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레위기 2, 3, 요한복음 21, 잠언 18, 골로새서 1
묵상구절
20:1 아람의 벤하닷 왕이 그의 군대를 다 모으니 왕 삼십이 명이 그와 함께 있고 또 말과 병거들이 있더라 이에 올라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그 곳을 치며
20:2 사자들을 성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보내 이르기를 벤하닷이 그에게 이르되
20:3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아내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하매
20:4 이스라엘의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내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하였더니
20:5 사신들이 다시 와서 이르되 벤하닷이 이르노라 내가 이미 네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너는 네 은금과 아내들과 자녀들을 내게 넘기라 하였거니와
20:6 내일 이맘때에 내가 내 신하들을 네게 보내리니 그들이 네 집과 네 신하들의 집을 수색하여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을 그들의 손으로 잡아 가져가리라 한지라
20:7 이에 이스라엘 왕이 나라의 장로를 다 불러 이르되 너희는 이 사람이 악을 도모하고 있는 줄을 자세히 알라 그가 내 아내들과 내 자녀들과 내 은금을 빼앗으려고 사람을 내게 보냈으나 내가 거절하지 못하였노라
20:8 모든 장로와 백성들이 다 왕께 아뢰되 왕은 듣지도 말고 허락하지도 마옵소서 한지라
20:9 그러므로 왕이 벤하닷의 사신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왕께 말하기를 왕이 처음에 보내 종에게 구하신 것은 내가 다 그대로 하려니와 이것은 내가 할 수 없나이다 하라 하니 사자들이 돌아가서 보고하니라
20:10 그 때에 벤하닷이 다시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사마리아의 부스러진 것이 나를 따르는 백성의 무리의 손에 채우기에 족할 것 같으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하매
20:11 이스라엘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 같이 자랑하지 못할 것이라 하라 하니라
20:12 그 때에 벤하닷이 왕들과 장막에서 마시다가 이 말을 듣고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진영을 치라 하매 곧 성읍을 향하여 진영을 치니라
20:13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20:14 아합이 이르되 누구를 통하여 그렇게 하시리이까 대답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로 하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이 이르되 누가 싸움을 시작하리이까 대답하되 왕이니이다
20:15 아합이 이에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을 계수하니 이백삼십이 명이요 그 외에 모든 백성 곧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을 계수하니 칠천 명이더라
20:16 그들이 정오에 나가니 벤하닷은 장막에서 돕는 왕 삼십이 명과 더불어 마시고 취한 중이라
20:17 각 지방의 고관의 청년들이 먼저 나갔더라 벤하닷이 정탐꾼을 보냈더니 그들이 보고하여 이르되 사마리아에서 사람들이 나오더이다 하매
20:18 그가 이르되 화친하러 나올지라도 사로잡고 싸우러 나올지라도 사로잡으라 하니라
20:19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과 그들을 따르는 군대가 성읍에서 나가서
20:20 각각 적군을 쳐죽이매 아람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이스라엘이 쫓으니 아람 왕 벤하닷이 말을 타고 마병과 더불어 도망하여 피하니라
20:21 이스라엘 왕이 나가서 말과 병거를 치고 또 아람 사람을 쳐서 크게 이겼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 17:1 부터 22:40까지는 북이스라엘 제7대 왕 아합의 우상 숭배 장려 정책과 그의 악정에 대항하여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기 위한 선지자 엘리야의 활동에 관한 기사.
17,18장: 아합의 바알 종교 장려 정책에 맞서 싸우는 대선지자 엘리야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반역한 북이스라엘을 당신께로 돌이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이 강조되었었다. 그 중에서 갈멜산상에서 엘리야의 기도에 불로써 응답하신 사건(18:38)과 3년 가뭄을 끝내고 비를 내려주신 사건은(18:45) 북이스라엘 백성과 아합으로 하여금 전능하신 하나님을 깨달아 알 수 있도록 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19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합으로 하여금 우상 숭배 정책을 펴도록 미혹한 그의 아내 이세벨의 권세가 약화되지 않고 오히려 엘리야 선지자의 목숨을 위협하기에 이르렀음을 보도한다. 이는 곧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이적을 보여주셨지만 이를 보고도 아합과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치 않았음을 증거해 준다.
20장
19장에 이어 20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람과의 전쟁을 통해 당신의 살아 계심과 그 능하신 행하심을 또다시 아합과 북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신 사실을 기록한다. 객관적 전력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아합과 북이스라엘은 마땅히 하나님께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아합은 이러한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으면서도 대적의 목숨을 하나도 살리지 말라는 성전의 규례(신 20:1-20)를 정면으로 어기고 적군의 수장 벤하닷을 살려주었다(34절). 이는 결국 그가 거듭 반복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과 이러한 불순종으로 인하여 아합과 그의 가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필연적으로 임할 수밖에 없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본장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아람 왕 벤하닷이 사마리아성을 포위하고 굴욕적인 조건을 내걸어 항복을 요구한 사실(1-12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 벤하닷을 두 번이나 패배시킨 사실(13-30절), 벤하닷을 살려준 아합의 범죄와 불순종한 아합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경고(31-43절)
💡 열왕기와 역대기에서 ‘벤하닷’으로 불려지는 인물은 일반적으로 세 명으로 구분.
