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1월 24일 수요일 묵상구절 욥9:1-35

Jeehyun 2024. 1. 24. 09:40

맥체인성경읽기

창세기 25, 마태복음 24, 에스더 1, 사도행전 24

묵상구절

[9:1-14 하나님과의 논쟁을 통하여 자기 의를 입증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불평]

9: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9:2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9:3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9:4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

9:5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9:6 그가 땅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시니 그 기둥들이 흔들리도다

9:7 그가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도다

9:8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9:9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9:10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9:11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9:12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

9:13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밑에 굴복하겠거든

9:14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

[9:15-24 욥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괴리감 토로 및 두차별적으로 심판하는 것으로 보이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

9:15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9:16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9:17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9:18 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

9:19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소환하겠느냐

9:20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

9:21 나는 온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9:22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9:23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

9:24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

[9:25-10:1 하나님을 향한 좌절감의 직설적 토로와 하나님 앞에서의 변론 의지 천명]

9:25 나의 날이 경주자보다 빨리 사라져 버리니 복을 볼 수 없구나

9:26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먹이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

9:27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불평을 잊고 얼굴 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9:28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9:29 내가 정죄하심을 당할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9:30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

9:31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9:32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9:33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9:34 주께서 그의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의 위엄이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9:35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라

10:1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욥10:2-22 창조주 하나님의 무차별적 심판에 대한 항변과 호소]

10:2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10:3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10:4 주께도 육신의 눈이 있나이까 주께서 사람처럼 보시나이까

10:5 주의 날이 어찌 사람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해와 같기로

10:6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들추어내시나이까

10:7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

10:8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10:9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10:10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0:11 피부와 살을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엮으시고

10:12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10:13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10:14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0:15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내 눈이 보기 때문이니이다

10:16 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젊은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놀라움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

10:17 주께서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를 바꾸어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번갈아서 치는 것 같으니이다

10:18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10:19 있어도 없던 것 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겨졌으리이다

10:20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시되

10:21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10:22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매튜헨리/옥스퍼드

1. 서론

💡 9:1-10:1

본장은 욥의 고난의 원인을 규명하면서 욥과 욥의 세 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 사이에 일어난 제1차 논쟁에서 빌닷의 인과응보론적 책망과 충고에 대한 욥의 답변 및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기록된 9, 10의 일부.

개요

  1. 9:1-10:1
    • 죄를 범한 결과로 지금 욥이 징벌을 받고 있다는 빌닷의 전통적인 원칙론에 입각한 통렬한 비난에 대하여 욥이 적극적으로 반론을 펴는 내용.
  2. 반면 10:2-22,
    •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난 가운데서 갈등하고 있는 욥이 자신과 절대자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대한 자신의 내면적 고뇌를 토로하면서 내뱉는 두번째 중간 기도.

전반부 9:1-14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무능한 인간은 전능하신 능력과 우주적 위엄을 지니신 절대자 하나님과의 논쟁을 통해서는 자기 의를 입증할 수 없음을 논증하며 그러한 불공평한 상황에 대해 불평하는 부분.

중반부 9:15-24

욥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괴리감을 토로하며 무차별적으로 심판하시는 분으로 여겨지는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는 부분.

후반부 9:25-10:1

욥이 하나님을 향한 좌절감을 직설적으로 토로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처지를 변론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는 부분.


💡 10:2-22

본장은 빌닷의 일차 변론(8장)에 대한 욥의 반박(9, 10장)의 후반부.

이러한 본장은

  • 빌닷의 논증에 대한 욥의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반론의 성격을 지니는 9장과 달리,
  • 빌닷에 대한 논증은 뒤로하고 고난과 관련하여 해결되지 않은 문제둘로 인한 욥의 고뇌가 하나님께 대한 탄원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개요

앞선 9:35과 10:1에서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변론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한 바 있다.
이제 본절 이하 22절까지에서는 직접적으로 욥이 하나님께 자신의 의지를 밝히는 부분이다.
이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욥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 어린 절규를 발하는 7:7-21에 나오는 욥의 제일차 변론 중 첫번째 중간 기도에 대응되는 창조주 하나님의 무차별적 심판에 대한 항변과 호소의 내용을 담고 있는 욥의 두번째 중간 기도이다.

욥의 어조 변화

읍의 태도는 9장에서 보인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9:14,19,29에 의하면

  • 욥은 자신이 당한 고난에 대해 하나님과 변론하기를 강력히 원하면서도 하나님과 자신의 본질적 차이를 인식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 체념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하지만 본절에 나타난 욥의 태도는 그것과 완전히 반대이다.

본문에서 욥은 하나님을 향해 두 가지를 요구한다.

  1. 먼저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정죄하는 것을 잠시 유보해 주실 것을 요구한다.
  2. 그리고 무슨 이유로 자신에게 고난을 주시는지 말씀해 주실 것을 요구한다.

⇒ 따라서 본절 이후 계속되는 욥의 말은 단순한 독백이 아니라 천상의 법정을 가정한 하나님을 향한 자기 변호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단락별 내용

1) 9:1-14 (하나님과의 논쟁을 통하여 자기 의를 입증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불평)

 💡 9:1-14

[문맥]

  • 제8-10장은 빌닷의 제일차 변론과 그에 대한 욥의 답변을 다루고 있습니다.
  • 이 중 제8장이 빌닷의 제일차 변론을 다루고 있다면, 제9,10장은 그에 대한 욥의 답변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하의 본문]

  • 빌닷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을 기록하고 있는 제9.10장 기사의 개시 부분.
  •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논쟁을 통해서는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할 수 없는 불공정한 상황에 대한 불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1-4절)
    본문을 보면 욥은 우선 빌닷의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않는다’ 라는 말에 동조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겠느냐고 빌닷의 주장을 더 보충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욥이 자기의 불의함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 하지만 이는 욥이 자기의 불의함을 인정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다만 사람이 자기가 옳다는 것을 하나님께 설득시키려고 논쟁하거나 논리를 전개하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에 대비되는 인간이 논쟁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자기는 하나님과의 논쟁을 통하여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하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3.4절).

  2. (5-14절)
    1. (5-10절) 그는 인간이 감히 논쟁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고 하나님께 항거할 수 없는 근거로서
      →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우주적인 위엄을다양한 실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2. (11-14절) 아울러 인생이 관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무기력한 인간의 실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11-14절).
      → 즉 욥은 지금 자신의 불의함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과 논쟁을 통하여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할 수 없는 불공정한 상황을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역으로 자기의 의로움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한편 여기서 욥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하기 위해 제시한 실례들은 제 38-41 장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당신의 능력을 말씀하실 때 제시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욥이 이러한 것들을 모른다고 하셨는데,

→ 이는 욥이 본문에서 이러한 것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단지 머리의 지식으로 그쳤을 뿐,

→ 그러한 지식에 근거하여 그의 믿음이 표출되지 못하고,

→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원망하고 불평하였기 때문입니다.


2) 9:15-24 (욥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괴리감 토로 및 두차별적으로 심판하는 것으로 보이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

 💡 9:15-24

여기서는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할 수 없는 불공정한 상황에 대한 불평을 기록하고 있는 9:1-14에 이어 욥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괴리감 토로 및 무차별적으로 심판하시는 것으로 여겨지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15-21절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의로움을 설득시킬 생각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로서 답답한 것은
    • 까닭 모를 이유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고통을 가하시는데 자기가 호소한다고 한들 하나님께서 그 호소를 들어주시겠느냐는 것입니다(15,16절).
    • 강한 쪽이 하나님인데, 힘으로 겨룬다고 한들 어찌 이길 수 있겠으며, 재판에 붙인다고 한들 누가 하나님을 재판정에 세울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 비록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한다고 한들 하나님께서 욥 자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을 정죄하게 할 터이니 이러한 하나님과는 처음부터 겨룰 수 없으며,
    • 이로 인하여 자신은 자기 생명의 가치를 천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17-21절).
  2. 22-24절
    그리고 욥의 항변은 극단으로 치달립니다.
    즉 욥은 죄 없는 자에게도 갑작스런 재앙이 닥치는 것을 보면서 - 하나님은에 대해 항변한 것.
    • 의인이나 악인이나 무차별적으로 심판하시는 분, 의인의 고난 당함을 보시면서 오히려 비웃으시는 분, 세상이 행악자들의 손에 넘어갈 때 재판관으로 하여금 그릇된 판단을 내리도록 섭리하시는 분이라고(22-24절).
    말하자면 욥은 지금 세상의 불합리한 일, 공의가 상실된 듯한 모든 일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는 자신에게 임한 고난으로 인하여 욥의 신앙이 하나님의 공의와 신실하심을 의심하는 상태로까지 추락하였음을 보여주는데,

⇒ 이는 나중에 하나님께서 욥을 향하여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네가 나를 불의하다고 하느냐״라고 꾸중하신 빌미가 됩니다(40:8).


 

유한한 우리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행사를 다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지식으로 하나님의 행사를 이해하려는 것은 자기 몸무게나 젤 수 있는 저울로 지구의 무게를 재려 하는 것과 같은 무모한 짓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므로 하나님의 행사에 대하여는

— 그 선하심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겸손히 수납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선하심만 믿는다면 우리가 수납 못할 하나님의 행사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납득할 수 없는 명령에 순종하여 백세에 얻은 아돌이라도 번제로 바치려고 한 것도 그가 하나님의 행사의 선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있어서 아브라함과 같이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9:25-10:1 (하나님을 향한 좌절감의 직설적 토로와 하나님 앞에서의 변론 의지 천명)

💡앞서 8장에 나오는 바 인과응보론적인 전통에 입각하여 욥을 정죄하고 책망한 빌닷의 논증에 대한 욥의 변론을 다루는 9, 10장의 일부인 본장의 내용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극찬을 받았던(1:8; 2:3) 욥조차 극한 고난 가운데서 원망하며 몸시 흔들리는 모습을 통해 그 역시 유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 본장 첫째 문단(1-14절)에 나오는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절대 무능에 대한 고백(2-4절),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고백( 510־절), 인생이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고백은(11-14절)
    → 욥이 매우 성숙한 신앙과 깊은 사고의 인물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 욥은 인간의 무능 및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절대 주권을 인정하기는 하나,
  • 그 역시 현세적 인과응보론적 사고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직접적으로 특정한 죄를 짓지 않은 자신에게 이처럼 혹독한 고난이 주어건 것은 부당하다고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였다.

