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7월 19일 화요일 묵상구절 수2:1-24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정탐꾼을 보내다

하나지기 2022. 7. 19. 10:21

맥체인 성경읽기

사사기 2, 사도행전 6, 예레미야 15, 마가복음 1

묵상구절

2: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2:2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2:3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

2:4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2:5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였으나

2:6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2:7 그 사람들은 요단 나루터까지 그들을 쫓아갔고 그들을 뒤쫓는 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

2:8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2: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2: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2: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2:12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2:13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2:14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2:15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2:16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갈지니라

2:17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2: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2:19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2:20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하니

2:21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2:22 그들이 가서 산에 이르러 뒤쫓는 자들이 돌아가기까지 사흘을 거기 머물매 뒤쫓는 자들이 그들을 길에서 두루 찾다가 찾지 못하니라

2:23 그 두 사람이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나아가서 그들이 겪은 모든 일을 고하고

2:24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하더라

매튜 헨리 / 옥스퍼드

▶ 정탐꾼을 도운 라합 (여호수아 2:1-7)

이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 내용을 보게 된다.

Ⅰ. 여호수아의 사려 있는 행동을 본다.

그는 이 중요한 도하작전을 조사하기 위해서 정탐꾼들을 보낸다. 아마 가나안 입국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것같다.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1절). 모세도 정탐들을 보냈었다(민 13:17). 여호수아도 그 정탐꾼들 중의 하나였다. 그것은 나쁜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여호수아가 다시 정탐꾼들을 보낸다. 그것은 이전에 정탐꾼들이 파견될 때와 같이, 온 땅을 돌아다녀 보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 만을 엿보라는 것이었다. 또한 온 회중 앞에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혼자만이 알도록 보내는 것이다.

그는 사려있는 장군과 같이 계속적으로 대중의 유익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첫 발자국을 잘 내어 디디어서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이 몰래 변장을 하고 친히 요단을 건너는 모험을 하는 것은 적합한 일이 못 되었다. 그래서 그는 두 사람을 보낸다(70인 역에는 두 젊은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 두 사람이 땅을 살펴보고 전하는 보고서에 따라서 그는 공격의 방법을 강구해야 했었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위대한 사람들도 일반 사람들과 같은 안목으로 볼 수밖에 없다.

별다른 대책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채용하는 사람들의 선택에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선택된 사람들이 어떻게 충성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너무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은 적절한 수단을 간구하는 일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열성으로 하게 해준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확신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앞서 두 사람을 보냈다. 노력을 게을리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시험하는 것이다.

💡 이 시점에서의 정탐꾼 파견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신앙적 결정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정탐꾼 입장이 아니라 반대로 가나안 땅에 정탐꾼을 파견하는 위치에 서게 된 여호수아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는 약속의 땅 가나안 정복에 대한 각오를 더욱 굳건히 다졌을 것이다.

40여년 전 과거 이스라엘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으로 정탐꾼을 파견한 것은 하나님께서 명령을 내리시기 전에 백성들이 미리 요청한 것이며(신 1:22) 이는 가나안 정복의 실패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 아니라 효과적인 전투 수행을 위한 치밀한 준비로써 정탐꾼을 파견한 것이다. 즉 여호수아는 자신에게 맡겨진 가나안 정복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정탐을 파견하는 등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슬기롭고 충성된 하나님의 일꾼이었던 것이다.

 

3. 이 두 사람이 이 어려운 일에 얼마나 열성으로 뛰어 들었는지를 살펴보라.

목숨을 원수의 손에 쥐어 주는 모험이라고 해도 이들은 그들의 장군 여호수아에게 순종했으며 회중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 열성이었으며,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의 보호자시요, 또한 자기들의 사명을 수행하려는 각자의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 2절은 정탐꾼들이 여리고로 들어가자마자 별로 주저하지 않고 라합의 집으로 들어갔음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선택은 두 정탐꾼들의 지혜로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시며 동시에 라합을 구원하여 그녀를 통하여 구속사를 이루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결과이다(마1:5).

 

Ⅱ. 정탐꾼들을 라합의 집으로 인도하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들이 어떻게 요단을 건넜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 강가에서 7, 8마일이나 떨어진 여리고 성으로 잠입해 들어갔고, 거기서 안전한 숙박지를 찾다가 라합의 집으로 인도되었다.

라합은 기생이라고 불려지고 있는데, 이것은 평판이 나쁜 여자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비록 나중에 회개하고 변화되긴 했지만, 여자에게 있어서는 치욕이었다. 문둥이 시몬도 비록 문둥병은 고쳐졌으나 그가 살 동안 그의 이름에 언제나 문둥이라는 말이 붙어 다녔는데(마 26:6), 그것은 역시 부끄러운 일이었다.

라합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신앙과 선행이 우리를 교훈시킬 목적으로 높이 칭찬되어지는 신약에서도 그는 기생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 당시 가나안의 첫관문이며 규모가 큰 도시였던 여리고 성에 잠입한 정탐꾼들이 굳이 다른 곳이 아닌 창녀의 집에 들어간 이유는 이곳은 일반 가정집과는 달리 돈만 내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성내의 여러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었으므로 여리고 성과 관련한 군사적인 정보를 얻거나 민심을 살피기에 아주 적절한 곳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여인 라합을 통해 가나안 정복의 첫 사업을 성공케 하시며, 그녀의 후손으로 다윗과 그리스도를 '탄생케 하여'(마 1:5) 하나님의 구속사가 혈통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와 믿음에 의하여 이루어짐을 보여 주신 것이다(히 11:31).

