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 성경읽기
신명기 28:20~68, 시편 119:25~48, 이사야 55, 마태복음 3
묵상구절
21:22 <기타 규정>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22:1 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22:2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또는 네가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 줄지니
22:3 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형제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 것이며
22:4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들을 일으킬지니라
22:5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
22:6 길을 가다가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 새가 그의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보거든 그 어미 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22:7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되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22:8 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22: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을 다 빼앗길까 하노라
22:10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22:11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22:12 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매튜 헨리 / 옥스퍼드
Ⅱ. 목매달아 죽인 악인을 매장하는 율법(22절).
나무 위에 매어 달아 죽기까지 버려두었던 시체들을 우리들에게서처럼 유대인들도 그대로 버려두지 못하게 했다. 신성 모독죄나 그 밖의 어떤 중죄를 져서 법정의 판결로 돌로 쳐 죽인 자의 시체는 종종 나무 위에 매달아 두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런 일을 세상에 알리고 그의 추행을 밝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두려움을 주며, 듣고 놀랄 뿐 아니라 직접 보고 두려워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무에 단 시체를 밤새도록 두지 말고 해가 지기 전에 묻도록 했다(율법은 이르기를). "그런 자에게는 이런 처벌을 내리는" 것으로 족하다고 한다. 이것으로 일을 끝내었다. 그리하여 죄지은 자를 그의 죄와 함께 무덤 속에 묻어 버렸다.
1. 하나님은 이처럼 인간의 육신을 존중하고 극악한 죄인에 대해서도 관대히 대하시려 하신다. 매질의 수효를 율법으로 제한한 이유가 꼭 같은 이유로 인하여 시체를 그대로 노출시켜 두는 시간은 율법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곧 "네 형제가 네게 상스럽게 보일까 함이니라." 사후의 처벌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에게 보류해 두신다. 우리 인간은 이에 대해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다. 육신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죄인의 몸을 사슬로 매단다거나 머리와 사지를 결박하는 일이 좋은 일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 22절, ‘그리고 그가 처형당할 것이다 그러면 네가 그를 나무 위에 달라’
사형수를 나무 위에 다는 것은 처형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그를 처형한 후에 죽은 자의 죄상을 알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어기는 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행하는 일이었다(수10:26; 삼하4:12). 이와 더불어 죽은 자의 시체를 매다는 행위는 죽은 자에게 또 하나의 치욕을 더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온당한 처벌이 그가 행한 죄에 치러졌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다음 절에서 보듯이 나무에 달린 것은 하나님께 저주받았음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행 5:30).
2. 이런 행동에는 분명히 어떤 의식적 요인이 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불경스런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죽은 육신은 땅을 더럽히므로 시체를 나뭇가지에 그대로 두지 않도록 했다.
👀 나무에 달린 시체는 저주의 상징이었으므로(수 8:29;에 2:23; 눅23:39; 행5:3) 축복 받은 약속의 땅에 계속 둘 수 없었기에,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충분히 드러냄과 동시에 그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한 후에는 그 당일로 장사하여야만 했다.
또한 그러한 저주받은 자의 모습이 땅 위에 드러나 있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저주를 그 땅에 머물러 있게 하는 요인이 되었으므로 그날로 그 저주받은 자를 땅에 묻어서 하나님의 저주가 더 이상 땅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해야만 했던 것이다.
