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4월 2일 토요일 묵상구절 민22:1-20 발락을 부른 모압 왕 발락

하나지기 2022. 4. 4. 07:39

맥체인성경읽기

레위기 5, 시편 3, 4, 잠언 20, 골로새서 3

 

묵상구절

22:1 이스라엘 자손이 출발하여 여리고 맞은편, 요단강 건너 모압 평지에 진을 쳤다.

22:2 십볼의 아들 발락은 이스라엘이 아모리 사람들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고,

22:3 그 백성이 매우 많으므로 모압이 두려워하며,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혔다.

22:4 모압이 미디안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이제 저 무리가 마치 소가 들의 풀을 뜯어먹는 것처럼 우리 사방의 모든 땅을 먹어 치울 것입니다." 하니, 그 때에 십볼의 아들 발락이 모압의 왕이었다.

22:5 그가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부르기 위해 발람의 고향, 곧 강가의 브돌로 사신들을 보내어 말하였다. "보시오, 한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와 온 땅을 뒤덮었고, 이제 나의 맞은편에 머물러 있습니다.

22:6 그들이 나보다 강하니, 이제 와서 나를 위해 이 백성을 저주해 주시오. 그러면 내가 혹시 그들을 쳐서 이 땅에서 그들을 쫓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당신이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22:7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그들의 손에 점치는 값을 가지고 떠나 발람에게 가서 발락의 말을 전하니,

22:8 발람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밤은 여기서 머무십시오.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그대로 내가 당신들에게 주겠습니다." 하니, 모압의 고관들이 발람과 함께 머물렀다.

22:9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너와 함께 있는 이 사람들이 누구냐?" 하시니,

22:10 발람이 하나님께 대답하였다.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제게 보낸 사람들입니다.

22:11 그들이 전하기를 '이집트에서 나온 한 백성이 온 땅을 덮었으니, 지금 이리로 와서 나를 위해 그들을 저주해 주시오. 그러면 혹시 내가 그들과 싸워서 그들을 쫓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22:12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마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다." 라고 하셨다.

22:13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발락의 고관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은 당신들의 땅으로 돌아가시오. 내가 당신들과 함께 가는 것을 여호와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니,

22:14 모압의 고관들이 일어나 발락에게 가서 말하였다. "발람이 우리와 함께 오기를 거절했습니다."

22:15 발락이 다시 그들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냈다.

22:16 그들이 발람에게 가서 말하기를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에게 오는 것을 주저하지 마시오.

22:17 내가 진실로 당신을 존귀하게 하고, 당신이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겠으니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해 주시오." 하니,

22:18 발람이 발락의 종들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만일 발락이 자기 집에 은과 금을 가득 채워서 나에게 준다 해도, 나는 작은 일이거나 큰 일이거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는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22:19 이제 당신들도 오늘 밤 여기서 머무르시오. 여호와께서 나에게 무엇을 더 말씀하실지 알아보겠습니다."

22:20 하나님께서 밤에 발람에게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라. 그러나 너는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만 행하여라." 고 하셨다.

 

