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9월 29일 금요일 묵상구절 대하16:1-6 <이스라엘과 유다의 충돌(왕상 15:17-22)>

Jeehyun 2023. 10. 3. 18:50

맥체인성경읽기

열왕기상 1, 갈라디아서 5, 에스겔 32, 시편 80

묵상구절

1 아사 왕 제삼십육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한지라

2 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내어다가 다메섹에 사는 아람 왕 벤하닷에게 보내며 이르되

3 내 아버지와 당신의 아버지 사이에와 같이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하자 내가 당신에게 은금을 보내노니 와서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 그가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4 벤하닷이 아사 왕의 말을 듣고 그의 군대 지휘관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성읍들을 치되 이욘과 단과 아벨마임과 납달리의 모든 국고성들을 쳤더니

5 바아사가 듣고 라마 건축하는 일을 포기하고 그 공사를 그친지라

6 아사 왕이 온 유다 무리를 거느리고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운반하여다가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 서론

남유다의 제3대 왕 아사(B.C. 911-8기년)의 행적에 대하여 기록된 14-16 장 가운데 마지막장인 본장은 그의 불신앙적 태도와 불행한 말년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저자는
앞선 14, 15장에서 아사의 긍정적인 면모를 소개하고 그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다고 평가하면서도(15:17), 본장에서는 그의 연약한 모습을 길게 기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더구나 본장에 소개되어 있는 아사의 불신앙적 태도가 여호와를 찾지 않았던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7,8,12절). 이는 본서 전체의 핵심 주제가 ‘여호와를 찾는 것'(12:5; 24;20; 28:9)이며, 아사와 관련해서도 그가 여호와를 찾는 인물이었음을 거듭 강조하여(15:2,4,12.13,15) 온 것과 크게 대조된다.

이러한 대조를 통하여 저자는 사람의 신앙심이 식어질 때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 여호와를 찾지 않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런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징계를 받게 된다. 저자는 여호와틀 찾으며 선을 행하면 축복을 받지만(15:15) 반대로 행할 때에는 큰 징계를 받는다는 교훈을 대조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하여 아사의 불신앙적 태도에 대한 것까지 상세히 기록하여 놓은 것이다. 

●아사의 어리석은 동맹(역대하 16:1-6)

이 사건의 연대와 열왕기 상의 역사와를 어떻게 조화시키나 하는 문제는 매우 난처하다.
바아사는 아사왕 26년에 사망하였다(왕상 16:8). 그렇다면 어떻게 이 일이 아사왕 36년에(그 때에는 바아사 가문은 이미 완전히 끊어지고 오므리가 왕위에 있었다.) 있을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그것은 아사 왕국 즉 유다 왕국의 36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르호보암의 통치 1년으로부터 계산하면 아사 치세 16년에 부합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15장 19절도 그런 식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아사왕 15년까지 더 이상 전쟁이 없으리라고 했던 15장 19절을 해석한다면 그 앞 구절(15장 10절)도 같은 아사의 15년에 있었는데, 어떻게 이것이 큰 일로 표현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여기에 기록된 아사의 실책이 있는 뒤(16장) 그는 전쟁을 하였다(9절)고 했다. 조세푸스(Josephus)는 그 사건을 아사왕 26년에다 두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역대하 16장을 가필한 자에게 실수가 있었다고 생각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인정한다면, 15장 19절의 계산은 용이하게 된다.

여기에 나오는 이 구절들은 우리가 이전에 본 것들이다(왕상 15:17 이하).

아사는 이 일에서 몇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 1 아사 왕 제삼십육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한지라

라마를 건축함 = 요새화 했다
바아사는 라마를 점령하자마자 곧바로 건축 작업에 들어갔음.
그러나 여기서 건축이라는 것온 불모지에 도시를 세운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기존 성읍을 더욱 견고하게 요새화하는 것을 가리킨다.

