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민수기 1, 시편 35, 전도서 11, 디도서 3
묵상구절
9:1 선지자 엘리사가 선지자의 제자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너는 허리를 동이고 이 기름병을 손에 가지고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
9:2 거기에 이르거든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를 찾아 들어가서 그의 형제 중에서 일어나게 하고 그를 데리고 골방으로 들어가
9:3 기름병을 가지고 그의 머리에 부으며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노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되 지체하지 말지니라 하니
9:4 그 청년 곧 그 선지자의 청년이 길르앗 라못으로 가니라
9:5 그가 이르러 보니 군대 장관들이 앉아 있는지라 소년이 이르되 장관이여 내가 당신에게 할 말이 있나이다 예후가 이르되 우리 모든 사람 중에 누구에게 하려느냐 하니 이르되 장관이여 당신에게니이다 하는지라
9:6 예후가 일어나 집으로 들어가니 청년이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며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여호와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노니
9:7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 주리라
9:8 아합의 온 집이 멸망하리니 이스라엘 중에 매인자나 놓인 자나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다 멸절하되
9:9 아합의 집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과 같게 하며 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과 같게 할지라
9:10 이스르엘 지방에서 개들이 이세벨을 먹으리니 그를 장사할 사람이 없으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니라
9:11 예후가 나와서 그의 주인의 신복들에게 이르니 한 사람이 그에게 묻되 평안하냐 그 미친 자가 무슨 까닭으로 그대에게 왔더냐 대답하되 그대들이 그 사람과 그가 말한 것을 알리라 하더라
9:12 무리가 이르되 당치 아니한 말이라 청하건대 그대는 우리에게 이르라 하니 대답하되 그가 이리 이리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는다 하셨다 하더라 하는지라
9: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 열왕기하 1-13장
: 엘리사의 사역을 중심한 분열 왕국 시대 중반기의 역사.
1-8장: 남북 네 왕의 통치를 엘리사의 사역을 중심하여 기술.
9-10장: 이어지는 엘리사 사역 기간 중에 있었던 예후의 반란 과정과 통치를 기술.
본서 저자가 예후와 관련된 기사를 무려 73절에 걸쳐 길게 기술한 이유
예후가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정사에 있어서 매우 특이하게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대로 행하였다는(10:30) 호의적 평가를 받았던 인물일 뿐 아니라 왕상 19:15-28과 21:17-29에 나타난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악하였던 아합 왕가의 심관에 관한 엘리야의 예언을 직접적으로 성취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아합 왕가의 악행과 그들의 심판에 대한 에고는 앞선 8장에서도 기술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에돔을 일으키셔서 남유다의 제5대 왕이며 아하의 사위인 여호람을 징계하시되 다윗의 언약 아래서 보호하신 것과 아람 왕 하사엘을 예비하셔서 북이스라엘의 제9대 왕이며 아합의 아들인 요람을 1차 징계 하신 사실을 소개하고 있는 것.
그런데 본장에서는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에후가 죽일 것이요"(왕상 19:17)라는 엘리야의 예언대로 보다 본격적인 심판이 임하여 아합의 아들 요람이 하사엘에게 부상을 입고 이스르엘성으로 피난해 있던 중에 군대의 지휘관 중 한 명인 예후가 반란 을 일으켜 아합의 아들인 요람은 물론, 이세벨을 비롯한 아합의 외손자인 남유다의 아하시야까지 살해하는 사건이 소개되고 있다.
본장에 기록된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아합 왕가에 심판이 선포된 이후 적어도 14년 이상 지난 후에 성취된 것이며 이는 공의로우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성취됨을 보여준다.