 

그 교훈은 다음과 같다.

  1. 아무리 죄가 크다고 해도 적시에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 우리는 창녀와 세리들이 메시야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 나라의 모든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는 성경을 읽는다(마 21:31).
  2. 회개하기 전에는 악하고 못되었던 많은 사람들도 회개한 후에는 신앙과 성결에 있어서 위대한 본을 보여준 자들이 많이 있다.
  3. 젊은 시절에 지은 죄가 회개를 통하여 은혜로이 용서를 받기는 했더라도, 그 수치는 언제나 지니고 다녀야 한다. 그들이 옛날의 잘못을 들을 때 자기들의 회개를 새롭게 하고, 또한 회개한 증거로서 인내를 가지고 그 수치를 참고 나가야 한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는 단 한 사람의 친구, 즉 온 여리고 성에서 단 한 사람의 호의를 지닌 사람이 있었을 뿐인데 그녀가 바로 기생 라합 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때로는 도덕적으로 단정치 못한 사람들을 당신의 목적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시었다.

만일 이 정탐꾼들이 다른 집으로 갔다고 하면 틀림없이 배신을 당했을 것이고, 무자비하게 처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정탐꾼들이 믿을 만한 친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시었고, 그들을 그리로 인도하시었다. 이따금 우리들 보기에는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것같이 보이는 것이 위대한 목적을 성취시키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들의 길에서 성실하게 하나님을 인식하며 걸어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그의 눈동자같이" 인도하신다(렘 36:19, 26 참조).

💡 2절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여리고에 잠입해 들어가자 즉시 그 사실이 알려지고 왕에게까지 보고되는 과정을 급박하게 묘사되었다.

이것을 볼 때 여리고의 경비와 보완 점검이 매우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2-3절). 이스라엘 군대가 요단강 동편에서 아모리 왕들을 격파했다는 소문이 이미 가나안에까지 널리 알려진 상황이었고는 그들이 곧 가나안으로 진격할 것이란 사실이 명백하였기 때문에 여리고 성을 비롯하여 가나안 일대의 성읍뜰에는 곧 요단강을 건너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경계령이 내려져 있었으며, 성읍 거민들은 수상한 사람들에 대해 유독 더 경계심을 가졌을 것이다.

 

Ⅲ. 이 정탐꾼들을 받아들이고 보호하는 일에서 라합의 경건을 볼 수 있다.

주막집을 경영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을 환영한다. 그리고 모든 손님들에게 정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라합은 그녀의 손님들에게 대한 예의 이상의 것을 보여 주었다. 그녀가 한 일은 비상한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녀가 자기의 왕과 나라를 거슬러서 이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한 것은 바로 "신앙에 의한" 것이었다(히 11:31). 그녀의 말을 보더라도(9절) 그녀는 이들이 어디서부터 왔으며 이들의 사명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들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고 이들은 또한 거기에 유숙했다.

  1. 이들이 성내로 잠입한 것이 발각되었고 그래서 이들에 대한 적개심이 불붙었다는 것을 알고도, 그녀는 이들을 삼대로 덮인 지붕에 숨겼었다(6절). 만일 관리들이 이들을 수색하러 이리로 온다면 이들은 영락없이 들키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말리기 위해서-후에 껍질을 벗겨 물레에 돌리려고-지붕 위에 줄지어 벌여 놓은 삼대로 현숙한 여자의 아름다운 기질을 발휘했다. 비록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그녀가 부족한 여인이었을지 몰라도, 그녀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는" 여자였다(잠 31:13).

그녀의 정직한 직업의 본보기를 보아서, 어떤 이들은 라합이 과거에는 창녀였으나 지금은 창녀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1. 정탐꾼들에 대한 심문을 당했을 때 그녀는 그들이 자기 집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리고 이 수색자들을 속여서 돌아가게 함으로 이 정탐꾼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었다.

여리고 왕이 이들을 찾으려 보낸 것은 이상할 것이 못된다(2,3절). 그는 원수가 문간에 이르렀다는 것을 듣고 공포에 떨었고, 그 공포는 모든 낯선 사람에 대한 의심과 질투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에게는, 라합에게 "이들을 끌어내라" 고 하여 정탐꾼으로 다루도록 명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라합은 이들을 안다는 사실과 이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사실을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더 심한 수색이 생겨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정탐꾼들이 달아났다는 것과, 아마도 추격하면 따라 미칠 것이라는 것까지 덧붙였다(4,5절).

💡 라합이 이미 ‘숨긴지라’ (차판)
하나님의 숨기시는 행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은총을 의미, 또한 모든 고통과 환난 가운데서 유일한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기생 라합이 자기 집으로 잠입한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목숨 걸고 숨겨 준 행위는 하나님의 백성을 숨겨 줌으로써 그녀 자신이 이스라엘의 여리고 공격시 구원받기 위한 자의적인 판단에 의하여 내려진 믿음의 행동이었다(히11:31; 약 2:25). 그러나 원천적으로는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출 14:14) 이제 그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서(1:2-4) 기생 라합을 사용하셔서 두 정탐꾼들을 여리고 왕의 악한 손으로부터 숨겨 보호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자기 백성을 악한 세력으로부터 숨기시는 ‘차판’ 의 하나님께서는 이제 여리고의 매춘부 라합을 그 도구로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신 것이다.