매튜 헨리/옥스퍼드

  • 스페셜포인트발락의 발람 초청 사건은 다음 두 가지 면에서 출애굽 시대의 여타 모든 사건과 구분되는 특징적 사건이다.
    1. 첫째 여타 모든 사건은 이스라엘이 주체가 되었던 반면에 이는 일단 이스라엘 민족은 그 저주의 시도의 대상으로서 간접적 지위만 차지할 뿐 전체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진행된 사건이었다.
    2. 둘째 이 사건은 주로 영적 측면에서만 진행된 사건이었다.
    3. 이 세상의 모든 사건에는 영적 측면과 육적 측면이 동시에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스라엘 또는 주번 국가간의 군사적, 정치적 사건의 요소는 거의 전무한 반면 영매, 하나님의 사 자의 출현, 나귀가 말을 함, 거듭된 제사와 신탁 등 직접적으로는 거의 종교적, 영적 요소로만 진행되고 있다.
    이같은 발락의 발람 초청 사건은 분량상으로는 도합 세 개의 장, 일곱 문단에 걸쳐 진행되는 비교적 긴 일련 기사이지만 그 내용은 이방인들의 이스라엘 저주 시도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이의 무산으로 일관되어 비교적 명료하며 그 구성과 전개 또한 단순한 편이다.발람은 어떤 인물인가?이것은 영매로서의 그의 영적 무지틀 드러내는 것인 동시에 그야말로 명약관화한 진리조차도 순간적 탐욕에 눈이 멀어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자기 판단과 자기 이익에 맞는 일만을 계속 고수하고자 하는 인간의 보편적 형태의 한 전형이기도 하다.지금 이 순간 바로 나에게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 진리를 알면서도 당장의 안일과 순간적 유익을 위하여 내 생각만을 계속 고집하고 있는 발람의 모습이 없는 것인가?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만의 민족 신이거나 아니면 한 지역에 국한된 지방 신이신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다스리시는 절대 주권자이심을 보여 준 것.
    • 또한 하나님께서 이방인 영매인 발람의 욕구나 의지와는 달리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신탁의 말씀만을 강권적으로 전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소위 영계에서도 이방인들이 섬기는 그 어떤 존재보다 강하신 유일한 초월적 절대자이심을 입증한 것이기도 하였다.
    사실 지방 할거적 다신교 사상에 젖어 있던 발락과 발람 모두는 이같은 전우주적 절대 주권자, 근본적으로는 유일하게 신성을 가지신 영계의 절대 초월자로서의 여호와(Jehovah)에 대한 인식을 처음부터 결여하고 있는 자둘이었다. 따라서 온 세상의 역사를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신탁과 이의 분명한 실현은 이 당시의 발락과 발람이 이를 진정으로 깨달았는지의 여부는 둘째 치고라도, 하나님의 전우주적 통치권과 절대 초월적 신성을 가진 유일한 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의 독보적 지위에 대한 분명한 선언이요 증거였다.그렇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을 중심으로 전역사를 움직여 가시는 것이다. 이것은 태초부터 세상 끝날까지의 영원한 진리이다. 따라서 신약 시대의 택한 백성인 우리들도 바로 우리들이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며 또한 나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역사적 소명의 완수에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 끝으로 우리는 각각 일국의 왕이요 당대의 국제적 명성을 가졌던 술사였었던 발락과 발람의 마지막 모습이 모두 실망에 가득차 냉담하게 헤어져야 했던 사실에도 주목하여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는 인간의 모든 시도는 끝내 좌절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한 악인들의 걸합은 마침내는 파괴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하는 산 실례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 또한 하나님은 발람이 전한 신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전역사를, 그리고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전역사를 경륜하실 것을 거듭하여 직, 간접으로 표현하셨다.
  • 한편 하나님께서 모압 왕 발락과 메소포타미아 술사 발람의 이스라엘을 향한 영적 저주의 시도를 꺾으신 사실은
  • 바로 이같은 점에서 발람은 역사와 인생을 향한 하나님외 영적 통치 원리와 선악간의 근본 진리들을 모른다기보다는 순간적 편의와 욕심 때문에 매순간 자기도 모르게 도외시하는 인간들 모두의 실상에 대한 적나라한 상징일 수 있다.
  • 발람은 매우 이채롭고도 복합적 성격의 특이한 인물(the Character)이다. 그는 일면으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신탁만을 정직하게 전하는 자로서의 원칙을 고수하는 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진정한 영ao였다면 근 40여 년 동안 당시 근동 전역을 긴장시켰던 이스라엘을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출애굽 구원 사건의 실체를 궤뚫고 있어야만 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발락의 청을 처음부터 거절해야 했었다. 그러나 발람은 실제적으로는 발락이 제시한 대가에 현혹되어 발락의 초청을 받은 때로부터 시작하여 세번째 제사를 드릴 때까지 이스라엘을 위한 그리고 이스라엘을 중심한 하나님의 역사 경륜의 의지가 계속하여 분명히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거듭하여 어떻게 헤서든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신탁을 얻어 내려고 시도하고 있다.
  • 본 단락에서부터 시작하는 제 22-24장 사이의 도합 일곱 문단은 소위 발락의 발람 초청 사건을 연속 보도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의 모압 평지 (Plain of Moab) 주둔에 두려움을 느낀 모압 왕 발락(the Balak) 이 신적 저주를 빌어서라도 이스라엘을 저지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메소포타미아 출신의 영매 발람(the Balaam)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하는 총 4회의 제사와 신탁(Oracle)을 시도한 사건을 보도.