그리고 아합 왕가에 대한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일차적으로는 B.C. 722년 북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예표임과 동시에 구속사적으로는 최후의 날에 있을 영원한 심판의 예표로서의 의미도 지닌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아합 왕가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은 =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바대로 장차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최후의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본장은 내용상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1-13절: 예후의 기름부음 및 즉위와 아합 왕가의 멸망 예언에 대하여
14-29절: 아합의 아들 요람이 전쟁 중 부상을 입어 이스르엘 성에 머무는 사이 예후가 반역을 일으켜 요람을 살해하고 왕위에 등극하는 내용에 대하여,
30-37절: 아합의 아내로서 북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남유다까지 우상 숭배로 타락시킨 장본인인 시대의 악녀 이세벨이 예후에 의해 마침내 살해되고 그 시체마저 개들의 밥이 되는 비참한 사실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예후(열왕기 하 9:1-10)
여기에서는 예후가 왕이 되도록 기름부음을 받은 사건을 보게 된다. 그 때 그는 라못 길르앗에서 왕에게 고용된 군대 지휘관(아마 참모장이었을 것이다)으로 있었다(14절). 거기에서 그는 그의 주인인 왕을 위해서 싸우고 있었으나, 그 주군을 대항하여 싸우라는 보다 높은 왕의 명령을 받은 것이다. 예후가 이전에도 정권을 목적했거나 생각했던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에게 제시된 임무는 전혀 의외의 일이었던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엘리야에 의해서 이미 기름 부음을 받았었으나, 다른 명령을 받을 때까지는 행동하지 말라는 비밀지령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마치 사무엘이 다윗에게 왕이 되기 오래 전에 기름을 부었던 것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엘리야가 하사엘에게도 또한 기름을 부었다고 생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아니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이 일들을 하도록 명령했을 때는, 하나님이 그에게 엘리사로 하여금 "그를 대신하여 예언자가 되도록"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그것은 엘리야가 없어진 후에 하나님은 엘리사에게 지시하여 그들에게 기름 붓는 일을 맡기시려 한 것이었다.
Ⅰ. 주어진 임무는 무엇인가를 보자.
1.엘리사는 예후에게 기름 붓기 위하여 자기가 직접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늙어서 그러한 여행을 할 수 없었고, 너무 잘 알려져서 그 일을 몰래 할 수가 없었으며, 사람 눈에 띄지 않고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예언자의 생도들 중의 하나를" 보낸다(1절). 그들은 엘리사를 아버지와 같이 존경했을 뿐만 아니라고(2:15), 그를 아버지와 같이 쫓고 순종했다.
👉 선지자의 생도
엘리야 시대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는 용어인데, 150년간이 공백을 깨고 선지자의 생도라는 새로운 명칭의 등장 → 엘리야 시대 이후 선지자의 활동이 다시 왕성해졌음. 이 시대의 선지자들이 스승을 영적인 아버지로 불렀다는 사실을 전달하며, 이는 그들이 사무엘의 지도하에 있었던 선지자 무리들의 경우보다 그들의 스승과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사무엘 시대와 달러 엘리야, 엘리사 시대에 선지자와 생도들 사이에 이러한 친밀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았던 악 한 왕으로부터 선지자들이 박해를 받던 시대상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우상을 숭배하던 왕에 의한 신앙적 탄압이 오히려 선지자 생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지도자인 선지자와 보다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도록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엘리사가 그의 생도에게 가라고 지시한 장소인 ‘길르앗 라못'
앞선 8:29에서 복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연합군이 아람 왕 하사엘에 맞서 싸운 장소.
여기서 북이스라엘 왕 요람은 부상을 입어 ‘이스르엘'로 피신하게 되는데, 바로 이런 상황 가운데서 엘리사가 예후를 찾아 길르앗 라못 으로 생도를 보낸 것. 이러한 사실은 예후가 요람의 전권을 위임받아 길르앗 라못에서 계속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후
이름의 뜻: ‘여호와는 한 분이시다' 혹은 ‘그는 여호와이시다' .
⇒ 이러한 이름의 뜻으로 미루어, 그의 부모와 가문은 신실한 여호와 신앙을 소유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요람 밑에서 군대 장관을 지냈는데, B.C. 841년 엘리사의 생도에게 기름부음을 받고 왕위에 올라 B.C. 814년까지 약 28년간 복이스라엘의 왕으로 통치함. 통치 기간 중 그는 하나님께서 위임한 아합 가문에 대한 심판을 수행한 동시에 바알 숭배자들을 진멸하고 바알 산당을 훼파하기까지 했다(9:21-10: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그는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였을 뿐 아니라(10:29) 전심으로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않았다(10:31).
그리고 이에 대한 징계로 ⇒ 하나님께서는 아람 왕 하사엘을 일으키셔서 북이스라엘의 영토 일부를 뻬앗게 하셨다(10:32,33). 이처럼 예후는 북이스라엘의 왕 가운데는 유일하게 본서 저자로부터 비교적 호의적 평가를 받은 왕임에는 분명하나 그의 통치에는 영욕이 교차하였다.
