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창세기 12, 마태복음 11, 느헤미야 1, 사도행전 11
묵상구절
15:13 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말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
15:14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중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그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 우리를 해하고 칼날로 성읍을 칠까 하노라
15:15 왕의 신하들이 왕께 이르되 우리 주 왕께서 하고자 하시는 대로 우리가 행하리이다 보소서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하더라
15:16 왕이 나갈 때에 그의 가족을 다 따르게 하고 후궁 열 명을 왕이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하니라
15:17 왕이 나가매 모든 백성이 다 따라서 벧메르학에 이르러 멈추어 서니
15:18 그의 모든 신하들이 그의 곁으로 지나가고 모든 그렛 사람과 모든 블렛 사람과 및 왕을 따라 가드에서 온 모든 가드 사람 육백 명이 왕 앞으로 행진하니라
15:19 그 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이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15:20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 없이 가니 오늘 어찌 너를 우리와 함께 떠돌아다니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15:21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종도 그 곳에 있겠나이다 하니
15:22 다윗이 잇대에게 이르되 앞서 건너가라 하매 가드 사람 잇대와 그의 수행자들과 그와 함께 한 아이들이 다 건너가고
15:23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며 모든 백성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
15:24 보라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도다
15:25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15:26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15:27 왕이 또 제사장 사독에게 이르되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너는 너희의 두 아들 곧 네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평안히 성읍으로 돌아가라
15:28 너희에게서 내게 알리는 소식이 올 때까지 내가 광야 나루터에서 기다리리라 하니라
15:29 사독과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다 놓고 거기 머물러 있으니라
15:30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15:31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15:32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덮어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15:33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만일 나와 함께 나아가면 내게 누를 끼치리라
15:34 그러나 네가 만일 성읍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전에는 내가 왕의 아버지의 종이었더니 이제는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하면 네가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리라
15:35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이 너와 함께 거기 있지 아니하냐 네가 왕의 궁중에서 무엇을 듣든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알리라
15:36 그들의 두 아들 곧 사독의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요나단이 그들과 함께 거기 있나니 너희가 듣는 모든 것을 그들 편에 내게 소식을 알릴지니라 하는지라
15:37 다윗의 친구 후새가 곧 성읍으로 들어가고 압살롬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망명에 오른 다윗(사무엘 하 15:13-23)
👉압살롬의 반역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그 세력이 급속히 커져 갔음을 기록한 12절에 이어 본절부터 23절까지는 아들의 반란에 충격을 받고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가는 다윗의 비참한 모습과 그 과정에서 가드 사람 잇대가 다윗을 충성스럽게 수종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다윗의 일생이 비록 파란만장한 일들로 가득 차 있었으나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이리저리 쫓겨다니면서 사람들로부터 저주를 당한 이 시절보다 더 비참한 때도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때에 다윗은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라는 내용의 눈물겨운 시를 지었을 것이다(시 3:1,2).
그러나 다윗은 왕으로서의 힘을 상실하고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는 자신을 모욕하는 많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오히려 의지할 대상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신앙의 회복을 경험하게 된다(시 3:3-8).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이 한때 완악한 마옴으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밧세바와의 간옴 및 우리아 살해 등의 범죄를 저질렀던 다윗을 다시 놀라운 신앙인으로 회복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다윗의 마음을 아시는 듯이 하나님은 고난에 직면한 다윗을 완전히 버리시지 않고 가드 사람 잇대로 하여금 수종들게 함으로써 택한 자 다윗을 향한 당신의 은혜와 사랑이 심판 중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신다.
Ⅰ. 여기서 압살롬의 반란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진다(13절).
👉이제 압살롬은 왕됨을 스스로 자처하지 않아도 백성들의 추대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잦은 전쟁에 따른 징벌과 과중한 세금 등으로 다윗의 정부에 대해 평소 불만을 품고 있던 차에 그들이 칭송해 마지않는 압살롬이 정권을 잡자 새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압살롬에게로 그 마음이 급속히 기울어져 갔던 것으로 보인다.
사건은 악화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지도자들에게 있다는 통념 때문에 민심이 압살롬에게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실보다 더 불행해 보였다. 그러나 다윗은 압살롬이 백성을 꼬드기는 데 사용한 술책들을 생각하고 더욱 괴로워했다. 확실한 자신의 유리점을 살려 그의 술책을 좌절시키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을 것이다. 자기 추종자들의 마음에 확신을 넣어 주는 것이 왕자의 지혜다. 그들을 손에 넣었다면 그들의 심장도 능력도 손발도 모두 소유한 것이다.
Ⅱ. 다윗에게 주어진 경종과 그에 대한 해결 방안.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이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불법으로 배신하여 아버지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는 카이젤의 말을 잘 알았을 것이다. kai, su teknon-즉 아들이란 무엇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서 너무 높은 지나친 기대를 가지고 키우지 말라. 높은 희망은 높은 절망을 가져온다. 다윗은 상담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자기 마음만 믿고 하나님만 의존했다. 예루살렘의 종말이 곧 다가왔다(14절). 그는 용사로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해결책을 취택했다.
1. 참회자로서의 다윗.
그는 징계를 받을 때 복종하고 채찍을 드신 하나님의 손에 매어 달렸다. 그의 양심은 우리아의 사건을 회상시켰다. 그 죄악 때문에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삼하 11:11)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내게 이루시니 내가 이 재화를 조절하거나 대적할 것이 아니라 오직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복종할 것 뿐이다" 라고 다윗은 스스로 생각한다. 다윗은 불법자 압살롬 앞에서는 의인이지만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참회하며 그의 의 앞에 복종했다. 그래서 그의 죄악에 대한 형벌을 달게 받았다.
