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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 목요일 왕하4:8-37 엘리사와 수넴 여인

Jeehyun 2023. 4. 13. 08:50

맥체인성경읽기

레위기 17, 시편 20, 21, 잠언 31, 디모데전서 2

묵상구절

4:8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에 한 귀한 여인이 그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하였으므로 엘리사가 그 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4:9 여인이 그의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를 지나가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4:10 청하건대 우리가 그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만들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두사이다 그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에 머물리이다 하였더라

4:11 하루는 엘리사가 거기에 이르러 그 방에 들어가 누웠더니

4:12 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이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여인을 부르매 여인이 그 앞에 선지라

4:13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너는 그에게 이르라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세심한 배려를 하는도다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하랴 왕에게나 사령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 하니 여인이 이르되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 하니라

4:14 엘리사가 이르되 그러면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까 하니 게하시가 대답하되 참으로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었나이다 하니

4:15 이르되 다시 부르라 하여 부르매 여인이 문에 서니라

4:16 엘리사가 이르되 한 해가 지나 이 때쯤에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하니 여인이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

4:17 여인이 과연 잉태하여 한 해가 지나 이 때쯤에 엘리사가 여인에게 말한 대로 아들을 낳았더라

4:18 그 아이가 자라매 하루는 추수꾼들에게 나가서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렀더니

4:19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사환에게 말하여 그의 어머니에게로 데려가라 하매

4:20 곧 어머니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죽은지라

4:21 그의 어머니가 올라가서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와

4:22 그 남편을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사환 한 명과 나귀 한 마리를 내게로 보내소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오리이다 하니

4:23 그 남편이 이르되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거늘 그대가 오늘 어찌하여 그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냐 하는지라 여인이 이르되 평안을 비나이다 하니라

4:24 이에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몰고 가라 내가 말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위하여 달려가기를 멈추지 말라 하고

4:25 드디어 갈멜 산으로 가서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4:26 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4:27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그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가만 두라 그의 영혼이 괴로워하지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하니라

4:28 여인이 이르되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하니

4:29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이르되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 하는지라

4:30 아이의 어머니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엘리사가 이에 일어나 여인을 따라가니라

4:31 게하시가 그들보다 앞서 가서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소리도 없고 듣지도 아니하는지라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아 그에게 말하여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4:32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4:33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4:34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4:35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4:36 엘리사가 게하시를 불러 저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부르매 여인이 들어가니 엘리사가 이르되 네 아들을 데리고 가라 하니라

4:37 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수넴 여인의 정성(열왕기 하 4:8-17)

오랫동안 자식이 없다가, 늙으막에 아들을 얻게 되는 것은, 예전에는 아브라함, 이삭, 마노아, 엘가나의 경우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전능과 은총이 나타나신 사례도 보았던 것이다. 이제 바로 엘리사에 의해서 그러한 기적이 베풀어진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한 착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친절한 대접을 해 주고 났을 때, 그 보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다. 마치 아브라함이 천사들을 대접하고 났을 때 아들을 얻으리라 했던 약속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관찰해 볼 수 있다.

Ⅰ. 수넴 여인이 엘리사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이스라엘의 물자 사정은 엉망이었다. 그러나 어디로 가든 예언자들이 자기들의 친구들을 만날 수 없을 만한 정도로까지 악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수넴은 잇사갈 지파의 도성이었다. 사마리아와, 엘리사가 자주 들르던 갈멜 사이에 위치하고 있던 도시이다(2:25 참조). "거기에 귀한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좋은 집이 있었고, 그녀의 인심도 매우 좋았었다. 또 그녀의 남편은 많은 재산을 지니고 있었다. 그 남편도 아내를 지극히 신뢰했으며, 그녀의 분별력 있는 처사(잠 31:1)를 신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유명했던 엘리사까지도 그들의 집을 지나쳐 버릴 수 없었다.

아마 엘리사는 그 마을의 어떤 조용한 숙소를 찾아 들곤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경건한 부인이 한 번은 그 숙소에서 엘리사를 발견하고는, 자기 집에 와서 식사를 같이 하자고 자꾸만 졸라대었던 것이다(8절).

👉 8절, 한 귀한 여인의 간권함

아마 이 여인은 경제적으로 부유하였을 뿐 아니라 인품이나 신앙에 있어서도 존경을 받고 신분이 높은 인물이었을 것.
원문은 여언이 ‘자발적인 의지로 엘리사에게 계속해서 강하게 붙잡고 청하였음’ 을 보여준다.
이러한 수넴 여인의 행동은 나그네에게 옴식을 대접하고 그를 섬기는 고대 셈족의 관습에서 나온 것으로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하나님의 사자들을 접대한 것을 상기케 한다(창 18:1-8). 이같은 행동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축복을 받은 것처럼(창 18:9-14) 이 여인 역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융숭하게 대접함으로 아름다운 신앙적 삶의 면모를 보였고 — 이로 인하여 이후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여러 가지 축복된 일을 경험할 수 있었다(17:33-37절; 8:1-6). 