 

(1) 우리는 이것이 선한 행위라고 확신한다.

이 일은 사도에 의해서 인정을 받은 행위이다(약 2:25). 야고보는 라합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다" 고 말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라합이 "사자들을 영접하고 다른 길로 그들을 내보냈다" 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녀는 이 일을 믿음으로 행했듯이 이러한 그녀의 믿음은 인간에 대한 공포, 나아가서는 왕의 진노까지도 초월하는 믿음이었다. 그녀는 이스라엘 위에 베풀어진 놀라운 기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믿었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가나안 위에 선포된 운명은 피할 수 없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있었다. 이러한 신앙으로 라합은 정탐꾼들을 숨겨 보호해 주고, 정탐꾼들의 은총을 구했던 것이다. "나는 당신들의 하나님을 믿으며 가나안도 당신들의 소유가 될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나는 감히 당신들에게 친절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더라면 그녀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무기력한 믿음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또 의롭다고 칭함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라합이 크나 큰 위험 앞에서 믿음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어놓았을 때,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녀의 믿음은 살아서 움직이는 믿음이 된 것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모험이라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야말로 참된 신자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는 자들은 그의 백성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며 그들과 함께 자기의 운명을 내어 던진다.

하나님을 자기의 피난처와 숨을 곳으로 삼는 자는 필요할 때마다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된다. "나의 쫓겨난 자들로 너희와 함께 있게 하라" (사 16:3, 4).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그의 나라를 섬기는 일로 환난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성실하고 뜨거운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2) 그러나 이 일 속에는 쉽게 정당화될 수 없으나 정당화되어야만 하는 점이 있다. 만일 그렇게 되지 못하면, 그 일은 라합을 의롭게 할 수 있는 착한 행위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이다.

[1] 라합이 원수들을 숨겨주고 자기 나라를 배신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일은 라합이 자기 왕에게 대한 충성이나 한 구성원으로서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임무에 대해서는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이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줄을" 그녀가 "알았다" 고 하는 사실이 바로 그녀를 정당화해 주는 것이다(9절). 거역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임을 알았을 때, 하나님께 대한 그녀의 임무는 어떤 다른 것에 대한 그녀의 임무보다도 더욱 우선적인 것이었다. 만일 라합이 하나님께서 이 땅을 그들에게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이 땅을 이스라엘이 소유하지 못하도록 이 땅 백성과 결합해서 방해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곧 죄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백성에게 어떤 땅을 하나님이 약속하셨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을 경우라고 한다면 이러한 행위는 공공의 복리를 해치는 반역적인 행위로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라합은 자기에게 찾아온 관원들에게 거짓말로 속였음이 분명하다.

라합은 정탐꾼들이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몰랐으며 그들이 이미 달아났으며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했다. 이 일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만일 라합이 진실을 말하든가 아니면 침묵을 지키든가 했더라면 그녀는 정탐꾼들을 배신하는 결과를 만들어 냈을 것이며, 분명히 큰 죄악을 범하게 되었을 것이다.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기기 위해서 관원들에게 반대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이 다른 길로 정탐꾼들을 추격하도록 하는 그 이상의 행위는 하지 않았다. 만일 스스로 속아 넘어가게 된다면 속아 넘어가도록 버려두라. 악한 일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잘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 누구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물론 라합의 경우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다. 그러므로 이것을 전례로 삼을 수는 없으며, 여기서 정당화된다고 해서 절대로 일상적인 경우에까지 거짓말을 합법적인 것으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라합은 요단강 동편 쪽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나 가나안 족속에게 절대로 자비가 베풀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비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파멸을 당한 사람들은 속임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라합이 가나안 족속으로서 아무리 거짓말이 악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잘 배우지 못했다고 하는 정상 참작을 한다고 해도, 라합의 거짓말은 역시 죄악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라합의 믿음을 받으셨고 그녀의 잘못을 용서하셨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경우에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해도 우리의 사명은 여전히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며 거짓말을 미워하고 두려워하며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롬 3:8)는 사실을 확신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록 그 속에 약함이나 어리석음이 섞여 있다고 해도 그 생각하는 바의 성실함과 정직함을 받아 주시며 우리가 실수하는데 대해서 가혹하게 벌하시지 않으신다. 어떤 이들은, 라합의 대답이 어떤 다른 사람들을 보고 말한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라합이 행한 거짓말은 동기야 어쨌든 분명한 거짓말이었고 그것은 자기 민족을 배반하고 멸망으로 몰아넣는 비열한 행동으로 비난받을 수 있는 행위였다.

한편 라합의 거짓말은 신앙의 눈으로 여리고의 멸망은 필연적이란 사실과 자기의 힘으로 이를 막을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한데서 나온 신앙과 믿음을 근거로 행한 거짓말이므로 죄가 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아무리 선한 목적을 가졌다 하더라도 거짓말 자체는 분명히 죄이지만 그 동기가 신앙적이라면 용서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이는 그녀의 행위가 역사의 주이시며 공의로운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결단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라합의 행위는 인간적으로만 보면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신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것으로 칭찬 받아 마땅한 것이다.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세상과 하나님을 선택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때는 반드시 하나님을 선택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선의의 거짓말은 과연 용납이 되는 것일까?

