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1월 21일 토요일 삼하19:16-23 다윗과 시므이

Jeehyun 2023. 1. 24. 00:45

맥체인성경읽기

창22, 마21, 느11, 행21

묵상구절

19:16 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러 내려올 때에

19:17 베냐민 사람 천 명이 그와 함께 하고 사울 집안의 종 시바도 그의 아들 열다섯과 종 스무 명과 더불어 그와 함께 하여 요단 강을 밟고 건너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19:18 왕의 가족을 건너가게 하며 왕이 좋게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로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19:19 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19:20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기에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하니

19:21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대답하여 이르되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말미암아 죽어야 마땅하지 아니하니이까 하니라

19:22 다윗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너희가 오늘 나의 원수가 되느냐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 하고

19:23 왕이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그에게 맹세하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시므이를 용서함(사무엘 하 19:16-23)

 💡 본절부터 23절까지는 예루살렘으로 환궁하는 다윗이 게라의 아들 시므이를 만나 관용을 베푸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베냐민 지파 게라의 아들 시므이는 일찍이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으로 피신하던 때에 그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하고 멸시한 바 있었다(16:5-14).

시므이는 평소 사울 왕의 죽음과 사울 왕가의 몰락이 다윗 때문이라고 믿고 있던 자였다. 그런데 마침 다윗이 권력을 알고 쫓기는 신세가 되자, 그 기회를 이용해 다윗에게 형언할 수 없는 모욕을 퍼부은 것이다.

그런 그가 이제 다윗이 다시 왕권을 회복하여 예루살렘으로 환궁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다윗을 맞이하러 나온 것이다. 시므이는 다윗이 왕권을 회복한 지금 다윗을 저주하며 돌을 던졌던 과거의 악행 때문에 처벌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다윗에게 나아와 머리를 조아리며 비굴하게 생명을 구걸한다.

그는 다윗 왕을 영접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매우 서둘러 요단강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여호수아 영도하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단강을 건넌 이후 지금까지 엄청난 사건들이 이 강을 건널 때마다 일어났다. 고통스러운 전투 중에서 다윗은 특별히 요단 땅에 왔을 때 하나님을 기억했다.

"오직 저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시 62:6).

그는 환궁의 영광을 안고 이 강을 또 건너게 되었다. 다윗의 군인들이 이 강을 건너기 위해 숙박소를 마련했고 왕의 가족을 건네기 위하여 나룻배를 마련했다(18절). 나룻배를 어떤 이는 구조선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함선의 다리라고도 한다. 나룻배는 그에게 봉사하기에 편리하게 하려고 만든 것이다. 그가 싸울 때 야비하게 그를 학대했던 두 사람을 요단뚝에서 만났다.

Ⅰ. 시바를 만났다.

 💡시므이가 다윗에게 나아올 때에 사울의 사환이었던 시바도 그와 함께하였다. 시바는 일찍이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으로 피신 다니던 때에 적지 않은 음식으로 그를 공궤하였었다(16:1-4). 그러나 그는 므비보셋을 섬기라는 다윗의 명(9:9,10)을 어기고 므비보셋을 모함하여 그의 소유를 자신의 것으로 가로겠다.

그는 다윗이 차후에 그런 비리의 진상을 알아내 자신을 처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리부터 다윗의 마음을 사기 위해 다윗의 환궁길에 나와 그를 극진히 영접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시므이는 자기 지파인 베냐민 사람 일천 명을 대동하였고 시바는 자신의 아들 열 다섯과 종 스무 명을 대동하였다. 이는 다윗을 성대하게 환영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다윗은 시므이와 시바를 용서하는데 이는 베냐던 지파의 실력자들인 이들을 포용함으로써 베냐민 지파의 지지도 확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시바와 시므이는 환궁하는 다윗에 대한 예우를 갖추기 위하여 요단강 서편에서 동편으로 건너가 다윗을 배알하는 성의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다윗에 대한 진정한 존경심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라도 다윗외 호의를 입기 위한 기회주의적인 처신일 뿐이다. 시므이와 시바는 다윗의 요단 도하를 돕기 위해 나룻배 등 각종 편의를 아낌없이 제공했다(18절).

