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5월 30일 월요일 묵상구절 신12:1-28 하나님께서 택하신 예배 장소

축복둥둥 2022. 5. 30. 11:40

 

맥체인성경읽기

신명기 3, 시편 85, 이사야 31, 요한계시록 1

묵상구절

12:1 "여호와 네 조상의 하나님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사는 모든 날 동안 너희가 지켜 행하여야 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다.

12:2 너희는 높은 산이든지 언덕 위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 너희가 쫓아내야 할 민족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는 모든 장소를 완전히 허물고,

12:3 그들의 제단들을 무너뜨리며 그들의 기둥 우상을 부수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불에 태우며 그들의 새긴 신상을 깨뜨려서 그들의 이름을 완전히 없애라.

12:4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는 그렇게 하지 말고,

12:5 오히려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지파 가운데 그분의 이름을 두고 그분의 거처를 삼으려고 택하신 그곳으로 찾아 나아가

12:6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 제물과 너희 십일조와 너희 손의 들어 바치는 제물과 너희 서원 제물과 너희 자원 제물과 너희 소나 양의 처음 난 것을 그곳에 가져와 드려야 한다.

12:7 또 너희는 그곳, 곧 여호와 너희 하나님 앞에서 먹으며 여호와 네 하나님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에 복 주신 것을 너와 네 가족이 함께 즐거워하여라.

12:8 우리가 오늘 여기서 한 것처럼 각기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하지 마라.

12:9 너희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안식과 유업에 아직 들어가지 못하였으나,

12:10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유업으로 주실 땅에 정착하게 될 것이며, 또 그분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들을 물리치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셔서 너희가 안전하게 살 것이다.

12:11 그때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모든 것, 곧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 제물과 너희 십일조와 너희 손의 들어 바치는 제물과 여호와께 바치기로 서원한 모든 아름다운 서원 제물을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려고 선택하신 그곳으로 가지고 가서 드려라.

12:12 너희는 너희 아들들과 딸들과 남종들과 여종들과, 너희 성 안에 있으나 너희와 함께 할 몫이나 유업이 없는 레위 사람과 함께 여호와 너희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여라.

12:13 너는 조심하여 네가 보는 아무 데서나 네 번제를 드리지 말고

12:14 오직 너는 너희 한 지파 가운데 여호와께서 택하신 그곳에서 네 번제를 드리며,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하여라.

12:15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복을 따라서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네 모든 성문 안에서 짐승을 잡아, 부정한 사람이든지 정한 사람이든지 노루나 사슴 고기를 먹듯이 고기를 먹을 것이나

12:16 피는 먹지 말고 물처럼 땅에 쏟아 버려라.

12:17 네가 십일조로 바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소와 양의 처음 난 것과 서원하여 드린 모든 서원 제물과 네 손의 들어 바친 제물을 네 성문 안에서 먹지 말고

12:18 너는 오직 여호와 네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곳, 곧 여호와 네 하나님 앞에서 네 아들과 딸과 남종과 여종과 네 성문 안에 있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어라. 그리고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로 여호와 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여라.

12:19 너는 네 땅에서 사는 동안 레위인을 저버리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12:20 여호와 네 하나님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네 땅의 경계를 넓혀 주실 때에, 네 마음이 고기를 먹고 싶어서 '내가 고기를 먹고 싶다.' 하면, 네 마음이 원하는 대로 네가 고기를 먹을 수 있으나

12:21 여호와 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이 네가 있는 곳에서 멀거든,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소와 양을 잡아서 네 마음이 원하는 대로 다 네 성문 안에서 먹어라.

12:22 부정한 사람이든지 정한 사람이든지, 모두 노루와 사슴을 먹듯이 그것을 먹을 수 있으나

12:23 어떤 일이 있어도 피는 먹지 마라. 피는 곧 생명이니,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지 마라.

12:24 너는 그것을 먹지 말고 물처럼 땅에 쏟아 버려라.

12:25 너는 피를 먹지 마라. 네가 이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여야 너와 네 후손이 잘될 것이다.

12:26 그러나 네가 바칠 거룩한 제물이나 서원 제물만은 여호와께서 택하신 그곳으로 가지고 가라.

12:27 네가 고기와 피를 여호와 네 하나님의 제단에 번제로 드릴 때, 제물의 피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제단에 붓고 고기는 네가 먹어라.

