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 성경읽기
사사기 12, 사도행전 16, 예레미야 25, 마가복음 11
묵상구절
10:1 그 때에 여호수아가 아이를 빼앗아 진멸하되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한 것과 또 기브온 주민이 이스라엘과 화친하여 그 중에 있다 함을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듣고
10:2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기브온은 왕도와 같은 큰 성임이요 아이보다 크고 그 사람들은 다 강함이라
10:3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헤브론 왕 호함과 야르뭇 왕 비람과 라기스 왕 야비아와 에글론 왕 드빌에게 보내어 이르되
10:4 내게로 올라와 나를 도우라 우리가 기브온을 치자 이는 기브온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화친하였음이니라 하매
10:5 아모리 족속의 다섯 왕들 곧 예루살렘 왕과 헤브론 왕과 야르뭇 왕과 라기스 왕과 에글론 왕이 함께 모여 자기들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올라와 기브온에 대진하고 싸우니라
10:6 기브온 사람들이 길갈 진영에 사람을 보내어 여호수아에게 전하되 당신의 종들 돕기를 더디게 하지 마시고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 우리를 구하소서 산지에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왕들이 다 모여 우리를 치나이다 하매
10:7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용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올라가니라
10:8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그들 중에서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
10:9 여호수아가 길갈에서 밤새도록 올라가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니
10:10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게 하시므로 여호수아가 그들을 기브온에서 크게 살륙하고 벧 호론에 올라가는 비탈에서 추격하여 아세가와 막게다까지 이르니라
10:11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하여 벧 호론의 비탈에서 내려갈 때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우박 덩이를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았더라
10:12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 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10:13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0:14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10:15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길갈 진영으로 돌아왔더라
매튜 헨리 / 옥스퍼드
▶ 스페셜포인트
- 10:1-5
-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주동이 되어 가나안 남부 동맹이 결성되는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기브온 인근에 위치한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은 왕도와 같은 기브온마저 이스라엘에 항복하여 화친을 맺은 사실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헤브론, 야르못, 라기스, 에글론 등 가나안 남방의 주요 성읍의 왕들과 세력을 규합하여 먼저 기브온을 침으로써 이스라엘에 타격을 입히고자 하였다.
- 10:6-15
- 절박한 위기 의식을 느낀 기브온의 원군 요청에 따라 이스라엘이 출전함으로써 가나안 남부 지역 정복 전쟁이 자연스럽게 전개되고 있는 것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은 벨호론(Beth Horon)에 오르는 비탈길과 아얄론 골짜기의 내리막길을 따라 남부 동맹군을 추격하며 승승장구한다.
- 이 과정에서 여호와께서는 우박을 내려 이스라엘의 수많은 적군을 죽이시니 해와 달이 멈추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초자연적인 이적을 베풀어 이스라엘의 승리를 완전히 굳게 해 주셨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같은 주권적인 개입으로 가나안 남부 동맹군에 대해 대승을 거두게 된다.
10:1-11:15절에서의 가나안 남방과 북방의 정복 과정에서 나타난 특징을 두 가지로 꼽을 수 있다.
첫째, 이스라엘의 승리는 여호와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결과라는 것이다.하솔 왕으로 대표되는 가나안 북방 세력과의 싸움에서도 그 승리의 원인은 역시 “여호와께서 친히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붙여서 몰살시키신"(11:6) 결과였다.
가나안 남부 동맹군과의 기브온 전투에서의 대승 이후, 성경 기자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10:14)는 마무리 진술로써 승리의 요인이 여호와께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그 군을 섬멸하고 아모리 다섯 왕을 처형하고서 남부 정복을 완성한 이후에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고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과 그 땅을 단번에 취하니라"(1 0:42)는 진술을 빠뜨리지 않고 있다.
둘째, 가나안 정복 전쟁은 인간편에서도 최선을 다한 전쟁이었다는 사실이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주로 사용한 공격 방법은 기습 작전이다. 가나안 남방 동맹군들에 대해서도 밤새도록 행군하여 갑자기 급습을 했으며, 북방 동맹군에 대해서도 적군이 전혀 예상치 못한 때에 습격하는 방법을 취했다.