그는 정중한 말로 왕을 악이용 했다. 시바는 왕에게 그의 주인을 비난함으로 그의 재산을 할례받았다(16:4). 그는 고지식한 왕을 속여서 왕의 친구 요나단의 아들에게 매정하게 하도록 유도한 것은 다윗에게는 이보다 더 큰 악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왕을 만나려고 지금 그의 종들과 아들들을 수행하고 찾아왔다(17절). 그가 찾아 온 것은 왕의 총애를 받으려고였다. 또한 므비보셋이 자기의 오점을 드러냈으면 이를 벗어버리기 위해서였다(26절).

Ⅱ. 시므이를 만났다. 그는 불쾌한 말로 그를 학대하고 비난하고 저주했다(16:5).

만약 다윗이 패배했더라면 그는 계속 그를 무시했을 것이며, 그가 행한 것이 찬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윗이 지금 개선하여 왕좌에 회복되는 것을 알고 그와 평화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윗의 아들 예수를 지금 멸시하고 악용하는 자들은 그가 영광 중에 오실 때 그들이 화해하려고 할 것이나 이미 그 때는 늦을 것이다. 시므이는 왕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1.그는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도움이 될 만한 좋은 동료들을 데리고 왔다.

2.그는 베냐민 족속 중에 많은 사람들을 데려왔다. 그들 중에는 왕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총사령관과 지도자들이 1,000여명이나 되었다. 왕을 만나려는 관심 때문에 자발적으로 지원한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중에는 유다 지파를 제하고는 이러한 존경을 왕에게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친절했다.

3.그는 서둘러서 기회를 잃지 않았다. 당신이 노중에 있을 때 속히 적과 손 잡으라.

(1) 죄인의 복종(18-20절).

💡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왕을 저주하며 돌맹이를 집어던지던 그 시므이가 이제는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상황에 따라서 처신을 달리하는 그의 기회주의적인 속성을 잘 보여준다. 즉 이는 다윗을 존경해서 취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취한 것이었다.
다윗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시므이가 다윗 앞에 나아와 용서를 구한 것은 대단히 치밀한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 사실 당시 상황에서 다윗은 시므이를 처벌할 수 없었다. 요단 도하 전에 베냐민 지파의 실력자인 시므이를 처단한다면,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에 이 소식이 퍼져 반다윗 정서를 부채질할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다윗이 경유해야 할 길갈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베냐민 지파 사람들외 거주지였으며, 시므이와 함께했던 베냐민 지파 사람 1,000명을(17절) 대항하여 요단강을 건너는 것 역시 많은 위험 부담을 안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지금 시므이의 행동은 당장 자신을 처단할 수 없는 다윗의 약점을 이용하여 확실한 면죄부를 받아 후환을 없애려는 데우 처밀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내 주여 원컨대 내게 죄 주지 마옵소서”
본문은 시므이가 지난날 다윗에게 행하였던 그 사악한 죄악들(16:5-14)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묻지 말아 달라고 간구하는 내용이다. 이는 물론 시므이가 다윗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용서를 구하는 진실된 태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다면 마땅히 그는 ‘악을 행한 저를 죽여 주십시오’ 라고 말헤야 했을 것이다.

20절,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는 고로”
-시므이는 이전에 다윗에게 행했던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스스로 밝힌다. 그런데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면서 이전에는 자신의 잘못을 몰랐으나 이제는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시므이의 이러한 발언의 진실성은 대단히 의심스럽다. 사실 전에 다윗을 저주하고 멸시하고 그를 향해 돌맹이를 집어 던질 때 시므이는 '내가 지금 죄를 짓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이제 와서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 때의 자신의 행위를 '죄악׳ 으로 깨달았다고하는 것은 모순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이는 시므이가 삶의 분명한 원칙을 세웠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지 않고 사사 시대의 사람들과 같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삿 21:25) 자기 중심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의 마음 중심에는 절대 진리이신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자신의 편리에 따라 의견과 말을 바꾸는 죄악된 자아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왕 앞에 참회자로서 애원자로서 엎드렸다. 그는 이로써 겸허를 나타내려 했다. 다윗의 모든 신하들 앞에 베냐민 지파인 그의 친구들 앞에 수 천명 자기 수하 사람 앞에 엎드렸다. 많은 사람 앞에서 저지른 죄이므로 많은 사람 앞에서 복종했다. 그는 그의 죄를 인정했다. "당신의 종인 내가 지은 죄를 아나이다." 이것으로 그는 괴로워했다. 그는 왕의 용서를 간청했다. 내가 심술궂게 행하였나이다. 당신의 종의 패역을 기억지 마소서. 그는 자기의 생명이 다윗 왕의 관대한 마음에 달렸음을 암시했다.

