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열왕기상 12, 빌립보서 3, 에스겔 42, 시편 94
묵상구절
19: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19:2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내매
19:3 그의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한 사람과 나귀 두 마리를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기뻐하니라
19:4 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머물게 하매 그가 삼 일 동안 그와 함께 머물며 먹고 마시며 거기서 유숙하다가
19:5 넷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의 사위에게 이르되 떡을 조금 먹고 그대의 기력을 돋운 후에 그대의 길을 가라 하니라
19:6 두 사람이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밤을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 하니
19:7 그 사람이 일어나서 가고자 하되 그의 장인의 간청으로 거기서 다시 유숙하더니
19:8 다섯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이르되 청하노니 그대의 기력을 돋우고 해가 기울도록 머물라 하므로 두 사람이 함께 먹고
19:9 그 사람이 첩과 하인과 더불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에게 이르되 보라 이제 날이 저물어 가니 청하건대 이 밤도 유숙하라 보라 해가 기울었느니라 그대는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내일 일찍이 그대의 길을 가서 그대의 집으로 돌아가라 하니
19:10 그 사람이 다시 밤을 지내고자 하지 아니하여 일어나서 떠나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으니 여부스는 곧 예루살렘이라 안장 지운 나귀 두 마리와 첩이 그와 함께 하였더라
19:11 그들이 여부스에 가까이 갔을 때에 해가 지려 하는지라 종이 주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가 돌이켜 여부스 사람의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십시다 하니
19:12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하고
19:13 또 그 종에게 이르되 우리가 기브아나 라마 중 한 곳에 가서 거기서 유숙하자 하고
19:14 모두 앞으로 나아가더니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가까이 이르러 해가 진지라
19:15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아 들어가서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었더라
19:16 저녁 때에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 그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거류하는 자요 그 곳 사람들은 베냐민 자손이더라
19:17 노인이 눈을 들어 성읍 넓은 거리에 나그네가 있는 것을 본지라 노인이 묻되 그대는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 하니
19:18 그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가나이다 나는 그 곳 사람으로서 유다 베들레헴에 갔다가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19:19 우리에게는 나귀들에게 먹일 짚과 여물이 있고 나와 당신의 여종과 당신의 종인 우리들과 함께 한 청년에게 먹을 양식과 포도주가 있어 무엇이든지 부족함이 없나이다 하는지라
19:20 그 노인이 이르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쓸 것은 모두 내가 담당할 것이니 거리에서는 유숙하지 말라 하고
19:21 그를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서 나귀에게 먹이니 그들이 발을 씻고 먹고 마시니라
19:22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19:23 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19:24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나
19:25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19:26 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엎드러져 있더라
19:27 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져 있고 그의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19:28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19:29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가지고 자기 첩의 시체를 거두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19:30 그것을 보는 자가 다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도망간 레위인의 첩(사사기 19:1-15)
여기에 나오는 레위인의 가정생활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 아니한다. 그러나 이 레위인이 다음 이야기와 같은 피해를 입게 된 계기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홀(Hall) 주교는 이 이야기에 대한 서두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당시 그 나라에는 공적(公的)으로 고소를 제기할 수 있는 제도가 없었으므로, 한 레위인이 피해자이며 또한 고소자로서 한 사건을 들고 나서게 되었다" 는 것이다. 레위인은 미가의 우상 숭배를 따르는 일에는 적극적이었으나, 기브아 사람의 사악한 행위에 반기를 드는 데에는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레위 사람들보다 더욱 시급하게 통치권이 필요했던 지파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사기 전체를 통하여 이 두 가지 사건외에는 레위인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 레위인은 에브라임 산지 사람이었다. (1절). 그는 유다 베들레헴이 있는 한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그녀가 그의 "첩" 으로 불리워지고 있는 것은 그녀가 남편에게서 재산권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는 아직 정착하지 못하여 그녀에게 줄 돈이 없었던 때문인 것 같다. 그에게 다른 부인이 있었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여기에서는 그녀를 "첩" 이라 부르고 있다(1절). 그녀는 미가의 집에 있던 레위인과 같은 성읍에서 왔다. 마치 유다 베들레헴은 에브라임 산지에 이중적인 재앙을 가져온 것처럼 되었다. 즉 미가의 제사장이던 레위인도 그러했거니와 그녀도 레위인의 아내로서는 온당치 못했기 때문이다.