먼저 벤하닷 1세: B.C. 900-860년경 통치한 인물. 그의 아버지는 ‘다브림몬'이고 할아버지는 ‘헤시온'. 이 인물은 이스라엘 왕 바사가 라마를 건축하여 북쪽에서 유다로 통하는 길을 차단하였을 때, 유다 왕 아사로부터 왕궁과 성전의 은과 금을 받고 북이스라엘을 공격하였던 인물(15:18-22; 대하 16:1~6)
벤하닷 2세: B.C. 860-843년경에 통치한 인물. 벤하닷 1세의 아들인 듯하다. 그는 아합 시대에 북이스라엘을 두 번이나 침입하였을 뿐 아니라 아합의 아들 요람 때에 북이스라엘에 침입하여 사마리아를 포위하였던 인물(왕하 6:24). 후에 병들어 하사엘로 하여금 선지자 엘리사에게 병세를 묻게 하였으나, 엘리사의 예언을 들은 하사엘에 의해 살해당하였다(왕하8:7-15).
벤하닷 3세: 벤하닷 2세의 왕위를 찬탈하였던 하사엘의 아들로 B.C. 796-770년 경 아람을 통치한 인물. 그는 여호아하스의 치세에 북이스라엘을 압박하였으나,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에게 패배하였다(왕하 13:3-13, 22-25).
이 세 벤하닷 중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은 벤하닷 2세.
본장에서 부각되는 벤하닷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벤하닷은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북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신명기적 저주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실행하는 역할을 한다. 즉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인물을 통하여 신 28:29의 말씀대로 죄 범한 북이스라엘로 외세의 압제와 노략을 당하며,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암울한 상태가 되게 하신 것(1~6절).
둘째, 벤하닷은 그의 패배(16-30절)를 통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분께서 북이스라엘로 돌이키게 하심 (18:37)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벤하닷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하다드의 아들' 즉 아람 신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막강한 군사력과 그와 함께하는 32명의 지방 영주들을 가지고 있는 이 벤하닷의 두 번에 걸친 패배는 여호와께서 열방까지도 다스리시는 오직 한 분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람 왕 벤하닷을 패배하게 하심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은 사건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언약에 신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을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신 28:7)을 지키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하닷으로 패배케 하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회개하여 돌아오도록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마지막으로, 전쟁에 패배한 벤하닷이 생명을 얻게 되는 것(31-34절)은 아합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즉 아합은 전쟁에 패배한 벤하닷을 자기의 형제라고 하며 살려주는데, 이는 성전의 규례(신 20:1-20)를 명백히 어기는 것이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구원하여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고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않았음을 명백하게 드 러 는 사건으로 아합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보여준다.
●벤하닷의 무례한 요청(열왕기 상 20:1-11)
다음 몇 가지를 살펴 보자.
Ⅰ. 벤하닷은 아합의 왕국을 습격하고, 왕도 사마리아를 에워쌌다(1절). 그러한 싸움의 원인은 알 수가 없다. 탐욕과 야망이 그 근본 원인이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구실도 붙일 필요가 없었다.
다윗은 그의 시대에 아람 사람들을 완전히 정복하여, 그들을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만들었으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한 까닭으로 해서, 아람 사람들은 다시금 그들에게 무서운 존재로 만드셨다. 아사는 아람인들을 유혹하여 이스라엘을 이미 침략케 한 바 있는데(15:18-20) 이제는 그들이 스스로 침략을 감행하게 되었다. 외국 군대를 자기 나라로 끌어 들이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후손들이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벤하닷은 왕 32인을 그와 함께 있게 했다. 아마도 이 왕들은 그에게 조공을 바치는 자들이거나 부득이 그를 따라 다녀야 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와 공모했거나, 그를 도움으로써 어떤 이득이 있었기에 따라야 했을 것이다. 이 보잘 것 없는 통치자들이 생각했던 왕의 칭호란 얼마나 값싼 것이 되었는가
💡 벤하닷은 이스라엘을 자신이 영향력 아래 복속시키기 위하여 군사력을 동원함
‘벤하닷이 그 군대를 다 모으니 왕 삼십이인이 저와 함께 있고,..’
직역하면 ‘그가 그의 모든 군사력을 모았다. 그리고 왕 삼십이인이 그와 함께 있었다' 이다. 역사적으로 아람은 강력한 중앙 집권의 왕정이 시행되지 않고 소규모의 도시 국가들이 공존하는 연할 부족 국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여기서 32인의 왕도 아람의 소규모 도시 혹은 부족을 통치하던 지방 영주들을 지청한다. 이들은 아람의 중심지 다메섹을 다스리던 벤하닷이 그들 가운데 주도권을 가지게 됨에 따라 벤하닷과 종주권 언약을 맺었으며, 평상시에는 조세를 바치고 본절과 같은 전시 상황에서는 군사를 파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벤하닷은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군사력을 동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32명이나 되는 지방 영주들을 모두 소집하여 을려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이는 몇 안되는 초라한 군사들(15절)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도와줄 외부의 지원군이 없는 북이스라엘의 상황과 대조되어 이 전쟁이 객관적으로는 복이스라엘이 결코 승리할 수 없는 전쟁임을 잘 보여준다.
