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1월 30일 화요일 묵상구절 욥18:1-21 <빌닷의 두 번째 말>

Jeehyun 2024. 1. 30. 09:31

맥체인성경읽기

창세기 31, 마가복음 2, 에스더 7, 로마서 2

묵상구절

18:1-4 (자신들의 조언을 거부하는 욥을 향한 감정적 비판)

18: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18:2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18:3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

18:4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

18:5-21 (인과응보론적 욥의 고난 해석을 전제한 악인의 멸망 경고)

18:5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18:6 그의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

18:7 그의 활기찬 걸음이 피곤하여지고 그가 마련한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니

18:8 이는 그의 발이 그물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려들며

18:9 그의 발 뒤꿈치는 덫에 치이고 그의 몸은 올무에 얽힐 것이며

18:10 그를 잡을 덫이 땅에 숨겨져 있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목에 있으며

18:11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라게 하고 그 뒤를 쫓아갈 것이며

18:12 그의 힘은 기근으로 말미암아 쇠하고 그 곁에는 재앙이 기다릴 것이며

18:13 질병이 그의 피부를 삼키리니 곧 사망의 장자가 그의 지체를 먹을 것이며

18:14 그가 의지하던 것들이 장막에서 뽑히며 그는 공포의 왕에게로 잡혀가고

18:15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의 장막에 거하리니 유황이 그의 처소에 뿌려질 것이며

18:16 밑으로 그의 뿌리가 마르고 위로는 그의 가지가 시들 것이며

18:17 그를 기념함이 땅에서 사라지고 거리에서는 그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을 것이며

18:18 그는 광명으로부터 흑암으로 쫓겨 들어가며 세상에서 쫓겨날 것이며

18:19 그는 그의 백성 가운데 후손도 없고 후예도 없을 것이며 그가 거하던 곳에는 남은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

18:20 그의 운명에 서쪽에서 오는 자와 동쪽에서 오는 자가 깜짝 놀라리라

18:21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스페셜 포인트(18-19장)

18-19장

  • 욥과 친구들 간의 제이차 논쟁을 다루는 제15-21장의 연속 부분.
  • 여기서는 엘리바스의 제이차 변론과 읍의 반박 변론을 다루는 제15-17장에 이어 빌닷의 제이차 변론과 욥의 반박 변론을 다룬다.

<개관>

1. 18장

빌닷의 제이차 변론을 다룬다. 빌닷의 제이차 변론은 엘리바스의 제이차 변론에 대한 욥의 반론을 재반박하는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그 내용은 엘리바스의 제이 차 변론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무죄를 항번하는 욥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1) 1-4절

빌닷은 욥이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 즉 비록 명백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분명한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회개를 촉구하는 친구들을 비난하며 자기의 의를 거듭 주장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책망하며(1-4절)

2) 5-21절

악인이 받을 보응에 대하여 강도 높게 말함으로써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5-21절).

3) 빌닷의 변론은 합당했는가?

  • 비록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목하에 진행된 것이지만,
  • 사실은 욥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변하는 잘못된 것이었다.

즉 빌닷은

  • 하나님의 참된 뜻과 섭리를 깨닫고 그에 따라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 자기의 선입견과 인간의 제한적인 사고에 따라 독선적이고 감정적인 주장을 욥에게 퍼부은 것이다.

4) 빌닷의 모습 = 우리의 모습

이러한 빌닷의 변론의 태도는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흔히 발견되는 태도이다.

즉 우리도 어떤 사실을 주장함에 있어서

  •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내세우지만,
  • 사실은 자기의 생각을 말하고,
  • 하나님의 이름과 뜻은 자기의 주장의 신빙성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만 이용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 이는 그야말로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파는 실로 가증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이러한 모습을 버리지 않는다면

욥의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준엄한 책망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고 자기 합리화를 위해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을 이용하려 드는 등의 자세를 — 늘 경계해야 할 것이다.

