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11월 19일 토요일 삼상 15:34-16:13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다

Jeehyun 2022. 11. 19. 21:40

맥체인성경읽기

역대상 13, 14, 야고보서 1, 아모스 8, 누가복음 3

묵상구절

15:34 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자기의 집으로 올라가니라

15:35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16: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16:2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16:3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16:4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이르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16:5 이르되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하고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성결하게 하고 제사에 청하니라

16: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16:8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

16:9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16:10 이새가 그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16:11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16:12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16: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15:34-35

Ⅱ. 사무엘은 사울왕을 떠났으며(34절), 다시는 그가 당하는 문제에 대해 충고를 하거나 도와 주기 위해 "그를 가서 보지 아니하였다" (35절). 왜냐하면 사울이 사무엘이 도움이나 충고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사무엘은 제사장이자 선지자인 자신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함. 사울 기브아는 사울의 고향이자 이스라엘의 수도 역할을 한 곳.

‘사무엘이 라마로, 사울이 기브아로' 갔다는 표현은 단순한 사실을 기록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즉 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단절되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무엘은 종교적 지도자로서 자신이 활동 무대로 삼았던 라마로 돌아갔고, 사울은 정치적 지도자로서 자신의 거점이었던 기브아로 돌아갔다는 표현 속에서 각자의 길이 갈리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사무엘과 사울의 관계 단절은 하나님과 사울의 관계 단절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이 사울과 다른 길을 갔다는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셨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자기도 사울을 버렸다. 어떤 때 (19:24 의 경우와 같이) 우연히 사울을 만나는 일은 있었어도, 결코 일부러 그를 만나러 간 일은 없었다.

하지만 사무엘은 "사울을 위해 슬퍼하였다." 그것은 그처럼 위대한 일을 잘할 수 있었던 사람이 스스로 어리석은 짓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멸망받게 된 것을 생각하고 애달파 하였기 때문이었다. 사무엘은 사울과 같이 위대한 축복을 받을 수있었던 사람이 그처럼 저주와 천벌을 받을 수 받게 없게 된 그 나라의 형편을 슬퍼하였다. 사무엘은 또 사울을 회개시킬 기회가 없게 된 그의 영원한 상태를 슬퍼하였다. 사무엘인 사울을 위해 슬피 운 것은 그를 위해 하나님께 탄원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왕을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다." 그리고 사무엘로 하여금 그의 할 일을 하도록 하는 결심을 가지게 하였다. 그리하여 사울을 위한 사무엘의 기도는 아무런 효력을 발생시키지 못했다.

  1. 비록 우리는 버림받은 죄인들에게서 손을 떼며, 그들과 친하게 지내서는 안 되겠지마는 그런 버림받은 죄인들을 위해서 슬퍼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선지자는 그의 백성을 떠나 가기로 결심하였지마는 "그들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 고 하였다(렘 9:1, 2).
  2. 비록 버림받은 죄인들이 스스로를 위해서 슬퍼하지 않지마는 우리는 그들을 위해 슬퍼해야 한다. 사울은 자기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노여움에 대해 관심을 쏟지 않고 있었지마는 사무엘은 그를 위해 밤낮 슬퍼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애곡하였을 때에도 예루살렘은 안연히 서 있었다.
👉 슬퍼하는 사무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와 인간적인 정리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습, 즉 자신이 기름을 부어 세운 왕이었지만 하나님을 떠나 열방과 같은 왕으로 전락하고 만 사울에 대한 인간적 연민과 하나님의 엄중한 심관 선언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사무엘에게 있어서 사울을 만난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여호와의 심판을 재천명해야 하는 것이기에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본문에서 사무엘이 ‘슬퍼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의 슬픔과 더불어 사울에 대한 연민이 담긴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스페셜포인트

16:1-23의 두 문단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예선된 다윗이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사실과 다윗이 사울에게 불려와 음악 치료사와 병기 든 자로 사울을 수종들게 된 사실을 다룬다.

하나님은 당신께 버림받은 사울로 인하여 슬픔에 잠겨 있던 사무엘에게 베들레헴의 이새의 아들들 중 하나를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예선하였음을 밝히고 그곳으로 가서 당신이 지명하는 자에게 기름을 붓도록 지시하셨다(1-5절).

