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민수기 15, 시편 51, 이사야 5, 히브리서 12
묵상구절
1:19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는 호렙을 떠나서 너희가 보았던 그 크고 무서운 광야를 지나 아모리 사람들의 산지로 가는 길을 따라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렀고,
1:20 그때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아모리 사람들의 산지까지 이르렀다.
1:21 보아라,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 앞에 그 땅을 주셨다.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는 올라가서 차지하여라.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마라.' 하였다.
1:22 그러나 너희가 모두 내게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들을 우리 앞에 보내어 우리를 위해 그 땅을 살펴보게 합시다. 그래서 우리가 올라가야 할 길과 우리가 가야 할 성읍들을 우리에게 보고하게 합시다.' 라고 하였다.
1:23 내가 그 말을 좋게 여겨, 너희 가운데 각 지파에서 한 명씩 열둘을 뽑았으며,
1:24 그들이 나아가 산지로 올라가서 에스골 골짜기까지 이르러 그곳을 정탐하고,
1:25 그들이 그 땅의 과일을 손에 들고 우리에게 돌아와 말하기를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이 좋았다.' 라고 그 일을 보고하였다.
1:26 그러나 너희는 올라가려 하지 않고, 여호와 너희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으며,
1:27 너희는 너희 장막 안에서 원망하여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우리를 아모리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어 전멸시키려고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셨다.
1:28 우리가 어디로 올라가야 하는가? 우리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케 하여 '그 백성은 우리보다 강하고 크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았으며, 거기서 우리가 또한 아낙 자손들을 보았다.' 라고 하였다.
1:29 그때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라.
1:30 너희 앞서 가시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보는 앞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그분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1:31 광야 곧 너희들이 걸어온 모든 길에서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은 것 같이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를 안고 이곳까지 이르게 하신 것을 너희가 보았으나
1:32 너희는 이 일에 대하여 여호와 너희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1:33 그분께서는 너희 앞서 길을 가셔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장막 칠 곳을 찾아 주시며,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가야 할 길을 보여 주는 분이시다.' 라고 하였다.
매튜헨리/옥스퍼드
●슬픈 추억(신명기 1:19-46)
모세는 여기에서 그들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바로 가나안 경계에서 그 땅을 정복할 영광에서 그리고 그 땅을 소유할 기쁨에서 그들에게 일어난 숙명적인 회전과 곧 당시의 전 세대는 광야로 되돌아 나아가게 되었고 그들의 육체는 모두 거기에 쓸어진 장장한 경험담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기억해 둘 만한 회고담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민수기 13장과 14장에서 읽긴 하지만 거기에 언급되지 아니한 몇 가지 상항이 여기에는 나타나 있다.
Ⅰ. 그는 그들에게 호렙산에서 발행하여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가데스바네아에까지 행진한 사실을 상기시킨다(19절).
- 큰 광야를 지나 그들을 이끌어 주시고 무서운 황야로 둘러싸인 여러 가지 불운에서 그들을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선하심을 그들에게 의식시키기 위하여 그렇게 했다. 우리가 당한 위험을 상기할 때 우리는 거기서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을 감사하게 된다.
👀 모세가 말하고자 한 광야는 바란 광야이지만, 지금 모세는 광야 생활을 회상하고 있다는 점과 ‘모든'이란 말을 ‘광야' 앞에 기록한 점을 통해 살펴볼 때 여기서 ‘크고 두려운 광야' 란 단순히 호렙에서 가데스 바네아로 가기 위하여 거쳐 간 ‘바란 광야' 만을 지칭한다기보다는 40년 간 지내온 광야를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광야는 단지 한 번 일시적으로 지나쳐 온 광야가 아니라 사십년 간 내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황하면서 죽음을 맛보고 지나온 곳이었기 때문에 모세가 광야를 다시 회고하면서 소개할 때에는 ‘크고 두려운'이란 형용사를 붙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광야를 단지 구경만 한 것이 아니라 오늘까지 장막을 치고 걷으면서 광야를 직접 걸어서 지나왔기 때문에 모세의 표현에 ‘너희가 본', 곧 경험적 뉘앙스를 되살려주는 표현을 사용한다.
- 그들의 우둔함을 재 천명하기 위해서이다. 즉 그들은 불만을 품고 그들이 이러한 역행적인 행동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몰수당하고 그것을 기대할 이유를 상실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를 지나 애굽으로 되돌아 가려고 했던 것이다.