엘리사는 겸손하여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사양했다. 그런 일류 인사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했던 것이다. 그래서 엘리사가 처음으로 그녀의 집에까지 들르는 데는 다소간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친숙해진 후로는, 그리로 순회할 때마다 그 집을 방문했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의 손님을 지극히 반겼다. 엘리사와 교제하는 것을 지극히 소망했다. 그래서 그녀는 식사만 같이 하자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집에다 그의 숙소를 마련해 줌으로써, 보다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해 준 것이다. 그녀의 가정이 이 손님으로 인하여 축복을 받았을 것은 물론이요, 그 지붕 밑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손님의 신앙적인 담화와 모범을 배웠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훌륭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사실을 자기 남편에게 알리고 나서야 실행했다. 그녀는 남편의 동의를 얻지 않고는 집안의 돈을 지출하거나 낯선 자를 불러들이는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9, 10절). 그래서 그녀는 남편에게 제안했다.

1.자기가 초대하려는 그 손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 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집에도 축복이 될 것이며, 하나님도 그에게 베푼 친절을 당신 자신께 베푼 친절로 간주하고 보상해 주리라는 것이었다. 아마 그녀는 사렙다의 과부가 엘리야를 영접하여 얼마나 큰 복을 받았는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 내가 아노니,

수넴 여인은 이전부터 엘리사와 교제해 왔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진실로 참된 여호와의 중임을 확고히 알 수 있게 되었다.
⇒ 완료형으로 사용되어, 자신의 판단이 확실함을 드러내 주고 있다.
⇒ 이처럼 확신에 찬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여인이 뛰어난 영적 분별력과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신앙적 열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넴 여인은 엘리야의 외모와 인품 그리고 학식 등과 같은 인간적 면모만을 본 것이 아니라 ‘엘로힘'이란 하나님을 나타내는 칭호와 종교적 용어인 ‘카도쉬'란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과 관련된 종교적 측면에서 엘리사를 평가했다.
⇒ 이런 점에서도 그녀의 성숙한 신앙적 면모가 잘 드러난다. 

2.그녀가 그 손님에게 친절을 베풀더라도, 그것이 자기에게 짐이 되지는 않는다 했다.

그녀는 그 손님에게 단지 작은 방 하나를 지어 주고자 했던 것이다. 아마 그녀에게는 여분의 방이 없었을 것이다. 또는 그 손님이 거할 만큼 은밀하고 조용한 방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 10절, 앞절에서 수넴 여언이 엘리사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표현한 사실은 그녀가 엘리사를 지극히 존귀히 여겨 결국 자신들이 사용하던 방을 내주는 정도가 아니라 엘리사를 위해 새로운 방을 짓기에 이르렀음.

엘리사를 위한 수넴 여인의 배려

그곳에 구비될 물품들로 소개되는 이러한 ‘책상', ‘의자', ‘촛대' 등은 ⇒ 아주 기본적인 것들로 보여지기도 하지만 이것들 역시 수넴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필요를 위해서 특별히 준비한 것들이다.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위해서 이같은 것들만을 제안한 이유는 ⇒ 엘리사가 그곳에서 아무런 부담이나 방해 없어 휴식과 연구, 묵상과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로 여겨진다. 본문의 수넴 여인은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 아무런 부담 없이 자기가 준비한 처소에 출입할 수 있도록 방을 지었을 뿐 아니라, 그에게 곡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려하고 이같은 것들을 구비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얼마나 깊이 배려하였는지 알 수 있다. 엘리사는 선지자 사역을 수행하던 중 휴식이나 재충전이 필요했을 때 이곳을 방문하여 유숙했다(11절)

엘리사는 명상을 위해 많은 시간을 써야 했고, 그 집안의 소란으로 인하여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해야 했었기 때문이다. 가구도 매우 소박하게 갖추면 된다. 값비싼 옷걸이나 스탠드, 또는 소파나 거울 따위는 없어도 되며, 침상, 식탁, 의자, 촛대, 그것이면 그에게 필요한 물품의 전부이며, 휴식과 연구에, 읽기와 쓰기에 모두 넉넉했다. 엘리사는 그러한 비품으로 지극히 만족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 갔다가도 그리로 돌아와 유했기 때문이다(11절). 아마 엘리사는 별로 체면을 차리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의 하인과 같은 방을 쓴 것으로 보인다.

Ⅱ. 엘리사는 이 친절에 감사했음을 알 수 있다.

자기의 방이 매우 조용하고 그 대접이 매우 후했으므로, 그는 그녀에게 뭘로 보답할까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은혜를 입은 자들은 다시 갚으려고 애써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도 감사한 줄 모르거나, 마음씨 좋은 사람들의 식객노릇만 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못쓰게 된다.

1.그는 자기가 궁정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제의했다(13절).

"당신은 우리를 위한 주의 깊은 배려를 베풀었도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받은 친절을 귀히 보았다. 그렇게 부유하고 관대한 자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지만, 겸손한 자들은 친절을 받으면 이렇게 감사를 한다).

👉 ‘네가 우리를 위하여 생각이 주밀하도다’

‘주밀하도다’(하라드)
두려움, 떨림 이상의 의미를 지녀, 하나님의 사람의 성스러움에 누를 끼칠까 두려워 하여 삼가고 하나님의 사람에게 적합한 예우를 갖추기 위해서 정성을 다한다는 뉘앙스를 포함.
본문에서 ’하라드'는 그녀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베푼 모든 외적인 선행이 ‘하나님의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기인하는 행동의 조심스러움' 즉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존경과 두려움을 바탕으로 조심스럽게 취해진 것들임을 밝혀주고 있다. 