●발락이 발람을 부름(민수기 22:1-14)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디어 광야의 방랑생활이 끝나고 거기를 벗어 날 수 있게 되었다(21:18). 그리고 이제는 요단강 근처 모압 평지에 진을 쳤다. 그들은 모세의 사후에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요단강을 건널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 여리고 맞은편에 진을 침

  • 본문은 성경에서 ‘여리고'란 지명이 최초로 언급된 곳이라는 데서도 의미가 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과거 가나안 정탐 보고와 관련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 준 불신앙으로 인하여(13.14절) 40여 년간이나 가나안 정복이 연기된 불행스러운 과거를 가지고 었었던 이스라엘이 다시 가나안의 첫 관문인 여리고 성 맞은편에 진을 침으로 가나안 정복의 전기를 마련했다고 하는 것이다.
  • 여기서 여리고 맞은편이란 요단강 서편에 있는 여리고 건너편인 요단강 동편의 모압 평지를 의미한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1세대들의 불신앙으로 인한 광야 방황을 끝내고 가나안 백성과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붙이시는(21:34)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듭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한 거점을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고치셔서 과거의 실패에서 돌이켜 다시 승리할 수 있도록 하신다(신 6:3; 대상17:26; 사55:3).

Ⅰ. 이스라엘이 가까이 오자 모압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2-4절).

 

👀 당시 한곳에 오랜 세월을 정착하여 살던 모압인들이 40년 동안이나 정처없어 광야틀 유랑했던 이스라엘에 대하여 마처 고향을 떠난 여행자가 가지는 것과 같은 심한 두려움을 가졌던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압 사람들과 싸우지 말고, 그들에게 적대심을 품지도 말라고 하신 명령을 그들이 알았다면(아마 모세가 그들에게 이것을 알려 주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로부터 어떤 위험한 일을 당하리라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러한 말을 들었다면, 아마 그들은 그들을 쉽사리 정복하려는 속임수로만 알고 마음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옛날 아브라함과 롯이 친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모압 사람들은 가능하기만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을 멸망시키고자 결심하였으며, 의당 이스라엘도 그들을 멸망시키려고 결심했을 것이라고 아무 의심 없이 믿었던 것이다. 잘못을 꾸미고자 하는 자들은 흔히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잘못을 저질르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한없는 불안은 결국 그들의 까닭 없는 적의에서 온 것이다.

그들은 아모리 사람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의 소식을 듣고(2절), 그들의 이웃이 불길에 싸였으니 만큼 그들 자신의 집은 위험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많은 숫자를 보았다(3절). "그들은 수 가 많았다."

그리하여 만일 이스라엘의 승승장구하는 군사들의 행진을 막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조속히 강구하지 않으면, 그들의 온 땅이 쉽사리 정복될 것이라고 추단하였다. 또한 이 거대한 대적에 감히 대항할 만한 힘이 자신들에게 없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이 무리가, 소가 밭의 풀을 뜯어먹음 같이 우리 사면에 있는 것을 다 뜯어먹으리로다" (4절). 그리하여 그들은 심히 두려워하였으며, 근심하였다. 이처럼 악인들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도 두려워한다(시 53:5).

 

👀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파 야곱에게 하신 약속대로 이스라엘의 수를 많게 하셨다. 이들이의 수효는 남자 장정만 60만 명이 넘었으므로 전체 인구는 200만을 넘었을 것이다.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서 이와 같이 많은 수의 자손이 불어나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

한편 당시 이스라엘은 비록 아모리의 남왕국과 북왕국은 쳐부수었지만(21:1-3; 21-35)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압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웃 나라의 멸망을 보고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기우에 불과했다(신 2:9). 오히려 그들이 진정으로 무서워해야 할 대상은 외형적으로 수효가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그들을 강성하게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모압 사람들에게는 이스라엘의 배후에서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만을 두려워했고 거짓 선지자 발람을 초청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5, 6절).

 

이 두려움을 그들은 이웃인 미디안의 장로들에게 호소하였다.

👀 ‘미디안'은 아브라함의 세번째 아내인 그두라의 후손들을 말한다(창 19:37). 이들은 시내 반도 뿐만 아니라 아카바만까지 이르는 매우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이들은 주로 유목과 상업에 종사하였으므로 고대 세계에 대한 많은 정보와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발락은 마옴의 당혹감과 위기감을 해소하기 위하여 미디안의 장로들을 조언자로 불러 이스라엘을 무찌를 방법을 상의하였다.

