 금식은 영혼을 치료하는 약이 아니라 자아를 높이는 독극물이 될 뿐이다.”
매튜 헨리 주석 중,
"그들은 70년 동안 금식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었느냐'고 물으신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파괴를 슬퍼했으나, 그 파괴를 불러온 자신들의 죄는 슬퍼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는 고난(Misery) 때문에 울었으나,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진 것 때문에 울지는 않았다. 진정한 종교는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경건이 나의 안위나 나의 종교적 평판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그 모든 금식의 날들을 당신의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실 것이다."
존 오웬, ‘죄 죽이기’
"그리스도의 영이 원리가 되지 않는 모든 종교적 의무는 하나의 송장(Carcass)과 같다. 성령에 의해 수행되지 않고, 오직 인간의 의지와 두려움, 혹은 습관에 의해 수행되는 금식과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엇을 했느냐'를 묻기 전에 '누구의 힘으로 했느냐'를 물으신다. 자기 중심적인 경건은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면서 사실은 자기 자신을 예배하는 가장 교묘한 우상숭배다. 우리는 우리의 '금식'조차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야 할 만큼 부패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스티븐 차녹,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영적 예배에 관하여)’ 중,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오직 영적인 것만을 기뻐하신다. 몸을 굽히고 음식을 거절하는 것은 동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오직 거듭난 영혼만이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동기가 변화되지 않은 자의 금식은 하나님을 달래려는 미신적 행위일 뿐이다. 복음적 금식은 '심판이 두려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여 그분과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을 끊기 위해' 하는 것이다."

매튜헨리/옥스퍼드

옥스퍼드 주석

●금식에 관한 질문 (스가랴 7:1-7)

이 특별한 설교는 앞의 환상 이후 2년이 넘어서 행한 것인데, 그 동안에 그는 그의 환상을 설명했다(1절). 즉 다리오왕 "4년 9월," 그리고 제 1장 1절에 있는 다리오왕 2년 8월을 비교해보면 시간이 그렇게 걸린 것 같다. 스가랴가 그동안 계속 게을렀던 것은 아니나(그와 학개가 다리오왕 제 6년에 성전이 마칠 때까지 계속 예언했다고 명백히 했다), 그동안 그는 이것처럼 기록으로 남았던 어떤 설교를 하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글에 의해서 뿐 아니라 입의 말에 의하여도 명예롭게 되시며 그의 역사를 이루시고, 또 자기 유익을 지키신다. 그리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진척시킴으로서 뿐만 아니라, 가르쳐진 것을 되풀이하고 역설함으로써도 그리할 수 있다. 이제 여기서 우리가 살필 것은

1. 이 물음을 가져오는 자들이 누구인가?

세레셀과 레겜멜렉이니, 유력한 지위와 외모를 가진 사람들로서, 그들은 "그들의 수하와 함께" 와서 이 심부름에 불려진 것을 자기 멸시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명예로 생각했다. 즉 다음과 같은 영예이다.

(1) 하나님의 집의 수종자들로서이다. 거기서 의무를 다하고 명령을 받는다. 사람에게 가장 큰 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규례의 가장 작은 일보다 작다.

(2) 하나님의 백성의 대리자로서이다. 그들의 일들을 협상하는 자들이다. 땅을 소유한 사람들은 사업을 하는 사람들보다 여유가 더 많아서, 그들의 시간을 공중에 대한 봉사에 사용해야 하며, 선을 행함으로써 그들은 참으로 위대하게 된다. "교회들의 사자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고후 8:23).

2. 그들은 무슨 심부름으로 왔는가?

그들은 아마 "금과 은" 과 함께(마치 6:10, 11 에 나오는 자들처럼) 파송되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만일 그랬더라도 언급되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는 두 가지 위대한 심부름을 위해 파송되었으니,

(1) 하나님과 중재하여 그의 긍휼을 힘입으려고 왔다.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구하려고" 또는 혹자의 생각대로(당시의 용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치려고" 즉 그것과 함께 그들의 기도를 봉헌하려고 보내어졌다. 포로기간 중에 유다인들은 성전을 향해 기도했다(단 6:10 에 나타나는 바대로). 그러나 이제 그 성전이 재건되는 순탄로에 있었으므로 그들은 성전 안에서 기도할 그들의 대표를 보내었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집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 이라고 일컬어지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사 56:7). 기도 중에 우리는 자신을 "여호와 앞에" 세우고, 우리 위에 계신 그의 눈을 보며, 우리의 눈을 그에게 들어야 한다.

