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열왕기상 12, 빌립보서 3, 에스겔 42, 시편 94
묵상구절
1 여호사밧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2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아우들 아사랴와 여히엘과 스가랴와 아사랴와 미가엘과 스바댜는 다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들이라 3 그의 아버지가 그들에게는 은금과 보물과 유다 견고한 성읍들을 선물로 후히 주었고 여호람은 장자이므로 왕위를 주었더니 4 여호람이 그의 아버지의 왕국을 다스리게 되어 세력을 얻은 후에 그의 모든 아우들과 이스라엘 방백들 중 몇 사람을 칼로 죽였더라 5 여호람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삼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니라 6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7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 8 여호람 때에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지배하에서 벗어나 자기 위에 왕을 세우므로 9 여호람이 지휘관들과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출정하였더니 밤에 일어나서 자기를 에워싼 에돔 사람과 그 병거의 지휘관들을 쳤더라 10 이와 같이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지배하에서 벗어났더니 오늘까지 그러하였으며 그 때에 립나도 배반하여 여호람의 지배 하에서 벗어났으니 이는 그가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더라
11 여호람이 또 유다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예루살렘 주민으로 음행하게 하고 또 유다를 미혹하게 하였으므로 12 선지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되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네 아비 여호사밧의 길과 유다 왕 아사의 길로 행하지 아니하고 13 오직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음행하게 하기를 아합의 집이 음행하듯 하며 또 네 아비 집에서 너보다 착한 아우들을 죽였으니 14 여호와가 네 백성과 네 자녀들과 네 아내들과 네 모든 재물을 큰 재앙으로 치시리라 15 또 너는 창자에 중병이 들고 그 병이 날로 중하여 창자가 빠져나오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16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들과 구스에서 가까운 아라비아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키사 여호람을 치게 하셨으므로 17 그들이 올라와서 유다를 침략하여 왕궁의 모든 재물과 그의 아들들과 아내들을 탈취하였으므로 막내 아들 여호아하스 외에는 한 아들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18 이 모든 일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람을 치사 능히 고치지 못할 병이 그 창자에 들게 하셨으므로 19 여러 날 후 이 년 만에 그의 창자가 그 병으로 말미암아 빠져나오매 그가 그 심한 병으로 죽으니 백성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분향하던 것 같이 그에게 분향하지 아니하였으며 20 여호람이 삼십이 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그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하였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주석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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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4장
- 남북 분열 왕국 가운데 다윗 언약을 계승한 왕조인 남유다 왕국의 20대 왕의 통치를 중심으로 하여 선민의 역사를 다루는 역대하 제2부 10-36장의 연속 부분.
- 남유다 제4대 왕인 여호사밧의 통치에 대하여 다루는 17-20장에 이어 남유다 제5-8대 의 네 왕의 통치에 대하여 다룸.
이를 개관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 21:1-20의 두 문단 : 남유다 제5대 왕인 여호람의 통치에 대하여.
- 1- 10절: 여호람의 악행 및 에돔과 립나의 배반에 대하여.
- 11-20절: 여호람의 악행에 대한 엘리야의 책망과 심판 예언 및 성취에 대하여.
여호람
- B.C. 848-841년까지 8년 간 통치, 즉위 초부터 시작하여 그의 통치 기간 내내 그의 조부인 아사나 부친인 여호사밧과는 달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 그는 자신의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피를 나눈 형제들을 살륙하는가 하면,
-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 숭배에 빠지는 죄를 범하게 하였고,
- 자신의 그러한 정책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가차없이 죽이기까지 하였다.
성경은 이러한 그의 악행의 원인을 그의 아내의 영향에서 찾고 있다.
- 일찍이 여호람의 부친이었던 여호사밧은 북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과 결혼 동맹을 체결하였다. 즉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아함의 딸 아달랴가 정략 결혼한 것이다.
- 그런데 이러한 결혼 동맹은 정치•종교적으로 남유다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가져오게 되었다.
- 아달랴가 여호람을 충동질하여 북이스라엘 아합 왕가의 인본주의적 통치 이념과 우상 숭배 정책을 본받게 함으로써 → 여호람은 왕권 강화를 이유로 형제들을 살륙하고 여호와 신앙 대신 북이스라엘의 바알 숭배를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여호람외 타락은 하나님의 징계를 불러왔다.
- 하나님은 에돔과 립나로 하여금 남유다를 배신하게 하였다.
하지만 여호람은 이러한 징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악한 길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시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람을 책망하고 그에게 심판을 경고하셨다.
하나님의 경고는 두 가지였다.
- 하나는 그 의 백성과 자녀와 아내들과 재물을 치실 것이라는 것,
- 다른 하나는 그가 탈장으로 인하여 죽게 되리라는 것.
이 예언은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 즉 하나님은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로 남유다를 침공하여 왕궁의 모든 재물과 여호람의 아내들과 자녀들을 치게 하시고, 또 그 자신 역시 후에 탈장으로 죽게 하신 것이다.
이러한 여호람외 통치 기사가 가르쳐 주는 바,
-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가장 원론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전하여 준다.
그런데 저자는 여호람의 악행을 지적하면서, 그러한 여호람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7절)*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 하나님께서 악을 행한 여호람에 대한 심판으로 그의 모든 재물과 아내와 자녀들을 멸하시면서도,
- 오직 한 아들 아하시야만큼은 살려두시어 왕조를 잇게 하신 사실과,
- 아하시야 사후 아달랴가 다윗의 씨를 진멸할 때에 — 요아스의 생명을 보존시켜 다윗의 위를 잇게 하신 사실을 통해 입증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성과 언약의 영원성을 확인하게 된다.
- 실로 인간은
- 연약하고 불완전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늘 실패하게 마련이지만,
- 하나님은
- 언약에 신실하셔서 한번 주신 언약에 대해서는 언약의 한편 대상자인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성취하신다.
- 그리고 여기에 우리가 늘 실패하는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 여호람의 악정(역대하 21:1-11)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 수 있다.
❖ 1-4절 : 여호사밧의 죽음과 여호람 통치기에 있었던 골육상잔
Ⅰ. 여호사밧은 여호람에게 대해 매우 조심성 있고 관대한 아버지였다.
그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이 여기 나와 있다(1-3).
그들은 여호람보다 더 훌륭한 자들로서 매우 훌륭한 지혜와 덕을 갖추었고 그들의 학식에 맞는 행위를 한 자들이라고 했다(13절).
그러나 여호람은 그들을 거역했다. 그들은 매우 유망한 자들이었으며, 다른 어떤 아들도 여호람보다는 왕관을 물려받기에 더 합당했다. 그러나 여호람이 장자라는 이유로(3절) 아버지는 그에게 나라를 물려주었고, 그의 형제들에게도 몫을 분배하며 편안히 살게 하였고, 그들이 여호람에게 귀찮게 굴지 않도록 했다. 아브라함도 이삭을 자기의 상속자로 삼았을 때 다른 아들들에게도 선물을 나누어 주었었다.
이 점에 있어서 여호사밧은 그의 아들에게 매우 친절했으며 공평했다. 따라서 그의 아들도 이러한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를 본 받았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부모의 은덕을 가장 많이 입은 자식들이 오히려 별로 고마운 줄 모른다는 사실을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여호사밧이 자기 백성들에 대해서 볼 때 이 일을 현명하게 잘 했는지, 또 그들에게 공정하게 했는지, 그것은 나로서는 말할 수 없다. 장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분배받을 때 다른 아들의 두 배의 몫을 받게 되어 있었다(신 21:17). 그러나 만일 장자가 통치자로서 적합치 않으며(통치는 백성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행한 모든 것을 그르칠 것 같다고 생각되면, 그를 제쳐놓고 유망하며 우상 숭배에 치우치지 않는 그 다음 아들을 택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권력은 신성한 것이다.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훌륭한 일도 할 수 있고 해로운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Detur digniori-받을 만한 자에게 그것(권력)을 주자. Salus populi suprema lex-무엇보다도 먼저 백성들의 안전을 고려해야 한다.
💡 21:1 여호사밧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여호사밧의 죽음
역대기 저자는 여호사밧의 죽음을 간단히 기술함
이는 제1대 왕 르호보암이나(12:16) 제2대 왕 아비야와(14:1) 마찬가지로 ‘~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성에 장사되고’ 란 정형적 문구와 유사하게 기록되었으며, 여기에 ‘그 열조 와 함께' 란 문구만 한번 더 추가되었을 뿐이다.