발락의 오해

  • 모압인들은 유목민이었던 자기들의 생존 기반이 되었던 초지를 이스라엘이 불에 태워다 없애 버리듯 자기들을 모두 멸망시키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이스라엘은 단지 이곳을 지나가려 했을 뿐이었다. 오히려 발락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적으로 생각한 나머지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파괴시킬 것이라고 자기 백성들을 자극함으로써 이스라엘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켰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근심한 장본인이 십볼의 아들 발락 모압 왕이라는 점에 특히 주목하게 된다. 그의 근심이 곧 그 나라 전체의 근심이었고 그의 생각에 의해 모암이 움직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나라의 왕의 생각과 판단은 엄청난 영향을 미치며 그 책임은 실로 큰 것이다. 이처럼 지도자의 판단의 실수는 그 나라 전체의 운명을 바꾸어 놓게 된다는 사실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공동적인 안전을 강구해 보고자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모압 왕국이 무너지면 미디안 공화국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모압 사람들이 원하기만 하면 이스라엘의 전진과, 아모리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승리를 잘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땅의 일부를 벌써 차지하고, 나머지 땅도 정복하려고 하였던 아모리 왕 시혼의 위협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주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대해 감사를 돌리며, 이를 기뻐할 만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우정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협조자가 될 만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조상 롯의 신앙을 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진 것과 같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워하였으며, 정신이 혼란에 빠져 스스로 괴로와하였다.

 

Ⅱ.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게 하려고 꾸민 모압 왕의 계략은 말하자면 지금까지 그들을 위해 싸워주신 하나님을 그들과 맞서는 분으로 만들어 보고자 한 것이었다.

 

👀 6절, ‘저주하라’

  • 저주하라로 번역된 단어의 원형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타락하게 하였던 뱀에게 하신 저주(창 3:14), 노아 시대에 있었던 패역한 자둘에 대한 하나님의 저 주(창 5:29),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아브라함에게 저주하는 자에게는 당신께서 저주하겠다고 하는 말씀(창 12:3) 등에 쓰인 표현이다. 발락은 이스라엘에게 임하기를 원했던 저주가 매우 강도 높은 것이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용어틀 사용했던 것이다.
  • 하지만 아무리 자기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불신자의 사악한 저주는 결국 자신에게 돌아간다고 하는 사실이 앞으로 전개되는 사건들을 통해 나타난다(24:14-25). 

그는 자기의 무력보다는 자기의 재능을 더 의지하였다. 그리고 강력한 마술을 부릴 줄 아는 선지자나 또는 어떤 사람을 청해다가, 이스라엘에게는 저주를 빌고 자기를 위해서는 축복을 빌게 하면, 자기가 감히 그들과 맞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것에서 나왔을 것이다.

  1. 그것은 어떠한 신앙의 잔재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아들들의 문제를 다스리며 그들의 운명을 다스리는 어떤 눈에 보이는 지배력을 의지하게 하며, 이러한 힘에 자신들을 맡기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참다운 신앙이 무너지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들의 경건한 조상, 아브라함과 롯의 신앙과 예배를 간직하여 비참하게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들 스스로가 지키지 못한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유일하게 지키고 있는 백성들을 저주하는 그런 악행은 감히 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Ⅲ. 그들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기 위하여 브올의 아들인 유명한 마술사 발람을 부르고자 하였다.

 

👀 발락의 요구사항 :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해 주시오...

  • ‘나를 위하여’ 란 표현은 발락의 이기적고 자기 중심적인 심리 상태를 잘 보여 준다. 즉 발람이 모압으로 오는 것이나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이 다른 이유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하여 되어져야 함을 명시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과 달리 ↔  패역한 악인은 삶의 중심에 자기 자신을 두고 모든 것을 자신 위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면 내가 “혹시” 그들을 쳐서 이 땅에서 그들을 쫓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 혹시(unless, maybe, if so be) →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발락은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만 하면 이스라엘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졌음을 보게 된다. 이처럼 거짓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자신들의 믿음에 헛된 근거에 토대를 둔 확신을 깊게 가질 수 있다.
  •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믿느냐’는 것이 중요한지를 알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무엇을 믿느냐’ 임을 알아야 한다.
  • ⇒ 복술가인 발람을 믿었던 발락과 하나님만을 믿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국은 천지 차이였다. 믿음의 대상을 잘못 찾아 결국 멸망을 자초했던 발락을 볼 때 우리는 허탄한 세상을 향한 믿음이 아닌 절대자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을 갖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함을 깨닫는다.