Ⅰ. 이 레위인의 첩은 음행을 저지르고 남편에게서 달아났다(2절). 시리아역은 그녀가 "그에게 오만해져" 혹은 "그를 경멸하여 행음하였고", 이에 대해 그가 불쾌히 여기자 "그녀는 그를 떠났다" 고 했다. 그러나 온당치 못하게도 그녀의 아버지의 집에서는 그녀를 받아 들이고 환대해 주었다. 만일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부당히 취급하여 그의 집에서 내쫓았다면 분명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괴로움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기 위해 사악하게도 그녀의 남편을 떠나왔을 땐,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죄를 묵인해 주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녀가 그녀의 아버지는 언제나 그녀를 반가이 맞이해 줄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렇게 무례하게 자기의 의무를 팽개쳐 버리고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모들의 지나친 관용으로 자식들의 버릇을 그르치는 수가 허다하다.
Ⅱ. 그 레위인은 직접 그녀를 데리러 갔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왕이나 사자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음행한 연고로 처형되어 죽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와 대조적으로 그녀의 피해를 입은 남편이 그녀와 화해하기 위해 먼 길을 찾아와서 그녀에게 다정히 말했다(3절). 만일 그가 그녀를 버렸다면 그녀에게 다시 돌아 오도록 요청하는 것은 죄악이 되었을 것이다(렘 3:1). 그러나 그녀가 도망간 것이라면 그가 다시 이전처럼 그녀와 다시 화목하기 위해 그녀의 잘못을 용서해 준다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관대하고 간절히 간구한 것은 위로부터 내리는 지혜가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에게 다정히 또는 온화하게 타일렀으며(히브리어로는 내심에 호고했다고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로 보아 아마도 그녀는 그가 그녀를 데리러 왔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의 잘못을 회개하며 슬퍼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처럼 하나님도 음행한 이스라엘인에 대해 "내가 저를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리라" (호 2:14)고 말씀하셨다.
Ⅲ. 그녀의 아버지는 그를 매우 반겨 주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가 그녀의 잘못을 용서하고 화해하러 왔다는 것을 알고는 특별히 그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 그녀의 아버지는 "그를 보고 환영했으며" (3절), 삼일 동안 그로 하여금 머물도록 환대해 주었다(4절). 그 레위인은 그가 그녀와 완전히 화해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그의 친절을 받아들였으며, 조금도 그녀나 그녀의 아버지의 잘못을 책하지 않았다. 그 날은 마치 혼례 첫 날처럼 즐겁고 편안하게 지냈다. 모든 사람은, 특히 레위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이웃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들은 이렇게 모여 미래에 대한 평온과 행복을 꿈꾸었다. 그러나 이 모든 그들의 즐거움이 이 삼일 후에 슬픔과 재앙으로 바뀔 줄을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우리 집안이 번성하여 지극한 기쁨에 젖어 있을 때, 우리는 또 한편으로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곧 어떤 고통이 닥쳐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곁에 어떤 재난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대비하고 있어야 하며,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사 56:12)고 생각하여 방심해서는 안 된다.
- 그녀의 아버지는 진심으로 그의 방문을 환영하는 뜻을 표하며 그가 머물고 가도록 진지하게 간청했다. 그는 그의 사위에게 애정을 갖고 대했으며 그와 함께 있는 것을 즐겁게 생각했다.