12:28 내가 너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는 잘 듣고 지켜라. 네가 여호와 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하고 바른 일을 함으로써 너와 네 후손이 영원히 잘될 것이다."

매튜헨리/옥스퍼드

●우상의 유물을 버리라(신명기 12:1-4)

 

💡 12-26장까지는 선민이 지켜야 할 각 율법 조항들을 종합 재정리하고 있는 모세의 고벌 설교 제 2부 후반부. 이러한 모세의 고별 설교 제 2부 후반부에서는 선민이 지켜야 할 각종 율법들의 세부 조항을 제시함.

12:1-16:17은 주로 신앙 생활 관련 규례를 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개시 부분으로 가나안 우상 타파와 단일 중앙 성소에서의 제사 명령을 기록.

→ 즉 가나안 사람들이 숭배하던 신당을 파괴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한 곳에서만 하나님께 제사하라는 것.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단일 중앙 성소 제사 명령을 주신 것은

  •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나님께 대한 순수 신앙을 보존하게 하는 데 그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습니다.
  • 만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단일 중앙 성소가 아닌 아무 곳에서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용하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도 가나안 족속들의 풍습을 쫓아 자신들이 임의로 제사 장소와 제사 방식을 정하여 제사함으로써 순수한 여호와 신앙을 보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한편 단일 중앙 성소 제사는 순수한 여호와 신앙을 보존하는 것 외에도 이스라엘 12지파를 하나로 결속시키고 공동체 외식을 갖게 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매개가 되기도 했는데 이러한 단일 중앙 성소 제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오직 자기 피로 교회를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예표적으로 보여 줌과 아울러 오늘날 하나님의 성소인 교회는 성도들을 하나로 결속시키고 성도들의 신앙을 성숙시키는 신앙의 장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오직 한 분 뿐이라는 위대한 근원적인 진리에서 하나님은 예배를 받아야 하며 그 분만이 받아야 하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 앞에 다른 신을 세워서는 안 된다는 근본적인 율법들이 나온다. 즉 이것이 첫째 계명이요, 둘째 계명은 그것을 보호하는 수비이며 그것을 두르고 있는 울타리이다.

거짓 신들로 향하는 반역을 막기 위하여 거짓 신들을 예배하는 그런 방법이나 태도로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금지 당하고 있고, 또 우리가 예배의 타당한 대상에 집착하기 위하여 제정된 예배의 규정을 이행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모세는 제 2계명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부연하고 있다.

 

 💡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가나안 땅에서 여호와의 성민으로서 거룩함과 정결함을 지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는 마땅히 여호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해야 했다.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과 구별된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도 인간의 규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레19:2; 롬12:1,2)

 

본 장과 다음에 나오는 네 장에 있는 내용은 대부분이 이 문제에 관련된 것이다. "그들이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 는 이러하다.

  1. 그들이 가나안의 주인이 된 그들의 휴식과 번영의 날에 지킬 것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종교가 우리의 교역의 세월에서만 우리의 일이 된다든가 은밀한 장소에서의 우리의 유흥으로 또 괴로움에서 위로가 되기 위해서만 제정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니 우리가 좋은 땅을 소유하게 될 때 더욱이 광야에서는 물론, 가나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고, 우리가 어릴 때는 물론 장성하여서도, 또 우리가 그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을 때는 물론 일로 분주할 때도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지켜야 한다.

  1.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야 할 것들이다. 우리가 여기서 시련의 상태에 있는 동안 순종을 계속하고 마지막까지 결코 우리의 의무를 버리거나 선한 일에 지쳐서는 안 된다.

Ⅰ. 그들은 여기서 가나안들이 자기들의 우상의 신으로 섬기던 모든 것들을 폐지하고 근절해야 한다(2,3절).

여기에는 우상 전당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것을 혹자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세운 성막은 종교적 사용을 위해 만들어진 최초의 주거였고 그것으로부터 전당들이 그들의 기원을 가지게 되었다라는 견해를 가짐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사용되어 오고 이제 파괴될 장소들은 그들의 예배를 위해 높은 산이나 작은 산들 위에(마치 높은 지대가 그들의 예배를 높이 들어 올리기에 유익한 것처럼) 그리고 유쾌함이나 장엄함을 주기 때문에 푸른 나무대로 터를 잡고 있었다. 마음을 안일하게 하고 경건케 하며 또 움추리게 하고 차분히 가라앉게 하는 곳은 어디든지 예배 장소에 합당한 곳으로 생각되었다. (푸른 나무—고대 근동에는 산과 마찬가지로 나무에도 신성함이 깃들어 있다는 사상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특별히 키가 크고 잎이 울창한 나무들은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기에 우상 숭배 예식을 행하는 장소로 선택되는 일이 많았다.)