예후에게 기름 붓는 이 일은
(1) 위험이 따랐다(삼상 16:2).
그러므로 엘리사 자신이 나서는 것은 적합치 않았고, 예언자의 생도들 중의 하나가 적합했다. 그들의 생명은 엘리사의 생명보다는 귀하지 않았고, 엘리사가 하는 것보다는 위험이 적었다.
(2) 그 일은 수고를 요구했다.
그러므로 전력을 다할 젊은이에게 더 적합했다. 젊은이는 일하게 하고, 노인은 지휘하게 해야 한다.
(3) 그러나 그것은 왕에게 기름 붓는 명예로운 일이었다.
그 일을 하는 자는 그 후에 그 일을 위하여 발탁되어질 것을 희망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엘리사는 젊은 예언자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그들 중의 하나를 고용했다. 그는 모든 명예를 독차지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젊은 예언자들과 영예를 나누어 갖기를 주저치 않았다.
2.엘리사가 그를 보냈을 때,
(1) 그가 예후에게 부을 기름을 그의 손에 들려 주었다.
"이 기름 병을 취하라." 솔로몬은 "회막에서 가져온 기름" 으로 부음을 받았다(왕상 1:39). 그런 기름을 이 때에는 얻을 수가 없었지만 예언자의 손에서 온 기름은 하나님의 집에서 온 기름과 동등했다. 왕에게 기름 붓는 일은 항상 계속되던 행사는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솔로몬의 경우와 같이 왕위 계승이 혼란한 때, 또 요아스의 경우(11:12)와 같이 왕위 계승이 방해될 때, 또는 예후의 경우와 다윗의 경우와 같이 통치권이 새 가정으로 옮겨질 때에만 기름 붓는 식이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항상 사용 되었지만,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2) 엘리사는 그가 해야 할 "말을 그의 입에" 두었다고 했다(3절). 즉 "내가 너에게 왕으로 기름 부었다" 라고 말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 외의 엘리사가 그에게 한 모든 말(7-10절)을 그에게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로 보내는 자들에게 자세히 지시하여 보내실 것이다.
👉 ‘기름병'(파크 항쉐멘)은 1절에서 엘리사가 생도의 손에 쥐어준 병과 동일한 것 = ‘왕을 세우기 위헤 사용되는 기름이 든 병을 뜻한다.
여기서 사용된 기름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성전에서 사용되는 거룩한 관유와 같은 것이었다(출 30:25).
기름부음 의식 의미
왕이 될 사람에게 기름을 붓는 의식은 선민 공동체와 하나님을 연결시키는 중개자가 되는 거룩한 직임을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이러한 기름부음의 대상은 왕을 비롯한 선지자와 제사장이었다.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위에 해당하는 단어의 원형 ‘마솨흐’는, 종교 의식의 맥락에서 사용되면 이 단어는 하나님의 특별한 지명(대하 22:7)과 존귀한 명에(삼상 24:6,10) 내지는 하나님의 보호(시 105:15) 등의 의미를 함축하는데, 본문에서도 이러한 의미를 반영하는데, 무엇보다도 ‘완료형’으로 사용되어 선지 생도가 예후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붓는 의식을 행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 자신이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성경의 기록을 분석해 보면 '기름을 붓는 행위'는 왕조의 창시자들과 경쟁자를 이기고 왕위에 오른 왕들을 소개할 때 반드시 등장하고 있다(11:12; 23:30;삼하2:4;5:3; 왕상1:34.39). 여기서 하나님의 명령으로 기름붓는 의식을 행한다는 사실은 예후가 여호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합법적인 왕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예후가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된 것은 그가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선택된 합법적인 왕임을 의미하는 동시에, 요람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를 북이스라엘의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하시지 않고 있음을 뜻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왕을 삼노라 하셨느니라’
본문 서두에 나오는 ‘코' : 방법, 장소 시간을 나타내는 지시 부사, ‘이렇게(thus)', ‘여기에(here)' 라는 의미.
⇒ 본문은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었다'라는 의미.
이처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면서 1인칭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 전달되는 말이 선지자 개인의 말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대언하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3) 엘리사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1] 그 일을 비밀리 행하라. 그는 예후를 다른 장관들 중에서 뽑아내어, 골방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2절).