이새는 유다 지파 소속으로 룻기의 주인공인 보아스와 룻의 중손자이다(룻 4:21.22). 그러므로 이새의 가문은 유다 지파 내에서 유력한 가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모두 예 3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장자 엘리압은 용모와 신장이 준수하여 사무엘이 보기에도 사울을 대신할 만한 왕재라고 여겨겼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 것을 말씀하시고 이새의 막내아들로서 양을 치던 다윗에게 기름을 붓도록 지시하셨다(6:1-3절).

다윗은 당시 15세 정도의 어린 소년에 불과하였다. 다윗이 비록 호기와 무용과 구변을 갖추었다고는 하나(16:18) 나이도 어리고 목동에 불과했던 그가 쟁쟁한 형들을 제치고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예선된 사실은 그에게 기름을 붓는 사무엘이나 본서의 독자들에게 의외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형들 대신에 어린 자가 선택되는 것은 성경의 익숙한 패턴이기도 하다. 이스마엘 대신 이삭, 에서 대신 야곱, 열 형들 대신 요셉이 선택된 것은 이미 우리가 잘 아는 사실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과 관련한 사건들은 모두 하나님의 구속사적언 계획 속에서의 전환점들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다윗의 선택 역시도 하나님의 구속사가 세로운 전환점을 맞게 될 것임을 예시한다.

아무튼 다윗의 선택은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적인 권위나 상속의 범칙 등에 근거하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근거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다윗이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사울이 아직 왕으로 건재하던 때로 누구도 새로운 왕의 펄요성을 느끼지 못하던 때였다. 따라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받은 것은 우연이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진 결과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예선과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일임을 확증하는 증거가 된다.

한편 다윗이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신 곧 성령께서는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옮겨오셨다(13,14절).

이것은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고 대신 다윗을 선택하셨음을 나타내는 상징적 사건이다. 하나님의 신어 떠난 사울에게는 악신이 찾아왔다. 저자는 이 악신을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an evil spirit from the Lord)' 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악과 관련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악의 근원인 사단과 그의 하수인들언 악령의 활동까지도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기에 악을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의미이다.

아무튼 악신으로 인하여 사울은 심각한 발작적인 정신 질환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의 그러한 질병은 음악으로만 다스릴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정말 우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다윗은 사울에게 불려가 음악 치료사와 병기 든 자로서 사울을 수종함으로써 전날 여호수아가 모세 밑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연마한 것처럼 왕으로서의 훈련을 쌓게 된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또 골리앗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골게 된 배후에 내재된 하나님의 섭리 (Providence of God)이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것이나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건은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때 문에 그것은 우연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에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의 배후에는 우주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개입과 섭리가 있다. 유한한 인간의 육신의 안목으로는 이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신앙의 영적 안목으로 본다면 이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것이나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사울을 대신하여 다윗을 하나님이 진정한 왕으로 다스리시는 신정 왕국의 대리자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이후 우리는 하나님이 다윗을 신정 왕국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기 위해 어떻게 연단하고 섭리하시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 그리고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둘을 보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는 영적 안목을 길러야한다. 우리가 그러한 영적 안목을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들리워 사용되는 귀한 하나님의 일꾼이 될 것이다.

베들레헴에 간 사무엘(사무엘 상 16:1-5)

사무엘은 다시는 공식적인 일을 위해서는 백성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라마에 있는 자기 집에 은퇴하고 있었다. 그리고 19장 20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가 거느리고 있던 선지자의 생도들을 훈련하고 교육하는 데만 자신을 전적으로 몰두하고 있었다. 사무엘은 젊은 왕보다는 젊은 선지자들을 만족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죽는 날까지 하나님은 여기서 볼 수 있는 다윗에 대한 기름부음 외에는 달리 사무엘을 불러내어 국가에 관련된 공식적인 일에 종사시킨 일이 없으시다.

Ⅰ. 하나님은 사무엘이 사울의 버림받음에 대해 그처럼 오래 슬퍼하는 것을 꾸짖으셨다. 하나님은 슬퍼한 것 자체를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계속 슬퍼하는 것에 대해 꾸짖으셨다.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1절)

사무엘은 그의 가족들이 제침을 당하고 그의 아들들이 면직을 당했을 때에도 그처럼 슬퍼하였다는 기사를 우리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사울과 그의 후손들이 버림받은 일에 대해서는 다할 수 없는 슬픔을 표시하였다. 전자는 백성들의 어리석음 때문이며, 후자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노 때문에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제 자신을 되찾고 계속 슬퍼만 하지 말아야 할 때가 되었다.

