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4월 16일 주일 왕하6:1-7 쇠도끼를 찾다

Jeehyun 2023. 4. 15. 21:56

맥체인성경읽기

레위기 20, 시편 25, 전도서 3, 디모데전서 5

묵상구절

6:1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주하는 이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6:2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가져다가 그 곳에 우리가 거주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가라 하는지라

6:3 그 하나가 이르되 청하건대 당신도 종들과 함께 하소서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내가 가리라 하고

6:4 드디어 그들과 함께 가니라 무리가 요단에 이르러 나무를 베더니

6:5 한 사람이 나무를 벨 때에 쇠도끼가 물에 떨어진지라 이에 외쳐 이르되 아아, 내 주여 이는 빌려온 것이니이다 하니

6:6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어디 빠졌느냐 하매 그 곳을 보이는지라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쇠도끼를 떠오르게 하고

6:7 이르되 너는 그것을 집으라 하니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 그것을 집으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물 위에 떠오른 도끼(열왕기 하 6:1-7)

👉 한편 아람과의 전쟁에서 위기에 처한 북이스라엘의 구원과 관계된 엘리사의 이적이라는 본장과 7장의 전반적 내용과는 별개로 본장 1-7절에서는 물에 빠진 도끼를 물 위로 떠오르게 한 엘리사의 이적을 소개한다.

앞선 5장 전체가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문둥병 치유 및 이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에 대한 기록이고 6:7-7:20 역시 당시 북이스라엘과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었던 아람과 관계된 엘리사의 일련의 이적에 대한 기록인데, 그 사이에 이와는 전혀 무관한 듯이 보이는 본 사건이 소개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하나님은 국가간의 전쟁과 같은 중대한 일에 개입하여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지극히 사소한 일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역사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역시 대외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선지 생도를 훈련시키는 일이나 그들이 처한 삶의 어려움을 돌보는 일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독자들로 하여금 인지케 하려는 목적에서 이 사 건을 소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에서는 여러 가지 사실들을 관찰해 볼 수 있다.

Ⅰ. 예언자들의 생도들과 그들이 처한 형편에 관한 사항을 보자.

여기서 말하는 학교는 길갈에 있는 학교를 말하는 듯하다. 엘리사가 이전에 거기에 있었고(4:38), 또 길갈은 요단에서 가깝기 때문이다. 아마 엘리사가 어디에 주재하든, 그가 있는 곳에는 그의 교훈과 고견과 기도 때문에 많은 생도들이 모여 들었을 것이다. 누구나 엘리사와 함께 또는 가까이 지내고 싶어했을 것이다. 선생이 되고자 하는 자들은 남들이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처지로 자신을 내어 놓아야 한다.

 👉 예언자들의 생도들과 엘리사의 관계:
이 시대의 선지자둘은 사무엘의 지도하에 있었던 ‘선지자의 무리'의 경우보다 그들의 영적 아버지와 더욱 가깝고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이처럼 이들 선지 생도들과 선지자와의 관계가 긴밀하게 결속된 이유는
⇒ 아마도 우상 숭배가 만연해 있었던 당시 북이스라엘의 사회 정황과 관련해 이들 선지 생도들의 생활이 그만큼 어려웠으며 따라서 영적인 아버지로서 선지자가 이들을 더욱 각별하게 살피고 돌봐야 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생도들의 수효가 늘어났다. 결국 그들이 기거할 방이 없게끔 되었다. "보소서, 거한 곳이 우리에게 너무 좁습니다" (1절). 이것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잘 들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필경 엘리사의 기적이 사람을 많이 끌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많아지고 게하시는 면직되었으므로 누군가 정직한 사람이 게하시를 대신하여 그들의 식생활을 돌보았을 것이다(4장 43절의 예로 보면). 게하시가 자기 주인의 후박함을 투정한 것이 나아만 때의 일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분명 그랬을 것이다.

👉본문에서 정관사와 더불어 쓰인 이 장소는 엘러사가 선지 생도들을 만나 교육하던 곳일 수도 있지만, 제사를 드리던 장소를 뜻할 수도 있다. 즉 이곳은 엘리사와 선지 생도 공동체의 단순한 거주지였다기보다는 교육을 위한 장소 혹은 제사를 드리기 위한 장소였을 가능성이 크다.

2. 그들은 겸손한 사람들이라서, 화려하고 웅대한 집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방이 모자라게 되었을 때, 그들은 백향목 대리석과 공교한 공예 기술자들을 구하러 사람을 보내자고 말하지 않았다. 단지 각자 목재 하나씩을 가져와서 평범한 오두막을 짓자고 했다. 예언자의 생도들은 모두 이 세상의 비천함에도 만족히 여기면서 저 세상의 귀중한 일을 염두에 두고 있는 그런 자들이었다.