2. 정치가로서의 다윗.
예루살렘은 큰 도시이기는 하지만 질서가 잡힌 곳은 아니었다. 시편 51편 18절에서의 다윗의 기도문 가운데 보면 "주의 은택으로 시온의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이것은 그 성의 성벽이 무너져 이를 수축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다윗이 가지고 있는 작은 병력으로는 너무 큰 일이라 수축할 수 없었다. 다윗은 대다수의 국민이 압살롬에게 빠져 있어서 다윗에게 진실로 응할지 그것이 의심스러웠다. 그가 이 성벽을 수축한다면 특별히 압살롬의 농간에 걸려들지 않은 순수한 동료를 뺏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을 아끼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동료를 구하거나 공격의 비극을 만들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성을 쌓는 것으로써 반란이 제압되기를 원했다. 선한 사람들은 자기가 고통을 당할 때 남이 당하는 고통을 생각한다.
👉 그런데 다윗성은 정복하기 어려운 견고한 요새였을 뿐 아니라 비록 늙었다고는 하나 다윗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용사로서 요압 장군을 비롯하여 수많은 충성스런 장군들(삼하 23:8-39) 및 군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압살롬의 반란군을 진압하지 아니하고 왕궁에서 급히 도망가야 했는가?
그것은 많은 백성들이 압살롬의 군대에 가담하여 반란 당시 다윗의 군대보다 압살롬의 군대가 더 강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백성들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다.
→ 즉 다윗은 예루살렘성을 사수하기 위해 압살롬의 군사와 싸우게 되면 예루살렘성이 피로 크게 얼룩질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단순히 자신의 군대의 전력이 약하거나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성과 거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임이 본문을 통해 드러난다. 압살롬에 의한 재앙의 잔학성을 강조하는 표현들을 통해 신하들로 하여금 도망을 서두르게 했을 것이고, 이미 대세를 파악한 다윗은 무고한 거민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성의 파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도망의 길을 택했을 것.
‘칼로 성을 칠까 하노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다윗이 자신을 모반해서 일어난 압살롬의 세력에 대해 대항하지 않은 신앙적 이유 역시 생각해 볼 수 있다.
→ 그것은 압살롬의 반란이 일찍이 그가 밧세바와 우리아에 대해 행했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관의 결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실제 나단 선지자는 이 죄에 대한 심판의 하나로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하였다(12:10). 따라서 다윗은 자신의 범죄에 대해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헤 겸손히 순중하고자 했던 것이다.
Ⅲ. 예루살렘으로부터 급거 도피.
그의 신하들은 그의 생각에 동의하며 성실하게 그를 따랐다(15절). 그래서 그는 그들의 충의심을 확인했다.
👉 '우리 주 왕의 하고자 하시는 대로 우리가 행하리이다'
다윗의 궁내 대신들이 철저하게 다윗의 결정을 존중하고서 그가 어떤 것을 선택할지라도 그대로 따를 것이라는 자신들의 강한 결의를 내비친 것이다. 혼란스런 와중에서도 다윗의 궁내 대신들은 다윗 왕을 중심으로 일치 단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충직스러운 신하들이 있었기에 다윗은 피신 기간 중에도 좌절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어려움을 잘 극복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 그는 압살롬이 말과 병거를 타고 올 때 도보로 예루살렘을 피해 갔다. 외모를 화려하게 꾸미는 사람은 언제나 동기도 좋지 않은 사람이요, 불의한 사람이다. 이 장면을 보라. 반역자와 그의 종들은 말을 탔고 법적 권한이 주어진 임금은 걸어간다. "또 보았노니 종들은 말을 타고 방백들은 종처럼 땅에 걸어다니는도다" (전 10:7). 그는 하나님의 긍휼의 손을 붙들기 위하여, 동료들과 추종자들에게 겸손을 보이기 위하여 함께 살고 죽자는 뜻으로 자기를 낮추었다.
- 그는 가족을 데리고 갔다. 위기의 날에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슬픔의 날에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가장은 언제나 갑작스런 재난에서 가족을 돌보아야 한다. 그는 10사람의 처첩들을 집지키라고 남겨 두었다. 그들은 여자이니 정상을 참작하여 살인자나 강탈자들이라도 그들에게는 어떤 피해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은 이들을 조정하셨다.
👉 아마도 다윗이 그의 첩 열 명을 왕궁에 머물러 둔 것은
-비록 그 모든 정황을 고려하였다 할지라도 반란의 수괴가 타인이 아닌 자신의 아들인 만큼 자기 아들이 설마 그런 패역한 행위를 할까 하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더구나 그가 알고 있는 압살롬은 근친 상간을 한 형 암논을 살해할 정도로 근친 상간을 혐오하는 자였으므로, 그런 압살롬이 부친의 첩들을 취하여 강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다윗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의 첩 열 명을 왕궁에 남겨 두고 도피했지만, 그로 인해 아들에게 공개적으로 욕을 당해야 했다(16:20-23).
⇒ 이는 다윗을 공개적으로 욕되게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심판 예언(12:11,12)의 궁극적 성취였다. 하나님은 압살롬의 패륜과 다윗의 안일한 마음을 통헤 당신의 심판 예언을 성취하셨던 것이다.
3.그는 경호원과 방백들을 데리고 갔다. 베나야의 지도를 만든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들 그리고 잇대의 지도를 받는 가드 사람들과도 동반했다. 그를 따르는 600명은 모두 블레셋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유대교를 신봉하는 자들로서 다윗의 덕담과 경건성에 감화된 사람들이다. 다윗은 그들로 자신을 경호할 수 있는 군대를 편성했고 그들은 열심히 따랐다. 다윗의 아들에게서는 로마의 백부장(눅 10:9)같이, 가나안 여인처럼(마 15:28) 그런 위대한 믿음을 찾아 볼 수 없었다.