3. 그러나 거기에는 그리스도와 상관된 어떤 이유가 주어져 있다. 즉 "나뭇가지에 매달아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다" 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당하는 가장 끔찍한 치욕이고 모욕이다. 그리하여 다른 중죄의 처벌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처형은 그 범인을 하나님의 저주 아래 두는 것이다. 하늘과 땅 가운데 매달려 있는 그를 본 자는 그가 이 하늘과 땅에서 버림받고 무가치한 자가 되어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이 너무 멀리까지 전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를 밤새도록 매달아 놓아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해 주었는가를 알려 주기 위해 사도 바울은 나무에 달려 죽은 이 낙인 찍힌 자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비교하여 예증하고 있다(갈 3:13). 모세는 그가 가장 추악한 것을 의미할 때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 이라는 귀절을 성령에 의해 사용하고 있다. 후에 이 귀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적용되었는데, 그 속에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의 사랑이 얼마나 커다란 힘인가를 느끼며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박학한 패트릭 주교가 잘 관찰한 바 대로 이 귀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적용된다. 이 죄인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치욕을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죄인을 해가 지기 전에 매달려 있던 나뭇가지에서 끌어 내린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저녁 때에 저주받은 십자가에서 끌어 내려지고 묻히시게 되었다(유대인들은 이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요 19:31). 그것으로 말미암아 죄는 사하여졌고 율법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내려졌던 저주도 멈추게 되었다. 죽은 육신이 묻혀졌을 때 이스라엘이 맑고 깨끗하게 되었듯이, 그리스도가 행하신 온전한 속죄로써 교회는 깨끗하게 되었다.
● 이웃 사랑 (신명기 22:1-4)
💡 유실물 반환 및 상부 상조 규례
이웃의 잃어버린 물건을 보면 찾아 주고 이웃의 나귀나 소 등이 길에 넘어진 것을 보면 그 이웃을 도와 그것을 일으켜 세워 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지 이웃의 잃어버린 물건을 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인을 찾아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이웃 사랑이 단지 이웃에게 피헤를 주는 일을 하지 않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하여 수고하며 희생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선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출애굽기 22장 4절에는 원수에게도 친절을 베풀자는 말씀이 있고 여기에서도 비록 이웃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더라도 그에게 친절을 행하도록 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율법은 언제나 공평하기 때문이다.
1. 길 잃은 가축을 만났을 때는 그 주인에게 돌려 주거나, 그것이 있었던 목장으로 데려다 주어야 한다(1, 2절).
한글 개역 성경의 ‘길 잃은' 이란 번역은 우양이 자의적으로 무리에서 벗어나 길을 잃고 헤매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반면, 원어 성경의 의미는 어떤 재난이나 사고로 인하여 우양이 어쩔 수 없어 무리에서 분리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암시해 준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볼 때 우양을 찾아 주는 것은 단순히 이웃의 재산상의 손실을 막아 주는 정도만이 아니라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 형제와 함께 마음을 나누는 태도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이 가축을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렇게 행해야 한다. 즉 자기가 대접받고 싶은 그대로 남에게 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공평의 근본적인 율법이다. 신앙은 우리에게 친절할 것을 가르치며, 우리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선행을 행하도록 가르치고 있다는 것를 명심하자.
👀 본문과 동일한 규정을 다루는 출23:4 에서는 ‘네 형제의'로 번역된 단어와는 달리 ‘네 원수의'’라는 말이 나온다.
출 23:4의 원수는 이방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내에서 원수지간으로 지내는 자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신명기는 원수라는 대상을 제외시킨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친분 관계가 현재 어떠하든지간에 관계 없이 이스라엘 동족은 모두 '형제’ 라고 표현하였다. 따라서 ‘네 형제의'라는 말은 오히려 출23:4의 규정보다 더 넓은 범위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형제의 범위를 또 한 차례 넓혀 ‘네 이웃'으로 확장하셨다.
눅10:29-37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형제이든지 원수이든지 간에 또는 자기 동족이든지 이방 민족이든지 간에 도움을 필요로 하고 호소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지 모두 우리의 이웃임을 가르쳐 주셨다.
이러한 이웃에 대한 사랑은 곧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자만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눅10:27). 즉 신본주의에서 출발하지 않는 인도주의는 인간의 진정한 가치,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추상적인 감상주의로 흐르기 쉽다. 그러나 신본주의에서 출발한 인도주의는 하나님을 섬기는 차원에서 이웃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속적이고 힘이 있을 수 있다.