아마 그래서 그 예언자의 임무에 대한 예후의 확신이 시험당했을지도 모른다. 그 때 그는 자기의 소명을 증명할 아무런 증거도 댈 수 없었다. 예후가 그 의식 때문에 갑자기 힘이 나게 되었다면, 그것이 그가 기름 부음을 받았음을 충분히 증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거기서 여하한 다른 증명도 필요치 않다. 나타난 결과가 그 표적의 최상의 증거였다.
👉 골방으로 예후를 데리고 들어가라고 지시한 것은 예후에게 기름 붓는 일이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중대 사안이기 때문에 비밀리에 수행되어야 함을 나타내며, 동시에 왕을 세우는 일에 있어 인간적인 개입을 전적으로 배제하기 위함.
본문의 ‘골방’이라는 표현
⇒ 당시의 전쟁의 형국과 관련해 중요한 암시를 주는 표현.
당시의 아람과의 길르앗 라못 전쟁은 북이스라엘에게 있어 방어전이었다. 따라서 예후는 이 전쟁에서 그의 군대와 함께 막사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이를 방어하느라고 성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정황을 고려해 볼 때 비록 전쟁 중에 요람은 부상을 당했지만 길르앗 라못 방어전은 효과적으로 수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그 일을 신속히 행하라고 했다.
그가 그 일을 위하여 갔을 때, 그는 "허리를 동여야" 했다. 그가 그 일을 하고서, 사례비나 대접을 받으려고, 혹은 예후가 무슨 일을 하려는가 보기 위하여 "지체하지 말고 빨리 달아나야" 했다. 빈둥거리고 쓸데 없이 지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과 같이, 자기의 일을 민활하고 힘차게 하는 것이 예언자의 생도들이 할 일이다. 그들은 재빠르게 날아 다니는 천사와 같이 되어야 한다.
👉 지체말고 도망하라는 것은 자기가 감당해야 할 사명에만 집중하고 그 일을 마쳤다면 가능한 한 빨리 그 장소에서 이탈하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신의 사명을 다했으니 더이상 머뭇거릴 이유 없이 가능한 한 빨리 엘리사 자신에게 복귀하라는 의미.
Ⅱ. 위임이 전달 되었다. 그 젊은 예언자는 자기 일을 신속히 행했고, 곧 라못 길르앗으로 갔다(4절).
거기에서 그는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하고 전쟁 회의를 하는 장군들을 발견했다(5절).
👉 당시의 일반적 정황대로라면 이 소년이 예후를 만나기 위해서는 회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거나, 심지어 보안상의 이유로 예후를 만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 생도가 장관들이 모인 장소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선지 생도가 엘리사의 전령이었음을 나타내는 어떤 증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이유를 추정할 수 있다. 즉 당시 엘리사의 명성이 선지 생도로 하여금 군부 지휘관들의 희의장까지 갈 수 있게 하는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5절, ‘우리 모든 사람 중에 뉘게 하려느냐… 장관이여 당신에게니이다’
군대 지휘관들어 모여 있는 가운데 예후와 선지 생도 사이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장면. 앞선 선지 생도의 말에 예후의 물음이 곧바로 이어지는 것으로 볼 때, 예후는 당시 군부에서 회의를 주도하거나 적어도 다른 여타의 지휘관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군부에 행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관이여 당신에게니이다’라는 선지 생도의 간단한 대답은 ⇒ 마치 예후가 질문하기틀 기다렸다는 듯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간단한 대화를 통한 사건 묘사는 등장 인물들과 이야기의 흐름이 모두 여호와의 주권적 섭리, 즉 예언의 말씀의 성취틀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뉘앙스를 암묵적으로 전달한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고-자기의 외모는 초라하지만-그는 무리 가운데서 예후를 불러내었다.
그는 틈 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마치 권위 있는 자와 같이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전할 말이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아마 예후는 자기의 사명에 대해 약간의 예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영예를 찾아서 조급해 하지 않으면서, "우리 모든 사람 중에서 뉘게 하려느냐?" 고 물었다. 그가 먼저 말했기 때문에 그가 용무의 대상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모두 예후 그가 바로 목표한 사람임을 만족하였던 것 같다. 예언자는 그를 혼자 데리고 가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6절).
성령의 기름부음은 숨겨진 일이다. 그것은 아무도 알지 못하나, 그것을 받은 자만이 아는 새로운 기름이다.