이제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하고 물었다.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은 너그러운 일을 궁리하고, 감사할 줄 아는 자는 고마운 일을 궁리하는 법이다. "당신이 왕께나 군대장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는가? 당신의 남편에게 무슨 일반 직책이나 군대의 직위를 주기를 원하는가? 무슨 탄원을 해야 할 일이 있거나, 고소를 했는데 지연되는 일이 되는가? 고등 법원에 상소할 일이 있는가? 내가 도와 주리다."

👉이러한 질문은 엘리사가 궁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엘리사가 지난 번 전장 때 왕들에게 베푼 은혜로 인하여, 궁정과 그렇게 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그가 자신을 위해서는 그런 권세를 택하지 않았지만, 자기의 친구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진 사람은 자신의 출세 이상으로 남을 돕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같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었는 엘리사가 본절에서 ‘왕에게나 군대 장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 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그 일어 왕이나 군대 장관과 관련된 일임을 암시하고 있다.

혹자는 이를 ‘군대 내에서의 남편의 직책어나 직위 청원' 또는 ‘법적인 문제와 관련된 소송과 탄원' 등의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매튜 헨리)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자기에게 잘해 주었다는 이유로 이같은 정치적인 청탁을 했을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것도 이 말을 전달하는 자가 엘리사의 사환으로 있으면서도 지속적으로 불신앙적이고 탐욕적인 생각들을 버러지 못해 비참한 최후를 당한 게하시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같은 견해는 더욱 설득력을 잃는다.

따라서 이는 당시 악한 왕으로 여겨지는 오므리 집안의 왕들이 다스리는 불의한 사회와 정치제도 하에서 혹 수넴 여인이 당할 수 있는 불의하고 억울한 일들과 관련해 엘리사 자신이 왕이나 군대장관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중재할 어떤 일어 있느냐' 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아마도 당시 북이스라엘은 과거 솔로몬이 각 지역벌로 공동체에 부과한 재정적, 군사적 목적을 위한 모종의 공공분담(왕상4:7) 방식으로 군대와 국가사업에 필요한 것들을 충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관련햐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 되는 수넴 여인의 남편은 세금을 징수하면서, 또는 군대에 복무하는 사람들의 식량이나 혹은 장비를 책임지거나 조달하면서 지나치게 많은 요구를 국가로부터 받았을 수 있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본문은 이같은 국가적, 군사적 책임 사항들과 관련해 수넴 여인의 가정이 받았을 수 있는 불이익이나 지나치게 부당한 요구 등에 대해 엘리사 자신의 중재가 필요한지를 물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유의 일이란 필요치 않다고 했다. "나는 내 백성 중에 거하리이다" 라고 말했다. 즉 "우리는 이대로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이상의 영달을 원치 않습니다" 고 했다.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면서 "자기 백성 중에 거하는" 것은 실로 행복스런 일이다. 우리는 그들과 서로 선행을 베풀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지내는 것을 만족히 여기고 평안히 살 수 있으며, 우리의 평안한 시절을 아는 것은 더욱 큰 행복이다. 왜 자기 백성들과 잘 지내고 있는 자들이 궁궐에 살기를 부러워하겠는가? 그런 자들은 어느 때가 자기들이 편히 사는 때인지를 알기만 해도 족할 것이다.

👉 수넴 여인은 완곡히 거절함.

수넴 여인의 이 말은 자신이 엘리사를 대접한 것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이거나 이에 상응하는 보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수넴 여인의 대답 속에서 우리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의 자세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일이 있은 몇 년 후에, 수넴 여인이 지금은 필요 없다고 말한 바로 그것, 곧 왕께 여쭈어야 할 일이 생기게 되는 사실을 보게 된다(8:3, 4). 자기 백성들과 거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의지하고 있는 그 산이 평생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착한 여인처럼, 그들도 낯선 자들과 함께 거해야 될 때가 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영원히 거할 도성은 하늘에 있다.

2.엘리사는 왕의 궁정보다 훨씬 우세한 하늘의 궁정과 자기의 관계를 그녀를 위해 사용했다.

엘리사는 그녀에게 뭘 해 주면 좋겠느냐고 자기의 하인과 상의했다. 이 위대한 예언자는 이 정도로 자기의 하인에게 대했다. 그래서 하인 게하시는 그녀에게 자식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들에게 큰 재산은 있었지만, 그것을 물려받을 아들이 없었고, 그녀의 남편은 이미 늙었으므로 자식을 가질 희망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엘리사가 그녀를 위해서 이러한 은총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어낼 수 있다면, 현재로서는 그녀의 가장 걱정거리를 치워 주게 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의 궁핍에 가장 도움이 되는 자들은 가장 친절한 환영을 받게 된다. 그는 즉시 그녀를 불러오라고 했다.

👉 게하시는 수넴 여인이 자식이 없는 것을 알고 당시의 일반 여성처럼 그녀가 분명 자식을 갖기를 원하리라고 짐작하여 엘리사에게 그녀의 불임 사실을 고한 것.