4.그를 따르는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너무 멀리 걸었기 때문에 정지를 요구했다. "왕이 나가매 모든 백성이 다 따라서 벧메르학에 이르러 머무니" (17절). 그는 아무에게도 강제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압살롬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억지로 가게 하고 곧 좋아질 것이라고 강권적인 언동을 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아무에게도 원조를 청한 일 없다. 다만 지원한 사람들뿐이다.
👉 벧메르학
이곳은 예루살렘 경계선 끝에 있는 어떤 장소일 것인데, 23절을 고려할 때 기드론 시내를 건너기 직전의 장소로 추정된다. 정신 없이 도망치던 다윗이 그곳에 잠시 머문 이유는 자기에게 남아 있는 군대를 재정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Ⅳ. 블레셋 개종자 600명의 인솔자 잇대와 가드에서 답론.
- 잇대와 그가 이끄는 자들이 모두 다윗을 따르겠다고 했지만 다윗은 그 생각을 단념하라고 했다.
👉 잇대
-잇대는 히브리인이 아닌 블레셋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윗을 따라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자 하였다. 그는 다윗의 도피 기간 내내 그를 충성스럽게 따르면서 요압과 아비새 장군이 올랐던 지위까지 올라갈 정도로 다윗에게 깊은 신임을 받게 된다(18:2).
-당시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견원지간이었기 때문에, 블레셋의 가드 출신인 잇대가 다윗의 심복이 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 과정에 대해 본서 저자는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추론을 하자면,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던 시절 블레셋의 가드로 망명해 생활하고 있을 때에(삼상 21:10-15; 27:1-7) 잇대는 망명자 다윗에게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훗날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 이후에 잇대는 본국에서 모종의 정치적 이유로 추방되어 다윗에게로 망명해 왔을 것이다.
하필이면 다윗이 왜 자기에게 찾아와 충성을 맹세하는 아방 망명자 잇대를 향하여 반란자 압살롬에게 돌아가 거기 거하라고 권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 혹자는 다윗이 잇대의 안전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잇대는 지금 이방 땅에서 망명자라는 위태로운 지위에 있는데 게다가 반란자에게 쫓겨난 자기와 함께 있게 된다면 그 목숨이 더욱 위태해지게 될 것이므로 다윗은 그를 새롭게 세력을 키워 가고 있는 압살롬에게 보내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학자는 다윗이 잇대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해 이와 같은 명령을 했다고 설명한다. 그 명령에 따라 잇대가 압살롬에게 가버린다면 다윗은 그를 더 이상 거들떠보지도 않겠지만, 그러한 명령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다윗에게 충성을 다 바치겠다고 하면 다윗은 그에게 중대한 직위를 맡길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자의 입장이 더 지지를 받는다.
(1) 다윗은 그가 압살롬에게로 가려는 생각은 없는지 아니면 자기를 따르면서 열심히 얼마나 있는가를 시험해보려 했다. 그래서 다윗은 그에게 돌아가서 새 왕을 섬기며 전직을 유지하라고 명했다. 만일 그가 좋은 군사가 아니었다면 다윗을 위해서 그렇게 최선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며 그들과 함께 압살롬편으로 갔을 것이다.
(2) 만일 잇대가 다윗왕에게 충성을 다 했었다면 그때 그렇게 곤란한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능한 한 평안을 추구하는 새로운 개종자, 전향자, 이방인과 유랑자에게는 다윗의 겸허한 정신이 답습하기 어려운 관례였다. 그래서 "내 어찌 너로 우리와 함께 유리하게 하리요" (20절).
👉 본문에서 다윗은 잇대의 상황과 자신의 상황을 대조시키면서 잇대가 자신을 떠나 압살롬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잇대는 본국에서 추방당해 다윗에게로 온 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안정된 피난처가 필요한 형편이었다.
반면 잇대가 그토록 의지하려고 하는 다윗 자신은 안전한 피난처도 없고 분명한 목적지도 없이 떠도는 형편이었으므로 잇대를 안전히 보호해 줄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다윗은 더더욱 잇대에게 자기를 떠나라고 말했을 것이다.
다윗은 한시라도 빨리 안정된 삶을 확보해야 할 잇대가 압살롬을 피해 방랑자의 삶을 살고 있는 자기를 따르게 되면 결국 큰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배처럼 불안정한 삶을 살 수밖에 없음을 이 동사를 통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다윗의 이러한 모습은 마치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모압을 떠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면서 그 두 자부에게 자기를 떠나 모압으로 돌아가 안정된 삶을 살라고 촉구했던 나오미의 모습(룻 1:8-13)과 같다.
관대한 사람은 자기의 고충보다 남의 고충을 더 생각한다. 그래서 잇대는 자기의 행복을 포기한다.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20절)
이 은혜와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것은 잡신 우상을 버리고 전능자 하나님의 날개 아래 서는 자에게 주기로 약속된 것이다. 이 말은 친구와 헤어질 때 사용하는 아주 정중한 송별사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안전하고 평안하리라는 말이다. 다윗의 이 나라 사랑하는 의지는 자신과 동료들을 보호하시는 평강과 행복의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진리에 의한 것이다(시 61:7 참조)
👉 다윗은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축복을 이방인 잇대에게 기원하고 있다.