유한한 인간의 한계

유한한 인간은 이해하기 힘든 문제에 직면하여서 하나님의 섭리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절대 순복하는 것이 바람직함에도 불구하고 욥은 이에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이유로 욥을 정죄할 수는 없다.

  1. 욥이 절대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대로 순복하기보다는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괴리감을 토로하고 무차별적으로 심판하시는 것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처사에 대해 원망한 것은
    우리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극한 고난 가운데 있었을 뿐 아니라 친구들의 정죄로 크게 상심하였던 욥의 처지에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 그리고 이러한 욥의 모습은 절대자 하나님과 한계를 갖는 인간 사이의 높은 담을 허무시는 중보자에 대한 완전한 계시가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신약 성도들이 누리는 복

그런 점에서 과거 욥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였던 중보자이신 에수 그리스도를 역사 가운데서 경험하고 구주로 받아들인 신약 성도인 우리들은

  • 욥과 같이 — 하나님을 범접하지 못할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 담대히 나아가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뢸 분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은혜 가운데 있는 측복된 자들이다(요 14:6; 히 10:19-22).

욥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 자신이 알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변론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 하나님과 자신의 엄청난 차이로 인하여 감히 하나님께 항변할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그는 극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이렇게 욥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간격이 있다.

→ 이 간격은 창조주와 피조물로서의 간격이요, 심판주와 죄인으로서의 간격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이 간격을 단번에 좁혀주셨다.

물론 이 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제 더 이상 아무런 간격도 존재하 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안에서 우리 인간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여주셨고 창조자와 피조물, 심판주와 죄인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되게 하여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이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얼마나 놀라운 신비인가?

이제 여러분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하나님과의 내밀한 교제를 통하여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고 아들로서의 기쁨을 누리기 바란다.


4) 10:2-22 (창조주 하나님의 무차별적 심판에 대한 항변과 호소)

 💡 10:2-22

여기서는

  • 하나님을 향한 좌절감의 직설적 토로와 하나님 앞에서의 변론의지 천명을 기록하고 있는 9:25-10:1에 이어 무차별적으로 심판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항변과 호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이러한 본문은 욥이 세 친구들과 제일차 논쟁을 하던 중에 드린 두번째 중간 기도이기도 합니다.
    → 즉 욥은 친구들과의 제일차 논쟁 중에 각 친구들의 번론에 대한 답번을 마무리하면서 한결같이 하나님께 원망과 항변투의 기도를 드리는 데, 본문이 그 두번째인 것.

욥은 9장에 나타난 대로,

  • 이미 하나님과 자신의 본질적 차이로 인해 자신이 하나님께 항변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있었다.

다만

  • 욥은 그러한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 본장에서 하나님을 향해 자신이 담고 있던 여러 가지 질문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

1. 전반부 2-17절

자기에게 까닭 모를 고난을 주신 하나님을 향한 욥의 항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욥은 원통함을 참다 못하여 자기의 생각을 여과 없이 그대로 하나님께 쏟아 놓고 있습니다.

  1. (2,3절)
    욥은 까닭 모를 고난의 원인에 대하여 하나님의 해명을 요구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을 죄인 취급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왜 자기와 더불어 쟁론하시는지 알게 하여달라고 항변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악한 자들이 세운 계획은 잘되게 하시는 의도가 무엇인지 해명하여 주실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2. (4-13절)
    •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여 두 가지의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자신의 고난의 부당성을 항번하고 자신의 무죄함을 간접적으로 역설하고 있습니다.
    1) 4-7절
    무죄한 자신에게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능력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즉 창조주로서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마치 한계가 뚜렷한 육신을 가진 인간처럼 자신의 무죄함을 알지 못하고 자신에게서 허물과 죄를 찾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자기에게 고난을 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업니다.

    2) 8-13절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즉 욥은 자신을 지으시고 지금까지 지키신 하나님께서 왜 어제 와서는 자신을 멸하고자 고난을 주시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입 니다.

    3) 14-17절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여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자신의 고난의 부당성과 무죄함을 간접적으로 역설한 읍은 이제14-17절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죄의 유무와 관계없이 자신을 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부당성에 대하여 항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읍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시는 것을 일종의 심술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 즉 하나님은 자기가 죄를 범하면 죄를 범한 대로, 의로우면 의로운 대로 늘 자신을 공격할 계획만 세우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본문 전반부를 통한 교훈

  • 우리는 까닭 없이 고통을 당한 자의 심정을 층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유한한 인간의 이성의 잣대로 함부로 판단하여하나님을 공의롭지 못한 분으로 매도하는 큰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실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후반부 18-22절

하나님을 향한 욥의 애원 섞인 호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여기서 먼저 욥은 자신을 태에서 나오게 하심으로 고난을 당하게 하신 하나님의 처사에 대하여 항의하였습니다.
  2. 그리고 자신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옴을 상기시키며 이제 자신을 버려두어 자신이 살 동안만이라도 평안을 누릴 수 있게 하여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 이러한 호소는 7:20.21의 호소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것은 욥이 모든 것을 잃고 삶의 의욕을 상실한 상황에서 오 직 유일하게 지닌 소망이 더 이상 하나님의 간섭으로 말미암은 고통 없어 살다가 죽는 것이었음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3. 결론

💡 앞서 엘러바스의 논쟁 말미에서도 읍은 하나님을 향하여 첫번째 중간 기도를 드린 바 있다(7:7-21).

이처럼 욥이 인간과의 논쟁을 통하여 그 무엇을 얻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은 바람직한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기도가,

  •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고(4-7절),
  •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며(8-13절),
  • 죄없는 자신을 처시는 하나님의 부당성을 항변하는(14-17절) 내용이라는 점에서

—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비록 이 모든 기도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절대자이심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였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의 처사의 부당함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욥이 이러한 태도를 보인 원인은?

이러한 욥의 태도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절대 선하심을

  •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고,
  • 자신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평가한 데서 비롯되었다.

→ 따라서 38-41 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계시는

  •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순복과 관련한 것이었고

42:1-6에 나오는 욥의 회개는

  • 과거의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을 수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 의미에서 본장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역설적 교훈은

  1. 인간은 어떤 사건 속에 내재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2. 주권자 하나님의 섭리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 아니라,
  3. 모든 일의 근원자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섭리를 전적으로 믿고
  4. 이에 절대 순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욥은 인간의 나약함과 하나님의 절대성을 인정하기는 하였지만,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의로우신 섭리에 전적으로 순복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욥과 그의 친구들 간의 무익한 논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던 것이다.


4. 단락별 주석

욥의 대답(1)(욥기 9:1-13)

빌닷은 욥이 매우 많은 말을 한 것에 대해 그를 책망하는 데서부터 시작했었다(8:2). 그러나 욥은 그것에 대해 충분히 항의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대답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욥은 빌닷이 제시한 이론, 즉 하나님은 결코 심판을 굽게 하시지 않는다는 이론에 동의하고 있다.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럴 줄 아노라"(2절).  우리는 우리와 더불어 논쟁을 하고 있는 자들의 의견이라도 우리가 그것에 동의할 때는 솔직히 시인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의 입에서 나온 것으로서, 우리에게 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고집을 내세워 진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 적용돼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빛 속에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해야 한다. "사악이 인간에게 파멸을 초래하고, 믿음이 깊은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를 얻으리라는 것은 진실로 그러하다. 이러한 진리에 나는 동의한다. 그러나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선할 수 있겠는가?"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다"(시 143:2).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하나님의 엄격하심과 냉엄하심, 즉, 아무도 겨룰 자 없는 하나님께 대한 격렬한 원망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장에서 이와 같이 매우 격렬한 감정을 나타낸 것처럼 보이는 표현들이 몇 곳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오히려 인간의 사악함에 대한, 특히 그 자신의 죄악됨에 대한 경건한 자백으로 보고 싶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범죄한 대가대로 우리를 다루신다면 우리는 어김없이 멸망할 것이다.

Ⅰ. 욥은 인간이 논쟁하거나 싸우는 일에 있어서 그의 조물주와 비교가 안 되는 상대자라는 진리를 제시하고 있다.

1. 논쟁에 있어서 비교가 안 된다(3절).

사람이 하나님과 율법이나 이론으로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1) 하나님은 그와 더불어 쟁변하고, 그의 처사를 규탄하는 자들이 대답할 수 없는 천 개의 어려운 질문을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셨을 때 큰 질문들을 많이 내놓았으나("네가 이것을 아느냐?" "네가 그것을 알 수 있느냐?"), 욥은 하나도 대답할 수 없었다(38, 39장). 하나님은 매우 지혜로운 체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명백히 밝히실 수 있다.

(2) 하나님은 우리가 책망 당할 천 가지의 잘못을 제시할 수 있으며, 우리를 규탄할 천 가지의 항목을 열거하실 수 있다. 그때 우리는 그 잘못을 다른 것에 전가시키는 말을 그에게 할 수 없고, 단지 침묵으로써 그것들이 모두 사실임을 승인해야만 한다. 우리는 한 가지라도 이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며, 또 저것은 하찮은 것이며, 또 저것은 그릇된 것이라고 밀어 놓을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사실을 부인하고, 범죄하지 않았음을 항의할 수 없으며, 또 다른 것에 대해서도 잘못을 부인하고 정당할 수 없다. 아니, 우리는 그에게 대답할 수 없다. 단지 욥처럼 "우리 손으로 우리 입을 가리며"(40:4, 5)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외쳐야 한다.

2. 싸움에 있어서 비교가 안 된다(4절).

"그를 거역하고 형통한 자가 누구이랴?"