그는 요셉 지파(다윗의 치정초기에 이스보셋을 추종하여 유다 지파로부터 분리되었던 이스라엘 지파 중 하나임. 2:10 참조) 모든 사람들보다 가장 먼저 돌아온 것은 그의 충성심의 표현이었다. 그는 의무의 본보기로서 다른 사람들을 권유하고 왕의 온화한 성품을 대해 본 경험에 의하여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따르게 하려고 제일 먼저 왔다.

💡요셉 지파는 일차적으로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를 가리키나, 본문에서는 유다 북쪽에 위치한 여러 지파들을 모두 지칭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쓰였다(A.A.Anderson).

시므이가 속한 베냐민 지파 역시 북부 이스라엘 여러 지파들 중 하나이므로 그는 지금 자신이 유다 지파를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가운데서 가장 먼저 다윗을 영접하러 내려왔다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는 시므이가 얼마나 처세에 능한 자인가를 잘 보여준다. 유다 지파는 자신들이 다윗을 영접하러 간다는 사실을 다른 지파에 통보하지 않고(41절), 오히려 비밀리에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시므이가 유다 지파와 함께 다윗을 영접하기 위해 앞장섰다는 것은 그가 자신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다윗의 재옹립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사태를 관망하다가 유다 지파가 다윗을 예루살렘으로 환궁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자 재빨리 앞장서서 자신에게 피해가 없도록 다윗과 면대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다 지파가 다윗을 예루살렘으로 환궁시키려는 움직임이 없었으면 시므이는 결코 다윗에게 나아가 잘못을 빌지 않았을 것이다. 시므이는 상황에 따라 행동을 달리하는 결코 믿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2) 그에게 불리한 제안(21절).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치 아니한가?"

 💡 이는 단지 감정에 치우친 행위가 아니라 한편으로는 율법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였다(출 22:28). 여호와께서 신정 왕국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기름부으신 자를 저주하는 것은 죽어 마땅한 범죄였다.

여호와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저주하는 것은 곧 여호와를 저주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그러한 자는 돌로 쳐죽여야 했던 것이다(레 24:14; 왕상 21:10). 따라서 아비새의 요구를 정당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 가운데 그를 본보기로 삼으라고 했다. 이러한 제안은 그가 저주했을 때 시므이를 죽이자고 했던 아비새의 제안이었다(16:9 참조). 다윗은 이런 일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의 사법권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이런 저주를 묵인하는가? 아비새는 그의 진실한 관심보다 다윗의 감정을 생각하고 이런 제안을 했다. 왕은 이런 시련에 대비해서 자신을 무장할 필요가 있었다.

(3) 왕의 명으로 면제됨(22, 23절).

다윗은 불쾌하게 아비새의 동의를 거절했다***.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 시므이를 죽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아비새에 대한 다윗의 답변.
-다윗의 이 말은 스루야의 아들인 요압과 아비새가 실제로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시므이를 처형하려는 행위를 제지하는 관용적인 표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본문에서 다윗의 대화의 대상인 요압파 아비새는 다윗과 사촌지간이다, 다윗이 이들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자신의 누이의 아들로 지칭하는 것은 가까운 인척 관계임을 상기시켜서 반드시 자신의 말에 따라주기를 바라는 호소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너희가 오늘 나의 대적이 되느냐’
다윗의 계획은 시므이를 처단하지 않고 용서함으로써 왕권을 탈환한 자로서의 관용을 보임과 더불어 베냐민 지파의 민심을 얻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베냐민 지파는 물론 온 이스라엘의 반감을 사게 되어 다윗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왕권을 완전히 회복하는 데 있어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것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아비새는 그러한 다윗의 속내를 알지 못하고 다윗의 계획을 가로막는 적대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리요’ 다윗이 시므이를 처단하지 않는 이유.
-다윗은 시므이가 결코 무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왕상2:9), 그의 죄를 잊는다거나 용서한다는 표현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시므이를 처단하지 않은 이유는 본문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왕권의 회복과 관련되어 있었다. 즉, 시므이의 처단 문제는 단순히 개인적인 원한 관계의 청산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왕권을 되찾는 데 있어 크나큰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므이를 처단하지 않았던 것이다.