이와 함께,
1.그는 예후에게 왕의 관작을 수여한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나는 그의 이름으로 온 사신이다-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여호와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왕을 삼노라." 그는 그에게 논의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칭호를 주고, 다음과 같이 하여 그가 왕이 되리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1) "이스라엘 하나님에 의해서" 이다.
즉 그 하나님에게서 자기의 권력이 나왔음을 그는 알아야 한다(그에 의해서 왕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권력을 써야만 하며, 하나님께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치리자들도 하나님의 사역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에 의지해서, 그리고 그에게 온전히 헌신하면서 그의 영광을 위해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예후가 왕으로 세워지는 근본적인 목적을 밝히는 본문,
즉 북이스라엘이 오므리 왕조 아래서 바알 신앙에 오염됨으로 하나님의 백성됨의 본질에서 이탈하였음을 암시하면서 예후가 왕으로 세워진 것이 바로 이러한 복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백성으로 바로 세우는 것임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 따라서 예후는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여호와를 자신의 왕으로 삼아 그에게 충성을 다하며 그가 통치할 백성들까지도 여호와의 백성으로 바로 세우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2) "여호와의 백성의" 왕이 되었음을 상기시킨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히 타락하였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과 그들의 모든 영예로운 관계를 박탈당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여호와의 백성" 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고, 아직은 그들에게 이혼증서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후는 자기가 왕이 되어 다스릴 그 백성을 "여호와의 백성" 으로서, 즉 자기의 예속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인, 그의 아들들, 그의 장자들로서 대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 을 학대하거나 압제해서는 안 되며, 그 자신도 하나님을 위하여 자제하며, 하나님의 법에 의하여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2.그 젊은 예언자는 예후가 당장에 할 일을 지시한다.
그가 할 일이란 아합의 모든 집을 멸절시키는 일이다(7절). 이것은 그가 왕위에 나아가는 길을 개척하여, 권좌의 소유를 보장하기 위한 일이 아니라, 죄악되고 가증스런 그 아합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시행하기 위한 일이다.
👉 심판의 대상으로, ‘아합의 집’ 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왜 하나님께서는 당시 이스라엘 왕이었던 ‘요람’만을 지칭하지 않으시고 ‘아합의 집'이라고 언급하셨을까? 그리고 만일 본문에서 왕조의 뿌리를 언급하려 했다면, ‘아합의 집'보다는 ‘오므리의 집'으로 표현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 하지만 본문은 ‘요람, 오므리' 대신 ‘아함’ 이란 인물을 특별히 지칭하고 있음.
이는 오므리 왕조 가운데서도 ‘아합’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이방신을 섬기는데 가장 열심이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특히 본장의 사건이 왕상 19:15-18과 왕상 21:17-29에 선포된 아합 왕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을 성취하는 것임을 드러내기 위함이기도 하다.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이는 치거나 때리는 일반적인 행위를 묘사할 때도 사용되지만 대개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범죄한 인간들을 향해 심판을 내리는 의미를 나타낼 때 사용된다. 본문에서도 이 단어는 아합의 집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예언자는 아합을 그의 "주인" 이라고 불렀다. 이 관계는 아무런 이의(異意)가 없을 것이다. "그는 너의 주인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과 그의 후계자에게 대항하여 일어서는 것은, 하나님께 직접 받은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닐 경우라면, 단지 천박한 망은(忘恩)이요, 반역, 반란, 그리고 나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너는 너의 주인 아합에게보다도 하늘에 계신 너의 주님께 더 높은 의무를 지고 있다."
하나님은 "아합의 온 집을 멸망시킬 것이요, 그것은 바로 너의 손으로 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런즉 두려워 말라. 그가 너에게 명령하시지 않았느냐? 범죄 할까 두려워 말라. 그의 명령이 너를 의롭다 할 것이고, 너를 지지해 줄 것이다. 위험을 두려워 말라. 그의 명령이 너를 안전케 하실 것이며, 성공하게 하실 것이다."
👉 ‘내가 갚아주리라’(나캄)
‘나캄’ — ‘복수하다, 원한을 풀다, 앙갚음하다’ 라는 의미로 성경에 70회 나오는데, 대개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사용됨.
여기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복수'의 개념은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나캄'은 사적인 증오심이나 원한에 의한 비윤리적인 복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한 당신의 고유한 통치 권한을 행사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신 32:35,41).