이러한 축복의 말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는 자부들에 대한 나오미의 축복의 말(룻 1:8)과 흡사하며,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에수 그리스도로 좋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기도한 사도 바울의 이방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축도(엡 1:2)와도 흡사하다.
다윗의 이러한 축복의 말이 놀라운 것은 그가 부정적인 측면의 선민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닫힌 마음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나님의 1)은혜와, 2)진리 ⇒ 이 두 가지 요소는 하난미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속성들, 선하신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는 영적 축복들.
따라서 다윗이 이방인 잇대에게 그와 같은 축복의 말을 했다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 백성 외에는 다 저주받을 자라고 믿었던 당시 이스라엘의 배타적 선민 사상에 젖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하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까지 그러한 축복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물론 21절을 통해 당시 잇대가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지만, 잇대 자체가 이방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를 하나님의 참 백성의 반열에 포함시켰던 것.
-잇대는 비록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히브리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지만, 선민 이스라엘의 어느 불의한 반역자와 달리 하나님을 따라 의로운 삶을 추구하였기 때문에(21절) 다윗은 그에게 이와 같은 축복을 기원하였던 것.
-본문과 같은 축복을 통하여 다윗은 잇대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엡 4:24)으로 간주하고 있다.
2. 잇대는 담대하게 다윗을 떠나지 않을 것을 결심했다(21절).
👉 “여호와의 사심과 우리 주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본문은 이방 블레셋 가드 사람 잇대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개종자였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용적인 맹세 어구(삼상 14:39 ; 19:6; 20:3)를 사용하여 다윗을 끝까지 따르겠다는 자신의 뜻이 영원히 번치 않을 것임을 맹세한다.
-또한 잇대는 ‘여호와’ 와 ‘다윗’을 나란히 언급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된 다윗에 대한 충성이 곧 하나님에 대한 충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무론 사생하고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
-본문은 참으로 헌신적이고 순수한 잇대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직역하면 ‘죽든지 살든지 당신의 종은 그 곳에 있을 것입니다'가 된다.
-그는 상황을 관망하여 이해 관계에 따라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선택하는 자가 아니라, 다윗과 하나님께 대한 충성으로 비록 자기의 생명이 끊어진다 할지라도 다윗이 있는 바로 그곳에 자기도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맹세했던 것이다.
-이러한 결의는 그가 다윗의 축복의 말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입증해 준다.
룻과 잇대의 유사점
잇대의 이러한 말은 나오미의 며느리 룻이 그 시어미에게 했던 말과 흡사하다.
룻
-룻은 남편이 죽고 그 시어미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모압 땅에 남아 충분히 재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볼구하고 그녀는 시어미 나오미에게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 1:16,17)라고 맹세했던 것이다.
잇대
룻과 마찬가지로 잇대는 마처 망대를 세우고자 하는 자가 자기의 예산이 망대를 준공하기에 충분할 것인지 미리 그 비용을 계산하는 것처럼(눅 14:28) 본인이 한 말에 따르는 결과를 분명히 계산했을 것이다. 그 결과 자기의 목숨이 끊어질 수도 있다는 계산이 나왔을텐데도 불구하고 잇대는 다윗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다윗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던 것이다.
잇대에게 배울 점
잇대의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그리스도에 대한 성도들의 제자도의 모델이 된다(마 16:24-25; 눅 9:62; 14:25-33)
다윗이 있는 곳이라면 살든지 죽는지 위험하든지 안전하든지 추종을 하겠다고 자신의 결심을 맹세했다. 떨어지기를 싫어했다. 자신의 부귀도 영화도 모두 다윗왕을 위한 것이라고 그의 존재 가치를 오직 다윗왕에게 두었다. 낙화일로에 있는 그를 보면서도 어떤 처지에서도 변함없는 그의 미덕과 지혜 때문에 그는 결코 그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서도 사랑할 수 있는 자가 진정한 친구다. 그는 역경 중에서도 우정을 굳게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도 죽어도 그의 사랑을 끊을 수 없노라" 라는 굳은 결의로서 다윗의 후손 그리스도에게 집착하려는 것이다.
👉 22절, 그 종자들과 그와 함께한 아이들이 다 따름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 문맥에서 ‘아이들’ 이라는 단어는 유아만이 아닌 여자 및 잇대에게 속한 모든 가족을 지칭한다고 본다(W. Baumgartner).
즉 잇대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은 다윗을 끝까지 따르고자 결단한 잇대와 하나된 운명 공동체의 모습을 끝까지 견지하고 있는 것.
-잇대에게 속해 있지만 친족이 아닌 종자들은 잇대의 의견에 충분히 저항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충성스런 주인을 닮아 그 주인과 생사고락을 함께하기로 결의하였던 것.
-이와 같은 모습은 아들이 앞장서서 아비된 왕에게 반란을 일으킨 다윗의 가정과 극명한 대조를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저자는 아버지를 배신한 압살롬을 간접적으로 비난하기 위해서,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은 범죄의 결과로 붕괴의 위기에 놓인 다윗 집안의 부정적인 면모를 대조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 결연히 하나가 되어 목숨을 걸고 다윗을 따르고 있는 잇대의 집안을 소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Ⅴ. 백성들이 고난 중에 다윗을 동정함.
그와 그의 종자들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그리스도도 수난에 돌입할 때 같은 시내를 건넘. 요 18: 참조) 여리고와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광야로 향하니 온 성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었다(23절).
저들이 우는 이유.
