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열왕기하 15, 디도서 1, 호세아 8, 시편 123, 124, 125
묵상구절
6: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6:20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6:21 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7:1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7: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벧세메스 사람들의 범죄와 형벌(사무엘상 6:19-21)
- 여기에는 벧세메스 사람들의 범죄가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보았다" (19절).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깊은 숭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궤는 휘장 안에 가리어져 있으며 대제사장까지라도 일년에 단 한 번만 그것도 향의 연기 속을 통해서 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아마 이런 것 때문에 그처럼 많은 사람이 와서 보았을는지 모른다(그것은 금지된 것은 더욱 하고 싶은 인간의 심정과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런 이유 때문에 어떤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것이 공개되었던 것보다도 더 그 궤를 볼 때 기뻐하였는지(13절) 모른다.
하지만 단지 보는 것만으로 그들은 만족치 않았다. 그들은 단지 보기만 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상의 일을 행했다. 그들은 아마 못박아 놓았을는지도 모르는 그런 포장을 뜯어 제키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아마 블레셋 사람들이 증거의 두 돌판을 없에 버린 것이 아닌가를 확인해 보고자 했다는 핑계를 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감추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그런 것을 더욱 보고 싶어하는 그들의 죄악된 호기심을 만족시키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보잘것 없는 인간이 자기들에게 속하지 않은 비밀한 것을 알아보고 캐려 든다는 것은 하나님을 크게 모욕하는 것이다(신 29:29; 골 2:18). 우리는 모두 우리에게 금지된 지식을 탐하다가 멸망받았다. 하나님의 궤를 들여다 본 커다란 죄는 하나님의 궤를 우습게 본 데서부터 나온 것이다. 이 경우 지나친 친밀함이 결국 멸시와 불경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들은 아마 제사장들이 하는 모양대로 행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사장 직분의 위엄이 보상되었나 하면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성물에 대한 불경을 한층 더 심하게 한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들이 먼저 시범을 보이면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멀리 떨어져서 하나님의 궤를 경외심을 가지고 우러러 보게 가르쳐야만 했다.
그들은 아마 그들이 베푼 궤에 대한 환대와 그리고 궤가 본토로 돌아온 것을 환영하여 그들이 드린 번제 때문에, 다시 말해서 그들이 그 궤를 위해서 행한 바가 많기 때문에 그 궤를 드려다보는 것으로 보상을 받아도 좋으리라고 생각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한 바가 많다고 하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것에 대한 그의 불경과 무례가 용서받을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그들은 아마 그 궤가 포로에서 갓 풀려 나오고 아직 안주하지 못한 현재의 환경이 너무 보잘 것 없는 것이기에 그렇게 행한 것인지 모른다. 지금 그 궤는 차디찬 돌 위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궤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거리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이 보잘 것 없이 시행된다고 하여서 하나님의 명령 자체를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바르게 보며, 순전히 그 겉 모양으로만 판단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궤가 그 어느때보다도 지금 바로 그 위엄이 극치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궤는 그 자신의 능력으로 블레셋 사람들을 이기었으며, (그리스도께서 무덤을 벗어나듯이) 그 속박을 벗어났다. 그들이 이러한 사실을 생각했다면 그들은 보통의 궤를 드려다보듯이 하나님의 궤를 드려다보지 않았을 것이다.
👉 성경은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와 같은 성물을 함부로 다루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민 4:20에서는 여호와의 성물을 보기만 해도 죽을 것을 경고하고 있으며, 삼하 6:6,7에서는 웃사가 제사장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언약궤를 잘못 다루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다.
본문에 나타난 벧세메스인들의 경솔한 행동의 결과도 하나님의 진노로 어어져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으로 끝나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은 홀로 영광 받으시는 분이시며 인간은 철저히 하나님과 구분되는 자라는 점을 드러내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
2.여기에는 그들의 죄에 대한 형벌의 기록이 있다. "여호와께서 벧세메스 사람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다."
