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3월 10일 묵상구절 민수기 14:1-10 원망한 이스라엘

하나지기 2022. 3. 10. 19:42

맥체인 성경읽기

출애굽기21, 누가복음24, 욥기39, 고린도후서9

 

묵상 구절

  • 백성들의 행동 — 밤새도록 곡함

14:1 온 회중이 소리 높여 부르짖었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울었다.

  • 백성들의 말 — 원망과 선동

14:2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죽었거나 혹 이 광야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14:3 어찌하여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시는가? 우리 아내와 아이들이 사로잡힐 것이니,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14:4 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가 우두머리를 세우고 이집트로 돌아가자." 하니,

  • 모세와 아론의 행동 — 엎드러짐

14:5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얼굴을 숙이고 엎드렸다.

  •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 — 격려

14:6 그 땅을 정탐한 자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으며,

14: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그 땅은 아주 좋은 땅입니다.

14:8 만일 여호와께서 우리를 좋게 여기신다면, 우리를 그 땅으로 데려가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14:9 여호와를 거역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을 떠났고, 여호와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백성들의 행동 — 돌로 치려함

14: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났다.

 

매튜 헨리/옥스퍼드

● 원망에 사로잡힌 이스라엘(민수기 14:1-4)

여기에서는 악한 정탐꾼들이 자기들의 부당한 보고 때문에 어떠한 불행을 당했는가를 보게 된다. 가나안 정탐꾼으로 뽑힌 그 열두 명의 사람들은 그들이 돌아와 회중에게 보고하기 전에 먼저 자기들끼리 거기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래서 갈렙과 여호수아는 최선을 다하여 다른 정탐꾼들의 마음을 돌이켜 자기들처럼 생각케하려 했을 것이다. 그들이 만일 의견의 일치만 보았더라면, 위치상 갈렙은 먼저 그들을 대신하여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그러면 만사는 잘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악한 정탐꾼들은 순전히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러한 폭동을 야기시켰음에 틀림없다. 아마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자기들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망설이고 있는 민중을 유혹하여 애굽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 대장들이 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인가? 본문 속에서 우리는 폭동을 조정한 자들을 보게 되는데, 이들은 본 장이 끝나기도 전에 멸망하고 만다. 다음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

 

Ⅰ. 백성들이 얼마나 안달을 부렸는가.

"그들이 소리높여 부르짖었다(1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그 정탐꾼들의 보고를 더 신인했고, 자기들의 처지가 절망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온갖 감정의 굴레가 벗겨졌으므로 아무도 그들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어리석고 심술궂은 어린애들처럼, 그들은 엉엉 울었다. 그러나 왜 우는지도 몰랐다. 적들이 자기들의 본부를 공격하고, 그들이 자기들의 진영 문에 들어온 아낙의 자손을 보고나서 울어도, 울 시간은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는 자들에게는 울지 않으면 안 될 고통거리가 생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만사가 이미 끝났다는 듯이, 그들은 주저 앉아서 "밤새도록 곡하였다." 불신앙이나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그 자체가 형벌이 되는 죄임을 기억하자.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들은 항상 자신들을 들볶게 된다. 세상 때문에 슬퍼하는 자들이 하나님 때문에 슬퍼하는 자들보다 더 많으며, "세상의 슬픔은 죽음을 낳는다."

 

👀 1절, 온 회중이 : 회중에 속한 개인의 개별성, 전체와 더불어 개별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 정탐자들의 보고를 들은 회중의 부르짖음은 곧 백성들의 원망의 통곡으로 이어졌다.

사실 백성들은 정탐자들의 보고를 직접 듣지는 못했다. 따라서 이러한 백성들의 반응은 정탐자들의 보고에 대한 백성의 대표자들, 즉 회중의 반응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다.

점층법을 통한 이스라엘 내의 불신앙의 확산

  1. 처음엔 전체 회중이 소리를 높였고,
  2. 다음엔 회중 개개인이 부르짖었고,
  3. 본문에서는 백성들까지 통곡하게 된 것이다.

성경의 역사가 증거하는 바와 같이 지도자의 신앙 상태는 그 지도자가 대표하는 무리의 신앙 상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영적 건강함은 그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들이 영적으로 건강한지 여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자들은 자신의 영적, 도덕적 상태가 전체 교회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명심하여 언제나 스스로 삼가고 경성하여야 할 것이다.