- 왕궁에서 세도 속에 살던 자기 나라 영주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시시한 수행원과 광야에 나와서 은신처를 찾고 있는 초라한 모습을 보고 울었다. 다윗 자신이 싸우고 건설했고 번영시켜 놓은 다윗의 도성에서 자기 자신도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없게 된 광경을 보고 울었다. 악한 자식을 두었기 때문에 높은 영광의 자리에서 천민으로 하락한 것을 보면 이방인들까지라도 연민의 정을 느낄 것이다. 자기 자식들 때문에 파산당하고 학대받는 부모들은 자연히 동료들의 동정을 받게 마련이다.
- 자기 국토에서 번영을 누리던 영주가 불행하게 된 것을 보고 백성들의 존경을 몰수당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비탄 중에 있음을 보면 그를 도와 줄 대책이 없는 자들은 그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질 것이다.
👉 다윗 무리가 기드론 시내를 지나 광야길로 향함
기드론
-‘어둡다, 한탄하다’
-이 지명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의미는 우연히도 당시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던 다윗과 그를 따르는 백성들의 비참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음.간헐천으로서 우기인 겨울철에만 물이 흐르다 건기인 여름철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시내.
-이 시내는 훗날 예수께서 최후 만찬을 끝내신 후에 건너가신 곳으로도 유명한데(요 18:1), 다윗이 그곳을 건너갔다는 사실은 이제 그가 왕도 예루살렘 지역을 완전히 벗어났으며, 이제 본격적인 고난의 행로가 시작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고한다.
유대 광야
-이는 예루살렘과 사해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다. 이 길은 매우 험난하고 거친 길로서 도피의 길에 오른 다윗 일행에게 적지 않은 고통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다윗이 그곳을 지날 때에 지어 노래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 63편에 따르면, 그는 그곳을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으로 묘사하였다(시 63:1).
-그러나 그는 그런 환경에 처하면서도 자신의 처지에 대해 비관하거나 하나님에 대해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으며 (시 63:2-6),
-하나님이 그의 강한 오른손으로 자기를 굳게 붙들어 주신다고 고백하였다(시 63:7).
-또한 그는 생명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받는 그런 곳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이 그곳에서 시랑의 밤이 될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시 63:9-10) 그런 역경은 자기를 넘어뜨리지 못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곳을 지나면서 지금은 비록 자기가 여기에서 고통을 당하지만, 언젠가는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배역하는 자들이 그곳에서 엎드러져 죽을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다윗과 사독의 협상(사무엘 하 15:24-30)
👉 24~29절
본절부터 29절까지에는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와서 자기를 따르려고 했던 사독과 아비아달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전쟁시 언약궤와 함께 동반 출전함으로써 하나님의 도움이 임하기를 바랐다(삼상4:2-4). 왜냐하면 언약궤는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이었고 승리의 보장물처럼 여겨졌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다윗의 이와 같은 태도는 당시 일반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태도와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던 다윗은 왜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려보냈을까?
-먼저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범죄로 인하여 도피의 길을 떠나는 자신과 더불어 유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즉 당시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이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임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것.
-다음으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마치 우상과 같이 주술적으로 의지했던 당시 일반 이스라엘 사람들과 달리 다윗은 그것 없이도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도우실 것이라는 올바른 믿음을 소유하였기 때문이다(시 63:7).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하나님 자신에게서 의로운 자에게로 직접적으로 임한다는 믿음을 가졌기에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일 뿐인 언약궤 자체를 주술적으로 의지하는 미성숙한 사람들의 행태를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충의와 다윗의 관심.
다윗은 곤궁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나타냈다. 압살롬이 백성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취했던 방법은 그들에게는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에게는 전연 마음이 없기 때문에 다윗을 지지하게 되었다. 만일 사독과 아비아달과 그와 함께한 레위인들이 그에게 언약궤를 가지고 가서 그와 함께 한다면 하나님이 도와 주실 것이다(24절).
번영 속에서 언약궤를 가까이 했던 사람은 역경 속에서도 함께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이 법궤를 안치할 만한 장소를 발견할 때까지는 평안하지 못했다. 만약 제사장들이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다윗이 환궁하기까지는 언약궤도 안치할 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
👉 사독: ‘의롭다’ 라는 의미를 지닌 ‘차다크’에서 유래한 이름. ‘의로움’이라는 의미.
-레위 지파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의 직계 후손으로서(대상 6:8), 포로기 후 이스라엘 대제사장 계열의 시조가 된 사독(대상 6:12; 스 7:2)의 7대 조상.
-삼하 8:17에서 처음 소개됨. 그는 다윗 왕의 통치 기간 동안 엘리 가문의 마지막 제사장인 아비아달과 더불어 대제사장직을 수행하, 솔로몬의 통치 기간에는 아비아달을 제치고 대제사장으로 활동했던 중요한 인물이다(왕상 2:35).
아비아달도 올라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 기다리더니
-아비아달은 다윗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무사히 도망나올 때까지 그들의 안전을 위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
Ⅱ. 다윗은 충성심이 있는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냈다(24, 25절).
아비아달이 원래 제사장이었고 사독은 그의 조력자였다. 그래서 아비아달이 집무 중에는 언제나 사독이 언약궤 앞에 가장 가까이 참관할 수 있었다(24절). 그래서 다윗은 그의 말을 듣고 역경 중에서 견딜 수 있는 좋은 조언자가 되었다.
1.다윗은 언약궤의 안전을 갈망했다 "하나님의 궤를 도로 성으로 메어가라" (25절).