엄숙하게 그늘진 곳과 숲이 적막함은 오늘날도 명상을 위해 은둔하는 자들에게 애호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은둔이 우상 숭배하는 이방인들에게 준 결과는 그들이 예배하는 일을 빛 가운데 내어 놓을 수 없는 어둠의 일을 은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은 원주민에 의하여 그들의 신으로 섬길 때 사용된 제단과 주상들과 신상들과 함께 모두 파괴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모든 이름은 망각에 묻혀야 하고 존경으로 기억되지 않을 뿐 아니라 전혀 기억되지 않도록 해야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의 사실들을 고려해야 했다.

1. 그들의 땅의 명성.

이와 같이 더러워진 땅을 성소로 불리지 않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이 수치로 아는 물건들처럼 이 모든 분노의 더미들은 모두 제거되게 하라.

2. 그들의 종교의 안전.

사려 분별이 없는 불경건한 사람들이, 특히 퇴폐한 시대에 있어서 그것들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하나도 남기지 않게 하라. 이러한 유해의 본거지들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물건들처럼 멸절되게 하라. 그는 이러한 지시를 하고 예배에 관계되는 규례를 말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선한 것에 대한 확실한 접촉이 있을 수 있기 전에 악한 것에 대한 혐오가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롬 12:9).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과 장소 위에 세워져야 하되 마귀의 나라를 멸망시킨 폐허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들은 공존할 수 없고 그리스도와 벨리알 사이에는 어떠한 공통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인간이 자의적으로 풍요를 기원하여 세운 돌상을 깨뜨리라는 것은 풍요의 원천이 인간이 세운 거짓된 주상에 있지 않고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며 늦은 비와 어른 비를 적절하게 내려주시고 바람과 햇빛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만 달려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이라는 것이다.

또한 가나안 땅의 거민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들을 돌로 새기거나 나무로 깎아 만들어서 숭배했는데 사람이 땔감으로 사용하는 나무나 생명이 없는 돌로 신상을 만들어 섬기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신랄하게 비웃으신다(사 44:13-20).

그 이름을 그곳에서 멸하라

이름=어떤 존재의 속성을 나타내 주는 것. → 이 명령은 듣지도 못하고(사44:9,18), 지식도 없고 생각도 없으며(사44:19), 말을 하지도 사람에게 화나 복을 내리지도 못하며(렘10:5), 사람을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우상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멸절시켜 버리라는 명령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인들이 2,3절에서처럼 그들의 우상들을 섬기는 방식들과 같이 자신들의 임의대로 여호와를 섬겨서는 안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르는 ‘엘로힘’ 하나님은 결코 가나안의 신들과 같지 않다. 이스라엘과 인격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엘로힘’이시다.

 

Ⅱ. 그들은 우상 숭배자들의 제식과 관례들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로 보충시켜서는 안 된다. 아니, 그것을 미화하고 개선한다는 구실은 붙여서도 안 된다. "너희는 하나님 여호와에게는 그처럼 행하지 말라" (4절).

말하자면 "너희는 하나님께 높은 산이나 낮은 산들위에서 제물을 드리고 주상을 세우고 숲을 기르고 신상들을 세움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니, 너희는 사치스러운 공상을 너희의 예배에 끌어들여서는 안 되며 유쾌한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 그는 모든 신들 위에 계시며 다른 신들이 예배받는 것과 같이 예배받지 아니할 것이다."

●지정된 곳에서만 제사를(신명기 12:5-32)

 

💡 5절,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 하나님의 이름이 있게 될 성전은 가나안 우상을 섬기는 산당과는 달러 사람이 선택한 장 소가 아니라 주권자 하나님이 임의로 선택하시는 곳이 될 것이다.
  • 이처럼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소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기뻐하시는 대로 선택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은 사람이 어느 특정한 곳에 가두어 놓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거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 ‘이름을 둔다’ : 그 장소가 하나님의 것임을 확증하는 것임과 동시에 하나님은 가나안의 신과 같이 어느 장소에 매여 있는 신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곳에 주권적으로 임하실 수 있는 분임을 알려 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개개인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세심하게 살펴,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이름만 그 성막에 두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성막에 임재하실 것이다.