그 해답을 성경에서 찾아보자. 성경은 라합의 행위를 분명히 ‘믿음의 행위'로 인정하고 있지만(히11:31; 약2:25) 그 방법상에 있어서의 거짓말을 한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하므로써 은연중에 비록 그 동기는 선했지만 거짓말 자체는 바르지 못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두 정탐꾼

정탐꾼들이 기생 라합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지만 반대로 라합이 폭로하거나 그 숨겨진 사실이 탄로가 날 경우에는 여지없이 함정과 올가미에 빠진 상태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들은 자신들이 숨어 있는 삼대 뒤편이 악한 자의 올가미로 변하지 않도록 시편 기자의 간구대로 의인을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숨은 장소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기생 라합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선한 행동에 의해서 올가미가 아니라 안전한 보호처가 될 수 있었다.

 

▶ 라합의 슬기 (여호수아 2:8-21)

여기서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베풀어 준 봉사에 대하여 후에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은총을 베풀겠다는 약속을 한다.

Ⅰ.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그리고 정탐꾼들을 통해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 목적한 가나안 공격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큰 용기를 전해 준다. 이것을 위해서 정탐꾼들은 온 것이며 또 올만한 가치가 있었다.

관헌들을 깨끗이 돌려보내고 난 후에 라합은 정탐꾼들이 있는 "지붕으로" 와서, 붙들리게 될 위험한 상황에서 겁에 질려 아직도 공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들에게 안도감을 불어넣어 준다.

  1. 라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신 위대한 일들에 대한 이야기가 여리고에까지 전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10절).

그것은 최근 요단강 건너편에 위치한 인접 국가인 아무리 족속을 점령하고 획득한 승리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애굽에서 탈출한 놀라운 구원과 홍해를 건너 위대한 여로를 경과해 온 40년 전의 이야기까지 여리고에서는 생생하게 기억되고 이야기되어지며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움이 되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그의 동료들을 보고 사람들은 "놀라게 되었다" (슥 3:8). 하나님께서 "그의 놀라운 기사들을 어떻게 기억나게" 하시는가를 주목하자(시 111:4).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의 능력을 말하게 될" 것이다(시 146:6).

  1. 라합은 이러한 일들의 소문이 가나안 민족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9절), "우리의 마음이 녹았도다" (11절).

만일 라합이 주막을 경영하고 있었다면 그녀는 세계 여러 곳으로부터 오는 나그네들과 여러 종류의 집단으로부터 많은 것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정탐꾼들은 라합의 정보 제공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아 낼 수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정보를 안다고 하는 것은 여호수아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굉장히 유익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자기들의 원수들이 사기 저하되어 있다는 정보를 듣는다는 것은 아주 겁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러 일으켜 주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절망 상태에 있는 원수들은 틀림없이, 특별히 그것도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때에는 자기들 앞에서 거꾸러질 것이라고 하는 결론을 쉽사리 얻어 낼 수 있었음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땅 사람들로 그들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신 11:25).

그리고 이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다른 약속도 성취되리라는 확증을 이들에게 던져 주게 될 것이다. 강한 인간이라도 자기 용기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며 건장한 사람이라도 자기 힘을 자랑치 못하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몸도 마음도 모두 약하게 만드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아무리 힘센 원수라고 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아무리 강한 원수라도 이스라엘 앞에서 두려워 떨게 만드실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라도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강퍅하게 가지고는 형통하지 못한다. 사람의 혼을 지으신 하나님은 어느 때라도 공포의 칼로 그를 맞서실 수 있기 때문이다.

3. 라합은 여기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아마도 이토록 큰 믿음이 발견되어진 일은 일찍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스라엘 중에서라도 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만큼 큰 믿음은 보지 못하였을는지도 모른다.

💡 본서의 저자가 정탐꾼들의 객관적인 정탐 내용은 상술하지 않고 기생 라합의 기사만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특히 기생 라합의 신앙적인 고백을 언급하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바로 가나안 정복의 실체를 보여 주는 핵심 내용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정복의 효과적인 방법을 구하기 위해 여리고 성에 잠입한 정탐꾼들에게 가나안 정복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있음을 이방인의 입술을 통해서 재확인케 하셨고 그로 인해 정탐꾼들은 가나안 정복의 핵심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근거한다는 메시지를 확실히 전달받았던 것이다.

 

(1) 그녀는 온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배를 믿고 있다(11절).

"여호와 너희 하나님, 너희가 예배하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 나시며 그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의 하나님이시며, 만군의 주로 섬김을 받으실 분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광대한 거리가 있다. 그러나 위대한 여호와의 감찰과 통치하에서는 모두가 동일하다. 하늘이 그의 능력을 넘어 서지 못하며 아래로 땅도 그가 아시는 바이다.

💡 본문은 단지 하늘과 땅에만 하나님이 계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온 우주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표현은 신명기에서 모세의 말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신 4:39; 5:8). 그리고 솔로몬도 이와 동일한 고백을 하였다(왕상 8:23).