하나님의 궤를 천막으로 끌고 다녀 어지럽히지 않도록 하라고 다윗은 말했다. 압살롬이 아무리 악할지라도 그것을 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윗의 마음은 엘리 제사장처럼 하나님이 궤를 두려워했다. 그는 자신의 안전이나 번영보다 교회의 안전과 번영을 더 생각했다. 자신의 기쁨보다 예루살렘을 더 기뻐했다(시 137:6 참조). 그는 어떠한 곤경에 빠져서도 자기 행복과 안전을 구하기에 앞서서 교회의 번영과 복음의 승리를 더 원했다.
👉 언약궤를 다시 보낸 이유는?
-당시 건물 형태의 성전이 없었던 상황에서 사독과 아비아달은 언약궤를 왕 곁으로 가져왔지만, 다윗은 그것을 다시 성으로 가져가라고 명했다. 당시 언약궤는 다윗성의 휘장 가운데 안치되어 있었는데(6:12-15; 7:2; 11:11), 다윗은 제사장들이 피신하는 자기에게 가져온 그 언약궤를 다시 그곳에 안치하도록 명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시 예루살렘 왕궁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2.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의 특권 중에 희열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그는 법궤를 돌려 보내는 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것은 자신이 환궁하여 왕위에 복직되는 것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더 자신에게 만족스럽게 생각한 것이다.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자신의 안전과 편의를 도모한다. "히스기야 왕도 자신의 건강 회복을 바라고 성전으로 올라갔다" (사 38:22 참조).
3. 다윗은 자신의 당면한 불행을 하나님의 거룩한 뜻으로 알고 매우 겸손했다.
그는 모든 선에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시는 행복을 희망했다.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실 것이로되 그렇지 아니하면 가장 큰 불행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라고 하나님이 나를 거부하신다면 이에서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만일’ 이라고 가정법으로 말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에 대해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현재 어떤 모습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
-다윗은 자신이 현재 하나님의 온혜를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자임을 자각하고 었었다.
즉 다윗은 현재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전에 밧세바와 우리아에 대해 자신이 행한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임을 철저하게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는 자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 수는 없다는 의미에서 가정법 구문을 사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만에 하나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자신이 예루살렘에 무사히 환궁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본문은 비록 지금은 자신이 비참한 도망자의 신세이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의 손길을 뻗치기만 하신다면 언약궤가 놓여 있는 예루살렘의 장막으로 반드시 돌아갈 수 있다고 다윗이 확고하게 믿었음을 보여준다.
-진정한 믿음이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언약에 기초해 은혜를 거두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다윗은 바로 그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언약궤를 과감히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처분하시도록 하면 얼마나 만족스러운가를 고찰해 보자.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했다(욥 9:12 참조). 그는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했다(욥 33:13). "종이 여기 있아오니" 명령을 기다리는 종처럼 법궤에 대한 처분을 하나님께 일임하려는 말이다.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반대 의사가 전연 없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모두 선한 것이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욥 23:13, 15) 그는 그의 뜻대로 하려고 했다. 이것이 우리의 관심사요, 의무이다.
어떤 일을 우리가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묵종해야 한다. 우리는 그의 뜻을 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의 뜻이 우리에게서 행하시도록 일임해야 한다.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장중에서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되어진 일에 대하여 불평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다윗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겸손한 자인지 확연히 보여준다.
-‘선히’ 에 해당하는 ‘토브’ 는 선과 악의 절대 기준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관단에서 ‘선한 것’ 을 나타낸다. 그것이 비록 인간외 눈에 악한 것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판단에 선한 것이라면 선한 것이라는 뜻.
-‘행하시옵소서’ - ‘그가 행하실 것이다’ 라는는 의미.
이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일에 대해 다윗은 어떠한 불평과 반대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여 보인 지극히 겸손한 모습인 것이다.
이와 같은 겸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대한 무조건적 인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자신에 대해 하나님께서 냉혹히 대하신다 할지라도 그분의 뜻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즉 다윗은 자신의 궁극적 소망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 왕좌에 앉는 것이지만, 행여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지 않으사 압살롬에 의해 패하게 하신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그러한 조치를 겸손하게 받아들이겠다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그런 겸손함을 지녔기에 룻날 시므이가 저주할 때에도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 겠느냐״라고 말하면서 시므이를 죽이지 않고 용서할 수 있었다(16:10).
이러한 모습은 절대 주권을 가지고 공의로 모든 일을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성도가 마땅히 가져야 할 바른 신앙의 자세이다.
Ⅲ. 다윗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없을 동안 힘이 되어 줄 만한 제사장들과 비밀 체결을 한다. 그는 예언자 사독을 불렀다(27절).
그는 시대를 분간할 줄 알고 사명을 아는 지혜있는 사람이었다. "너는 선견자가 아니냐." 그러므로 적군의 동태에 대한 정보와 방안을 내게 알릴 수 있지 아니하냐, 이처럼 위급한 때 약삭빠른 한 사람의 선견자는 20명 이상의 가치가 있다. 그는 떨어져 있는 동안의 서신 교환을 약속했다.
- 그에게 보냄을 받을 자는 아히마스와 요나단이다. 그들은 사독의 보호자요, 매사를 신중히 하는 충성스러운 경험자들이었다.
- 그들은 그곳으로 소식을 보내기로 하고 거기서 기별이 올 때까지 광야에서 기다리기로 했다(28절). 그리고 그는 그에게 전해지는 정보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성으로 돌아와 사건이 발생하기를 기다렸다.