 👉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그곳에 처소를 세우사이다..

선지 생도들이 새로운 처소를 건축하기 위해 재목을 취하고자 한 곳은 ‘요단' 즉 요단강 유역.
왜 그들이 ‘요단'을 택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이에는 다음의 사실들이 관련된 것으로 보여 진다. 앞절에서 언급했듯이 지금 선지자들이 거주하는 곳은 여리고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 요단 강 유역이 여리고와 가장 가까우면서 필요한 자재를 구할 수 있는 곳이었다는 것이 이를 설명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실제 당시 요단강 근처에는 숲과 나무들이 울창하였고 그곳에서는 버드나무, 포플라나무, 석류나무 등 건측에 필요한 목재를 충분히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갖추어진 건축물에 포함될 만한 ‘들보' 정도 크기의 나무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대개 양질의 목재를 구하려면 이스라엘 중앙 고원 지역의 서쪽 경사지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이들 선지 생도들은 그런 나무를 벌목할 수 없을 뿐더러 그같은 나무를 구할만한 경제적 여력도 없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선지 생도들은 그들의 새로운 삶의 터전을 건축하고 이를 위한 건축자재를 얻고자 요단강 유역을 선택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사실 전달만이 아니라 당시 선지 생도들이 겪고 있던 생활고까지 반영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그들은 가난했다. 그들은 요직에 앉은 자들과는 상관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것은 요람이 왕이었고 이세벨도 통치권을 쥐고 있었다는 것, 혹은 예언자들의 생도들은 방이 비좁게 되면 자기들끼리 집을 확장하려고 논의하며 단지 정부에다 건의를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말해 주는 한 표적이다.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세상에서 총애를 받는 일이 드물다. 오히려 그들은 너무나 가난하여 일꾼을 고용할 능력이 없었으며(그래서 일을 하기 위해서 공부를 중단해야 했었다) 연장을 살 능력도 없었다. 그래서 이웃집에 가서 연장을 빌어와야 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가난이란 것이 예언하는 일에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4.그들은 근면하여 스스로 수고하려 했다. 그들은 게으른 수필처럼(게으른 "수도사" 라 부르면 좋으리라) 남의 수고로 살아가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자기들 스스로 일할 자유를 허락해 달라고 빌었다. 예언자들의 생도들이 너무나 명상에만 전념하여 행동하기에 부적합한 사람들로 변화될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되듯이, 일하기 싫어할 정도로 안일에 탐닉되어서도 안 된다. 먹어야 되는 자는 일을 해야 되며, 그렇지 않으려면 굶어 죽어야 한다(살후 3:8, 10). 그 누구도 정직한 노동을 짐스럽게 생각하거나 부끄러운 일로 여겨서는 안 된다.

5.그들은 엘리사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자들이었다. 그들도 예언자였지만, 그들은 그에게 지극한 존경심을 보냈다.

(1) 그들은 그의 허락 없이는 도무지 집을 지으려 하지 않았다(2절). (그 공동체는 엘리사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음)

우리 생각에는 아무리 온당하더라도, 우리들의 판단을 한번 검토해 보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그리하여 보다 지혜롭고 경험이 많은 자들의 충고를 들어보는 것이 좋은 일이다. 특히 그 예언자들이 자기들의 아버지(스승)를 함께 모시고 가려 했으며, 모든 행동은 그의 지시에 따라 하려 했다는 사실은 특히 자랑스러운 태도이다. 그들은 Permissu superiorim-연장자들의 허락을 얻어 일을 하려 했다.

(2) 그들은 엘리사가 같이 가지 않으면 재목을 자르려 하지 않았다. "당신도 종들과 함께 하소서" (3절).

위급한 경우에 조언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들 사이의 질서를 지키며, 감독을 해 주시사 각자가 훌륭히 일을 해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니라. 훌륭한 생도들은 항상 훌륭한 규율 밑에 있기를 바란다.

👉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엘리사가 선지 생도들의 무리와 항상 함께 있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엘리사 당시에 선지 학교는 벧엘이나 길갈, 여리고와 같은 성읍에 서로 독립적으로 세워져 있었다. 따라서 엘리사는 어느 한 공동체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고 정기적으로 순회하면서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면 왜 이 선지 생도들은 스승에게 동행을 요구하였던 것일까?
이는 엘리사를 깊이 신뢰했던 이들 선지 생도들이 자신들의 계획과 일에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함께함으로 축복과 성공을 약속받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엘리사의 동행 여부가 하나님의 축복과 일의 성공 여부와 결부된다고 생각한 선지 생도들의 동행 요구룰 엘리사가 수락한 것은
⇒ 이들의 요청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본문은 엘리사가 제자들의 말까지도 경청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따라 행하고 있다는 의미도 전달해 준다. 따라서 이같은 본문은 엘리사의 신앙적 측면만 아니라 인격적 측면까지도 부각시켜줌.