  1.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으며, 그는 또한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야 하기 때문에 사울에 대한 그의 감정을 잊어버려야 한다. 사울을 멸함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사무엘은 이로써 만족해야 한다. 이미 판결은 내려졌다. 그의 기도와 눈물이 그 판결을 돌이킬 수 없다(삼하 2:22).
👉 왕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대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선택했던 왕이 하나님께 버림받았으므로 더 이상 왕을 요구할 수 없게 되었으며,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을 선택해 주셔야만 하는 형편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의 왕권이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 아래 속해 있음을 반영한다.

2.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손해 보는 바는 없다. 사무엘은 그의 친구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에 빠져 있지 말고 공동의 복지를 마련하여야만 했다. "사울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아라. 내가 한 왕을 예선하였노라. 백성들이 스스로 한 왕을 세웠었다. 그러나 그가 잘못되었음이 밝혀졌다. 이제 나는 나를 위하여 내가 한 왕을 예선하였는데, 저는 내 마음에 드는 자이다" (시 89:20; 행 13:22 참조).

"사울이 버림을 받았어도, 이스라엘은 목자 없는 양같이 되지 않으리라. 나는 다른 목자를 그들을 위하여 마련해 놓았으며, 그로 말미암아 오는 너의 기쁨이 능히 버림받은 왕으로 말미암는 슬픔을 극복하리라."

👉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가라’
‘뿔’ :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는 ‘기름병’이 사용되었다. 이 뿔은 다윗의 기름부음을 다룬 1-13절의 처옴과 마지막 절에서 반복되어 강조됨으로써 사울이 기름부음 받은 것파 다윗이 기름부음 받은 것이 여호와 앞에서 차이점을 가지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즉 사울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을 때는 ‘기름병'으로 받았지만, 여호와에 의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질 다윗은 ‘뿔’ 로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던 ‘뿔’ 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2장의 한나의 기도 속에 이미 나타나 있다. 한나의 기도는 한나의 ‘뿔’을 높이신 하나님을 찬앙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2:1),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뿔' 을 높이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마치고 있다(2:10). 여기서 ‘뿔’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전적으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정한다. 본문에 등장하는 ‘뿔’ 도 한나를 미천한 여인에서 기쁨과 감사의 여인으로 높이신 하나님의 능력이 새롭게 선출된 이스라엘의 지도자 다윗에게도 부어질 것을 암시한다.

‘기름’
왕, 제사장들을 세우는 데 사용될 때는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과 능력이 임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냄. 

Ⅱ. 하나님은 사무엘을 베들레헴에 보내어 이새의 한 아들에게 기름을 붓게 하셨다. 아마 사무엘은 그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지 않았던 것 같다. "너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가라" 고 말씀하셨다. 사울에게는 병에 채워진 기름을 가지고 기름을 부었다(10:1). 그것은 보잘 것 없고 깨지기 쉬운 것이었다. 다윗에게는 뿔에 담은 기름으로 기름을 부었다. 그것은 보다 풍성하고 든든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 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눅 1:69).

👉 이새: ‘여호와의 사람’. 이새는 보아스와 룻의 손자.

사울과 다윗이 왕으로 세워지는 과정의 차이점
사울이 잃은 나귀틀 찾는 과정 중에 선지자 사무엘을 찾아옴으로써 왕이 되었다면, 다윗의 경우는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이 직접 찾아가셔서 그를 왕으로 세우셨다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1절에서 ‘내가 한 왕을 예선하였다’ 할 때 → ‘나를 위하여’ 라는 의미의 번역을 생략함. ⇒ 사울은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그들을 위하여’ 왕을 세워주심, 하나님께서 이제 다윗을 ‘자신을 위하여’ 왕으로 세우신다.

Ⅲ. 사무엘은 이 심부름을 가기가 두려워서 이를 거절하였다(2절). 그리하여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라고 말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 수 있다.