하나님은 자기 궤의 면목을 세우기 위해 얼마나 질투를 많이 부리신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자기에 대한 모독을 용서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속이지 말라. 그는 속임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두려워 하지 않으며, 그의 은혜의 표를 두려운 마음으로 사용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노여움의 표를 받게 된다. 금지된 것을 캐보려고 하며, 거룩한 불에 너무 가까이 가는 자는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오만 칠십인을 치셨다." 여기 살륙당한 자의 숫자는 원래 이상한 방법으로 기록되었다. 그 처럼 많은 사람이 범죄했으며 그리고 살륙당했겠느냐는, 그 불가능 때문에 그 본문이 바르게 기록된 것인가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원래는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또는 사이에서) 칠십인, 오만인을 치셨다" 고 되어 있다. 시리아와 아라비아 역본에는 "오만 칠십인" 이라고 되어 있다. 갈대아 역에는 "장로 칠십인과 일반인 오만" 이라고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칠십인의 제사장들이기 때문에 오만명과 막먹는 것" 이라고 본다. 어떤 사람은 또 칠십인은 궤를 들여다 본고로 살륙을 당한 벧세메스 사람의 숫자이고, 오만은 궤 때문에 살륙을 당한 블레셋 지방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스무명에 한명씩 죽어가는 대량 학살이었음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이 칠십인 즉 천명 중에서 오십명을 살륙하셨다" 라고 본다. 칠십인역은 오늘날 우리가 가나아가 성경과 같이 "하나님이 오만인과 칠십인을 치셨다" 고 되어 있다. 그런데 조세푸스(Josephus)는 단지 칠십인이라고 말했다.
👉 하나님의 재앙이 블레셋 뿐만 아니라 당신의 법을 순종치 않은 이스라엘에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벧세메스 사람들을 죽이심으로 독종으로 징계하신 블레셋 사람들보다 더 크게 심판하셨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재앙’의 동일성은 자신의 택한 백성이라 하여 죄가 있어도 무조건 용서하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성경은 ‘선민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법을 거슬러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명확히 말하고 었으며(신 8:11-20; 28:15-68), 아울러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의 범을 순종하여 따른다면 여호와의 백성에 속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사 60:1-14; 호 2:23; 슥2:11).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지극히 공의로우신 분이시다.
3.벧세메스 사람들을 휩쓴 무서운 공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라고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20절).
👉 누가 서리요?
저자가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결코 섬길 수 없으며, 더욱이 하나님과 겨루어 결코 어길 수 없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표현을 이어나오는 문장과 연결해서 이해하면, 언약궤를 메고 갈 수 있는 경건한 사람들을 구하는 의미를 지닌다. 즉 그들은 블레셋인들처럼 언약궤를 빨리 다른 곳으로 보냄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던 것이다.
본문에서는 ‘여호와’가 강조되었다.
‘여호와 하나님’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속성을 다시 ‘거룩하신’으로 수식하여 여호와의 신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진술은 결국 벧세메스에 내린 재앙의 근본 원인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반대되는 벧세메스인들의 불경건에 있음을 명시하는 것이다. 그러고 여기서 제기된 이 질문은 사무엘서 전체 차원에서 볼 때에, “여호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라고 고백했던 한나의 기도와도 연결되며 (2:2), 나아가서 앞으로 등장하게 될 이스라엘 왕권에 대한 하나의 질문도 던져주고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한 왕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 대신에 요구하게 될 그 왕들은 과연 앞으로 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본문을 통하여 메아리로 울려퍼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말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하여 주셨다는 불평을 하나님께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죄에 대해 책망하지 않고, 이와 비슷한 경우에 "다윗이 분하게" 여겼던 것과 같이 (삼하 6:8, 9), 하나님과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 불평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경외어린 찬양이라고 본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여겼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판단 앞에서 "누가 감히 이 궤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고 말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가능하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청함을 받고, 격려를 받고, 가능성을 부여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께 쟁론하기 위해 그의 앞에 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가 감히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앞에 설 수 있으며, 그것을 바로 쳐다볼 수 있겠는가?(딤전 6:16) 누가 감히 굽힐 수 없는 정의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법정 앞에 설 수 있으며, 자기의 옳음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시 130:3; 143:2) 하나님께서 강한 팔을 휘두르실 때 누가 감히 그 앞에 설 수 있으며 그 매를 맞고도 버티고 설 수 있겠는가?(시 76:7)
4.그 궤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자 하는 그들의 원함을 기록하고 있다.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라고 그들은 물었다(20절).