만일 하나님께서 죄를 형벌하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자신의 성품에 진실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의 복수'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이라는 또 하나의 증거는 — 종말에 대한 선지자들의 예언에 잘 나타난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이 이루어지는 종말의 때를 가리켜 ⇒ ‘보수의 날'이라고 칭하였다(사 34:8). 실제 계시록에서는 종말에 하나님께서 불의와 죄악을 행하며 당신의 백성들을 핍박했던 자들에게 보수하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서술해 주고 있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계 18:20). 이처럼 하나님은 반드시 악에 대해서 징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시 94:1).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의 일시적 형통을 결코 부러워해서는 안되며(잠 23:17),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한편 본문과 유사한 표현이 율법서인 신 32:43에도 나타난다. 따라서 이 표현은 하나님의 정의가 실행되어짐을 나타내는 법률적 표현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 예언자는 예후가 현명하게, 그리고 올바른 방법으로 이 큰 일을 아합의 집에 시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그들의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이 다루시는 그들의 논쟁의 근거가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과 싸우시는가를 말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유의하시는 것을 예후도 유의하게 하기 위함이요, 즉 하나님이 유의하시는 것은 바로 그들이 흘린 하나님의 종들, 예언자들 그리고 다른 신실한 예배자들의 피였다. 이제는 이세벨의 손에서 그 피를 찾으시겠다고 하였다. 또 그들이 우상 숭배자들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벌을 받기에 충분할 만큼 악했고, 그들에게 임한 모든 것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에서 아직 언급되지도 않고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다투시는 이유는 그들이 박해자들이라는 점에 대해서였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제단들을 훼파" 했을 뿐 아니라, "칼로써 그의 예언자들을 살해" 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떤 죄악도 이것보다는 군주와 백성의 죄악의 그릇을 완벽하게 채우지 못하며, 어떤 죄악도 이러한 죄악보다 더 분명하고 쓰라린 파멸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이 죄악이 바로 예루살렘의 최초의 파멸(대하 34:16)과 최후의 파멸을 가져왔던 죄이다(마 23:37, 38).
이세벨의 음행과 마술보다도 그녀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고, 남은 자들은 골방과 동굴 속으로 몰아 넣었다는 사실이 더 하나님을 자극시켰다(왕상 18:4).
(2) 아합가의 운명을 말해 주었다.
그들은 철저한 파멸을 선고 받았다. 즉 그들은 교정하기 위한 징계가 아니라 뿌리째 뽑아버리려는 심판이다. 예후는 동정이나 호의나 인정을 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했다.
아합에게 속한 모든 자는 살해되어야 한다(8절). 여로보암과 바아사의 집안이 파멸된 것에서 본을 따서 시행해야 했다(9절).
그리고 특히 이세벨을 개들에게 던지라는 지시를 받는다(10절). 아합 왕가의 피의 전량으로도 예언자들과 성도들과 순교자들의 피를 보상하기에는 너무나 적고 부족했다. 하나님의 계산으로는 그의 종들의 피가 너무나 고가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이 용무를 마친 예언자는 최선을 다해 속히 귀가했다. 그리고 예후를 혼자 남겨 두어, 그가 앞으로 해야 할 바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지시를 구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했다.
👉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왕가(B.C. 930-908년)를 시작으로 바아사 왕가(B.C. 908-885년)와 오므리 왕가(B.C. 885-841년)를 거쳐 예후의 왕가로 이어짐.
이러한 왕권 교체는 한결같이 반역과 혁명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궁극적으로 왕들이 여호와를 배신하고 우상을 섬긴 범죄에 대해 여호와께서 심판하신 결과였다. 여로보암 왕가는 그의 신하로 있던 바아사에 의해 완전 멸절되었으며(왕상 15:29), 바아사 왕가 역시 7일 천하로 마친 시므리에 의해 그 일족이 완전히 몰살되었다(왕상16:11). 따라서 본문은 아합 왕가가 여로보암 왕가나 바아사 왕가처럼 신하의 반역과 혁명에 의해서 멸망하되 완전히 멸절될 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 멸절의 원인이 여호와틀 배신한 데 있음을 나타낸다.
●혁명에 나선 예후(열왕기 하 9:11-15)
잠시 후 예후는 회의 석상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일어난 일을 억지로 알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 사실을 그냥 덮어두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면 그와 그 군대장들 사이에 일어난 것을 알아보도록 하자.