이처럼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함께하심을 믿고서 안일하게 대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기의 모든 지략과 힘을 기울여 최선을 다해 싸우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또한 여호수아는 전쟁의 과정에서 여호와의 명하신 것은 행치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10:40; 11:15)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스라엘 군대가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패배를 경험했던 아이 성 일차 전투를 상기해 보라. 물론 아간의 범죄가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온 이스라엘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정탐의 말을 듣고 소수의 인원만으로 승리를 얻으려 했던 여호수아의 자만심 또한 중요한 패인이었다.
오늘날 다양한 모습의 영적 전쟁을 싸워야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위의 교훈을 새겨야 한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만 하면 승리가 보장된다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지 않는 자의 편에 서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열심은 결코 인간의 게으름을 조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5:17)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열심은 순종하고자 하는 자의 마음에 인간의 수준을 초월하는 고귀하고도 탁월한 열심의 불을 지피는 것이다. “하나님께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것처럼 기도하고 나에게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것처럼 일하라"는 무디 (D.L. Moody) 의 말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이 시대의 여호수아들을 위한 금언이 될 것이다.
▶ 동맹군과 기브온의 대전 (여호수아 10:1-6)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은 이제 가나안 땅에 꽤 오랫동안 머물러 있게 되었고 아무런 큰 일들이 생겨나지 않았다. 그들은 기적에 의해서 여리고를 점령하게 되었고 전략으로 아이성을 점령했으며 기브온은 항복해서 들어 왔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들의 승리의 행진이 이들의 가나안 입성의 화려함과 출발의 영광에 발맞추어 진행되지 않는 것 같이 보였다. 이들 가운데는 이 지연상태에 대해 초조하게 생각한 나머지 여호수아의 느린 행동에 대해서 불만을 터뜨려 놓기도 하고 왜 자기들이 자기들의 원수가 동맹을 맺고 자기들을 향해서 맞서기 전에 당장 가나안의 중심부로 쳐들어가지 않느냐고 또는 자기들의 명성과 성공이 이토록 자자할 때 바보스럽게 가만히 있어야 하느냐고 대드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호수아의 사려가 드디어 나태와 비겁과 사기의 부족으로 비난받게 되었다.
👀 1절, 진멸(’하람')하되
본절은 아모리의 다섯 왕들이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을 중심으로 가나안 남부 동맹을 맺게 된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이 단어는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인간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여겨 철저하게 파멸하거나 바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 동사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가나안 정복 전쟁이 세속적 전쟁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임을 잘 보여 준다.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이 철저하게 진멸되었고 기브온 거민도 이스라엘과 화친 관계를 맺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택은 자신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치게 될까봐 염려하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가나안 남부의 다른 네 왕과 더불어 동맹을 맺게 되었다(3,4절). 그러나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은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인 바 이들 역시 하나님의 진멸 대상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1. 그러나 가나안이 하루에 점령되어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조금씩 조금씩"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 내실 것을 말씀하셨다(출 23:30).
그를 믿는 사람은 절대로 서두르거나 혹은 자기가 기대하는 것만큼 빨리 그 약속이 성취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단정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2. 여호수아는 가나안 족속이 침략해 오도록 기다렸다.
그들로 먼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공격해 오도록 하라(아니면 이스라엘의 동맹이 되게 하라). 그러면 그들에게는 멸망이 있을 뿐이며 적어도 그 멸망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보다 정당하고 합리적인 구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수아는 이들을 진압하기에 충분한 용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원수들이 먼저 일격을 가해 오도록 기다린다. 그럴 때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보기에도 정당한 행동으로 나타날 수 없다. 그들은 이미 기브온 족속이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에게 은총을 입게 되었는가를 본 이상 그들은 자기들의 항거에 대해서 더 이상 변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3. 이스라엘이 이렇듯 조용히 쉬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유리한 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들 작은 왕들의 세력이 한꺼번에 뭉쳐지게 되면 이들을 보다 쉽게 일격에 파멸해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대항해서 동맹하도록 그 생각을 저들 마음 속에 불어 넣으실 때 바로 이 의도를 가지고 계셨다. 원수들이 서로 힘을 합하도록 계획했을지라도 여호와께서 의도하신 것은 그들을 타작 마당에 곡식단을 모으듯 저들을 모아 한꺼번에 타작하기 위함이었다(마 4:12) ("잠깐 머물러라. 그러면 더 빨리 이루어질 것이다" 라는 말과 같이). 때로는 역설을 보이는 것이 올바른 사려있는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 라합, 기브온 거민들과 아도니세덱의 반응의 차이점
같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라합과 기브온 거민들 —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받아들임. 아도니세댁과 그의 백성들 — 이스라엘을 대적함.