 

Ⅱ. 그들은 자기들을 다스리는 치리자들에게 어떻게 대들었는가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여호와를 비난했다(2,3절).

장로들의 회중이 불만을 토하기 시작했다(1절). 그러나 그 병은 순식간에 온 진영에 전염되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원망했다" 고 했기 때문이다. 질투와 불만은 요원의 불길처럼 삽시간에 그 무사려한 무리들에게 번졌다. 그 무리들은 쉽사리 "권세 잡은 자들을 멸시하고 위에 있는 자들을 악평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 2절을 보면 통곡 후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주어는 온 이스라엘 자손이다. 회장+백성=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어로 등장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강하게 반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지도자나 일반 백성 할 것 없이 모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 일에 한마음이 되었다. 이처럼 악은 쉽게 전염되며, 또한 악한 생각은 선한 생각보다 사람들을 더욱 쉽게 하나로 만든다.

  1. 그들은 이유없는 불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그들이 처음 났던 그곳 애굽에서 죽었었더라면, 또는 근래에 욕정으로 인하여 재앙을 받아 광야에서 죽은 자들과 함께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굴레 벗은 감정의 방탕한 광란을 보라. 이러한 감정은 저들의 본능 자체가 지극히 아끼는 그 생명 자체까지도 탕진하게 만든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온 이래로 그 당시처럼 그렇게 여러달을 즐겁게 보낸 시절은 없었다. 지금 그들은 영예로 옷입었고, 호의로 동정받고, 계속 놀라운 여러가지로 대접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이 살아가는 동안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듯이, 그들은 자기들이 애굽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으리라고 한다. 이들은 이렇게 경솔한 생각을 가졌다. 즉 그들의 죄로 인하여 그들의 이웃 형제들에게 내렸던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심판을 업신여겨, 그들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들과 같이 재앙을 받았더라면 하고 말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정복자로서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정의의 희생물이 되어 범죄자로 죽기를 원했다.

어떤 자들은 본문을 이렇게도 해석한다. "오, 우리가 애굽에서 또는 광야에서 이미 죽었더라면!" 그들은 죽는 것이 무서워서 죽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가없은 문둥병자들은 죽기보다는 차라리 적진으로 뛰어 드는 모험을 감행하여 "그들이 우리를 죽이면 죽으리라" (왕하 7:4)고 했었는데, 이들은 그런 생가도 없었다. 타락한 이스라엘의 영들은 얼마나 천박해지는가. (최악의 사태가 오면) 명예로운 침상에 서자기의 칼로 자살하려는 군인이라기 보다는 못된 양들처럼 광야에서 죽기를 바라는 것이다.

 

👀 불신앙 속에서 원망과 소원을 하는 이스라엘

  1. 그들은 자기들의 소행을 당연지사로 여기고(3절) 끝없는 절망 속에서, 저들이 진군한다면 칼에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공포에 구실을 잡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처자식들도 가나안인들의 희생물이 되고 말 것이 뻔하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해서도 가장 사악한 모독이 던져졌다. 마치 하나님은 그들을 이렇게 칼에 쓰러지게 하려고 그곳까지 끌고 왔으며, 마침내는 저들의 처자식들, 불쌍한 것들까지도 필경 희생물이 될 운명에 놓여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므로 사실상 그들은 사랑이신 하나님을 가장 악한 악이라고 비난했고 그가 그들에게 말한 모든 것, 그를 위해 베푼 지금까지의 모든 일은 실로 그들에게 유혹의 함정이 되었고 그들을 몽땅 파멸시키려는 은밀한 계획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한 셈이다.

이 얼마나 뻔뻔한 짓인가! 그러나 하늘을 향하여 욕설을 퍼붓는 이 혀들은 지옥불에 떨어지지 않을 것인가? 마귀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악한 생각을 갖도록 온갖 수단을 다 쓴다. 즉 하나님은 죄인들의 죽음을 바라며, 당신의 종들의 고생과 고난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뜻을 아시나니(우리는 어떻게 알든 간에), 그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을 주려는 생각" 이다(렘 29:11).