아사 왕 기록과의 차이
이는 제3대 왕 아사의 죽음에 대하여 본서 저자가 “아사가 위에 있은 지 사십일년에 죽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성에 자기를 위하여 과 두었던 묘실에 무리가 장사하되 그 시체를 법대로 만든 각양 향재들을 가득 채운 상에 두고 또 위하여 많이 분향하였더라"(16:13,14)고 장황하게 기록한 것과 비교된다.
간단히 기록한 이유
이는 여호사밧이 선정을 베풀었고, 백성들에게 율법을 교육하였으며, 사법 제도를 정비하고 모압 연합군의 침공시 신앙으로 이를 격퇴하는 등 선한 면모를 많이 보였지만, 반대로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과 아하시야와 더불어 긴밀한 관계를 가짐으로써 — 남유다 왕국에 큰 재난을 자초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제5대 왕 여호람의 악행이나 제6대 왕 아하시야의 악행, 그러고 제7대 왕 아달랴가 즉위하여 다윗 왕조를 멸절시키려 한 것이 모두 — 근원적으로는 여호사밧이 북왕국의 우상 숭배자 아합 가문과 연혼함으로써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서 저자는 여호사밧의 큰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책이 미친 영향력 역시 너무 컸기 때문에 그의 죽음과 장사에 대하여 간단하게 기술했다고 볼 수 있다.
여호람
여호사밧에 뒤이어 유다 제5대 왕이 된 여호람은 재위 8년 동안 실정만을 거듭하였다.
그는 부친 여호사밧과는 판이하게 여호와 앞에 악한 자였으며, 그의 모든 동생들을 다 죽이고 외조부인 아합의 행위를 따랐으며, 국토 여러 곳에 산당을 세워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 숭배를 하도록 적국 장려하였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비참하게 죽어갔으며, 그 시신은 열왕의 묘실에도 들지 못하는 수치를 당하였다. 이러한 모든 죄악과 수치와 비참함은 → 그가 우상 숭배자 아합과 이세벨의 사위였다는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 이러한 사례는 악한 자와 짝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교훈한다.
‘여호람'이라는 이름
‘여호와께서 일으키심'이라는 의미. 그러나 그는 그의 이름 뜻에 걸맞지 않게 여호와로부터 일으킴을 받지 못하였고, 오히려 자기 자신과 자신이 통치하여 온전히 세워야 할 나라를 타락의 나락에 빠뜨리고 말았다.
💡 21:2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아우들 아사랴와 여히엘과 스가랴와 아사랴와 미가엘과 스바댜는 다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들이라
여호사바의 일곱 아들의 이름에는 — 모두 '여호와', 또는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들어가 있다.
여호사밧은 그 일곱 아들의 이름
'여호와께서 일으키셨다', '여호와께서 도우셨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 '여호와께서 기억하셨다’, '여호와께서 도우셨다', ‘누가 하나님 과 같은가?', '여호와께서 심판하셨다'
라는 이름으로 지음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투철한 신앙심을 나타냈으며, 그 아들들이 일평생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신앙 고백적인 의미를 담아 자녀들의 이름을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상관없이 우상 숭배자인 아합 가문과 교제하고 심지어 자기 아들을 아합의 딸과 혼인시킴으로 남유다의 신앙적 타락을 조장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장자인 여호람은 결국 동생들을 모두 살륙하는 악을 자행하였고, 우상 숭배자로 하나님을 떠나서 악행을 일삼다가 생을 마치고 말았다.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이라’
본서 저자는 여기에서 의도적으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록하였다. 그것은 바로 여호사밧이 신정 왕국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잇는 다윗의 직통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 21:3 그의 아버지가 그들에게는 은금과 보물과 유다 견고한 성읍들을 선물로 후히 주었고 여호람은 장자이므로 왕위를 주었더니
본문에서는 여호사밧의 지혜로움이 잘 드러난다.
여호사밧은 왕위를 계승하는 여호람 외의 다른 아들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권력 투쟁을 일삼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그들에게 많은 재산을 분배하여 유다의 중요한 성읍에 흩어져 살게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과거 르호보암이 사용하였던 정책(11:23)과 동일한 것이었다. 원문은 여호사밧이 장자인 여호람 외에 그의 아드들로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에 흩어져 살게 하였으며, 더불어 은과 금과 보물들을 매우 많이 선사하였음을 의미한다.
여호사밧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준 이러한 선물은 분명 그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얻은 결과물일 것이다.
이는 앞서 20장에 기록된 바 모압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얻은 탈취물 등으로 인해 남유다가 부요와 태평 성대를 누렸다는 내용을 통해서도 유추해 볼 수 있다(20:24-30). 그러나 여호사밧은 자기 아들들에게 물질적 유산은 풍부하게 남겼지만, 정작 남겨주어야 할 것은 전해 주지 못하였다. 그것은 바로 신앙적 유산이었다. 그는 축복의 결과만을 남겼을 뿐 축복을 가 져다주는 근본 원인이 되는 신앙을 남기지 못한 것이다. 이는 마치 솔로몬이 그 아들 르호보암에게 부강한 나라는 남겼지만 신앙적 유산을 올바로 남겨주지 못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이 본문을 읽는 독자들은 분명 솔로몬이 바른 신앙을 전수하지 않고 물질적인 풍요만 남겨준 결과 르호보암이 실정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남북이 분열되었을 뿐 아니라(왕상 12:19,20) 애굽 왕 시삭의 침공으로 그 많던 물질도 하루아침에 상실하고 만 것(왕상 14:25,26)을 기억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호사밧이 그의 아들들에게 남겨준 것 역시 여호람의 악정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일환으로 찾아든 이방의 침공으로 말미암아 허무한 것이 되고 만다(4,12-17절). 본서 저자는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해 참으로 선민 이스라엘이 무엇을 소중하게 간직해야 하고 그 후손에게 전수해야 하는지를 각인시켜 주고 있다.
장자 여호람에게 유다 왕국 통치권을 물려줌
한글 개역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후’ 라는 단어는 여호람이 장자라는 사실을 강조함.
고대 근동 사회에서장자는 아버지 의 기업과 가문외 이름을 승계하는 특권이 있었다. 이런 전통에 따라 여호람은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자연스럽게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호람의 왕위 계승은 인위적인 절차상에 있어서는 문제가 없지만,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분명 문제 있는 것이었다.
본래 이스라엘은 신정 국가이기 때문에 -장자나 차자의 구분없이 -하나님이 임명하는 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옳다. 그 대표적인 실례로 다윗이나 솔로몬 등을 들 수 있다. 다윗의 경우 본래 왕좌에 앉을 아무런 인간적 조건도 갖추지 못하였다. 또 그는 자기 집에서도 말째 아들에 불과하였고 7명이나 되는 형들까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예선하셨기 때문에 그로 인해 하나님이 폐하신 사울의 자리, 즉 신정 왕국 이스라엘의 통치자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삼상 28:17; 왕상 14:8). 솔로몬의 경우도 다윗의 막내아들로 여겨졌으며 그 위에는 그보다 더 나이가 많은 형제들이 여럿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왕이 될 수 있 었던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 때문이었다. 이런 신정 왕국 이스라엘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 여호람이 장자였기 때문에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본문의 내용은 독자들에게 불길한 예감을 던져 준다.
Ⅱ. 여호람은 자기 아버지의 아들들에게 매우 잔인한 형제였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형제들을 모두 칼로 죽여버렸다.
그릇된 혐의나 율법에 의한 트집 아니면 암살에 의해 죽였다. 그는 형제들이 없어지기 전까지는 자기의 정치적 위치가 안전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여, 어떤 악한 자의 손을 빌려 그들을 모두 죽이도록 했을 것이다.
악의를 지닌 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시기한다. 여호람은 가인이 아벨을 미워하고 죽인 것과 같은 이유에서 그의 형제들을 미워하고 죽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건한 태도가 자기의 불경건함을 비난받게 했고, 그들을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반면에 자기는 존경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여호람은 그들과 더불어 그들을 지지하고 그들의 복수를 갚을 것같이 보였던 이스라엘의 여러 방백들도 죽였다. 여호와께 대한 선한 지식을 가르쳤던 유다의 방백들이(17:7) 본문에는 앞에서의 "이스라엘의 족장" (19:8)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방백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야말로 참된 이스라엘인이며 흠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인자한 아버지가 물려 준 칼로 이 사악한 아들은 그들의 배를 찔렀다. 이처럼 "피로 나라를 건설하는" 자는 화가 있을 것이다(합 2:12). 그러한 기초는 지붕까지도 무너져 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 21:4 여호람이 그의 아버지의 왕국을 다스리게 되어 세력을 얻은 후에 그의 모든 아우들과 이스라엘 방백들 중 몇 사람을 칼로 죽였더라
‘세력을 얻은 후에’
세력을 얻다 원형 ‘하자크’ 본래 의미: ‘강하다’, ‘붙드다’ 비유적 의미: 마음의 강퍅함과 완악함. 직역하면, ‘그리고 그가 그 스스로를 강하게 하였다’ 이는 정치적 측면에서 여호람이 그의 왕권을 견고하게 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비유적 측면에서 보면, 여호람이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강팍하게 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모든 아우들과 이스라엘 방백들 중 몇 사람을 칼로 죽였더라’
그가 그의 동생들을 남김없이 살륙한 만행은 사사 시대에 스스로 왕이라 칭한 아비멜렉이 그의 형제 칠십명을 한 반석에서 죽인 것(삿 9;5)과 흡사하다.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통치권을 잡은 자가 반대파 및 통치의 잠재적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세력을 제거하는 것은 흔허 있는 일이지만, 여호람과 같이 자기 친동생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일은 흔치 않다.