Ⅱ. 그는 그들이 그 때에 가나안을 위해 싸우는 것이 얼마나 마땅한 일이었든가를 보여준다(20,21절).
👀 20절, ‘주신’ 아모리 산지,
-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기업으로 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미래에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순종과 믿음이 요구되었다.
21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 한글 개역 성경이 번역을 생각했지만 본문에는 ‘보다'는 뜻의 표현이 8절에 이어 2번째로 나온다. 8절에서는 모세가 호렙산을 떠나기 전에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땅을 볼 것을 이스라엘 백성둘에게 촉구했던 반면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직접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눈으로 확인시켜 주려는 모세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위 20절의 ‘주신'은 분사형으로 사용되어 미래에 주어질 것을 나타낸 반면 본문에서는 어떤 얼어 이미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완료형으로 사용되어 아직 가나안 땅의 정복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 땅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올라가서 얻으라."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바로 자신들의 문지방에 이르러 섰을 때 행복한 안착을 향한 길이 얼마나 가까웠든가를 보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죄가 더욱 크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았으나 그 때도 모자랐다" (막 12:34). 거기에 당도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위선자들의 영원한 패망을 더욱 슬프게 만들 것이다(막 12:34).
👀 두 개의 명령
1.올라가서,
2.얻으라
- 두 개의 명령형 동사가 본문 서두에 나온다. 모세가 이처럼 확신에 차 거듭하여 명령할 수 있었던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었다. 과거 이스라엘 조상들과 맺은 언약대로 하나님은 그 땅을 주실 것인데, 땅을 주시겠다는 이 약속이 이루어질 것은 이미 후손이 번성할 것이라는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신(10절 설명 참조)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 성취로 보증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불의한 약탈 행위가 아닌가?
- 아니다. 레18:27,28에서 볼 수 있듯이 거민들의 가증한 행위로 인해 그 땅이 거민들을 토해낼 때에 이스라엘 백성둘이 거민들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그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창 15:16).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얻는 기업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진 기업일 뿐만 아니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얻는 것이었기 때문에 의로운 기업이었다.
이스라엘은 어떤 태도로 정복해 나아가야 하는가?
→ ‘주저하지' → ‘용기를 잃다', ‘낙담하다', ‘당황하다’
- 이는 모두 가나안의 강한 거민과 견고한 성읍들을 보고(민13:28) 겁을 먹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다. 본문은 단순히 한글 개역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머뭇거리거나 뒤로 물러서지 말라는 뜻만을 전하는 것어 아니라 근본적으로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신 약속을(8, 21절 설명 참조)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라는 독려의 말씀이다.
Ⅲ. 그는 정탐하러 보낸 자들에 대하여 책망을 하는데 민수기에는 이 이야기가 나타나 있지 않다. 거기에는(민 13:1, 2) 여호와께서 정탐군을 보내라고 지시하셨으나 여기에서는 우리가 보는 바 그 백성들이 먼저 그것을 원했고 그 다음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시어 그들의 의사에 맡긴 것으로 되어있다. "너희가 '우리가 사람을 우리 앞서 보내자'라고 말했다" (22절). 모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20,21절).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심중에 그 말씀을 의지할 뜻이 없었다. 인간의 책략이란 하나님의 지혜보다는 사람을 더욱 의지한다. 그래서 그들은 태양 빛으로 나아가는데 등불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마치 그들은 자기들 앞서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으로는 충분하지 못한 것처럼 그들 앞서 정탐군들을 보내려 했던 것이다.
👀 민13:2에는 하나님께서 정탐꾼을 보내라고 명령하시는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민수기의 기록은 하나님의 자의적인 의지의 표명이라기보다는 백성의 불신의 행동을 허락하시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민수기에서는 백성들의 불신앙적인 요청에 대한 언급은 생략한 채 단순히 그 결과만을 기록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본절의 기록은 민수기 13장의 배경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를 다음 문장에 나오는 동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 내부에서 이미 결정된 사항을 가지고 와서 모세의 동의를 얻어내려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고 지혜를 구하려는 태도와는 정반대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우리 우리 앞서 보내어’
- ‘우리가 보냅시다' 란 뜻. (1인칭 권유형) — 이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 내부에서 이미 결정된 사항을 가지고 와서 모세의 동의를 얻어내려고 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고 지혜를 구하려는 태도와는 정반대의 모습인 것이다.