본문의 규정도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 의해서 실천될 수 있는 모습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려움을 당한 이웃이 끊이지 않는다고 할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이웃과 형제에 대한 사랑 역시도 끊이지 않아야 할 것이다.
타인의 우양을 자기가 취하려 하는 의도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사실과 타인의 우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 일을 행하는 데 있어서,
(1) 그들은 수고를 꺼려하지 말고 주인을 알면 그 가축을 곧 데려다 주어야 한다. 만약 그들이 주인에게 알려 그 주인이 찾아 가도록 한다면 그가 찾아오기 전에 어떤 재난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2) 비용드는 것을 꺼려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 주인을 모르거든 그 가축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주인을 찾을 때까지 키워야 한다. 길 잃은 이웃의 가축을 돌봐 주는 데에도 이러한 관심이 필요할진대 하나님과 그의 의무로부터 떠나 길을 잃고 헤매는 인간에게랴! 우리는 진리를 떠난 자들이 돌아설 수 있도록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하며(약 15, 19). 우리들 자신을 또한 돌아 보아야 한다(갈 6:1).
2. 모든 잃은 물건은 그 주인에게 돌려 주어야 한다(3절).
유대인들은 "잃은 물건을 주운 자는 대중 앞에 나가 서너 번 큰 소리로 주인을 찾도록 되어 있었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영국 관습과 비슷하다. 만일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그 물건을 주은 자가 자기의 것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이러한 경우를 깊이 연구해 본 저술가에 의하면) 물건을 주운 자는 그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
💡 3절 본문에는 ‘그리하고’ 라는 단어가 3번 반복되어 나온다. → ‘그리고 이와 같이(1,2절 규정과 같이) 너는 행할 것이라’
⇒ 3번 반복된 것은 본절에 나오는 각 경우들에 동등한 중요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즉 형제가 잃어버린 것이 짐승이든지 의복이든지 그리고 무엇이든지 관계없이 동일한 자세로 취급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못 본 체하지 말 것
⇒ ‘너는 스스로를 숨길 수 없을 것이라’
이는 이웃의 잃어버린 것에 대한 임무를 회피해서는 안되는 것과 함께 회피할 수도 없을 것이라는 뉘앙스를 가진다. 즉 본문은 비록 그러한 임무에서 스스로 회피한다고 해도 하나님에게는 감추어진 모습을 결코 숨길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뜻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이웃을 향한 그 사람의 책임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의 판결이 기다리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3. 곤경에 빠진 가축을 도와야 한다(4절).
우리가 언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런지 모르더라도, 우리는 이웃에 대한 우호감과 사랑을 가지고, 짐승에 대한 동정을 가지고(자비로운 사람은, 비록 자기 것이 아닐지라도 짐승의 생명을 존중한다.) 이렇게 행해야 한다. 어떤지 모르나 "앞으로도 결코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곤경에 빠진 동물만이 아니라 그 동물이 지고 있던 짐까지 일으켜야 한다. 곧 본문의 명령은 그 형제가 다시 자기 길을 제대로 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는 일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혼합을 금함 (신명기 22:5-12)
여기에 나오는 몇 가지 율법은 생활에 나타난 극히 사소하고 하잘 것 없는 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사람들이 만든 법은 흔히 그렇지 못하다. 즉 De minimis non curat lex - 법은 사소한 일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시계와 사랑 안에 있으므로 극히 하잘 것 없는 일 속에서라도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을 지니게 된다. 사소한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이 보이나, 그것이 그리 보잘 것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율법 속에 그것을 기록하고 계시며 그것을 중대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Ⅰ. 우리 자신과 이웃의 정절을 보호하기 위해서 남녀의 구별이 분명한 차림을 하라고 했다(5절).
"인간의 본성 자체가" 사람의 "머리 모양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고전 11:14). 옷에서도 마찬가지다. 평범한 차림에서나 특별한 차림에 있어서나 성별이 혼돈되는 의복을 입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남을 어떤 합법적인 도리나 숨기 위하여 혼돈되는 의복을 입을 수도 있을지 모르나, 운동이나 연극에 있어서도 그러한 복장이 문제시되고 있다.