👉사무엘은 기름을 부어 새로운 왕을 세우라는 여호와의 명령에 두려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두려움과 주저함은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았을 때(출 3:11)와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을 때 드러냈던 반응과 유사하다. 이들의 공통적인 상황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불가능해 보어는 것을 하나님이 사명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무엘의 경우에도 사울이 왕으로 건재해 있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이행하기 힘든 일이었다. 사울이 폐위를 예언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엄연히 헌재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시점에서 그것도 인간적인 시각에서 세 왕이 등장할 여지가 전혀 없던 때에 이러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사울에 대한 반역 행위이며 목숨을 건 행동이었기 때문.
  1. 비록 사무엘이 한 마디의 언급이 없어도, 사울은 버림받은 이후 더욱 악독하여졌으며, 더욱 난폭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얼마나 불신앙에 떨어졌으면 감히 사무엘을 죽이고자 할 수 있었을까?
  2. 사무엘의 신앙이 기대했던 것만큼 강하지 못했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사울의 격노를 그처럼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보내신 분이 그를 지켜 주시며, 그 일을 성취시키도록 하여 주시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사무엘의 입장에서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조용히 처리하여 자기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노출시키지 않는 방법을 지시사여 주시기를 바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Ⅳ.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번제를 드린다고 하여 그의 계획을 숨기라고 명령하셨다. "내가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말하라" 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너의 손으로’ 암송아지를 끌고 가, 직접 그 일을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또한 사울에게 발각되어서는 안되는 극비의 사항이므로, 이 일에 제 삼자가 개입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드러내셨다.
 👉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취해야 할 행동에 이어 그가 해야 할 말까지 지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인 행동과 말까지 지시하심으로 사울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주저하고 있는 사무엘을 독려하셨다.

하나님은 사무엘이 사울의 의심을 피하는 방법으로 ‘제사'를 이용하신다.
이것은 13-15 장의 사건에서 사울이 보여준 여호와의 제사에 대한 태도를 역설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특히 사울은 아말렉 멸절 명령을 어기고 백성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탈취물을 남겼다고 변명을 했다. 하나님은 사울이 했던 그 말을 그대로 사용하셔서 사무엘의 피할 길을 마련하셨던 것이다. 제사를 이용해서 하나님을 기만하려고 했던 사울은 이제 제사를 통하여 사실 속에 숨겨진 이면적 진실을 보지 못하는 ‘아이러니(Irony) '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속임수를 쓸 것을 지시하신 것은 아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안과 함께 왜 제사를 드렸는지 그 목적을 사울로 알지 못하게 하셨을 뿐 사무엘은 실제로 이새의 집안과 함께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다만 사울은 14장에서 요나단과 병기 든 소년이 블레셋에 선제 공격을 가했던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처럼 진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한편 사무엘은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시를 5절에서 그대로 순종함으로써, 무사히 이새의 집안과 대면하게 된다(5절).

사무엘은 그대로 했다. 그가 왕에게 기름부으려고 왔을 때 제사를 드리려 왔다는 것은 조금도 틀림없는 사실이기도 하다(11:15). 선지자로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제사를 드릴 수 있다. 그가 비록 다른 목적이 또 있었지마는 이를 숨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서, 그가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만 말하였다고 하여도, 실제로 제사를 드린 이상에는 진리의 법에 모순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새로 하여금 제사를 드리는 것을 알게하고,그를 제사에 초대하고 그의 가족들을 제사 뒤에 가지는 잔치에 초대하도록 시켰다(아마 이새는 그 성읍의 우두머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내가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에게는 매 과정마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실수하지 않고 가장 잘 해낼 수 있다.

👉 사무엘은 여호와가 말씀하시는 대로 행동에 옮기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일꾼이 어떤 일을 행하기에 앞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본문은 과거 이스라엘 앞에 지도자로 서게 될 모세에게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출 4:12).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명령에 무모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명령을 수행할 방법을 이미 다 준비해 놓고 계신 상태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일에 있어 하나님의 전적인 주도성이 잘 드러난다.
즉 기름부을 자를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여호와의 일이며, 사무엘은 지명된 사람에게 기름을 붓기만 하면 된다.

Ⅴ.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베들레헴에 갔다. 그러나 그는 화려한 행렬을 지어서 간 것도 아니고, 많은 시종들을 거느리고 간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제사에 쓸 암송아지를 끌고 가는 사환 한 사람만을 데리고 갔다. 그렇지만 "베들레헴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였다."