5) 악인이 벌을 받을 것이라는 빌닷의 말에 담긴 진리

한편 빌닷의 주장 가운데 악인이 받을 보응에 관한 것은

  • 욥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일 뿐만 아니라 현세적 인과응보 사상에 입각한 것이라는 점에서 — 잘못된 것이기는 하지만,
  • 종말론적으로 보면 틀림없이 실현될 진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원한 작정과 계획에 따라 악인들에 대한 결정적인 심판을 세상 종말의 때로 유보하여 두셨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는 인과응보의 원리가 현실적으로 완벽하게 실현되지 않는다. 즉 이 세상에서는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부조리한 일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고, 또 실제로 번번히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 공의로우시기에 악을 절대 간과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제 세상의 종말이 이르면 악인들을 심판하여 영원한 어둠과 멸망에 던져 넣으실 것이다.

이는 비단 세상 마지막 때까지 생존하여 있는 악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이 세상 마지막 때가 되면 죽은 자들이 다 부활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며, 그들이 이 세상에서 행한 행위에 따라 엄정하게 보응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러 성도들은 부조리한 일이 가득한 이 세상 가운데서도 — 결코 악인의 꾀를 쫓거나 죄인의 길에 서지 말아야 할 것이다(시 1:1.2).

 

2. 19장

다음으로 제19장의 세 문단은 빌닷의 제이차 주장에 대한 욥의 반박 변론을 다룬다. 이를 좀 더 상술하여 보면,

1) 1-6절

욥은 친구들의 비논리적이면서도 일방적이고 비정한 변론을 반박 질책하며 자신의 고난이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니라 죄와 상관없이 단지 하나님께서 강력한 주권으로 억누르신 결과라고 주장한다.

2) 7-22절

이어 자신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시고 도리어 계속해서 고난을 가하신다고 원망하고 자기의 고난으로 인하여 형제와 친척과 친한 친구들, 손님들과 계집중들, 아내와 동족, 어린아이들까지도 자기를 버리고 업신여긴다고 탄식하면서 친구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처심으로 고난 당하는 자신을 동정할 것을 호소한다.

3) 23-29절

끝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번호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피력하며 그러한 확신에 근거하여 친구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다.


결론

이상에서 보듯 빌닷의 제이차 변론에 대한 읍의 반론은 제일차 논쟁에서의 엘리바스의 제이차 변론에 대한 반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욥은 여기서도 자신의 무죄함을 변론하고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원인을 죄에 대한 하나님외 정벌로 보는 친구들의 일방적인 매도에 대하여 반박•질책하며 자신에게 알 수 없는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향해 항변하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장의 변론에서 욥은

  • 불평과 원망 가운데서도, 후일에 자신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실 구속자가 등장할 것(25절)을 확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 내세의 소망을 바라보며(26절) 하나님의 궁극적인 개입을 신앙하는 면모를 보인다.
    ⇒ 이는 욥이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극심한 고난에 처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불가해한 현실 사이에서 극심한 내적 혼란에 빠져 번뇌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욥의 구속자 사상

한편 여기서 욥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구속자의 등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물론 이는 욥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고통에서 건져주실 것임을 신앙 고백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구속사라는 보다 원대한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 곧 인간의 모든 질고의 원인이 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실 구속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을 예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욥은

  • 아직 특별 계시가 완성되지 않은 시점에서 인류 구속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알지는 못하였지만,
  • 자신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고 또 하나님이 해결하여 주실 것이라는 신앙 고백을 통하여,
  • 장차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인류의 근원적 문제를 헤걸하여 주실 것임을 예언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인류 구속이라는 구속사적 진리
→ 어느 순간에 생겨난 신학 사상이 아니라 이미 고대로부터 있어왔으며,
시간의 흐름과 추가적 특별 계시가 주어짐에 따라 점진적으로 구체화되고 완성된 것이라는 구속사의 연속성과 점진적 발전 사상을 일깨워 준다


1. 옥스퍼드 단락별 서론

1) 욥18:1-4 (자신들의 조언을 거부하는 욥을 향한 감정적 비판)

 💡 본문은 이러한 빌닷의 제이차 변론의 전반부로서 자신들의 조언을 거부하는 욥을 향한 감정적 비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먼저 빌닷은 욥이 자기를 변호하기 위해 헛된 말을 계속 지어내고 있다고 비난하였습니다(2절).
  2. 또 그는 욥이 자신들의 선의의 조언을 묵살하고 경멸하며 친구들을 짐승과 더러운 자로 취급하고 있다고 격렬하게 비난하였습니다(3절).
  3. 계속해서 욥이 16:9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짖는다고 말한 것을 반박하여 그의 삶을 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 자신이라고 질타하였습니다(4절).