(1) 그리하여 그녀의 아버지는 그를 자기의 사위로서 그리고 그의 집에 뿌리박은 하나의 나무가지로서 그에게 정중히 대우해 주었다. 우리는 우리의 골육지친과 마찬가지로 결혼으로 한 집안 식구가 된 자들에게도 의무와 사랑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이 레위인처럼 먼저 친절을 베푼 자는 역시 남에게서 친절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녀의 아버지는 그를 하나님의 집의 종인 레위인으로써 경건한 존경심을 품고 대해 주었다. 그가 이렇게 존경을 받을 만한 (그가 존경받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 같다.) 레위인이라면, 그녀의 아버지가 그에게 머무르도록 간청하고 서로 얘기를 나눔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훌륭한 지식" 을 배우게 되고 또 그가 그의 사위로 인하여, "레위인을 얻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리라" 는 것을 바라게 될 수 있다는 것을 퍽 칭찬할 만한 일이다.
[1] 그녀의 아버지는 네째 날에도 그에게 더 머물러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것은 친절한 일이라 볼 수 있다. 그들이 언제나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므로 그는 그가 머무를 수 있는 데까지 함께 있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이 레위인은 갈 길이 급했다. 선한 사람의 마음은 항상 자기의 일에 있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둥우리를 떠나 분주히 돌아다니는 새처럼 그의 자리에서 떠나 열심히 일하기" 때문이다. 하는 일도 없이 오랫동안 밖에 나다니기를 즐기는 자는, 집에서 할 일이 하나도 없거나 또는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게으름 피우는 사람들이다. 특히 이 레위인이 광야에 있는 그의 몇 마리의 양을 돌보기 위해 그의 집으로 가고자 하는 것은 퍽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이 레위인은 끈질긴 간청에 의해 그가 예정했던 것보다 더 오래 머물러 있게 되었다(5-7절). 우리는 너무 쉽게 권유에 항복하여 우리의 의무를 등한히 한다든가 또는 친구의 호의를 무시하여 통명스럽게 거절해 버리다든가 하는 극단적인 태도를 피해야겠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부활하신 후 친구의 권유로 그가 처음 계획하셨던 것보다 더 오래 머무르셨다(눅 24:28, 29).
[2] 그는 할 수없이 다섯째 날의 오후까지 머무르게 되었으며 이것은 후에 증명되었듯이, 불친절한 일이 되었다(8,9절). 그녀의 아버지는 그에게 빨리 식사를 준비해 올테니 식사를 들고 떠나도록 간청했는데 이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그로 하여금 하룻밤을 더 묵고 가도록 하기 위한 계획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살로에 있는 여호와의 집" (18절)에 할 일이 많았으므로, 마음이 조급하여져 더 이상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좀 더 일찍 떠났다면 그들은 이제 묵게 된 것보다는 더 좋은 집에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들은 실로에 도착할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친구들의 다정한 친절이 때로는 이처럼 재난을 초해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즉 우리의 행복을 위해 계획한 것이 때로는 함정으로 되어 버린다. "이 세상에서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 레위인이 그렇게 늦게 출발한 것은 현명치 못한 처사였다. 그 전날 떠나던가 아니면 좀 더 참고 그 다음 날 떠났더라면 그는 훨씬 편히 집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Ⅳ.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브아라는 곳에 머무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곳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성읍으로 후에 "사울의 기브아" 라고 불리워졌으며, 실로와 에브라임 산지로 가는 길 도중에 위치하고 있었다. 땅거미가 내리고 밤이 오려 하자, 그들은 어디에 머무를 것인가를 생각했다. 밤이 오면 그들은 더 여행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어둠 속을 걷는 자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어야 하듯이, 이들은 안식처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 그의 종이 그에게 후에 예루살렘이 된 여부스에 머물 것을 제안하였으나, 그곳은 아직도 여부스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성읍이었다. "청컨대 여부스 사람의 성읍에서 머물기로 하사이다(11절)" 하고 그의 종이 말했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하였다면 그들은 베냐민 지파의 땅 기브아에서 묵는 것보다 훨씬 나았을 것이다. 타락하고 방탕스런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사람들보다도 더욱 악하고 위험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그 주인은 하룻밤이라도 결코 외인의 성읍에서 지내려 하지 않았다(12절). 그것은 그가 자기의 신변의 안전을 염려한 때문이 아니라, 될 수 있으면 그들과 접촉을 피하고 또한 그들의 신세를 지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곳을 피함으로써 그는 이 저주받은 사악한 사람들과 교제를 갖지 않으려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중에서도 특히 레위인들을 이스라엘 사람들과 사귀며" 외인의 자손들" 과 사귀지 않도록 해야 한다.