이스라엘 민족이 한동안 가나안 족속과 전쟁을 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바로 기다리던 사건 하나가 터진다.
1. 다섯 왕이 기브온 족속을 대항해서 동맹을 맺는다.
👀 기브온 거민들은 비록 정당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이스라엘로부터 여호와의 능력을 힘입고자 한 반면, 아도니세덱은 순전히 인간적인 힘만을 얻고자 했다.
그리고 그 결과에 있어서도 여호와의 능력을 힘입고자 한 기브온 거민은 승리한 반면 인간의 힘에 의존한 아도니세덱은 무참히 패배하였다.
인본주의가 만개한 오늘날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들은 본문의 어리석은 아도니세덱처럼 자기의 도움을 지식, 물질, 권력 등 세상에서만 애타게 찾고 있다. 그러나 하늘의 시민권을 갖고 있는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의 도움을 오직 하늘에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방패되시는(시 3:3)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근본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이 동맹을 발설한 주모자였다. 그는 아주 좋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이름은 "의의 주" 라는 뜻이다) 아마도 "의의 왕" 멜기세덱의 후손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이름과 혈통이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악인처럼 보며 특히 그의 조상 멜기세덱이 그토록 성실한 우정을 보였던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대해서는 간악한 원수였던 것 같다. 그는 이들 왕들 중에서 가장 존귀한 제왕이며 가장 윗자리에 있다는 것 때문에 (아마도 여타 왕은 그를 의지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자기들 가운데 가장 덕망있고 힘이 있고 그리고 싸움 잘하는 이 왕을 존경하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가 여리고와 아이성이 정복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성들 중에 가장 강한 도성의 하나였을 기브온마저 항복하고 났으므로-이것이 그를 경악시킨 주원인이었을 것이다. - 자기 나라 안에 파고 드는 위험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잘 깨달았기 때문에, 아도니세덱은 자기 인근 왕들을 불러 모아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게 했다. 그래서 먼저 기브온을 대항해서 그가 모을 수 있는 온 병력을 집결시켰다. "내게로 올라와 나를 도우라, 우리가 기브온을 치자" 라고 그는 말한다.
그가 이 일을 결심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정책인 면에서.
그는 이 성을 탈환하고 싶었다. 그것은 이 성이 강한 성이며, 그리고 이 성이 누구의 수중에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 그의 나라에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2) 감정에서.
자기가 베풀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을 베풀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딴 마음을 품고 자기들의 나라를 배신하고 그들의 공통의 적을 도와 주었다는 핑계를 내세워 여호수아와 화친한 이 백성들을 징계함으로써 저들을 따르려고 하는 다른 나라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만들어 놓으려고 했었다. 이와 같이 사탄과 그 도구들은 하나님과 화친한 자들에게 대해서 전쟁을 걸어온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고 그리스도에게로 전향한 사람들을 이탈자처럼 대우하더라도 이상히 생각지 말라. "
2.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이 처해 있는 곤경과 위험에 대해 여호수아에게 전갈을 보낸다(6절).
이제 그들은 이스라엘과 맺은 동맹의 은전을 기대한다. 비록 그것이 기만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사실이 드러난 후에 다시 확인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여호수아가 자기들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1) 도의심에서.
그들은 그의 종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첫 번 인사에서(9:8). "우리는 당신의 종들입니다" 라고 한 것과 같은 아첨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그들은 종들이 되었다. 가장 불쌍하고 보잘 것 없는 자기들의 종들을 보살피고 그들을 바로 할 수 있는 힘이 주인의 수중에 있을 때, 종들로 하여금 불행을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은 주인의 의무다. 충성을 바치는 사람이 보호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다윗도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시 119:94)라고 하나님께 간청한다. 그리고 만일 우리도 하나님의 것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다.
(2) 명예상.
이들이 자기들의 원수와 싸우게 된 근거는 그들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표시한 존경과 그들이 맺은 계약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여호수아는 이들이 공격을 당하는 것은 자기와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이들의 애착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들을 돕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윗은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훌륭한 호소거리가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주를 위하여 훼방을 받았나이다" (시 69:7). 우리의 영적 원수들이 우리를 대항해서 진을 치고 우리를 삼키려고 위협할 때 우리는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믿음과 기도로 우리의 여호수아되신 그리스도에게 나아가 힘과 은총을 구하자. 그러면 우리도 똑같은 평화의 응답을 얻을 것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고후 12:8, 9).