 

👀 “어찌하여”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시는가? 우리 아내와 아이들이 사로잡힐 것이니,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 어찌하여
  • :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이런 상황으로 이끌고 온 모세나 아론에게,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그들을 사용하신 하나님께 대해 극심한 반감과 분노의 감정을 담고 있는 감탄사로서 전혀 탄식이라고 할 수 없는 따져 묻고 있는 어감이 강한 말.
  • 여호와께서는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당장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그것이 자신들의 불신앙 때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출20:7)까지 범하였던 것이다. → 따라서 그들은 이 계명을 어긴 자들을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엄청난 징계를 당하게 된다.
  • 그 징계로 인해 그 땅을 악평한 10명의 정탐꿈들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으로 즉시 죽임을 당한 것은 물론이고 여호와께 대항한 모든 출애굽 1세대 이스라엘 자손들까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간의 광야 생활로 그들의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33.37절).
  • :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 데서(2절) 한 걸움 더 나아가 직접 ‘여호와'란 하나님의 이름을 분명하게 지적하여 말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원망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 ‘우리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는가?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단순히 지금 그들에게 닥친 상황이 비관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두려움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오랫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도 애굽의 거짓된 이방신들을 이해하듯이 이해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올바른 신앙일 수가 없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참되고 확실한 지식을 근거로 해서만 획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보다 근본적으로 그들의 불평은 자신들을 인도해 내신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악평하고 불평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자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까지도 모득했으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듈을 이끌어 내어 파멸시키려 하고 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들의 불평은 하나님의 언약과 인도하심에 대한 근거없는 비난으로 이어졌다.

Ⅲ. 그들은 가나안을 향해 진군하는 대신 이 절망적인 결단을 내리고 만다.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이러한 의안은 처음에는 그저 질문 형식으로 주어졌다.

"우리가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3절)

그러나 그러한 동요는 커지고, 백성들의 영은 이미 비뚤어진 것은 뭐든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던 고로, 아무런 토의도 거치지 않고, 그러한 제안이 그냥 결단이 되었던 것이다.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4절).

이 일은 오랜 후에 "그들은 반역하여 저들의 종살이로 되돌아가려고 한 장관을 세웠도다" 라고 슬퍼했다(느 9:17).

 

1. 그들이 애굽에 있었던 시절을 사모하며, 그곳에 있었으면 지금보다 더 좋았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그들이 감히 가나안으로 진군하기를 싫어한다면, 애굽으로 돌아가느니 그냥 가만있는 것이 더 좋았으리라.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뭘 불평하는 것인가? 식량이 풍부하고, 평화와 휴식이 있고, 좋은 통치자들이 있고, 훌륭한 벗들이 있고.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가 있고, 광야에서도 불편한 것이 없었는데, 어떤 만족을 원한단 말인가? 어디 가야 이보다 더 편한 곳이 있을까? 애굽으로! 그곳에서의 그 괴로운 속박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그들은 중노동을 시키던 공사 감독과 벽돌을 굽던 고된 일을 다시 원하는 것인가? 그리하여 그들 때문에 애굽이 당했던 그 모든 재앙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제 다시 돌아가면 전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인가? (일년 반도 안 되는) 이 짧은 세월 동안에 그들 밑에서 내쉬던 한숨과 해방의 노래 소리를 몽땅 잊었단 말인가! 야수처럼 그들은 눈앞의 현실에만 집착하여, 이성의 모든 힘과 더불어 모두 기억을 감정에게 송두리째 희생하고 만 것이다(시 106:7  참조), 이것이 저들의 비극을 재촉한 것이라는 경고를 볼 수 있다(신 28:68). 즉 그들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하는 그것 말이다. 죄인들은 스스로 자기들에게 원수 노릇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행치 않는 자들은 자기 자신의 불행과 파멸을 스스로 추구하게 된다.

 

👀 3절의 뉘앙스 :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좋다' 또는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선하다'***로 해석하는 것이 히브리어적인 뉘앙스를 더 많이이 살리는 번역이다.

가나안 땅에 대한 10명의 정탐꾼둘의 비관적 보고를 들은(13:32,33)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나안 입성과 애굽으로의 회귀는 차선과 최선의 일이 아니었다.

본문의 표현에 의해 판단해 볼 때 그들에게 가나안 입성은 악하고 좋지 않은 일이었고, 애굽으로의 희귀는 선하고 좋은 일로 여겨졌던 것이다.

즉 자신들의 판단대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가 되는 ‘악한 일'을 버리고 애굽으로 돌아가 애굽인의 노예로서의 삶을 사는 ‘선한 일'을 택하자는 것이 원어 성경에서 느낄 수 있는 본문에 대한 정확한 의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누리던 비굴한 풍요로움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굽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은 불신앙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이 위험이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반복하여 외쳤던 그들의 구호였다(11:4-6; 20:2-5; 21:5; 출14:11,12; 16:13).