'말과 병거들이 있더라'
아람 왕 벤하닷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무기였던, 그러고 막강한 군사력의 상징이었던(수 11:4;왕하 13:14) 말과 병거를 구비하고 있었음. 본문은 아람의 벤하닷이 많은 수효의 군사들을 동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최첨단의 무기로 무장하였음을 보여주어 객관적 전력상으로는 이스라엘이 도저히 승리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는 것. 고대 근동의 말과 병거는 애굽산이 대부분이었다. 10:29은 솔로몬 왕이 치리하던 당시에 아람 왕을 위하여서도 애굽에서 말과 병거를 수입해서 되파는 중개 무역을 하였던 것으로 기록하 고 있다. ‘왕은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신 17:16) 어긴 솔로몬의 이러한 비신앙적 행위가 후일 자신의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는 한 원인이 된 것이다.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치며'
그런데 이스라엘 왕 오므리와 아합의 치세에 대한 성경과 데사 비문, 앗시리아의 기록들은 이들 오므리와 아합이 매우 강력한 힘과 정치적 감각을 가진 왕이었음을 보여준다. 즉 이들은 광범위한 건설 활동을(16:24; 22:39) 벌이고 베니게 즉 시돈과 혼인 동맹(16:31)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군사력을 소유하여 모압을 지배하기까지 하였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아람의 군대가 사마리아에 도달하기까지는 상당한 정도의 전투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밀리는 상황에서 계속 패배하였기에 이스라엘의 군대는 고작 7,000명 정도 밖에(15절) 남아 있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벤하닷은 사마리아성에 이르기까지의 전투틀 매우 성공적이고 신속하게 수행하여 사마리아성에까지 물밀듯이 밀어닥친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적군에게 패배하여 수도 사마리아만 남게 된 것은 궁극적으로는 당신의 구원 능력과 전능하심을 보이심으로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려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신 28:29)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Ⅱ. 두 왕 사이의 흥정을 보자.
분명히 이스라엘의 방어선이 그들을 떠난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아람인들이 그토록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최근에 세운 이스라엘 수도 사마리아로 전진해 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도시의 방비는 허술했고, 침략자의 수중에 쉽게 함락되게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두 나라가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1.벤하닷의 자만심은 아합에게 무례한 요구를 하게 된다(2, 3절).
👉 2절, 사자들을 … 보내어
벤하닷은 사마리아성에 대한 공격을 잠시 멈추고(12절), 아합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항복을 받아내려고 하였다. 이후 사자를 통해 전달되는 그의 무례한 말투와 가혹한 요구 조건으로 미루어 보아 벤하닷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저항하기 어려운 상태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벤하닷의 교만함: ‘벤하닷은 이르노니(’코 아마르’)’ → ‘벤하닷은 이렇게 명령한다’ 여기서 ‘코 아마르'는 벤하닷의 교만함을 메우 선명하게 보여준다. 즉 *코 아마르'는 이사야서서에서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기술하는 데 자주 사용된 표현으로(사8:11; 10:24; 18:4), 말하는 자의 권위를 강하게 드러내는 표현이다. 아람 왕 벤하닷은 일국의 왕인 아합을 향해 자신이 마치 그의 하나님이고 왕인 것처럼 거만하고 위협적인 표현으로 명령하였던 것이다. → 이는 벤하닷이 이스라엘 왕이 더 이상 전투를 수행할 능력을 가지고 않다고 판단하였으며, 그의 마음에는 이미 이스라엘 왕을 자신의 봉신처럼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강화의 나팔을 울리면서, 아마 나팔수가 성중에 들어가,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그 사실을 알렸을 것이다. 만일 아합이 벤하닷의 노예가 되고, 그가 가진 것 중에서 공물을 바칠 뿐 아니라 그의 칭호도 벤하닷에게 양도하고, 모든 것, 곧 그의 처들과 자녀들, 그들의 가장 좋은 것들을 벤하닷의 멋대로 한다는 조건에 승복하면, 포위를 풀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온 말투로 보다 그들을 성나게 하려는 뜻이 들어 있다. "모든 것을 예외없이 나의 것으로 삼으리라" 는 것이다.
👉 ‘내 것이요 .. 내 것이니라’
여기서 벤하닷이 자기 것이라 단정하는 것들은 대개 승전국이 패전국에 요구하는 조공과 볼모를 의미한다. 본문에서 이런 것들이 어미 자기의 것이라고 벤하닷이 단정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전쟁에서 삽시간에 사마리아까지 휩쓸고 들어온 것처럼 앞으로 있을 전쟁에 대해서도 이미 승리를 장담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벤하닷의 요구는 아합 왕을 모욕할 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주권까지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벤하닷은 여기서 강조적 표현인 대명사까지 사용하여 이러한 자신의 교만과 탐욕에 가득 찬 야심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2. 아합의 가엾은 마음은 벤하닷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알린다. 벤하닷이 의기양양하게 요구 조건을 내세우는 것에 비하여, 아합이 항복의 구체적 사항을 열거하지 못함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사실상은 그의 말과 같은 뜻이다. 즉 "나와 나의 것은 다 왕의 것이니다" 라고 한 것이다(4절).
👉 4절,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목을 곧게 하여 따르지 않으면서 아람 왕의 잔혹한 명령에는 비굴하게 굴복하는 아함 왕의 치졸한 모습이 부각된다. 아합 왕은 아람 왕을 ‘내 주 왕이여'라고 호칭하는데, 이는 아합이 한 나라의 통치자로서의 체통과 주권을 완전히 포기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왜냐하면 ‘내 주 왕이여'에 해당하는 ‘아도니 함델레크'라는 표현은 신하가 자신의 왕을 향하여 사용하는 극존칭의 표현이기 때문이다(삼상24:8; 26:17). 아합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아람 왕의 봉신에의 요구를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드러내고 있다. 사실 3절에 기술된 아람 왕의 요구는 아합 왕의 인격을 무시하고 이스라엘의 주권을 짓밟는 대단히 오만한 것으로, 한 나라의 왕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요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순순히 그의 요구를 받아둘인 것은 아합이 더 이상 벤하닷의 공격을 지탱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도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람의 군대가 사마리아를 고립시켜(1절) 아합은 전투에 필수적인 식량을 더 이상 충원할 수 없었을 것이며, 또한 아람의 군사들이 사마리아를 고립시킨 채 복이스라엘의 각처에서 약탈을 자행한 까닭에 전국이 황폐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John Gray). 본서 저자는 아합이 자비하신 참 ‘왕'이시며 ‘주'되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따르지 않았기에, 이제는 잔혹한 아람의 벤하닷을 자신의 ‘왕', 그리고 ‘주'라 부르며 그의 잔혹한 ‘말씀’에 따라 행해야 하는 실로 비참한 처지가 되어버렸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러한 아합의 말을 직접 화법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죄의 효과를 살펴 보자.