‘죽였더라’
원형 ‘하라그’ : 잔인하게 살륙하는 것을 나타냄.
출 32:27에서는 이 단어가 ‘도륙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되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여호람이 그 동생들을 얼마나 잔인무도하게 살륙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의 동생들이 무슨 악한 일을 했다거나 반역을 꾀했다거나 한 일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후에 선지자 엘리야는 여호람을 책망하면서 ‘너의 아비 집에서 너보다 선한 아우들을 죽였으니' (13절)라고 말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여호람은 형제들이 존재하는 것 자체를 자신에 대 한 위협으로 생각하고 만행을 저지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선하다'는 것이 도덕적 의미를 넘어서 종교적 의미도 지닌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들은 여호람과 달리 우상 숭배를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여호람은 자신의 종교 정책에 비협조적인 자들을 제거하는 중에 아우들을 죽였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방백 중 몇 사람’
선왕 여호사밧이 백성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웠던 방백들이(17:7) 우상 숭배를 조장한 여호람에 의하여 잔인하게 살륙되었음.
❖ 5-6절 : 여호람 통치 개요 및 평가
💡 21:5 여호람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삼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니라
여호사밧 재위 제17년째부터 공동 통치(왕하1:18; 3:1).
B.C.848년~ 단독 통치.
여호람의 악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살려두신 이유
그의 통치 기간은 여타의 유다 열왕들에 비할 때 그렇게 긴 기간은 아니다. 그러나 재위 초부터 마지막까지 악정을 일삼으며 유다를 영적으로 황폐화시킨 여호람이 8년 동안이나 남유다를 통치하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통치권을 얻자마자 무죄한 동생들및 방백들을 살륙하였고 유다 온 백성으로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한 악한 왕이었다.
그런 악인을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8 년 동안이나 살려두셨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아마 당시 유다에 있던 의로운 사람들은 그가 이처럼 악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통치에 대해 회의를 품기도 하였을 것이다(시 73편).
그러나 이와 같은 결과가 있게 된 것은 ⇒ 하나님께서 그런 악인에 대해서도 끝까지 인내하시는 자비로운 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자 그외 사망 2년 전에 그에게 심판의 불치병을 보내셨다(19절). 이처럼 하나님께서 악한 여호람에 대해 무려 6년 동안이나 심판 없이 인내하신 것은 그의 불의를 보지 못해서도 아니요, 그를 처벌할 힘이 없어서도 아니요, 다만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셨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여호람에게 6년이라는 기간을 회개의 기회로 주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람은 끝까지 악에서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마침내 재위 8 년에 불치병으로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Ⅲ. 여호람은 가장 사악한 왕이었다.
그는 자기 왕국을 더럽히고 타락시켰으며, 인자한 자기 아버지와 선조들이 이룩해 놓은 개혁을 파괴해 버렸다. "그는 아합의 집의 길로 행하였다" 고 했다(6절).
또한 그는 백성들이 자진해서 만들기를 두려워하던 산당을 만들어 다시 우상 숭배에 힘을 기울였다(11절).
💡 21:6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길’
본문에서는 비유적으로 사용되어,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나 사상을 의미한다. 즉 이 단어는 사람들이 자주 걸어 딱딱해진 길처럼, 습관적 생활이 쌓이고 쌓여 굳어진 생활양식을 일컫는다. 이러한 생활 양식은 곧 삶 그 자체를 지칭한다.
놀라운 것은 유다 왕 여호람이 유다 왕들의 생활 방식을 쫓지 않고, 이스라엘 왕들의 악한 삶의 자세를 무비판적으로 쫓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쫓았던 이스라엘 왕들의 삶의 방식은 곧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과 그를 뒤이은 왕들이 걸었던 길,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곳곳에 우상을 세워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떠나게 만드는 등 한마디로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한 모습이다. 바로 그러한 삶을 아합의 가문이 이어 받았는데, 여호람은 그의 장인 아합의 집이 행하던 대로 북이스라엘의 왕들의 길을 쫓았던 것이다.
여호람이 북이스라엘 왕들의 생활 방식을 쫓은 이유
⇒ ‘아달랴와의 결혼 때문’
아달랴는 바알과 아세라를 유난히 잘 섬기던 이세벨의 딸답게, 유다에 바알과 아세라 종교 문화를 가지고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 아달랴가 남편 여호람을 부추겨 아합 왕가의 인본주의적 통치 이념과 우상 숭배 정책을 본받게 함으로써 악을 행하게 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 그녀가 여호람 사후 그 아들 아하시야를 꾀어 악을 행하게 한 사실(22:3)을 통해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신앙에 근거하지 않은 잘못된 결혼이 유다 왕국에 큰 악을 몰고 온 셈이 되었다.
성도들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외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밸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14-16)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 왕하8:18 강해,
18절, ‘저가 .. “길(떼레크)로 행하여”
길
일반적 의미의 ‘도로'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성경에서는 ‘사람의 행위나 활동에 대한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노선'을 가리키는 은유적 용법으로 많이 사용. 예1) 시1:6 ‘의인의 길’, ‘악인의 길’. 여기서 ‘의인의 길'은 ‘여호와의 길'과 밀접하게 관계된다.
예2)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여호와의 도’를지키라'고 명령하여야 하는데(창18:19), 이는 하나님의 율법의 규례와 계명인 여호와의 도가 이 명령을 자녀에게 주는 부모 자신들의 인간적 권위보다 근본적이고 훨씬 높을 뿐 아니라 이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근거해 부모의 권위와 가정의 질서가 바르게 세워지기 때문이다.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 표현은 여호람이 남유다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의 왕들처럼 우상을 숭배하되, 아합의 집에 속한 왕들처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해 우상 숭배를 지지하고 있음을 강조(왕상 16:30~33). 이러한 범죄는 여호와만을 전적으로 의지 하지 않고 북이스라엘과의 정략 결혼을 통해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여호사밧의 어리석음이 빚어낸 결과였다.
본문은 궁극적으로 북이스라엘 왕조가 끊임없이 반복해 왔던 악한 우상 숭배를 다윗의 후손들인 유다 왕들도 적극적으로 본받고 있는 암울한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으며, 이를 통해 남북 두 왕조가 결국 동일한 운명에 처할 수 밖에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직역하면 ‘그리고 그는 여호와의 “눈들 안에서” 그 악을 행했다’
‘눈들 안에’ : ‘여호와의 목전에’, ‘여호와의 보시기에’
‘그 악’ : ‘깨뜨리다, 악하게 되다’ + ‘나쁜, 사아간, 해로운’ ⇒ 주로 도덕적 결함이나 잘못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
⇒ 이러한 표현을 통해 볼 때 여호람은 하나님 앞에서 종교적 범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결함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의 눈들 안에'로 직역되는 ‘떼에네 예흐와'라는 표현 속에서
→ 하나님께 대해 불순종하는 인간의 악한 모습들이 하나님의 눈동자에 마치 영상으로 그려지듯이 강한 시각적 이미지로 부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지전능하시고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신 하나님은 이처럼 개개인의 모든 행위들을 바로 눈앞에서 바라보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이같은 진리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시선을 속이면서 살아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시선을 감지하지도 못한 채 아에 하나님을 멸시하는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지극히 작고 은밀한 죄악까지도 세밀하게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은 결코 속일 수 없음을 명심하고 살아야 한다. 이처럼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살아가는 신전의식을 견지할 때 죄를 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의롭고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 그는 자기의 궁정이 있던 예루살렘의 주민들을 손쉽게 이 영적 음행에 끌어들였다.
"그는 그들을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도다" (계 2:20).