1. 이것은 이방인의 우상 숭배적 관습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비너스 숭배에서는 여자가 갑옷을 입고 남자는 여성의 옷을 입고 있는데, 이것은 미신적인 관습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일이다" .
2. 일이나 사람의 성질에 있어서도 성별이 혼돈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즉 남자는 나약해서는 안 되고 집에서 여자의 일을 해서도 안 된다. 또한 여자는 표독해서는 안 되며 가르치거나 권위를 찬탈해서도 안 된다(딤전 2:11, 12).
3. 의복을 혼동해서 입게 되면 정숙하지 못한 일을 범하게 되므로 그것을 금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범하지 않으려는 자는 이런 차림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자료를 보면 이성의 옷을 입기 좋아하는 변태적 경향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며, 여신 이쉬타르의 숭배 의식과 관련해서 거세하는 일을 언급하고 있다. 가나안에서는 아스다롯(Astarte) 신을 경배하기 위해 가면을 쓰며, 이성의 옷을 입었었다.
본문의 명령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전달한다. 현대에는 남성과 여성이 담당하는 독특한 역할과 구분이 점점 없어지고 있으며, 소위 유니섹스(uni-sex)라는 문화 풍조가 어느새 익숙해져 가고 있다. 심지어 동성애까지 정당화하는 풍조가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모두 동일한 인격체인 것과 다른 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사이에는 엄연한 구분이 있어야 한다.
인간은 인격체로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동일하게 지음 받은 남•녀가 동등한 존재이지만, 성에 있어서는 남•녀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성의 구분을 없애는 것은 곧 하나님의 창조 질서틀 파괴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는 비단 개념적이며 추상적인 질서만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성의 역할이 혼미해짐으로 가정이 파괴되는 현상이 나타나며, 이는 곧 사회적인 혼란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사소하게 유니섹스한 의복 문화에서부터 시작하여 실제로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성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는 우리의 생활 곳곳에 침투하여 그 위험 수위를 이미 넘어서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우리는 본문과 같은 이러한 행위를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나아가 그 어느 때보다 성적으로 혼란하며 패역한 이 세대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분명히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Ⅱ. 새 둥지를 발견했을 때 그 안에 있는 어미새는 잡으면 안 된다(6, 7절).
유대인들은 "이것은 모세의 율법 속에 있는 모든 계명 중에서 가장 작은 것" 이라고 말하나, 이 귀절을 잘 살펴보면 아주 중요한 계명 가운데 다섯번째 계명 즉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는" 약속을 찾아 볼 수 있다. 사소한 일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율법을 아주 경멸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 명령대로 그가 잡은 새(숲에 있는 두 마리의 새보다 가치 있는)를 놓아 주는 자는 "의로운 일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존중하는 자라고 볼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부인할지언정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새들을 "돌보시는가?" (고전 9:9) 물론이다. 우리의 그리스도께서는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않았도다" 라고 말씀하셨다(눅 12:6). 이 율법은
1. 우리가 짐승을 학대하거나 그것을 괴롭히는 것을 낙으로 삼는 것을 금하고 있다.
비록 하나님은 우리를 "공중에 나는 새보다도 더 지혜롭게" 만드셨고, "그 새를 주관하도록" 해 주셨지만, 우리는 권리를 악용해서는 안 되고, 또 가혹하게 그들을 다스려서도 안 된다. "어미 새를 놓아주어" 다시 새끼를 낳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결코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에 복이 있나니라" (사 65:8).