그 대답은 매우 쉽다. 우리는 태초부터 오늘날까지, 하나님을 거역한 대담한 죄인이 계속 그를 대적하여 패역한 일을 계속하고서도, 하나님의 심한 형벌을 받지 않았다든가, 그의 어리석음의 대가를 뼈저리게 당하지 않았다는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범죄자들은 형통하거나 평안을 믿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의 길에서 위로를 얻지 못했고, 성공하지도 못했다. 인간이 온갖 재주나 권세를 써서 그의 창조주와 겨루어 무엇을 얻었는가? 하나님에 대한 모든 반항은 피어오르는 불 앞에 찔레와 가시덤불을 던지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시도는 매우 어리석으며, 무익하며, 멸망을 초래하는 것이다(사 27:4; 겔 28:24; 고전 10:22). 배신한 천사들은 하나님을 거역하였으나, 형통하지 못했다(벧후 2:4). 용이 싸우나 쫓김을 당한다(계 12:9). 사악한 자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의 지혜를 논박하고, 그의 율법에 불순종한다. 그리고 그들의 죄악을 옹호하며 환난 가운데서도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의 은총 받기를 거부하며, 그의 영과의 싸움을 계속 고집한다. 그들은 그의 협박을 무시하고 이 세상에서의 그의 권세를 대적하는 데 앞장 선다. 그러나 그들이 형통하였는가? 아니다. 그들은 "진노의 날에 임할 진노를 그들 스스로에게 쌓는" 것 뿐이다. 이 돌을 굴리는 자들은 그것이 그들에게로 돌아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Ⅱ. 욥은 우리와 관련을 맺고 계시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보여 줌으로써,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원리에 대답할 수 없다. 그는 "힘이 강하시니" 우리는 그와 끝까지 싸울 수가 없다. 무한한 지혜와 능력의 소유자이신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 지혜나 능력에 있어서 당할 자가 없으신 하나님과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지친 짓이다. 마귀는 욥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할 것이라고 스스로 장담했다. 그러나 욥은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그를 찬미했다. 그가 많은 고통을 당하고 그 자신이 매우 비참하게 되었을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대해 언급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는 원망하는 것을 잊었고, 기쁨과 함께 거했으며, 매우 유창하게 고귀하고 유용한 주제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 다음의 몇 가지를 인용하였다.

1. 욥은 자연계를 실례로 들고 있다.

자연의 하나님은 제어할 수 없는 능력으로 행하시며, 그가 원하시는 일을 하신다. 왜냐하면 자연의 모든 질서와 능력은 그로부터 나왔고, 그에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1) 그가 원하실 때 그는 자연의 방향을 변화시키고, 그 흐름을 역행시키신다(5-7절).

자연의 일반법칙에 의해 산이 정해졌으므로 "영원한 산"이라 일컬어진다.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않으며(시 93:1), 거기에 박혀있는 기둥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해는 제때에 떠오르고, 별들은 이 아래 세상에 그 빛을 발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 그는 일반적인 궤도에서 그것을 내어쫓으실 수 있을 뿐 아니라 질서를 역행하고 자연의 법칙을 변화시키실 수 있다.

[1] 산보다 더 견고한 것은 없다. 산을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산의 자리를 옮겨 놓으실 수 있다. "그가 산을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그것이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그는 그것을 옮기신다. 그는 산들의 머리를 낮게 하실 수 있다. 그는 그것들을 평평하게 하실 수 있으며, 진노하심으로 그것을 무너뜨리실 수 있다. 그는 그 산들이 아무리 높더라도 또 아무리 넓고 돌이 많더라도 농부가 흙더미를 파헤치듯 그 산들을 쉽게 헤쳐 놓으실 수 있다. 사람은 산들을 넘기 위해 많은 힘을 기울이나, 하나님은 원하실 때 그것들을 없애버리실 수 있다. 그는 시내산을 진동하게 하셨다(시 68:8). "작은 산들은 뛰었다"(시 114:4). "영원한 산이 무너졌다"(합 3:6).

[2] 땅보다 더 견고한 굴대 위에 세워진 것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원하실 때 "땅을 움직여 그 자리에서 밀어내시며," 심지어 "그 기둥이 흔들리게" 하실 수도 있다.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흔드실 때는 그 자체가 도움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참으시는 은혜를 얼마나 많이 입고 있는가를 보라. 하나님은 죄의 고통 아래에서 신음하는 모든 죄지은 인간들을 받쳐 주고 있는 땅을 진동시키시고, "악인을 그 가운데서 구축하시기에"(욥 38:13),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그러나 그는 계속 땅을 견고케 하시고, 그 위에 인간을 세우셨으며, 한꺼번에 그것이 그 반역자들을 삼키도록 만들지는 않으신다.

[3] 떠오르는 해보다 더욱 견실한 것은 없다. 그것은 정해진 때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원하실 때 그것을 정지시키실 수 있다. 태초에 해에게 떠오르라고 명하신 분은 그 명령을 취소하실 수 있다. 한때 해는 서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또 어떤 때는 물러가라는 명을 받고 있는데, 이것은 해가 그 위대하신 창조주의 견제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위대하시다. 그리고 악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 햇빛을 비추지 않으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까지도 비추게 하시는 그의 선하심은 얼마나 크신가! 별들도 만드신 그가 만일 원한다면 그것들을 밀폐하여 그것들을 우리의 눈으로부터 감추실 수 있다. 지진과 지하 열에 의해 산들은 때로 옮겨지고 땅은 진동한다. 매우 어둡고 흐린 낮과 밤에는 마치 태양은 떠오르지 못하게 되어 있고 별들은 봉인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행 27:20).

욥이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실 수 있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실재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사실을 가르킨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이 모든 구절들은 노아의 홍수에 적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에 땅 위에 있는 산들은 진동했고 해와 별은 어두워졌었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 있는 이 세상에 대해서도 그 불은 예비되어 있으며, 그 뜨거운 열이 산과 땅을 불사를 것이고, 해를 암흑으로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고 있다.

(2) 그가 원하시는 한 그는 자연의 정해진 방향과 질서를 보존하신다. 그리고 이것은 계속되는 창조이다.

하나님은 홀로 그 자신의 능력에 의해 그리고 다른 것의 도움없이 다음과 같은 일을 하신다.

[1] "하늘을 펴신다"(8절).

그가 하늘을 처음으로 펼치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계속(즉, 언제나) 펴고 계신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양피지 두루마리처럼 그것 자체가 한데 두루 감져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는 바다 물결을 밟으신다."

즉, 그는 그것이 땅을 덮지 못하도록(시 104:9), 그것을 제압하시고 지키시는데,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고 그를 경외해야 하는 이유로서 주어져 있다(렘 5:22). 그는 기고만장한 파도보다 더 강하시다(시 93:4; 65:7).

[3] 그는 성좌를 만드신다. 그 모든 것들 중에서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 그리고 전반적인 "남방의 밀실"이 열거되어 있다(9절).

이러한 무리를 이루게 되는 별들을 제일 처음 만드신 다음 하나님은 그것들을 그 순서대로 정렬해 놓으셨다. 그리고 그는 계속 그것들을 만드시고, 존재하도록 보존하실 것이며, 그들의 운동을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들이 인간에게 유용한 것들이 되도록 만드시며,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그것들을 살펴보도록 하신다. 짐승들은 그것들을 살펴볼 능력이 없다. 우리가 보고 이름을 지은 그 별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결코 우리의 눈으로 보지 못하며, 남극 주위에 있기에 여기에서 "남방의 밀실"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다른 천체의 별들도 하나님의 인도와 주권 아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얼마나 지혜로우며 전능하신가!

2. 섭리의 왕국을 실례로 들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일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특별한 섭리이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시는가를 잘 생각해 보라.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다"고 말할 것이다.

(1) 그는 큰 일을 많이 행하시며, 많은 기이한 일들을 행하신다(10절).

욥은 여기에서 엘리바스가 말한 것과(5:9)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그의 적대자이긴 하지만 그가 말한 것을 그대로 좇아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하나님, 기이한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며, "큰 일을 행하신다." 그의 기이한 일은 너무 많아서, 우리는 그것들을 셀 수 없으며, 너무 신비로와서 우리가 발견해 낼 수가 없다. 그의 뜻은 매우 깊도다.

(2)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그리고 깨닫지 못하게 행하신다(11절).

"그가" 그의 일 속에서 "내 앞을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내가 깨닫지 못하니라. 주의 길이 바다에 있도다"(시 77:19). 인간의 활동은 대개 명백하게 느껴지나, 하나님이 우리 주위에서 행하시는 그 모든 일에서는 "우리가 그를 보지 못한다"(행 17:23). 우리의 유한한 이해력으로는 그의 뜻을 잴 수 없으며, 그의 활동을 이해하거나 그가 택하신 방법을 측정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행하시는 것이나, 계획하시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행사를 판단하기에는 너무 무능하다. "통치의 비밀"(arcana imperii)은 우리 위에 있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거나 논평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3) 하나님은 논의될 여지가 없는 주권을 가지고 행하신다(12절).

그는 원하실 때,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의 육체적 쾌락과 신뢰를 빼앗으시며, 건강과 재산, 친척과, 친구 그리고 생명 자체까지도 빼앗으신다. 어떠한 일이 있든, 그것을 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누구의 손에 의해서 그것이 제거되든지, 그 속에서 그의 손이 인정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는가? 누가 그를 쫓아낼 수 있는가?"(난외, 누가 그를 소생시킬 수 있는가?) 누가 그를 말리거나, 그의 뜻을 바꿀 수 있는가? 누가 그를 거역하거나 그의 움직임을 대적할 수 있는가? 누가 그를 제어하거나 그의 해명을 요구할 수 있는가? 어떤 행위로 그를 대적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하시나이까라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 또는 왜 그것을 행하시나이까라고 물을 수 있겠는가?"(단 4:35) 하나님은 그가 행하시는 것에 대한 이유를 우리에게 밝힐 의무가 없으시다. 그의 행사의 의미를 지금은 우리가 모르고 있으나, 현재 특권으로 행해진 것처럼 보인 것이 장차 무한한 지혜 속에서 가장 훌륭히 행해지게 될 때 우리는 충분히 알게 될 것이다.

(4) 하나님은 어느 피조물도 항거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능력으로 행하신다(13절).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면"(이것은 그가 원하실 때 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진노의 여호와"이시므로 그것을 퍼부으시거나 그의 뜻에 따라 그것을 명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아래 굴복한다." 즉, 그는 그를 대적하는 자를 교만하게 서로 돕는 자들을 분명히 타도하시며 멸하신다. 교만한 자는 그 스스로를 하나님과 그의 행사에 대적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대적 행위 속에서 그들은 손과 손을 맞잡는다. 땅의 왕들이 모이고 그의 멍에를 벗어던지기 위해, 그의 진리를 짓밟기 위해, 그리고 그의 백성들을 박해하기 위해, "이 땅의 왕들이 모이고 다스리는 자들이 서로 의논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행 21:28; 시 83:8). 만일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한 사람이 그의 심판을 받는다면, 그 나머지 사람들이 그것을 도우려고 교만하게 오며 그의 손에서 그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일이다. 하나님께서 기꺼이 그의 진노를 거두시지 않는 한(그는 때때로 그렇게 행하신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참으시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 교만한 조력자들은 그 아래 거꾸러지며, 그들이 돕고자 계획한 자들과 함께 쓰러진다. "누가 하나님의 진노의 능력을 알리요?" 다른 사람들을 도울 만한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그것을 대적하는 일을 도울 수 없게 될 것이다.