(1) 그가 만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노하게 하고 그를 떠나지 않았던들, 벤하닷이 그토록 엄청난 요구를 그에게 할 수는 없었으리라.
죄는 우리 인간들을 신의 가호에서 벗어나게 하고, 처참한 곤경으로 몰아 넣는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지 않으면 우리의 적이 우리를 다스리리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 외에 모든 것에 대한 노예가 된다. 아합은 바알을 위해 은과 금을 준비했었다(호 2:8). 그런고로 금과 은을 그가 빼앗긴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렇게 재물을 돌리면 결국 몰수당하게 된다. 죄로 말미암아 그의 양심을 부정하게 하지 않았던들 그는 그토록 비겁한 항복은 하지 않았으리라. 죄를 범한다는 것은 사람을 낙심케 하고 비겁자로 만든다. 바알이 그를 도와 줄 수 없음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리라고 믿을 아무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어떤 조건에서든지 자기 생명을 팔아 치우는 데 만족하였던 것이다. 목숨과 목숨을 맞바꾸었다. 즉 그에게 가장 귀중한 모든 것을 버렸다. 왕자로서 죽느니 보다 차라리 거지가 되어도 생명만은 부지하려 든 것이다.
3. 벤하닷의 오만함은 아합의 항복에 때 맞추어 커지고, 거만함과 건방짐이 더욱 커졌다(5, 6절).
👉 벤하닷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자신의 그 요구 사항을 더욱 구체화하여 드러내면서, 처음 요구한 것보다 더욱 무리한 요구를 함.
이같이 교만하고 잔혹한 벤하닷의 전언을 기술하는 본절은 범죄와 반역으로 인해 즉각적인 파멸에 내던져도 마땅한 북이스라엘에 대해 참으시고 그들에게 승리를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능력을 서술하는 13절의 내용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아합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벤하닷의 처분에 맡기고, 왕이니까 서로 잘 봐 주리라고 기대했다. 다시 말하면 벤하닷이 차지한 통치권을 인지(認知)하는 것으로 그가 만족하게 느끼리라 믿었다. 그리고 벤하닷이 얻은 명예는 당분간 그를 충족시켰다. 그리고 그가 만일 어떤 명분을 내세울 수 있게 되면 그 권력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Satis est prostrasse leoni-즉 사자는 먹이를 넘어뜨려 깔고 앉아도 만족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가 통하지 않게 되었다.
👉 ‘벤하닷은 이렇게 명령한다’
이같이 교만하고 잔혹한 벤하닷의 전언을 기술하는 본절은 범죄와 반역으로 언해 즉각적인 파멸 에 내던겨도 마땅한 북이스라엘에 대해 참으시고 그들에게 승리를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 심과 능력을 서술하는 13절의 내용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먼저 본절은 벤하닷의 일차 요구를 기술하고 있는 앞선 3절과 같은 어구, 즉 ***‘벤하닷은 이렇게 명령한다'***라고 번역될 수 있다. ‘코 아마르 뻔 하다드’ 가 사용되어 벤하닷의 교만한 태도가 다시 한번 강조되어 표현되어 있다. → 이는 왕의 대리자인 사신이나 하나님의 대리자인 선 지자 또는 이에 상응하는 자격을 가진 사람을 보낼 경우에 사용되는 단어이다(삼하 12:1). 이는 결국 벤하닷의 명령과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대조하는 것이다. 13절에서는 이 단어가 직접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지자를 아합에게 보내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벤하닷도 아합에게 사자를 보내어 자신의 말을 전하게 하였고 하나님께서도 아합에게 선지자를 보내어 당신의 말을 전하게 하셨던 것이다.
(1) 벤하닷은 자만심과 탐욕에 가득 차 있어 아합의 재산과 영토를 전부 점유하지 않는 한 떠날 수가 없었다. 그는 영토와 재산이 단지 그의 것이라고 불리우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하며, 직접 자기 수중에 넣어야 만족하는 자였다. 벤하닷은 아합이 그 자신의 물품들을 하루라도 더 쓰도록 빌려 주는 일도 하려 하지 않았다.
(2) 벤하닷은 거만하고 간악했다.
벤하닷 자신이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기 위해 직접 왔었더라도, 다소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자를 보내어 아합을 모욕하고 허세를 부리며 궁전을 샅샅이 뒤지고, 모든 장신구들을 뺏고 떼어버리는 것이었다. 아니, 아합에게 더 많은 원통함을 주기 위해 벤하닷의 사자들은 자기들이 기뻐할 만한 것뿐만 아니라, 아합이 특히 좋아하는 사람이나 재물이 있으면 그것들을 모조리 약탈해 오도록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무릇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져가리라." 우리는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에 방해물이 끼어 들 때가 있다. 가장 귀한 것이 가장 안전하지 못함을 말해 주는 것이리라.
(3) 벤하닷은 분별없고 부정한 자로서 아합의 항복은 아합의 모든 백성들의 항복으로도 해석하고, 자기 마음내키는 대로 내 맡긴 것으로 생각했다.
"저희가 네 집 뿐만 아니라 네 신복의 집들도 수탐하며, 마음대로 약탈하리라." 하나님이여, 평화와 재물을 인하여, 더욱이 우리가 소유하는 그것들을 우리의 것이라 칭할 수 있음을 감사하나이다.
