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역대하 9, 유다서 1, 스바냐 1, 누가복음 23
묵상구절
29:1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 쳤더라
29:2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은 수백 명씩 수천 명씩 인솔하여 나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29:3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이 이르되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하니 아기스가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에게 이르되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
29:4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에게 노한지라 블레셋 방백들이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돌려보내어 왕이 그에게 정하신 그 처소로 가게 하소서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 그가 무엇으로 그 주와 다시 화합하리이까 이 사람들의 머리로 하지 아니하겠나이까
29:5 그들이 춤추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그 다윗이 아니니이까 하니
29:6 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와 함께 진중에 출입하는 것이 내 생각에는 좋으나 수령들이 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29:7 그러므로 이제 너는 평안히 돌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에게 거슬러 보이게 하지 말라 하니라
29:8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내가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하니
29:9 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전령 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아나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
29:10 그런즉 너는 너와 함께 온 네 주의 신하들과 더불어 새벽에 일어나라 너희는 새벽에 일어나서 밝거든 곧 떠나라 하니라
29:11 이에 다윗이 자기 사람들과 더불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떠나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돌아가고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르엘로 올라가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본장은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사건이 기록된 28:3-25의 삽입 기사 이전의 상황으로서 블레셋의 이스라엘 공격 준비와 다윗을 향한 아기스의 참전 명령을 기록한 28:1, 2와 이어진다. 여기서 저자는 독자들의 관심을 전장으로 다시 집중시키기 위하여 블레셋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의 대처 상황을 밝힌다.
그런데 앞선 28:4에서는 블레셋 군대가 수넴에 포진한 것으로 묘사한 반면 본절에서는 아벡에 포진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모순이 아니라 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본장의 시점은 앞선 28:4의 시점보다 빠르다. 즉 블레셋 사람들은 먼저 아벡에 모여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그들이 전쟁의 장소로 정한 수넴으로 이동하여 진을 쳤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멕이 블레셋 본토에 있는 군사 요충지인 반면 수넴은 이곳으로부터 내륙으로 동복쪽 60km 정도 떨어진 위치라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런데 시간적으로 앞서는 본장의 내용을 28:3-25 이하에 기록한 것은 본격적인 전쟁 진행의 기록에 앞서 전쟁에 임하는 사울의 불신앙과 그로 인해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유기된 상황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반면 본장에서는 다윗이 블레셋 방백들의 반대로 출전을 거부 당하게 되는 과정 속에 내재된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냄으로써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계속되는 보호를 보여준다.
이처럼 저자는 시간적 진행 상황까지 무시하면서 인본주의적 왕인 사울과 신본주의적 왕으로 택정받은 다윗의 상황을 비교 제시하여 다윗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하심을 부각시킨다.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한 다윗(사무엘상 29:1-5)
Ⅰ. 다윗은 매우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한 사실을 다윗 자신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다윗은 하나님의 충고를 구했다거나, 그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어떤 노력을 시도했다는 기사를 우리는 보지 못한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두 군대는 서로 진영을 치고 전투 준비를 완료하였다(1절). 다윗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아기스는 다윗에게 군대를 이끌고 와서 자기를 도와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 말에 따라 다윗은 왔으며, 열병식에서 아기스 뒤에 서 있는 것이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2절).
👉본문의 표현은 블레셋 군대의 조직은 체계적이고 클 뿐만 아니라 매우 역동적이란 느낌을 갖게 한다. 이는 1절에 나타난 이스라엘 군대의 정적 이미지와 큰 대조를 이룬다.
- 만일 두 군대가 서로 싸울 때, 다윗이 물러나며 제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비겁자요 배반자란 비난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를 보호해 주고, 그에게 은혜를 끼쳤고, 그를 매우 신임하였으며 또 그에게 매우 명예로운 사명을 주었던 아기스에 대해 배은망덕한 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런 파렴치한 행동은 그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다.
- 그렇다고 해서, 아기스가 기대 한대로 블레셋을 도와 이스라엘과 싸운다면 그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원수는 조국에 대한 배반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며, 그의 백성들이 그를 중오하게 될 것이며, 이구동성으로 그가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합당치 않음으로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할 것이며, 무할레자의 깃발 밑에서 싸운자로서 이스라엘의 왕에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또 만일 이 싸움에서 사울이 죽임을 당한다면 다윗이 그를 죽였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죄와 비난을 받게 되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처하게 된 어려운 입장이었다. 의인 앞에 환난이 놓인 것보다 죄가 놓였다는것이 그를 더 난처하게 만든다. 다윗은 유다 땅을 떠나 무할례자들과 함께 살면서 누구의 충고도 듣지 않고 이 난처한 입장에 자신을 몰고 들어갔다. 악인들과 밀접하게 관련을 가진 사람들이 만일 죄책감을 가지거나 한스러운 마음을 가지지 않고, 일이 잘 되어 간다면 이는 이상스러운 일이다.