욥의 대답(2)(욥기 9:14-21)

욥은 인간에게 하나님과 계속 싸울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에 대해 말했었는데, 그는 여기에서 그것을 그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사실상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 일에 실망하고 있는데, 이것은(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그가 하나님은 그를 대적했고, 옳든 그르든 그에 대해 너무 가혹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하나님에 대해 지나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히려 그것이 그 자신의 의로움을 불완전하게 느끼고 있었고, 현재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시지 않으신다는, 어둡고 암담한 그의 우려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보고 싶다.

Ⅰ. 욥은 감히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지 않았다(14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아래 굴복하겠거든 하물며 내가(내 자신이 매우 무기력하므로 돕는 자가 되기엔 까마득히 불쌍하고 약한 피조물이) 감히 대답하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대적하여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만일 내가 그와 더불어 변론하려 한다면 그는 분명 나를 매우 엄하게 다스릴 것이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천한 그릇을 만들거나, 그가 만든 그릇을 산산이 부수어 버린다고 해서, 진흙이나 그 깨어진 그릇이 그와 더불어 변론하겠느냐? 하나님을 대적하여 대답하거나, 그에게 어떤 일을 철저히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들은 매우 어리석은 인간이다. 오히려 모든 육체는 그 앞에서 침묵을 지켜야 한다.

Ⅱ. 욥은 감히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려 하지 않았다.

비록 그의 친구들에게는 그 자신의 고결함을 주장했고, 그들이 암시한 것처럼 그가 사곡한 자이며 악한 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결코 항복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는 결코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의로움으로서 내세우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감히 내가 무죄하다고 단언할 수 없나이다. 그리고 또 그것 때문에 내가 성공한다고 생각지도 아니하나이다." 욥은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의를 주장할 수가 없었다.

  1. 욥은 하나님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으므로 감히 하나님을 시험하려 하지 않았다(15-19절).

그는 그의 친구들에게 그 자신의 경우를 옹호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 자신이 그들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경우가 사실보다 더 선하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 하나님과 변론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 하나님은 욥이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그를 더 잘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했다(15절).

"가령 내가 내 생각에 의로울지라도, 그리고 내 마음이 나를 정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나의 마음보다 더 크시며 내가 알지 못하며 알 수도 없는 나의 은밀한 잘못과 실수들을 알고 계시기에 그것으로 나를 책망하실 수도 있으시다. 그러므로 내가 감히 대답하지 못한다."

사도 바울도 이와 똑같은 내용의 말을 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사악함이 내 안에 거하는 것을 내 자신이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고전 4:4). "하나님께서 내가 내 안에서 발견하지 못한 것에 대해 나를 책망하시지 않는다면 나도 감히 그 문제로 자책하지 않겠다." 그러므로 욥은 그 탄원을 철회하고 "그를 심판하실 하나님께 간구했다." 즉, 그 자신을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맡기고, 그 자신의 공적에 의해 성공을 꾀하려고 생각지 않았다.

(2) 그는 그의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 용납되거나 화평의 응답을 얻을 만한 점이 있었다고 생각할 근거가 없었다. 아니, 그것의 성공으로 돌릴 만한 가치가 그 기도 속에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덕으로 돌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부르기 전에 대답하시며, 우리의 기도가 훌륭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도에 은혜롭게 응답하시기 때문이다(16절).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가 그에게 청한 것을 주셨다 할지라도, 나의 최선의 기도마저 매우 연약하고 결점투성이이기 때문에 그가 거기에서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믿지 아니하리라. 나는 그가 나에게 응답하사 오른 손으로 구원하셨다고는(시 60:5) 감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순전히 그 자신의 이름을 위해 그것을 행하셨다." 패트릭(Patrick) 주교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내가 간구한 후 그가 나의 소망을 허락하셨다 할지라도 나는 내 기도가 그 일을 이루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네가 이를 아는 것은 너의 연고가 아니니라."

(3) 하나님께서 욥의 결백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이 현재의 재난을 가져다 준 것은 그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케 해주었다. 즉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사람의 외적인 상황을 분배하시고 명하시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통치권에 의해 행하시며 미래의 상태를 위해 상과 벌을 충분히 그리고 정확하게 분배하실 수 있도록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에, 비록 그가 어떤 사람에게 그릇된 일은 행하시지 않는다고 해도 이 생애에도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한 보응을 내리시는 것만은 아니라(즉, 가장 선한 자가 언제나 가장 선한 대가를 받거나 가장 악한 자가 가장 나쁜 대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는 사실이었다. 욥은 그의 특별한 범죄를 깨닫지 못했지만 특별한 환난을 당하게 되었다(17, 18절).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바람이 자기에게 불어닥쳐 당황하도록 만들리라는 것을 예상해야 한다. 욥은 "폭풍으로 꺾이웠다."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찔레와 가시덤불 속에서 긁힘을 당할 것을 예상해야 한다. 욥은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는 점점 커졌다. 모든 사람들은 매일 고난을 당하게 되며, 때로는 쓴 잔을 마시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해야 한다. 불쌍한 욥의 고통은 그에게 너무 무거웠으므로 그는 숨을 쉴 여유도 없었으며, 괴로움이 그를 가득 채웠다. 그는 대담하게 이 모든 것을 까닭 없이, 큰 진노를 입을 만한 이유 없이 생겼다고 말하고 있다.

많은 훌륭한 해설자들의 판단과는 반대로 우리는 여태까지 욥이 말한 것을 선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의심할 바 없이 "그는 그의 입술로 경솔하게 말했다." 그는 하나님이 그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신다(그러나 그는 이처럼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연설을 훌륭히 이용할 수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심을 비방했고, 그것이 "까닭 없이" 왔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공의를 비방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인간성의 연약함에서 오는 것보다 더 많은 죄를 짓고서도 인생들에게 주어진 일반적인 재난에서 오는 슬픔밖에는 느끼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인생들에게 주어진 재난에 의한 것보다 더 많은 슬픔을 느끼나 인간의 공통적인 연약함 이외의 잘못은 그들 스스로에게서 느끼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4) 그는 하나님과 겨루어 볼 만한 능력이 전혀 없었다(19절).

[1] 무기의 힘으로도 겨룰 수 없었다.

"나는 감히 전능자와 함께 시합장에 들어갈 수 없다. 힘으로 말하면, 그리고 그것에 의한 승부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나보다 더욱 강하시어 분명 나를 능가하실 것이다." 군병을 지휘하는 그와 더불어 싸울 자가 없다(고 한 사람이 가이사에게 말한 일이 있었다). 더욱이 천군들을 지휘하시는 분과 더불어 싸울 자가 없다. "내가 네게 보응하는 날에 네 마음이(네 마음의 용기와 태도가) 견디겠느냐? 네 손이 네 자신을 방어할 만한 힘이 있겠느냐?"(겔 22:14)

[2] 논쟁의 힘으로도 할 수 없다.

"나는 감히 그 사건의 시비곡직을 따라 재판할 수 없다. 심판으로 말하면 그리고 나의 권리를 주장할 것 같으면 누가 나를 호출하겠느냐? 내가 호소할 만큼 더 높은 능력을 가진 자가 없으며, 그 공소를 들어 주도록 정해진 더 높은 재판관이 없다. 왜냐하면 그가 가장 높으시고, 그로부터 모든 인간의 심판이 나오며, 인간은 그것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1.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므로 감히 재판에 서려하지 않았다(20, 21절).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그리고 나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할지라도, 나의 변호는 내게 불리할 것이며 심지어 그것이 나를 무죄로 선언할 때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라."

그 자신의 마음의 기만을 알며 경건한 경계심으로 그것을 막아내고 오랫동안 드러나지 않던 부분에서 잘못된 점을 때때로 깨닫는 선한 자들은 자기가 실재로 의식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죄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 스스로를 의심해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죄를 짓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고 단정지은 성서를 거짓말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순전하며, 내게 내 죄가 없으며, 하나님이 나를 책망하실 것이 없노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나의 패괴함을 교만하고 무지하며 건방짐을 증거하리라. 오히려 내가 순전하다마는,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지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에 이 모든 고통의 짐이 지워져 있는 동안 내 생명이 연장되기를 원하지 않노라고 하여야 한다." 또는 "비록 내가 잡다한 죄에서 떠났다하더라도, 비록 내 양심이 극악한 죄로써 자책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내 결백함을 주장할 정도로 내 마음을 믿지 않으며, 또한 내 생명이 하나님과 더불어 다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과 다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그에게 복종하고 우리 스스로를 그의 발 밑에 내던지는 것은 우리의 의무인 동시에 지혜이다.


욥의 대답(3)(욥기 9:22-24)

여기에서 욥은 그와 그의 친구들 간에 논쟁이 되어 왔던 요점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욥의 친구들은, 의롭고 선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 언제나 형통하며, 비참하고 환난 속에 있는 자들은 단지 악인들 뿐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욥은 반대로,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크게 환난을 당하는 것은 흔한 일이라고 단언했다. 이것이 그와 그의 친구들 간에 의견이 달랐던 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증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욥은 그의 주장을 지키고 있다. "나는 모든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이라는 사실을 말했었고 여기에서 다시 이야기하고 있다."

1.욥이 여기에서 뜻하고 있는 것 속에는 매우 많은 진리가 있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한다. 즉, 일시적인 심판이 내려질 때 그것은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모두 내려지며, 멸망하는 천사는(비록 그가 한번 구별하긴 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과 애굽 사람들의 집을 거의 구분하지 않았다. 사실상 소돔의 심판에 있어서도 "영원한 형벌의 불"이라 일컬어지는(유 7) 불을 가지고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써는 불가하시다는 말씀을 들으시면서도 의인을 악인과 함께,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심판하셨다"(창 18:25). 그러나 단지 현세적인 심판에 있어서 의인들은 그들의 몫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칼은 이 사람과 함께 저 사람도," 아합과 함께 요시야도 "삼켜버린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순전한 자나 악한 자나" 그들은 모두 같은 공동 파멸 속에 묶어 "멸망시킨다."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 바벨론으로 끌려갔었다(렘 24:5, 9). "홀연히 재앙이 내려 도륙될 때에," 그리고 그 앞에서 모두를 쓸어 버릴 때에, 하나님은 악인의 파멸이 되는 그 재앙이 무죄한 자와 그들의 믿음을 어떻게 연단시키는가를 보시며 기뻐하실 것이고,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다"(벧전 1:4; 시 66:10).