(2) 하나님께 그의 뜻을 물으려고 왔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요구를 진정할 때, 그것이 그로부터의 교훈을 기꺼이 들으려는 의도와 함께 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그의 율법을 듣는 것을 그만 두고 귀를 돌린다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들이 그에게 용납되기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일생의 모든 날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거기서 주여, "당신은 나를 위해 무엇을 하시렵니까?" 또한, 주여, "당신은 나로 하여금 무엇을 하게 하시렵니까?" 하고 물으면서 "구할 수 있도록" (시 27:4) 소망해야 한다.

3. 그들이 누구와 의논했는가?

그들은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에게" 말했다. 전자는 보통 경우를 위한 신탁이었고, 후자는 특별한 경우를 위해서였다. 그들은 양자를 함께 받게 되었고, 각자가 이 경우에 있어서 그들과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하도록 애썼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양한 은사를 허락하시고 모두가 그것을 유익하게 쓰도록 하셨으니, 우리는 기회있는 대로 모든 것을 이용해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정해진 성직자인 사제들에게 열중하여서 그들에게 주어진 은사들에 의해 교회를 섬길 자격이 갖추어진 것으로 보이는 예언자들을 무시하게 되지는 않았다. 또한 그들은 예언자들에게 크게 매혹되어 제사장들을 멸시하지 않았으니, 그들은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에게 모두 말했으며, 양자와 의논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만유에서 역사하는" 한 성령에게 영광을 돌렸다. 하나님은 "우림" 이나 "예언자들에게" 의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으며(삼상 28:6), 따라서 그들은 각각을 경시해서는 안 되었다.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서로 질투하지 않았고, 그들 가운데 어떤 차이를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그들 사이에 차이를 만들지 말고, 그들 양자가 소유한 하나님을 감사할지니라. 예언자들은 참으로 제사장들 가운데서 잘못된 것을 비난했으나, 동시에 백성들에게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라" 고(말 2:7) 말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 문의해야 하며,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그의 특별한 일이 바로 "성경을 탐구하는" 일인 자들의 충고를 구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4. 그들이 만족하기를 바랐던 경우는 무엇이었는가?(3절)

"내가 여러 해 동안에 행한 대로 5월 간에 울며 재계하리이까?" 다음을 살피라.

(1) 포로기 20년 동안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선포된 해방 이후 20년을 보낸 이 시기까지, 그들의 과거에 행한 실천이 무엇이었나? 그들은 겸비와 기도를 위해 엄격히 정해진 금식을 지켰다. 그들의 밀실, 가정, 혹은 그들이 가졌던 예배 집회에서 기회가 있는 대로 경건하게 지켰다.

여기에 나온 경우는, 오직 하나, 5월의 금식을 말한다. 그러나 8장 19절에 의하면 그들이 네 번의 연례적 금식을 준수한 듯한데, 하나는 제 4 월에(6월 17일) 예루살렘 성벽의 붕괴를 기억하여 지켰고(렘 52:6), 또 하나는 제 5 월에(7월 4일) 성전의 불탐을 기억하여 지켰고(렘 52:12, 13), 또 하나는 제 7 월에(9월 3일) 그들의 분산을 완결지었던 그달리아의 살해를 기억하여 지켰고, 또 하나는 제 10 월에(12월 10일) 예루살렘 포위의 시작을 기억하여 지켰다(왕하 25:1).

그들이 이 같은 금식일을 지키고, 이리하여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울고 애통하라고 부르셨던 회개의 섭리 아래 자신을 겸비케 하며, 또 이리하여 그들의 환난에 적응하며 구원에 대해 스스로를 준비시키는 것은 매우 칭찬할 만한 일이었다.

(2) 그들의 현재의 의문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이 이 금식을 계속해야 하는가 그만둬야 하는가였다. 그런데 그 질문은 일인칭으로 되었다. "내가 울리이까?" 그러나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 해당하는 경우이며, 한 사람의 만족은 나머지 사람에게도 만족이 될 것이었다. 혹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그만두었으나, 그 질문자는 다른 사람들의 실천에 의해 좌우되지 않으려 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그것을 계속하게 하면, 그는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든 간에 그것을 할 것이다. 그의 금식은 그의 "울음과 재계함" 이라는 말로 묘사되었다. 종교적 금식은 절제, 곧 여기서 우리 자신을 일상적이며 합법적인 삶의 위안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으로 일컬어진 절제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여기서 울음이라고 표현된 죄에 대한 경건한 눈물에 의해 엄숙하게 행해져야 한다. "내가 아직도 여러 해 동안에 행한 대로, 영혼을 괴롭히는 날들을 계속해야 합니까?" 그것은 이전처럼(1:12), 마지막 포로기로부터 계산되어, 10년이 된다고 언급된다(5절). 질문은, 만일 하나님께서 지정하신다면, 비록 그것이 육체에 고행이 되더라도 기꺼이 계속하겠다는 것을 암시한다.