  1. 광야를 지나서 이제까지 온 길을 되돌아 가겠다는 것은 정말로 지각없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구름이 그들을 다시 인도해줄 것인가, 아니면 만나가 계속 내려 줄 것인가? 그리나 그렇지 않다면, 수천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필경 광야에서 길을 잃고 죽게 되고 말 것이다. 가나안의 정복에서 오는 고난이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어려운 것이라 하더라도,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에는 더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듣도록 하자.

(1) 외적 조건이 가져다 준 십자가 밑에서 불만하거나 안달을 부리는 어리석음.

우리는 현재의 위치와 운명에 대해서 불평을 하면서, 그것을 바꿔 보려고 불안해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그렇게 불평하고 있는 한, 이 세상 어디에도 우리에게 조금도 불편을 끼치지 않을 곳이 있겠는가? 우리의 형편을 더 좋게 하는 길은 우리의 정신 자세를 더 훌륭하게 만드는 일이다. "애굽으로 가는 게 낫지 않겠는가?" 라고 묻는 대신에, "현실 속에서 만족을 찾으며.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고 물어야 한다.

(2) 하나님의 길을 떠난 자의 어리석음.

하늘 나라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가나안,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하늘 나라에 대한 악한 소식을 들어온 자들은 그 땅은 실로 복된 땅이니 도달하기 어려운 곳일 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엄격하고 진지한 경건을 갖는다는 것은 실천 가능성이 없는 일로 여겨지며, 이 때문에 출발을 잘한 자도 계속 행진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자가 많아진다. 신앙 생활에 대한 상상적인 고생을 감수하기보다는, 그들은 죄악된 생활이 주는 확실한 치명적 결과에 스스로를 던져 버린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인들의 우행을 본 받아서 가나안의 문턱에 들어서서도 한 대장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 진정되지 않는 폭동(민수기 14:5-10)

 

👀 옥스퍼드영적교훈 서론부

13:25-33에서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열 명의 가나안 정탐꾼들로부터 가나안 땅은 그 땅 거민들의 강성함과 견고한 성읍들 때문에 도저히 정복될 수 없다는 부정적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극도의 절망에 빠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난동을 자행하는 장면.

이러한 본문을 보면 10명의 정탐꾼들로부터 가나안 정복의 불가능성을 보고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국심한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절망감은 모세가 아닌 다른 한 장관을 세워 그토록 위대한 이적으로 구출된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 신분으로나마 안전을 되찾으려고 하는 비굴한 노예근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그들의 반역 행위를 만류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쳐죽이려고 하는 극악함마저 보였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적 태도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에 대한 반역이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반역으로 종래는 하나님을 버리겠다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서 결국 하나님의 저주를 야기시켜 마침내 38년 간의 광야 방랑 생활의 발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친구들은 여기서 가능한 한 그들을 멸망의 길에서 구해 보려고 폭등에 개입했지만, 헛수고였다. 의사가 그들을 치료하려고 했으나, 그들은 고쳐지기를 원치 않았다. 파수꾼이 그들에게 경보를 울렸지만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고, 마침내 그들의 피가 그들의 머리에 쏟아졌다.

 

Ⅰ. 소동을 진압시키려고 최선의 노력이 경주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적어도 자기들에게 평화를 줄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 했다면, 모든 불평은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

 

1. 모세와 아론이 참여했다(5절).

민중들이 원망하는 대상이 바로 이들이었지만(2절). 그들은 그 모욕과 수치를 용감히 묵살해 버리고, 자기들에게 무례히 구는 그들에게 신실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백성들의 아우성이 너무 컷으므로, 모세와 아론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밑에 있는 사람들을 시켜 조용히 하라고 명령했지만, 군중들의 분노는 더욱 소란해졌던 것 같다. 그러므로 온 회중이 보는 앞에서 청중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었다.

 

👀 모세와 아론 ↔  이스라엘 백성들

  •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차이로 만들어진, 대조적이고도 대치되는 상황.

모세와 아론이 ... 엎드렸다.

  • 완강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강한 태도에 겁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처럼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내려질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고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임하지 않도록 기도하기 위하여 엎드렸을 것이다.
  • 즉 하나님 앞에 엎드린 모세와 아론의 태도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리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며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지극히 신앙적인 행동이었다. 