- 지방에 거하는 백성들을 여기에 끌어들이는 일은 다소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거짓된 아첨에 물들려하지 않은 자들은 강제로 그의 저주스런 우상 숭배에 동참하도록 요구되었던 것 같다. 그는 "또 유다를 미혹케 하였다" 고 했다. 그는 백성들을 바로 잡으라고 준 권력을 가지고 교회를 파괴하는 데에 사용했다.
❖ 8-10절 : 에돔과 립나의 독립
Ⅳ. 여호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숭배하지 않았을 때, 그의 신하들도 그에 대한 충성을 저버렸다.
💡 21:8 여호람 때에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지배하에서 벗어나 자기 위에 왕을 세우므로
본절에서부터 10절까지는 당시까지 유다와 관할 하에 있던 에돔과 립나가 유다의 통치권을 벗어나 독립하였다는 기사. 그 사건을 통해 유다의 국력은 전보다 약해졌는데, 이는 여호와를 버린 여호람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다윗에게 주신 언약을 지키고자 다윗 가문의 등불을 끄지는 않으셨으나, 패역한 여호람에게 상당한 정치적 타격을 주심으로 그를 징계하셨다.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지배하에서 벗어나’
직역하면 ‘에돔이 유다의 손 아래로부터 이탈하였다’
에돔
에돔이 유다의 통치권 아래 복속된 때는 다윗왕 때.
다윗은 염곡에서 에돔 사람 일만 팔천을 쳐죽이고 그곳에 수비대, 즉 총독부를 두어 그 나라를 속국으로 만들었었다(삼하 8 :13,14). 에돔은 그 때부터 정치적 자주권을 상실하였으며 그 상태가 여호람 왕 때까지 계속되었다. 물론 그들이 다윗 때부터 여호람 때까지 전혀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솔로몬의 치세 때에 에돔 사람 하닷이 난을 일으켰으나(왕상 11:14) 완전한 독립은 쟁취하지 못하였었고, 여호람의 부왕 여호사밧 왕 때에도 요단 동편의 다른 족속들과 동맹을 맺고 유다를 배반한 일이 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었다. 그런데 그들이 여호람 때에 자주 독립을 쟁취하게 된 것이다.
‘배반하여’
‘파솨으’ : 폭동을 일으켜 기존 지배력 세력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함. 그러므로 본문에는 상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 에돔 사람들은 유다에서 파견하여 자신들을 관할하게 하였던 총독부를 공격하여 뒤엎은 후에 독립은 선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유다의 국력은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1. 그에게 공물을 바치던 이방 나라들도 그렇게 했다. 에돔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켰고(8절), 그가 그들을 징벌했어도(9절), 그들은 복종하지 않았다(10절).
💡 21:9 여호람이 지휘관들과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출정하였더니 밤에 일어나서 자기를 에워싼 에돔 사람과 그 병거의 지휘관들을 쳤더라
‘여호람이 … 출정하여더니’
여호람은 요단강을 건너 먼 에돔 땅까지 진격하였음. 병행 구절에서는 ‘사일'까지 간 것으로 나온다(왕하 8:21).
‘자기를 에워싼’
여호람의 출정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에돔으로 진격한 그는 오히려 그의 장관들과 함께 에돔 사람들에게 포위당하고 만다.
영역본과 한글번역의 의미
차이 공동 번역을 비롯하여 많은 영어 번역본들은 본문을 한글 개역 성경과 다르게, 에돔이 여호람과 그의 병거와 장관들을 포위하였는데, 여호람이 병거 장관들과 함께 에돔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 것으로 번역하였다.
📌 왕하8:21 강해,
이스라엘에 병거가 도입된 시기는 다윗 왕 때였으며(삼하8:4; 대상18:14), 솔로몬왕 때에 와서는 많은 병거를 보유하여 전쟁에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호람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상황에서(18 절), 아무리 강력한 무기를 보유했다 해도 그가 가진 무기는 그를 승리케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병거'와 같은 강력한 무기를 소유했다고 하더라도 이처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여호람이 자기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치르는 전쟁은 패배로 귀결될 것이 분명하였다.
본문 전체는 여호람이 에돔군을 진멸하기 위해 공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에돔군에 의해 포위당한 상황에서 병거 장관들과 함께 그 포위망을 뚫기 위해 공격하는 난처한 상황을 묘사한 것. 여기서 우리는 18절에 나타난 여호람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이방 에돔을 통해 전쟁 발발 초기부터 여실히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에돔 군대에게 포위되었던 여호람의 군대가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자신들어 살던 유다 집을 향해 간신히 도망옴
원정에서 패하여 에돔으로 하여금 남유다에서 완전히 독립게 하는 부정적 결과를 얻었지만, 왕과 백성이 멸절되지 않고 집으로 평안히 귀환하는 긍정적 결과 역시 얻었다(왕상22:17.28). ⇒ 이는 여호와께서 18절에 나타난 여호람의 범죄에 대해서는 전쟁의 패배라는 결과를 주어 징계를 내리시되, ⇒ 19 절에 나타난 다윗과의 언약에 근거하여 여호람의 목숨은 부지하게 하시고 일반 백성들 역시 각기 자기 장막에 들어같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음을 의미한다.
2.그의 왕성의 한 성읍도 역시 반역했다. 립나가 반란을 일으켜(10절), 자유로이 나라를 이루고 그들의 왕을 세웠다(수 12:15).
하나님께서 왜 그것을 허용하셨으며 그들이 왜 그렇게 행했는가 하는 데에 대한 이유가 여기에 나와있다.
- 즉 여호람이 그의 조상의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자가 되어 그릇된 신들을 섬기게 되자, 자기들도 하나님과 하나님께 대한 자기들의 의무를 저버리는 자들이 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여호람에게 계속 복종할 수가 없었던 때문이다.
- 따라서 그들은 그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했다. 그가 하나님을 지지하는 동안은 그들도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버렸을 때는 그들도 그를 버렸다. 이러한 이유가 반란을 일으킨 그들을 정당화해 줄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일을 명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정당화시켜 줄 것이다.
💡 21:10 이와 같이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지배하에서 벗어났더니 오늘까지 그러하였으며 그 때에 립나도 배반하여 여호람의 지배 하에서 벗어났으니 이는 그가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더라
에돔 정벌 실패
본절은 여호람의 에돔 정벌이 철저히 실패로 끝났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여호람은 에돔의 반란을 평정하지 못하였다. 그 후로 제9대 왕 아마샤(왕하 14:7)와 제10대 왕 아사라(왕하 14:22)가 에돔의 일부를 장악하긴 하였으나 에돔이 유다의 통치권에 완전히 복속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런 독립 국가 상태가 포로 귀환 이후까지 이어졌다.
립나의 반역
‘그 때에’ 립나도 배반하여..
‘그 때에’ = ‘동시에’
립나의 유다 반역도 에돔의 반역과 때를 같이하여 일어났던 것.
립나
유다와 블레셋의 경계선상에 있었던 작은 도시 국가였던 립나.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당시 이스라엘에 정복당하였으며(수 12:15), 여호람 때에 독립을 쟁취하였다가, 훗날 히스기야 왕 때에 다시 유다에 정복되었다(왕하 19;8). 당시 여호람은 유다의 동서에서 동시에 반란이 일어났기에 이처럼 작은 도시 국가가 일으킨 반란도 쉽게 잠재우지 못하였던 것이다.
에돔과 립나의 반역의 이유 —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
본서의 저자는 제사장적 관점에서 신정 왕국에서 하나님을 대리하여 통치하는 왕들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그들 이 실패하고 많은 고난을 당한 것은 — 그들이 여호와를 등지고 악을 행한 데 대한 여호와의 징벌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하였으며, 본문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설한 것이다.
그가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더라
‘버리다’ (’아자브’)
(완료형) — 한 번 버린 후 두 번 다시 거들떠보지 않았다는 사실.
그가 하나님을 이렇게 미련 없이 버리게 된 이유,
하나님 없이 스스로 강성할 수 있다는 교만함과 하나님 대신 우상을 의지함으로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이 작용하였기 때문.
하나님은 이처럼 신앙을 저버리고 이에 대해 미련조차 갖지 않는 완악한 자들에게 마땅한 징벌을 가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악인이 악한 행실을 버리기 전까지 — 결코 강성할 수 없음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 7절 : 다윗의 집이 보존되는 까닭
Ⅴ.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집안과 맺은 언약을 깊이 생각하셨다. 그래서 비록 그 집안이 비참하게 부패하고 타락되었다 하더라도, 그 왕실 집안을 멸하지 않으셨다(7절).
이 일에 대해서는 앞에서 읽은 바 있다(왕하 18:19-22). 그 언약의 요지는, 다윗의 자손은 죄를 짓게 되겠지만, 그 언약은 결코 폐기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시 89:30 이하).