우리는 이러한 빌닷의 변론을 보면서 그가 욥에 대하여 감정적으로 매우 격앙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즉 적어도 제일차 변론에서만 해도 논리적인 변론으로 욥의 고난의 원인이 그의 죄에 있음을 지적하여 그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하고자 하였던 빌닷은 욥이 자신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비난하자 감정이 격앙되어 마치 싸움닭과 같이 극단적인 감정 표현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빌닷은 욥에 대하여 “너희”란 2인칭 복수를 사용하고 있는데,

  • 이는 그가 욥을 보편적 악인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 이는 결국 빌닷이 자기 감정을 못이기고 욥을 친구가 아닌 악인의 하나로 취급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 18:5-21 (인과응보론적 욥의 고난 해석을 전제한 악인의 멸망 경고)

💡 여기서는 자신들의 조언을 거부하는 욥을 향한 감정적 비판을 기록하고 있는 전반부 1-4절에 이어 욥의 고난에 대한 인과응보론적 해석에 근거하여 악인의 파멸을 경고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5-14절

악인이 필연적으로 처하게 될 파멸의 앙상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1. 먼저 빌닷은 악인의 빛이 꺼지고 그 장막이 어두워진다는 표헌을 통해 악인의 운명을 서술합니다(5.6절).
  2. 이는 악인이 경제적으로 파탄을 당하고 그의 세력이 쇠약해질 것임을 경고한 것입니다.
  3. 이어 악인의 발걸음은 들리고 결국 그는 멸망하는 짐승처럼 올무와 함정에 빠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7-10절).
  4. 그리고 재앙이 그에게 닥처고 사망이 그를 찾아오게 된다고 하였습니다(11-14절).
  5. 다음으로 악인의 파멸로 인한 허망한 최후 상황을 열거하고 있습니다(15-20절)
  6. 즉 악인의 번영은 하나님의 징계로 완전히 근절되며, 악인의 명성과 자손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7. 끝으로 21절에서는 악인의 파멸의 확실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빌닷이 악인의 파멸에 대하여 언급하는 이유는 자명함니다.
  8. 그것은 욥이 바로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현재 악인들과 동일한 파멸의 상황에 처했음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사실 빌닷이 말하는 악인은 이름만 언급되지 않았을 뿐 욥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면 틀림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언급된 악인의 파멸 과정은 거의 욥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는 이미 2절에서 읍을 악인의 범주에 포함시켜 말한 바 있어서 본문의 악인이 욥을 지칭한다는 것은 더욱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이렇게 볼 때 빌닷은 욥에 대하여 매우 큰 감정적 적대감을 가지고 대하고 있음을 거듭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로 빌닷은 현세적 인과응보론적 사상에 근거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는 욥을 악인으로 규정하는 일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이 파멸의 길로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궁극적이고 종말론적인 것이요, 현세상에서 고난의 상황이 그것을 당하는 자를 악인이라고 규정할 만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빌닷의 주장은 지극히 모순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며 욥을 극악한 죄인으로 매도하고 그가 지금까지 당한 모든 일이 죄의 결과라는 주장은 옳지 못한 것일 뿐 아니라 잔인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욥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언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옥스퍼드 결론

💡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장 전체는 빌닷의 제2차 변론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빌닷의 변론은 일차 변론보다 더 격화된 엘리바스의 제2차 변론에(15장) 대한 욥의 답변과(16,17장) 깊은 관련을 갖는다.

욥은 악인의 비참한 최후를 강조하며 자신을 일방적으로 정죄하는 엘리바스의 공격에 대하여 일일이 답변하기보다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토로하며 하나님께 중보를 호소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 이러한 욥의 태도는 빌닷을 강하게 자극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 빌닷은 자신들의 조언을 거부하는 욥을 향하여 감정적인 비판을 가하였을 뿐 아니라,
  • 장황한 열거법을 사용하여 악인이 필연적으로 처하게 될 파멸과 허망한 최후의 상황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빌닷은 논중의 강도를 높였지만 그 논지는 제1차 변론에서의 자신의 논지나 앞선 엘리바스의 제2차 번론의 논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즉 빌닷은 현세적 • 도식적 인과응보론에 입각하여 욥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데서 한 걸음도 더 진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빌닷의 경직된 논리는 또 다시 제19장의 욥의 반론을 불러일으킨다.
→ 고난 당한 친구를 위로하고 동정하기는커녕 저주에 가까운 독설을 통하여 제압하려고만 하는 그의 태도는 또다시 욥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매튜헨리 주석

빌닷의 두 번째 연설(욥기 18:1-4)

여기에서 빌닷은 심한 말로 불쌍한 욥을 향하여 쏘아대고 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현명하고 선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욥에게 고통을 더 하고자 하는 사탄의 계획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다.