 

모세의 전 율법 중에서 여기 만큼 강하게 강조하고 마음 속에 뿌리박게 하는 특별한 교훈은 없다(내가 기억한대로).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모두 성막 뜰에 세워진 하나의 제단에 그들의 희생 제물을 모두 가져와서 거기서 그들의 모든 종교 의식을 이행하도록 해야했다. 도덕적 예배에 대해서는 지금과 같이 그들이 자기들의 여러 회당에서 예배드리듯이 그때도 의심할 바 없이 어느 곳에서든지 기도할 수 있었다. 이것을 행하라는 명령과 그 반대의 금지가 여기에서는 우리가 자녀들을 가르칠 때처럼 거듭거듭 되풀이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에는 쓸데없는 반복은 없다고 확신한다. 여기에서 이 모든 강조가 거듭되는 이유는

1. 우상 숭배와 미신,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유혹에 의하여 꾀임에 빠질 위험성으로 기울어지는 그 백성의 심중에 있는 이상스런 경향성 때문이다.

2. 이 임무의 수행은 그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임으로써 하나의 방법과 하나의 마음을 지속시킬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들 예배에 부패한 관습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그들 사이에 통일성과 형제의 사랑을 보존하는 데 크게 유용하기 때문이다.

  1. 이 임무가 가지고 있는 중요성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라" (딤전 2:5). 우리가 함께 발견하는 이 두 가지 큰 진리에 대한 그들의 신앙의 증거를 가지고 한 장소를 굳게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신성의 통일성의 개념을 지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비록 그들이 확실하게 식별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과 그와 교통하는 길은 오직 한 길 즉 메시야 안에서 그리고 메시야에 의해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이 장의 훈시를 타당한 몇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자.

Ⅰ. 여기에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나안에 "안정하여"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안식을 주사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 하나님은 그들의 단일성의 중심이 되게 하시고 그들의 모든 제물을 그리로 가져가게 하실 어떤 장소를 택하실 것이 약속되어 있다(10,11절).

 

💡 ‘안식’

: 참된 안식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

또한 10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쉼을 주신다는 의미는 궁극적으로 당신의 백성에게 베푸실 영원한 안식을 예표하는 것이다.

본문의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했을 때 일차적으로 이루어졌고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 위에 올랐을 때에 더욱 진전된 형태로 성취되었으나(왕상5:4) 결국 완전한 안식은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이 세상에서 참된 안식을 저해하는 모든 악의 세력들이 멸절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주위의 모든 대적들과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안전하게 이스라엘을 보호하셔서 평안과 안식을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다.

 

다음의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

  1. 만일 그들이 한 장소에 얽매이어야 된다면, 그들은 그 장소에 관하여 명백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복음 아래 계신 그리스도께서 일정한 장소를 택하시어 로마 제국이 자부했던 그러한 권세의 자리를 만들려고 의도했다면, 우리는 그 지정된 장소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되었을 것이다.
  2. 하나님은 그 부족들이 자기들 지방 가운데 그것을 두게 함으로써 오는 세속적인 이득을 얻으려고 서로 다투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장소의 선택권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세주의 내림을 의도하시고 거룩한 규례의 제정을 하시듯이 그 선택권은 자기 자신이 가지셨다.
  3. 그는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기 위해(11:29) 그리심산과 에발산을 지적하신 때와 같이 당장에 그 장소를 지적하시지 아니하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오는 그 이상의 지시와 모세가 떠난 후 신의 지도를 그들이 기대하게 되기 위하여 그때까지 그 일 행하심을 보류해 두신다. 하나님이 선택할 장소는 당신의 이름을 두시고 즉 당신의 것으로 불리어지는 곳, 그의 영광이 머무는 곳, 자신을 자기 백성에게 현현하시고 사람들이 자기들 이름으로 하는 것과 같이 자신을 알게 할 수 있는곳, 당신의 이름이 찬양을 받고 높이 들리는 그런 장소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가 법증을 지키시고 당신을 존경으로 찾는 자들에 의하여 찾아지는 그곳이 그의 거처가 될 것이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였고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시는 곳이었으며 그의 거처였다. 그 안에는 율법판이 들어 있었다. 즉 "그의 입에서 나오는 율법" 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들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나오는 은총을 받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법궤를 두실 장소를 제일 먼저 선택하신 곳이 실로였다. 그러나 그후 그곳은 죄를 지음으로 인하여 그 영광을 잃고 말았다. 우리는 길르앗 - 여아림과 다른 장소에서 법궤를 보게 된다. 그러나 마침내 다윗 때에 그것은 예루살렘에 안착하였고 하나님은 다른 어떤 장소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보다 더 명백히 솔로몬의 성전에 대하여 "이 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전을 삼았다" (대하 7:12)라고 말씀하셨다(대하 6:5 과 비교해 보라). 이제 복음 아래서 우리는 황금을 신성하게 하는 성전도 없고 예물을 신성하게 하는 제단도 없다. 다만 우리에게는 오직 그리스도 뿐이다. 예배의 장소에 관하여 예언자들은 영적인 "분향에 드려지는 곳은 어디나" (말 1:11) - 우리의 구주는 이 산이나 예루살렘도 아니고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참된 예배자들은 영접되리라고 선언하셨다(요 4:23).

