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민수기 10, 시편 46, 47, 아가서 8, 히브리서 8
묵상구절
35:22 그러나 만일 그가 적대감 없이 순간적인 실수로 사람을 밀쳤거나 악의가 없이 그에게 무엇을 던졌거나
35:23 혹은 미처 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떨어뜨려 죽게 했다면, 그는 원한도 없고 악을 행하려 한 것도 아니니,
35:24 회중이 쳐 죽인 자와 피를 복수하려는 자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규례에 따라 판결하여라.
35:25 회중은 살인자를 피를 복수하려는 사람의 손에서 구해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내고, 거룩한 기름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무르게 하여라.
35:26 그러나 만일 그 살인자가 자기가 도피한 그 도피성의 경계를 벗어나면,
35:27 피를 복수하려는 자가 그 도피성 경계 밖에서 그를 만나게 될 때 그 살인자를 죽여도 그에게는 피 흘린 죄가 없을 것이다.
35:28 이는 그가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 머물러야 하고,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야 자기 소유의 땅으로 되돌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35:29 이것이 너희가 너희의 모든 거주지에서 대대로 지켜야 할 판결의 규범이 될 것이다.
35:30 누구든지 사람을 쳐 죽이면, 증인들의 증언에 의해서만 그 살인자를 죽일 수 있으나, 그 사람에 대하여 증인이 한 명뿐이면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
35:31 너희는 살인죄를 범한 그 살인자의 목숨을 위해 속전을 받지 마라.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35:32 또 너희는 도피성으로 피한 사람을 위해 속전을 받아서 제사장이 죽기 전에 그가 고향에 돌아가 살 수 있도록 하지 마라.
35:33 너희는 너희가 살고 있는 땅을 더럽히지 마라. 피는 땅을 더럽히니, 피흘림을 받은 그 땅은 피를 흘리게 한 사람의 피가 아니면 속함을 받을 수 없다.
35:34 너희는 너희가 살고 있는 땅, 곧 내가 머무는 그 땅을 더럽히지 마라.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거주하기 때문이다.'"
매튜헨리/옥스퍼드
- 만일 살인 행위가 자의에 의한 것, 즉 의도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면, 또 만일 그것이 "원한 없이 또는 기회를 엿봄이 없이" (22절) 사람을 "보지" 못하고 "해하려 하지도" 않았는데(23절)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면(영국의 법은 그것을 과실치사 또는 per infortunium - 불운으로 인한 살인이라 부른다) 이 경우에는 그릇 살인한 자가 피할 수 있도록 지정된 도피성이 허락되었다.
👀 23절은 살인의 도구나 행위보다는 동기에 관심을 더욱 집중하고 있다.
- 동일한 도구로 인해 동일한 결과를 낳은 행위라 할지라도 그 동기에 따라 판결이 달라진다. 하나님이 참으로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마음 곧 우리의 중심이기 때문이다(삼상16:9)
도피성에 관한 율법은 다음과 같다.
(1) 사람이 어떤 사람을 죽였을 때, 그는 "회중 앞에서" 즉, 공개 법정의 재판장 앞에서 판결을 받을 때까지는 이 성에서 안전했고, 이 율법의 보호 아래 있었다. 만일 그가 이처럼 자수하기를 무시한다면, 그에게 불리하다. 만일 피를 보수할 자가 어느 곳에서 고를 잡거나 도피성으로 어슬렁거리며 가는 그를 붙잡아서 죽였다면 그의 피는 자기 자신의 머리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방패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회중 앞에서 판결받을 것
- ‘회중'이 판결하는 그 판결은 단순히 개인적 살인 사건이란 개별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identity),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삶의 원리와 관계된 것이다.