 👉 성읍의 장로들이 떨었던 것은 물론 예상처 못한 사무엘의 방문에 대하여 혹시 자신들을 책망하려고 오지는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중 사무엘에게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경외심..) 후에 제사장 아히야가 사울에게 쫓기어 혼자서 놈으로 찾아온 다윗을 맞이하면서 떨었던 것 (21:1) 역시 다윗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느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기름을 붓는 사건이 여호와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사무엘이 그 고장의 불법과 죄악을 심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하기 위해 오는 줄 알고 두려워하였다. 죄는 두려움의 원인이 된다. 사실 죄가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자를 무서워하게 되고 또 그의 말씀을 두려워하게 된다. 아니면 그들은 그들에 대한 사울의 노여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 사울이 사무엘에 대해 대단히 노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사무엘을 환대하면 그것 때문에 사울이 그들에 대해 시비를 걸 것이라고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들은 사무엘에게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라고 물었다. "당신은 평안한 가운데 오신 것입니까? 사울을 피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까? 우리에게 화평을 주러 오신 것입니까? 진노의 소식을 가지고 오신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선지자들로부터 좋은 말씀 듣기를 애써야 한다. 그리고 우리를 거스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들의 기도를 듣기를 두려워해야 한다. 다윗의 자손이 유다의 임금으로 탄생하셨을 때 온 예루살렘이 소동하였다(마 2:3).

사무엘은 언제나 집에 있었다. 그런데 이처럼 자기 집에서 멀리 떠나온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반드시 어떤 비상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가 온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사무엘이 그들을 안심시키기까지는 크게 두려워했었다(5절). 사무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나는 평강을 위하여 왔노라. 나는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온 것이지, 너희에게 줄 진노의 말씀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온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환영하여라. 그리고 내가 드리는 제사에 참여하기 위해 너희 자신을 성결케 하라. 그리고 그 제사를 통해서 은혜를 받으라."

엄숙한 임명이 있기 전에 먼저 엄숙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와 영적인 예배를 드리고자 할 때는, 우리 자신을 세상과 떨어지게 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기에 합당하도록 자신을 성결케 해야 한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의 사명은 세상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인간들은 두렵고 떨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화평을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인간들에게 충분히 확신시켜 주셨다. 그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오신 것이며, 그 제물은 자기 자신이시었다. "당신은 나를 위해 당신의 몸을 내주셨나이다." 우리는 예수의 제사를 통해 크게 도움받기 위해 자신들을 성결케 하자.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오는 사람들은 화평을 가지고 와야 한다. 종교적인 행사는 떠들썩하고 폭력적인 것이 되도록 준비되어서는 안 된다.

👉 사무엘이 평강을 위해서 왔다고 말한 것은 책망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는 의미와 더불어 또 다른 이중적 의미를 내포한다.

본 사건이 새로운 왕을 통해서 신정 통치를 감행하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에 완전한 평화가 임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사울과 사무엘, 그러고 사울과 다윗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분쟁을 야기하는 촉발제였다. 또한 사무엘어 말하는 ‘평화’ 가 겉으로는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예선된 자에게 기름을 붓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본문은 사람이 보고 듣는 외면적인 것을 이용하셔서 하나님의 내면적인 뜻을 성취해 가시는 역사의 주관자어신 하나님의 통치 방법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특히 과거 사울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과 관련하여 죄를 범하였는 바(13:8-14; 15:15) 이제 하나님께서는 제사라는 방법을 사용하셔서 사울의 왕권이 다윗에게로 넘어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신다.

성경이 정확히 기록하지 않아 그 진상을 알기는 어렵지만 6-13절에 성읍 장로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아마 당시 사무엘온 성읍 장로들을 배제한 채 이새와 그의 아들과과 더불어 제사틀 드렸던 것으로 보인다.