여기서는 다윗이 스스로가 어떤 일을 하겠다고 나선 것으로는 나오지 않고 있다. 아마 다윗은 직접 이이스라엘 사람들을 공격하는 일에는 가담하지 않고, 다만 왕의 머리를 지키는 자로서 지명된 것으로 보인다. 이 직책은 이미 그에게 지명된 적이 있다(28:2). 그러나 죄의 가장자리까지 근접하고도 그 죄속에 빠지지 않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어리석음을 책망하기 위해 그를 이런 어려움 속에 몰아 넣으셨지마는,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바로 서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으셨고, 그리고 또한 피할 길을 주셨다" (고전 10:13).
👉 본문은 28:1,2에 나오는 아기스의 출병 요구에 다윗이 응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족 이스라엘을 치는 이 전쟁에 다윗이 출병한 것은 블레셋으로 망명하여 아기스의 보호를 받는 처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것이지 자신이 원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러한 다윗의 상황은 ‘그 뒤에서' 라는 표현에서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본문은 다윗의 실제적인 위치 뿐만 아니라 동족과의 전쟁에 임해야 하는 그의 심리적인 면까지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다윗은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져서 스스로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무기력한 상황에 있었으나 바로 뒤이어 하나님께서 블레셋 방백들로 하여금 다윗의 참전을 반대하게끔 역사하심으로써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Ⅱ. 다윗에게는 이 어려움에서 피해 나갈 길이 열렸다.
하나님은 블레셋 방백들의 마음을 충동하여 그들이 다윗의 출전을 반대하셨고, 그를 돌려 보내도록 주장하게끔 하셨다. 이처럼 그의 친구들이 그에게 어떤 도움을 주지 못할 때 하나님은 오히려 다윗의 원수들의 반목이 그를 도울 수 있게 하여 주셨다.
- 군대를 열병할 때 블레셋의 방백들이 물은 질문, 곧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3절)라는 질문을 타당한 질문이었다. 그 말은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으며,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 고 묻는 것이다. "한 히브리 사람이 자기의 고장을 떠나면", 그가 히브리인의 정신을 가지고 있을 때, "그는 제대로의 활동을 펴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그가 블레셋 사람들의 진중에서는 불안할 수 밖에 없다. 다윗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였다" (시 26:5). 그런데 지금 다윗은 그런 사람들 가운데 있다.
이 경우에도 아기스는 다윗을 명예롭게 보증하여 주었다. 아기스는 다윗이 자기의 조국에서 악독한 핍박을 받아 도망쳐 나온 피난인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를 보호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아기스는 다윗을 보호할 의무가 자기에게 있다고 보았고, 또 그에게 일을 맡겨도 좋으리라고 보았다. "그가 나와 함께 있은지 여러 날, 여러 해로다" 라고 아기스는 말했다. 즉 아기스는 다윗이 상당한 기간 동안 그의 궁전에서 그와 함께 있었건만 어떤 허물을 그에게서 찾을 수가 없었고, 불충한 점도 보지 못했고, 오직 그가 충심으로부터 자기를 섬긴 것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아기스의 말을 통해 우리는 다윗이 매우 신중하게 처신하였으며 그의 마음 속에 여전히 자리잡고 있던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을 조심스럽게 숨겨 왔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미련한 자들에게 가까이 갈 때는 지혜롭게 걸으며, 우리 앞에 악인들이 있을 때는 우리의 입을 다물어야 하며" 과묵해야 할 필요가 있다.
2. 그러나 블레셋의 방백들은 다윗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단호하게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었다.
(1) 다윗은 블레셋의 오랜 원수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이겼을 때 불려진 노래 즉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라는 노래를 들먹였다(5절). "그처럼 우리의 백성들을 많이 죽인 사람을 숨겨주고 그를 신임한다는 것은 우리의 수치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때에는 그처럼 활기있게 자기를 도와 준 사울과 진정으로 대항해서 싸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읍니다."