💡 21:7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
여호와께서 여호람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않으신 까닭.
무죄한 동생들을 모조리 살륙하고 백성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 하는 여호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악한 자였다. 그는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온갖 불의를 자행 한 자였다.
그러나 여호와는 그를 당장에 심판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가 비록 심판받아 마땅한 악인이었지만, 여호와의 언약을 받은 다윗 가문에 속한 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본서 저자는 여호와께서 멸하기를 즐겨하지 않으신 대상을 ‘여호람’이라 표현하지 않고 ‘다윗의 집' 이라 표현한 것이다. '다윗의 집'은 다윗의 가문, 즉 장차 메시야가 탄생하실 유다 지파 의 줄기를 나타낸다(마 1:6-11). 이로 보아 하나님은 여호람 개인에 대해 자비를 베푸셨다기보다, 다윗의 가문에 대해 자비를 베푸신 것이다. 이를 역으로 보면, 여호람이 은혜를 입은 이유는, 다만 다윗 가문의 후손이 라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여호와의 인내의 은혜를 입은 것이었다.
다윗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즐겨하지’ 아니하였음은
즐겨하다 (‘아바’) 의무적으로 요구되는 일을 자발적으로 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
악인에 대한 심판은 의와 정의로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상 필연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집에 대해 그 일을 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아니하셨음은’
‘로’ —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단어가 사용됨.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가문 멸하는 일을 얼마나 원치 않으셨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윗과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셔음이더라’
여호와께서 다윗의 가문 멸하기를 즐겨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집과 나라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그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게 유지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주셨다(삼하 7:16).
‘항상 등불을 주시겠다고’ 삼하7:16의 표현 ‘영원히 보전되고 .. 영원히 견고하리라’를 변경 제시한 것.
★ ‘등불’의 의미
1.문자적 의미
a.(’니르’) ‘반짝이다’ 란 의미의 어원에서 유래. 등잔의 심지에서 타오르는 작은 불.
b.일반적으로 등불이 집에 켜져 있다는 것 = 거기 거주하는 자가 있음을 나타낸다.
☛ 따라서 다윗과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 = 일차적으로 다윗 왕조의 존속을 암시하는 것.
2.구약 성경 내에서의 특별한 의미로 사용된 용례
a.성막의 성소 - 여호와께 날마다 켜야 했던 등잔불을 지칭하기도 함(출25:37; 27:20).
→ 그 등불은 영적으로 어두웠던 시기에도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삼상3:3).
b.다윗의 찬양
하나님이 직접 다윗의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로 비유되기도 하였다(삼하 2 2 :29).
c.예언
솔로몬을 반역해 열 지파를 이끌고 북이스라엘을 창건한 여로보암에게 주신 예언
: 하나님은 다윗에게 한 지파를 주어서 그에게 한 등불이 항상 하나님 앞에 있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고(왕상 11:36),
남유다 제2대 왕 아비얌이 여호와 앞에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은 다윗을 위하여 그에게 등불을 주셔서 그 아들을 세워 후사가 되게 하사 왕위를 견고케 하셨다고 하였다(왕상 15:4).
이러한 용례를 고려할 때에, 하나님이 다윗 가문에 등불을 주셨다는 것은 다윗 가문에서 난 인물의 지속적 왕위 계승을 나타내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왕권의 영원성 및 견고성을 나타내는 것.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하고 견고한 왕권은, 비록 인간이 연약함으로 인해 범죄하였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보존된다.
특히 ‘허하셨음'으로 번역된 '아마르'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허락하셨다는 의미가 아닌, 능동적으로 말씀하심으로 약속하셨다는 의미이다. 진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하므로 영원한 실효성을 가질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성취되어진다.
열왕기 병행구절과의 차이점(왕하8:19)
표현의 변화
‘유다’ → ‘다윗의 집’
‘그 종 다윗을 위하여' → ‘전에 다윗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 때문에’ 로 달리 표현됨.
이러한 표현상의 변화는 본서가 열왕기보다 하나님의 언약의 확실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해 준다.
본서 독자들에게 다가왔을 의미
이같은 본문의 언약적 확실성에 대한 표현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당시 일차 독자들에게 상당한 소망을 주었을 것이다. 다윗 왕조는 B.C. 586년 시드기야 왕을 끝으로 종말을 고한 것처럼 보였다(36:11-20). 그러나 70년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다시 귀환하였을 때에도 다윗 왕조는 부활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 다윗 왕조의 둥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았나 하는 회의에 잠겼을 것이다.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본서 저자는 일찍이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주셨던 그 언약을 본절에서 상기시킴으로써, 장차 다윗 왕조가 다시 그 왕권을 계승하여 영원히 견고하게 설 것이라는 소망을 주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기대는 결국 다윗의 가문에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마1:1-16; 2:2,6; 롬1:3).
❖ 11-15절 : 엘리야를 통한 여호람 책망과 심판 예언
💡 21:11 여호람이 또 유다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예루살렘 주민으로 음행하게 하고 또 유다를 미혹하게 하였으므로
‘또’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욱더’ 란 뉘앙스.
⇒ 이는 여호람이 그가 행한 악행에 대해 여호와로부터 징벌을 당한 후에도 깨닫지 못하고 전보다 더더욱 완악해져서 계속해서 범죄하고 있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부사.
1. 음행하게 함
이 동사의 본래 의미: ‘창기짓을 하다’라는 의미(창34:31; 38:24)
비유적 의미: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이방 우상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는 것을 가리킨다(레20:6; 삿8:33). 이는 우상숭배가 = 영적간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 또한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들과 정치적•경제적 이해 관계 때문에 여호와의 뜻에 어긋나는 교역을 하는 것을 = 영적 간음에 비유하기도 하였다(사 23:17; 겔 16:28).
➤ 여호람의 죄1
하나님을 대리하여 언약 백성을 통치하는 신정 왕국의 왕으로서 백성들을 신앙의 길, 여호와를 섬기는 길로 인도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거룩한 의무는 내팽개치고, 오히려 그 땅에 산당을 건축함으로써 그 백성들로 하여금 영적 간음을 범하도록 조장 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2. 미혹하게 함.
올바른 길에서 꾀어내어 그릇된 길로 가게 하는 것(신13:5) 본문에서 이 단어는 ⇒ 유다로 하여금 길을 잃게 만들 어 버렸다는 의미를 나타낸다(NRSV, made Judah go astray).
➤ 여호람의 죄2
이처럼 여호람은 소경이 되어 소경들을 인도함으로써 자신도 멸망하고 백성들도 환난 가운데로 밀어넣고 말았다(16,17절; 마15:14).
●여호람의 종말(역대하 21:12-20)
Ⅰ.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로 하여금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경고하도록 했다.
이것으로 보아 여호람이 왕위에 올라 자기의 사악한 정체를 폭로한 일은 엘리야 승천 전에 있었던 것 같다. 엘리야의 승천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된 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자로 서술된 엘리사가 여호사밧과 함께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왕하 3:11). 그러나 이 일은 엘리야가 땅 위에 살고 있던 동안에 있었던 것 같다. 이 이야기가 적당한 위치에 기록되지 못한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엘리야의 승천 이전에 여호사밧의 죽음과 여호람의 즉위를 읽게 되기 때문이다(왕상 22:50). 우리는 엘리야가 떠날 때가 가까워졌으므로 그 자신이 직접 여호람에게 갈 수는 없었지만, 여호람이 자기 형제들을 죽이는 사악한 일을 행한다는 것을 듣고서 글을 써 먼저 엘리사에게 그것을 전해주도록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여호람을 회개시키기 위해서였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한 결과로 어떤 일이 생기는가를 들려주어 그를 고발하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 의 이름으로 온 이 경고장은, 그가 다윗의 혈통이라는 사실을 들어서 그를 책망하였다.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었지만, 그러한 그가 이렇게 타락했다는 것은 더욱 분노할 만한 일이었다.
1. 그의 죄는 분명히 책망 받을 일이었다.
- 그는 하나님의 선한 길을 떠났다. 평화롭고 영예롭게 살다가 죽은 그의 선한 아버지와 조상들이 가르치고 명한 그 본보기를 따르지 않았다(12절).