하나님을 땅과 하늘에 가득하여 전우주에 가득 찬 분으로 묘사하는 이러한 표현은 어떤 특정 지역과 대상에게만 영향력을 미치는 것으로 여겨졌던 이방 우상과 차별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유일신 개념을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본문은 기생 라합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이다.

그녀의 표현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 뿐만 아니라 온 우주에 편만하신 무한하고 위대하신 분이시다. 이러한 고백이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접하지 못했으며, 율법 교육을 받지 못했던 이방인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비록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접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역사와 자연 가운데 드러나는 일반 계시를 겸허하게 바라보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발견할 수 있음을 알게 해준다. 이방 여인 라합도 선민 이스라엘의 행적에 대해 들으면서 이방 족속들이 섬기는 어떠한 신도 이스라엘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같을 수 없음을 깨닫고 믿어 이를 고백한 것이다.

 

(2) 그녀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을 믿고 있다(9절).

"나는 하나님이 이 땅을 너희에게 준 줄 아노라."

여리고의 왕도 라합이 들은 것과 같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들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들에게 자기가 지배하는 땅을 주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마지막 순간까지 이스라엘과 대항해서 이 땅을 움켜쥐고 있으려고 했다. 아무리 굳센 확신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 자기 힘으로 목적을 성취시킬 수는 없다. 은혜로 기생 라합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을 들었을 뿐인데도, 눈으로 직접 목격한 이스라엘의 많은 장로들도 이 약속의 불신으로 죽어 가는 그런 판국에 그녀는 조상들에게 맺어진 약속의 진실을 확신하며 이야기한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라합이 바로 그러했다. "오 여인아, 너의 믿음이 크도다."

💡 라합은 여리고 성과 가나안 지역을 살피기 위해 잠입한 정탐꾼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다.

“내가 아노라(야다)”

야다: 감각 기관에 의해 얻은 지식이나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 더 나아가 남녀의 성적인 관계를 통해 아는 것까지 포괄하는 폭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는 이스라엘조차도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가 있었다(렘4:22).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정보가 없다거나 하나님을 잊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야다'의 의미로 볼 때 본문은 기생 라합의 놀라운 신앙 고백임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여리고 성을 포함한 모든 가나안 땅을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는 약속에 대한 확신을 고백한 것이다.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라합이 가나안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는 여호와의 약속을 ‘들었노라' 라고 말하지 않고 ‘아노라' 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즉 라합은 수동적이고 인지적인 앎의 상태를 말한 것이 아니고 실제적이고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만 고백할 수 있는 능동적이고 체득적인 간증을 한 것이다(암 3”2). 그녀가 만약 지식적인 앎에서 그쳤다면 이런 고백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라합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참 신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였던 것이다(약 3:25).

 

Ⅱ.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자기와 자기의 친척들이 여리고의 파멸의 날에 멸망당하지 않고 보호를 받게 해 줄 것을 약속시켰다(12,13절).

1. 그녀의 나라에 다가오고 있는 변혁에 대한 라합의 신앙의 진지성과 위력이 나타나 있다.

라합은 이스라엘인들과 관계를 맺으려고 애쓰면서 친절히 대해주었다. 라합은 자기 나라의 점령을 미리 내다보았고, 믿음으로 미리 정복자들의 은총을 구했었다. 이와 같이 노아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자기 집을 구원하고 세상을 정죄했다" (히 11:7). 죄인들의 파멸과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천국의 땅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를 참으로 믿는 사람은 닥쳐오는 진노를 부지런히 피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평에 가담함으로써 영생을 얻으려고 애쓸 것이다.

  1.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의 친척들의 안전을 위한 라합의 배려는 자연적인 애정에 있어서 칭찬할 만한 본보기가 된다.

이와 같은 라합의 태도가 우리 모두에게 보여 주는 바는 우리도 우리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그녀와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하며,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자신과 함께 그들을 계약의 테두리 안으로 이끌어 들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합의 남편이나 자녀에 대한 언급은 없는 대신 부모와 형제 자매에 대한 이야기만 나와 있지만, 그들에 대해서도 라합은 적절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 정탐꾼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자기와 맹세해줄 것을 요청한 것은, 라합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고 그를 믿고 하나님께 대한 경건심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 은 경건한 종교적인 행위였다.
👀 하나님 외에 온전한 진실은 없으며, 모든 ‘진실성’과 ‘확실성’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확보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생 라합의 요구를 만족시킬 만한 증표는 하나님의 언약 자체뿐이었다. 라합은 정탐꾼들로부터 여호와의 이름으로 한 맹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여리고간의 전쟁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진리의 표' 를 삼았던 것이다(14,18절).

이처럼 거짓된 우상이나 변하기 쉬운 인간의 마음을 맹세의 근거로 삼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한 맹세를 진실한 표로 삼은 것은 라함의 영적 성숙함을 보여 준다.

후일 라합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생명을 구하였을 뿐 아니라 이방인 창녀의 신분에서 구원 공동체인 이스라엘 백성 안에 포함되는 축복까지 얻게 된다. 라합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포함되어 신분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 사건은 이스라엘 구원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은 그들의 혈통이나 신분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구원이 하나님께만 있다고 믿는 신앙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다. 따라서 라합처럼 이방인의 신분이라고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 소유하고 있다면 얼마든지 구원 공동체 안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출애굽 당시에 ‘중다한 잡족’ (출12:38)이 이스라엘에 포함되었던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은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신약 시대에 이방인들이 영적 이스라엘, 즉 성도가 됨으로써 완전히 성취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지, 결코 인간의 혈통이나 육신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요 1:12,13).