👉 “무릇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을”
네 눈이 기뻐하는 것 =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지칭. 즉, 벤하닷이 약탈해 가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람까지 포함하여 값나가고 가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이는 벤하닷이 내일 당 장, 자신의 신하들의 손으로 왕실 뿐만 아니라 온 국가 전체를 상대로 철저하게 약탈하겠다는 것 으로 그의 잔인함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는 이스라엘 왕 아합의 자존심을 깎아내리려는 벤하닷의 의도도 있음.
4. 벤하닷의 거만함이 이렇게 갈수록 커지자, 아합의 연약한 기백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비록 대담하지는 못했어도, 목숨을 건 저항을 하게 되었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기 보다는 오히려 목숨을 걸고 싸우려 했다.
👉 7절, 아합이 나라의 장로를 다 부름
사실 아합은 이미 벤하닷의 봉신이 되겠다고 회답을 보냈으므로 벤하닷의 요구를 바로 들어주는 것이 마땅하였다. 그런데 요구를 실행치 않고 대책 희의를 소집한 것은 벤하닷의 이차 요구가 수용하기에 너무나 지나친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5, 6절에 기술된 아람 왕 벤하닷의 요구는 봉신이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은 공물의 형태가 아니라 벤하닷의 신하들어 직점 수탈해 간다는 면에서 굴욕적인 것일 뿐만 아니 라, 왕실에 제한된 것이 아닌 국가 전체를 수탈의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경제적 기 반을 완전히 초토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합 왕의 말대로 벤하닷의 행동은 문자 그대로 ‘악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1) 아합은 이제 자기의 자문관들의 조언을 듣는다. 그들은 아합왕이 끝까지 버티기를 건의했었다. 그러나 아합왕은 힘없이 말하고(7절), 자문관들에게 벤하닷은 분별없는 적군이 아니며, 재해를 불러 일으키려는 것은 아니라고 호소한다. 하등의 도발을 하지 않았는데도 아합의 나라를 침범하고 그 수도를 강점한 벤하닷에게, 아합은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아합은 자문관들에게, 벤하닷이 이전에 자기에게 얼마나 강했던가를 말하면서, 이러한 난경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좋은 의견을 말하도록 한다. 그래서 담대히 말한다.(" 왕은 듣지도 말고 허락지도 마소서" 8절). 그들은 자기들은 왕의 편에 서서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 여기서 드러나는 아합의 무능력과 비굴함
아합이 장로들의 의견을 묻는 모습은 → 세속적 측면으로 보자면 아합 왕의 신하들과 백성들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라고 인식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왕으로서 백성돌을 보호한다는 뉘앙스보다는 도리어 나라가 존폐의 위기 앞에 있는데도 왕으로서 나라가 나아같 방향도 결정하지 못하고 대처 방안을 제시하지도 못하 는 아합의 무능함과 비굴함을 부각시켜 주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이는 그 형식과 내용을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즉 형식적인 면에서만 보면 아합이 국가 긴급회의를 개최한 것온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신하들과 백성들을 배려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아합의 말과 관련된 실제적인 내용의 측면을 살피면 형식적인 이해와는 전혀 다른 결론이 도출된다. 즉 아합은 처음에는 아람 왕의 요구에 굽신대다가 그 강도가 더해져서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자 안절부절하며 도리어 자기가 결정하고 감당해야 할 책임을 희피하고 이제는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그 결정을 미루는듯한 뉘앙스를 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내용은 궁극적으로 아합의 무능력과 무책임을 드러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8절, 본문에 나오는 장로들과 백성들의 대답이 어처럼 강력한 부정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볼 때 이는 5.6절에 기술된 벤하닷의 이차 요구에만 응하지 말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아합 왕이 받아들이기로 한 3절에 기술된 벤하닷의 일차 요구도 수용하지 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들은 벤하닷과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결사적으로 싸우겠다는 항전의 뜻을 밝히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이는 말을 번복하는 아람왕으로부터 앞으로 어떤 더 강력한 요구가 주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더불어 역사상 이스라엘과 첨예한 대립 관계를 형성해 온 아람에 대한 민족적 감정이 폭발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2) 그러나 아합왕은 벤하닷을 거부하는 데도 매우 온건했다(9절). 아합은 이스라엘에 대한 벤하닷의 통치력을 승인하는 것이다. 너희는 "내 주 왕께 고하기를, 나는 태연히 맞설 의도가 없으며 이미 작정한 항복을 철회하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처음에 제공한 것은 내가 다 그대로 하려니와 이것만은 내가 할 수 없도다. 나의 것이 아닌 것은 내가 줄 수가 없도다 라고 하라" 는 것이다. 아합이 이렇게 비굴하게 요구를 거부했어도 벤하닷은 울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표현 방법으로 미루어 본다면, 아합이 이 정도로나마 대담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백성들이 그에게 활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 “왕이 처음에 보내어 종에게 구하신 것은 내가 다 그대로 하려니와”
이스라엘의 장로와 백성들의 심한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아합은 아람 왕 벤하닷의 일차 요구사항은 들어줄 수 있어도 이차 요구사항은 들어줄 수 없다고 절충안을 제시한다. → 이는 아람의 막강한 군사력에 대항할 변변한 군사마저 얼마 남지 않은 현실을 감안한 선택일 수도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그의 유약하고 타협적 성품에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아합의 유약한 모습은 부인 이세벨을 제어하지 못하고 자신과 이스라엘의 신앙을 타락게 한 원인으로 지적되는 것이기도 하다 (21:25). 앞선 4절과 마찬가지로 아합은 아람의 왕을 ‘내 주'라고 부른다. → 자신은 “당신의 종”으로.. 이는 한 나라의 왕으로서 도저히 취할 수 없는 치욕스런 태도라 아니할 수 없다. 아합이 하는 말의 의미는 ⇒ “자신이 벤하닷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하겠으며, 그 이상은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자 했다. 구체적으로는 아합의 은과 금, 그의 아내, 그리고 그 사랑하는 자녀들을 벤하닷에게 보내겠다는 것이다. 아합은 왕실의 재산과 아내, 그리고 자식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리고 한 나라의 왕으로서 도저히 취할 수 없는 굴종적 태도를 보이면서까지 전쟁을 피해 보려고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합은 벤하닷의 둘째 요구에는 따를 수 없음을 밝히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반대 의사를 강력히 직접적으로 나타내기보다는, 능력의 부족을 나타내 는 ‘할수 없나이다'라는 완곡 어법으로 표현하여 ⇒ 최대한 벤하닷의 반감을 사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이러한 말투는 외교적 어투라고 볼 수도 있으나 벤하닷의 강력한 말투와는 너무나 대조된다. 여기서도 아합의 유약한 성품이 드러난다.