💡 21:12 선지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되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네 아비 여호사밧의 길과 유다 왕 아사의 길로 행하지 아니하고
‘선지자 엘리야가 .. 글을 보내어’
직역하면 ,'그 때에 그 선지자 엘러야로부터 문서가 왔다(NASR Then a letter came from Elijah the prophet)’
(와우 계속법)으로 시작되는 본문, 이는 본절과 11절이 시간적, 내용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유다 왕 여호람이 그의 조부 아사와 부친 여호사밧과 달리 악으로 치닫는 삶을 산다는 소식은 유다 온 땅에 퍼져나갔으며, 당시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선지자 엘러야의 귀에까지 들어가서 엘리야는 그를 책망하며 여호와의 심판을 선언하는 편지를 쓰게 되었던 것. 엘리야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이름 뜻 당시를 대표하는 선지자 아합과 이세벨의 우상화 정책에 맞서 싸운 정의로운 선지자였다(왕상 18장).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여호람에게 자기 정체성을 먼저 일깨우시는 하나님 이 표현은 여호람이 —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바 있는 경건한 왕 다윗의 후손임을 상기시켜 준다. 그의 조부 아사 왕은 유다 왕들 중 최초로 종교 개혁을 단행한 왕이었고(14:1-5), 부친 여호사밧 역시 ’전심으로 여호와외 도를 행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는 평을 들은 왕이었다(17:6 ; 20:32). 그런 가문에서 후계자 교육을 받고 자란 여호람은 조부 내지는 부친에 견줄 만한 왕이 될 것으로 기대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은 여호람이 그의 조부와 부친의 길둘로 행치 않았다는 사실을 맨 먼저 지적하셨다.
‘네가 네 아비.. 길로 행하지 아니하고’
길 : (6절과 동일)
동일한 생활 방식이 쌓이고 쌓여 굳어진 사람들의 삶의 양식
여호람은 그의 아내 아달랴의 불경건하고 사악한 삶을 받아들여, ↔ 조부와 부친의 경건한 삶의 양식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는 거룩함을 요구하는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하지 않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 더 편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삶은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삶이나, but, 결국 그들을 멸망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비록 사람들이 즐겨 찾지는 않지만, 생명으로 인도 하는 좁고 협착한 길로 행하라고 권하신 것이다(마 7:13.14).
또 그는 경건치 못하고 악한 아합 집의 길을 따랐다.-그는 그의 나라에 우상을 세우고 그것을 섬기도록 백성들을 강요했다.-그리고 그의 형제들이 자기보다 훌륭하다는 이유로 그를 살해했다(13절). 이러한 것들이 바로 그를 징계해야 할 이유였다.
💡 21:13 오직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음행하게 하기를 아합의 집이 음행하듯 하며 또 네 아비 집에서 너보다 착한 아우들을 죽였으니
본문은 여호람의 범죄로 인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 모두가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앞서 여호람이 악한 길을 택하고 그 길을 걸어간 사실을 보도한 본서 저자는 이 길을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이 따라 걷게 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는 백성을 바른 신앙으로 이끌어야 할 왕이 →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그릇된 길을 걷게 될 때 → 백성들까지도 미혹에 빠뜨리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통해 열왕기서와 역대기서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바, 지도자의 바른 신앙 자세가 — 공동체 전체의 서고 넘어짐을 결정짓는다는 메시지를 다시금 들을 수 있다.
‘아합의 집이 음행하듯’ 하며..
아합의 집
일차적으로 아합 가문을 지칭. 그 가문에 대한 기사는 왕상 16-22장에 소개되어 있다. 열왕기 저자는 그 가문에 대해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라고 압축적으로 기록하였는데(왕상 16:30-33), → 이것이 바로 아합의 집이 걸었던 악행의 길이었다.
당시 우상 선지자들
아합 통치 당시 사마리아에는 왕궁에서 활동하던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이 있었다(왕상 18:19). 이는 그 우상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 숭배를 조장하고, 하나님의 길에서 완전히 떠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능히 짐작게 한다.
아합의 처 이세벨
그녀는 이스라엘에서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하였으며(왕상 18:4), 급기야 엘리야 선지 자까지 죽이려고 찾았다(왕상 19:2,10).
이와 같이 아합 가문은 → 하나님의 선민을 모두 우상의 자 녀들로 만드는 것을 과업으로 삼았는데, 유다 왕 여호람도 그들의 발자취를 따랐던 것.
아합의 집이라는 표현은
⇒ 아합 가문의 죄악으로 인해 심각한 우상 숭배에 빠져버린 북이스라엘 전체를 지칭하는 표현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여호람의 범죄로 인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 모두가 음란함과 우상 숭배에 빠지고 말았다는 본절 상반절의 내용과 견주기 위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즉 본서 저자는 다윗의 후손인 유다 왕 여호람이 아합의 집의 소위를 본받음으로 말미암아, 남유다 전체가 북이스라엘과 같은 신앙적 오염에 빠져들고 말았음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너보다 착한 아우들을 죽였으니’
‘선한’ (핫토빔’)
본문에의 의미는, 도덕적 선함, 종교적 선함 여호람의 동생들은 우상을 섬기지 않고 여호와를 섬겼으며, 부친 여호사밧의 길로 행하여 여호와 앞에 정직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토브'가 암시 해 주는 것.
여호람이 왜 선한 동생들을 죽였을까?
여호람은 이처럼 도덕적• 종교적으로 선한 삶을 살면서 자신과 상반된 길을 가고 있는 동생들이 못마땅했을 것, 백성들이 그들을 추종할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그들을 잔인하게 살해해 버렸을 것이다.
2. 이 죄들에 대한 심판이 내려졌다.
그는 분명히 자기의 죄가 멸망의 원인이 되리라는 사실을 들었다.
(1) 즉 그의 나라와 가족이 파멸하리라는 것을 들었다(14절).
"매우 치명적인 타격으로 심지어는 전쟁과 포로라는 타격으로 여호와께서 네 백성과 네 자녀를 치리라."
악한 자들은 자기들과 관계된 모든 것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게 한다. 그의 백성들도 그와 함께 우상 숭배를 했고 아내들은 그로 하여금 우상에 빠지게 했으므로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 21:14 여호와가 네 백성과 네 자녀들과 네 아내들과 네 모든 재물을 큰 재앙으로 치시리라
‘힌네’로 시작하는 본문
‘보라!’ ; 히브리어에서 ‘힌네'라는 단어가 전달하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본문에서도 이 단어는 여호람으로 하여금 신실하신 여호와께서 선언하시는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므로, 주목하여 들을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단어를 ‘보라!’로 번역해 주는 것이 좋다.
‘치시리라'
(능동태 분사형) — 임박한 미래에 그 일이 있을 것임을 나타냄. 즉 큰 재앙으로 치는 일이 너무나 확실하며 임박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이처럼 분사형을 사용한 것.
‘큰 재앙’
재앙
‘타격’, ‘역병’ 이라는 의미.
본문에서 이 단어는 이방 나라인 블레셋과 아라비아의 침략과 약탈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16,17절).
‘큰’
그 침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클 것이라는 사실이 동일한 어원의 명사와 동사의 사용을 통해서 뿐 아니라, ‘큰' 으로 번역된 형용사 '게돌라'의 사용을 통해서 암시되어 있다.
‘게돌라' : 심히 크거나 정도가 심한 것을 나타내는 단어, (창 4:13) 장차 이방의 침략으로 인한 여호람의 타격의 참상을 생생히 보여준다.
재앙의 대상
여호와께서는 여호람을 심판하시되, 여호람 자신 뿐 아니라 그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치실 것을 말씀하신다. 이 심판은 — 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자신의 아버지 여호사밧의 아들들을 쳐죽인 것에 대한 심판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자신보다 선한 동생들을 모조리 살해한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빼앗기는 심판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부친이 생명같이 아끼던 자녀들을 다 죽인 여호람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가 생명같이 아끼는 자녀들과 아내들을 잃을 것을 경고 받은 것이며, 이 예언은 이후 그대로 성취된다.
(2) 그의 건강과 생명이 파멸되리라는 것을 들었다.
"너는 고통스럽고 진저리나는 중병을 얻어 마침내 죽게 될 것이다" (15절).
이것은 그가 이전에 경고 받은 것이다. 즉 파수꾼이 그의 목숨을 건져주었을 때도, 그의 피는 그의 머리로 돌아가리라는 사실을 예고했었다. 그리하여 그토록 구체적으로 예고되었던 것이 이제 사실화되자, 그런 일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그의 죄에 대한 벌이요 그가 의도했던 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아합에게서 악행하는 것을 배웠듯이 이러한 엘리야의 경고를 듣고 아합처럼 겸손해지는 것도 배웠더라면, 그리하여 아합과 같이(왕상 21:27) 자기 옷을 찢어 굵은 베로 몸을 동이며 금식을 했었더라면, 아합처럼 적어도 그 벌이 감해지기라도 했을지 누가 알랴? 그러나 그는 그러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그것을 휴지조각처럼 내던지고, 엘리야를 "조롱하는 자라" 고 보았던 것 같다. 믿으려고 하지 않는 자는 감각에 따를 것이다.