👀 기브온은 이스라엘과 화친함으로써 이스라엘의 관할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브온은 당시 벧엘이나 아이성보다도 크고 강력했으며 가나안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가나안을 남북으로 양분하는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습니다. 따라서 기브온의 항복은 가나안 족속들에게 치명적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기브온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예루살렘에게는 심각한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은 자신이 속한 아모리 족속의 다른 지역 성읍들로 더불어 군사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대적하기에 앞서 먼저 배신자이자 가나안의 주요 거점에 위치한 기브온을 응징함으로써 자신들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악의 무리도 자신을 배신한 자를 그냥 놔두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상에 속했던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세상으로부터 온갖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도 같은 성격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돌아와 당신께 속한 자들을 늘 지켜 보호하여 주시기 때문에 성도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안전할 수 있습니다.
▶ 태양이 멈추고 (여호수아 10:7-14)
Ⅰ. 여호수아는 기브온 족속을 도울 결심을 하고 또 하나님께서는 이 결심을 북돋아 주셨다.
1. 그는 길갈로 올라갔다(7절).
즉 그는 기브온을 구하기 위해서 이 원정을 계획하고 결단하고 준비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첫발을 내딛기 전에 그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는 말씀을 하셨을 거라고 생각된다. 여호수아가 이렇게 자기의 새로운 우방을 돕는 일은 관대하고 정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왕은 자기가 기브온을 공격할 때 여호수아가 이들을 도와 주리라고 하는 생각은 거의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기브온 족속들이 기만 작전에 의해서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이들을 가나안 족속들같이 방기해 버릴 것으로 생각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는 확신을 가지고(4절), 기브온을 치자고 말한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들을 살려 주겠다고 한 약속이 스스로가 그들을 죽이지 않겠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죽음을 막아줄 힘이 자기 수중에 있을 때 그들이 살육 당하는 것을 수수방관하고 보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잠 24:11, 12). 여호수아는 이들이 이스라엘 하나님의 신앙과 예배를 받아들일 때 이들도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보호 받으려 왔음을 알고 있었다(룻 2:1, 2). 그러므로 그는 자기 종들을 보호해야만 했었다.
👀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용사로 더불어..
군사 ‘군사'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 전쟁의 백성'이 된다. → ‘전쟁의 백성'은 가나안 정복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의 성격을 잘 보여 주는 용어이다. 가나안의 정착이라는 하나님 언약을 성취하기까지 이스라엘은 전쟁을 위해 존재하고 전쟁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야 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전쟁을 즐기는 자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영적으로 대적하는 자들과의 실제적인 대적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을 위해 숱하게 치러야 했던 전쟁은 단순히 세속적이며 정치적인 싸움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한 ‘거룩한 전쟁' 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스라엘의 거룩한 전쟁을 이끄시는 하나님 자신도 ‘용사'로 묘사된다(출15:3). 그리고 ‘예흐와 체바오트’, 즉 ‘만군의 여호와'는 그분이 이스라엘 군대의 사령관이 되신다는 것을 반영하는 이름이다(삼상 17:26,45). 용사 싸움에 능한 자로 인정되어 전쟁에서 지휘관과 같은 특별한 임무를 맡게 된 용사. 용사의 원어가 하나님을 묘사할 때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번역된다(사10:21). 그리고 이러한 명칭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싸우시는 그의 구원의 능력을 강조하는 표현이다(습3:7).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여된 군사로서의 명칭은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 이것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이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며 적진에 함께 출전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지금까지 개별 성읍 단위의 소규모 전투와는 달리, 가나안 남부의 연합군과의 대규모 전투가 예상되는 기브온 전투에 출전하면서 이스라엘의 군사를 총동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맡겨진 일을 위해 용기를 불어넣어 주신다(8절). "두려워 말라. "즉
(1) "네가 하는 일이 선하고 너의 소명이 분명함을 의심치 말라. 비록 그 일이 기브온 족속을 돕는 것이긴 하지만 너는 마땅히 해야 될 일을 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진실로 너와 함께 하시리라. "
(2) "적의 세력을 두려워 말라. 비록 많은 왕들이 너를 대적하여 동맹을 맺고, 기브온을 없애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또 그렇게 필사적으로 싸우게 되겠지만 실망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너의 손에 붙였노라.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파멸하도록 정하신 자들인즉 대항하지도 도망치지도 못할 것이다.