이것을 다음과 같을 뜻이다.

(1) 그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이 바다의 소동, 그 파도의 요란함, 그리고 그 백성의 요동을 진정시키려 한 것이다.

(2) 그것은 저들의 영이 가장 큰 고민과 관심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그들은 놀란 사람들처럼 땅에 엎드려졌다. 백성들은 저들의 자비를 묵살해 버리는 것을 보고 놀라서,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 같았다. 그렇게 훌륭한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이렇게 못된 성질을 가졌다는 것을 보라.

(3) 그리고, 그들의 원망을 중지시키는 것은 모세와 아론이 그 백성들에 대한 커다란 열의를 보인 것이다. 그들을 자기들의 겸손한 자세가 그들에게 영향을 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더 이상 배반을 고집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모세와 아론은, 마치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통하여 그 백성들에게 간청이나 하는 듯이,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간청했다. 모세는 그들이 백성들에게 이야기했던 내용을 반복해서 기록했다. "두려워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위해 싸우시리라" (신 1:29, 30). 아끼는 사람들에 대한 열심 있는 친구 노릇을 하는 자들은,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는 무엇이나 하려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모세와 아론은 자기들이 명예로운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들의 파멸을 막기 위해서 간절히 머리를 숙였다.

 

2. 갈렙과 여호수아도 참여했다.

그들은 백성들의 죄를 보고 거룩한 분개로 자기들의 옷을 찢었다. 그들은 이미 그들에게 하나님의 분노가 임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 구약에서 옷을 찢는 행위

  • 마음에 느끼는 격렬한 슬픔이나 엄청난 고통을 표현하는 상징적 행위
  • 본문은 완료형으로 사용되어, 이 행동이 격렬하였으며 이미 완료되었음을 보여 준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왜 옷을 찢었는가?

  •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가나안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패역한 말들로 인해 그들의 마음이 찢은 듯이 아팠기 때문.
  •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라면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질 때, 여호수아와 같렘같이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 앞에 더없이 패역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가슴을 찢으며 고통하는 사람이 아닐까? 

이 두 선량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사건이 더 큰 괴로움을 주었다. 그 소동은 저들이 같이 갔었던 그 정탐꾼들에 의해서 야기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자기들의 동료들이 일으킨 그 폭동을 진정시키기 위한 일이면 뭐든지 하려 했다. 저들의 말은 매우 논리정연하여, 그것보다 더 사리에 밟고 감격적인 말은 없었다. 그들은 권위 있게 말했다.

(1) 그들은 자기들이 탐색한 그 땅은 분명히 복된 땅이라고 확언했다. 그리고 그 땅은 정말로 모험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나쁜 정탐꾼들이 말하듯이 그렇게 "주민들을 삼키는" 땅이 아니라고 했다. 그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 이라고 했다(7절).

문자적으로는 매우 매우 좋은 땅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복된 땅을 멸시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사람들이 신앙의 유익함을 바람직하다는 것을 철저히 확신하기만 하면, 신앙의 봉사에 결코 망설이지 않을 것임을 명심하자.

 

👀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은 가나안 땅의 자연 경치가 아름답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제 8절에서도 언급되는 것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즉 비옥하고 좋은 열매를 맺는 땅이라는 의미이다.

→ 직역하면 ***‘그것(그 땅)은 매우 매우 좋은 땅이다'***가 된다.

  • 여호수아와 갈렙은 ‘매우'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함으로써 가나안 땅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그릇된 시각을 교정하려 하였다.
  • 즉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믿음의 눈으로 하나 님이 허락하신 좋은 땅을 보고 정복하여 취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2) 그들은 자기들이 그 땅을 소유하기 위해 나아가는 길에 놓여 있는 듯이 보이는 그 곤란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 땅의 사람을 두려워 말라(9절).

너희들이 아무리 그들을 무섭게 생각하더라도, 그림 속의 사자 같아서 사납지 않다. 그들은 우리 밥이니라." 즉 "그들은 우리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먹이가 되기 위해 우리보다 먼저 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편안히, 아주 즐겁게, 그리고 매우 많은 유익을 얻으면서 그들을 지배하게 되리라" 는 것이다. 바로를 그들에게 고기로 주었다는 말씀이 있다(시 74:14). 또한 가나안 인들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불리하게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이 저들편의 유익이 될 것임을 분명히 보았다. 그것은

[1] 가나안 인들이 성벽이 있는 도성에서 살고 있지만, 그들은 무방비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보호자가 그들에게서 떠났느니라" . 제 국가의 권한을 보유해 주고 있던 일반 섭리가 그들을 버렸다. 그러므로 저들에게는 아무런 은신처나 보호책이 없게 되리라. 다른 정탐꾼들은 그들의 강대함을 주목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저들의 사악함과, 그 결과로 하나님이 저들을 버렸고, 따라서 "그들의 보호자가 떠났다" 는 것을 주목했다. 하나님을 분노케 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는 그 누구든 안전을 기대할 수 없다.