벧세메스의 여호수아의 밭에 있었던 큰 돌 위에 언약궤를 놓았던 것은 일시적 조치였기 때문에 고정적으로 둘 수 있는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지만 자신들이 깨끗한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진노를 통해 알게 된 벧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를 옮기는 것 자체를 주저하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화목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그의 은혜를 되찾을 수 있는가?" 하고 물었어야 했을 것이다(미 6:6, 7). 그러나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궤에 대하여 진저리를 치기 시작하였다. 만일 이때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정중히 모셨다면, 하나님의 궤가 그를 가운데 자리를 잡고, 이로 말미암아 복을 받았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죄인들의 양심에 공포로 임하자, 그들은 자기들의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 말씀에 대해 쟁론을 제기하며, 이를 멀리 하였다(렘 6:10).
그들은 그들보다 훨씬 고지에 있는 강한 성읍 기럇여아림의 장로들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들이 내려와서 하나님의 궤를 그리로 가져 가라고 요청하였다(21절).
👉 벧세메스 사람들이 기럇여아림을 언약궤의 보관 장소로 선택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블레셋과의 아멕 전투로 인하여 실로의 성소가 훼파되었으며 또한 실로에는 엘리와 그의 두 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전을 섬길 만한 자가 살지 않았으나 기럇여아림에는 이에 합당한 자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7:1).
또한 간접적으로는 기럇여아림이 벧세메스와 더불어 블레셋의 관도 내에 있었지만, 거리상 블레셋과 좀더 떨어져 있는 지역이므로 그 지역으로 옮겨서 저들의 신경이 거슬리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일 수도 있다.
그들은 감히 그들이 손을 대서 이를 가져다 주려고도 하지 않고, 위험한 물건으로 생각하고 다만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만 하였다. 이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은 극단에서 극단으로 치달으며, 완고한 철면피에서 비굴할 정도의 수치심으로 곧장 달려갔다.
"삼림의 성읍" 인 기럇여아림은 유다 지파에 속해 있었다(수 15:9; 60). 그리고 벧세메스로부터 실로에 이르는 길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궤를 가지고 가라고 사람을 보냈을 때, 우리 생각에, 그들의 생각은 그 궤를 실로의 장로들이 가져 가기를 원했던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궤가 이 성읍에서 저 성읍으로 옮겨지며 아무도 정식으로 돌봐주는 이가 없었다고 하는 것은, 아직 이스라엘 왕이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준다.
●기럇여아림에 간 하나님의 궤(사무엘 상 7:1,2)
여기서 우리는 기럇여아림에 있는 하나님의 궤에 대한 기사를 보고는 약 40년 후 다윗이 그 궤를 옮겨 갈 때까지 (대상 13:6) 다만 한 번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14:18).
👉 7:1,2은 4장 이후부터 계속되어 오던 ‘법궤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 부분을 끝으로 본서의 내용은 다시 이스라엘 최후의 사사이며 이스라엘 왕정의 새 시대를 여는 민족의 영도자인 사무엘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고 있다.
즉 여호와의 언약궤가 일단 기럇여아림으로 안착된 후 엘리 가문의 몰락 이후 전이스라엘의 최후의 사사이며 동시에 선지자와 제사장의 사역까지 수행하게 된 사무엘이 본격적인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먼저 내적인 신앙 개혁 운동을 일으키고 외적으로는 이방 블레셋을 평정하여 잠시나마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 것을 기록하는 것이다.
Ⅰ.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들의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축복이 될 수 있었던 것을 그들의 짐거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궤는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는 향기" 가 아니라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는 향기" 가 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로 가게 되었다.
1.기럇여아림 사람들은 기쁨으로 궤를 그들에게로 옮겨갔다(1절).
"그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겼다" 는 말씀이 맨 처음에 나왔다. 그들의 이웃인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받아들일 때 만큼 그것을 떠나보낼 때는 기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궤로 말미암은 벧세메스에서의 살륙은 자의적인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마땅한 응보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살륙을 당한 자들은 하나님의 궤를 원망할 것이아니라, 자신의 부끄러움을 깨달아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의 노를 격동치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해치 아니하리라" (렘 25:6)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이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례를 더럽히는 자에 대한 그의 심판은 그 성례를 두렵게 생각지 않게 하고, 오히려 그것들을 더럽히게 하며, 잘못 사용하게 하는 데서 부터 시작된다.