Ⅱ. 그들은 모든 그들의 번제와 희생 제물을 하나님이 택하실 이 장소로 가져오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6절 그리고 다시 11절).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것을 그리로 가져오라." 그리고 "그 곳에서 너는 번제를 드리고" (14절), 그리고 "그 고기와 피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에 드릴 것이요" (27절).

 

 💡 5절에서 설명했듯이 모세 당시에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성소의 위치는 자주 변경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 생활을 할 때는 반드시 한 장소를 택하여야 했다. 그 장소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이 있었던 예루살렘의 모리아산이었고(대상 22:1; 대하 3:1) 그곳에 솔로몬은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했다(대하 3:1,2).

하나님의 성소 선정은 아무데나 임의로 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와 절대적인 의지로 세심히 살피어 택하신 결과이다. 또한 이스라엘 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실 한 곳으로 모든 제물을 가져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며,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지명하여 주신 것들이어야 한다.

이는 예배드리는 자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자의적으로 선택해서 예배드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교훈한다. 과거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께 분향하다 여호와의 저주로 죽은 사건(레10:1,2) 은 여호와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다른 제물을 가지고 여호와께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크나큰 죄악이 되는지를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여기서 그들의 희생 제물이라고 불리는 화목제에 대해서 그들이 고기는 먹을 수 있으나 피는 제단에 부어야 했다. 여기에서 복종과 존경의 자연적인 표현으로서 그들에게 있는 어떤 본래적인 가치를 위한 것이 아니고 그들 자신을 위한 제물과 헌물은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시고 받지도 않으신다는 교훈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제물이 열납된 것은, 순전히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단에서 연유된 공로에 의하여서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어느 곳에 있든지 매일 기도와 찬양을 드려야 하며, 이것이 훨씬 더 요긴하고 가치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경건한 이스라엘인은 비록 그가 몇 달 동안 내내 제단에 제물을 바칠 기회를 못가졌을지라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와 교통하며 그로부터 자비를 얻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크리스챤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의 공로에서만 수납되기를 바라고 모든 우리의 영적 제물을 하나님께서 드려야 하는 의무를 예시했다(벧전 2:5).

Ⅲ. 그들은 하나님께 바치려는 제물은 제단으로 가져와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과 자기들이 교통함을 보여주는 표시로서 먹고 마시는 모든 식물도 율법이 지정한 장소로 가져와야 했다(6절).

그들의 "십일조와 손의 거제", 곧 그들의 처음난 열매, 그들의 서원에 그리고 "낙헌 예물" 과 첫 태생들, 또 그들 자신들이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 의하여 종교적 목적으로 쓰이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선택하실 그 장소로 가져와야 했다. 즉 그 왕국의 모든 지방에서 나오는 왕위의 모든 세입이 국고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손이 수고하는 모든 것에 복주심을 인하여 즐거워하라" (7월).