[2] 이스라엘은 천막 속에 거주하지만, 강성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우리 편이시다." 그의 이름은 강한 망대로다.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와 할께 해 주는 한은, 아무리 강한 대적이라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그들은 저들이 지금 처한 모든 위험은 저들의 불만에서 왔으며,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대적이 되지 않은 한 가나안 인들을 쳐 이기리라는 것을 명백히 보았다. 바로 이 때에만 저들의 사정은 바꾸어질 것이다(8절). 즉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분명히 그는 그럴 것이다-우리가 그를 노엽게 하지 않는 한, 그는 우리를 이 아름다운 땅으로 인도하시리라.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얼굴의 빛(시 44:3)으로 인하여 필경 그 땅을 차지하리라. 우리가 그의 은혜를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우리의 은혜를 저버리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가능하다."

 

👀 8절, 만일 여호와께서 우리를 좋게 여기신다면, 우리를 그 땅으로 데려가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 좋게 여기신다면
  • : 보통 호의는 어떠한 대상의 존재 자체나 행위가 자신의 마옴에 합하고 또 그로 인해 자신이 만족감이나 흡족함을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떤 사실을 알고 믿었기에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었는가?

  •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의 정복이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인간의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 그러고 그분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스라엘에게 요구된 믿음은 무엇인가?

  •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인간적 판단 기준을 가지고 가나안 정복 전쟁이 가능한 일이냐 아니냐를 저울질할 것이 아니었다.
  • 오직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상태에 있기만 하면(신 10:15) 가나안 정복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러므로 단지 그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성실히 그러고 굳건히 믿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 그러나 자신의 사랑하는 동족들이 자신과 함께 정탐했던 10명의 어러석은 정탐꾼들의 불신앙적 정탐 보고에 의해(13:25-33)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잊어버린 채 울부짖으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모습을 볼 때(1-3절),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치 못하는 백성들에 대해 가슴 아픈 심정으로 자신들의 옷을 짖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6절).

2. 결론은 이렇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9절).

죄인들을 파멸시키는 것은 그들 자신의 배반밖에 없음을 기억하자. 하나님이 그들을 버려두시며.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에게서 밀어낸다. 그래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들 스스로가 축출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늘의 가나안에서 축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의 진상이 이보다 더 밝히 드러날 수 있겠는가? 이보다 더 그들에게 강한 요청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이 있었던고!

 