6-13절은 화목제를 드린 후 공동 식사를 하는 문맥으로서 이 공동 식사에는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동참하는 것이 상례인데 성읍 장로들이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비밀스럽게 행해야 할 기름붓는 의식이 거행되는 것으로 볼 때 제사 자체에 성읍 장로들이 배제된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한편 이러한 사실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부을 때 사람들을 초청한 장면과 대조된다.
사울: 사무엘이 사울을 위해서 식사에 초대한 대상은 해당 본문에 정확히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그 지방에 유력한 사람들로 추정된다. 이는 사울을 유력한 자둘 앞에서 공식적으로 알리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다윗: 반면에 본문 이하에 나타난 초청은 사무엘 개인을 포함하여 그 어떤 인간적인 계획도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오직 여호와의 단독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진 사울에 대한 선택과 다윗에 대한 선택이 과정에서부터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이 점점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Ⅵ. 사무엘은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특별히 주목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비밀히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사무엘은 이새를 처음 보자 그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고, 그의 집에 숙소를 정했으리라고 보여진다. 사무엘은 다른 모든 장로들에게는 "자신을 성결케 하라" 고 말했다. 그러나 사무엘은 기도와 가르침을 통해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성결케 하여 주었다.”

사무엘은 그전부터 그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20:29 을 보면 이새의 가족들이 드린 가족적 제사를 볼 수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서) 이새의 가정은 매우 경건한 신앙의 가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무엘은 공적인 제사에 참여하기 위한 그들의 가족적인 준비를 도와 주었다. 그리고 아마 다윗을 택하여, 그에게 기름을 부은 것은 공적인 제사가 거행되기 전에 가졌던 이새의 가정 제사에서의 일이었다고 보여진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욥이 그 아들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던 것처럼" (욥 1:5), 아들들 하나하나를 위한 개인적인 제사를 드리게 하고, 그것을 구실삼아 그 아들들이 하나하나 그의 앞에 나오게 하였던 것 같다. 한 가족에게 축복의 신호가 오면 그 가족들은 모두 스스로를 성결케 하여야 한다.

기름부음 받은 다윗(사무엘 상 16:6-13)

하나님께서 만일 (1절에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이새의 아들들에게 그들 중에서 한 왕을 택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다면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대로 멋진 모양을 꾸몄을 것이며, 모두가 바로 자기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Ⅰ. 발탁을 받기 위해 멋진 자세로 서 있었던 이새의 큰 아들들이 모두 그대로 통과되었다.

  1. 맏아들 엘리압이 제일 먼저 혼자 사무엘에게 왔다. 그때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고 오직 이새만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무엘은 그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라고 마음 속으로 외쳤다(6절). 비록 선지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떠나서 말을 하면, 나닫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삼하 7:3), 다른 인간이나 마찬가지로 잘못 말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자신이 알려주는 사람에게 기름만 부으면 된다고 지시하셨는데(3절), 엘러압을 눈으로 보았다는 것은 어미 그가 사람을 외모로 판단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사무엘이 엘리압을 여러 아들 중에서 가장 던저 본 것은 아마도 그의 용모와 신장이 출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본문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인간적인 기준으로 이세의 아들들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마음 속에 은근히 속삭여 주심으로써 선지자의 잘못을 시정하여 주셨다. 하나님은 "그 용모를 보지 말라" 고 하셨다(7절).

👉하나님께서 이처럼 강조적인 표현을 사용하셨을 때, 사무엘은 곧바로 사울을 떠올렸을 것이다. 사울이 이처럼 외적으로 완벽한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사무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자신의 판단 기준이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 아님을 곧 깨닫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미치지 못할 준수한 용모와 키를 가졌던 사울에게 극도로 실망한 사무엘이 여전히 그런 표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려고 하였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기쁘게 하여 주고자 왕을 선택하셨을 때는 외모가 준수한 사람을 택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에 드는 자를 택하고자 하셨을 때는 외모를 보고 택하지 않으셨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신다(사 11:3).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

(1) 이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 속을 아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시다. "인간은 눈으로 본다" (라고 이렇게 원문대로는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거기 나타난 쾌활함이나 명랑함을 보고 즐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고, 그의 생각과 의도를 보신다.

(2) 이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보시고 그를 판단하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좋은 마음의 기질과 거룩함을 지녀야 한다. "하나님앞에서 값진 것은" (벧전 3:4) 이러한 것들이지, 결코 겉으로 보이는 위엄이나 힘이나 신장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의 참다운 미는 그 마음에 있는 것이지 결코 그 풍체에 있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고, 사람들을 판단할 때 그들의 마음을 보고 판단하되, 풍체를 보고 판단하지 말자.