👀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적절한 떄에 자신의 목적과 뜻을 이루기 위하여 말씀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백성의 위기 상황이 있을 때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그의 백성들에게 먼저 찾아오셨던 것이다.
Ⅱ. 여호수아는 이 결심을 실행하며, 하나님은 이 일을 집행하도록 그를 도와 주신다. 여기서 우리는
1. 여호수아의 놀라운 근면과 적이 패배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본다. 이 행위에서
(1)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을 속히 구원하려는 호의를 보여 주었다(9절).
"그들에게 갑자기 이르렀다."
이와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는 지연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만일 이스라엘 지파 중 하나가 위험에 처했다고 해도 여기 기브온을 구원하기 위해서 한 것보다 더한 관심과 열성을 보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일을 생각해 볼 때, 다른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개종한 이방인을 위해서나 본토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위해서나 간에 동일한 규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동맹한 왕들이 그들의 병력을 몰고 기브온을 마주 치기 직전에 여호수아가 이들에게 도착했다. 이 놀라운 사실이 그들을 너무나 당혹하게 했다. 이 원수들은 실제로 한 집단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따라서 그 몸에는 목도 하나뿐이었다) 이 일에 있어서는 급히 서두름이 과거에 완만한 행동만큼이나 긴요한 일이었다. 그는 바로 이 총체적인 집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그 일이 완숙해져서 실행하게 되었을 때는, 아무도 과거엔 느린 것처럼 보이던 여호수아만큼 신속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아무도 여호수아를 향해서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룬다" 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여호수아는 당일에 기브온에 도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원수들을 치는 데에 여하한 유리한 입장도 놓치거나 혹은 자기의 새로운 동맹자의 기대를 빗나게 하거나 혹은 무관심했다는 인상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는 이 원정이 성공할 때까지 잠을 자지도 않고 졸지도 않기로 굳게 결심하고 밤새도록 행군해 갔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데리고 간 병력도 힘쎈 용사들이었음이 틀림없다. 몸이 건강할 뿐만 아니라 견인불발의 사람들이었으며 이 일에 열심히 있는 군인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이 피로를 견디어 내지도 못했을 것이며 자기들의 지도자에 대해서 불만을 터뜨리며 "이것이 우리가 가나안에서 약속받은 나머지 몫들인가?" 라고 질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의 고난이 행복한 정착을 위해서 있는 것임을 잘 알고 또 거기에 잘 따라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도" 여기서 "역경을 견디는" 법을 배우고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 가며", 자기들의 종교가 이따금 밤잠을 자지 못하게 할지라도 허망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게 될 때 그 때에 충분히 휴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가 이토록도 긴장하여야만 했는가?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원수들을 그의 손에 붙이시기로"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들의 노력을 게을리 하거나 대신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을 불러 일으키고 경주시키기 위한 것이다. 참 신앙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데는 서두르지 않으나 그 일을 실행하는 데는 서두른다. 그것은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근면하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온 힘을 다해서 공격할 때 그의 크신 능력을 나타내어 적을 파멸하신다(10,11절).
여호수아는 의기저상한 이 적들을 때려 부술 수 있는 충분한 수효의 막강한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원수들은 전쟁의 정해진 운명에 따라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 스스로가 이 크고 결정적인 전쟁에 나타나시사 가나안 족속들을 대항해서 하늘의 포문을 여셨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것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도 아니며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로" 된 것임을 증명하려 하심이었다(시 44:3). 여호와께서 그들은 이스라엘 앞에서 패망케 하셨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만을 했으나 실상 하나님께서 모두 맡아 하시었다.