어떤 혼란이 나라 안에서 일어나기를 왕과 제사장이 이처럼 호의로 비밀리 서로 모의할 수 있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 다윗의 의도는
-다윗은 사독과 아비아달 및 그들의 아들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둘아가 압살롬이 차지하게 될 왕궁의 상황을 자기에게 자세하게 보고하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이는 다윗이 비록 예루살렘을 빠져나왔지만 아직까지 왕궁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는 사실과 더불어 상대의 동태틀 정확하게 파악하여 앞으로의 행로를 결정하려 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다윗이 기다리기로 한 나룻터는 아마 이 광야 나룻터는 요단강과 사해가 만나는 지점 요단 서편으로서 가나안 땅 경계 끝 지점께 있는 나루였을 것이다. 이곳은 전략상 주요 지점일 뿐 아니라 위협적인 상황이 닥칠 때에는 요단 동편으로 도피하기가 용이했기 때문에 다윗은 잠시 머물며 예루살렘으로부터의 기별을 기다릴 장소로 이곳을 선택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독과 아비아달은 다윗 왕의 지시를 조금도 어김없이 그대로 순종했다.
Ⅳ. 다윗과 그를 쫓는 백성들이 감란산 길로 올라갈 때 일부러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30절).
👉본절부터 37절까지는 반란자 압살롬을 피하여 함법적인 통치자 다윗이 비참한 모습으로 요단 나룻터로 도망친 사실과 더불어 예전에 다윗의 모사였던 아히도벨이 정권을 탈취한 압살롬의 편에 가담한 반면, 아렉 사람 후새는 모든 권력을 잃어버린 다윗을 위해 헌신을 결단한 사실을 대조적으 로 묘사하고 있다.
저자는 다윗이 그의 모사 아히도벨의 배반 소식을 들은 것과 후새를 만나 그에게 첩자의 임무를 부여한 사실을 동시에 말하던서 다윗이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아니며 일말의 희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는 모사 아히도벨에게 배반을 당한 대신 후새라는 충실한 일꾼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후새는 그 이전부터 다윗의 좋은 친구였지만(37절) 다윗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틀 위해 더없이 훌륭한 모사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1. 다윗은 자신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수줍은 얼굴로 슬피 울면서 맨발로 죄수처럼 걸어 갔다.
👉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행함.
-고대 근동에서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걷는 행위는 노예들만 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수치스러운 죄를 회개하며 스스로를 겸허하게 낮추는 상징적 행동이 된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발에서 신을 벗었는데(출 3:5), 그것은 그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었던 반면 자신은 거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에루살렘성에서 요단 나루턱으로 도망치면서 자신의 현 상황이 범죄한 자신에 대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그는 거룩하신 자 앞에서 자신을 의롭다고 할 만한 어떤 명분도 찾지 못하여 발에서 신을 빗은 채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모습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자신을 더없이 비참한 상황에까지 이끌고 가신 하나님 앞에 다윗이 어떠한 항의도 하지 않고 다만 통회하는 심정으로 섰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며, 동시에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낮아지고 겸손해져있는가도 잘 보여준다.
그렇게 용감하고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명성이 높던 사람이 한 사람의 적의 일견에 그렇게 쉽게 어린애처럼 부르짖을 수 있는가. 그가 당하는 괴로움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1) 그의 아들의 고약성.
자기 태에서 나와서 자기 품에 안겨 자라난 자가 일어나 그의 발꿈치를 찬다는 것을 생각하면 울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자신도 자기가 키운 자식이 반역하기 때문에 이런 고통으로 슬퍼한다고 말했다(시 95:10 참조). 우상 숭배하는 마음 때문에 찢어지는 고통이 있다고 했다(겔 6:9 참조).
(2) 여기에 하나님의 노여움이 크게 나타났다. 내 고초와 재난이 쑥과 담즙으로 더욱 악화된다고 했다(애 3:19). 그의 죄가 항상 그의 앞에 있었지만(시 51:3) 지금처럼 불행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사울이 죽이려고 쫓아다닐 때도 그렇게 슬피 울지 않았다. 다만 마음의 상처가 그에게 무거운 고통을 주었다(시 38:4).
2.다윗이 울 때 그의 고통과 슬픔에 감동되어 따르는 모든 백성도 울었다.
👉 다윗 왕의 추종자들이 자신들을 왕과 운명을 같이하는 존재로 여겼기에 다윗과 동일한 행동을 취한 것.
즉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신정 왕국의 합법적인 통치자 다윗이 패역 무도한 반역자 압살롬을 피하여 왕궁을 버리고 도망하는 국가적 재난 에 대해 다윗의 추종자들은 크게 슬퍼하였던 것이다.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특히 우리보다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을 위해 울어야 한다. 우리는 죄 때문에 우는 자와 함께 울어야 한다. 히스기야도 자기 죄를 뉘우치고 예루살렘 모든 거민들과 함께 하셨다(대하 32:26 참조). 죄인들에게서 고통을 덜어 주는 길은 그들과 함께 울어 주는 것이다.
●다윗과 후새의 협정(사무엘 하 15:31-37)
압살롬의 음모단에 아히도벨이 끼어있다는 것보다 다윗에게 위협적인 것은 다시 없다. 왜냐하면 이런 음모단에 하나의 좋은 두뇌를 가진다는 것은 천 개의 세련된 손을 가지는 것보다 유익하기 때문이다. 압살롬은 정치가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관심하는 일은 무엇이나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는 다윗의 과거 모사들과 친분이 있기 때문에 더욱 위협적인 사람이다. 그러므로 만일 아히도벨이 혼선을 일으키기만 한다면 압살롬은 진로를 바꿀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는 음모자의 두목을 제거할 것이다. 이것은 다윗이 바라는 것이다.