이 발람은 아브라함이 떠나왔으며 라반이 살고 있던, 그 먼 고장에 살고 있었다. 아마 가까운 곳에도 스스로 훌륭한 점복가임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발람만큼 명성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발락은 발람이 아무리 먼 곳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알고 있는 가장 능한 사람을 부르기 위해 그 먼 곳까지 사람을 보냈다. 그만큼 발락은 이 계획을 위해 열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발람을 데려오기 위해 발락은 이렇게 하였다.

  1. 발락은 이스라엘의 거대한 숫자와 그리고 그 진영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사정을 마치 친한 친구에게 호소하듯 그에게 불평을 토함으로 발람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그는 말하기를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 편에 거하였다" 고 하였다(5절).
  2. 발락은 발람의 말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사실 발람을 자기의 신으로 추겨 올렸다. 그는 말하기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이다" 고 하였다(6절).

👀 이 말은 발락의 영적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저주가 아닌 저주가 결코 어떤 영향력을 가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지식을 과신하고 있던 발락은 술사 발람이 저주하기만 하면, 그 저주의 대상이 저주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는 "선지자" 라고 일컬어졌다(벧후 2:16). 아마 그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능력" 이란 말을 들을(행 8:10) 마술사 시몬과 같이 마술을 가지고 사람들의 명성을 사던 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발설한 저주는 노아나(창 9:25). 엘리사의(왕하 2:24) 경우와 같이 놀라운 효력을 발한다. 그러나 "까닭 없는 저주는 이르지 아니한다" (잠 26:2). 그리고 더욱이 골리앗이 다윗에게 한 것과 같은 "그 신들의 이름으로 한 저주" (삼상 17:43)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기를 바라고, 우리에게 적대하지 않도록 하자.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를 축복하실 수도 있으며, 또 저주하실 수도 있으신 그분의 은총을 받고 있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찬사도 발람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발락은 발람의 마음을 끌기 위해 "복술의 예물" 을 가져가게 하였다(7절). 그것은 발람이 "사랑한 불의의 삯" 이었다(벧후 2:15).

 

Ⅳ. 하나님은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도록 제재하셨다.

아마 발람은 매우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해서 모르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진실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들어서 알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즉시로 그 사자들에게 대답하되, 자기는 하나님께서 축복한 백성을 저주할 수 없노라고 말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자들을 유숙하게 하고 밤새 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며,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다(8절). 우리가 우리를 유혹하는 자와 의논을 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쉽사리 유혹에 떨어지기 쉽다.

 

👀 본문은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신 꼭 그대로만' 이란 의미이다. 이는 외형적으로 볼 때 하나님 명령만을 따르겠다는 신앙적인 대답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외형적으로는 하나님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했다. 이는 발람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발람이 유일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여호와'의 선지자였는가?

  • 발람은 여호와를 유일신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여러 많은 신들 가운데 한 신으로 인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신관이 여호와 신앙을 지닌 바른 것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 당시 다신론 사상이 팽배하였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거주하였던 발람은 지역신 사상과 민족신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민족신으로만 받아들였고 이스라엘 민족이 승승장구하는 것을 막는 방법은 이스라엘의 민족신인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돕지 않거나 저주하는 것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여호와란 이름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밤에, 아마 꿈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셔서, 이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물으셨다.

 

👀 (9절) 8절에서 유일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여호와'가 사용된 반면, 바로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엘로힘'이라는 하나님의 다른 이름이 사용되었다.

  • ‘여호와' : 주로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 대하여 구원을 선포할 때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인 반면,
  • ‘엘로힘' : 천지를 창조하신 무한하신 능력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따라서 본문은 이방 선지자 발람에 대하여는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는 여호와로 나타나시기보다는 무한하신 권능을 보여 주는 엘로힘으로 나타나셨음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은 ‘엘로힘'이란 하나님 이름의 사용은 이후로 나귀가 사람의 말을 하게 되는(30절) 등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을 암시하는 역할도 한다.

(10절) ... 제게 보낸 사람들입니다.