- 회중이 판결에 참여하게 하는 목적따라서 이는 개인주의화 되고 서로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는, 특히 상대방의 죄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를 꺼려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에게 죄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좋은 실례라고 할 수 있겠다."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마 18”15)
- 우리 신앙인은 결코 서로 따로 떨어져서 생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바울이 비유했듯이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성령과 한소망으로 한 몸을 이루는 유기체적 존재이다(고전12:12-14; 엡4:3,4,15,16).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은 모두 서로에게 유기적이며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옆에 있는 성도가 바로 서야 내가 바로 서고 이렇게 각각의 성도들이 바로 설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가 지은 명백한 죄에 대하여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 죄의 판결과 처벌에 있어서 공동체의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의 문제에 대하여 공동체의 대응을 요구하고 계셨던 것이다.
(2) 만일 재판으로 인해 그가 고의적인 살인범이라는 사실이 발견된다면, 도피성은 더 이상 그를 보호해 주어서는 안 되였다. 그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 내려 죽일지니라" (출 21:14).
(3) 그러나 만일 그것이 과실이나 우연에 의한 것임이, 그리고 그를 친 것이 그의 생명이나 또는 다른 것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면, 그때에 이 살인자는 피를 복수할 자가 그에게 관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도피성에 계속 안전히 피해야 했다(25절).
👀 25절, 살인자에 대한 보호는 공동체의 책임
- 원어 성경은 각 문장에서 모두 ‘에다'(회중)를 기록하여 우연히 살인한 그 사람을 보호하는 주체가 ‘회중’으로 표현된 공동체임을 훨씬 더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우발적이거나 실수로 살인한 자에 대한 보호는 공동체의 책임인 것이다.
-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루는 공동체는 한 몸이기 때문에 죄에 대한 처벌 뿐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을 과도한 보복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에 있어서도 전체적인 책임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의 공동체로 세움을 입은 교회 또한 이러한 책임이 지워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한 개인의 공의와 자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전체의 공의와 자비를 원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 살인자를 건져낼 것
- 건져내어 = ‘구원하다', 건져내다’를 기본으로 함
- → 이 어근은 ‘자기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을 그 위기에서 구해 낸다'는 의미.
- 이처럼 홀로 있으면 피의 보수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과실 치사자를 회중으로 대표되는 공동체가 죽음의 형벌에서만큼은 구원해 내야 한다고 하나님은 지시하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를 하나님의 은혜와 속죄가 있는 도피성으로 돌려 보내서 그 생명을 보존케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교회 역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자들을 돌보며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이와 더불어 더욱 험써야 할 일은 죄의 사슬에 매여 영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합심하여 구원하여(빌 1:27) 영적 생명을 보존케 하는 일이다(엡 4:16). 즉 교회는 도피성이 상징하는 바 대속의 은혜가 넘치고 생수의 강이 흐르는 주님의 품으로 죄인을 이끌어 구원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요 7:38; 롬 5:8).
그는 도피성의 경계를 벗어나서는 안됨.
- 사방 2천 규빗(약 912x912m)의 도피성(4절 참조) 안에서만 산다는 것은 살인자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 일종의 형벌이었다. 살인이 고의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지라도 살인에 대한 책임이 살인자에게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11 절 설명 참조). 이는 사람의 생명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 실수로 살인을 범한 살인자를 죽음의 형벌에 넘기지 않고 그의 생명을 구하여 도피성에서나마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틀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코 피 흘린 죄를 완전히 용서하신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인 사람의 피를 훌린 대가는 마찬가지로 그 피를 흘리는 것이다(창 9:6). 그래서 아무리 고의적인 살인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대제사장의 피가 필요했던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자기 집과 가산에서 추방된 상태로 머물러 있어야 했다.
👀 성경은 살인자가 자신의 산업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기를 당대의 대제사장이 죽은 이후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 이는 대제사장의 죽음과 살인자의 의도적이지 않은 살인을 연결시켜서 생각하는 것이다. 즉 대제사장의 죽음을 고의성이 없이 이루어진 살인에 대한 대속적인 죽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대제사장의 죽옴이 이와 같은 대속적 기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중재자로 대속죄일에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속죄소로 들어가서 죄를 속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존재였기 때문이다.