- 이들은 베들레헴에서 5,6마일 떨어져 있는 여부수를 지났으나 그들이 라마에 도착하기 전에 해가 지므로 기브아에 머무르게 되었다(13-15절). 거기에서 그들은 길에 앉아 그들을 재워 줄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렸으나 아무도 그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 당시 그곳에는 여관이나 주막집들이 없었기 때문에 여행하는 사람들은 이 레위인처럼 식량과 그 밖에 필요한 물건을 돈 대신 가지고 다녀야 했으며(19절), 그들이 숙소를 얻는 것은 그 곳 주민들의 친절과 호의에 의존해 있었다. 이에 비해 오늘날 우리들이 아무리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간다 하더라도 돈으로 알맞는 숙소를 얻을 수 있고 또 편히 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자기 나라보다도 더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머무를 수 있는 숙소는 이 세상 아무 곳에도 없다. 이 여행자는 비록 레위인이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언제나 레위인을 환대하도록 명하셨다.) 기브아에서 냉대를 받았다. 즉" 그를 집으로 영접하는 자가 없었다" (15절). 만일 그들이 그가 레위인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들은 더욱 그를 꺼려했을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심판의 날에 "너희는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지 않았다" 는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기브아에 머문 일행(사사기 19:16-21)
그곳에는 기브아에 "속한 "자가 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곤경에 처해 있어 그곳 사람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이 레위인에게 호의를 보여 준 자는 기브아 "안에"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이 사악한 백성들이 날이 어두우므로 그와 그의 첩을 초대하는 것처럼 가장하고서 그들에게 악행을 행하도록 음모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이들은 음모를 계획할 만한 재치를 갖고 있지 않았거나 또는 그들을 속일 만큼 사악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들은 제각기 혼자서나 사악한 일을 생각해 낼 수 없으므로 밤이 으슥해 오자 서로 모여 그들에게 어떻게 재난을 행할까 하고 공모했는지도 모른다. 혼자서 죄를 행하는 것보다 여럿이서 공모하여 범행을 저지르는 것이 더욱 나쁜 재앙을 초래한다. 레위인과 그 아내 그리고 종이 밤을 길에서 새울까 보아 (그것은 마치 사자의 굴 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두려워하고 있을 때, 마침내 한 사람이 그들을 초대하였다.
Ⅰ. 그들을 초대한 친절한 사람은 누구인가.
- 그는 에브라임 산지에서 온 사람으로 단지 기브아에 거하고 있을 뿐이었다(16절).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 가운데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들은 초라한 여행자들에게 친절히 해 주어야 할 특별한 이유를 갖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조상인 베냐민이 그의 어머니와 여행하는 도중 이곳 가까이에 있는 길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창 35:16, 17). 그러나 그들은 곤경을 당하는 있는 여행자에게 냉담했다. 한편 이 성실한 에브라임 사람은 그들을 동정해 주었고, 그 여행자가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는 그의 고향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물론 그는 그들에게 더욱 친절히 해 주었다. 기브아에 단지 체류하고 있었던 그가 기브아 사람보다도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더욱 동정해 주었는데, 그것은 그가 "나그네의 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출 23:9; 신 10:19). 선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이 세상에 잠시 거하는 나그네라 생각하여, 다른 사람에게 친절히 대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더 좋은 나라에 속해 있으며 이 세상은 그들의 영원한 안식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소멸되어 가고 있던 덕행을 지니고 있던 노인이었다. 그 당시 자라나는 세대들은 모두 타락해 있었고, 그나마 미덕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늙거나 죽어 버렸다.