Ⅰ. 기도로 이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음모자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고 간단히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31절)***라고 했다. 그는 길게 기도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많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여호와여 이 일을 행하시옵소서." 이 기도는 강렬한 기도였다. 하나님은 강청하는 자의 기도를 잘 들어 주신다. 다윗의 기도가 특별히 그런 기도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히도밸을 자신의 모사로 데리고 있던 다윗이었기 때문에(12절) 아히도벨의 압살롬 진영 가담은 그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에 다윗은 반란자의 무리에 가담하여 각종 모략을 베풀 아히도벨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였던 것이다. 결국 아히도벨은 훗날 자신의 모략과 관련하여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17:14,23)
다윗은 모략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했다. 하나님은 근심과 두려움의 억눌림을 받는 우리에게 기도를 통해 겸손하고 자유스러운 그리고 특별한 관심을 끌 수 있도록 하셨다. 다윗은 아히도벨을 대적하는 기도는 하지 않았지만 그의 모략을 하나님께서 어리석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아무리 현명한 모사라도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어리석게 만들어지면 좌절되고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과 입술의 말을 다 아신다고 확실히 믿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모든 지혜자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시고 재판장을 미련하게 하실 수 있다(욥 12:17; 사 3:2, 3). 그는 그가 입은 상처와 그가 의로움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실 줄 굳게 믿었다.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열심으로 기도하면 어떤 모사도 하나님은 어리석게 하실 것이다.
Ⅱ. 정책으로 이 일을 이루려 했다.
우리는 열심히 기도에 힘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반역하게 된다. 기도는 교회의 원수들의 모략을 파괴하는 좋은 무기이다.
다윗이 언덕에 도착하자, 하나님께 예배했다(32절).
우는 것은 예배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배에 생기를 준다. 여기서 그는 세 번째 시를 썼다. 어떤 이들은 그가 드린 예배에서 부른 노래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후새는 다윗에게 왔다. 그가 말할 때 하나님이 들으시고 아히도벨을 어리석게 할 수 있는 사람을 그에게 보내 주었다.
후새는 다윗의 당면한 고충을 위안하기 위해서 와서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썼다.
👉그는 비록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다윗의 친구로 불렸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37절).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이며 자신과 친분을 유지하던 다윗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감람산 꼭대기까지 찾아왔던 것
다윗은 그를 압살롬에게 보낼 첩자로서 채용했다. 다윗은 후새를 데리고 가지 않으려 했다(33절). 그는 모사로서보다는 군인으로 돕는 것이 더 유익하므로 반역자 압살롬이 도착할 때를 기다려 자기를 돕도록 그를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냈다(34절).
다윗은 그의 책략을 후새에게 암시했다. 그는 후새가 압살롬을 충고로서 단념시키거나 그의 모략을 탐지하여 다윗에게 알려 줌으로써 아히도벨의 책략을 좌절시키고 다윗의 안전처를 찾으려 했다. 이런 흉악한 거짓이 어찌 정당하겠는가. 압살롬이 그의 아버지를 반역하면 인류를 반역하는 것이고 그를 속이면 인류를 속이는 것이라고 주지시키는 것을 모의에 최선책으로 삼았다.
👉 압살롬은 후새가 다윗 왕의 오랜 친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었었기 때문 에(37절), 그를 다윗이 보낸 첩자로 의심할 가능성이 높았다. 다윗은 바로 어러한 점을 우려하여 후새로 하여금 ‘자신의 의지로’ 예루살렘서으이 압살롬에게 온 것임을 강조하는 단어를 사용할 것을 강조한 것.
또한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라는 단어를 통해서 후새로 하여금 압살롬을 노예가 주인을 받들어 섬기듯이 정성껏 섬길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게 하였다. 즉 후새 자신은 더 이상 다윗을 위한 모사가 아니라 압살롬의 모사로서 그를 층성스럽게 섬길 것임을 분명히 드러내라고 지시하였던 것.
다윗이 후새가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할 것이라고 확신한 까닭은
-다윗이 이렇게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아히도벨의 모략이 후새의 그것보다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은 것으로 만드실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확신대로 압살롬과 그의 백성들은 결정적인 시기에 두 사람의 모략 중 후새의 모략을 따름으로써 (17:14) 아히도벨의 모략은 무효화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모략이 시행되지 않은 것을 비관한 아히도벨은 자살하고 만다(17:23).
후새에게 들은 모든 것을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낱낱이 고하라고 지시함
-다윗은 후세 혼자서 일하게 하지 않고 사독 및 아비아달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게 함으로써 후새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다윗은 이러한 방법으로 압살롬의 전략을 효과적으로 파악하여 추후 자신의 행동 방향을 결정하려 하였던 것이다.
다윗은 후새를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논의 대상자로 소개했다(35절). 또 동지로서 다윗의 심부름꾼으로 그들의 두 아들을 추천했다(36절). 그래서 후새는 예루살렘에 와서 압살롬이 군대를 거느리고 오는지 안오는지를 보고 했다(37절).
성과 궁의 주인이 어찌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혼란없고 튼튼한 나라를 찾고 있는 것이다.
👉 이상과 같이 본장에서 저자는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하여 쫓겨 도망가는 다윗의 비참한 상황 다음에 → 충성스런 잇대를 등장시키고, → 아히도벨의 반역으로 인하여 불리해진 다윗의 절망적인 상황 다음에 → 뜻하지 않았던 인물 후새를 등장시키고 있다.
이러한 대구적 구조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통하여 범죄의 대가를 혹득하게 치르는 과정에서도 그틀 완전히 멸하시지 않고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본장에서 다윗이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인정하고 회개하면서 도움을 구하는 모습은 13, 14장에서 그의 자식들 앞에서 보여주었던 무능하고 어리석은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것으로 다윗의 회복의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그의 범죄를 간과하지 않고 철저히 징계하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결과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