  • ‘보낸 사람들' :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파송을 묘사할 때 많이 사용되는 표현.
  • → 주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보낼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가 본문에서 사악한 발락의 명으로 보냄을 받은 귀족에게 사용되고 있다고 하는 것은 풍자적인 데가 있다. 이 단어는 발락의 보냄을 받은 모압 귀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들과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그러나 발람을 통해서 그 말을 듣기를 원하셨다. 발람은 사자들이 온 용건을 하나님께 아뢰었다(9-11절).

그리고 하나님은 발람에게 그들과 함께 가지 말도록 꾸짖으셨으며, 축복 받은 백성을 저주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12절).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 때로는 아비멜렉이나(창 20:3), 라반에게(창 31:24) 직접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악인에게도 말씀하신다.

 

👀 하나님께서 저주하는 것은 물른 가서도 안된다고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보여 줌과 동시에 범죄의 자리는 처음부터 피해야 한다는 삶의 방법을 보여 준다(시 1:1).

 

그리고 우리는 불의한 일꾼이면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였으며,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발람은 발락에게 가지 말라는 말씀만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조만간 저주하려고 하였던 일을 그만 두라는 책망을 들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으신 것을 볼 수 있다. 즉 "그들은 복을 받은 자" 라고 하셨다.

→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의 중요한 부분이었다(창 12:3).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 고 하나님은 축복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위험을 초래한다.

이스라엘은 가끔 광야에서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저주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불법을 보응하시지 않으시기 때문" 이다. 그 죄가 가리우심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롬 4:6, 7).

 

👀 하나님은 한번 하신 약속을 결코 바꾸시거나 지키지 않는 분이 아니시다(23:19; 삼상15:29). 따라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과 언약하신 것은 발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저주를 한다고 해서 바뀔 수 없다(창 15:18; 26:3-5; 28:13-22; 출19:5).

결국 발람이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한다 해도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날마다 복받는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처럼 하나님이 복주시기로 한번 작정하신 자는 영원토록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된다.

 

Ⅴ. 사자들은 발람을 데리고 오지 못했다.

  1. 발람은 사자들에게 하나님의 대답을 충실하게 알려주지 않았다(13절). 그는 단지 "내가 너회와 함께 가기를 여호와께서 허락지 아니하셨다" 고 말했다.

👀 발람이 발락의 뜻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하여 모압 땅으로 가는 것은 명백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발람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행동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발람의 이러한 태도는 후에 바뀌게 되며 결국 죄악에 동참하게 된다(21 절).

 

그는 사자들에게 그가 반드시 전했어야 했던 말, 즉 이스라엘은 축복 받은 백성이니 만큼 그들을 저주할 수 없다는 말을 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할 때 그 계획이 무너지고 다시는 그런 요청이 또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발람은 실제로는 그가 발락을 겸손하게 섬기고 싶다는 뜻과 그의 계획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있다는 것과 또 그를 기쁘게 하여 드리고 싶다는 뜻을 전하게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가지 못한다는 뜻을 전함으로 한편으로는 자기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임을 나타내 보이고자 시도한 바도 있다.

하나님의 금령에 어긋 행하는 일은 단지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 행하는 것인 양 말하며, 또 하나님의 법을 거슬러 행하는 것을 그의 허락 없이 행하는 것인 듯 깎아서 말하는 사람들은 쉽사리 사탄의 표적이 된다.

  1. 사자들 역시 발람의 대답을 발락에게 충실하게 전하지 못했다. 그들이 전한 말은 단지 "발람이 우리와 함께 오기를 거절하더이다" 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그가 더 정중한 대우와 더 많은 대접을 받기를 원하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그들은 발락에게 그의 계획을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지 않았다. 이처럼 큰 인물들은 주위 사람들의 아첨하는 말 때문에 잘못에 빠지는 수가 많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눈으로 자기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찾아내어야 한다.

● 발락이 다시 발람을 부름(민수기 22:15-21)

여기에는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기 위하여 또 다시 발람을 데려 오려고 사자들을 두 번째로 보낸 기사가 있다. 발락이 그의 잘못된 일을 끈질기게 한 것만큼만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해 실망하지 않고 열심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면 좋겠다. 교회의 대적들은 교회를 대항하고 악행을 위해서 쉬임없이, 지침도 없이 달려든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분은 저들을 웃으신다.

 

Ⅰ. 발락은 발람을 더욱 더 유혹하였다.