Ⅰ. 군대장들은 그 젊은 예언자를 경멸하면서 말했다.
"그 미친 자가 무슨 까닭으로 그대에게 왔더뇨?(11절) 그가 그대에게 온 용무가 무엇이뇨? 그리고 왜 그대는 그와 얘기하기 위하여 그렇게 물러가 줄만큼 그의 비위를 맞추려 했었는가? 예언자들은 군대장들과 친구인가?"
👉 본문에 기록된 ‘그 미친 자' 란 말이 뜻하는 바는 당시 선지자들의 행태가 황홀경에 빠져 진언하는 자들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보다는 당시 북이스라엘의 반여호와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나온 하나님의 선지자를 홀대하는 상투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를 "미친 자" 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 예언자는 "저희와 함께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기를" 원치 않고(벧전 4:4) 그는 자기를 부정하는 생활과, 금욕과 이 세상 경멸의 생활을 살았고, 자기들의 시간을 예배에 바치는 그런 자들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 때문에 그들은 예언자들이란 바보들이요, "신이 감동한 자는 미쳤다" (호 9:7)고 생각했다.
종교를 갖지 않은 자들은 흔히 신앙심을 경멸하여 말한다. 그리고, 그들을 미친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우리의 구주를 향해서 "그는 미쳤다" 고 말했고,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그는 악마에 들렸다" (그런 자는 실로 얼마나 불쌍한 자인가!)고 말했고, 사도 바울에 대해서는 "많은 학식이 그를 미치게 했다" 고 말했다.
이처럼 지고(至高)의 지혜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고,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자들은 미친 사람들로 간주된다.
아마 예후는 동료들을 책망하기 위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즉 "너희는 그 사람이 예언자임을 알라. 그런데 왜 그를 미친 자라고 부르는가? 너희는 그의 가르침이 광기에서 나오지 않고 영에서부터 나옴을 알라?" 고 하던가 혹은 "너희는 그가 예언자임을 알라, 그 용무는 나에게 내 결점을 말해 주고, 나에게 나의 의무를 가르쳐 주는 것임을 알 수 있지 않느냐?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너희에게 알려 줄 필요가 없다" 고 말할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그들의 말을 일축해 버리려 했지만, 그들은 그에게 얘기하기를 강청했다. "그것은 당치 않은 말이다." 우리는 그의 임무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없노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말하라고 그들은 말했다.
👉 ‘당치 않은 말이라'에 해당하는 ‘쉐케르'는 ‘거짓말', ’허위’, ‘속임수’를 의미하는 단어로,
→ 어떤 것이 사실과 다르며 근거가 없다는 의미에서 거짓된 말이나 행위를 부정할 때에 사용된다. 렘 27:10에서 ‘쉐케르’는 거짓을 예언하는 자들에게 사용되는데, 이는 아무리 선지자가 설득력 있고 논리적으로 예언한다 할지라도 그의 말이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근거 없는 것이란 사실을 나타내면서 사용되었다.
또한 ’우상'들의 거짓됨을 나타낼 때도 사용된다(사 44;20 ;렘 51:17). 본문에서 ‘쉐케르’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으며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군대 지도자들은 길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쉐케르' 라 는 단 하나의 명사만을 사용하여 앞선 예후의 말을 강력히 부정하고 있다.
⇒ 즉 그들은 예후의 말에 암시되어 었는 선지 생도와 자신들의 연루에 대한 의혹을 단 한마디 말로 잘라 강경하게 부정하고 었는 것이다.
예후는 재촉을 받고 나서, 그 예언자가 "자기 왕으로 기름 부었다" 고 알렸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머리에는 기름이 보였을 것이다(12절).
그들 중 어떤 자가 나서서, 요람에 대한 충성심에서이거나 그에게 질투를 느껴 왕이 되는 길을 막아서거나, 아예 처음부터 그의 계획을 좌절시킬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예후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했고, 그 사실을 고백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누구를 믿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일으킨 자가 자기를 지원하시리라는 것을 믿었다.
👉 그가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군대 지도자들에게 선지 생도가 말한 것을 그대로 밝힌 것은
⇒ 당시 군부의 움직임이 자기를 향하여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과 선지 생도가 전한 말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진실한 계시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 전쟁의 추이와 관련해서 요람은 아람군의 집중 공격으로 부상당한 가운데 있었지만 아람에 대한 이스라엘의 방어전은 여전히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람이 이스라엘에게 있어 너무나도 중요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있다면 어떤 사람도 그를 폐위시키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가 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전쟁을 지속적으로 지휘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못하였다는 변수는 존재한다.