바아사가 침략한 이유는?
바아사가 이처럼 라마를 점령하여 요새화한 것은 라마가 지니는 군사적 중요성 때문이다. 이곳은 예루살렘 북쪽 6km, 기브아 북쪽 3km, 벧엘 남쪽 7km 지점에 있는 산지였으며 교통상의 요지였다. 따라서 복쪽에서 남쪽으로 가거나 반대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을 통과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유다로 남하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 위기감을 느낀 바아사가, 이곳을 점령하여 요새화함으로써 사람들의 남하를 막을 뿐 아니라 남유다에 대하여 군사 전략상 유리한 입장에 서고자 했을 것이다.

라마
이렇게 해서 건축된 라마는 등극할 때부터 호전적인 자세로 일관해 온 바아사의 남유다 압박과 침공을 더 용이하게 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 사용되었을 것. 이에 더하여 바아사는 본문 이후에 언급되는 것처럼 남북 이스라엘의 분열 이후 계속되어온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남유다 왕래를 막고자 하는 목적에서도 라마를 건측하였을 것이다.

1. 그는 이방왕 벤하닷과 동맹을 맺으며 자신을 과대평가한 것 등은 잘못이었다(3절).

그가 자신보다는 자기와 하나님의 언약과 또 자기 조상들과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더 의지하였더라면, 자기의 동맹을 그처럼 자랑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자기 조상이 시리아 왕족과 맺은 동맹을 그렇게 뽐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 2 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내어다가 다메섹에 사는 아람 왕 벤하닷에게 보내며 이르되

▶︎ 2-3절,
이스라엘의 2대 왕 바아사의 침입을 받아 국가적 위기에 처한 아사왕이 그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많은 돈을 들여 아람 왕에게 원조를 청하는 내용

아사의 처사가 올바른가?
아사 왕의 이러한 모습은 과거 애굽의 백만 대군을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물리친 그의 신앙(14:11)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음을 보여준다.

본 상황에서 아사의 죄는
아람과의 군사 동맹 체결 자체에 있지 않다. 신정 왕국 남유다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은 제쳐두고, 세상적인 방책만을 의지한 것이 그의 심각한 오류요 범죄였다. 더구나 아사 왕을 아람과의 동맹 채결을 위해 왕궁에 있는 은금도 부족하여 여호와의 전 곳간에 있는 은금까지 취하여 벤하닷에게 뇌물로 보냈다. 아무리 북이스라엘이 먼저 첨공해 왔다 하더라도 성전의 보물까지 갖다 바치며, 이방인에게 동족을 처도록 요청한 아사의 행위는 신정 왕국의 왕으로서 바른 처사라 할 수 없다.

왜 세상을 의지함이 범죄인가?
여호와의 백성이 위기의 상황에서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불신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전 곳간에서 은금을 취해 바침
왕상15:18에 따르면, ‘전부’ 갖다 바쳤다고 명시적으로 기록됨. 즉, 아사 왕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의 보물 창고에 들어 있는 은금을 모두 꺼내어 벤하닷에게 보냈음을 알 수 있다.

과거 두 차례 종교 개혁을 일으켰으며 하나님을 의지하여 세라의 백만 대군까지 물리친 아사의 신앙이 이처럼 쇠퇴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끊임없는 개혁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개혁이 이루어지자 이를 멈추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16:1의 ‘삼십육년’을 ‘이십육년’으로 바꾸어 이해한다면, 이 시점은 아사가 제2차 종교 개혁을 일으킨 때로부터 10년 이상이 흐른 이후가 된다. 10년이라는 평화의 기간 동안 아사의 신앙이 차차 식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거의 역사가 일차 독자들에게 주는 교훈은,
바벨론 포로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다는 사실, 혹은 성전을 재건하였다는 사실에만 만족하고 안주한다면
⇒ 신앙의 퇴보를 가져와 하나님께 범 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2.만약 그가 이스라엘의 전체적 영예를 온당하게 존중했더라면, 훗날에는 유다 자신에게도 말썽거리가 될지도 모를 그런 외국 군대를 불러들이며 공동의 적을 자기 나라로 끌어들이기보다는, 바아사를 돌이키게 할 다른 어떤 방책을 강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3.어떤 분노도 없이 단순한 뇌물의 공세로 인해 바아사와의 동맹을 파기한 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이 벤하닷의 죄악이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벤하닷을 사주하여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은 아사의 죄악이었다. 왕이나 나라의 공신력이 그렇게 값싸게 타락되어서는 아니 된다.