전능자의 화살이 의인을 향해 날아가나니,

하나님께서 결백한 자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의 변함없고 존엄한 마음을 원하시기 때문이니,

멸망시킴이 아니라, 연단을 위함이라.

R. 블랙모아경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의 고통을 달게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 고통은 그들을 영예롭게 하고 유익하게 하기 위해 계획된 시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일을 기뻐하신다면 그들이 불쾌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만일 그가 그 결과가 얼마나 영화로운 것인가를 아시고 "무죄한 자의 고난을 비웃으신다"면, 그들도 또한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5:22), 그것들을 향해 개가를 부르면서, "죽음이여, 네 바늘이 어디 있는가?"라고 말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한편, 악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표징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이 그들의 손에"(그들은 큰 소유물과 큰 권한을 즐기며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가지고, 원하는 것을 행한다), "악인의 손에"(원문에는 이 단어가 단수로 되어 있다) "붙이웠다." 마귀 곧, 악인은 "이 세상의 신"이라 일컬어지고 있는데, 모든 자랑거리가 그의 손에 넘겨졌다(눅 4:6). 또는 "악인의 손에"라는 단어는(패트릭 주교와 총회 주석의 판독대로) 그 당시 매우 사악하면서도 크게 형통했던 유명한 포학자로서, 욥과 그의 친구들에게 잘 알려진 자로 볼 수도 있다.

악인은 세상을 얻으나, 의인은 하늘을 얻는다. 세상없는 하늘과 하늘 없는 세상 중에 어느 것이 더 낫겠는가? 하나님은 섭리 속에서 악인이 출세하게 하시는 반면, 지혜롭고 선하며 다스릴 수 있는 자격이 있어, "재판관"이 되기에 합당한 자들의 "얼굴을 가리우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혀 살게 하신다. 그리고 악한 일을 범하는 자들의 손에 이 세상이 주어지는 반면, 지혜롭고 선한 자들는 파멸당하고 정죄당하며, 그들의 얼굴을 가리우게 하는 고통이 주어진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행해지는 것을 매일 목격한다. 그것을 행하시는 자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것을 행하는 "자는 어디에 있으며, 누구인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단 4:32)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에게 그것을 돌릴 수 있겠는가?

2.그러나 욥이 여기에서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의 어조는 매우 역정적이다. 하나님께서 괴로움을 주신 사실을 나타내려 할 때, 그는 "하나님이 순전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 "멸망시킨다"고 말해서는 안 되었다.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를 시험하시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려 했을 때 욥은 "그가 비웃으시리라"고 말해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괴롭히시기를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다. 논쟁이나 불만으로 마음이 흥분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 입술의 문 앞에 파수꾼을 세워, 거룩한 일을 말할 때, 합당한 예의를 지키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욥의 대답(4)(욥기 9:25-35)

욥은 여기에서 더욱 불평이 많아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 장을 그가 시작했을 때처럼, 하나님의 지혜와 공의에 대한 경건한 표현으로서 끝맺지 못하고 있다. 불평스런 기분에 빠진 사람들은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얼마나 무례하게, 아니, 얼마나 불경스럽게 되도록 재촉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하나님과 더불어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과 같은 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시편 기자가 흔히 그러하듯이, 하나님을 원망하도록 허락을 받았지만, 여기에서의 욥처럼 결코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Ⅰ. 그의 형통한 날들이 지나간 것을 그가 여기에서 원망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25, 26절).

"나의 날이(즉 나의 모든 좋은 날들이) 내가 깨닫기도 전에 갑자기 가버리고는 돌아오지 않는다. 좋은 소식을 가지고(구시와 아히마아스처럼) 지급으로 달려온 그 어느 우체부도 모든 위로가 나에게서 떠나간 것처럼 그렇게 빠르지 못했다. 이처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재빨리 그 항구로 떠난 배는 결코 없으며, 그처럼 빨리 먹이를 잡기 위해 날아가는 독수리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처럼(잠 30:19), 내가 형통하던 자취도 남아 있지 않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1. 시간의 흐름은 매우 빠르다. 그것은 항상 날개 위에 있으며, 그 종말을 서두르고 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우리에게 있어서 소일거리란 얼마나 불필요한 것인가? 그리고 세월이 가듯이 오고 있는 영원을 향해서 시간이 매우 빨리 흘러가고 또 계속 흐르고 있는 이 때에 시간을 보상하는 것은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
  2. 세월의 향락은 매우 허탄한 것이다. 시간이 아직 계속되는 동안에,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빼앗길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형통이라는 햇빛보다도, 우리의 날이 더 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사라질 때는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었던 것처럼 된다. 우리의 의무를 행한 것을 회상할 때, 그것은 후에 우리에게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인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다가, 그것이 모두 손실되고 없어질 때, 그것을 추억하는 것이 기쁨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나의 날이 달려가므로 도로 부를 수 없고, 복을 부를 수 없으며, 그 뒤에는 아무 것이 남은 것도 없구나."

Ⅱ. 현재의 괴로운 상태에 대한 그의 원망은 용서받을 수 있다(27, 28절).

  1. 그의 친구들이 충고했던 대로 그가 그 자신을 진정시키고 평정시키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가 그렇게 하려한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는 "그 원통함을 잊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얼굴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여," 하나님이나 사람들과 더불어 합당한 교제를 나누고자 했었다.
  2.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발견했다. "오히려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노라. 내가 내 고통을 대항하여 분투하더라도, 그것이 대부분 나를 이기며 내게 너무 가혹한 것임을 증거한다." 그러한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를 실천하기 보다, 아는 것이 더 쉬우며,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 가를 아는 것이 그러한 마음을 갖고 지키는 것보다 쉽다.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게 인내를 설교하고 그들에게 그들의 원통함을 잊고 스스로를 위로하라고 말해 주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은 말한 것처럼 쉽게 행해지지는 않는다. 두려움과 슬픔은 믿음과 올바른 이치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들은 포학한 것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에 쉽게 복종하도록 만들지 못한다.

Ⅲ. 하나님께 대한 그의 원망은 무자비하고 냉혹한 것으로서 결코 용서될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타락한 언어였다. 그는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마음 속을 쪼개고 들어와 그로 하여금 격렬한 원망을 터트리도록 만든 하나님께 대한 이 가혹한 생각들이 한 때는 그의 주위에 얼씬도 못했었다. 선한 자들이라고 해서 언제나 선한 말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구조와 유혹에 대한 그들의 힘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그들이 실수한 것을 회개로써 후에 취소할 수 있는 기회로 허락하시며, 그것으로 그들을 책망하시지 않게 될 것이다.

1.욥은 여기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 마치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위로를 얻거나 그의 비통함을 구조받기에 실망한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그의 결백함에 대해 언제나 선한 증거를 보여 주어야 했다.

"주께서 나를 무죄히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내 환난이 매우 오래 계속되고 매우 급속히 불어나고 있으므로, 나는 주께서 나를 그 속에서 구원하시고 형통한 상태를 내게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나의 무죄함을 확증해 주시리라고는 결코 바랄 수가 없습니다. 옳든 그르든, 나는 악인으로서 취급받아야 합니다. 나의 친구들은 나에 대해 계속 그렇게 생각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내게 계속 환난을 주실 것입니다. "내 자신을 분명히 밝혀 나의 결백함을 주장하기 위해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29절)

이미 치우쳐 있는 상태에서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가장 무죄한 자가 그들 스스로를 밝히기 위해 사람들에게 가는 일은 흔히 수포로 돌아간다. 증거가 명백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유죄 판결을 받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일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학대받는 무죄한 자의 옹호자이시므로 그에게 의로운 사정을 맡기는 것은 결코 헛된 수고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욥은 위로 얻는 일을 실패로 여길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결백을 밝히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더욱 불쾌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30, 31절).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내 결백함을 증거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소용없을 것이다. 심판은 내게 분명 불리하게 내려진다. 주께서 나를 개천(멸망의 구덩이 또는 더러운 도랑이나 하수구)에 빠지게 하시리라. 그리하여 그것이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코를 불쾌하게 하므로,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할 것이며, 나마저도 나 자신을 만지기 싫어할 것이다."

욥은 그의 환난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을 보았다. 그의 친구들의 눈에 그를 더럽게 비치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그의 환난을 원망하였고, 그의 위로뿐만 아니라, 그의 명성도 파멸시킬 정도로 그것이 계속되는 것을 원망하였다. 그러나 이 말들을 선의로 해석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우리 자신을 의롭게 하기에 그리고 그들의 신뢰를 확보하기에 급급하다 할지라도, 세상적인 눈 아래 깔려 있는 잡다한 죄의 더러움에서 우리의 손을 깨끗이 지키려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은 정결하고 무죄함을 가장하는 우리의 모든 위선을 떨쳐 버릴 수 있도록 은밀한 많은 죄로 우리를 책망하실 수 있으며, 거룩한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 자신이 추악하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실 수 있다. 바울이 바리새인이었을 때, 그는 그의 손을 매우 깨끗하게 지켰다. 그러나 계명이 와서 그 마음의 죄를 드러나게 했을 때 그는 "그를 개천에 빠지게" 한 정욕을 알게 되었다.

(2) 그는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한 말씀을 듣기에 실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가혹했다.

[1] 그는 그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은 것을 원망하고 있다(32절).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시다. 나는 나같은 사람과 대담하게 논쟁할 수 있었다(질그릇 조각은 흙으로 된 질그릇과 더불어 다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나보다 무한히 높으시므로, 나는 감히 그와 함께 시합장에 들어갈 수 없다. 만일 내가 그와 대결한다면 분명 나는 내동댕이 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 첫째,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시다. 가장 위대한 왕들에 대해 우리는 "그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생각과 방법은 우리의 것보다 무한히 높으시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의해 그를 측량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어리석고 약하며 연하고 변덕스러우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의지하면서 죽어가는 피조물이다. 그러나 그는 독립적이며 불멸하는 창조주이시다.
  • 둘째, 이러한 사실을 숙고해 볼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매우 겸손하게 되고 잠잠케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지 말고 그를 우리보다 무한히 높으신 자로 언제나 바라보도록 하자.

[2]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점을 조정해 주고 논쟁을 해결해 줄 중재자나 판결자가 없음을 원망하고 있다(33절).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없는 것을 원망하는 것은 실상 있기를 바라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70인역에도 이것을 그렇게 풀이하고 있다. "양척 사이에 중재자가 있다면!" 욥은 기꺼이 그 문제를 언급하고 있으나, 중재인이 될 만한 능력이 있는 피조물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도 역시 하나님께 맡겨야 하며, 그의 심판에 따르도록 결심해야 했다. 우리 주 예수는 축복 받은 판결자이시다. 그는 하늘과 땅 사이를 중재하시며 양쪽에 손을 얹고 계시다. 그에게 아버지께서 모든 심판을 의탁했고,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현재 복음에 의해 밝혀져 이처럼 원망할 여지를 남겨놓지 않고 있으나, 그 당시에는 이처럼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3] 그는 하나님의 위협을 원망하고 있다.