그는 발람을 효과있게 설복하기 위해 어떤 계략을 꾸몄다. 아마 그는 사자들의 손에 갑절의 돈을 주어서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 명예 면에서 그를 유혹하기 위하여 그의 탐욕에 대해 미끼를 던졌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자만심과 야심에 대해서도 유혹하였다. 우리는 옛 사람의 앞잡이를 억제하기 위하여 날마다 얼마나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가 ! 세상 재물과 지위 를 멸시할 수 있는 사람은 선한 양심을 지키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발람을 유혹하기 위하여 발락은 어떤 재간을 부렸는지 보자.

1. 그는 먼저보다 휠씬 더 "높은 귀족들" 을 보냈다(15절).

 

👀 원어 성경으로 볼 때 본문은 상당히 강조된 문장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 당시 발락의 다급함.

  • 발락은 발람에게 보낸 귀족들의 보고를 받자마자 곧바로 행동을 취했다.
  • 또한 발람에게 재파견된 그 귀족들이 앞서 파견했던 장로들(7절), 귀족들(8,14절) 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던 자들이며 귀족들 가운데서도 더욱 영화롭고 존귀한 위치에 있었다. 발락은 발람을 초청하는 데 또다시 실패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 그 간청은 매우 다급한 것이었다.

이 권세있는 왕이 그에 대해서는 애원하는 파가 되었다. "청컨대 아무 것에도 거리끼지 말고 내게로 오시오(16절). 하나님께도 양심에게도 또 죄나 수치에 대한 두려움도 거리낌이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 비록 발락이 발람에게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서라도 자기에게 오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무것에도 거리끼지 말고'라는 표현 속에는 그것이 비록 하나님의 뜻이라도 단호히 거절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발람은 처음에 그에게 찾아온 장로들에게 분명히 하나님이 금하시므로 갈 수 없다고 말하였고(13절), 이런 사실은 그대로 발락에게 고하여졌다(1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락은 발람 어 자기에게 오는 것을 어떤 것도 방해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함으로써 사실상 하나님께 대항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인에게는 때로 세상 사람들의 부탁이 하도 간절하여 이를 거절하는 것이 오히려 너무 냉혹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갈등의 순간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하는 부탁은 그것이 아무리 간곡하다 하더라도 죄라는 사실이다. 성도는 그 순간에 단호한 결단력으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1. 보다 고귀한 것을 제공하였다.

"내가 그대를 모압 왕들 사이에서 높여 크게 존귀케 하리이다" 라고 말했다. 아니 그는 발람이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는 빈칸이 들어 있는 위임장을 보냈다.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겠노라" 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나는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드리며. 당신의 명령이면 무슨 말씀이든지 지키겠습니다. 당신의 말씀은 내게 대하여 법과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17절).

이처럼 죄인들은 자기들의 사치심 또는 적개심에 만족을 주기 위해서는 얼마나 괴로움을 당해도, 얼마나 많은 것을 허비하여도, 그리고 얼마나 그들이 비굴해지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덕법에 대해서 전혀 뻣뻣한 자세만을 취할 것인가? 하나님은 이를 허락지 않으신다.

 

Ⅱ. 발람은, 겉으로는 거절하는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유혹에 굴복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발람의 갈등 즉 죄를 뉘우치는 마음과 죄에 물드는 마음 사이의 갈등을 분간해 볼 수 있다.

  1. 그의 뉘우치는 마음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고 설득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바른 말을 하였다. 아무도 그가 한 말보다 더 좋은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발락이 그 집에 은, 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높여서 이야기하였나 보라. 그는 하나님을 일컬어 "여호와 내 하나님" 이시라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아니면서도,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이시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아닌 까닭은 하나님이 그의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동시에 말감을 가리켜 맹세한다" (습 1:5).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해서 말하고 있는가를 보라. 그는 마치 그 말씀을 충실히 지키는 자. 그 말씀을 조금도 가감하지 않는 자와 같이 말하고 있다. 또 그가 얼마나 이 세상의 재물을 경시하고 있는가를 보라. 그는 금 과 은을 하나님의 은혜와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있는 듯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불의의 삯을 탐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을 살피는 자는 알고 계신다. 악인도 좋은 말을 하며, 입으로는 경건을 표시하기가 쉽다. 그러므로 그의 말로 그를 판단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마음을 살피신다.

