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11월 18일 금요일 삼상15:32-33 사무엘이 아각을 처형하다

Jeehyun 2022. 11. 18. 16:21

맥체인성경읽기

역대상 11, 12, 히브리서 13, 아모스 7, 누가복음 2

묵상구절

15:32 사무엘이 이르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이르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15:33 사무엘이 이르되 네 칼이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아각의 처형과 사울과의 결별(사무엘 상 15:32-35)

선지자로서 사무엘은 여기서 왕들의 위 세움을 받았다(렘 1:10).

Ⅰ. 사무엘은 아각왕을 진멸하였다. 그것은 지금까지 아무도 감히 실행하지 못하였던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를 따른 것이었다. 그는 "아각을 찍어 쪼갰다." 어떤 사람은 사무엘이 다만 명령만 하였다고 보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손상받은 공의를 위한 희생 제물로서(33절), 그 제물을 찍어서 쪼개는 것과 같은 양식대로, 사무엘 자신의 손으로 직접 찍어 쪼갰다고 보기도 한다.

  1. 아각의 헛된 희망이 사라졌다.

"아각이 즐거운 낯으로 왔다."

👉 아각의 즐거움은 자신어 사울의 손에서 제사장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함으로 비롯된 것이다. 많은 전쟁을 수행하면서 포악함과 잔학함에 길들여진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제사장에게로 자신이 넘어갔다는 소식은 아각에게 생존의 희망을 안겨다주었을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아각의 즐거워하는 모습은 33절에서 맞이하게 될 그의 처참한 죽음과 극한 대조를 이룬다.

그는 그가 왕이었음을 나타내며, 그러므로 자기를 존경해 주고 정중하게 다루어 달라는 뜻으로 당당한 모습으로 왔다. 그리고 고생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유순하고 연약하여 "그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보지도 않은 것처럼" (신 28:56) 걷기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확실히 전쟁의 열기도 식고, 사망의 괴로움이 지나갔도다(32절)."

아각은 이제 군인인 사울의 칼에서 벗어나자, 평화의 사람인 늙은 선지자인 사무엘로부터는 어떤 위험도 받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 아각이 즐거운 모습으로 사무엘 앞에 나타난 이유:

아각도 자신이 당연히 죽을 것으로 예상하여 고통 중에 있었지만, 이제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음을 미각적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 아각의 말은 잔인한 속성을 갖고 있는 사울보다는 여호와의 제사장에게 맡겨진 것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더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판단이 담긴 것. 

(1) 죽음은 괴로운 것이다. 죽음은 본질적으로 무서운 것이다. 어떤 사본들은 아각의 말을 "참으로 죽음은 괴로운 것이다." 고 읽는다. 따라서 70인역은 먼저의 귀절에서도 "아각이 두려워 떨면서 왔다" 고 읽는다. 죽음은 아무리 용감한 마음도 낙담시킨다.

(2) 많은 사람들은 죽음의 무서움이 지나가지 않았는데도 이것이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죽음이 그들 가까이에 있건마는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참다운 신자들은 은혜로 말미암아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그러나 죽음 자체가 지나간 것도 아니며, 그 괴로움 자체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5)

2.지난날 아각이 행한 악행이 여기서 벌을 받았다.

사무엘은 그의 조상들의 죄만 아니라, 그 자신의 죄까지도 묻기 위해 아각을 불렀다. "그의 칼이 여자들로 무자케 하였던" 것이다(33절). 그는 그의 조상들의 잔인함을 그대로 본받았으며, 그의 밑에 있는 자들도 똑같은 일들을 행하였다. 그러므로 아말렉에 의해 흘린 모든 의로운 피가 이 세대에 돌아갔던 것이다(마 23:36). 자기 자신에 대해 너그럽고 관대하였던 아각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잔인하였으며, 지독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그렇다. 그들의 욕망에 대해 관대한 사람들은 그들의 욕정에 대해서도 엄격하지 못하다. 그러나 흘린 피는 반드시 기억이 된다. 왕들도 그들의 흘린 죄없는 피에 대해서 왕중 왕이신 분에게 책임 추궁을 당한다. 므낫세 왕의 이러한 죄에 대해 여호와께서 용서치 않으시겠다고 하셨다(왕하 24:4; 계 13:10 참조).

👉 출21:24,25, 신19:21의 ‘동해 보복법’에 입각한 형벌 선언을 받은 아각

동해 보복법: 이 규정은 복수를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법적 공의를 보장하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즉 ‘동해 보복법'은 자신이 피해를 받은 대로 반드시 보복하라는 취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받은 피해 이상의 보복이 상대에게 가해짐으로 상호간의 보복이 악순환되는 폐단을 막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 율법은 점차 그 근본 취지를 벗어나 잘못 적용되고 말았다.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동해 보복법’ 의 참 의미를 망각하고 모든 이해 관계에 적용함으로써, 하나님 안에서의 인간 관계의 근본 원리를 언약 안에서의 사랑에 두지 않고 일대 일의 이해 관계로만 적용시키는 우를 범하고 만 것이다. 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해자에 대한 보복을 금지하셨을 뿐만 아니라(마5:38.39), 더 나아가 이 율법을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평화주의(마5:39)와 절대 사랑(마5:43, 44)의 계명으로 승화시키셨다.

그러면 본문에서 왜 사무엘은 율법에 나와 있는 ‘동해 보복법’을 통해 심판을 선언하고 있는가?
아각에 대한 심판의 근거가 되는 법. 또한 이방인과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는 사울에 대한 비난의 의미도 담고 있음. 본문에 나타난 ‘칼’ 은 8절에서 사울이 사용한 ‘칼’ 을 연상케 한다. 사무엘의 말대로 아각의 칼이 이스라엘 여인으로 무자케 한 것을 사울이 알았다면, 사울은 우선 자신의 칼을 아각을 심판하는 데 사용했어야 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율법대로 ‘아각' 을 심판하지 않고 오히려 살려두었다. 이렇듯 아각을 하나님의 율법대로 심판하지 않고 ‘아각’ 을 통해 어떤 다른 보상을 바라는 사울의 이방인과 같은 모습을 사무엘은 간접적으로 비난하고 있는 것.

아각의 처형은 단순한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말렉 족속 완전 진멸 명령에 근거한 종교적 차원의 문제였다. 사무엘은 15:3에 나타난 하나님의 ‘헤렘’ 명령을 사울을 대신하여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다. 아각의 죽음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철저하고도 엄중한 것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