하나님의 두려움은 그 화살을 그를 향했고 그를 매우 혼돈케 했다. 그러므로 그가 이전에 가졌던 그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34, 35절).

"그의 무한하신 초월성에 의해 내가 느끼게 되는 거리감 이외에도, 그가 현재 나를 대하시는 일이 나를 매우 낙담시키고 있다. 주께서 그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는 외적인 환난을, 하나님의 진노를 그의 영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그 괴로움만큼 크게 여기지 않고 있다. "그를 두렵게 한 것은 그 위엄"이었다. "그것이 물러가도록 해 주시고, 나로 하여금 그의 긍휼을 다시 보게 하고 그의 두려움만을 보게 하여 나를 당황하지 않게 하시길 원하노라. 그리하시면 내가 말하리라. 그리고 그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리라.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니라. 구름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여전히 내게 임하고 언제나 내 영을 침식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

2.이 모든 사실에서 우리는 이런 것들을 배우자.

(1)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진노의 능력을 두려워하도록 하자. 만일 선한 사람들이 그것에 의해 이처럼 놀라게 된다면 "부정한 자와 죄인이 어디에 나타나겠는가?"

(2) 심령이 상해 있는 자들을 동정하고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도록 하자. 그들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그들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선한 생각을 항상 지니도록 주의하자. 그들이 가혹하게 생각하는 것은 많은 재앙을 초래하게 되는 발단이 되기 때문이다.

(4) 우리가 여기에서의 불쌍한 욥처럼 서글픈 상황에 있지 않고, 주님의 빛 가운데 행하도록 해 주신 하나님을 찬미하자. 우리는 그 속에서 즐거워하고 "떨면서 기뻐하자."


욥의 대답(5)(욥기 10:1-7)

Ⅰ. 욥의 원망 속에는 강한 결심을 주장하는 태도가 나타나 있다(1절).

그의 사정을 하나님께 탄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위압되어 있었기 때문에, 욥은 그의 분노를 폭발시킴으로써 그 자신의 긴장을 풀고자 결심하고 있다. 그는 격렬한 언어로 시작하고 있다.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다. 내 영혼이 이 육체를 싫어하고 그것을 저버리기를 원하고, 생명에게서 떠나기를 원하는구나. 그것을 싫어하고 혐오하면서 죽음을 갈망하는구나." 은혜의 부족함으로 인해 그는 자연 그 자체의 명령을 거역하였다. 우리는 인간답게 행해야 하며 거룩한 자답게 행해야 한다. 믿음과 인내는 우리로 하여금 살기에 곤비함을 느끼지 않도록(그리고 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그것을 학대하지" 않도록) 막아줄 것이고, 심지어 섭리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매우 혐오하도록 만들 때에도 그렇게 해 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징계를 혐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욥은 살기에 곤비했고, 또 어떠한 방법으로도 편안함을 얻을 수 없었으므로, 원망의 말을 터트리기로 결심하고 있다. 그는 격렬한 손에 의해 그의 영혼을 토로하려 하지 않고, 격렬한 말에 의해 그의 영혼의 비통함을 토로하려 했다. 손해를 입은 자들은 그들이 말할 허락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난폭한 감정은 제어되지 않은 욕구와 같이 그들의 탈선을 그들도 어쩌는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변명으로서 그것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말에 굴레를 씌우듯이 지혜와 은총으로 우리의 입을 막지 않는다면 그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욥의 타락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으나 은총이 그 말 속에 있다.

1.그는 원망할 것이나 그것은 "그의 원통함을 발설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비방하려 하지 않았고, 또한 불의하거나 불친절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책망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와 더불어 논쟁하시고 그를 대적하여 행하시는 근거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는 대체로 그 까닭이 그 자신 안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그 모든 수욕을 기꺼이 참으려 했을 것이다.

2.그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표현하려는 것은 그의 정해진 심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의 괴로움에 대한 것일 것이다.

만일 내가 잘못 말한다면 그렇게 말한 것은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거하는 죄"이며 나의 마음이 아니고 그 비통함이다.

Ⅱ. 그는 하나님께 겸손히 탄원하고 있다. 그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말은 기원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하나의 훌륭한 기도로 받아들이고 싶다(2절).

1.그 기도는 환난의 고통에서 그를 구원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죄되는 일이었다.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나를 당신에게서 언제나 멀리하지 마옵소서. 비록 내가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나로 하여금 저주 아래 있게 하지 마옵소서. 비록 내가 아버지의 막대기로 징벌을 당할지라도, 심판자의 칼로 나를 끊지 마소서. 당신은 나를 징계하십니다. 나는 참을 수 있는 한 그것을 견뎌내겠습니다. 그러나 나를 정죄하지는 마옵소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비록 환난 가운데 있더라도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큰 위로가 된다(롬 8:1). 그들은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주께 징계를 받는다"(고전 11:32). 그러므로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그 무엇보다도 이것을 면제되기를 바라야 한다. "비록 주께서 나를 다루시기를 즐거워한다 하실지라도 나를 정죄하지는 마옵소서. 나의 친구들은 나를 정죄하나 주께서는 그리하지 마옵소서."

2. 그의 환난 당하는 참된 이유를 알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그것도 역시 죄되는 일이었다.

주여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히실 때 그는 우리로 더불어 쟁변하시는 것이며, 그가 우리와 쟁변하실 때 거기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다. 우리도 그러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아무 이유 없이 화내시지는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 회개하고 가슴 아프게 느끼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더불어 쟁변하도록 만든 그 죄를 버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 이유를 찾아내려 할 때는 선한 양심을 사용하여 창세기 42장 21절에 있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성실하게 살펴보는 것이 마땅하다.

Ⅲ. 욥은 그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태도에 대해 역정스런 충고를 하고 있다. 지금 그는 정말 그의 영혼이 원통한 가운데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에 그의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비난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1. 욥은 그가 참을 수 있는 이상의 고통을 주실 정도로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을 가혹하게 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의 품성의 긍휼하심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3절).

"주께서 학대하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아니다, 분명 그렇지 않다.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애 3:34-36) 그가 친히 하시기를 기뻐하시지 않는다.

"주께서는 나를 다루시는 일에서 주의 종을 학대하고 주께서 만드신 것을 멸시하시고 주의 대적에게 호의를 베푸시는 것처럼 보이나이다. 그러니 주여, 이제 어찌된 연고입니까? 이러한 일이 주의 성품을 기쁘게 할리 없고, 그것이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나를 이처럼 대하시는 것은 웬일입니까? 내 피 속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으리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해하셨다는 생각은 결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선한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 그는 하나님의 공의로써 그의 섭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몰라 매우 당황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밝혀 줄 날까지 기다려야 했다. 우리도 하나님에 대한 가혹한 생각을 잠시라도 가지지 말자. 왜냐하면 우리는 그때에 가혹하게 여길 만한 이유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는 그의 포로를 이처럼 고문대 위에 올려 놓고 자백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4-6절).

(1) 그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어떤 것들을 발견해 내시지도 않으며, 그것들을 판단하시지도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육신의 눈"을 가지고 있지 않다(4절). 왜냐하면 그는 영이시기 때문이다.


💡 4절, ‘하나님의 눈'

이와 관련해 본래적으로 욥이 가진 생각은

→ 지금 자신을 죄인으로 취급하고 정죄하는 친구들의 눈과 다르다는 이해가 전제되어 있다.

⇒ 즉 본래 하나님의 눈이 자신을 보는 이유는

  • 지금 고난을 당하는 자신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라는 이해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 이는 성도들, 특히 고난 당한 성도돌에게 있어 하나님의 눈은 공의와 자비가 발현되는 출처로 구약 성경에 자주 언급되기 때문이다(대하 16:9; 시 34:15; 잠 15:3).

그러나 자신이 엄청난 재난 속에 고통을 당하고 있음에도 자신을 구원하시지 않고 지속적으로 고난을 가중시키는 것처럼 보이자

— 욥은 하나님께 대해 본문과 같은 반문을 내뱉고 있다.

이를 통해 욥은

  • 자신을 정죄하기에 급급해 하며 온갖 비난의 말을 내뱉기 위해 자신을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과 마찬가지로,
  •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의 허물과 죄를 찾으려 하시느냐(6절)는 원망의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이다.

‘주께서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리이까’

  • 본문에서 욥은 언간과 하나님의 시각 차이를 언급함으로써 인간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전지성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행실을 아실 것이라는 고백과 더불어 지금의 재난이 결코 합당한 것이 아님을 항변한다. 

  • 육신의 눈은 암흑 속을 볼 수 없으나, 암흑은 하나님에게서 감추어지지 못한다. 육신의 눈은 한 때에 어느 한 곳 밖에는 보지 못하고 조금밖에는 볼 수 없다.
  • 그러나 "여호와의 눈은 각처에 있어 온 땅을 두루 살피신다."
    많은 일들이 매우 호기심과 통찰력이 강한 육신의 눈으로부터 감추어져 있다. 심지어 "독수리의 눈으로도 보지 못한 길이 있다."
  •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눈으로부터 감추어진 것은 없고, 또 있을 수도 없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 육신의 눈은 외부에 나타난 것만을 볼 수 있고, 또 "의식의 환상"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의 실상을 보신다.
  • 그의 시각은 속임을 당할 리 없다. 왜냐하면 그는 마음을 감찰하시며 그 생각과 뜻을 증거하시기 때문이다.
  • 육신의 눈은 점차로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한 가지 물건을 볼 때 다른 것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에 모든 것을 보신다.
  • 육신의 눈은 쉽게 피곤해지며 쉬기 위해 매일 밤 닫혀져야 한다. 그리고 노쇠해짐에 따라 곧 어두워지고 죽음에 의해 감겨질 것이다.
  • 그러나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않으시며 시력이 나빠지는 일도 없다. "하나님은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지 않는다." 즉, 사람은 사람들은 사실 그대로 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것대로, "진술되고 입증된 것에 따라," 그리고 흔히 감정과 격정, 편견과 타산에 치우쳐 판단하나, 하나님은 그렇게 판단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사실대로," 그가 사실을 알고 계시는 대로, 즉, 보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감찰에 의해 "행해진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 사람들은 탐구하여 비밀을 캐어낸다. 그리고 증인을 심문하고 공범들의 자백을 강요하거나, 감언이설로 속이면서 증거를 비교하고, 그것을 추정함으로써 비밀을 알고자 한다.
  •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을 써서 알아내실 필요가 없다. "그는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지 않는다."