 

  1. 라합의 요청은 아주 정당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라합이 그들을 보호해 주었으니까, 그들도 라합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보인 친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합에 대한 정탐꾼들의 친절도 그녀에게 속한 모든 것에게까지 미치어야 한다. 이러한 일은 자기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의 위험까지도 불사했던 이 라합을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가장 작은 일이었다.

자비를 베푼 자는 자비를 받을 것을 기대해도 좋다. 라합은 자기가 정탐꾼들에게 보인 친절에 대한 보답으로 무슨 출세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들이 라합에게 입은 자비가 크기는 하지만, 라합은 오직 한 가지 요구 즉 자기의 생명이 일괄적인 파멸에서 구원될 것을 요구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친절을 보인 보상으로 에벳멜렉에게 어떠한 역경에서라도 그의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같이 될 것을(렘 39:18) 약속하시었다. 그러나 이 라합이 후에는 살몬의 아내로 이스라엘의 한 왕후가 되고 그리스도의 조상의 한 사람이 되는 데까지 지위가 올라가게 되었다(마 1:5). 충성되게 그리스도를 섬기며 그를 위해 고난을 겪으면, 그는 보호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가 생각하거나 요구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으로 갚아 주실 것이다.

💡 본문에서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꾼들에게 자신이 자비를 베풀었다고 말하는 것에는 상호 관계 속에서 성실을 다하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녀는 이스라엘과 여리고 성과의 전쟁에서 자신이 베푼 자비의 대가로 이스라엘을 향해 당당히 자비를 요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이 자비는 궁극적으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자비였으며, 하나님 백성의 일원이 되는 축복으로까지 이어진다.

 

Ⅲ. 정탐꾼들은 라합을 파멸에서 지켜 줄 것을 엄숙하게 약속했다(14절).

"우리의 생명으로 너희를 대신하겠다. 우리들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들의 생명만큼이나 중하게 여기겠다. 그리고 당신들 중의 누구를 해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해치는 것이 될 것이다."

아니, 차라리 이 말은 누구든지 그녀와의 약속을 깨뜨린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시기를 바란다는 뜻일 것이다. 라합은 이들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내걸었다. 그런데 지금 그 보답으로 이들은 라합을 위해서 자기들의 생명을 내걸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맹세는 공적 신앙과 민족의 명예를 걸고 된 일이다. 이들이 "여호와께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때" 라고 하는 말속에는, 자기들만이 아니라 자기들을 파견한 온 민족을 의미하고 있으며, 온 이스라엘이 이 맹세 속에 분명히 관계되는 것으로 본다.

이들은 이 일에 대해서 라합을 대접하는 것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권위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임을 의심하지 않았고, 여호수아도 자기들이 한 일을 인정해 줄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반 규례에 따라서는 그들이 가나안 족속과 계약을 맺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신 7:2), 진심으로 이스라엘의 유익을 도모하고 참으로 친절을 베푼 특수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마저 금지되어져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 은혜를 갚는 것은 자연의 철리이다.

👀 본문에 나타난 그들의 다짐은 쫓기는 정탐꾼으로서의 절박한 심정에서만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여호와의 이름으로(12,13절) 맺은 언약을 층실히 지키려는 성실성에서 나오는 다짐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다짐은 말만으로 끝나지 않았고 성설한 실천이 따를 수 있었던 것이다.

특별히 본문에 언급된 ‘생명을 대신하여' 언약을 지키겠다는 결의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언약에서도 나타난다. 즉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시내산 언약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출 20-23장)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된다.

누구든지 이 언약을 어기게 되면 자신의 생명으로 대신한다는 상징으로 화목 제물의 피를 취하여 절반은 제단에 뿌리고(출 24:6) 나머지 반은 백성들에게 뿌렸다(출 24:8).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들이 언약을 배신한 대가를 인간에게서 찾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찾게 만들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체결한 언약의 완성은 인간의 죽음을 대신하여 자기 생명을 대신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여기서 다음 사실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정탐꾼들이 라합과 맺은 약속.

일반적으로 보면, "우리가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14절). 우리는 약속을 하는 데만 친절한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이행하는 데도 진실할 것이며, 우리가 약속한 바를 이행하는 데만 진실할 뿐 아니라 너희 요구와 기대를 넘어서까지 친절을 베풀 것이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을 때로는 하나님의 친절과 신실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시 117:2).

어떤 경우로건 우리는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누가 손을 대면 그 피는 우리 머리로 돌아오리라" (19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보호할 책임을 진 사람들에게 대해 우리의 부주의로 해를 끼치게 되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 죄책을 져야 하며, 그 피는 무거운 짐으로 남게 될 것이다.

