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5월 11일 목요일 왕하14:17-22 유다 왕 아마샤가 죽다(대하 25:25-28)

Jeehyun 2023. 5. 12. 09:00

맥체인성경읽기

민수기 20, 시편 58, 59, 이사야 9:8-10:4, 야고보서 3

묵상구절

14:17 이스라엘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죽은 후에도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십오 년간을 생존하였더라

14:18 아마샤의 남은 행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4:19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그를 반역한 고로 그가 라기스로 도망하였더니 반역한 무리가 사람을 라기스로 따라 보내 그를 거기서 죽이게 하고

14:20 그 시체를 말에 실어다가 예루살렘에서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하니라

14:21 유다 온 백성이 아사랴를 그의 아버지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으니 그 때에 그의 나이가 십육 세라

14:22 아마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잔 후에 아사랴가 엘랏을 건축하여 유다에 복귀시켰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 앞선 15, 16절에서 잠시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초점을 맞췄던 본서 저자는 본절에서부터 다시 남유다의 아마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앞에서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통치를 소개하며 이스라엘의 사료를 언 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본문단에서 저자의 실질적 관심은 유다의 아마샤에 있음을 보여준다.

본장 1절은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 제2년에 아마샤가 남유다의 왕위에 올랐고 예루살렘에서 29년을 치리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13:10에 의하면 요아스는 사마리아에서 16년을 치리하였으므로 아마샤는 요아스보다 15년을 더 오래 산 셈이 된다. 이는 본문에 기록된 연대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리고 2절에 의하면 아마샤는 나이 25세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그는 54세가 되던 해에 죽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왕들과 비교해 볼 때 그는 평균수명을 살았지만 사는 동안에 전쟁에서 패하여 북이스라엘의 포로로 끌려가는 굴욕적인 일을 경험하는 등 그다지 평탄한 길을 걷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그의 아버지처럼 신하들의 반역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맞이 하였다.

그렇다면 저자가 본절에서 아마샤가 15년을 더 생존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아마샤가 교만함에 대한 여호와의 징계로 북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참패하여 포로로 끌려갔다가 다시 해방되어 15년을 더 살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회개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음을 강조하기 위함dl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모반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고 밝히고 있는 19절의 기사에 암시되어 있다. 만약 아마샤가 북이스라엘의 포로에서 해방된 이후 15년을 여호와 앞에서 회개와 겸비의 시간으로 보냈다면, 이와 같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관련 구절인 대하 25:27은 아마샤가 여호와를 버렸던 처음의 배교 상태를 지속했으며 그 이유로 모반의 죽임을 당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아마샤의 모습은 그의 후손인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죽을 병에서 회복되어 15년의 생명 연장을 받고도(20:6) 바벨론 침공의 빌미를 제공하는 어러석음 저질렀던 모습(20:12-19)과 매우 유사하다. 본서 저자는 남유다의 왕들이 회복의 시간이 주어져도 회복하지 못하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열거하면서 이스라엘 회복의 가능성은 이제 왕들에게는 더 이상 없으며 오직 여호와께만 있음을 강조한다. 

2.유다 왕 아마샤의 죽음.

그는 자기를 정복한 왕보다도 15년이나 더 살았다(17절). 어떤 사람들은 치욕을 겪으면서도 완전히 죽지 않고 오래 살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로 굴욕을 당하게 하기 위해서이다(아마샤도 필경 그런 부류였다). 그의 행적이 그의 역대지략에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18절). 그러나 그것이 그의 존귀성을 드러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가 에돔을 정복했을 때 발휘한 잔인성과, 이스라엘 왕에게 무모한 도전을 벌인 그의 무례함을 위해서였다.

💡 열왕기서 기자는 아마샤의 일반 행적에 대헤서는 관심이 전혀 없으며, 오직 그의 신앙 상태와 그 신앙에 대한 여호와의 반응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그의 일반 행적에 대해 관심이 있는 독자는 유다 왕 역대 지략과 같은 책을 참고할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의 정치를 증오하던 자기의 신복에 의해서 살해되었다(19절). 예루살렘은 그에게 반역했다. 그가 어리석었고 허세를 부렸던 연고로 수치스런 폐허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라기스로 도망갔다. 그가 얼마나 오래 숨어 살 수 있으랴! 그는 마침내 라기스에서 살해되었다(19절).

💡 본서 저자가 굳어 모반의 주체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 것은
⇒ 궁극적으로 이 일이 인간의 도모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음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성경은 모반의 직접적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다만 대하 25:27 에서 아마샤가 모반에 외해 피살을 당하게 된 것은 그가 여호와를 버렸기 때문이라고만 언급하고 있다.
즉 ‘아마샤의 패역과 배반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아마샤 죽음의 근본적 원인만을 밝혀 독자들로 하여금 이 사건을 정치적 관점이 아니라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란 신학적 관점에서 보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샤가 모반자들의 칼날을 피해 ‘라기스'로 피신한 것은 이곳이 당시 유다 성읍 중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라기스: 예루살렘 남서쪽 약 48km에 위치한 요새화된 성읍. 본래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이전에도 가나안 사람들의 왕도 중 하나였을 만큼 유서깊은 도시. 예루살렘에 이어 유다에서 두번째로 큰 성읍이었을 것. 이 성읍은 장중한 성벽과 제방, 그리고 해자와 해자 외벽을 갖춘 하나의 큰 요새였고, 이곳이 이처럼 견고하게 요새화된 때는 르호보암 때로, 외세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대하11:9)

하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요새화된 성읍인 ‘라기스'는 군대의 손길로부터는 안전했을지 모르지만 신분을 위장한 자객의 손길로부터는 아마샤를 지켜줄 수 없었다.
아무리 견고한 요새에 몸을 피한다 할지라도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그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반역도들의 분노는 더 이상 연장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시체를 수레에 태워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왕실 묘소에 장례 지냈기 때문이다.