[1] 하늘이 그들을 대항해서 싸운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원수들이 얼마나 큰 공포와 혼동에 빠졌을 것인가 하는 것은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누가 하늘의 능력과 대항하며 거기서 피하며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참 하나님을 모욕했고 오직 창조주에게만 돌려야 할 경배를 피조물을 섬기는 데로 바꾸어 하늘의 별들을 경배함으로써 하나님의 명예를 약탈했었다. 그러므로 이제 하늘의 천군들이 그들과 맞서서 싸우며 그들이 우상으로 만들어 섬기든 피조물의 한 부분조차도 그들을 대항해서 싸우며 그들의 파멸을 축하한다(렘 8:2). (오직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우리 스스로가 그의 사랑을 지키는 일 외에 세상에 어떤 피조물도 희생이나 제사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 수는 없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승리한 이스라엘 민족의 손쉬운 노략물이 되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2] 공포가 그들에게 엄습했을 뿐만 아니라 우박이 내려 그들을 크게 도륙했다. 이 우박이 너무나 크고 강하게 내렸기 때문에, 비록 이스라엘 군대가 부지런히 죽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의 칼에 죽은 숫자보다 우박에 죽은 숫자가 더 많았다. 하나님 자신이 욥에게 "전쟁과 격투의 날을 위하여 쌓아둔" 눈과 우박의 창고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욥 38:22, 23). 그리고 그것은 여기서 가나안 족속의 멸망을 위해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거대한 대포에서부터 발사되는 이 우박은 겨낭된 사람에게 영락없이 들어 맞으며 (이들과 섞어 싸우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절대로 겨냥되지 않았다) 그것이 어디에 맞든지 간에 영락없이 죽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하며 어떻게 틀림없이 망하게 되는가를 살펴보라. 하나님의 손에 빠지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거기서는 빠져 달아날 곳이 없다. 어떤 이들은 벳호론이 기브온의 북쪽 아세가와 막게다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들은 뿔뿔이 달아났지만 그들이 어느 길로 도망치든 간에 우박은 그들을 추격했고 어디서든지 그들을 내리쳤다.
2. 여호수아의 위대한 신앙과 하나님의 능력은 기적적인 태양의 멈춤으로 절정에 이르고, 따라서 이스라엘의 승리의 날은 연장될 수 있었고 적은 철저하게 패망하게 되었다.
우박은 그 높이가 구름보다 높지 못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도움을 보여주기 위해서 구름보다 더 높은 곳에서 내려왔다. 태양은 쉬지 않고 움직여서 온 땅을 비추지만 이스라엘 민족을 도와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멈추어 친절을 베풀었다. 표징이 되는, "해와 달이 주의 나는 화살의 빛으로 인하여 그 처소에서 멈추었다" (합 3:11).
(1) 태양이 멈추도록 여호수아는 기도했다.
나는 이것을 기도라고 부른다. 그것은 "그가 여호와께 말씀 드렸다" 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12절). 엘리야에게 있어서도 우리가 읽은 대로는 그가 단지 가뭄을 예언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왕상 17:1), 그것은 기도한 것으로 일컬어지고 있다(약 5:17).
[1] 여호수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을 봉사하는 일에 있어서 지칠 줄을 모른다. 그는 온 밤을 행군하고 온 종일을 전투했었다. 누구든지 잠간의 휴식과 수면을 취하고 싶을 것이며 자기 군대에게도 약간의 휴식을 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혹은 고용된 사람과 같이 이토록 훌륭한 하루 일을 끝냈다면 열심히 그늘을 찾고 밤이 오는 것을 기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리어 그는 낮의 연장 이외에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여호와를 앙망하고 그를 위해 일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라!" (사 40:31)
[2] 그는 자연의 힘을 초월하는 그리고 정상적인 제도까지도 통제하시고 변경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절대 능력을 믿는 위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기적이 이러한 기회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의 마음 속에 소망을 자극시킨 것으로 보아 여호수아의 마음 속에 비상한 충동이나 자극이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된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원하거나 기대한 것은 건방진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 기도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드려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불러 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마음 속에 이 신앙을 불러 일으키시고 그리고 "너의 믿음대로 그리고 너의 믿음의 기도대로 너에게 이루어지라" 고 말씀해 주시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일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속에 불어 넣지 않으셨는데 그의 마음 속에 생겨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은 흔히 태양이 멈추어 줄 것을 원하기 보다는 완전한 승리를 이루기 위한 수천의 계획들을 그 마음 속에 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성도들 가운데서도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중보의 역할을 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기도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불러 일으키사 그것을 구하게 하시며, 그가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위해서 간구하도록 하신다(겔 36:37).
첫째로 "태양아, 머무르라" 고 말한 여호수아는 얼마나 위대한가!
그의 조상 요셉은 태양과 달이 그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었다. 그러나 그것이 상징으로 이루어진 후에 그의 후손대에 이르러 그것이 문자적으로 다시 이루어질 꿈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기도는 이토록 권위가 나타났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와 약속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평범한 기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시간에 이 목적을 위해서 신적 영감이 부여된 예언자의 기도였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기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구해지기만 하면 일반적으로 기도는 효능을 낸다는 것을 가르쳐 주며, 또한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 (사 45:11)고 한 기도의 존귀스러움을 우리에게 기억나게 해 준다.