6.그들은 정직했다.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것을 돌리려고 한 자들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도끼질을 너무 열심히 하다가 불행히도 그 도끼를 물 속에 빠뜨려 버렸을 때(일을 잘 안 하던 사람들은 흔히 과열하기 쉽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이건 우연한 실수다. 도와 줄 자 없는가? 도끼 자루 탓이로다. 주인은 이제 할 수 없게 되었도다." 오히려 그는 큰 걱정으로 소리를 쳤다. "오, 주인이여! 그 도끼는 빌려온 것입니다" (5절)라고 했다.

만일 도끼가 본인의 것이었다면, 자기 동료들과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된 것만 걱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걱정 외에도, 정당하게 대하고 감사를 드려야 할 그 도끼 임자에게 부당한 일을 저지르게 된 것을 걱정했다. 빌어온 물건에 대해서도 내 것처럼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웃을 우리 자신같이 사랑해야 하며,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 예언자 생도는 가난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도끼도 살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 도끼를 잃어버린 것이 남달리 큰 걱정거리가 된 것이다. 정직한 마음씨를 가진 자들에게는, 그 가난이 수치스럽다기보다는 남에게 갚아야 할 빚을 갚을 수 없게 되는 것이 가난이 주는 가장 큰 슬픔이다.

 👉 본문에서와 같이 도끼날이 자루에서 빠져 나가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신 19:5). 그리고 이는 쉽게 다시 끼울 수 있었으므로 대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본문의 선지 생도는 도끼날이 물에 빠져 수습이 곤란한 상황이었고 도끼가 자기 것이 아니라 남에게서 빌려온 것 이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율법상 이웃에게 빌려온 물건을 상하게 하거나 잃어버리면 그에 따른 적절한 배상을 하여야 했다(출 22:14). 그리고 이러한 배상의 의무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자신이나 그 가족이 그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선지자의 생도는 이와 같은 여러 정황으로 인해 탄식하며 엘리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Ⅱ. 예언자들의 아버지 엘리사에 관한 기록을 보라.

1.그는 지극히 겸손하고 동정심이 많은 자였다. 그는 생도들이 원하자, 그들과 함께 삼림으로 갔다(3절). 누구든지, 특히 사역자들은 자기들은 너무나 위대하여 자신을 낮출 수 없다거나 자선을 베풀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직 모든 자들에게 다정히 대해야 한다.

2. 그는 위대한 권능을 지닌 자였다. 자연의 법칙과는 반대로, 도끼가 물 위에 뜨도록 할 수도 있었다(6절).

자연을 지은 하나님은 자연의 법칙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도끼 자루마저 집어 던져 버리지 않고, 새로 나무 가지를 잘라서 물 위에 내밀었다. 우리는 그 나무 가지가 가라앉아서 도끼를 올려놨다고 생각하여 그 기적을 두 배로 늘일 필요는 없다. 나뭇가지는 도끼에게 떠오르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선포하는 한 신화로 보면 족하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총은 이 세상의 진흙탕에 깊이 침윤된 돌같은 영혼들을 떠오르게 하시사, 그들의 이 세상적 욕망을 위에 있는 거룩한 것들에게 행하도록 하실 수 있다.

👉 왜 엘리사는 도끼날을 떠오르게 하는 데 나뭇가지를 사용했을까?

엘리사의 이적은 예수께서 물고기의 입에서 금화를 꺼낸 이적 (마 17:27)이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이적처럼(마 14:15-21) 주 변의 환경을 이용하여 이적을 일으킨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같은 행위의 배후에는 이런 일을 목도하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틀 더욱 생생하게 기억토록 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 라고 이해할 수 있다.

예수의 권능을 예표하는 구약의 대표적 인물로 여겨질 정도로 엘리사는 일생 동안 다양한 이적들을 많이 행하였다.
그는 선지자로 부름받은 자신을 조롱하는 42명의 청년을 죽이기도 하였고(2:23.24) 또한 신실한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기도 하였다(4:17-34).
또한 북이스라엘에 대한 아람의 은밀한 전쟁 계획을 예언하고(8-12절), 북이스라엘을 침입한 아람 군대의 눈을 멀게 하여 생포하는(18-23절) 등 이적을 사용해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적들과 비교하여 볼 때 본단락에 나오는 도끼를 물 위로 떠오르게 한 이 이적은 매우 사소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 저자가 이를 기록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의 사소해 보이는 일까 지 일일이 간섭하시며 특히 당신의 종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기 위하여. 성도는 이러한 하나님을 매사에 의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