하지만 성경기록을 통하여 수넴 여언이 자식이 없는 것에 대해서 그 어떤 심적 갈등이나 불만을 표출했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물론 그녀 또한 자식을 갖기 위해 하나님께 회개하며 희생 제물을 드리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다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수고가 결실 없이 끝나자 여인은 자신의 무자함이 윤리적이나 종교적인 문제에 의한 것이 아님을 확신한 듯하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는 ‘불임' 에 대한 당시의 편견이나 왜곡된 시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자기 접에 모시고 아무 거러낌없이 그에게 필요한 예우를 다하였을 것이다.

그녀는 아주 겸손하고 정중한 태도로 "문간에 섰다" (15절). 이것은 그녀가 늘 행하던 정숙한 태도의 결과였다.

👉 엘리사의 두번째 부름을 받고 다시 그의 앞으로 온 수넴 여인은 그녀 자신이 엘리사를 위해 준비해준 방이었음에도 방 안까지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와 선 것으로 묘사됨.

→ 이는 그녀 가 여전히 엘리사를 경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여인의 겸손하면서 사려깊은 행동은 그녀가 깊은 신앙을 지녔을 뿐 아니라 교양을 갖춘 현숙한 여인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났을 때, 엘리사는 일년이 못 되어 그녀가 아들을 나으리라고 확신케 했다(16절). 그녀는" 예언자의 이름으로" 이 예언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왕께 사정을 얘기해 주는 왕의 조신의 보답은 못 받았지만 예언자의 보답을 받았다. 그것은 예언자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지는 하나의 놀라운 자비를 보답 받은 셈이다. 이 약속은 그녀를 놀라게 했다. 그녀는 그 말로 조롱을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닙니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내게 농담을 마시옵고 진실을 말하소서. 당신의 여종을 속이지 마소서" 라고 했다.

👉엘리사의 말이 그녀로서는 너무 놀라운 말이어서 과거 사라처럼(창18:12,13) 농담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약속된 시일이 차자, 그 약속을 입증해 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엘리사가 말해 준 그 시기가 되자,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17절).

👉 엘리사의 말에 대한 즉각적 응담. → 1년의 시간적 차이 이후, 언제나 정확한 때에 그의 계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드러난다.

돖이 돌아오매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돖이 돌아오매'로 번역하여 ‘1년이 지났다'라는 사실을 전달하나 이는 16절에서 이미 설명하였듯이 만물이 소생하는 봄철을 가리키는 말이다(T. R. Hobbs). 16 절 이하에서 아이가 태어날 시점을 예고한 후 아이가 태어나기까지의 공백을 아무런 강조 없이 지나쳤으면서도 아이가 태어난 시점을 이렇게 다시 언급하는 것에는 본서 저자의 특별한 의도가 있다. ⇒ 바로 ‘생명의 때' 즉 봄에 태어난 이 아이를 통해 마치 불임이란 비극을 안고 사는 수넴 여인과 같이 영적 결실을 전혀 맺지 못하고 있는 북이스라엘에게 있어 생명의 공급과 희망은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본문의 시점은 이같은 의미와 더불어 이어지는 18절부터 20절에 나오는 아이의 죽음의 시점과 관련해 또 다른 사실을 강조해 주고 있다.

17절에서 아이가 태어난 시기를 밝힌 후 이어지는 18절 이하의 내용에서는 아이가 자라 갑자기 죽는 시점을 곡식 베는 시기 즉 추수기로 밝힘.

그렇다면 생명의 계절인 봄에 태어나 잘 성장하다가 어느 혜 생명을 추수하는 시기에 갑자기 죽게 된 아이의 운명과 관련해 본서 저자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새롭게 시작되어 생명과 소망을 가지게 된 북이스라엘이 무의미한 역사를 되풀이하다가 추수의 날에 아무런 열매조차 맺지 못하고 사라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음. 즉 본서 저자는 한 아이의 기적적인 출생과 뜻하지 않은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상태와 장차 있을 운명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예언자를 위해서 방을 지어 주는 친절을 베푼 보답으로, 하나님은 그녀의 가정을 세워 주셨다. 우리는 이 사건이 그 집안에 얼마나 큰 기쁨을 주었을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노래하라, 오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이여!"

●수넴 여인의 아들의 죽음(열왕기 하 4:18-37)

아마 아들이 태어난 뒤로는, 예언자가 선한 수넴 여인에게서 갑절의 대접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그는 그녀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후로는 일생 동안 그녀가 엘리사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해도 그 신세를 갚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자기의 기도로 태어난 아들이기 때문에 예언자에게도 그 아들은 지극히 귀여웠을 것이며, 부모에게도 그들의 노년에 태어난 아기이기 때문에 몹시 귀여웠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생겼다.

Ⅰ. 그렇게 귀여움을 받던 그 아이가 갑자기 죽어 버린 것이다.