그는 태양이 행동의 장소, 곧 전쟁의 장소인 기브온 위에 멈출 것을 명령한다. 그가 이 요구를 한 것으로 봐서 원수들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태양은 지금 저물고 있었다. 그가 일몰을 향해서 태양이 빨리 기울고 있는 것을 보지 않았더라면 낮이 더 길어질 것을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왕의 왕이 되신 분의 이름으로 이것을 명령한다. 달도 머물렀다고 한다. 천체 전체가 다 같이 그 길을 멈추어야 하는 것이 우주의 조화와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했었기 때문이다. 아니라면 사실 태양이 비치는 동안에는 달은 필요가 없었다.
여기서 아얄론 골짜기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기브온 근처에 있는 곳으로 아마 여호수아가 그 시간에 거기 있었던 걸로 생각된다.
둘째로 이스라엘 민족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담대한 노릇이며 아주 강력한 신앙의 확신을 실증해 주는 것이다.
만일 이 사건이 요구대로 응답되지 않았더라면 그에게 이보다 더 큰 치욕이 없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틀림없이 그를 미쳤다고 단정지었을 것이며 또한 그도 이토록 무모하게 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지시해서 마음 속에 나타내 주신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실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태양아 멈추라" 고 하는 말을 두려움없이 했었고 또한 그들에게 이 기적의 사건을 보도록 했었다.
그에게는 자기가 믿는 그분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전능의 능력을 믿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제힘으로 진행하며 전속력으로 움직이며 "용사처럼 달리기를 즐기는" 태양이 즉시 멈추어 서리라고는 도저히 기대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연의 왕국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자연의 기존 질서나 과정이 변하고 중단되며 하늘의 질서와 이 질서에 따라 움직이던 항구적인 관습이 깨어지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태양 아래 모든 족속들 가운데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이 비상 사태에 있는 그들에게 두배의 낮으로 은총을 베풀기 위해서 동시적으로(물론 이것은 당연히 따라 오게 되어 있는 것이지만) 지구의 다른 한 부분을 두배의 밤으로 놀라고 두려워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해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골고루 비치게 하신다" 라는 말씀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한 번만은 의로운 이스라엘에게 은총을 베풀기 위해서 불의한 자들은 태양이 멈추는 동안 보통 때보다 더 오랜 시간을 태양을 기다리게 하신 것이다.
👀 원수를 갚도록,
하나님의 복수에는 항상 당신의 백성에 대한 자비가 함께 나타난다. 즉 하나님의 복수는 복수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택한 백성을 위한 자비의 성격도 지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수는 항상 그의 언약 백성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본문에서 가나안 남부 연합군들에 대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들이 이스라엘의 원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 족속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하나님의 원수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리고 본문에서 원수를 갚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빛 아래에서 행해지는 이방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가 동시에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적적으로 멈추어 선 태양과 달로 인한 시간의 지연은 가나안 남부 연함군들에 대해서는 재앙으로 작용하였던 반면 이스라엘군에게는 대적을 섬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자비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2) 이 기도에 따른 놀라운 응답.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대로 이루어졌다(13절). "태양이 멈추고 달이 멈추었다." 태양과 지구 사이의 그 광활한 거리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의 한 마디에 태양은 즉시 멈추었다. 왜냐하면 하늘 위를 다스리는 하나님은 동시에 이 땅도 다스리시며 또한 자기가 기뻐하실 때는 "하늘들이라도" 여기에서처럼 땅에 귀를 기울이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기적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1] "종일토록 계속했다. "즉 태양이 다른 때 같으면 다시 돌아 올라올만큼 오랜 동안을 지평선 위에 머물러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 일이 일어난 때가 한 여름쯤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서는 태양과 태양 사이의 시간은 약 14시간 정도인데 이 날만은 약 28시간으로 길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사건이 일년 중 낮이 가장 짧은 시기에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여호수아가 낮의 연장을 원하고 기도했으리라고 하는 것은 더욱 있을 법한 일이다.
[2] 백성들은 원수들에게 충분히 보복할 수 있는 시간을 소유하게 되었고 따라서 원수들에게 완전한 패배를 안겨 주었다. 우리는 이따금 전쟁의 역사에서 밤에는 싸움이 끝나고 밤의 그늘은 피정복자들이 퇴각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하는 것을 읽어 보게 된다. 원수들의 이러한 도망의 이점을 막기 위해서 낮은 두배로 길어지고 이스라엘의 손은 원수들을 하나 없이 찾아 낼 수 있었다. "그에게는 밤도 낮과 같이 비취기 때문이다" (시 139:12).