 

💡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즐거워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는 것은 결국 여호와로 인해 즐거워함으로 힘을 얻으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너희들의 손이 닿는 모든 것’에서 너희들의 손이 닿는 모든 것에서 마음을 다해 기뻐하라는 본문의 명령은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이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결코 두려워하거나 움츠러들지 말고 여호와를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살아가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몇 가지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행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행한 일은 그것이 우리 자신의 과실이 아니라면 우리의 이익이 된다는 사실이다" (12절).

하나님께 바치는 자들은 그 분 앞에서 즐거이 먹고 그들의 희생물로 기뻐하게 될 것이다. 즉 그는 우리와 더불어 먹고 우리는 그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우리는 우리의 지식과 신앙의 증가로 말미암아 신앙의 정열에 활기를 줌으로써 은혜스러운 관습과 결심을 확고히 함으로 우리 자신의 품성을 높이고 우리 자신의 마음을 높이고 향상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혼이 양육되는 것이다.

2. 하나님을 위한 일은 거룩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너희는 "먹고 즐거워" 할지니라(7절 그리고 다시 12절과 18절).

(1)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 해야 한다(12절). 즉 "눈물로 하나님의 제단을 가리우는" 자들보다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자들은 없다(말 2:13).

우리의 일터에서 노래부르는 것을 우리의 의무로 삼으실 우리가 섬기는 주님이 얼마나 선하신 분인가 생각하여 보라. 신앙의 봉사가 그들에게 하나의 고역이나 힘든 일이 되지 않고 즐거움이 되기 위하여 어린 아이들과 노비들도 그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해야 한다.

(2)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는 데서 발견한 그 기쁨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그들을 감동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그들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주심을 인하여 기뻐하여야 한다(7절). 종교적인 업무에서 그들이 가지는 어떤 위안을 그들의 평상의 일로도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영혼의 강건함을 얻어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충심과 기쁨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과 그의 선하심 안에서 가지는 이러한 경건한 기쁨은 우리가 영원히 기뻐할 것이며 공허하고 육욕적인 환락에서 오는 죄와 유혹을 막는 데 최선의 힘이 되고 세상의 비애에 대한 위로가 되는 것이다.

 

💡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레위인에 대한 적용을 특정 대상에게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친히 레위인들의 선물이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다른 모든 것을 더해 주시겠다는 말도 바로 복음을 들고 나아가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선물이 되어 주시겠다는 사실에 기초한 약속이다.

 

Ⅳ. 그들은 레위인들에게 친절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그들은 즐거워했는가? 레위인들은 그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그들과 함께 기뻐하지 않으면 안 된다(12절, 18절). 그리고 총괄적인 주의를 주고 있다. "너는 삼가서 네 땅에 거하는 동안에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지니라" (19절). 제사장들의 조력자들로 제단에 참여하는 레위인들이 있었다. 이들이 버림받아서는 안 된다. 즉 언제나 제사장들을 돕는 레위인들의 봉사가 따라야만 했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 외에 다른 제단이 세워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레위인들을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으로 그의 백성을 교훈하고 그들의 예배를 돕기 위하여 나라 안에 퍼져 있는 레위인들에 관한 말처럼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친절히 대접하라고 명령받은 것은 "성 중에 있는 레위인" 에 대한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성중에서 그들의 입으로 나오는 율법을 배울 수 있고 우리의 축제에서 우리를 옳게 인도하고 과도를 만류해 줄 레위인들을 우리 가까이 대하고 있는 것은 큰 자비이다. 그들에게 선한 교훈을 주고 선한 본보기를 보여주는 사역자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것이 그 백성의 의무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 즉 우리의 모든 의식이 완전히 대치되는 저 세상에 이르기까지는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한, 레위인들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12절) "레위인들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어" 경작이나 장사로 생계를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너희 재산으로 함께 생계를 유지케 하라. 그들은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내고 율법으로 정해진 헌물을 내야 한다. 그들은 그 밖에는 다른 생계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Ⅴ. 그들은 일반 고기는 먹을 수 있었으나 그들이 어디에 거주하든 그들 개인의 집에서는 그들이 제물로 드린 고기는 먹도록 허락되지 않았다.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께 드린 헌물이든 그들이 자기 집에서 먹어서는 안 되었다(13,17절). 헌물로 드려진 것이 아닌 것은 그들이 좋을 대로 잡아서 먹을 수 있었다(15절). 이 허락은 거듭 반복되어 있다(20-22절).