- 이 표현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작 쳐다보고 뒤따라야 했던 인도자 하나님을 순간 잃어버리고 사람들을 먼저 쳐다보는 불신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래서 모세는 이러한 그들의 태도와는 반대로 너희 앞에 행하시는 (30,33절) 하나님이 지금까지 인도하셨고 또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면서 하나님께 돌아설 것을 촉구하였다.
- 하지만 그들은 결국 자기들 앞서 보낸 열두 정탐꾼들 가운데 열 사람의 불신앙적인 견해를 신뢰하고 지금까지 자기돌을 앞서 행하시며 인도하신 하나님을 불신하는 어리석은 태도를 버러지 못하였다.
Ⅳ. 그는 정탐하라고 보낸 그 정탐군들이 가지고 돌아온 그 땅의 풍성한 열매에 관한 보고를 다시 들려준다(24,25절).
👀 모세는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모압 평지에 머물고 있는 출애굽 제 2세대들에게 사십년 전에 가데스 바네아에서 있었던 사건을 전해 주면서 민수기 13장에 나온 내용 전부가 아니라 강조하고 싶은 내용만을 선택적으로 취하여 들려주고 있다. 지금 모세의 말을 듣고 있는 자들은 과거 범죄한 출애굽 제 1세대가 아니라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제 2세대였기 때문에, 모세는 정탐꾼의 사건을 이야기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심으로 그들이 얻게 될 약속의 땅의 복됨을 제일 앞세워 강조한다.
10명의 정탐꾼들을 비롯하여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출애굽 제 1세대 사람들은 그 사건과 관련된 죄악으로 인해 사십년 간 광야를 헤매면서 다 죽었지만, 그 세대조차도 약속의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라는 사실만큼은 인정했다는 사실을 모세는 지금의 이스라엘 신세대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언약하신 그 축복은 실로 귀하고 탐스러운 것이었다. 불신자들이 판단해볼 때도 그러했다. 즉 아무도 그 거룩한 땅을 본 사람이 없어도 그들은 그 땅의 풍성함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정복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라고 그 난점을 보고했다(28절).
👀 28절 본문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을 잃어버리게 되며, 하나님의 약속하신 기업을 잃어버린다는 것온 결국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모습 또한 앞절에서 보았듯이 당신의 백성에 대하여 한없이 자비로우시며 그들의 인생의 인도자 되신 하나님의 참된 속성을 왜곡되게 이해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28절,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로 낙심케 하여' → 그들의 믿음 없음
- 낙심케 하여 .. → 두려움과 공포로 인하여 싸울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를 뜻하는 말로서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믿음이 없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미 홍해 사건을 통하여 열방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셨으며(출15:13-16) 아말렉과의 싸움에서도(출 17:8-16) 싸움은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분명하게 알리셨다. 그런데 이들은 지금 여호와께서 함께하시기만 하면 오히려 천하 만민이 자신들을 무서워하고 그 마음이 녹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형제가 형제의 마옴을 녹아 내리게 한다고 하는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말을 전함으로써 결국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모두 불신앙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재촉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본문은 믿음의 붕괴가 상호 상승 작용을 일으키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비참한 실상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싸움으로 그들을 공격한다는 생각은 "그 백성이 우리보다 장대하기 때문에" 쓸데 없는 생각인양, 그리고 포위 8격하는 것은 백성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또 아마도 이것은 하늘까지 닫는 탑을 쌓겠다는 바벨탑을 세운자들 처럼(창 11:4)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비난할 의도를 가지고 그들의 악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과장법으로서 "그들의 도성이 하늘까지" 닿기 때문에 쓸데 없는 생각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 땅의 도성들이 하늘까지 성벽이 쌓여 있긴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방패로 둘러 쌓인 것과 같이 하나님의 호의로 싸여 있을 뿐이다.
👀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이는 참으로 두려운 싸움 상대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모세도 9:1에서 가나안 사람들의 군사력에 대하여 동일한 묘사를 한다. 하지만 보이는 현상적인 측면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과 그것에 대하여 좌절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며, 이는 오직 믿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소유한 자는 비록 현상적으로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맹렬한 불과 같이 그들을 파하실 능력의 하나님만을(9:3) 믿음의 눈으로 바라봄으로 대적을 올려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려다보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신앙 속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땅에서 취할 수 있는 물리적인 힘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하늘에 이를 정도로 높이 솟은 경고한 성들을 보고 질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의 시야에는 아낙 자손의 거구의 모습과 같이 육체적인 모습만이 보일 뿐이다.