- 그는 밭에서 일하고 저녁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저녁은 수고하는 자들을 집으로 부른다(시 104:23). 그러나 기브아에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자는 바로 그 사람 뿐 이었던 것 같다. 나머지 사람들을 쾌락과 나태에 빠져 있었으며 그들이 소돔과 같이 게울러 있었을 때 그들의 악이 또한 소돔에서와 같이 많이 행해지고 있었으리라는 것은(겔 16:49) 의심해 볼 여지가 없을 것이다. 낮동안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일한 자는 이렇게 밤에 만난 불쌍한 나그네에게 너그러운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사람들은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행하도록" 해야 한다(엡 4:28). 21절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어느 정도 재산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들에서 그 자신이 손수 일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부자라고 하여 게을러야 하는 특권을 누릴 수는 없다.
Ⅱ. 그는 얼마나 관대하고 후하게 그들을 맞아들였는가! 그는 그들이 그에게 하룻밤 재워 줄 것을 간청할 때까지 그들을 세워 놓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만났을 때(17절) 그들의 상황을 묻고 친절하게 그들을 영접했다. 이처럼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요구하기 전에 응답하여 주신다. 자비로운 사람은 구태여 도울 일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일할 수 있는 기회는 만나게 되며, 그때마다 남을 돕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한 눈을 가진" 자 (잠 22:9)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기브아를 소돔으로 비유한다면, 이 늙은 사람은 성문에 앉았다가 나그네를 맞아들인 (창 19:1)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욥은 행인에게 그의 문을 열어 주었고 나그네로 하여금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않았다" (욥 31:32). 다음의 일을 관찰해 보자.
- 그는 레위인이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는 얼마나 기꺼이 그들을 신뢰했던가! 사랑은 남을 의심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바라며 (고전 13:7), 다윗에게 인색하여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많은 종들을 떠나게 했던 "나발(삼상 25:10)의 잘못을 범하지 않다. 그 레위인들은 그가 지금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으며(18절), 그는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게 된 것을 매우 죄송하게 생각하며, 그에게 그들을 위해 자비를 베풀어 주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만일 기브아 사람이 그가 어디로 가는 사람인가를 들었다면 그를 영접하기를 더욱 꺼려했을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눅 9:53). 그러나 이 선한 노인은 그가 레위인으로서 하나님의 집을 향해 가는 길이라는 것을 듣고는 더욱 기뻐하며 많은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이처럼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종인 이 레위인을 "제자라는 이름으로" 영접했다.
- 그는 마음을 터놓고 그들을 대접했다. 이 레위인은 모든 필요한 물건들을 빠짐없이 가지고 있었지마는(19절), 이 관대한 주인은 자기의 물건으로 그를 대접하려 했다. "그대의 모든 쓸 것은 나의 담책이니라" (20절) 하고는, "그를 그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21절).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나 사역자들이 마치 버림받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여러 모로 도와주는 친구들을 보내 주신다.
●기브아의 죄악(사사기 19:22-30)
Ⅰ. 기브아 사람은 아주 사악한 일을 행했다. 우리는 이성(理性)을 가진 인간이, 더구나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를 받은 이스라엘 사람이 이렇게 극악한 일을 행했으리라 라고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윗은 "주여 인간은 어쩌면 이리도 비열한 존재이나이까?" 하고 인간의 사악함을 통탄했다. 우리는 기브아 사람의 악행을 읽고 "주여, 자기들의 욕정에 빠져 버린 자는 얼마나 사악한 인간입니까!" 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본문에는 악행을 저지른 죄인들을 비류들 (벨리알의 아들들, 영문)이라 했다. 즉 그들은 무절제하고 통제를 싫어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또한 마귀 (그는 벨리알이기 때문이다)의 자식들이요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반역하는 데에 마귀와 동조하는 자들이었다. 베냐민의 자손들에 대해 모세는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신 33:12) 하고 말했지만 그들은 이렇게 악한 비류의 자식들이 되어 정직한 자들을 괴롭혔다. 그들이 괴롭힌 자들은 레위인과 그 아내 그리고 이들을 대접한 친절한 노인이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나그네로서 예기치 않은 낯선 사건들을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 에 재난이 그들에게 닥쳐 왔다고 씌어져 있다(22절). 즐거움 그 자체는 순수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모든 위안과 즐거움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친구들과 어울려 기뻐하고 있을 때 그 때에 우리는 우리의 대적이 얼마나 가까이와 있는지 모르고 있으며, 그 재난이 우리에게 온 그 순간까지도 우리는 그것이 그렇게 가까이 우리에게 왔는지도 잘 모르고 있다. 만일 그 줄거움 자체가 죄악적이요 방탕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 즐거움으로 해서 무절제해지거나 무례해지지 않도록 우리들 자신을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즐거움의 끝에는 비애가 따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웃음을 울음으로, 기쁨을 비애로 바꾸실 수가 있다. 그러면 이제 이 베냐민 사람들이 얼마나 사악한 일을 저질렀는지 살펴 보기로 하자.