👀 9절, 여호와를 거역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을 떠났고, 여호와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본문 원어에서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서두에 ‘정녕, 참으로' 라는 단어가 있음.
  • 거역하다 (마라드)‘마라드' 사회계약적 의미
    • ‘마라드'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국제 정처의 맥락에서 계약을 맺고 있는 국가들 사이에서 종주국에 대한 예속국의 의무 이행을 거부하거나 그들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려는 행위를 의미한다(창 4:4; 느2:19). 그러나 예속국의 종주국에 대한 언약 의무 불이행은 곧 전쟁과 그로 인한 파멸을 의미했다.
    ‘마라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적 의미
    •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역시 고대 근동의 국가 사이에 맺어지던 종주권 계약의 맥락에서 이헤될 수 있다. 즉 양자의 관계는 언약(계약)으로 맺어진 것으로서 이스라엘이 예속국이 되어 종주국이신 하나님께 예속되는 형태이다.
    •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그들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신 이스라엘의 주인이셨다. 따라서 예속국으로서 이스라엘의 의무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거부하는 언약 파기자가 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도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맺어진(출19:5-8) 언약 파기의 행위였던 것이다.
    • 따라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정녕’이라는 강조 어구를 사용하면서 죽옴을 의미하는 여호와를 반역하는 일만은 절대 하지 말라는 절규에 가까운 촉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은 가나안 백성이 아닌 하나님께서 갖고 계셨기 때문이다.
  • : 원어 ‘마라드'는 개인적 관계에서 쓰이는 ‘거역하다'라는 단어보다는, 국가간의 관계에서 사용되는 ‘반역하다'라는 번역이 더 적합하다.
  • ‘마십시오' 라고 3번 반복되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촉구
  •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가나안으로 쳐들어 갈 것이냐, 10명의 정탐꾼의 말을 신뢰하여 애굽으로 돌아갈 것이냐라는 문제에 대한 이스라엘의 선택은 매우 긴박성을 띠는 문제임을 보여 준다. 이러한 **순간적 선택에 따라 이스라엘의 영원한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게 된다**. 따라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스라엘어 **언약 파기의 죄악이 되는, 따라서 죽음을 가져오는 볼순종의 길에서 지금 즉시 돌이킬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 ‘정녕’ , ‘마십시오’ → 이 두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권고하고 있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간절하고도 안타까운 마음을 잘 드러내 줌당시 여호수아와 갈렙의 의견은 소수 의견에 불과했다. 게다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10명의 불신앙적인 정탐꾼들의 의견에 동조하여 불평과 원망에 휩싸여 있었다(1-3절). 따라서 자신들의 의견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거칠고 위험할 것임에 틀림없었다(10절).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담대하고 단호하게 3번이나 “~말라” 라고 명령했다.
    • 이것은 그들에게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는 종의 충성됨
    • 동족을 자신보다 아끼는 사랑
    • 옳은 일에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본절에서 볼 수 있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마음
  • 지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은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절대 절명의 문제였다. 따라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로 이끌기 위해서 단어 하나의 선택에 있어서도 신중을 기해 말하였던 것.
  • 이 말씀을 들어야 하는 대상은 누구인가?지도자의 권위와 신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어떤 문제에 대한 결정과 태도도 인간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져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안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따라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회중' 을 ‘너희'로 지적함으로서 그들이 지도자로서의 자신들의 위치를 바로 깨닫고 지금이라도 신앙적인 결단을 하도록 촉구했던 것이다.
  • **당시 이스라엘 전체 백성의 대표였던 회중은 자신들의 위치와 그 위치에 따른 책임과 의무틀 망각하고 있었다**.
  • 두려움이라는 감정 - 긍정과 부정
    • 가변적인 상황이나 상대적인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를 부정적 영향, 즉 불신과 회의로 이끈다.
    • 하지만 절대자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즉 하나님을 향한 경외는 우리를 긍정적 영향, 즉 올바른 생활로 이끈다.
    • 실제로 성경의 여러 구절들에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올바른 생활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었다(레 19:14; 25:17; 신17:19; 왕하17:34). 즉 하나님께 대한 경외가 의로운 삶의 동기가 되는 것이다.
    • 그러나 불행하게도 본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의 올바른 대상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실패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대상인 이방 민족인 가나안 족속둘을 두려워하는 어리석음에 빠졌다.
  • 보통 두려움의 감정은 그 두려움의 대상에 따라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다르다.
  • 이스라엘이 진정 경외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 진정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이는 바로 여호와 한 분이시다.
    •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 ‘밥' : 히브리어에서 상대를 ‘밥(히브리어로는 떡)’으로 묘사하는 것은 적대적 관계에 있는 대상에 대한 탁월한 우월성을 보여 주는 비유.
    • (문맥적 역설) 불신의 눈으로 볼 때 가나안 땅의 거민들은 신장이 장대한 거민이었고 자신들의 모습은 ‘메뚜기'와 같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 그 거민들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밥상에 놓인 밥에 불과했던 것이다.
    • 그러므로 그 땅이 크고 아름다울수록, 그 땅 거민이 크고 장대할수록 오히려 자기의 밤상이 커지므로 이스라엘에게는 좋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땅과 거민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얻을 수 있는 만족함이 더 클 것이기 때문이다(24:8). 이처럼 본문은 ‘은유'와 ‘역설’ 이라는 뛰어난 문학적 기교를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삶이 얼마나 멋있는 것인가를 극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 믿음의 눈은 눈에 보이는 사실 너머의 참된 실재를 보게 한다.
      • 자신의 마음을 물리적 현상에 고정시키지 않고 “이미 이루어진 것과 같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에 둔다”.
      • 이러한 자는 현상적 어려움을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복된 기회 즉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차려주신 밥상으로 보는 것이다.
      “믿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 2).
    • **즉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은
  •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하신다그러나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분이시고 영원히 계신 분이다. 그리고 영원히 자신의 백성과 함께하시는 분이시다.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에겐 마땅히 영원히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안전을 맡기는 참된 믿음과 지혜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확신 가운데 사는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시59:9).
  • 더욱이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하시느니라’ 라는 문장에는 원어 성경상으로 동사가 없다. 곧 문장의 시제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 역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과 함께하시는 것은 영원불변의 사실이라는 진리를 보여 주고 있다.
  • 가나안 거민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보호자는 우상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보호자는 이내 사라질 그림자에 불과했다. 빛이신 여호와 앞에서 모든 우상은 그 거짓된 실체를 드러내고 곧 사라지고 만다.