👉 하나님은 겉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다 중요한 속사람, 즉 전인격적 측면을 감찰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마음을 중히 여기시는 까닭은 마음이 인간을 대표할 뿐 아니라 인간 행위의 원천어기 때문이다(창20:5). 사실 사울이 하나님께 버럼을 받았던 것도 그 마옴이 인본주의적인 생각과 교만으로 가득차서 그 행동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릴 새로운 왕에게 기름을 붓는 의식을 거행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 대상의 마음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인가를 살펴보시는 것이다.

2. 엘리압이 밀려나자, 아비나답과 삼마의 뒤를 이어, 다른 이새의 아들들 네 명이 모두 사무엘 앞에 차례로 나타났지만, 이제 처음과는 달리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보다 주의깊게 관찰하는 사무엘에 의해 모두 거절을 당했다.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라고 그들 모두를 두고 말했다(8,10). 인간은 그들의 명예와 재산을 아들들에게 나누어 줄 때 그들의 나이와 출생 연도에 의해 처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창 25:23)는 말씀이 있다. 만일 사무엘이나 이새에게 선택권이 주어졌었더라면 이들 중에서 하나가 반드시 선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인간들이 볼 때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물론 다소 유망하다고 보는 자들도 그대로 지나쳐 버림으로써 자신의 주권을 더욱 공고히 하신다.

 👉 가장 어린 자, 가장 작은 자:
그가 가장 어리다고 하는 것은 형들의 장성함과 비교되며, 그가 가장 작다고 하는 것은 사울의 큰 신장과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대조를 통해서 앞으로 등장할 이새의 막내 아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드러나게 될 것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작다'라는 개념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 의 뉘앙스도 지니기 때문이다. 과거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그의 외모 때문이 아닌 자신을 작게 여겼던 그 겸손함 때문에(9:21; 15:17) 왕으로 세우셨다. 그러나 사울이 왕이 된 후 여호와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외모가 준수하고 키가 큰 것은 교만의 상징이 되었다. 즉 저자는 사울과 구별되는 다윗의 외형적 모습은 물론 그 마음의 상태를 암시하기 위하여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Ⅱ. 드디어 다윗이 선택되었다. 다윗은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적은 자였다. 그의 이름은 "사랑받은 사람" 이란 뜻이다. 다윗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주어졌다.

  1. 다윗은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다(11절). 아버지의 집에서는 제사와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건마는 그는 들에 남겨지고 있었다. 막내는 흔히 가정에서 제일 귀여움을 받는데, 이새의 집에서는 다른 아들들에게 밀려난 형편이었던 것 같았다. 또 그들은 다윗이 가지고 있던 훌륭한 영적인 가치에 대해 그것을 분간하지도 그리고 바르게 평가하지도 못했다. 많은 위대한 천재들이 냉대와 멸시 속에 파묻혀 있는 수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간혹 인간들이 경멸하는 자를 추겨 세워 주시며" 그 부족한 부분을 풍성한 은혜로 채워 주신다." 다윗의 자손을 인간들은 멸시했으며, 그는 "건축자가 버린 돌" 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이름들 위에 뛰어난 이름" 을 가지고 계셨다. 모세가 이드로의 양무리를 칠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같이, 다윗도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기르도록" (시 78:71) 이끄심을 받았다. 그것은 그가 겸손하고 근면하였다는표시이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사, 그 위에 은혜 주시기를 즐겨하시는 것들이다. 우리는 훌륭한 왕의 자질을 위한 준비로서 군인 생활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목자의 생활을 보신다(목자 생활은 하나님께 대해 명상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의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목자 생활을 통해서는 그러한 일을 하는데 꼭 필요한 성령의 은사를 받을 수 있다.
    제사를 드리는 때이건만 다윗은 양들을 치고 있었다. 왜냐하면 제사에 먼저 참여하는 이에게 자비가 베풀어지기 때문이다.

2.사무엘은 다윗이 오기를 매우 간절히 기다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다른 모든 아들들이 택함받지 않았다면 반드시 그가 바로 택함받은 자이다" (아마 그 때의 식사는 제사시의 잔치가 아니라 보통의 식사 자리였을 것이다). 식탁에 전혀 자리까지도 마련되지 아니했던 그가 이제는 그 식탁의 주인공으로 초대되어 기다려지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낮은 자들을 높이고자 하시면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는가?