[3] 여호와께서 기도와 신앙을 이토록 존귀하게 보시고 이스라엘을 이토록 존귀하게 하신 "이같은 날은" 그전에도 그 후에도 결코 없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놀랍게 인간의 요구를 들어 주신 일도 없었고 또한 이토록 놀랍게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신 일도 없었다.
[4] 이 일이 민족 시집인 "야셀의 집" 에 기록되어져 있다고 한다. 그 책 속에는 이 기회에 씌어진 시가 다른 시들과 같이 들어 있다. 아마도 "여호와의 전쟁기" (민 21:14)와 같은 책인 것 같은데 이것이 후에 야셀에 의해서 계속되고 완성된 것 같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서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머무르라" 라고 하는 이 말들은 아주 운율적인데, 아마도 야셀의 책에 있는 그대로 인용해서 이 사건의 대사로 사용한 것 같다. 여호수아의 책의 신적 증거를 한 인간의 작품인 야셀의 책에서 확증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수중에 그 책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것을 이 역사의 이야기와 비교하는데 이용했을 것이며 또한 그것을 세속 역사에서 말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이용해서 신성한 역사의 진실의 증명을 정당화하는 것도 될 것이다.
[5] 그러나 태양이 멈추어 서는 이 엄청한 기적을 단지 이스라엘 백성이 원수들을 찾아내어 더 많이 살육할 수 있는 보다 충분한 시간을 주는 것 그 이상의 어떤 뜻이 분명히 있다. 사실 이 일을 그 다음날 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a. 첫째로 하나님은 여기서 여호수아를 특별히 사랑하는 자로, 그리고 그가 존귀하게 하기를 기뻐하는 자로 높이심으로써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그리고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그런 형의 인간으로 만드시려고 했었다.
b. 둘째로 하나님은 여기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서 자기가 가나안에서 하시는 모든 일을 온 세상에 알리시려고 했다. 따라서 세상의 눈인 태양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거기서 하시는 위대한 일을 보아 두었다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길을 보고 "그 땅에서 이루어진 이 놀라운 일을 탐문할 때에" (대하 32:31) 보증하려고나 하는 듯이, 기브온과 아얄론 골짜기 위에 몇 시간 동안이나 멈추어 있어야 했었다. 이 소문은 모든 인근 나라들에 선포되어졌다.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보라" (시 46:8). 그리고 계속해서 말한다고 "땅 위에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이스라엘 나라처럼 위대한 나라가 어디 있는가" 아마도 이일이 굉장히 먼 나라에서 온 것처럼 가장한 기브온 족속들과 같은 경우가 아닌 진짜 사절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이스라엘과 우호 협정을 맺기 위해서 몰려들게 했을 것이라고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c. 셋째로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해와 달을 섬기며 이것들에게 신적 존귀를 돌리는 우상 숭배자들에게 이 모든 것들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며 비록 그것들이 높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들보다 더욱 높으신 분이라는 것을 실증함으로써 저들로 하여금 믿게 하고 당황하게 만드시었다. 또한 이렇게 하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우상 숭배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굳세게 만드시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우상 숭배에 빠질 것과 그리고 또 그렇게 함으로 스스로 타락하게 될 것을 미리 내다보셨다(신 4:19).
d. 넷째로 이 기적은 (이것은 학자 피어슨 감독의 주장인데) 훗날에 세상의 빛이 어두운 밤을 향해서 기울어 질 때 "의의 태양" 되신 우리의 여호수아가 솟아 올라와(말 4:2) 다가오는 밤을 막는 참 빛이 되실 것을 의미했다. 이 주장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영적 원수를 정복하셨을 때 태양에 나타난 기적은 이것과 정반대였다는 것이다. 이 때에는 한낮에 태양이 떨어져 버린 것처럼 어두워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의 승리를 이루시기 위해서 태양 빛을 필요로 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이 어두움을 자기의 누각으로 삼으셨다. 그리고
e. 마지막으로 이 전쟁의 날에 태양과 달이 멈춘 것은 마지막 날, 주의 크고 두려운 날에 태양이 어두움으로, 달이 피빛으로 변할 것을 예시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