5.벤하닷은 사마리아를 파멸시키겠노라고 맹세한다.
폭풍우 같은 그의 분노가 저지를 받자 온통 소란해졌다. 벤하닷은 분노하여서, 자기의 신들의 무기력한 복수를 기원한다. "사마리아의 티끌이 나의 군대의 손에 가득 태워지기를!" (10절) 그는 엄청나게 많으면서 결심이 굳은 자기의 군대를 이끌고 사마리아로 침공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성공을 자신하고 있다. 그것은 티끌을 한주먹 가져가는 것처럼 쉬운 일일 것으로 본 것이다. 모든 것이 약탈될 것이고 심지어 사마리아 도시가 서 있는 땅덩이조차도 모두 가져 가리라는 것이다. 그의 자부심은 그렇게 드세듯, 그의 적의는 지극히 잔인했다. 비록 이스라엘 왕과 그 백성들은 벤하닷의 멸망을 보고 만족해야 할 자격은 없었지만, 이것은 그에게 멸망을 예비하고 있었다.
6.아합은 벤하닷의 장담에 대해 점잖게 비난하고 그의 협박에 감히 반항을 하지 않으며 다만 싸움의 불확실한 결과만 걱정했다(11절).
"그로 하여금 싸움을 시작하게 하지 말며, 칼을 차고 갑옷을 두르고 승리에 도취되지 않게 하여라. 마치 갑옷을 벗은 자처럼, 갑옷을 생각지 말게 하라. 그리고 전승자가 되어 돌아오게 하지 말라."
👉 앞선 10절의 아람 왕 벤하닷의 포악한 경고를 들은 아합은 더 이상 협상의 여지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에 아합은 결사항전을 결심하고 이전에 가졌던 굴종적 태도를 버리고, 방자하게 구는 아람 왕에 대해 풍자적 표현을 사용하여 일침을 가한다. 이러한 아합의 대답은 매우 유명한 격언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갑옷을 입는 자는 전쟁에 나가는 사람이고 갑옷을 벗으며 자랑하는 자는 전쟁에 승리하여 살아남은 사람이다. 따라 서 본문은 아직 전쟁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이미 다 이긴 것처럼 오판하지 말라는 조소의 의미를 지닌 격언이다.
아합 왕은 고대 근동에 널리 알려진 격언을 인용하여 전쟁 승리를 장담하며 자신과 북이스라엘을 무시한 아람 왕 벤하닷의 교만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아람 왕 벤하닷은 북이스라엘을 지나치게 경시한 결과 북이스라엘에 비해 월등한 군사력을 갖추었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북이스라엘 군대에게 대패하고 만다(19-21절).
이것은 아합의 말 가운데 가장 지혜있는 말이고, 우리 모두에게 좋은 조목인 것이다. 어떤 앞날을 미리 자랑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하는 까닭에서다(잠 27:1). 특히 싸움하는 어떤 날을 자랑함은 어리석으니 그것은 싸움의 결과가 우리에게 유리해지리라고 믿었던 만큼 불리해질 수 있고, 적을 무시하는 것은 좋은 정책이 못되며, 승리를 지나치게 확신하는 것도 패배에 이르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우리의 심령상의 갈등에 적용해 보기로 하자. 베드로는 그의 자신감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 우리는 갑옷을 준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마치 우리가 싸움에 이겨 갑옷을 벗는 것처럼 결코 자랑을 해서는 안 된다. "항상 두려움을 갖는 자는 행복" 하며,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게 된다.
●벤하닷의 패배(열왕기 상 20:12-21)
공격군과 농성군 사이에 맺어진 조약이 갑자기 파기되었으므로, 곧 발생한 전쟁과 그 결과를 살펴 보기로 하자.
Ⅰ. 아람 사람, 즉 침략자들은 술에 취한 왕으로부터 명령을 받았는데, 왕은 술잔을 든 채 명령을 내렸다. 또한 그는 "술을 마시면서" (12절), "장막에서, 대낮에 부하 왕들과 더불어 마시고 있었다" (16절). 술에 취함은 그의 백성들과 군인들이 옛부터 깊이 빠졌던 죄였다. 이 점에 관해서, 즉 옛날은 현대보다 술에 만취될 수 있었으니 좋은 시절이었다고 말하지 말라.