- 죽음은 오직 죽음으로만 속함을 받을 수 있는데(창 9:6), 살인을 행한 자의 피가 홀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살인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계속 유지되어 왔으나 대제사장의 죽음은 고의성 없이 이루어진 살인에 대한 대속적인 죽음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 살인의 죄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살인자는 죄의 멍에를 벗고 살인으로부터 혹은 살인에 대한 보복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자신의 기업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 구약 시대의 대제사장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대제사장의 대속적 죽음 역시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표한다. 즉 장차 구세주로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참되신 대제사장이 되시어(히 4:14; 5:6-10) 죄인된 우리를 대신하여 죽임을 당함으로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히 7:27) 우리를 죄의 올무와 죽음에서 해방시키실(롬 8:1,2)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철저함 뿐만 아니라 그 문제틀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또한 보게 된다.
그리고 만질 언제고 그가 그 성이나 그 들에서 벗어날 때는, 그 자신이 이 율법의 보호에서 벗어나는 것이므로, 피를 보수할 자는 그를 만났을 때 죽일 수 있었다 (26-28절).
👀 28절, 보수자가 살인자를 죽였을 때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 살인자는 당대의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도피성을 결코 떠날 수 없었다. 이는 피 홀린 죄가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어 고의성이 없는 살인자에 대한 대속을 이루기 이전까지는 피를 홀리게 한 죄가 씻기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25절 ‘대제사장의 죽기까지'에 대한 설명 참조). 따라서 그의 피 흘린 죄가 그대로 남아 있었던 상태에서 보수자의 살인은 살인이 아니라 ‘꼬엘'로서의 당연한 의무 이행이었던 것이다.
👀 30절,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
- 30절은 한 명의 증인이 살인자를 죽이기 위해 거짓된 증언을 할 수도 있음을 배려한 세심한 법적 조치이다. .. 한 사람의 증언이나 제시한 증거는 결코 참된 증거로 채택조차 되지 않는다.
- 본문은 우리에게 사형이라는 형벌이 결코 가볍게 판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 신앙인이 어떤 일을 판단할 때 신중함을 가져야 함을 가르쳐 준다. 이런 원리는 신약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요8:17; 고후13:1; 딤전5:19).
31절, 생명의 속전
- 성경은 동물이 사람을 해쳤을 경우에는 이렇게 속전을 받는 것을 허용하기도 했지만(출 21:30), 사람이 사람을 죽인 살인 행위에 대해서는 절대로 속전을 통해' 죄를 속할 수 없음을 단호히 밝히고 있다. 이는 인간의 생명은 오직 생명으로만 갚을 수 있기 때문이다(창 9:6)
👀 33절,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 직역하면 ‘그리고 너희는 너희가 그 안에 있는 그 땅을 더럽히지 말라’가 된다. ‘피가 땅을 더럽힌다’는 사상은 성경의 독특한 개념이다.
- 성경은 땅이 사람이 홀린 피를 받아 마시며 그 피로 인해 땅이 더럽혀지고’ 땅은 스스로를 깨끗게 하기 위해 그 땅에 거하는 사람을 토해 내게 되는 것으로 묘사한다(창4:10-12). 이는 인간의 문제를 땅이라는 자연과 연결시키는 유기적인 사고 방식이다. 즉 인간과 땅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죄를 지으면 그 인간의 죄로 인해 땅도 더럽혀지며 고통스러워하게 되는 것이다.
- 이는 창조시부터 하나님이 세운 법칙으로서 인간이 모든 피조들을 다스리는 창조 원리에 따른 것이다(창 1:28-30). 따라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범죄하였을 때 인간만이 아니라 만물도 저주를 받았으며, 왜곡되고 파괴되었던 것이다(창 3:17.18). 그래서 바울은 피조물이 죄 가운데서 고통스러워한다고 표현하고 있다(롬8:19-22).
34절, 너는 더럽히지 말라.