- 그들은 그들 가운데서 조용히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성읍을 축복되고 영예롭게 하는 이 정직한 저의 집을 밤중에 습격하여 오만하고 거친 행동을 취하였다. 그들은 그 집을 포위하였고 안에 있는 사람을 위협하기 위해 문을 힘껏 두들겼다(22절). 우리들의 집은 우리들 각자의 성(城)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안전하고 조용히 있을 수 있어야 하며, 법이 있는 한 우리의 가정은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그 당시 왕이 없었기 때문에, 정직한 사람들을 이 악한 자들로부터 안전하고 평화롭게 지킬 수가 없었다.
- 그들은 단지 하룻밤 숙소를 얻기 위하여 그들의 성읍으로 들어온 이 나그네들에 대해 특별한 앙심을 품고 있었다. 모든 예의바른 백성들이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들을 냉대했으며 이에 대해 그 집 주인은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었으니" (23절) 무례한 짓을 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의지할 곳 없는 자를 짓밟고 악을 모르는 나그네를 괴롭히는 자들은 정말 천하고 비열한 인간이다.
- 그들은 가장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태도 (그들은 그들의 행위에 대해 두려움이나 증오는 느끼지 않고 있었다.)로 레위인을 모욕하기로 계획하고 있었으며, 아마도 이들은 레위인이 젊고 잘 생긴 남자라는 것을 이미 살펴보아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가 그를 알 수 있도록 그를 끌어내라고" 우겼다. 우리는 이러한 그들의 태도로 단지 그들이 그가 어디서온 자이며, 그의 성품이 어떤한가를 알기 위해 왔을 거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 집에 사는 그 선량한 사람은 그들의 속셈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모세가 "가증한 일" 이라고 지적하며 율법에서 특별히 금해 놓은(레 18:22) 짐승의 욕정보다 더욱 사악하고 그릇된 일을 이들이 행하려고 한다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는 그들에게 애원했다. 이러한 죄를 범하는 자를 가장 극악하고 사악한 죄인들로 들어 신약성서에 열거해 놓고 있으며 (딤전 1:10), 이런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 (고전 6:9)고 지적하고 있다.
(1) 그런 죄는 소돔의 죄(sodomy: 男色)라고 불리고 있다. 소돔 사람이 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벌을 내리셨고 이로 해서 사해(死海)가 생기게 되었는데, 이 사해는 가나안의 국경을 이루고 있으며 또한 기브아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기브아 사람들은 자주 이곳을 지나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기에서 주는 어떤 경고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소돔보다 더 악하게(겔 16:48) 행하였고 "그들의 범죄를 좇아" 행하였다. 홀(Hall) 주교의 말대로 야곱의 자손이 이렇게 추악한 죄를 범하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가장 악한 우상 숭배자조차도 그들에 비하면 성자이었다. 하나님의 율법을 젖혀 놓고서 마귀를 그들 마음에 받아들이고 길거리에서는 남색을 행하면서, 그들이 실로에 하나님의 집을 갖고 있다는 것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옥이라도 타락한 이스라엘보다는 나을 것이다.