그러나 이같은 문제도 21절을 보면 해결된다.
21절에서는 그가 거의 회복되어 병거를 타고 예후를 맞으러 나온 사실을 묘사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전쟁에서 부상당한 뒤 회복한 전쟁 영웅인 요람이 예후의 반역으로 순식간에 죽임을 당하고 사태가 반란의 성공으로 귀결되고 있음은 무엇 때문이라고 설명해야 하는가?
당시의 정황을 통해 상황을 유추하면 군인들의 왕에 대한 감정은 경멸이었고 예후에 대한 감정 온 존경과 칭찬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본문에서는 이같은 예후에 대한 군부의 지지가 이루어진 이유에 대해서 본서 저자는 이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같은 분위기가 형성된 원인은 15, 16절, 그러고 21절의 내용을 통해 부분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당시 전쟁에서 요람은 아람의 집중 공격으로 부상을 당한다(8:28). 그런데 그는 이 일을 계기로 군대와 자신의 신복들은 전장에 놔두고 상처가 거의 치유된 상황에서도(21절) 여름 궁전이 있는 이스르엘에 머물면서 휴양을 즐겼던 것으로 보여진다. 요람 왕의 이러한 행동은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선 군인들에게는 사기를 떨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 반면 이같은 요람의 처신과는 달러 예후는 군을 움직이는 핵심 주체로 이 전쟁에서 상당한 공적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이러한 요람과 예후에 대한 군부의 감정은 본문에 이어지는 13절의 내용을 통해 표면화된다. 즉 선지 생도를 만나고 나온 예후가 자신을 입을 통해 여호와의 신탁을 전하자 이를 들은 군부의 지도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옷을 급히 취하여 예후의 발 밑에 깔고 그를 왕으로 선언하고 충성을 맹세했던 것이다.
⇒ 이는 군부의 마음이 예후에게 이미 기울어져 있었음을 반영해 준다. 이런 전폭적인 군부의 지지가 있었기에 예후의 혁명, 즉 아합 가문의 숙정 작업은 순식간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장에서의 군부의 동태가 예후의 반역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하나의 요소로 작용 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상당한 개연성을 갖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궁극적으로는 아합 가문을 심판하시기 위해 때를 정하시고 이를 이루어 가셨던 하나님의 섭리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본문에서 다른 모든 요소를 배제하고 선지자의 신탁 이후 예후의 반란을 군부에서 기정 사실화하고 예후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 역시도 이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나온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13절, 무리가 .. 급히 자기 의복을 취하여 바닥에 깔았음
군대 지도자들의 반응이 예후의 말을 들은 후 즉각적으로 이루어졌음
⇒ 원문에 다음 동사가 연속적으로 빠르게 진행됨을 나타냄 (1)그리고 그들이 서둘렀다. 2)자신의 의복을 취하였다 3)그리고 그들은 돌계단 위 그 아래에 놓았다’)
이처럼 그들의 행동이 즉각적이고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 군대 내에서 요람 왕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었었으며, 예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사전에 어느 정도 전척되어 있던 상태였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본문에서 군대 지도자들이 자신들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예후가 앉아 있던 섬돌 위에 깐 것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장면이다.
⇒ 단지 유사한 장면이 마21:8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본문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겉옷을 길에 편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무리들이 겉옷을 길에 편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한다는 의미를 지님 ⇒ 이는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보내기 위하여 모여든 무리들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를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야, 곧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야로 잘못 인식한 결과였다.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도 군대 지도자들이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예후의 자리에 깐 행위는 예후를 왕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상징적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겉옷은 = 인격과 권위의 상정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대 지도자들이 자신의 겉옷을 예후를 위해 깔았다는 것은 자신의 인격과 권위를 바닥에 내려놓음으로써 왕으로서의 예후의 권위를 최대한으로 드높인 일종의 의식적 행위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예후가 서 있던 자리 위에 자신들의 옷을 깔고 예후를 거기에 세운 후 왕으로 선포한 것은 왕의 보좌가 그곳에 없었기 때문에 행해진 임시 조치였다.
나팔을 불며 가로되…
당시 군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형식적인 의례를 갖추어 예후를 왕으로 추대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