💡 3 내 아버지와 당신의 아버지 사이에와 같이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하자 내가 당신에게 은금을 보내노니 와서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 그가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약조(언약-’뻬리트’)
‘자르다’ 라는 단어에서 유래.
여기에는 둘로 자른 제물 사이를 통과함으로 이루어전 고대 근동의 언약 체걸 관습이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언약 체결 관습은 언약의 한 당사자 중 한명이 언약을 파기한다면 그도 그 제물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처럼 이 언약은 언약 체결 당사자간의 의무 어행을 철저히 요구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의무 이행은 일방적언 것이 아닌 쌍방적인 것. 아사와 벤하닷 사이에 맺게 될 언약에서 그들이 서로 이행해야 할 의무는 — 군사 지원에 관한 것이다.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
본문을 직역하면, ‘바아사와 함께(한) 언약을 철저히 파괴시켜라’. 이 구절은 아람 왕 벤하닷과 이스라엘 왕 바아사 사이에 이미 체결된 언약이 있었음을 암시함. 그것은 상호 불가침 조약이며 상호 군사적 원조 동맹이었을 것. 병행 구절인 왕상 15:19을 보면 당시 벤하닷은 북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남유다와도 동맹을 맺고 있었다. 이처럼 아람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와 모두 동맹을 맺고 있었으나, 북이스라엘의 침공으로 다급해진 아사는 아람과 북이스라엘 간의 언약 파기를 강하게 요청하고 있는 것.

약조
= 원칙적으로 벤하닷은 바아사와 세운 언약을 목숨을 걸고 이행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는 벤하닷에게 그것을 철저히 파괴해 버리라고 요청하고 있다.

‘깨뜨려’
철저히 분쇄하고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아사는 어마어마한 자금을 뇌물로 준비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이 당당하게 요구를 할 수 있었다. 그는 밴하닷이 바아사와의 언약 파기로 인한 외교상의 피해보다는 자신이 제시한 뇌물에 더 무게를 두어 자신의 제의를 받아 들일 것을 확신하였던 것이다. 그는 벤하닷이 이스라엘의 북쪽을 치게 되면 라마에 와 있는 바아사가 자신의 왕국을 방어하기 위해 기수를 돌려 라마에서 돌아갈 것을 계산하여 본절과 같이 요구한 것이다. 

4.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여호와의 전에서 금과 은을 꺼낸 것은 죄를 가중시킨 것이다(2절).

그의 세속적 정략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성전이 약탈되어야만 했던가? 하나님을 자기 편에 가담시키고 하나님을 자기의 우군으로 삼으려면 차라리 여호와의 전에 예물을 바치고 기도와 간구를 드렸어야 했을 것이다. 그랬다고 하면, 그는 이런 비용을 들여서 벤하닷을 자기 편으로 삼는 따위의 일은 할 필요가 없었다.

5. 벤하닷의 군대가 이스라엘의 성읍들에게 부당하게 입힌 온갖 피해, 즉 그들이 흘린 모든 피와 노략한 전리품에 대해 아사는 전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면 좋을뻔 하였다(4절).

아마 아사도 그들이 사태를 그렇게까지 심하게 몰고 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딴 사람들을 범죄하도록 끌어들이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도 못하며 그것이 어디에서 끝날지도 모르는 법이다. 죄악의 시작은 물이 새어들어오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계획만은 성공하였다. 벤하닷은 바아사를 강력히 견제하여 그로 하여금 라마 건축공사를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고, 자기 나라의 북쪽을 방위하는 일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이로 인해 아사는 바아사의 축성 공사를 파괴할 수 있는 기회뿐만 아니라, 그 재료까지도 탈취해서 자기의 것으로 전용해 쓸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 4 벤하닷이 아사 왕의 말을 듣고 그의 군대 지휘관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성읍들을 치되 이욘과 단과 아벨마임과 납달리의 모든 국고성들을 쳤더니

아사와의 언약을 계속헤서 지키는 데서 오는 이익과 아사의 돈을 받고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데서 오는 이익을 저울질하던 바아사는, 최종적으로 바아사와의 언약을 깨뜨리고 아사를 도와 북이스라엘을 치기로 결정했다.