(2) 다윗이 그들에게는 사울의 모든 군사들보다도 더 위험한 대적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군인들은 우리의 앞에서 우리와 싸우는 동안, 그들이 우리의 뒤에서 우리를 칠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또 그는 우리를 배반함으로 자기의 주인과 화해하는 길을 모색할는지도 모릅니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읍니다. 그가 자기의 나라를 사랑하는지 아니하는지는 여하간에, 우리를 배반하는 것이 자기의 이익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읍니까?" 항복한 적을 신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와 같은 강력한 반발은 결국 다윗으로 하여금 동족과 전쟁을 하여야 하는 곤경에서 벗어나게 했을 뿐 아니라 다윗의 부재 기간에 시글락에서 발생하였던 다윗 가족과 이스라엘 여인들의 피납 사건을 해결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의 출정에 반대한 블레셋 방백들의 배후에는 신정 왕국의 새로운 지도자로 기름부어 선택된 다윗을 보호하사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그때 다윗이 출정하여 이스라엘과 싸웠다면 그것은 다윗이 차기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있어 치명적인 오점이자 장애물로 작용했을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과 헤어진 다윗(사무엘상 29:6-11)
👉 앞선 1-5절은 다윗을 전쟁에 참가시키려는 아기스의 결정에 대하여 블레셋 방백들이 거세게 반발한 사실을 다루었다. 이제 6-11절은 아기스가 다윗을 시글락으로 귀환시키고 블레셋 군대는 다윗이 없는 상태에서 이스르엘로 진군한 사실을 기록한다.
먼저 6, 7절은 아기스가 다윗의 귀환을 권면하는 내용이다. 아기스의 권면은 ‘여호와의 사시거니와’ 란 말로 시작된다.
여기서 블레셋 왕 아기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는 방식으로 맹세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한 말의 진실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종종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였다(룻 3:13; 삼상 14:39; 삼하 4:9; 왕하 2:2). 그리고 율법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헤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규정하고 있었으므로(레19:12),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기스는 블레셋 사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아기스는 어떻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 있었을까?
그것온 아기스가 다윗이 믿는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맹세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말을 믿어도 좋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표현 역시 아기스가 다윗을 존중했고 깊이 신임했음을 잘 보여준다.
아기스가 다윗을 신임하는 이유가, 방백들이 왜 다윗을 믿지 못하는지 밝힌 이유를 보다 훨씬 더 강한 것이라 할지라도, 아기스는 비록 방백들 중의 우두머리이며 왕이라는 호칭으로 일컬어지는 유일한 사람이지만, 이 문제를 위해 모인 작전 회의의 결정에 따라서 그가 아무리 다윗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를 돌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왕들이라고 해서 언제나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는 하지 못한다.
Ⅰ. 아기스는 다윗을 돌려 보내되, 매우 명예롭게 보냈다. 그리고 아주 보낸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 일만 하지 않도록 하였다.
1. 아기스는 다윗의 행동이나 말에 대해 대단히 만족하였다는 것을 표시하였다.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사자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안다" (9절).
지혜롭고 선한 사람은 어디가나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아기스가 다윗을 두고 하신 말씀과 같다(슥 12:8). 그들은 "여호와의 사자" 와 같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전자는 다만 왕의 칭찬에 불과하며 후자는 하나님의 약속이시다.
2. 아기스는 다윗의 훌륭한 처신을 증명하여 주었다(6절).
그의 찬사는 매우 충분하고도 정중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정직하였으며, 네 모든 처신은 내가 보기에 매우 좋았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서 어떤 잘못을 찾을 수가 없다."
다윗은 아기스에게 보다 훨씬 더 사울에게 잘했다. 그러나 사울에게서는 그런 칭찬을 들어보지 못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들이 상종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좋은 칭찬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잘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칭찬해 주는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잘해야 한다.
3.아기스는 그를 돌려 보내는 잘못이 전적으로 방백들, 곧 다윗이 계속 진중에 머물러 있는 것을 싫어하는 방백들에게 있다는 것을 말했다.
"왕은 그대를 매우 사랑한다. 그래서 그의 생명까지라도 그대의 손에 맡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방백들은 그대를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하며, 반대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대는 평안히 돌아가라."
아기스는 그의 장군들 사이에 증오심을 일으키게 하거나, 그의 군대 사이에폭동이 야기되게 하는 것보다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아기스는 그들이 왜 그렇게 불안해 하는지 그 이유를 밝혀 주었다. 아기스는 그것이 다윗 자신에게 있다고 하기보다는, 그의 "주인(즉, 사울)의 신하들" 이라고 부르는(10절) 다윗의 부하들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다윗은 믿을 수 있으나 그의 부하들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 우리는 다윗의 출전에 대하여 블레셋의 방백 뿐만 아니라 방백 밑에 있는 장관들까지 반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기스는 왕이였으나 부족 연합 국가 체제에서 절대 권릭을 행사하기 어려웠으므로 방백들과 장관들의 의견을 수럼하여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들로 인해 다윗은 동족 상잔의 불행을 피할 수 있었다.