Ⅴ. 그는 그들의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당한 고통이 어떠했으며, 그들의 형제들이 그들의 용기를 저하시키는 많은 말을 하고 있을 때 모세 자신은 그들을 격려시키려고 애썼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때에 "내가 너희에게 무서워 말라고 말했다" (29절). 모세는 그들의 단을 진정시키고 그들의 얼굴을 가나안으로 향하도록 종용했음을 충분히 암시했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임재해 계시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확실히 "그들을 위해 싸우신다 것" 을 확신시켰다(30절).
👀 모세는 출애굽 과정에서 ‘그들 앞에 행하사'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셨던 여호와의 행적을 상기시킨다. 그때도 이스라엘 앞에서 행하시며 인도하셨던 그 여호와께서 지금도 계속 변함없이 이스라엘 앞에서 행하시며 인도하고 계심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때 보여 주셨던 강한 능력으로 이제부터 수행하여야 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싸움 역시 승리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모리 족속과 그 성읍을 앞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에서 오른손의 권능으로 애굽 군대를 엎으시고 그 백성을 구원하셨던 그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다시 한번 그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자고 독려하였던 것. 이제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직접 나서서 싸울 것이란 사실을 강조한다. 홍해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제 여기서도 하나님에 의해 놀라운 승리의 구원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
비록 불신앙으로 인하여 출애굽 제 1세대는 자신들을 위하여 아모리 족속과 싸우시는 여호와의 구원 역사를 체험하지 못했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은 결국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 일을 이루셨고(수10:1-14), 성경 기자는 이에 대해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라고 선포했다(수10:14).
그리고 그들의 원수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더 크다는 증거를 위해 그는 애굽에 있을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행하신 일을 언급한다. 애굽에서 그들의 원수는 무엇이나 그들보다 우세한 입장에 있었지만 그들은 낮아졌고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30절).
그리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과 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친절을 입증하기 위해 그는 그들에게 "광야에 있을 때를" 상기시킨다(31,33절). 그 광야를 지나 올 때 그들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그들의 움직임과 휴식을 이끄심)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형안으로 인도하심을 받으며 부모님의 품안에 안겨 있는 어린 아이에만 볼 수 있는 그러한 돌보심과 부드러우심으로 이끄심을 받았던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온 여정 자체를 감싸고 보호해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다닌 어떠한 길에서도 예외 없이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안아서 보호하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돌보시는 자상한 손이 그들과 함께했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반역과 거부와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이끌고 이 장소까지 ‘오게 하기까지' 하나님의 인도가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에 이러한 하나님을 불신할 여지가 있겠는가?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눈에 보이는 증거를 보고도 "시험의 날에 그들이 마음이 완악하였으니" 세상에서 이들이야말로 가장 배은망덕한 백성이 아니었겠는가?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양육하는 아비가 젖먹는 아이를 품듯" (민 11:12) 이 백성을 이끝 책임을 주신 것을 한 번 불평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이끄시는 이가 하나님이란 것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견디시고 그들의 소행을 참으신다" 는 말에서 언급되어 있다(행 13:18).
Ⅵ. 그는 이 기회에 그들이 지은 죄를 그들에게 책임 지운다.
그가 대상으로 하여 말하고 있는 그들이 비록 새로난 세대라 할지라도 그는 그 죄를 그들에게 지운다. "너희는 거역하고 원망하였도다." 왜냐하면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 때에 생존해 있었고 비록 나이는 20세 전이었어도 아마 그 반역에 가담했을지도 모르며 그 나머지는 그 아비들의 부덕한 성품을 상속 받았고 그들을 위해 분개했기 때문이다. 모세의 비난 내용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불순종과 거역.
"너희가 올라가기를 즐겨 아니하고 거역하여" (26절).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배척은 실로 그의 권위에 대한 반역이다.
👀 1. 자발적 모습이 없는 이스라엘
-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려는 자발적인 모습이 전혀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저 낮은 지역에서 높은 지역으로 올라가는 것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을 적극적으로 차지하려는 의지 자체를 거부한 것임을 알 수 있다.“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26).