그들이 광야에 있는 동안은 희생물로 드려진 어떤 종류의 짐승의 고기든지 먹지 못했으나 성막문에서 도살된 것은 먹었고 그것의 일부분은 화목제로 하나님께 드려졌다(레 17:3, 4).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는 거기서는 그들이 성막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들은 가축들을 제단으로 끌어오지 아니하고도 자기들의 뜻에 따라 가축들을 잡아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허락은 아주 명백하게 반복되어 있다. 그 이유는 사탄이 사람들에게 시사된 대로 그들 개인의 집에서 헌물을 먹는 것을 금한 율법을 내세워 마치 사탄이 인류의 조상에게 한 것과 같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즐거움을 마치 주시기를 싫어하는 것처럼 하여 하나님의 몰인정을 허위로 만들어내는 기회를 가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즉 "너희는 네 마음에 즐기는 대로 먹어도 좋다." 너무 지나친 쾌락을 취하지 아니하고 또 너무 금욕되어 안정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적절히 절제하고 온건함으로 만족하는 것은 자연적이고 합당한 욕망인 것이다.

부정한 자는 거룩한 성물을 먹어서 안 되지만 보통 음식으로 사용되었을 때는 같은 종류의 고기라도 먹을 수 있었다. 정결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 사이의 구별은 엄격히 지켜져야 했고, 그 구별은 거룩한 잔치의 영예를 보존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일상적인 식사에 있어서는 그러한 구별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이 허락은 이중적인 어떤 제한이었다.

 

💡 우리는 13절 하나님의 명령과 같이 — ‘삼가서’ ‘너 자신의 보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는 하와가 탐심을 가지고 선악과를 바라봄으로써 범했던 것과 같은 죄를 경계하는 것이다. 또한 이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만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지식과 경험이 유한한 인간 자신이 진리의 척도가 되어 자신의 눈으로 판단하고 진리를 규정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주어지는 엄중한 경고이기도 하다.

또한 하나님께 제사드릴 수 있는 장소는 인간의 눈으로 선택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눈에 좋아 보어는 곳에 임재하는 분이 아니라 절대 주권을 행사하여 당신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곳에 임재하는 분이시다.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훌륭한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못난 자들을 택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며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이 인간의 기준과 다름을 보여 주는 것이다.

(14절)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1지파가 선택될 것이며, 그 지파의 땅 가운데 한 곳이 선택되어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져야 한다는 의미다. 후에 이스라엘에는 유일한 중앙 성전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졌다. 이곳은 12지파 가운데 유다 지파의 땅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성전을 세우기 위하여 선택하신 곳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 주는 유일한 중앙 성소가 있다. 그곳은 바 로 그리스도이시다(요10:30; 14:9,10), 따라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받으시지만 그리스도 밖에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려 하는 자는 오히려 이방 신을 섬기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이처럼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유일한 성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대체되었기 때문에(요2:19,21) 우리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리고 그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예배 드릴 수 있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요14:6).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자들은 모두 영적으로 도적이요 강도에 지나지 않는다(요 10:7,8).

 

1.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축복에 따라 먹어야 한다(15절).

우리는 우리의 재산 정도에 따라 알맞게 살고 우리가 가진 것 이상으로 재물을 쓰지 않는 것이 우리의 지혜인 동시에 의무라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가 가진 것 이상으로 소비해야 할 물건을 집안에 저장해 두는 것도 부당한 처사이지만, 소비하는 것은 더욱 부당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필경 남의 것을 탈취한것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은 더욱 부당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부당하게 절약된 것은 후에 가서 더 쉽게 탕진될 것이며, 부당하게 낭비되는 것은 아내와 자녀들이나 자기에게 돈을 빌려준 은인들에게 보답하기 보다는 자기가 저지른 악을 보상하는 데에 써버리리가 쉽기 때문이다.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지혜와 중용을 모색하며, 경성함과 단호한 결심으로 그것을 지켜나가야 하리라.

2. 그들은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16절과 다시 23절에서). "오직 그 피는 먹지 말라 너는 그것을 먹지 말고" (24절), "너는 피를 먹지 말라. 그러면 너는 복을 누리리라" (25절).