그는 유아기의 많은 위험을 잘 넘기고, 이제는 아버지의 밭에까지 나아갈 수 있게끔 되었다. 그 아버지는 필경 그와 얘기하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아마 그에게는 추수하는 기쁨보다 아들에 대한 기쁨이 훨씬 더 컸을 것이다. 그러나 빈들의 냉기 또는 열기가 그 아이에게 덮쳤다. 그 아이는 평소 귀엽게 자라났었다. 그래서 아이는 머리가 아프다고 아버지께 말했다(19절).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외에 그 누구에게 우리의 사정을 고하겠는가? 양자의 영이 믿는 자들의 온갖 근심과 바램을 아버지께로 올려다 줄 것이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머리야, 머리야, 가슴이야, 가슴이야" 하고 부르짖도록 가르쳐 줄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는 그를 어머니 품으로, 어머니의 무릎으로 돌려보냈다. 아버지는 아들의 형편이 별로 중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어머니 품에 안겨 한참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병은 중태였다. 그는 죽음의 잠을 자고 만 것이다(20절). 아침에는 멀쩡했던 아이가 점심 때가 되자 죽어 버렸다. 어머니의 사랑과 걱정이 아들의 생명을 보존시키지 못한다.

약속의 자녀, 기도의 자녀, 사랑으로 선사되었던 자녀를 이제 빼앗기고 만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질병과 죽음의 습격에 약하다.

그러나 그 지혜롭고도 믿음이 있는 어머니는 이 갑작스런 고난을 당하고도 입을 열지 않았으니, 얼마나 감탄할 일인가! 그녀는 성급한 애곡의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아이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강력히 믿었다. 그녀는 사자와도 같고 아브라함의 믿음의 참 딸답게도,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려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아들)를, 비유적으로 말하면, 다시 받아들인 것이다" (히 11:19). 그녀는 사렙다 과부의 아들이 소생한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고, 엘리야의 영이 엘리사에게 임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하나님의 자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믿고 있었던 고로, 하나님이 주셨던 것을 그렇게 빨리 도로 데려갔으니 이제 그것을 다시 회복시켜 주리라는 것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믿음으로 "여자들은 자기들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았다" (히 11:35). 이 믿음으로, 그녀는 자기의 죽은 아이를 위해서 장례 준비를 하지 않고 부활을 위한 준비를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를 예언자의 침상에 눕혔다" (22절)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예언자가 그녀에게 친절을 베풀 것을 기대한 때문이다. "오 여인이여! 네 믿음이 크도다." 이런 믿음을 가진 자는 좌절을 모르리라.

👉 수넴 여인이 왜 남편에게 아이가 죽은 사실을 알리지 않았는가?

수넴 여인은 그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죽은 아들을 엘리사의 방에 있는 침상 위에 눕혔다. 수넴 여인은 자신의 아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이가 죽은 사실을 남편에게 조차 알리지 않은 것이다.

아이를 엘리사의 침대에 왜 눕혔는가?

과거 엘리야가 자신의 침상에서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이를 소생시켰던 사실(왕상 17:19)과 관련해 이를 알고 의도적으로 취한 행동으로 여겨진다. 여인이 아이의 시신을 엘리사의 침상에 눕히고 ‘문을 닫고' 나온 것은 아들의 죽음이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을 통하여 수넴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에 의하여 아들의 죽음 문제조차 해결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녀의 강한 믿음이 아들의 소생이란 이적을 낳게 했다.

Ⅱ. 이 슬픈 사정을 그 어머니는 예언자에게 알렸다. 다행히도 예언자는 거기에서 멀지 않은, 갈멜 산 예언자 학교에 나가 있었다.

1.그녀는 남편에게 자기가 예언자에게 가도 좋다고 허락을 받기 원했다. 그러나 자기의 용무는 알리지 않았다. 아마 남편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녀를 보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22절). 그런데 남편은 거부했다.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23절). 이 말은 여호와의 절기 때에는, 그녀가 엘리사가 주관하는 집회에 참예하곤 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럴 때면 그녀는 다른 선한 사람들과 더불어 그의 말을 들으러 갔고, 그와 함께 기도와 찬양에 동참했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 집안에서 그 예언자를 모시고 그의 도움을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귀인이었지만, 공중예배에 참예하러 나갔던 것이다. 그 날은 그 지정된 날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왜, 무슨 일로 오늘 그에게로 나아 가려는거요?"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 나쁜 일도 없소이다. 두고 보면 당신도 잘되었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부부가 얼마나 서로를 생각해 주는가를 보라. 그녀는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는 아무 데도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편은, 그녀에게 지극히 친절하므로 그녀가 자기의 용무를 알리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말했더라도 그녀를 말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 23절, ‘.. 여인이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본문의 ‘솰롬'은 죽은 아이까지도 살리실 것을 믿는 이 여인의 믿음과 관련해 그녀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 사를 만난 이후에 아이의 죽음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받고 지금의 모든 환난이나 염려로부터 벗어나 다시금 완전한 평강을 회복할 것임을 고백하는 것으로 이후 그녀의 가정에 찾아올 결과를 예견하게 해주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즉 본문의 ‘솰롬'은 표면적으로는 남편에게 여행을 잘 다녀오겠다는 통상적인 인사말로 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서 잘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표현인 것이다.

2.그녀는 황급히 예언자에게로 달려갔다(24절). 그리고 그는 이미 멀리서부터 그녀가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하인을 시켜 뭐 잘못된 일이 있느냐고 물어 보게 했다(25, 26절).