💡 21:15 또 너는 창자에 중병이 들고 그 병이 날로 중하여 창자가 빠져나오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여호람에 대한 직접적 심판이 선언됨
직역하면, '또한 너 자신은 중한 질병들을 가지고, 너의 창자의 병을 가지고, 나날이(중하여져 가는) 그 병으로 인하여 너의 창자가 쏟아지기까지'.
이처럼 원문으로 볼 때 본문은 동사가 계속하여 생략되어 문장으로서는 불완전하지만, 그 의미만은 강조적으로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병을 나타내는 단어로 세 단어가 사용되었고, 세 차례의 전치사구가 사용됨.
‘나날이’
여호람의 병이 점점 더 심각해져가다가, 마침내 창자가 쏟아지는 지경에까지 이를 것을 생생하게 묘사. 엘리야는 그 당시로부터 2년 후에 죽을 때까지의 여호람의 상황을 정확히 예언함으로써 — 그의 병이 하나님의 징계임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하였던 것.
❖ 16-17절 : 블레셋과 아라비아 군대의 유다 침략
Ⅱ. 그가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에 예고되었던 그 무서운 심판이 그에게 가해졌다.
완악한 죄인들이 죄를 짓고도 놀라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장래의 저 세상에서 있을 비참한 형벌을 예고해 주어도 회개하려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때에 가서는 이 세상에서 그들이 겪는 명백한 비극상과 재산의 손실이나 건강에 치명적인 타격까지도 그들을 사악한 일에서 물러서도록 하지는 못할 것이다.
1. 여기에서 여호람이 그의 모든 즐거움을 빼앗겨 버린 것을 보라.
하나님은 "그의 이웃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켜" 그를 치도록 했다.
그들은 전에 여호사밧을 사랑하고 두려워하였었으나, 이제는 그의 나라가 자기들의 신을 바꾸어 섬기는 것을 보고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여서, 그를 미워하고 경멸하게 되었다. 그들은 때로 그와 시비하고자 그의 나라를 침입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에도 나타나 있듯이, 큰 자나 작은 자나 백성들은 치지 않고 단지 왕의 집만을 친 것 같다. 그들은 직접 왕궁으로 가서 "그 안에 있는 모든 재물을 탈취하였다" 고 했다.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다는 말은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그 아내들과 아이들을" 탈취하였다는 사실은 언급되어 있다(17절). 이처럼 하나님은 여호람과 그의 집에만 분쟁이 임하게 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셨다. 여기에서는 그들은 그의 아들들을 "탈취하였다" 고만 적혀 있으나, 우리는 그들이 "모든 형들을 죽였다" (22:1)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피의 대가는 피인 것이다. 그는 자기의 힘을 강하게 하기 위해 자기 모든 형제들을 죽였었다. 그러나 이제 한 아들만 제외하고 그의 모든 아들들이 죽었으므로, 그의 힘도 약화되었다. 만일 그가 다윗 집안에 속한 자가 아니었다면 이 한 사람도 살아 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로보암이나 바아샤나 아합의 집이 파멸당했을 때는 살아남은 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다윗의 집안은 때로 비참하게 타락했었을지라도 그들에게는 메시야라는 커다란 축복이 숨어 있었으므로 전적으로 근절될 수가 없었다.
💡 21:16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들과 구스에서 가까운 아라비아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키사 여호람을 치게 하셨으므로
16-20절까지는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선언되었던 심관판 예언의 성취 및 여호람의 비참한 최후를 기록. 즉 하나님은 유다 밖으로부터의 이방 침략과 여호람의 몸 안으로부터의 불치병을 통해 그를 철저히 파괴시켜 버리셨고, 백성들마저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 ‘격동시키사’
구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모두 66회 사용,
바람이 일어나는 것(아 4:16), 불이 일어나는 것(호 7:4), 폭풍이 일어나는 것(렘 25:32), 사랑의 감정이 일어나는 것(아 2:7), 다툼이 일어나는 것(잠 10:12), 분노를 발하는 것(시 78:38), 의식을 일깨우는 것(삿 5:12), 마음을 자극하는 것(대상 5:26) 등 다양한 용례로 사용 되었다.
본문에서는 특히 이 세상의 물질 뿐만 아니라 정신 및 영의 세계까지 창조하시고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여호람을 심판하시기 위해 — 가나안 서쪽에 위치한 블레셋과 남동쪽에 위치한 아라비아의 통치자들의 마음을 자극하여서 그들로 하여금 유다를 치게 만드셨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 두 나라 통치자들은 여호람이 에돔과 립나의 반역을 평정하는 데에 실패한 것을 보면서 유다를 침략할 마음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이 두 나라는 여호람의 부친 여호사밧 통치 이래 유다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존재하고 있었다(17:11).
하나님은 악행을 거듭하는 여호람을 징계하시되, 전에 여호람 자신이 다스리던 속국으로 존재하던 나라들을 들어 남유다를 침략하게 하심으로 심판하신 것이다.
💡 21:17 그들이 올라와서 유다를 침략하여 왕궁의 모든 재물과 그의 아들들과 아내들을 탈취하였으므로 막내 아들 여호아하스 외에는 한 아들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유다를 침략하여 .. 탈취하였으므로’
침략하여
원형 본래 알이 깨지면서 부화되는 모습(사 34:15) 및 포도주 가죽 부대가 찢어진 모습(수 9:4)을 나타내는 단어. 구약 성경에서 50회 사용된 이 단어는 주로 깨지거나 쪼개지거나 갈라지거나 터지는 의미를 나타내는 문맥에 쓰였다(창 7:11; 22:3; 출 14:16; 왕상 1:40).
본문에서도 마치 도끼로 나무를 쪼개 가르듯이 유다의 수비망을 거침없이 갈라버리는 모습을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유다를 불시에 습격 한 블레셋과 아라비아의 기습 공격으로 인해, 유다는 방어할 틈도 없이 완전히 뚫려 수도 예루살렘 까지 순식간에 함락되고 말았다.
모든 재물, 아들들, 아내들을 탈취함
여호람은 그의 아내들과 자녀들을 적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는데, 이러한 재앙은 여호와외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에 대한 여호와의 저주 목록에 들어 있는 재앙이다(신 28:30-34,41). 한편 적군에게 끌려간 자들은 일반적으로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22:1의 표현으로 볼 때 여호람의 아들들, 즉 왕자들은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윗 언약을 지키신 하나님의 자비
본문은 여호람 및 그 가문을 심판하는 와중에서도 다윗 언약을 기억하신 하나님께서 다윗 가문의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자비를 베푸신 사실에 대한 기록.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다윗과외 언약을 기억하사 다윗 왕통이 끊어지지 않도록 그루터기 하나를 남겨두셨다.
원문에는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알 수 없는 신비한 영적 의미가 드러난다.
‘여호아하스’ : ‘여호와께서 굳게 붙드셨다'라는 의미.(22:1 ‘아하시야'와 동일)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목적이 없는 일은 없다. 하나님이 그 많은 여호람의 아들들 가운데 바로 위와 같은 이름 뜻을 지닌 여호아하스를 남기셨던 것도, — 여호와께서 유다를 영원토록 붙드실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여호와는 진노 중에라도 다윗의 씨를 붙드시고, 유다 왕국을 붙드심으로써, 다윗의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시겠다는 당신의 언약(삼하 7 :13)을 지키고자 하신 것이다.
❖ 18-20절 : 탈장으로 인한 여호람의 사망
2. 그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심한 병" 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보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자에게는 이러한 재앙이 있으리라고 율법에 경고되어 있다(신 28:58, 59).
신28:58,59
28:58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28:59 여호와께서 네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그의 병은 매우 중했다. 그의 창자가 계속 빠져 나왔고, 그것으로 해서 다른 심한 병을 또 앓게 되었다. 그 고통을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운 것이었다. 그는 2년 동안 계속해서 앓았으나 병세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의 나이는 40을 넘지 못한 한창때였으나, 그 병은 고칠 수 없었다.
아사는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겼으나 몇 가지 그릇된 일을 행한고로 단지 발에만 병을 얻었었다. 그러나 마음이 사악한 여호람은 그의 창자에 병을 얻었다. 그리하여 잔인하게 형제의 창자를 찌른 자가 이처럼 자신의 창자에 중병을 얻게 된 것이다.
마음이 선하며 하나님이 매우 소중히 여기는 자들도 이러한 종류의 병들로 고통당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의 병은 아버지로서의 징벌을 주는 것에 불과하고, 육신이 고통스럽더라도 하나님이 위로를 주시어 그들의 영혼을 편하게 해 주신다. 여호람은 그의 집이 약탈당하고 아내와 자식들이 탈취당한 직후에 이렇게 심한 병을 얻게 되었다.