- 33절과 같은 의미의(더럽히다) 다른 단어를 반복과 강조를 통해 거듭거듭 땅을 ****더럽히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영원히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에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소원하는 하나님의 강렬한 소망이 담겨있다. 그러나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을 더럽히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 땅을 떠나실 것이라는 경고로서의 의미도 지닌다.
- 이렇듯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을 더럽히면 안되었던 이유는 이스라엘이 거하는 땅은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시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거룩함을 요구하신다(벧전2:5). 그러한 거룩함을 요구하는 이면에는 더욱 깊게 우리 자신외 영원한 행복을 위하시는 마옴이 깃들어 있다. 즉, 인간은 하나님과 연합할 때만이 참된 인간상을 회복하고 행복할 수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죄를 과감히 내어 버림으로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참기쁨을 누려야 할 것이다.
34절, 본문에서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죄가 완전히 처리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게 될 그 땅은 바로 하나님이 함께 거하실 땅이며,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자는 거룩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함이니라
- 이스라엘 ‘중에' : 단순한 전치사를 사용하지 않고,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그 가운데' 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까지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의 중앙에 계시며, 가나안 땅의 참된 주인이 되시고, 이스라엘의 삶 한 가운데에 거하셔서 이스라엘 자손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전하고 있다.
- ‘거함이니라' : 한 장소에 정착한 모습을 묘사.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지정된 성전은 지극히 거룩한 곳이며, 그중에서도 지성소는 그 거룩함을 비교할 수 없고,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은 자신의 거룩함을 늘 지켜야 했던 것**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거하는 그 땅 가운데 자신의 장막을 치고 완전히 정착하여 자리를 잡고 지속적으로 거하실 것이다. 그래서 그 땅은 거룩해야 하며, 피로 인해 더럽혀져서는 걸코 안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 바로 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고 거하심으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셨다(요 1:14).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이 되었으며(고전6:19), 우리는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며,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
- 구약에서도 그 땅을 거룩게 하는 일이 이토록 중요했다면, 신약에서 그분의 지체로 살아가는(엡4:12-16) 우리의 삶은 얼마나 성결하고 거룩해야 하는지 더 이상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 살인한 사람의 생명을 보존해 주는 사실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사람들은 자기의 범죄가 아니라 불운에 의해서, 또는 자기 자신의 행실이 아니라 섭리자의 행동에 의해서 고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피살자)를 그(살인자)의 손에 붙이셨기" 때문이다(출 21:13).
[2] 살인자를 그의 성읍에서 추방하고 어떤 면에서는 포로가 된 그 도피성에 감금시키는 것으로써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를 흘린 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지닐 것을 그리고 생명을 매우 소중히 여기고 실수나 부주의에 의해 다른 사람의 죽음을 야기시키지 않도록 항상 주의 할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다.