(2) 하나님은 인간처럼 근시안적인 눈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짧은 생명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5절).

"주의 날이 어찌 몇 날 안 되며, 악에 가득 찬 인생의 날과 같으리이까? 주의 날이 인생의 날처럼 계승되거나 변화될 리 있으리이까? 아닙니다.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경험에 의해 그리고 매일의 관찰로 알게 된 것에 의해 점점 슬기로와 진다. 그들에게 있어서 진리는 시간의 딸이므로 그들은 탐구하는 데 시간을 소비해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추구가 실패하면 다른 시험을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는 과거나 미래가 없으며, 모든 것은 현재이다. 인생을 측량하는 날은 하나님의 생을 싸고 있는 영원한 햇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3)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를 고문하는 날들을 연장시키시고 계속 이 환난 속에 감금시키시며,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허물을 찾으시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그의 죄를 사실하시기" 위해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 것처럼, 그를 심문하시지도 않고 또한 석방해 주시지도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다(6절).

욥을 불리하게 만들 이유를 찾기 위해 하나님이 이처럼 고문하고 있는 것이라고 욥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처사는 하나님께 명예롭지 못한 형세를 초래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가혹한 주인으로 여기도록 유인하는 미끼가 되었을 것이다. "이제 주께서 나의 위로를 고려하지 않으시려 한다면 주의 명예를 고려해 보십시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어떤 일을 행하옵소서. 그리고 주의 영광의 위를 욕되게 마옵소서"(렘 14:21).

3.그는 하나님께서 무죄하다는 것을 아는 한 불쌍한 포로를, 그의 손에서 그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자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감금해 두는 것은 그의 전지를 욕되게 하는 것으로 보였다고 생각하고 있다(7절).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그는 그 자신이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서 유죄함을 이미 시인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그가 사악하지 않았으며, 죄에 전념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대적이 되지도 않았으며, 그의 믿음의 위선자가 아니었다는 사실, "악하게 그의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는(시 18:21) 사실을 고집하고 있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 그러므로 구제할 길이 없습니다. 나는 당신의 통치하시는 뜻에 굴복하고서, 당신의 때를 기다리고, 내 자신을 당신의 긍휼하심에 맡겨 버리고, 거기에 누워 만족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즉, 전지한 자와 쟁변하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 때, 어떻게 우리를 진정시켜야 하는가?

(2) 만일 우리가 여기에서의 욥처럼 하나님께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나는 내가 부족하지 않다거나 연약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인하여 내가 악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무엇이 우리를 풍성하게 위로할 것인가?


욥의 대답(6)(욥기 10:8-13)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관찰할 수 있다.

Ⅰ. 욥은 그의 창조자이며 보존자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주목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를 존재하게 만드시는 그의 존재를 지지하는 자이신 그에게 그 자신이 종속되어 있음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이것이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알며, 생각해 볼 첫 번째 과제이다.

1.우리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고, 우리의 부모가 아니다. 부모들은 단지 그의 능력과 섭리에 의해 우리를 출생시킨 도구에 불과하다.

"그가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 스스로가 만든 것은 아니다. 주의 손으로 우리의 이 몸과 각 부분을 만드셨고"(8절), 그것은 "두렵고도 기묘하게 만들어" 졌다. 몸에 활기를 주는 영혼도 또한 그의 선물이다. 욥은 여기에서 이 두 가지를 주목하고 있다.

(1) 주께서 그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다(9절).

토기장이의 재주와 뜻에 따라 흙이 그릇의 모양으로 만들어지듯, 몸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우리는 근원이 천한 흙 그릇으로서, 곧 깨어질 "흙을 뭉치듯"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을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말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그리 불명예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 재료는 흙에서 나왔고, 그 틀과 형태는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태내에서 인간의 몸이 형성되는 것이 여기에서 훌륭한 비유가 되었다(10절,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셨나이다"). 그리고 약간의 구체적인 사실들을 유도함으로써(11절), 묘사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맨 몸으로 세상에 왔을지라도 몸 자체는 옷을 입히우고, 무장되었다. 가죽과 살은 그 옷이다. 뼈와 힘줄은 공격이 아니라, 방어를 위한 갑옷이다. 극히 중대한 부분, 심장과 폐는 이처럼 보이지 않도록 옷을 입고 있으며, 상처받지 않도록 울타리가 쳐져 있다. 인간 몸의 놀라운 조직은 창조주의 지혜와 능력과 선함을 입증하는 일례이다. 성령의 전이 될 수 있는 이 몸이 불의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2) 영혼은 생명이며, 영혼이 곧 인간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주께서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게 생명의 입김을 불어 넣으셨다. 그것이 없었다면 몸은 가치없는 시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들의 아버지이시다. 즉 그가 우리를 살아있는 영혼으로 만드셨으며, 우리에게 이성의 능력을 부여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생명과 은혜"를 주셨고, 생명은 은혜-음심이나 의복보다 더 큰 은혜-다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 독특한 은혜이다. 이제 욥은 그가 생명을 짐으로 여겨, 불평하고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하고 말했을 때보다 더 나은 마음 상태에 있었다. 또는 생명과 은혜는 그의 이전의 형통함을 언급한 인생의 모든 즐거움과 그 인생을 의미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 가운데 행하였고, 다윗처럼 그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산이 강하게 서리라고 생각했었다.

2.하나님은 우리를 보존하신다.

생명의 등불을 켜신 후, 그 자체가 타들어 가도록 내버려두시지 않고, 끊임없이 신선한 기름을 공급하신다. "주께서 내게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그리하여 삶의 역경, 즉 우리가 끊임없이 위협을 당하고 있는 죽음으로부터 나를 보호하시어 살게 하셨나이다. 그리고 생활의 모든 필수품으로써 또 그것이 원하고 갈구하는 물질을 매일 공급해 주심으로써 나를 축복하셨나이다."

Ⅱ. 어떻게 욥은 이것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으며, 또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가를 보자.

그는 하나님께 그것을 상기시키고 있다(9절).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을 지으셨나이다."

1."주께서 나를 만드셨으므로 나를 완전히 아시나이다(시 139:1-13). 따라서 징벌로써 나를 심문하실 필요도 없으며, 내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시기 위해 나를 고문대 위에 올려 놓으실 필요도 없습니다."

2."주께서 통치의 행위에 의해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습니다. 그것과 똑 같은 통치의 행위에 의해 나를 다시 부수어 버리시겠나이까? 만일 그러하시다면 나는 복종해야 합니다."

3."주의 손으로 만드신 작품을 멸하시려 하시나이까?"

성도들은 흔히 기도 속에서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 이시옵니다"(사 64:8)라는 탄원을 한다.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나이다"(시 119:73).

여기에서도 역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주께서 나를 지으셨거늘" 이제 나를 멸하시고(8절) "나를 티끌로 돌려 보내시려 하시나이까?"(9절)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렵니까? 주께서 나를 아끼시고 도우시며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시 138:8), 지켜 주시지 않겠나이까? 주께서 나를 만드셨고, 나를 아시옵니다. 그런데도 주께서 내게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고통을 주시어 나를 괴롭히시나이까? 나는 비참한 존재가 되도록 지어진 것입니까? 오직 이 재앙을 위해 내가 살아 남은 것이옵니까?"

만일 우리가 의무를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것을 우리 스스로에게 진술한다면, "하나님은 나를 지으셨고 나를 지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를 섬기고 그에게 복종하겠습니다"라고, 우리는 그것을 긍휼에 대한 요지로서 하나님께 진술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주께서 나를 지으셨습니다. 갓 만드셨습니다. 이제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욥은 하나님이 예전에 베풀어 주신 은혜와 그의 현재의 불쾌감을 어떻게 조정할 수 있는가를 알고 있었으나,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13절).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모든 것은 주의 뜻에 의한 계획에 달려 있으므로 그것이 어떻게 보이든, 서로 모순된 점이 없다는 것은 틀림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상하게 그의 방법을 바꾸실 때, 비록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의 마음 속에 선한 이유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며, 그것은 곧 밝혀질 것이다. 그 뜻을 정하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며, 우리가 미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뜻이 주께 있은 줄을 내가 아나이다." 하나님께 알려진 것은 모두 그가 지으신 것이다.


욥의 대답(7)(욥기 10:14-22)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욥은 격렬하게 원망하고 있다.

그는 이 혹독하고 불쾌한 이야기를 되풀이 하고 있다. 여기에서 비록 그는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용서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는 투덜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아무런 이유 없이 원망한 것이 아니라, 원망할 만한 까닭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우리가 그의 마음가짐이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경고로 삼아 우리의 마음을 좀 더 선하게 지니도록 하자.

1.그는 하나님의 심판인 엄격함, 그리고 그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가혹한 처사를 원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가혹함으로 울타리를 두른 공의"라고 부르려 하고 있다.

(1) 그는 모든 유리한 점들을 배제하고 있다.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나이다(14절). 만일 내가 한 발자국만 잘못 가거나, 한 마디를 잘못하거나, 한눈을 팔면, 나는 분명 그러한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주의 대리자인 양심은 분명 그것 때문에 나를 책망할 것이며, 이 속박, 이 고통의 아픔은 그에게 대한 처벌이라고 내게 말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처럼 불의를 중히 여기신다면 우리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비록 우리가 죄를 범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극단적으로 취급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2) 그는 이 유리한 점들을 극단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주께서 내 죄악을 사유치 아니하시나이다."

그의 고통이 지속되는 한 그는 사유의 위로를 얻을 수 없었으며, 즐거움과 기쁨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과 그의 손에 막대기가 들려진 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 사랑을 보기가 힘들다.

(3) 그의 성품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의 현재의 형편은 매우 불편했다(15절).

[1] 만일 그가 사악하다면 그는 저 세상에서 분명 파멸할 것이다.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옵니다." 죄악의 상태는 비참한 상태이다. 이것을 우리들 각자는 여기에서의 욥처럼 우리들 자신에게 적용시킴으로써 믿어야 한다. "내가 악하면, 비록 형통한 가운데 즐겁게 산다하더라도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 어떤 자들이 만일 악하다면 특히 그들은 이중의 화를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간절한 신앙 고백을 하고 또 흔히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훌륭한 약속을 많이 했었던 내가 이처럼 훌륭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는 축복을 누리고,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면서 풍성한 은혜를 오래 누리던 내가 악하면, 화가 수 천 가지의 화가 있을 것이옵니다."