(2) 이것은 그들의 우상 숭배에 대한 처벌이었고 그들은 무엇보다도 이 우상 숭배에 매우 집착하고 있었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 사악한 길로 빠졌고, 우상을 섬겨 하나님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듯이, 그들 자신도 서로 욕되게 하였다(롬 1:24, 28).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를 알 수 있으며, 우리는 거기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이 벨리알의 아들들을 소돔 사람들처럼 눈멀게 하시지 않았는가? 왜 하늘에서 그 성읍에 유황불을 쏟아지게 하시지 않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칼로 그들을 벌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또 그 후에 하나님께서 "정욕을 좇는 자들에게 영원히 불의 형벌을 내리시기 위해" (유 1:7) 남겨 두기로 한 때문이었다.
5. 그들은 그 노인의 비난과 간청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23,24절). 그 노인은 소돔과 롯의 이야기에서 롯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 19장 6절에서 8장의 내용과 비교해 보라. 그는 롯과 같이 그들을 형제라고 불렀고 공손히 말했으며, 그의 집에 온 손님들에게 해를 입히지 말라고 간청했다. 또한 그는 그들의 계획이 사악하다는 것을 지적하며 "이런 악한 일을 행하지 말라" 고 간청했다. 그는 또한 그것을 "망령되고 사악한 일" 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 롯과 너무나 가까이 일치하고 있다. (우리는 훌륭한 사람들의 일이라면 잘못된 일까지도 모방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그는 그들의 욕정을 채워주기 위해 자기의 딸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롯은 그의 딸을 매음시킬 권리도 없었으며, 또한 결과가 선하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악한 일을 행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이 노인의 나약한 제안은 부분적으로는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였으며 또한 자기집에 온 손님을 생각한 나머지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변명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런 일로 인하여 롯은 천사들에게 비난을 받아야 했다는 사실도 알지도 못하는 채, 그와 비슷한 경우에 처하여 한 롯의 처신에만 지나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그가 이렇게 재안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욕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있는 기생들에게 돌아가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25절). 강한 욕정은 귀마개와 같이 우리의 귀를 멀게 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양심을 무디게 하고 마비시킨다.
- 그들은 거기에 있는 레위인의 아내를 취하여 그녀를 욕보이어 죽게 했다 (25절). 그들은 그 노인이 자기 딸을 그들의 정욕을 위해 바치겠다는 의견을 묵살해 버렸는데, 그것은 아마 그녀가 아름답지 못한 때문이었거나 아니면 그녀가 매우 정숙하고 품위있는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위인이 그의 첩을 그들에게 데려다 주었을 때, 그들은 그녀를 억지로 끌고서 욕보이기에 적합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조세푸스가 이 이야기에 대해 해설해 놓은 내용에 의하면, 그들이 이 집을 포위한 의도는 레위인을 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녀를 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레위인이 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녀를 보고서 그녀의 아아름다움에 매혹이 되었으며 비록 그녀가 남편과 화해했다 하더라도 그녀의 모습은 그리 단정하게 보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방종한 몸가짐이나 행동으로 이러한 재난을 겪게 되는 수가 많다. 작은 불씨가 큰 화재의 원인이 된다. 우리는 이 레위인이 그들을 좇아가 그의 아내가 어떻게 되는 가를 살폈어야 했다고 말할는지도 모르나 그는 그 자신마저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감히 가려고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비참한 최후로써 우리는 그녀의 남편을 떠나 음행을 저질렀던(2절) 그녀의 예전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손을 볼 수 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환대해 주었고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용서해 주어 그녀의 죄가 잊혀진 듯 생각 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녀의 죄를 기억하시어 이 사악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를 욕보여 고통을 겪게 하셨다. 그들이 그녀를 다룬 것은 매우 의롭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은 그 일 전체를 통해 의로우심을 나타내셨다. 그녀의 죄는 값을 받았다. 그리하여 "욕정은 그녀의 죄였으며 또한 그녀의 형벌이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그녀는 음행을 한 연고로 죽임을 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녀는 사람의 형벌은 피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형벌은 피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을지라도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계셨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잘못을 행하고서도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는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께 사죄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인간이 보는 것 같이 그 일을 보지 않으시고 우리 인간이 때로 그러하는 것처럼 죄를 가볍게 다루시지 않는다. 이 일에 있어서도 의로우신 하나님은 기브아 사람들의 악한 행위를 결코 소홀히 보시지 않으셨다. 이 세상에서 이들의 악행보다 더 야비하고 비 인간적인 것은 없었다.