본문은 새의 보금자리에 있는 새끼나 알은 취해도 무방하지만 어미새는 취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어미새를 취하면 다시는 알을 낳을 수 없게 되어서 종족 번식이 그칠 위험이 있으므로 알을 낳을 수 있도록 어미새는 놓아 주라는 의미이다. 이는 밀렵꾼들이 보호 구역 내에 서식하고 있는 희귀 동물들까지 남획하여 멸종되는 사례가 적지 않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큰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2. 이 율법은 또한 우리에게 동정심을 갖도록 가르치고 있다. 그리하여 야비하고 잔인하며 비뚤어진 생각들을 증오하게 한다. 특히 자손을 낳으려는 여성들의 고충을 생각하여 그들에게 충격을 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 가장 잔인한 비인간적인 예로는 "어미와 자식이 함께 부숴지고" (호 10:14)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가르는 것" (암 1:13)을 들 수 있다.
3. 나아가 여기서는 그들의 자연적 애정이나 그 부드러운 성품을 이용하여 그들을 행하고 우리의 이익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어미 새에게 그의 알이나 새끼를 보호하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그 새는 날아가 버려 잡히지 않고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미새가 새끼를 위해 고통을 받으려는 연민의 정은 갸륵한 일이기에, 율법은 어미새를 보호하여 놓아 주도록 하고 있다.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처분에 달려있는 자들을 잔인하고 불친절하게 대하지 않도록 될 것이다.
💡 7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어미새는 놓아 주고 새끼 취하라는 본절의 명령은 단순히 박애주의적인 생각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여기서 날들을 길게 하는 주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이는 언약 안에서 주어지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에 대한 책임이 그들 자신에게 부여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본문의 약속이 4:40과 5:16에서는 언약을 지키는 부모와 자녀에게 동일하게 주어지고 있는데 이는 언약의 공동체가 산절없이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조그마한 새의 번식을 지키는 일과 하나님 백성의 번창에 대한 약속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다스리는 근본 원리가 하나님의 언약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Ⅲ. 집을 지을 때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두어 사람이 떨어지는 일을 막도록 해야 한다(8절).
여러 성서 귀절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저들의 지붕은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도록 평평하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주의를 크게 하지 않더라도 떨어지지 않도록 3피트 반의 높이로(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난간을 만들어야 한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주인의 소홀함으로 재난이 생겨 피를 흘리는 죄가 그 집에 임할 것이다.
💡 고대 근동의 집들에는 대부분 평평한 옥상이 있었는데, 그 평평한 옥상은 다락방으로서 또는 여가나 다른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수2:6; 삿16:27). 따라서 사람이 많이 이용하는 옥상에 난간이 없다면 대단히 위험했다. 그러므로 집을 지을 때는 사람이 떨어지지 않도록 반드시 난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율법은 규정한다. 그러나 본문에는 안전을 위한 것 이상의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지붕에 난간을 만드는 주된 이유를 한글 개역 성경은 ‘사람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으로 번역한 반면, 원어 성경은 ‘피 흘린 죄를 집안에 두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고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을 이에 종속시키고 있다. 죽 한글 개역 성경은 다분히 일차적으로 나타나는 현상과 인간 중심적인 것에 기준을 두고 한 번역인 반면 원어 성경은 19:10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언약의 땅을 더럽혀서는 안된다는 하나님 중심적인 언약의 문맥 속에서 강조되고 있다.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해야 했다. 곧 형제의 안전에 대한 배려도 언약이 그 근본 동기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진정한 의미에서 형제 중심의 사랑을 베풀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1.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섭리 뿐 아니라 율법으로도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신다.
2. 따라서 다른 사람의 생명은 우리의 생명과 같이 매우 소중하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재난이 미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율법은 공평하므로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방어해 주며, 우리의 태만으로 그들이 죽음을 당하여 그들의 피가 내 손에 돌아오지 않도록, 교량을 수리한다든가 우물을 덮도록 하여 위험한 것을 방지하도록 한다.
Ⅳ. 서로 다른 것을 섞는 일을 금하고 있다(9, 10절).