2.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모실 때 참으로 귀한 손님을 환영하며 맞이 하듯이 존경과 외경, 그리고 참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중하게 환대하는 가운데 모시고 갔다.
(1) 그들은 궤를 모실 만한 합당한 장소를 준비하였다. 그들에게는 궤를 안치할 공적인 건물이 없었다. 그러나 아비나답의 집에 모셨는데 그 집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아마 그 성읍에서 제일 좋은 집이었을 것이다. 또 아마 그 집주인은 그 성읍에서 가장 경건하며, 하나님의 궤를 매우 사모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마 아비나답의 집안은 제사장 계열의 사람들로서 언덕 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같이 언약궤가 동산에 항구적으로 거한다고 하는 것은, 여호와가 동산에 있는 산당에 거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이방신들의 하나와 같이 오해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곳은 적합한 장소라 할 수 없었다. 후에 다윗은 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 성전을 짓는 준비를 시작하였으며, 그와 같은 시도틀 통하여 언약궤는 시온에 모셔지게 되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들판에 있는 돌 위에 하나님의 궤를 그대로 방치해 두었으며, 제사장의 성음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자기 집에 그것을 모시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평민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집안으로 모셨는데, 아마 그 집에서 가장 좋은 방으로 모셨을 것이다.
[1] 하나님은 그 궤를 안치할 곳을 찾아 내신다. 한 사람이 그것을 몰아내면 다른 사람의 그것을 모셔 들이고자 마음이 동한다.
[2] 하나님의 궤가 개인의 집에 들어가게 된 것은 결코 새로운 사건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아직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공적인 장소를 구하지 못했을 때, 그들은 집에서 집으로 돌아다니며 설교하였다.
[3] 때로는 이스라엘의 평민들이 신앙적인 면에서 제사장들보다 더 잘 할 때가 있으며 그들을 부끄럽게 할 때가 있었다.
(2)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모시기에 합당한 사람을 준비하였다. "그들은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다."
👉 아론의 아들과 같은 이름을 가진 ‘엘르아살’ 이라는 사람은 모세 시대의 대제사장으로서 훌륭히 직분을 잘 감당했던 ‘엘르아살’ 과 같이 블레셋에서 다시 돌아온 언약궤를 지키는 일을 순조롭게 이행할 것임을 암시한다.
또한 1절에 등장하는 이 이름은 12절에 등장하는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라는 뜻의 ‘에벤에셀'과 더불어 7장 전체를 감싸안는 인클루지오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언약궤를 보관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이며 7장에서 소개되는 사무엘의 모든 활동 역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마 그가 나이가 많아 허락했기 때문이거나 또는 자기의 집을 돌보아야 하는 일 때문에 그 일을 시키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아마 신앙이 깊고 경건한 젊은이이며 동시에 그러한 최상의 일을 할 만큼 열심이 있었을 것이다.
엘리아살의 일은 심술궂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궤를 빼앗기지 않도록 지키는 것일 뿐 아니라, 호기심에 가득찬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지거나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는 궤가 놓인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늘 고상하게 꾸미는 일을 하여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궤가 비록 궁벽한 곳에 안치되어 있기는 해도, 아무도 돌봐주는 이가 없는, 무시된 상태로 내버려진 것으로 보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엘리아살을 레위 족속, 더욱이 아론의 후손이라고 나와 있지 않다. 또 그가 꼭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번제를 드리거나 향을 피울 제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몇몇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 앞에 와서 기도하였을 것이며 그는 그때마다 그들을 도와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그들은 그를 성별하였으며, 그의 동의를 얻어, 그로 하여금 이 일을 하도록 시켰으며, 늘 이 일에 종사하도록 구분하였다. 그리고 그 성읍에 있는 모든 이름들 가운데서 그를 따로이 세웠다.
이것은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당하고 있는 난점에 비추어 볼 때 능히 용서받을 수 있는 처사이다. 하나님의 궤가 금방 포로에서 해방된 것과 같은 상황에서는 급작스럽게 정식으로 엄숙한 가운데 모시기는 기대하기 어렵고, 있는 형편에 따라서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다.