👀 ‘인자(헤쎼드)'와 ‘진실(성)(에메트)'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언약 관계와 관련하여서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창 24:27,49; 32:10).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과, 이스라엘 정탐꾼과 라합이 맺은 언약이 유사한 성격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본문에 언급된 ‘헤쎄드'와 ‘에메트'는 라합과 정탐꾼들이 맺은 맹세의 언약과 관련하여 라합 사건이 가지는 핵심적인 주제틀 밝혀 주는 열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또 한편 라합이 이스라엘 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될 수 있었던 원리는 이스라엘 정탐꾼과 맺은 맹세의 언약의 요구에 부합하여 성실하게 주고 받은 ‘자비'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라합은 이스라엘이 누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얻었다. 그들이 맺은 언약은 구원의 진리이신 하나님의 언약을 전제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새언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언약의 또다른 당사자인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완성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성령 하나님의 내주 사역을 이루셨다. 이제 우리 믿는 이들은 언약의 당사자로서 이 언약에 부합한 자기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 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의 상징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하여 살아가야 한다(마 11:30).

 

2. 약속에 대한 단서와 제한.

비록 이 정탐꾼들이 급하게 서둘고 당황하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이들이 얼마나 약속 체결에 있어 신중하며 실행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에 자기들을 절대로 속박시키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계약은 신중하게 체결해야 한다. 뒤늦게 "맹세 때문에 악을 행해야" 하는 곤경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약속을 세심하게 지킬 사람은 약속을 맺는 데도 신중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갈 그런 조건들까지도 삽입시키는 것이 좋다.

정탐꾼들의 약속은 세 가지 단서를 수반했다. 이것들은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만일 아래의 세 가지만 이루어진다면 라합과 그의 모든 가족들을 반드시 보호해 줄 것이라고 했다.

👀 이스라엘 정탐꾼들의 맹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한 것이기 때문에(12.13절) 그들이 보장하는 라합 가족의 구원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여호와 이름으로 결속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전체 차원에서의 약속이었고 그들이 말하는 내용의 신실성은 단지 윤리적 차원에서가 아닌 신앙적인 차원에 근거한 것이었다.

여호수아서의 전반부에 정탐꾼의 사건이 기록되어 었으며, 여기서 객관적인 정탐의 내용을 기록하기보다 이방 나라의 기생 라합과 맺은 신앙적 차원의 맹세가 강조되고 있는 것은 추후 자신의 믿음과 신앙적 맹세에 의하여 생명을 건짐받은 라합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큰 일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하나님께서는 라합의 후손으로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셔서 구속사를 완성케 하셨다(마 1:5). 즉 라합은 여리고 성이 멸망하는 가운데서도 구원을 받았으며 후에 유다 지파의 살몬과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라합과 살몬 사이에는 룻기에 나오는 베들레헴의 유력한 자 보아스가 태어나게 된다. 보아스는 모압 여인 룻과 결혼하였으며 그 혈통에서 다윗 왕이 출생하였다(룻 4:18-22). 뿐만 아니라 이 혈통은 이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야께서 지상에 오시는 통로가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은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과 우상 숭배가 성행했던 모압 출신의 여인 룻을 메시야 혈통을 이루는 구속사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구원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하지 않으며 남녀의 차벌이 없이 모든 죄인에게 임함을 예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1400여년 전에 벌써 하나님께서는 비천한 여인 라합을 준비하셔서 당신의 구속사를 차질 없이 이루어 가셨던 것이다.

 

(1) 라합은 붉은 끈을, 지금 정탐꾼들을 달아 내린 그녀의 창가에 매어둘 것.

이것은 그녀의 집을 표시하는 것이다. 정탐꾼들은 이스라엘 진영에게 아무리 맹렬하고 열렬하게 군사적인 처리를 해나간다고 해도 어떠한 군인도 이 구별된 집에 대해서는 여하한 폭력도 행사하지 못하도록 각별한 주의를 주지시켰을 것이다. 이것은 문설주에 피를 뿌림으로 장자들이 죽음의 천사로부터 보호함을 받은 것과 같았다. 이것은 같은 색깔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피가 양심에 뿌려져 보호함을 받게 되는 신자의 안전을 암시한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라합이 사용했던 바로 그 끈이 자신을 구원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며 우리에게 평안을 베풀어주실 것을 기대해도 좋다.

👀 19절 본문의 ‘붉은 줄' 은 그 말 뜻 자체에 이미 ‘소망'이라는 뜻이 있다.

이는 정탐꾼들이 라합과 맺은 언약대로(12-14절) 그녀와 그녀의 가족둘을 살려주기 위해 창문에 달아 놓게 한 붉은 줄의 의미가 바로 ‘소망' 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라합은 붉은 줄을 창에 달아 놓음으로 자신의 믿음이 성취되고 이스라엘의 정탐꾼들과 맺은 언약이 이루어져서 여리고 성의 멸망으로부터 자신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창문에 묶은 ‘붉은 줄'은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으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는 증표로 부각되고 있다. 그리고 죽을 운명에서 구원의 소망을 보여 주는 창문에 매단 붉은 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라합이 붉은 줄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 구원 언약의 성취는 본문의 붉은 줄이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처럼 성도의 구원의 ‘소망' 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2) 라합이 안전을 원하는 모든 사람은 그녀와 함께 집안에 있게 해야 하며, 여리고 성이 점령당할 때 아무도 문을 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18,19절).

이것은 "필요한" 단서인데, 라합의 친척들이 정해진 집안에 있지 않는다면 절대로 분간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웃과 섞이게 된다면 거기에는 구제할 도리가 없으며, 칼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들을 삼켜 버릴 것이다.