자기 스스로를 과신하지 않았으면, 그는 술도 마시지 않았을 것이며, 술에 만취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방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방심과 관능은 옛 세상(홍수 이전 시대)과 소돔에는 병존했었다(눅 17:26). 벤하닷이 술취한 것은 벨사살왕의 경우와 같이 멸망의 전조였다(단 5장). 벤하닷 왕을 위하여 각기 맡은 직위에서 싸워야 할 왕들이 술을 마시고, 업무보다는 유흥에 빠졌으니 어떻게 성공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은 벤하닷이 지방 영주들과 함께 모여 단순히 술을 마신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원문은 '마시다가'에 해당하는 ‘쇼테'를 방해없어 계속 진행되는 상태틀 나타내는 분사형으로 기술함으로써 아람 왕 벤하닷이 계속 태만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16절에서는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여 벤하닷 뿐만 아니라 밴하닷 수하의 지방 영주들 역시 각기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기보다는 계속 태만한 상태를 유지하였음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벤하닷과 그의 수하의 왕들의 모습은 이들이 얼마나 북이스라엘군을 깔보았는지를 잘 보여주며, 동시에 이 전쟁을 치르는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객관적 전력 차이가 얼마나 컸는지를 읽을 수 있게 한다.
음주를 하면서 벤하닷은 어떻게 행하였는가 보기로 하자.
1.사마리아를 포위하라고 명령하고, 모든 병기들을 준비시켜, 전면 공격이 가능하도록 준비시킨다(12절). 그러나 술 마시는 통에 이러한 지시가 실시되는가를 보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오! 슬프도다. 너희들의 왕이 이토록 어린 아이같은지고!"
사마리아를 재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하는 벤하닷의 오만한 경고에 대한 아합 왕의 반응은 조소어린 것으로 아람 왕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었다. 이에 벤하닷은 그 즉시 전투를 수행하기 위한 진을 구측하였다. 객관적 전력상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아람 진영이 우세했다. 아람 진영은 수적 우세와 더불어 당시로서는 첨단 무기인 말과 병거를 소유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밴하닷에게는 그를 돕는 32명의 지방 영주들도 휘하에 있었다. 이제 이스라엘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2.갇혔던 자들의 역습이 시작되자(그 때쯤에는 그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며) 모든 적군을 살해하는 편이 쉬웠을 터인데, 살해하지 말고 사로잡으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이 기회에 그들은 오히려 침략군을 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맹약을 새로이 하고 평화를 갈구하여 나온 자들을 사로잡으라는 그의 명령이 얼마나 불법이며 경망스러웠는가. 이리하여 항상 그러듯이 그는 술을 마시고 법률을 망각하며 정책이나 전쟁의 응보(應報)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Ⅱ. 이에 반하여 갇혔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영감을 받은 한 선지자로부터 지시를 받았다. 그런데 아합은 이 선지자를 미워한 나머지 박해했다. "이스라엘의 왕 앞에 나아가는, 선지자 한 사람을 보라." 13절은 이렇게 읽을 수 있다.
1.여호와께서 아합과 같은 사악한 왕에게 선지자를 통해서 친절하고 고마운 말씀을 보내심을 보라. 그러나 그것은
(1) 비록 타락했지만, 하나님은 자기의 친구인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야곱이 선택한 바요, 성약(聖約)의 자손이며, 아직은 완전히 버림받지 않았던 자기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서 이렇게 하신 것이다.
(2) 여호와의 자비심을 넓혀 간악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자에게 선(善)을 베품으로써, 그들을 참회하도록 하거나 도저히 더 이상 용서할 수 없게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3) 벤하닷의 자만심을 억제하고 그의 거만함을 누르기 위함이었다.
아합의 우상 숭배는 이후에 처벌되지만 벤하닷의 거만함은 당장 징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거부하시며, 신명기 32장 26, 27절처럼 "그가 대적의 분노를 두려워 한다" 고 말하기를 즐기시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에는 아마도 단 한 사람의 선지자가 있었고, 그가 메시지를 가지고 다가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사마리아에 접근할 수 없었던 처지였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번영을 누렸다면 아합은 이 선지자를 보기조차 싫어했을 것인데, 아세라의 어떤 선지자도 그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그런 때에 이 선지자를 환영하게 된 것이다.
아합은 하나님의 예언을 물어보지도 않았으나,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를 아합에게 보내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비롭게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 한 선지자가 ‘나아가서’
이 선지자는 전쟁에 이길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교만한 자세를 취하지 않고 왕에게 갖추어야 할 예의틀 최대한 갖추어 겸손한 자세로 나아갔다.
나아가서: “매우 근접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다”(민4:19)
‘가까이 다가가다'라는 뉘앙스를 지닌 이 단어는 벤하닷의 사자들이 매우 잔혹한 내용 의 전언을 전한 것과 달리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 아합은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처하였으면서도 하나님을 찾거나 구하지 않았다. 그러한 아합에게 하나님 께서는 던저 자비를 베풀어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선지자를 보내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께서 당신을 찾지도 않은 아합에게 먼저 찾아오사 당신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신 이유는? ⇒ 아합으로 하여금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합은 이렇게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성전의 규례를 어길 뿐만 아니라(42절) 무고한 자를 죽이고 그의 재산을 뻬앗는 죄(21:19)를 지옴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 게 되었다(22:37).
이 선지자는 누구였는가?
아합 왕에게 가서 이스라엘이 아람 군대와의 전투에서 승전할 것이라는 낭보를 전한 선지자의 정체에 대해 혹자는 당대에 활동하던 미가야나 엘리야 선지자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가야는 아합에 대해서 길한 예언은 하지 않고 흉한 예언만 하였다고 기술되었으므로 이러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22:8). 그리고 엘리야도 역시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엘리야가 아합 왕조에 대해 대체적으로 심관과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다 는 점(18:16-19), 그리고 본서 저자가 17-19장까지 내내 엘리야의 이름을 밝히다가 본장에서 갑자기 그 이름을 밝히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점 때문이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전민족적으로 우상 숭배에 빠진 암울한 시대였지만 바알에게 무릎을 끓지 아니한 7천명의 선지자들을 예비하신 하나님께서는(19:18 ;롬 11:4) 이스라엘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무명의 한 선지자를 파견하사 그 로 하여금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던 것이다.