그들이 여호와께 속한 피를 여호와 앞 제단에 붓기 위해 가져올 수 없을 때 그들은 그것이 그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땅에도 붓지 않으면 안 되었다. 피는 생명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시는 것도 그에게 속한 일이요 보상으로 생명을 빼앗는 일도 그에게 속한 일임을 인정하기 위함이다. 패트릭 주교는 그들이 이와 같이 피 먹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당하는 이유는 고대 우상 숭배자들이 그들의 희생 제물의 피에 대하여 가졌던 미신 시상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의 악마들이 그것을 즐기고 그것을 먹음으로써 자기들의 그들과 교통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Ⅵ. 그들은 광야에서 가졌던 그들 자신의 부패한 관습이나 가나안 땅에 있던 그들의 선임자들의 부패한 관례들을 따르지 않도록 금지 당하고 있다.

1. 그들이 광야에서 가졌던 불합당한 관습과 그들의 현재의 불안정한 조건을 고려하여 묵과되었던 불합당한 관습을 계속 지켜서는 안 된다(8,9절).

"우리가 오늘날 여기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서는 하지 말지니라."

 

💡 이 말은 ‘우리가 오늘 여기까지 행하여 왔고 지금도 ~을 행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 이 표현은 본문에서 뿐만 아니라 삿17:6; 21:25에도 나온다. 이는 인간이 절대적인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기준인 율법을 기준 삼지 않고 자기의 눈에 옳은 것을 기준으로 하여 살아가는 삶의 앙식을 말한다. 결국 이는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을 떠나 죄악 가운데 있음을 알려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기 눈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삶의 양식은 죄로 인해 판단력을 잃어버린 인간의 보편적인 속성이기도 하다.
  • 고대 그리스의 궤변주의 (Sophist) 철학자인 프로타고라스 (Protagoras B.C. 500-430) 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 라고 하면서 진리의 기준이 각 개인의 판단에 달려 있다고 말했는데 오늘날의 사람들도 절대 진리를 믿지 않고 자기 눈에 좋으면 그것은 선(흥)이라 부르고 자기 눈에 좋지 않으면 그것은 악이라 부른다. 그리하여 영원한 진리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상대적이고 개인적인 가치만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성도는 이러한 인본주의적 가치관에 따르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이 진리의 기준이 되신다는 것을 믿고 그 기준대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거기서는 하지 말라고 촉구하신다.

이는 지금까지 행하여 왔던 모든 습성대로 결코 행하지 말고 지금부터는 하나님의 율법대로 행하라는 강력한 촉구이다.

 

모세보다 더 훌륭한 통치자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이 자기들의 통치자의 눈 아래서 서로 그렇게 밀집해서 야영을 하고 있는 지금보다도 이스라엘 백성에 더 좋은 질서와 훈련을 가질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없으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도 이미 많은 잘못과 불법적인 일이 그들 사이에 잠입해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하늘의 가나안에 이를때까지는 완전히 순수하고 올바른 사회를 보겠다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희생 제물과 경건한 예배, 공정한 법정과 민정을 가졌다. 또 "안식일에 땔 나무를" 모으는 사람들은 돌로 쳐 죽였던 것을 보면, 그들에게는 중요한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대단히 엄중한 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저들은 자주 옮겨 다녀야 했기 때문에 언제나 불안정했다.

(1) 그들은 아무도 율법이 요구하는 그대로 정확히 엄숙한 절기의 결례식을 지킨 자는 없었다.

(2) 그들 중 잘못을 범하기 쉬운 사람들은 진영이 이동하느라고 생기는 빈번한 재판의 중단을 기회로 악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러나(모세는 말한다)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여기서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불안정한 상태에 있을 때는 다른 때는 결코 인정되지 아니할 것이 용납되고 인정될 수 있다. 꼭 필요한 일들은 그 필연성이 계속되는 동안은 고려될 수 있다. 그러나 광야에서 있었던 일이 가나안에서도 있어서는 안 된다. 집이 세워지고 있는 동안에는 많은 먼지와 쓰레기가 깔려 있을 수 있지만 집이 완성되었을 때는 모두 말끔히 치우지 않으면 안 된다. 모세는 이제 자기의 생애의 통치를 끝내려 하고 있다. 그에게는 이스라엘이 자기의 통치 아래 있을 때보다 그 다음에 더 잘 되는 것을 예시하는 것이 위로였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매일 아침마다 정리해주는 찬미자매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