이것은 또한 "합리적인" 단서이기도 한데 이들이 구원받게 되는 것은 라합 때문이니까. 그녀의 집만이 여리고에서 은총을 받아야 한다. 그들이 "믿지 않은 자들과" 함께 멸망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이 성에 다가오는 파멸의 확실성과 무서움을 더욱 믿어야 하고, 그리고 노아가 방주로, 롯이 소알로 피한 것처럼 약속된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그들과 분리됨으로써 "이 패역한 세대에서부터 자신들을 구원"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단서가 되는데, 교회에 나아와 구원 얻을 사람들은 신자들과 더 친밀하게 사귀어서 "정욕으로 인하여 생긴 이 세상의 타락에서 피하고" 또 다시 세상으로 말려드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 이스라엘의 여리고 함락시 칼을 든 이스라엘의 군사들로부터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라합의 집에 모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자신의 죄로 인해 도저히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구원의 징표를 찾아야 하며, 구원의 징표가 있는 안전 지대로 속히 피해야 하는 것이다. 그곳은 바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피흘려 들아가신 에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요 그 보혈의 공로로 세워진 교회이다.

 

(3) 라합이 비밀을 지켜야 한다(14절).

"만일 너희가 이 일을 누설치 아니하면" 즉 "만일 너희가 우리가 간 뒤에 배신하거나 이 맹세를 퍼뜨려서 다른 사람들도 자기네들의 창에다 붉은 끈을 매어달아 우리를 혼동시킨다면 그때는 우리는 맹세에 대하여 결백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이다. "주의 비밀" 을 슬기롭게 지킬 줄 모르는 자들에게는 주의 비밀이 아무 가치가 없다.

Ⅳ. 라합은 이 새로운 친구들의 안전을 위해서 충분한 배려를 해주었고 그래서 이들을 "다른 길로 보냈다" (약 2:25).

정탐꾼들이 라합과 계약을 맺고, 거기에 동의했다는 것이(21절) 충분히 이해된 후에, 그 때야 라합은 이들을 "밧줄로 성벽에 달아 내렸다" (15절). 여기서 라합의 집의 우정어린 이 상황은, 바울이 다메섹에서 도망할 때와 마찬가지였다(고후 11:33).

라합은 또한 이들이 안전하게 달아나도록 갈 길을 지시해 주었다. 아무래도 라합이 이들보다 이곳 지리를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16절). 라합은 이들에게 산길을 택해서 추적자들이 돌아갈 때까지 산에 피해 있으라고 지시했다. 아무래도 그때까지는 안전하게 요단을 건너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며 자기들의 임무를 수행해 나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줄 믿는 것은 좋은 일이나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취할 수 있는 모든 지혜로운 방법을 무시하고 행동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신다고 고의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을 믿어야지 시험해서는 안 된다.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이 일의 비밀을 지키며 누설하지 말라고 하는 이 부탁은 그녀의 안전을 위한 것으로, 만일 라합이 이스라엘의 칼에 자기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자랑하다가 이스라엘 족속이 그녀를 보호하러 오기도 전에 여리고 왕의 손에 잡히어 반역죄로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칼빈은 해석한다. 그래서 라합이 정탐들의 안전을 위해서 충고해 준 것과 같이 정탐꾼들도 그녀의 안전을 위한 사려 있는 충고를 해 주게 된다. "자신을 삼가라" 고 하는 선한 충고는 우리가 언제나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할 바이다.

 

▶ 무사히 돌아온 정탐꾼들 (여호수아 2:22-24)

우리는 본문에서 여호수아가 파견했던 정탐꾼들이 무사히 귀환한 것과 그들이 가나안을 치러 나가도록 큰 용기를 불러 일으켜 주는 장면을 보게 된다.

만일 이 정탐꾼들이 모세가 파송했던 못된 정탐꾼들처럼 백성들을 실망시키려고 했더라면, 그들은 자기들이 본 바 여리고성의 높고 든든한 성벽과, 여리고 왕의 비상한 용기와 그들이 어떻게 구사일생으로 빠져 나올 수 있었던가를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며 여호수아에게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1. 이들의 무사 귀환 그 자체가 여호수아에게는 용기가 되었고 선한 징조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원수의 나라에 라합과 같은 선한 친구를 마련해 두시며, 여리고 왕의 분노와 추적자들의 탐색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무사히 귀환했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배려의 표지가 될 수 있었고,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살핌 아래 있다는 사실을 확증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행진이 의심없는 승리의 행진임을 믿게 해 주었다. 이 정탐꾼들을 놀라웁게 보호해 주신 하나님이 병사들도 보호해 주실 것이며, 전쟁의 날에 이들의 머리를 지켜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1. 정탐꾼들이 가지고 온 보고는 더욱 더 고무적인 것이었다(24절).

"그 땅의 모든 거민들이 비록 싸울 결심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들 때문에 간담이 녹아 지혜를 짜 내지도 못하고 싸울 용기도 없더이다. " 여기서 정탐꾼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니, 그것은 모두 우리들의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오직 가서 소유할 뿐입니다. " 죄인들의 공모는 때로는 그들의 파멸의 확실한 징조가 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들의 영적 원수들을 대항하면 그들은 우리 앞에서 달아날 것이다.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 마땅히 기회가 주어질 때면, 우리는 단순히 정복자 그 이상의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불러 일으켜 주는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