[1] 이 금식의 지속을 위해 어떤 말이 언급되었다. 금식과 기도는 언제든지 선행이 되며, 선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겸비해야 할 충분한 이유와 충분한 필요성을 가지고 있다. 이 금식을 던져 버리는 것은 그들이 너무 안일하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비탄 중에 있었으며, 하나님의 진노의 증거 아래 있었다. 그리고 환자가 스스로의 병의 후유증을 감지하고도 치료의 과정을 포기하는 것은 현명치 못한 일이다. 그러나,

[2] 이 금식을 그만 두게 하는 어떤 말도 언급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관한 그의 섭리의 방법을 바꾸셨고, 그들에 대한 긍휼의 길로 돌이키셨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들의 의무의 방식을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 이제 신랑이 돌아 왔으니, 왜 "신랑의 친구들이 금식" 해야 하는가? 모든 것이 알맞은 시절에야 아름답다.

그리고 제 5 월의 금식에 관여하는(그것은 그들이 특별히 질문하는 것인데), 성전의 불탐에 대한 기억 속에 보존되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대치되기 쉬웠던 듯하다. 그 까닭은 성전이 이제 아주 잘 재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 금식을 지켜왔으므로, 그들은 충고없이, 또한 요청과, 그 경우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바 없이는 그것을 그만 두려고 하지 않았다. 종교적 예배의 좋은 방식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남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충분한 이유없이 변경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성숙한 사려없이 변경되어서도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Ⅱ. 이 상황에 주어진 응답을 보자.

비록 그 질문이 아주 그럴 듯한 것 같으나, 그것을 제안한 자들은 그 문제에 있어서 양심적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까닭은 그들이 그 본질보다는 의식에 관해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금식을 자랑하며, 그 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비난하기를, 그가 그들에게 긍휼을 가지고 곧 돌아오시지 않았다고 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이 여러 해 동안에 행했기 때문이다." 마치 이사야 58장 3절처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는 식이다.

그리고 혹자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이 그들의 질문의 근저에 놓여 있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그들에게 당연히 있어야 할 신용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 그들의 기회가 끝났으므로 금식은 중단해야 마땅하다는 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질문에 대한 첫 대답은 "그 땅의 백성들" 에게 뿐만 아니라, 이 금식을 규정하였고, 아마 그들 중 일부는 그것을 지킬 것에 찬성하여 그들 자신의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던 "제사장들" 에게 향해진, 위선에 대한 날카로운 비난이다. 그들 모두는, 자기들이 금식함으로써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크게 빚진 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실은 그들이 매우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었음을 알라.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더 나은 방식과 더 나은 의도로 금식을 준수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에게 용납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 그들이 선한 것을 행했으나 올바르게 행해지지 않았다(5절).

"너희가 금식하고 애통하였다." 그들은 비록 그 의무가 몸에 괴로운 것이었으나, 그것을 등한시하거나 빼먹지 않았다(그들의 금식은 "항상 내 앞에" 있었다. 시 50:8). 그러나 그들은 그 금식을 바르게 하지 않았다. 각자의 의무를 구하러 오는 자는 그들의 잘못을 책망받으려는 기꺼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리고 의무의 형식에 열심하는 자들은 그들의 의무의 내용에도 마땅히 가져야 할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 신실하게 검토해야 한다.