💡 21:18 이 모든 일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람을 치사 능히 고치지 못할 병이 그 창자에 들게 하셨으므로
‘이 모든 일 후에’
14절의 예언에 따라 이루어진 17절의 재앙을 가리킴. 그런데 생략할 수도 있는 이러한 표현을 굳이 사용한 데에는 — 예언의 실현에도 불구하고 여호람이 회개하지 않은 데 대한 본서 저자의 깊은 안타까움이 담겨져 있다.
아마 여호람은 회개하기보다는 마음을 더욱 강팍하게 하여 하나님을 원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신 28:34에 나오는 것처럼 여호람은 자녀들, 아내들, 재물까지 다 빼앗기는 재앙을 당하면서 마치 미친 사람과 같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고통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는 병상에 눕게되었다. 그는 유명한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많은 약을 써보았지만, 그 몸 속에서 발한 병을 치료할 길이 없었다.
이러한 불치의 질병
신명기의 죄를 범한 자를 향한 저주문 가운데도 나 온다(신 28:35.59). — 즉 하나님은 신명기의 저주의 선언대로 회개의 기회마저 저버린 여호람을 철저히 심판하셨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여호람에게 보내신 창자의 중병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대장염(colitis), 이질(dysentery), 탈장(hernia) 등으로 추정되나 19절의 '그 창자가 빠져 나오매' 란 표현으로 보아 최종적으로 탈장까지 이른 것은 분명하다.
(1) 아마도 참화로 인한 마음의 슬픔과 고통이 그러한 병을 유발시켰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 병을 악화시켰을 것이다.
(2) 이 병 때문에 그는 처자를 찾으러 갈 수도 없었고, 그가 받은 타격을 보복할 수도 없었다.
(3) 아내와 아이들을 탈취당하고 모든 재물을 약탈당한 일은 와병 중에 있는 그에게 더 큰 슬픔을 안겨다 준 것이 틀림없다. 병들고 가난하게 되는 것, 병들고 외롭게 되는 것, 특히 죄를 짓고 병이 들어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되며 고통을 참을 만한 은혜나 그것을 직면할 만한 위로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매우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3. 그가 수치스럽게 장사된 것을 보라.
그는 8년밖에 다스리지 못하고,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다" 고 했다(20절).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아무도 그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가 죽었을 때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고, 오히려 예루살렘에 복이 깃들기를 원했다. 그들은 여호람에 대해 애착이나 존경을 거의 품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열왕의 묘실에 두려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릇된 정치를 한 그는 그 왕들과 함께 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몸을 그 조상들의 묘소와 따로 격리시킨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명령된 것일 것이다. 즉 죽은 후에는 사악한 자의 영혼이 의로운 자의 영과 영원히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 21:20 여호람이 삼십이 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그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하였더라
‘아끼는 자 없이’
다른 번역
70인역: ‘칭송 없이’
공동번역: ‘애도하는 사람 하나 없는 가운데’
NASB: ‘애도함이 없이’ 원문: ‘그가 죽을 때에 유다 사람 중 단 한사람도 그를 위해애도하지 않았다’는 의미.
여호람은 보통 무명의 사람과 달리 한 왕국을 통치하던 왕이었는데, 애도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은 → 그의 악행이 얼마나 심하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하였더라’
본문은 열왕기 저자가 기록하지 않은 내용(왕하 8:24) → 본서 저자가 이러한 사실을 기록한 것은 여호와께 범죄한 자의 비참한 말로룰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백성들이 여호람의 시신을 예루살렘에 묻기는 하였으나 역대 왕들이 묻혀 있는 왕묘에는 묻지 않았다는 사실은 — 백성들이 그를 제대로 된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는 무려 8년 동안이나 유다를 통치했지만, 결론적으로는 그의 백성들에게 왕으로 인정조차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그 열조에게 분향하던 것과 같이 그에게 분향하지 아니하였다" (19절).
이것은 그의 치욕을 더해 주었다. 그는 그들에게 온화하고 고귀한 기억을 전혀 남겨두지 못했으므로 오랫동안 심한 병을 앓다가 죽었기 때문에 거기에 향료를 뿌릴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데도, 그들은 향긋하고 귀한 향로로 그의 시체를 영예롭게 하려하지 않았다. 그 백성에게는 우상 숭배를 좇는 경향이 심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백성들은 우상 숭배하는 왕에 대해서는 진실한 호의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거의 믿음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도 사악하고 불경스런 자들은 경멸의 대상으로 비친다. 반면에 인간 본래의 양심은 때때로 진실로 경건한 자들에 대해서는 경의를 품게 된다.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는" 여호람처럼 그 자신이 "천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 21:19 여러 날 후 이 년 만에 그의 창자가 그 병으로 말미암아 빠져나오매 그가 그 심한 병으로 죽으니 백성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분향하던 것 같이 그에게 분향하지 아니하였으며
‘여러 날 후 이년 만에’
원문으로 볼 때 이 부분은 매우 장황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를 우리말로 옮기는 것은 상당히 어색하지만 대략적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 날 즉 이년의 그 끝이 경과한 그 때에 있었다” 이러한 여호람의 사망 시점에 대한 표현 역시 18절의 '이모든 일 후에' 란 발병 시점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넉넉한 회개외 기회를 주셨으나, 이를 활용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보다는 의원만 의지한 여호람에 대한 저자의 안타까운 감정을 전달해 준다.
‘저가 그 심한 병으로 죽으니’
NKJV 는 '그래서 그가 흑득한 고통 가운데서 죽었다(so he died in severe pain)' 란 의미로 번역,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들도 이와 비숫하게 번역(NASB, NIV, NJB). — 이런 번역은 여호람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어갔는지 잘 나타낸다.
또한 NRSV는 '그가 고통 속에서 몸부림 치며 죽었다(he died in great agony)'란 의미로 번역.
— 이는 그가 단지 육체의 고통 뿐만 아니라 정신적 고통까지 느꺼며 죽어갔음을 나타내는 것.
여호람이 죽는 그 순간에 여호와를 저주했는지, 아니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때늦은 후회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이런저런 정신적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죽어갔을 것이다.
‘심한’
한글 개역 성경이 단지 ‘심한'으로 번역한 ‘라임'을,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고통'의 의미로 번역했지만,
원문상 이 단어 : ‘악하다', ‘나쁘다'라는 의미(창6:5;13:13).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도 있다. 즉 여호람은 당시 유다 사람들이 악한 질병, 또는 여호와께 저주받은 질병으로 분류하는 병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 이후 백성들이 그의 묘에 분향하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여호람의 비참한 말로
‘백성이 … 저에게 분향하지 아니하였으며'
직역하면, '그래서 그의 백성들이 그를 위해 불태우지 않았다(NASB, And his people made no fire for him)’
죽은자를 위해 불태운다는 것은 = 당시 왕들의 장례식에 수반되었던 예우였다(16:14). 여호람은 죽어서 그의 백성들에게 철저히 외면을 당하였던 것이 확실하다. 이 사실을 곧이어 나오는 20절의 그를 아끼는 자가 없었다고 한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를 대적하고, 그의 백성들을 죄악의 길로 이끌었던 왕의 비참한 말로이다.
결론
💡 본장 전체는 남유다 제5대 왕 여호람의 즉위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다룬다.
그런데 그 전반적인 내용은 심히 암울하다. 유다 왕실 내에서 골육상잔이 일어났을 뿐 아니라 본격적인 우상 숭배가 이루어졌다. 이로 인한 하나님의 징벌로 유다는 외적의 침입을 받아 약소 국가로 전락했으며, 여호람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더욱 불행한 것은 이어지는 22장에 나오듯이 여호람의 악한 영향력이 그의 아들 아하시야 통치기에도 계속될 뿐 아니라 그 이후 아달랴의 통치기에는 최악으로 치닫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악의 영향력이 얼마나 뿌리깊은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이후 남유다외 멸망이 = 이러한 악의 축적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준다.
본서 저자 는 본서 일차 독자들에게 과거 조상들의 이러한 암울한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신정 국가의 재건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때에만 이룩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본문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가장 원론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전하여 주고 있는데, 저자는 하나님께서 여호람의 가문을 치시면서도, 그의 막내 아들만은 남겨두셨음을 언급함으로써 다윗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의 신실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엘리야가 북이스라엘에서 활약한 선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남유다의 여호람에게까지 편지를 보내어 그에 대한 예언을 한 것은 여호람이 엘리야의 주예언의 대상이었던 아합의 가문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기 때문, 나아가 하나님의 선지자의 활동은 지역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