[2] 만일 "그가 의로울지라도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고," 전처럼(9:15) 담대히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의 고통에 너무 억눌리고 압도되어 있었으므로, 즐거움이나 자신감을 가지고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외부에는 투쟁이 있었고, 내부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사이에서 그는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즉 그가 지금 당하고 있는 치욕과 그의 친구들의 책망으로 인해 당황한 표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속으로도 혼돈을 겪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황망하게 되고 그는 거의 미쳐 버릴 것 같았다(시 88:15).

2. 그는 그 처형이 냉혹함을 원망하고 있다.

하나님은(그는 생각하기를) 실수할 때마다 그를 벌하셨을 뿐만 아니라, 매우 심하게 벌하셨다(16, 17절). 그의 환난은 다음과 같았다.

(1) 몹시 비판스러웠고, 지극히 기이했다. 하나님은 먹이를 찾아 달려 내려가는 "사자처럼 그를 사냥하셨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상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희귀한 환난을 주어 그를 많은 사람들 가운데 굉장한 인물, 이상한 존재로 만드심으로써 "그에게 주의 기이한 능력을 보이셨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큰 고통을 주시고, 또 욥이 그 많은 것을 참아내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의 고통을 매우 무겁게 만든 것은 그가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느낀 점이었다. 그것이 그 고통을 더욱 쓰고 무겁게 느끼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를 대적하는 "하나님의 증거"였고, 하나님의 불쾌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의 몸의 종기를 그의 영혼 속에 있는 상처로 만들었다.

(2) 그것은 여전히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조류가 바뀌고, 썰물이 시작되기를 그가 기대했을 때에도, 그것은 여전히 계속 높아지고 있었다. 그의 고통은 불어났고,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진노도 더욱 커졌다. 그는 그 자신이 더 나아질 방법이 없음을 알았다. 이 증거하는 자들은 다시 그를 쳤고, 만일 한 가지 증거가 그를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또 다른 증거가 올는지도 몰랐다. "군대가 갈마들어" 그를 치는 것 같았다. 만일 그에게 변화가 일어났다면, 그것은 결코 호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싸우는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우리는 비가 온 후에 구름이 낄 것을 예상해야 한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쓰라리고 날카로운 시련이 마지막을 위해 예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그와 싸우셨고 그것은 큰 변화였다. 그는 이전에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그 고통을 더욱 격하게 했고, 그것을 정말 기이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은 보통 그의 백성들에게 그 자신이 친절하심을 보이신다. 만일 어떤 때 그렇지 않은 태도를 보이신다면 그것은 "그의 기이한 역사이며 기이한 행위"이시다. 그리고 그는 그 속에서 그 자신이 기이함을 보이신다.

3. 욥은 그의 생명을 원망하고 있으며, 그가 태어나 이 모든 고통과 환난에 처하게 된 것을 원망하고 있다(18, 17절).

"만일 이것이 내 몫으로 정해진 것이라면, 내가 태에서 나오게 됨은 어찜이니이까? 내가 거기에서 질식되거나, 태어나면서 죽지 않은 것은 웬일이옵니까?"

이것은 감정적인 언어로서, 그가 전에 빠졌던 것과 똑같은 죄에 다시 빠지는 일이었다. 그는 방금 생명을 "은혜"라고 불렀건만(12절), 이제는 그것을 "짐"이라 부르면서, 그것을 주신 것에 대해, 또는 그것을 그에게 부과한 것에 대해 하나님과 다투고 있다. 카라일(Caryle)씨는 이에 대해 욥에게 호의적인 견해를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욥을 괴롭힌 것은(욥이 상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의 생활 상태가 그의 인생의 주요한 목적.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고 너그럽게 상상할 수 있다. 그의 수금은 버드나무에 걸려 있었고, 그는 하나님을 찬미하는 곡조를 전혀 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그의 환난이 하나님을 영화롭지 못하게 하고 그의 적에게 모독할 기회를 줄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기운이 끊어졌으면 하고 기원하고 있다. 믿음이 깊은 자는 만일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찬미하고 영화롭게 하지 못한다면 살 목적이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가 풀이한 뜻이 그렇다면 그것은 잘못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 속에서도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생명을 지나치게 사랑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왜냐하면 지혜롭고 선한 자들도 때로는 이러한 경우에 처하게 되어 그것을 원망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운이 끊어지고 아무도 우리를 보지 않기를 원하는 때가 올지도 모르는데, 왜 우리가 기운이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사람들의 눈에 띄이기를 갈구하겠는가? 왜 우리가 우리 자녀들이 어린 아기일 때 죽어 "있어도 없던 것 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겨진" 것을 슬퍼하면서, 때로 그것이 우리 자신의 몫이었기를 바라는가?

Ⅱ. 욥은 겸손히 간청하고 있다.

1.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환난을 목도하시고"(15절), 그의 사정을 인지하시어, 그것을 불쌍히 생각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다윗도 이와 같이(시 25:18),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이처럼 우리는 곤고 속에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해야 한다. 그리고 그가 역경 속에 있는 우리의 영혼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로 우리 스스로를 위로 할 수 있을 것이다.

2.하나님께서 그의 고통을 덜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만일 그의 고통이 제거될 수 없다할지라도 그는 약간의 휴식 기간을 가질 수 없겠는가? "주여 나를 언제나 고문대 위에 두지 마시고, 언제나 궁지 속에 넣지 마옵소서. 나를 버려두사, 저으기 평안하게 하옵소서"(20절). "내게 잠시 동안의 휴식을 잠시 숨을 쉴 시간을, 그리고 내 스스로 약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하소서." 그는 이것을 큰 은혜로 간주하고 있다. 항상 편안한 상태에 대해 충분히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은 그들이 끊임없는 환난 가운데 있게 된다면 한 시간의 편안함이 얼마나 귀한가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진술하고 있다.

(1) 생명과 그 빛은 매우 짧다.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20절). 분명히 그것은 매우 적습니다. 모든 날들이 비참하도록, 극도로 비참하도록 만들지 마옵소서. 내가 살 시간은 극히 적습니다. 생명이 지속되는 동안 나로 하여금 생명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소서."

이 기도는 하나님의 본성이 선하다는 사실에 곧 환난을 당하고 있는 영에게 매우 큰 위로가 되는 사실에 그 근거를 굳게 두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하나님께 긍휼을 간구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인다면("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는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부지런히 의무를 행하도록 하는 우리들 자신의 간구로서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렇다면 내 힘껏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많은 날들이 있을 영원의 날을 위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나는 시간을 보상하고 기회를 선용해야 할 것입니다."

(2) 죽음과 그 흑암은 매우 가까우며, 또한 매우 깊을 것이다(21, 22절).

"주여 내가 죽기 전에 나를 저으기 평안하게 하소서." 즉 "고통 속에서 죽지 않게 하소서."

다윗도 이처럼 간구하고 있다.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나이다(시 13:3). 그렇게 되면 내가 위안을 기대하기는 이미 늦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시 88:10) "내가 죽기 전에 잠시 위로를 얻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가 이 세상을 조용히 떠날 수 있게 하시며, 지금과 같이 이러한 혼돈 가운데 있게 하지 마소서." 이처럼 우리는 신실하게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처럼 신실하게 "주여, 내 속 사람을 새롭게 하소서. 주여 내가 죽기 전에 나를 성별케 하옵소서.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간구해야 한다.

그가 여기에서 죽은 자의 상태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1] 그것은 결박된 상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이러한 인생을 살기 위해 다시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다(7:10). 죽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 마지막 종말을 고해야 한다. 그 때에 몸은 그것이 오래 눕게 될 곳에 놓여져야 하며, 영혼은 그것이 영원히 처하게 될 상태를 판결받는다. 오직 한 번만 행해져야 하며, 또 영원을 위해 행해져야 하는 것은 훌륭히 행해질 필요가 있다.

[2] 그것은 매우 암울한 상태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보인다. 거룩한 영혼은 죽을 때 광명의 땅으로 옮겨지는데, 그곳에는 죽음이 없다. 그러나 그 몸이 남아있는 "이 땅은 어두워서 흑암같고 죽음의 그늘이 진" 곳이다. 욥은 다른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 그 자신도 죽음과 무덤에 대해 매우 두려운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로 하여금 그것을 원하도록 만든 것은 그가 지금 당하고 있는 극심한 비참함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같은 내용을 지닌 표현들을 여기에서 잔뜩 전개시키고 있다.

가서 무덤 속을 잠시 들여다 보자.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발견할 것이다.

  • 첫째, 그곳에는 순서가 없다.
    그곳은 "아무 구별이 없고," 영원한 밤이 계속되며 낮이 연속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동등하게 누워있고, 왕이나 농부나 모두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종이 상전에게서 놓인다"(3:19). 사람들이 무덤으로 들어가는 데에 있어서는 순서가 없다.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나 가장 부유한 자가 제일 먼저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가장 가난한 자가 먼저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단지 생명의 하나님께 정해 주신 각자의 순서대로 들어간다.
  • 둘째, 그곳에는 광명이 없다.
    무덤 속에는 짙은 흑암이 있으며, 그것은 실재로 느낄 수는 없으나, 생명의 빛을 즐기는 자들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흑암이다. 무덤 속에는 지식이 없고, 위로나 기쁨도 없으며, 하나님을 찬미함도 없고 또 우리 구원의 역사도 없다. 그러므로 광명도 없다. 욥은 매우 수치를 느끼고 있었으므로, 다른 사람들도 그의 상처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이 그것을 보기도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감추어 주고 덮어 줄 무덤의 흑암이 그에게는 반갑게 느껴졌을 것이다. 어둠이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행하고 일하는 것이 마땅하다. 무덤은 흑암의 땅이기 때문에 우리가 눈이 감져진 채 그곳으로 옮겨지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그 때는 모든 자가 일반이 될 것이다. 무덤은 인간에게 흑암의 땅이다. 따라서 그곳으로 간 우리의 친구들을 우리는 흑암에 둔 자로 간주한다(시 88:18). 그러나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거룩한 자들의 몸이 티끌이 되어 없어지고, 다른 티끌과 섞였더라도, 그 어느 몸도 상실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눈은 그 모든 티끌 위에 계시며, 그 몸은 위대한 날에 분리되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