(1) 그들은 금식 중에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그는 그들 자신의 양심에 호소하신다. 그들은 그들이 그것에 신실하지 않아 왔다는 것을 자신에 대해 증언할 것이니, 사람의 마음보다 위대하시며 모든 것들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더욱 더 그리하실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나를 위해 전혀 금식하지 않았음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의무의 몸통과 형태는 있었으나 그 생명, 영혼, 힘은 없었다. 그것은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반복은 주요 문제로서, 큰 강조가 놓여 있음을 암시한다) 즉 그것과 다른 거룩한 의식들이 하나님에게, 그에게, 그의 말씀을 우리의 율례로, 그의 영광을 우리의 목표로 주목하여 행해지며, 그것들을 지킴에 있어서, 그를 기쁘시게 하기를 구하고, 그의 은혜를 얻고 그에게 우리 자신을 드러내려고 진지하게 고심하는지? 이것이 결핍되었을 때는 모든 금식이 놀이에 불과했다. 금식은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하지 않는 것은 그를 조롱하며 격노케 하는 것이었으며,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없었다. 이세벨의 금식처럼 금식을 죄에 대한 옷으로 삼는 자나, 바리새인처럼 그것에 의해 스스로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법정으로 삼는 자, 혹은 아합처럼 그들의 마음은 겸손하지 않으면서 겸손의 외적 표현에 머무르는 자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진정 그를 위하여 금식하는 것인가?"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는가?" (시 58:5) 만일 우리의 금식이 비록 잦고, 길고, 엄격하다고 해도, 그것의 엄숙성이 경건한 애정에 날을 세우고, 기도를 촉구하고, 경건한 애통을 증가시키고, 우리 마음의 기품을 바꾸고 생의 과정을 더 낫게 아니하면, 그것은 전혀 의도에 부응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 자신에게 행해진 것으로 받지 않으실 것이다.

(2) 그들은 그들이 먹고 마실 때의 눈으로 그들의 금식 중에 스스로를 주목했다(6절).

"다른 날에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아니 아마 너희의 금식일들, 즉 네가 이유를 발견했을 때도 스스로 지키지 않고 자유롭게 먹고 마실 때), 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 너희는 항상 마음대로 행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왜 너희는 이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파 하는 것으로 가장 하는가? 너희의 종교적 축제와 감사제에 있어서 너희는 너희의 금식 때처럼 역시 하나님께 눈을 돌리지 않아 왔다."

혹은, 오히려 이것은 그들의 일상 음식을 지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먹고 마심에 있어서처럼 그들의 금식과 기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영예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연적이든 일반적이든, 또 종교적이든 그들의 모든 행위의 중심은 여전히 저들 자신이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먹고 우리 자신을 위해 마시는 때는 먹고 마시는 목적을 잃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우리의 영혼을 받들기에 합당할 수 있도록 "먹든지 마시든지, 또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고전 10:31).

2. 그들이 행했어야 했을 주된 선행은 행해지지 않은 채 남았다(7절).

"여호와가 이전 선지자로 외친 말을 너희가 청종할 것이 아니냐? 그렇다, 너희는 금식일에 행했어야 했다. 금식일에 너희가 놓인 심판에 대한 너희의 슬픔의 증거로 울며 재계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았고, 오히려 너희는 예언자들의 성경을 찾아 하나님께서 너희의 선조들과 다투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보고, 그들의 불행에 의해 경계를 받아 그들의 허물의 발자취를 밟지 않도록 했어야 했다. 너희는 우리가 금식 중에 행했던 대로 행하리이까하고 묻는다. 아니다, 너희는 너희가 아직 행하지 않은 것을 행해야 한다. 너희는 너희의 죄들을 회개하고 너희의 생활을 개혁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이제 너를 불러서 하게 하는 것이요, 이전 예언자들이 너희의 선조들을 불러서 하게 했던 것과 동일한 것이다."

죄가 그들에게 부여했던 불행에 더욱 감화를 받게 하고, 그들이 죄를 회개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 나라의 이전 번성기의 상태를 기억하게 한다. 그때 예루살렘은 "백성이 거하여 형통하였으나," 지금은 황폐하여 애통에 잠겨있다. 지금 폐허가 된 "사면 성읍" 에 당시에는 거민이 있었고 "화평하였다." 그와 같이 나라에는 인구가 매우 많았다. "평원의 남방에 사람이 거하였으니," 전혀 방비되지 않았으나 그들이 안전하게 살았고, 곡식이 많이 산출되어 풍족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예언자를 통해 그들에게 외쳤으며," 진지하게, 그들이 성가실 정도로 외쳐 그들의 길과 행위를 고치려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의 번영이 곧 끝났을 것이다. 스가랴 예언자는 말한다. "이제, 너희는 알지니, 너희 조상들이 그들에게 내릴 심판을 막으려고 했어야 했던 일이 또다시 심판의 제거를 위해 너희에게 요청된다는 것을 주의하고, 깨닫으라. 그리고, 만일 너희가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너희 모든 금식과 애통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되리라." 후기 예언자들의 말은 이전 예언자들의 말과 일치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고, 백성이 번영에 처해 있든 역경에 처해 있든, 그들은 그들의 죄를 떠나 그들의 의무를 다하도록 부름받아야 한다. 이는 여전히 모든 노래의 후렴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