그 질문은 아주 구체적이었다.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도 평안하냐? 아이도 평안하냐?"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친구들과 가족들의 안녕에 대해서 물어 볼 수 있는 깊은 관심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 답변은 일반적인 말투였다. "평안하니라."

그녀가 찾아 온 사람은 게하시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시 39:1, 2). 그러나 그녀가 한 말은 지극히 인내심 있는 말이었다. "나와, 내 남편과 아이도 평안하니라" -모두가 평안하나, 아이는 집에 죽어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장 귀한 인척을 부르셨을 때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다-" 우리에게나 그들에게 잘 된 일입니다" 라고. 그것은 실로 잘 된 일이다. 하나님께서 하는 모든 일은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로 간 것이라면, 가버린 모든 자들에게는 잘 된 일이다. 또 그러한 재난으로 인하여 이후로 우리들이 더욱 의무에 바른 길을 걷게 된다면, 우리에게도 다행한 일이다.

3.그녀는 예언자에게 오자, 자기가 당면한 재난에 대해서 그에게 겸손히 시비를 가린다. 그녀는 그의 발 밑에 나아갔다. 이것은 그녀가 자기를 도울 수 있으리라고 믿을 수 있었던 그에게 오기까지는 아무에게도 표명하지 아니했던 근심과 걱정이 있었기 때문이다(27절).

그녀는 감정이 터져 나오려 하자, 이제는 그 감정을 밝히는 방법을 알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 감정의 발로가 소용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는 역시 숨길 줄도 알고 있었던 여인이다.

게하시는 그녀가 자기 선생의 발 밑에 앉는 것을 보면 기분 나쁘게 여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대로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는 그녀의 고민 이유를 하나님께로부터 즉시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이 원한다고 알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생각에 합당한 때에만 사물을 알려 주신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알려 주시지 않았다. 그 선량한 여인의 입을 통해 예언자가 직접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은 매우 애처로운 것이었다. 그녀는 예언자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1) 그녀는 하나님께서 주셨다가 이제 다시 빼앗아 간 이 자비를 요구하지 않았었다는 것. "내 주여, 내가 아들을 원하더이까? 내가 원치 않았음을 당신은 아시리이다. 나는 아들이 없다고 안달을 떨지 않았습니다. 한나처럼 빌지도 않았고, 라헬처럼 아들을 주시든지 나를 죽여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위안물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은총을 받아서, 거기에 지나치게 신경을 쏟지 않을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겠다. 그럴 때에는, 그러한 위안물이 분노 속에 왔다가 진노 속에 사라져 간 것이나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수넴 여인은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을 만난 시점에서 그녀가 처한 비극적 상황과 관련해 그동안 자기 스스로 억제하고 있었던 슬픔과 안타까움을 가감없이 정직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

(2) 예언자의 말에 전적으로 의지해 있다고 했다. "나를 속이지 말라고 말하지 않더이까?" 실로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16절). 그러므로 이 말은 이런 얘기일 것이다.

[1] 자기를 속였다고 그 예언자와 시비를 거는 말일 수도 있다. 그 자비의 선물이 그렇게 속히 사라져 간 것은 자기를 속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며, 차라리 그 아이가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자기가 그 아들로 위안을 얻기 시작하자 곧 다시 데려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은혜의 선물이 다시 사라졌다고 하여, 그 은혜의 선물 자체를 없신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 두자.

[2] 또는 그 아이를 다시 소생시켜 달라는 탄원일 수도 있는 "나는 속이지 말라고 말했나이다. 당신은 그러지 않으리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실망시키더라도 결코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를 속이지 않았으며 또 속일 수도 없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 좋다. 그러한 희망은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Ⅲ. 그 아이가 다시 소생하는 것을 보게 된다.

아마 그 여인은 아이의 죽음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간단히 언급된 것 이상으로, 자세히 그 아이의 소생에 대한 약속을 일러 주었을 것이다. 그 이야기가 여기서는 간략하게 나와 있다.

1.엘리사는 게하시더러 전속력으로 그 죽은 아이에게로 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의 지팡이를 그에게 주어 보냈다. 그리고 그 지팡이를 아이의 얼굴에 올려 놓으라는 명령을 주었다(29절).

👉 엘리사의 명령

‘네 허리를 묶고'
여행 준비를 단단히 하라는 의미와 더불어 신속하게 행동하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엘리사가 자신의 지팡이를 주어서 게하시를 파견한 것은 자신에게 영적 권위틀 부여하신 하나님이 이 일에 직점 개입하시는 것과 게하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인 자기 자신을 대리하는 것에 관해 확신을 가지라는 권면의 의미도 갖는다. 지팡이는 자주 권위 있는 사람들의 능력과 권위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과거 출애굽 역사에서 모세의 지팡이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도구로 사용됨.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 엘리사는 왜 그의 사환 게하시를 보내면서 인사를 하지도 말고 받지도 말라고 했을까?
일차적으로 게하시에게 주어진 사명이 막중한 것이므로 자신의 임무에만 전념하여야 했기 때문.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눅 10:4 에서 70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본절을 인용하셨다. 또한 그것은 시간을 허비함으로써 지체하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길거리에서 지인을 만나게 되면 인사하는 데 10분 이상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허영심이 많은 게하시가 그의 여행의 이유를 다른 사람들에게 발설함으로써 스스로 이적을 행하는 것인 양 자랑치 못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Theodoret). 