💡 9-11절까지의 규례는 모두 두 가지 다른 종류를 한 곳에 섞거나 함께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 이는 종(species)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함이며, 겉으로 보기에도 구별됨이 분명히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순수성을 지켜야 하며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보존하고 영적 순결을 지킴으로 다른 민족과 구별되도록 하기 위하여 의복의 재료에 이르기까지 혼합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는 철저한 삶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러한 것은 대체로 앞에 나왔던 것이다(레 19:19). 그러한 일에는 아무런 도덕적인 악이 나타나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밀과 보리 씨앗을 섞어 뿌리며, 말과 소를 함께 하여 밭을 갈고 양털과 배실로 짠 옷을 입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일을 금하고 있다.
1. 그것은 우상 숭배 풍습과 일치하거나
💡 이러한 금지의 명령은 농작물의 윤작 대신 이 방법을 택하면 땅이 더 빨리 황폐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애굽의 풍습을 염두에 두고 제정한 규정인 것을 알 수 있다.
애굽의 벽화에는 여러 종류의 과실나무가 나란히 자라고 있는 정원과 과수원의 그림이 있다. 이는 비록 눈에는 풍성하고 좋아 보여도 성경이 규정하는 거룩함이 가지는 분리의 개념을 반영하지 못하는 풍습이다. 따라서 모세는 죄악의 땅으로 상징되는 애굽의 풍습을 따르지 말아야 할 것과 거룩함의 근본 개념을 알려 주고자 본문의 명령을 하고 있는 것이다.
💡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물은 거룩해야 했는데 두가지 씨를 구별 없이 뿌림으로써 뿌리는 일에서부터 거룩함이 상실된 채 곡물이 자라난다면, 그 수확이 아무리 풍성하다 해도 그 예물은 결코 하나님께 구별된 것으로 거룩하게 드릴 수 없는 것이다.
눈으로 보기에 아무리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가치 기준에 따라서 시작하지 아니하고 세상의 가치로 좋아 보여 시작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 결코 기쁨이 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을 시작할 때 그 일의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결과를 계산하기보다 그 일이 과연 하나님의 가치에 기초하여 세상과 구별된 모습을 가진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2. 이스라엘의 명백하고 깨끗한 기질과는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창조주께서 무한한 지혜로써 서로 구별하여 만들어 놓으신 것을 한데 합함으로써 인간의 허영이나 호기심을 만족시켜서는 안 된다. 황소를 나귀와 교환하듯이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할 수 없고 또한 불경스러운 것과 함께 할 수 없다.
오늘날 아랍에서는 여전히 소와 나귀 흑은 나귀와 낙타를 함께 부려 밭을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이 모습을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여 강한 동몰과 약한 동물에 쟁기를 얹음으로 약한 동물을 괴롭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혼합 금지 규례의 문맥에서 나오는 본문의 분명한 의도는 동물 학대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 듣고 있던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반드시 지켜야 할 구별된 삶에 있다. 특별히 농삿일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그들의 주된 생업이 될 것이기 때문에 본문의 규례는 가장 기본적인 노동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실천해야 함을 주지시켜 준다.
Ⅴ. 옷단의 술을 달아 계명을 비망록으로 삼으라는 율법은 이미 나왔었는데(민 15:38, 39), 여기서 다시 반복되었다(12절).
이것으로 누구든 한 눈에 이스라엘 사람을 구별할 수 있도록 하며, 다른 민족이 그것을 보고 어떠한 경멸을 하든 말든 그들의 나라나 그들의 독특한 신앙에 대한 긍지를 배우게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술을 보고 계명을 기억하여 불미스러운 일을 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다시 이 내용을 반복한 것은 앞에서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옷단의 술은 양털과 배실을 혼합해 짠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11절).
💡 옷 단에 술을 다는 것은 단지 장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인이나 시리아인들의 옷과 구별되게 하려는 뜻인데, 민15:37-41 에는 더 구체적인 이유가 나온다. 그것은 겉옷 네 귀에 다는 술로 인하여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게 하여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쫓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하려는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