👉본문은 지금까지 있었던 언약궤의 ‘방랑’이 종결되고,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섬김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Ⅱ. 하나님의 궤를 여기에 그대로 둔다는 일은 서글픈 일이다. 다시금 실로에 잘 모셔야 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기는 해도 그 곳은 아직 황량한 채로 있었다(렘 7:14). 아니면 놉이나 혹은 기브온, 그것도 아니면 회당과 제단이 있는 다른 곳에 모시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러나 궤는 애국심이 불타는 사람이 일어나서 바른 장소로 모셔갈 때까지 그곳에 그대로 있어야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 하나님의 궤가 여기에 계속 머물러 있었던 기간은 매우 오랜 기간이었다. 하나님의 궤는 40년 이상이라는 매우 긴 기간 동안 멀리 떨어지고, 궁벽한 곳에 자리잡고, 찾아오는 이들도 없으며, 거의 무시된 오히려 삼림의 성읍에 머물러 있었다(2절). 다윗이 옮겨가기 까지의 "오랜 기간 동안 하나님의 궤는 기럇여아림에 있었다." 그것은 곧 이스라엘 사이에 거룩한 열심이 쇠잔하였다는 증거인데, 이상하게도 사무엘이 다스리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궤가 지성소로 옮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묵인하셨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궤가 제자리에 있을 때 그것을 무시하였던 죄를 벌하시고자 하시기 때문이었으며, 또 하나님의 궤를 설정한 그 제도의 중심은 다만 그것이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는 것과 그리고 "나중에 올 좋은 것이 곧 진동치 못할 것" 임을 보여 주고자 하시기 때문이었다(히 9:23; 12:27). 그것은 제사장들에게, 그들에게서 나오지 않은 한 사람을 성별하여 그 궤를 지키게 하였다는 것을 책망하기 위한 것이었다.
- 20년이 지나서 비로소 이스라엘 온 족속은 하나님의 궤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70인역 성서는 오늘 우리가 읽는 성서보다 그 뜻을 보다 더 분명히 밝혀준다. 거기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20년이 지났다. 그리고 이스라엘 온 족속이 다시금 여호와께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처럼 오랫동안 하나님의 궤는 사람들의 관심 밖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무런 불편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이 어디 있는지, 또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궤가 성전에 없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특별하신 임재의 표시가 없는 가운데 그들은 날마다 드리는 속죄의 제사를 제격식대로 드릴 수가 없었다.
형식적인 교수들이 대체적인 외형상의 꾸밈새에 만족하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제나 열납의 표시가 없는, 하나님의 궤가 없는 제단에 대해 만족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드디어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의 처지를 생각해 보고 하나님을 찾아 헤매며, 탄식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아무 하나님의 성령께서 특별히 역사하신 사무렐의 설교를 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제 회개와 갱신의 경향이 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나타났으며,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슥 12:10) 시작하였다. 라이트푸트 박사는 우리가 가진 성서 가운데서 이것을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사건과 비견할 말한 것을 찾는다면 사도행전 2,3장의 일대 회심 사건뿐이라고 본다.
(1)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의식의 귀한 가치를 아는 자는 그러한 의식이 결여되었다는 것은 통탄할 일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2) 참다운 회개와 회심은 하나님을 찾아 탄식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며, 우리가 계속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한 우리는 파멸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은혜 가운데 다시 임하시게 하시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는 안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하나님의 궤를 소유하고, 그것을 들여다보거나, 그것을 찾아 탄식할 때가 더 좋은 때였다. 은혜의 방법이 너무 흔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천시하는 것보다는, 그것이 부족하여 사람들이 애써 찾아 헤매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좋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애곡한 것과 언약궤가 기럇여아림에 20년 동안 있었다고 하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불순중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가 이방인을 통해 20년 동안 이스라엘에게 임했고 이스라엘은 간곡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구원을 사모하며 간구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즉 본문은 미스바 대성회가 발생하기 전 이스라엘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이제 그 동안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블레셋에서 벳세메스로 그리고 다시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겨졌듯이, 이제 하나님의 임재 사건은 이스라엘 족속을 중심으로 발생할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언약궤와 상관없이 주권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나타날 것이 암시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