- 그 땅의 산물이 좋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에 대한 책임은 거부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의 선례를 보여 주는 것과 같다.
2.여호와의 명을 거역함
- ‘거역함' = 이 동사는 거의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반항과 배반의 행동을 나타낼 때 쓰이는 단어이며 ‘~을 향해 불순종(혹은 반역)을 보이다' 란 의미를 나타내는 말이다. 즉 단순히 말을 듣지 않는 행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불신앙과 반역의 행위를 나타내는 것이다(민 20:24; 27:14)
- 여호와의 명 = 21절의 내용.
이스라엘의 합당한 태도는 무엇이었는가?
-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과연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스스로 약속하신 그대로 이스라엘을 번성케 하신 분이셨다(10절 설명 참조). 즉 자신이 약속하신 바를 틀림없이 성취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약속 그 가운데서도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약속을(19절) 굳게 믿고 그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을 순종해야 했던 것이다.
2.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비위에 거슬리는 반응.
👀 ‘너희의 장막' = 결국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막과는 정반대의 개념. 인간의 그릇되고 간교한 판단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멀리하고 뿐만 아니라 그 뜻에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대변하는 말.
그들은 아주 비열하게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고로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27절)***라고 말하고 있다. 이보다 더 하나님에 대하여 불합리하고 불진실하고 더 모욕적인 언사가 있을 수 있겠는가?
👀 ‘미워하시는’ → 미움(시느아)이란 단어는 단순히 마음 속에서 남모르게 일어나는 미움의 감정만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적대 행위를 유발시키는 보다 적극적인 미움의 상태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미워하시는 고로’는 계획적으로 하나님이 자신들을 곤경에 빠뜨리고 멸망시키려고 애굽에서 인도해 냈다라고 하는 하나님에 대한 심한 혐오와 원망이 섞인 말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자기들 앞에 놓인 가나안 땅 정복의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와 하나님의 속성까지 왜곡하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것은 당신의 자녀로 택한 자들에 대한 온전한 사랑 때문이었다(4:37; 7:8; 10:15). 그런데 오히려 그들은 눈앞에 닥친 시련이 하나님의 미움에 의한 것이라고 함으로써 사실을 완전히 왜곡해 버린 것이다.
어째서 이런 마음 상태가 나오는가?
- 이러한 배은망덕한 모습은 약속의 땅이라는 물질적인 목표만 쉽게 획득하려는 인간의 탐욕이 그 마음 바탕에서 작용한 결과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에게 어떤 내용으로 주어지면 무엇을 요구하는가?
-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언약을 통해 땅과 후손의 축복을 굳게 약속하셨다. 하지만 그 언약은 축복의 약속으로만 가득 차 있는 축복 선집이 아니라 그 백성의 책임 있는 삶을 요구하는 믿음과 실천의 규례였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약속된 축복이 실현되기까지 믿음과 인내로 그 언약을 성설히 지키며 그 규례들을 철저허 준행해야 했던 것이다.
- 하나님은 또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약속하셨다(요3:16; 롬5:21). 그러나 이 언약이 완전히 성취되기까지 성도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식에 따라 성실하게 나그네 인생길을 걸어가야 한다. 때로 그 길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인내함으로써 믿음을 지켜 의와 생명의 면류관을 얻어야 할 것이다(딤후4:8; 약 1:12).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망각한 자가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어떻게 왜곡하는가?
- 그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강한 손에 의해 일어났음을 망각한다. 또한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는 생명을 보는 눈을 잃어버리고 파멸을 보며 두려워하게 된다.
3. 이 모든 밑바탕에는 믿지 않는 심정이 있다.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32절).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너희의 불순종과 그의 능력과 선하심에 대한 불신은 모두 그의 말씀을 믿지 않음에서 나온 것이다. 영원한 진리의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을 때 우리에게는 슬픔이 찾아온다.
👀 ‘믿지' → 이 ‘믿음'은 곧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믿음이며, 생명을 구원해 주는 믿음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실제적으로 아모리 족속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는 믿음이었으며, 약속의 땅 가나안을 소유하게 하는 믿음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은 여호와를 믿지 않았다.
한글 개역 성경은 본문의 ‘믿지'를 과거형으로 번역했지만 히브리어에서 분사는 현재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모세는 분사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계속하여 믿어 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 가나안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에도 그분을 믿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매일 아침마다 정리해주는 찬미자매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