나로서는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자기의 몸을 죽은 아이에게 가까이 대고 아주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여 아이를 살려냈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엘리사는 이런 간단한 의식을 통해서, 더구나 그가 직접 거기까지 가지 못할 이유도 없는 그런 때에, 그렇게 아이를 다시 살릴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할 수 있었을까? 그러한 능력이 게하시 같은 사람을 통해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인가? 홀(Hall) 주교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감동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으로 되어진 일이므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토록 위대한 은총을 그렇게 값싸게 주고자 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은총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쉽사리 은총이 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2.그 여인은 예언자가 직접 가지 않으면 안 가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홀로 가지 않으리이다" (30절). 그녀는 지팡이에다가 그렇게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원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그 손 오른편에 있었다.

👉 본문의 이 표현은 → 아들을 잃은 상황에서 자신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종의 손길을 통해 아들이 희생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간곡한 마음의 표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의지가 포함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게하시에 대한 불신도 포함)

이는 마치 마르다가 죽은 오라비 나사로의 시신 앞에서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을 아나이다"(요 11:21,22)라고 고백했던 신앙과도 일맥상통한다.

본문에서 엘리사의 동행을 끝까지 요구하는 수넴 여인의 이같은 자세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어느 일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명령에 따라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게하시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꺼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같은 자세는 또 다른 측면에서 절박한 상황에 처한 성도가 어떤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소원을 아뢰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귀감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종들에 불과한 피조물을 신뢰하지 말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창조주, 곧 종들의 주요, 우리의 주이신 분의 권능만이 신뢰를 받아야 한다.

게하시는 re infecta-성공을 못하고 돌아왔다. 그 아이에게 어떤 생기도 보이지 않더라고 보고했다. "아이가 깨지 않더이다" (31절). 이것은 그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서, 아이의 죽음이 단지 잠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게하시 자신도 그 아이가 곧 깨어날 것으로 믿었다는 얘기다.

여기서의 게하시처럼, 사역자들은 죽은 영혼들에게 영적인 생명을 불어넣는 데에는 자기들의 힘으로는 아무 일도 못하는 법이다. 그들은 예언자의 지팡이처럼 사람들 앞에 말씀을 늘어 놓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당신의 영으로 임하시기까지는 아무런 음성도 들리지 않는다. 문자만은 생명을 죽인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오직 영이다. 마른 뼈에 생명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은 예언이 아니라, 하늘에서 호흡이 내려와 죽은 자들에게 들어가야만 된다.

3.예언자는 간절히 기도하여 이 죽은 아이를 다시 소생시키는 은총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낸다.

엘리사는 그 죽은 아이가 자기의 침상에 있는 것을 보았다(32절). "그래서 문을 닫으니 두 사람뿐이었다" (33절). 여기서는 죽은 아이까지도 "두 사람" 중의 하나, 곧 산 자로 언급되어 있다. 아직도 그 아이는 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사는 아무도 못 들어오게 문을 닫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권능을 자랑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거나,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과장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1) 엘리사는 이 중대한 일에 온전히 정성을 다했다. 아마 게하시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로 실효를 거두리라고 생각한 것은 하나님을 지나치게 시험한 것이라는 점을 알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실망으로 인하여 그는 자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기가 생각하던 이 문제가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주 엄숙한 자세로 하나님께 아뢰었다.

[1] 그는 "여호와께 기도했다" (33절).

아마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이 아이의 영혼이 되돌아오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실 때, 아주 권위 있는 자로서 말했다. 즉 Damsel, arise-젊은이여,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또한 "나사로야, 나오라" (그는 하나님의 아들, 생명의 주로서 권능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엘리야나 엘리사는 간절히 간구했다-그들은 하나님의 종이었기 때문이다.

[2] 그는 "아이에게 엎드렸다" (34절).

마치 자기의 열을 그에게 전해 주려는 듯한 태도였다. 이것은 엘리사의 갈망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위대한 일을 해 낼 것으로 그가 믿고 있는 하나님의 권능이 임한다는 한 표적을 보인 것이다.

👉 34절~ 엘리사가 죽은 아이를 살리는 과정을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부분.