2.선지자가 행한 두 가지 일은 다음과 같다.
(1) 아합에게 승리의 확신을 주어 활력을 갖게 했다. 이것은 비록 아합을 따르기는 했지만 이스라엘의 장로들 전체가 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일이었다(8절). 이 선지자는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으나(왜냐하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므로"), 아합에게 말하기를 바로 이날 포위 공격이 풀릴 것이고, 아람인들은 패주하리라고 한다(13절). 선지자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도다" 라고 말했을 때, 아합는 아마도 격노(激怒)의 말씀인 줄 알고 공포에 떨었으리라. 그러나 말씀의 내용이 자비로움을 알고, 그는 회생되었다. 그리고 이 축복스런 싸움의 역전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그 방법에 대해 말씀을 듣게 된다. "너는 내가 만날의 왕인 여호와인 줄을 알지어다."
잘되어 질 것 같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그것이 이루어질 때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일이었음이 입증된다.
👉 13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와 유사한 표현이 신29:6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님의 능력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시는 것과 관련하여 쓰인 이 표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대해 신실할 것을 요구 하는 촉구로 이해될 수 있다(신 29:9). 따라서 본문에서도 이 표현이 사용된 것은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승리 자체를 최종 목적으로 두시지 않고 이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당신의 하나님되심을 깨달아 알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당신께로 다시 돌이키도록 하는 것이 최종 목적임을 보여준다.
(2) 이 승리를 얻은 데 대하여 대처할 일을 선지자는 아합에게 교시한다.
[1] 벤하닷의 무리가 공격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역습하여 참호 속의 적을 기습하라.
[2]참전할 인원은 "각 도의 방백의 소년들." 즉 전쟁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못하며 숫자적으로는 겨우 232명에 불과한 종들이요 보병들로 곧 하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대담한 기도(企圖)를 실천해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는 그런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 빈약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지혜있고 강력한 적을 분쇄하는 도구가 되어 공격을 감행해야 한다. 즉, 벤하닷의 교만함이 처벌되는 동안 아합의 교만은 사전에 예방되고, "권능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나타나게 된다."
👉 아합 왕과 한 선지자 사이의 질문과 대답.
첫번째 질문: 아람과의 전쟁에 나갈 군사를 묻는 것
두번째 질문: 전쟁에 나갈 군사를 지휘할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
이에 대하여 선지자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응답
전쟁에 나갈 군사는 각 지방 영주 휘하의 정에 전투부대원들, 전쟁의 최전방에서 군사들을 지휘할 장수는 아합 왕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북이스라엘의 승리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이 어떻게 싸워야 할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선지자를 통하여 머리 계시하여 주셨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전투 방범은 매우 평범한 것이었다. 즉, 왕이 정에 부대를 이끌고 나아가 싸우라는 것은 특별한 전락이나 방법을 기 대하였을 아합을 층분히 실망시킬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대답은 특별한 방법이나 전락에 의지하지 않고 평범한 방법으로 전투틀 수행하여 승리하게 함으로 당신의 권능을 보여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에 의한 승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하기 위해 이러 한 방법을 사용하시려 한 것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주체가 바로 여호와이심을 깨닫도록(13절)하기 위한 깊은 배려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아합은 어떤 마음에서 선지자에게 물었는가?
이 전투를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렇듯 구체적으로 물어보고 있는 아합의 모습은 그가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있는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아합은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였다기보다는 현실이 너무나 암담하였으므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어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아합이 벤하닷의 공격물 받게 된 처음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는 점에서(1절), 응답으로 주어진 말씀대로 그 자신이 선두에 서서 직접 전쟁을 수행하지 않고 소년들을 선두에 내세웠다는 점에서도(17절) 확인된다.
[3] 아합은 자신이 여호와의 말씀을 믿고 있음을 증명해야 하므로, 이성의 눈으로 보건대는 가장 위험한 환경이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해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 은혜를 입은 자들은 그 약속들을 믿고 나아감이 타당한 일이다.
[4] 그러나, 소년들이 어려운 일을 해치고 나면, 여세를 몰기 위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다른 병력들을 활용하는 것은 아합에게 허용된다. 사마리아 내에서 그리고 부르면 들릴 가까운 곳에서 소집한 병력은 단지 7천 명이었다(15절). 비록 사람은 다르지만 이 숫자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던" 숫자와 같은 것에 주목해야 한다(19:18).
Ⅲ. 싸움의 결과는 자명한 것이었다. 교만했던 아람 사람들이 패배되고, 무시를 당해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승리를 구가하였다. 젊은 소년들은, 적은 수의 병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정오에 아람 사람들에게 경보를 발했다(16절). 그러나 견줄 데 없는 용감성과 기민함으로 소년들이 벤하닷의 군인들을 모두 쳐 죽이고 교란시키자, 처음에는 소년들을 무시했던 벤하닷은 싸울 생각은 않고 술에 취한 채 말을 타고 도망을 쳤다(20절). "여호와께서 지상의 왕들의 기백을 빼앗아버리시며,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을 보자. 벤하닷이 아합에게 요구했던 금과 은은 어디 있는가? 손에 가득하리라 하던 사마리아의 티끌은 어디 있는가? 가장 안심하고 있는 자들이 일반적으로 가장 용기가 없는 자일 수가 많다. 아합은 이 유리한 점을 이용함에 실패하였으나, "많은 아람 사람들을 살육했다" (21절). 여호와께서는 이따금 사악한 자들을 다른 사람의 채찍으로 쓰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