Ⅱ. 이 사람들의 사악한 행위는 온 이스라엘 지파에 알려졌다. 날이 밝아 비류들이 그녀를 되돌려 보냈을 때 (악한 일은 빛을 미워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 가련한 여인은 그녀의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려했다(25절). 그녀는 예전에 저질렀던 그녀의 죄를 회개하여 용서를 비는 듯한 자세로 문턱에 손을 얹고 얼굴을 땅에 댄 채 쓰러져 죽었다. 그가 그녀를 그 곳에서 발견했을 때 (26,27절) 그는 아마 그녀가 아직 잠들어 있거나 아니면 그녀가 당한 수치와 혼란 때문에 그러한 태도를 하고 있는가보다도 추측했으나 곧 그는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28절). 아마도 그녀의 몸은 손자국과 매자국으로 멍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 슬픈 일을 당하여 그는 실로로 가는 것을 보류하고 바로 집으로 갔다. 희망에 차서 나갔던 그는 우울과 실의에 젖어 돌아와서는, "이 일을 묵인할 수 있겠는가?" 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는 소돔 사람들에 의해 모욕받았던 사자들처럼, 기브아 사람을 태워 죽일 불을 하늘에 요구할 수도 없었다.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고 또 억울한 일을 공평하게 해 줄 만한 평의회나 큰 협의체 같은 것도 없었던 것 같다. 대제사장 비느하스라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그는 너무 성전의 일에 매어 있어서 이러한 재판관의 일은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레위인은 백성들에게 그의 억울한 일을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즉 회중의 그의 일을 재판해 주어야 했다. 비록 모든 지파가 모이는 정치적인 회합은 아직 없었지만, 각 지파의 우두머리끼리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그가 당한 참상을 모든 사람들이 믿을 수 있게 하고 또 그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그의 아내의 시체를 조각내어(29절), 특별한 전달인으로 하여금 각 지파에 보내어 탄원하게 했다. 그가 "마디를 찍어" 열 두 덩이로 나누어 각 지파에 보냈었을 때, 그는 물론 베냐민 지파에도 보내었는데 그것은 그들 가운데 의로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지파에 속한 사람이 이런 죄악을 저질렀다는 것에 대해 더욱 격분하여 그렇게 사악한 사람을 벌하는 데 동조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비참하게 욕보여진 시체를 조용히 묻지 않고 이렇게 조각을 내었다는 것은 매우 잔인스럽게 보였으나, 이 레위인의 의도는 그것을 보임으로써 그들이 행한 극악한 일을 알릴 뿐만 아니라 그의 지극한 분노를 나타냄으로써 각 지파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의도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 시체를 본 모든 사람들은 그 일이 행해진 데에 대해 놀라여 한결같은 분노를 표했다.
- 기브아 사람들은 그 사악한 일이 그 지파 사람에 의해 행해졌다는 것을 알고 죄의식을 느꼈다. 이와 같은 일은 전에 이스라엘에서 저질러진 적은 없었다(30절). 그것은 매우 중한 죄로써 모든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죄를 보고는 조롱하지도 않았으며, 이 일을 가볍게 농담으로 넘겨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 이 사악한 일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총회가 열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런 극악한 일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경고를 가할 수 있었고 또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이스라엘 지파에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 일은 결코 예사로 운 죄악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며 서로 모여 논의했다.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중대한 일을 맡는 자는 회합의 자리에 참석하기 전에 해야 할 세 가지 큰 일이 있다.
(1) 모든 사람은 의견를 발견하기 전에 그 자신이 혼자 충분히, 공명 정대히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또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신중하고 조용히 그그리고 어떤 편견 없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2) 모든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충분히 발표하고 또 친구들의 의견과 이론을 들은 후 그것을 다시 심사숙고해 보아야 한다.
(3) 모든 사람이 자기들의 의견을 말하게 한 후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투표를 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모든 사람과 의논하는 것이 안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