과거 그의 스승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릴 때 취한 방법과 흡사하다(왕상17:21).
⇒ 이같은 엘리사의 행위는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린 엘리야의 행위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같이 죽은 자를 소생시킴에 있어 취해진 유사한 선지자들의 행위가 의미하는 바를 정 확허 단정지어 규정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이는 자신의 몸을 통해 죽은 아이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전달되도록 하기 위한 상정적 행동이면서 동시에 이들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그 아이가 소생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해짐 : 싸늘하게 식어버린 몸에서 열기가 형성되어 체온이 올라감을 뜻함. → 이는 아이가 점차 살아나고 있음을 표현한 것.
⇒ 이처럼 엘리사가 죽은 아이를 살리는 모습은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모습(막 5 :39-42; 눅 7:13-15;요 11:43)과는 대조된다. 즉 엘리사는 하나님께 기도함과 동시에 죽은 아이 위에 엎드러는 행동을 취한 반면, 예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셨다. 이는 예수께서 생명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신 제2 위 성자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자기의 입을 그 아이의 입에다 대었다."
→ 이것은 마치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이에게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고자 하려는 것과 같다.
*다음에는 "자기의 눈을 아이의 눈에다가" 대고는 생명의 빛이 들어가 그 눈을 뜨게 하려고 했다.
*다음에는 "자기의 손을 그 아이의 손에다 대었다." 그 손에는 힘을 주려는 것이었다.
*다음에는 "내려와서 집 안을 걸어다녔다." 그것은 근심과 걱정이 가득 찬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하려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다는 표시였다.

👉이러한 엘리사의 행위는 사람들이 걱정과 초조함을 느낄 때 취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엘리사가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하고 걱정과 초조함 속에 어찌할 바를 몰라서 이같은 행위를 했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본문의 이같은 엘리사의 행위는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강렬하게 임하기를 고대하는 몸짓이며 그가 그만큼 아이의 소생을 위해서 전력을 다하였음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는 다시 올라가서 "그 아이 위에 엎드렸다" (35절). 죽은 자들에게 영적 생명을 불어넣고자 하는 자들은 이처럼 그들 자신이 먼저 그 문제에 깊이 관심을 쏟고 참여하며, 그들을 위해 열렬히 기도하는 수고를 다해야 한다.

(2) 이 일은 점차적으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해졌다" (34절). 이것은 예언자에게 계속 기도할 용기를 넣어 주었다. 잠시 후에는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를 했다." 이것은 목숨뿐만 아니라 활기를 약속해 주는 것이었다.

어떤 자들은 옛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었을 때 그가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최초의 증거는 재채기였다고 보고한다. 그래서 재채기하는 자들을 존중해 주는 관례가 생겼다고 한다. 어떤 자는 그 재채기가 머리를 맑게 해 주며, 아이의 병을 낫게 해 주었다고 본다.

👉 일곱번 재채기 한 것

아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망의 세력에서 승러하고 완전허 생명이 희복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죽은 아이를 소생시키는 본문의 기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활을 어떻게 이루실지를 예표
마치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과 동일시되어 그를 살린 것 같이,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우리와 동일시하시 우리의 인성과 죽음의 운명과 일치시키심으로 우리를 부활에 참예케 하시는 것이다(빌2:5-11; 히2:14,15).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엘리사의 이같은 기도와 간절한 몸짓에 점진적으로 응답하셨는가?
또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왜 하나님은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은 사실을 그에게 알려주시지 않았을까?
하나님께서 침묵하심을 통해 엘리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묻게 하고 점진적인 응답을 통해 엘리사가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즉 이는 엘리사를 단련시키시려는 하나님의 훈련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이같은 본문의 내용 가운데 상대적으로 아이 어머니인 수넴 여인의 믿음이 부각된다.
— 즉 그녀는 엘리사가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도록 기회를 제공한 인물인 것이다. 물론 엘리사를 찾아 만난 뒤 그와 대화하는 과정과 그 이후 있었던 일들(3절)과 관련해 수넴 여인의 부정적인 측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본문에서 이처럼 엘리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전심으로 그분을 의지하도록 기회를 제공한 인물은 아들의 죽음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 간구했던 어 수넴 여인이었다.

(3) 아이가 살아나서 아주 유쾌한 모습으로 어머니에게 돌아갔다(36, 37절). 그래서 걱정하던 모든 사람들이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 (행 20:12).

 👉 본문의 이같은 표현을 당시 상황과 비교하던 너무나 감격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18절 에서 밝혔듯이 죽었다가 다시 소생한 이 아이는 기껏 5세나 6세 정도의 어린아이였다. 이렇게 어린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여 품에 안긴다고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혼신의 간구를 통해 아이를 살려 그를 수넴 여인 품에 안겨주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감격 까지도 안겨준 것이다.

37절, 여인이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이를 안고 나가는 모습 ↔ 27절, 여인이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있는 모습

이는 27절의 행위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경의의 표현으로 죽은 아들을 살려 준 선지자에 대한 깊은 감사의 표현이자,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경배의 표시이기도 하였다. 죽었다가 다시 산 아들을 안고 나가는 어미의 마음에는 감격과 환희가 가득했을 것이다. 이 사건은 엘리 야가 사르바 과부의 아들을 살린 것(왕상17:17-24)과 함께 구약에서 죽은 자를 살린 2대 기적에 해당함과 동시에 장차 오실 그러스도께서 당신을 신뢰하는 자들로 하여금 사망의 권세로부터 온전히 자유케 하실 것에 대한 예표가 된다.

사람을 죽이고 또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라. 그리고 기도의 위력을 깨달으라.

그 기도에는 하늘의 구름을 움직이는 열쇠가 있었듯이, 죽음을 움직이는 열쇠가 또한 있다. 신앙의 위력을 보라. 고정된 자연의 법(죽음이란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이다)이 물러가는 것이 이 믿음 있는 수넴 여인이 실망을 겪는 것보다 더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