 💡 모반자들은 비록 치처적 목적으로 왕을 살해하기는 하였지만 민심의 향배를 보며 죽은 왕에 대하여 왕으로서의 예우를 갖추었다. 이러한 예우는 아마샤를 열조와 함께 다윗성에 장사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본문에서 예루살렘을 다윗성으로 표현한 것은 비록 실정을 하였지만 아마샤 역 시 다윗 왕의 후손이었으므로 그의 조상이 있는 왕실 묘에 묻히게 되었음을 보다 분명하게 나타내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모반자들이 아마샤를 다윗성에 장사한 것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모반에 대한 비난을 모면하기 위한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3.아사랴가 아마샤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죽은 지 12년이 지나서야 그렇게 되었다(23절과 2절을 비교해 보면). 아마샤는 여로보암 15년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사랴는 여로보암 27년(15:1)이 되어서야 비로소 통치권을 잡았던 것이다. 아사랴는 그의 아버지가 죽을 때에 겨우 4살이었다. 따라서 12년 간, 즉 그가 16세가 되기까지는 정권이 그의 보호자들의 손에 있었던 때문이다.

 💡 아사랴의 즉위에 있어서 특이한 점이란 무엇일까?

이는 ‘그 부친 아마샤를 대신하여' 와 ‘때에 나이 십육세라' 란 표현에서 암시받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열왕기에서는 ‘그 아들 ~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왕상 11:43 ;14;20.31 ;15:8,24 등)란 문구가 쓰이는 반면, 본절에서는 특이하게 ‘그 부친 ~를 대신하여'란 문구가 쓰였다. 이는 이때 다른 왕의 즉위와 상이한 점이 있었음을 암시하며, 그것은 선왕이 살아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아사랴가 16세에 즉위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15:1,2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아사랴는 B.C. 791-739년까지 52년간 통치를 하였다. 그러나 B.C. 791-767년까지는 부왕 아마샤와 공동 통치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공동 통치 기간은 24년 정도가 되며 단독 통치 기간은 28년 정도가 된다. 그렇다면 본절에 나오는 16세는 단독 통치의 시작 시점이 아니라 공동 통치의 시작 시점으로 보아야 한다. → 즉 아사랴는 16세에 공동 통치를 시작하였으며, 그로부터 24년이 지나 부왕 이죽은 후 다시 28년간 통치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아사랴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공동 통치를 시작하였을까?

그것은 아마샤의 유고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아마샤가 북이스라엘로 잡혀갔으며,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남유다에 통치권 공백이 생기자 백성들이 아사랴를 왕으로 삼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 그 부친 아마샤를 대신하여 란 표현이 나올 뿐 아니라 아사랴로 하여금 왕 위에 오르게 한 주체로 '유다 온 백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당시 유다 백성들은 많은 의논을 거쳐 아사라를 왕으로 삼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여 그를 즉위시켰을 것이다. ⇒ 하나님의 다윗 언약을 이유로.. 하나님의 언약을 부여잡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물론 하나님께서 언약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주신 것이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다스렸다(15:2). 그러나 그의 치세에 대한 이야기는 껑충 뛰어서 생략되어 버렸다. 단지 "아마샤가 그 열조와 함께 잔 후에, 그는 엘닷을 세웠다" (이 성은 에돔에 속해 있었으나, 아마 그의 아버지가 탈환했을 것이다. 7절)고 말했다(22절). 마치 아사랴의 치적 중에는 그 사건이 언급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사실이란 얘기다. 그는 아버지가 죽자 곧 엘닷 성읍을 건설했다.

💡 아사랴가 엘랏을 건축하여 유다에 돌렸더라

마치 16세에 왕위에 오른 아사랴가 그의 통치 기간 중에 했던 일이라고는 고작 엘랏을 건축하는 일뿐이었다는 식으로 본문을 부정적인 뉘앙스로 전달하고 있다. 즉 선왕이 하지 못했던 산당 제거와 같은 신앙적인 일에는 힘쓰지 않고,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는 통상로를 확보하는 외적인 일에만 전념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이는 마치 그의 조부인 요아스가 성전 보수공사와 같은 외적인 일에 전념했으나 끝내 여호와께 인정받지 못했던 것처럼(12장) 그 역시 동일한 결국을 맞이할 것임을 암시한다(15:4,5). 저자는 이같은 동일한 주제의 반복적 기술을 통해 남유다가 왕을 통해서는 회복이 불가능함을 암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