[3] 범죄자의 추방 기간을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로 제한시킴으로써, 그 신성한 직책을 영예롭게 했다. 대제사장은 그의 나라의 큰 축복으로 여겨졌으므로 그가 죽었을 때, 그에 대한 그들의 슬픔은 다른 모든 분노를 삼켜버려야 했다. 도피성은 모두 레위인들의 성읍이었고 대제사장은 그 지파의 우두머리로서 이 성읍들에 대한 고유의 주권을 갖고 있었으므로, 거기에 감금된 자들은 그의 포로로 간주되어야 마땅했다. 따라서 대제사장의 죽음은 그들의 방면임에 틀림 없었다. 범죄자가 감금된 것은 그의 소송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그가 죽을 때 소송은 끝난다. .Actio moritur cum perason-소송은 당사자에게서 만료된다. 에인즈워드(Ainsworth)는 여기에 대해, 대제사장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봉사와 제물로써 죄를 속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예시했으며, 한편으로 그들이 죽었을 때에는 우연적인 살인으로 인해 추방되었던 자들이 해방되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구속을 상징했다는 또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4] 그 죄수가 언제고 도피성의 경계를 벗어났을 경우에는 피를 보수할 자에게 내던져진다는 것을 통해서 무한하신 지혜자께서 그들의 안전을 위해 지시하신 방법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이것이 매우 엄격히 준수 되어야 하는 것은 구제법의 영예를 위한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진실로 큰 구원인 그 구원을 무시한다면 어떻게 구원 받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Ⅱ. 도피성의 모형과 상징 아래에는 복음에 대한 것이 많이 숨어 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우리가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것" (히 6:18)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 (빌 3:9)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도피성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구약의 역사에서 이 도피성을 달리 사용한 것에 대해, 더욱이 이러한 다른 율령에 대해 결코 읽은 바 없다. 도피성은 의도된 대로 사용되었음이 틀림없다. 단지 우리는 위험한 때에 "제단 뿔" 을 잡은 자들에 대해서만 읽을 수 있다(왕상 1:50; 2:28).왜냐하면 제단은 어디에 세워진 것이든지 간에 주요한 "도피성"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성에 관한 율법은 이스라엘의 구속을 바라는 자들의 기대를 불러 일으키고 격려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도피성이 살인자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제단은 죄를 깨닫고 그것으로 인해 두려움 속에 있는 자들에게 구속을 약속해 준다. 다음을 살펴보자.
- 여러 도피성이 있었고, 그것은 그 나라 여러 지역에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죽인 자는 이스라엘 땅 어느 곳에 거했든지 간에 그 도피성들 중 어느 하나에 반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피난처로서는 한 분의 그리스도만이 지정되어 있을지라도 그는 우리가 어디 있든지 간에 우리 가까이에 있는 피난처, 즉시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이시다. 왜냐하면 "말씀이" 그리고 그 말씀 속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 사람을 죽인 자는 이 도피성들 중 어느 곳에서도 안전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믿어 그에게로 도망하며 그의 안에서 쉬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로부터 보호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롬 8:1). 이처럼 피한 자들을 누가 정죄하겠는가?
- 그것은 모두 레위인의 성읍들이었다. 불쌍한 포로에게 있어서는, 비록 그가 하나님의 궤가 있는 곳으로 올라 갈 수 없었다 할지라도 그에게 여호와의 선한 지식을 가르치고, 그에게 그가 지금 처해 있는 그 섭리를 호전시킬 방법을 지시해 줄 레위인들이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또한 레위인들이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그들을 환영하리라는 것이 기대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불쌍한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초대하고,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안에 있는 자들을 돕고 권고하는 것이 복음 사역자들의 일이다.
- 타국인과 우거하는 자들까지도 비록 그들이 본래의 이스라엘 사람은 아닐지라도 이 도피성의 혜택을 얻을 수 있었다(15절).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헬라인과 유대인의 차별이 없다. 믿음으로써 그리스도께로 "도망하는 타국인의 아들들도," 그의 안에서 안전할 것이다.
- 그 성의 들이나 접경도 그 범죄자를 안전케 하기에 충분했다.(26, 27절).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옷깃에도 불쌍한 죄인들을 고치고 구원할 수 있는 효험이 있었다. 비록 우리가 완전한 확신에 이를 수 없을 때에라도,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은 선한 소망으로 스스로를 안위할 수 있을 것이다.
- 살인자가 도피성에서 찾은 그 보호는 그 성덕이나 문이나 빗장의 힘에서 기인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약속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영혼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안전함을 주는 것은 복음의 말씀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인하여 인을 치셨기" 때문이다.
- 범죄자가 그의 도피성의 경계에 이탈하거나 몰래 자기 집으로 다시 들어갔을 때, 그는 그 보호의 혜택을 잃고 피를 보수할 자로부터 공격받을 위험에 처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만일 그들이 그를 버리고 그를 떠나 유리한다면, 위험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뒤로 물러서면 멸망에 이르느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매일 아침마다 정리해주는 찬미자매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