복수심으로 분노하거나 난폭하고 거친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과는 함께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좋은 것이다. 그는 그의 상대로서 이런 기소자들을 방관했다. 그들은 친분이 있는 것처럼 했지만 그의 명예에 대한 의협심도 있었다. 옳지 않은 것으로 우리에게 충고하는 자들은 사실 사탄들이요 적수인 것이다.

[1] 그들은 그의 온화한 성품의 방해자들이었다. 그는 이 날이 바로 그의 왕국이 재건되고 이스라엘의 왕위가 회복되는 날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의 영광의 날에 그를 용서해 주었다. 항복자를 용서하는 것은 왕의 특권이다. 먹이를 놓아두는 것은 사자를 배불리는 것이다(Satis est prostrass leioni). 그의 기쁨은 그를 용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찌푸둥한 일에 돌입하는 것을 막는 일은 매우 좋은 일이다. 기쁨의 날은 용서의 날일 것이다. 그의 죄 때문에 당했던 망명 생활에서 그의 왕국이 다시 회복 된 것은 하나님의 궁휼에 의해서다. 그래서 그는 시므이에게 긍휼을 베풀려고 했다. 암몬 사람들로 악행하게 한 자들을 혹독히 보복했다(12:31 참조).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자신이 당한 악행에는 묵인했다. 전자는 이스라엘 사람에 대한 전반적인 모욕이요 왕국과 왕관에 대한 침해였다. 그러나 후자는 단순한 자기 개인에 대한 모욕이었으므로 선한 사람들의 호의에 따라 그들을 쉽게 용서할 수 있었다.

[2] 그들은 그의 관심사에 방해자들이었다. 만일 그가 그를 저주했던 시므이를 죽였다면 그에 대해 실질로 전쟁을 일으키고 무장하고 나섰던 자들도 같은 운명에 처해졌을 것이다. 가혹한 행위는 정책을 수반하지 않는다. 왕위는 긍휼로 인하여 성취되었다. 이에 있어서 시므이가 사면되었고 맹세가 확정되었다. 그의 선한 행위는 적중되었지만 만일 그가 후에도 부정한 짓을 한다면 그는 박해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신중하고 온화함으로써 국가 정의 실현의 기념비를 위하여, 후일을 위하여 예비했다.

💡 23절,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일견 합당해 보이는 아비새의 간청을 단호히 뿌리친 다윗은 시므이에게 죽이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다. 후에 다윗의 회상으로 볼 때 당시 이 맹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맹세였다(왕상 2:8).
-이후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시므이가 저질렀던 그 일(16:5-14)을 근거로 해서 다윗이 시므이를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다윗은 이 맹세에 근거해서 그의 평생 동안에 시므이를 해하지 않았다{왕상 2:7,8). 그러나 시므이를 처단하지 않은 다윗의 마음의 상태는 매우 불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왕위를 솔로몬에게 이양하고 유언으로 시므이를 처단할 것을 부탁했을 것이다(왕상 2:9).

한편, 다윗의 이러한 결정은 악인을 처벌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데 다소 미흡했다고 평가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당시로서는 시외 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일단 아무런 저항 없이 요단강을 건널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민심을 수습하여 일치와 화해를 이루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의 혼란을 수습하고 내면적 일치를 도모하기 위해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는 이러한 다윗의 모습은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잠 12:16)는 말씀을 연상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