벤하닷이 아사를 돕기로 결정한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막대한 자금이 대가로 주어지기 때문이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무방비 상태에 있는 북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써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바 영토를 확장하고 무역로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

⇒ 결국 아사는 벤하닷에게 북이스라엘 침공의 명분을 제공해 준 셈이다.
철저하게 자신과 나라의 이익만을 고려한 그의 이러한 선택은 — 북이스라엘 바아사와의 언약과 신의를 헌신짝처럼 내던져 버리는 비열한 짓이었다.

‘성읍드을 치되’
당시 이스라엘의 주력 부대는 모두 유다쪽의 라마에 가 있었기 때문에 벤하닷의 군사들은 이스라엘의 복쪽 지역을 매우 손쉽게 칠 수 있었다.

아벨마임과 납달리의 모든 국고성들을 쳤더니,
아람 왕 벤하닷이 친 이스라엘 성읍들은 모두 북이스라엘의 최북단 지역에 속하여 있었다. 특별히 이들 성읍들은 팔레스틴 북동 쪽에 있었던 아람국과 경계가 맞닿아 있었다. 왕상15:20 — 이욘, 단, 아벨벧마아가, 긴네렛 온 땅과 납달리 온 땅. 납달리의 모든 국고 성 과거 솔로몬 왕이 건측하였던 성들로서 복쪽 지방에서 나는 곡식들을 저장해 두는 성들이었다(8:6). 본절의 전반적 내용에 대하여는 왕상 15:20의 강해 설명을 보라. 아람의 벤하닷은 북이스라엘의 주력군이 남쪽의 라마 지역에 집걸하여 있는 틈을 타 상대적으로 취약한 이스라엘 최북단의 이 지역들을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로써 벤하닷은 남유다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곡창 지대이면서도 군사 전력상 중요하며 무역로 확보에 있어서도 중요한 요충지까지 얻을 수 있었다
💡 5 바아사가 듣고 라마 건축하는 일을 포기하고 그 공사를 그친지라

바아사는 아람의 군대가 이스라엘 북부 지역을 침공했다는 전같을 받고서 라마 건축하는 일을 즉시 중단하고 디르사로 향하였다.
사마리아가 건설되기 전까지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디르사는(왕상 16:8) 세점 북동쪽 약 11km에 위치한 성읍.
바아사는 언약을 파기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한 아람 왕 벤하닷을 응징하러 가지 아니하고 수도 방어룰 위해 디르사로 갔던 것이다.
💡 6 아사 왕이 온 유다 무리를 거느리고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운반하여다가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더라

벤하닷과의 공조가 성공하여 라마로부터 바아사가 떠나자 유다 왕 아사는 유다 백성들을 동원하여 라마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아사가 건측하기 위해 남긴 돌과 나무들을 취하여 라마 주번의 성읍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했다.

게바
예루살렘 북동쪽 약 9km, 라마 동쪽 약 3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성읍이다(수 18:24). 이곳은 원래 레위 사람들에게 할당된 성읍으로 유다 왕국의 복쪽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왕하 23:8). 바벨론 포로 귀환 후 베냐민 지파에게 할당되었으며(스 2:26; 느 7:30), 레위 사람들 가운데 노래하는 사람들이 거주하였다(느 12:29).

미스바
이 성읍은 또한 사사 시대 말기, 왕정 시대 직전 선지자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위하여 순회하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삼상 7:16).

본서의 저자는 아사 왕이 두 성읍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다'라고 기록하였는데, 이런 표현은 1절의 라마 건측과 마찬 가지로 성읍을 새로이 건축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존의 성읍을 요새화하였다는 의미이다.

아사가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한 이유는
⇒ 바아사의 남진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기 위함이었다.

렘 41:9에 의하면 아사가 미스바에 바아사를 두려워하여 구덩이를 왔음을 언급하는데
→ 이는 전시에 장기간 전쟁을 위해 비측할 물을 담는 크고 깊은 웅덩이 정도로 추정된다(Lange).
⇒ 이는 아사가 바아사를 견제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하였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사가 이룬 이 일은 크고 확실한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불신앙적 조치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