 

👀 발람의 본심

  • 본문은 하나님 말씀을 그 내용이나강도에 있어 조금이라도 약화시키거나 과장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만 전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실상 발람의 이 말은 진심이 아닌 거짓 종교인의 위선에 불과하였다. 발람은 이러한 말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신탁에 충실한 것처럼 위장하였지만 실제로는 제 19절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번복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1. 동시에 그의 죄에 물드는 마음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에 거슬리게 하였다. 그는 그 유혹을 거절하는 것 같이 보였다(18절). 그러나 그 때에도 그는, 그리스도께서 천하 만국을 주겠노라고 하는 사탄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하신 것과 같이, 또 마술사 시몬이 베드로에게 돈을 주며 성령을 사려고 하였을 때 베드로가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행 8:20)라고 말한 것과 같이, 단호히 이를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은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19절).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사 그로 하여금 그들을 따라가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남께서 무엇이라고 그에게 말씀하시는지 알아보겠노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 하나님께서는 분명 발람이 발락에게 가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발락이 파견한 귀족들에게 ‘이 밤을 여기서 유하라'고 말하는 발람의 태도는 하나님의 뜻을 자 기 마음대로 바꿔보려는 생각이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태도는 아니다. 그는 재물과 권세를 준다고 하는 발락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고, 하나님의 뜻은 분명한 데도 불구하고 다시 하나님에게 물음으로써 자신의 뜻을 이루려 하였던 것이다.

발람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선지자의 자세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발락이 파견한 귀족들의 달콤한 제안을 듣고 그의 마음이 동요를 일으키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금하셨던 내용을 다시 듣기 위해 기다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뜻을 바꾸셔서 자기 생각대로 해 주시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의 우회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게 할 수 있다는 듯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지독한 경멸이다. 그는 하나님이 축복한 것을 끝내 저주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하나님께서 이미 악하다고 선언하신 것을 돌이켜 행하도록 허락을 얻을 수 있는 듯이 생각하였다. 진실로 그는 하나님을 그 자신과 똑 같은 자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임을 밝히 말한 바가 있다. 그는 다만 묵묵히 그 뜻을 따라야만 했었다. 그리고 이미 확실히 결정된 사항에 대해 다시금 그 까닭을 물을 필요가 없었다.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짓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크게 멸시하는 것이며, 그 마음이 타락으로 빠지는 확실한 증거이다.

 

Ⅲ.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가라고 허락하셨다(20절).

하나님께서, 아마 천사를 통해, 그에게 오셨다. 그리고 그에게 그가 원하면 발람의 사자들과 함께 가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를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셨다" (롬 1:24).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네가 가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가려거든 가라. 그러나 너는 알라. 네 가는 길이 네게 영광을 가져다주지 못하리라. 네가 가기는 가지마는 너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그들을 저주할 수는 없다. 너는 내가 네게 일러주는 말만 말할지니라."

하나님은 악인들을 사슬에 묶어놓으신다. "여기까지는 그들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올 수 있다." 그러나 허락 받은 그 이상은 안 된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분노가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지만 동시 에 그 이상은 허락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그들과 함께 가라" 고 하신 것은 노여움을 가지시고 말씀하신 것이 분명하다. 발람 자신도 그것을 그렇게 이해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가지 못하게 막았을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냐고 발람이 반박하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기도를 때로는 사랑으로 거절하듯이, 때로는 악인들의 기도를 진노 속에서 들어주시는 일이 있으시다.

 

👀 하나님께서는 비록 발람이 모압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는 그의 자유 의지에 맡기셨지만 가서 말하게 될 예언의 내용은 철저히 간섭하시겠다는 의지를 피력하셨다.

 

Ⅳ. 발람이 길을 나섰다(21절).

하나님은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갈테면 가라고 내버려두셨다. 그런데 발람은 그 길을 떠나기를 무척 좋아하였다. 그는 그 사자들이 다시금 가자고 말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 자신이 "아침에 일어나서" 모든 것을 속히 챙겨 가지고, "모압 귀족들과 함께 행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원했던 바를 이루고 가느니 만큼 크게 기뻐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한 사도는 이러한 발람의 죄에 대하여 "삯을 위하여 어그러진 길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고 하였다(유 11).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딤전 6:10).

 

-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매일 아침마다 정리해주는 찬미자매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