아기스는 다윗을 ‘하나님의 사자같이 선하다’ 고 표현했다.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의 메시지를 대신해서 전하는 사람’ 그런데 아기스는 다윗을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하는 자로 평가하고 있다. 즉 아기스는 다윗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임을 알았으므로 ‘하나님’이란 표현까지 사용하여 그의 신실함을 높이 평가하였던 것이다.
4.아기스는 다윗에게 새벽에, 날이 밝자마자 떠나라고 하였다(10절). 그것은 다윗이 우물쭈물 하다가는 앞으로 더 많이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의혹과 질투를 막아 주기 위한 것이었다.
👉 다윗은 아기스의 명령에 대해서 더 이상 이의를 달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여 다음날 아침에 일찍 블레셋 진영을 떠났다. 다윗이 새벽에 일어나 시글락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기스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실상 다윗 자신의 자발적 의지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Ⅱ. 다윗은 아기스의 이야기를 정중하게 받아들였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무엇을 하였기에 내 주 왕과 헤어져야 합니까? 더욱이 내 주 왕이 전쟁터에 나가려고 하는 이 때 말입니다. 왜 나는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합니까?" (8절).
다윗은 이런 판국에 아기스를 돕기가 무척 걱정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기스가 그 사실을 알기를 원치 않았다. 위대한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을 말하고자 하는 강한 유혹에 빠지며, 그것을 피하기가 매우 어렵다.
👉 다윗은 아기스를 주인이라고 부르고 자신을 종이라고 불렀다.
→ 이것은 일차적으로 블레셋 방백들과의 대화에서 아기스가 다윗을 가리켜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라고 부른 것(3절)을 의식한 호칭이다.
→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건 이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이(16:12,13) 적지에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저자세를 취한 것으로서 극히 비굴한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윗은 더 나아가 이스라엘을 가리켜 아기스의 원수 라고 표현한다. 이스라엘을 극히 혐오하는 아기스를 자기의 주인이라고 부르고 동족을 원수라 부를 정도로 다윗은 자기 생명 보존을 위해 아기스의 비위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표현을 사용한데에는 이스라엘을 치러 가는 전쟁에 자신이 참여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나타냄으로써, 자기가 다시 블레셋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자기 의지가 아닌 아기스 왕의 의지라는 것을 명확히 하기 위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다윗은 아기스를 비롯한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여전히 블레셋의 편인 것처럼 가장함으로써 계속해서 안전하게 시글락에서 망명 생활을 할 수 있었다.
Ⅲ. 하나님의 섭리는 다윗의 곤경을 지혜롭고도 은혜롭게 해결하여 주셨다.
다윗은 올가미를 벗어났으며, 곤경에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성읍을 구원할 수 있었다. 다윗은 자기의 성읍이 위험한 지경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이처럼 블레셋의 방백들이 그에게 준 불명예는 오히려 그에게 큰 도움을 여러가지로 줄 수 있었다. "의인의 발걸음을 하나님께 서 지켜 주시매, 그는 그 길을 기쁘게 걸어 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매, 그는 그 길을 기쁘게 걸어 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하실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히 그 결과는 좋을 것이다.
👉 블레셋 방백들과 장관들의 비타협적인 태도와 아기스 왕의 타협적인 태도 및 귀환 결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읽을 수 있다. 다윗은 이제 꼼짝 없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나가야 할 상황, 곧 이스라엘과 싸워 자기 동족의 원수가 될 위기 가운데 있었다. 만약 이때 다윗이 스스로 참전 거부 의사를 밝히게 되면, 아기스에게 의심을 받아 더 이상 블레셋에서 안전하게 거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런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져 있는 다윗에게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나가지 않으면서 동시에 아기스의 의심도 받지 않는 길이 자연스럽게 열린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일을 블레셋의 방백들과 장관들이 해주었다. 그리고 아기스가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오히려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다윗을 전쟁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지 않았는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선하신 뜻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엡1:11)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않으시며, 또한 시험 당할 때 피할 길을 주시어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전 10:13).
본장에서 우리는 다윗이 진퇴 유곡의 상황에 빠겼다가 블레셋의 아기스 왕에게 신임도 얻고 동족 이스라엘과 싸우러 가지 않아도 되는 결과를 얻게 되었음을 보았다. 이 모든 것이 적절한 때에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당신의 택한 중 다윗을 도우신 하나님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하수에로 왕이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우연히 역대 일기를 보다가 자기의 생명을 구해 준 모르드개를 존귀케 한 사건(에 6:1-11)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졌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대적 블레셋의 장수가 되어 동족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꼼짝없이 참가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블레셋의 방백들의 강력한 반대로 다윗이 시글락으로 되돌아 간 본장의 사건도 다윗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고 살아간다면, 어떠한 막다른 골목에 이른다 할지라도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