 👉 사무엘은 자신이 이곳까지 온 목적을 완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일을 다하기까지 식사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의 투철한 사명감…

본문의 상황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출될 때의 상황과 비교된다.
사울: 사울의 경우는 사무엘이 직접 사람돌이 모인 식사 장소에 사울을 데려왔던 반면에(9:22),
다윗: 본문에서는 사무엘이 식사 장소에서 다윗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교틀 통해서 볼 때, 본문은 사무엘의 개입까지도 철저히 배제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3.다윗이 왔을 때의 그의 모습을 살펴보자. 그의 옷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아니했다. 그의 옷은 그의 직무상 다른 모든 목자들과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보잘 것 없고, 초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요셉처럼 옷을 갈아입지도 못했다(창 41:14). 그렇지만 사울처럼 준수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마는 정직하게 보였고, 사랑스럽게 보였다. "그의 빛이 붉고, 눈의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고 했다(12절). 말하자면 그는 해맑은 안색과, 좋은 눈과 그리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목구비는 뛰어나고 보기에 매력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애써 꾸민 것이 없고 오히려 직무상 햇볕과 바람 속에 자신을 드러내 놓고 지나게 하건마는 자연이 가져다 주는 아름다움은 그의 성품까지도 상냥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마 다윗이 사무엘 앞에 나타났을 때 사무엘이 그를 매우 정중하게 대해 주는 데 놀라서, 수줍음 때문에 얼굴이 홍조(를 띠은 것이 오히려 그를 더 멋진 사나이로 보이게 한 것인지 모른다.

4.사무엘이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의 귀에 다 대고(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9:15) "이가 바로 그가 기름을 부을 자라" 고 말씀하여 주셨다(12절). 사무엘은 그가 배우지 못했거나, 너무 젊거나 또는 그의 가족들에게서 무서워하거나 하는 점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기름뿔을 취하여 "그에게 부었다" (13절).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의미한다.

(1) 사울이 죽으면 왕국을 그가 다스리도록 하나님께서 임명하셨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왕권이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그에게 이양될 것이다.

(2) 왕국을 다스리기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그에게 하늘의 은사와 은혜를 내려 주시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로 합당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 주시는 것이다.

다윗은 "그 형제 중에서(in the midst of)"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아직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해 지명받은 것인 줄 몰랐으며, 그러므로 (요셉과는 달리)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의 형제들은 그에게 주어진 장래의 영광과, 또 채색된 옷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패트릭(Patrick) 주교는 이 말을 "사무엘이 그들 형제들 중에서 나오게 하여 기름을 부었다(He anointed him from the midst of his brethren)" 라고 읽는다. 그것은 사무엘이 다윗을 형제들 가운데서 따로 불러내어 비밀히 기름을 부어, 형제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단지 그 자신만이 알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엘리압이 아무 것도 몰랐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17:28). 이 때의 다윗의 나이는 20세이었다고 계산이 나왔다. 그렇다면 사울 때문에 받은 그의 고통이 약 10년 가량 계속되었을 것이다.왜냐하면 그의 나이 30세에 사울이 죽었기 때문이다.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는 그 때의 다윗의 나이는 25세 쯤이었고 그의 고난은 5년간 계속되었다고 보았다.

5.기름부음에 이어 좋은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그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13절).

그가 받은 기름부음은 빈 의식이 아니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하늘의 능력이 언제나 그와 함께하였다. 그리고 그의 외적인 환경은 변한 것이 없어도, 내적으로는 왕의 자질인 지혜와 용기와 그리고 나라의 일들에 대한 관심이 크게 싹터 오는 것을 자신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그로 하여금 그 선택이 하나님의 선택이었음을 크게 확신하게하여 주었을 것이다. 우리가 영광의 왕국에 들어가도록 예정되었다고 하는 그 가장 좋은 증거는 우리가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 받았다는 것과 또 마음 속으로 은혜의 활동을 경험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사자나 곰을 맨 손으로 잡은 용기나 또 뛰어난 음악의 재주들은 모두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셨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였다고 한다. 하여간 그는 이스라엘에서 노래 잘하는 자가 되었다(삼하 23:1).

이 일을 끝낸 후 사무엘은 무사히 라마로 돌아갔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외에는 (19:18), 한 번도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한다. 이제 그는 이스라엘의 홀이 유다 지파로 돌아가고 그의 눈이 그 구원을 보았기 때문에, 평안히 죽기 위해 은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