Ⅱ.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들은 정정당당한 추론에도 귀를 닫았다. 그보다는 이것 때문에 화가 났다. 더 무례해졌다.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했다" (10절).

 

👀 10절,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났다.

  • 돌로 쳐 죽이는 사형 방법 : 우상 숭배자들(레20:2), 술사들(레20:27),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레24:11)에게 적용됨.위에서 언급한 대로 돌로 쳐죽이는 처형법은 하나님께 대한 심각한 반역 죄인을 처형하는 처형법이므로 정작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사람들온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희중들이었다(1-4절).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회중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가장 신실한 발언을 한(7-9절) 두 사람을 돌로 쳐죽이려 하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그들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불평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려는 행동까지 취하려 한 것이다(행 7:57,58).
  •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대표들인 회중들은 자신들에게 신앙적 결단을 요구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오히려 돌로 쳐죽이자고 백성들에게 제안하고 있다.
  • 그러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모든 자손에게 나타났다
    • 하나님의 현현의 용례는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을 심판하기 위한 현현도 있었다.
    • 회막: 회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대표인 모세에게 스스로를 나타내시는 은혜의 장소였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진노를 보이시기 위하여 나타나셨다.
    • 이처럼 회막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현현은 복을 주기 위한 것이 될 수도 있으나 진노를 위한 나타나심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었다.
    • 갈렙과 여호수아를 돌로 치려던 회중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의해 심한 두려움을 느꼈으며 그들의 그릇된 시도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회중의 지도자와 요인들(패트릭 주교의 말대로)이 시민들에게 그들을 죽이라고 시켰다. 그들은 머리가 돈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의 지도자들이 "그들에게 잘못을 범하게 했다" 는 것은 슬픈 일이다. "악행에 깊이 빠진" 심령을 가진 자들이 자기들에게 좋은 충언을 해 주는 자들에게 분노를 내는 것 흔히 있는 일임을 기억하자. 개회하기를 싫어하는 자들은 자기들을 바로잡으려는 자들을 미인하며, 진리를 말해 주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을 원수시한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일찍부터 예언자들을 핍박하기 시작했고, "그들에게 보내어진 주들을 돌로" 치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그들의 죄악의 그릇은 다 차고 말았다(마 23:37). "그들을 돌로치라!" 왜? 그들이 무슨 악을 행했다는 것인가! 그들이 책망 받을 범죄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 두 증인들이" 계속 불충성을 자행하는 "그들을 괴롭힌" (계 11:10) 것은 사실이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의로운 말밖에 안 했다.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들을 두려워 말라" (9절). 그리고 이스라엘은 저들의 격려의 말로 자기들의 두려움을 물리치려 하지 않았지만, 그 말을 한 사람들은 자기들을 돌로 치라고 말하는 그 성난 군중들에 대처할 용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와 비슷한 경우를 당한 다윗의 처신도 그러했었다(삼상 30:6).

자기들의 조언과 위로로 남을 교화시킬 수 없는 사람들이라도 최소한 자기 자신들은 고상한 인품을 지니려고 노력해야 한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자기들이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위해 나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 나서시리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실망하지 않았다.

즉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사" 하나님의 종들을 돌로 치려는 자들을 공포와 당혹에 사로잡히게 했던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비난을 가했을 때도(3절) 하나님의 영광은 그들의 신성 도독을 침묵시키려고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갈렙과 여호수아를 위협하고, 하나님의 눈동자에 손을 대려 하자, 하나님의 영광은 즉시 나타났다. 하나님께 신실히 봉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음을 확신하며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인간의 분노에서 보호해 주실 것임을 명심하자.

 

- 하나님의 일하심과 수고해주는 찬미자매에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