Ⅰ. 빌닷은 엘리바스처럼(15:2, 3), 지루하고 긴 말로 욥을 책망하고 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말을 찾겠느냐?"(2절)

빌닷은 여기에서 욥뿐만 아니라(엘리바스와 소발이 아마도 그들이 해야 하는 의도에 알맞는 말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서), 그와 대담을 나누었던 모든 사람들을 책망하고 있다. 또는 비록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그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 욥의 편을 들어 호의에 찬 말을 들려 준 자들을 책망했다고는 볼 수 있다. 빌닷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가 지루했고, 그의 차례가 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릴 수 없었다. 이러한 태도는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듣기는 속히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혜롭다는 평판을 독점하려 하고, 그들에게 유리한 데로 이끌어 나가려고 주장하는 것이 논쟁하는 자들의 일반적인 심리이다. 다른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가 얼마나 합당치 못한 것인가를 모든 사람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자신 속에서 이러한 결점을 발견하는 자는 매우 드물다.

드디어 모든 논쟁자들의 말을 욥이 종식시켰다(29:22). "내가 말한 후에 그들이 말을 내지 못하였다." 그때 욥은 강했고 번영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황폐하고 천한 상태에 있으므로, 그가 거의 한마디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이 이전에는 존대함을 얻었으나, 이제는 마구 비방당했다. 그러므로 "지혜는(세월이 지남에 따라) 유업과 함께 하여야 아름답다"(전 7:11). 왜냐하면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해서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전 9:16).

Ⅱ. 빌닷은 욥이 자기가 말한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을 책망했다.

이것은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무리 합당한 말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듣는 자가 관심을 가지고 깨닫지 않는다면, 아무리 말해야 소용없는 일이다. "너희 귀를 열어 학자같이 알아 듣게 하라." 그러면 학자의 혀가 유익을 행할 것이다(사 50:4) 그렇지 않고서는 유익을 행할 수 없다. 듣는 자가 청종 할 때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자는 큰 힘을 얻는다.

Ⅲ. 빌닷은 욥이 자기 친구들과 그들의 제안을 거만하게 멸시하고 무시했다고 하며 그를 책망했다(3절).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느냐?"

이것은 불쾌감을 일으키는 말이었다. 욥은 실지로 그들을 "조롱하는 자"라고 불렀고, 그들이 지혜롭지 못하고 불친절하며 분별력과 온유함이 결여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그들을 짐승으로 간주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빌닷은 이 문제를 그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1. 그 이유는 욥이 말한 것이 마치 말할 수 없이 모욕적인 것이었던 것처럼 생각하고 그의 교만한 마음 그것에 대해 화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만한 자들은 그들 자신이 실제보다는 더 무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2. 그의 격한 마음이 욥을 학대할 구실을 찾아내고자 한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냉혹하게 대하고자 하는 자들은 먼저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그렇게 대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Ⅳ. 빌닷은 욥이 격분하고 있는 것을 책망했다.

"너는 분하여 스스로 찢는 자로다"(4절).

여기에서 그는 욥이 전에 말한 것을 상기한 것 같다(13:14).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그것은 너의 잘못이다"라고 빌닷은 말했다. 또는 욥이 16장 9절에서 한 말을 상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서 욥은 하나님을 또한 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엘리바스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으신다." "아니다." 빌닷이 말했다. "그것은 너 혼자의 책임이다." "그는 분하여 스스로 찢었다"는 것이다. 분노는 그 스스로를 심판하는 죄이다. 격하게 논하는 자들은 그들 자신을 찢고, 괴롭히게 된다. "그는(말 그대로) 자기 영혼을 찢는다." 즉 모든 죄악은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그것을 찢고 해하며(잠 8:36), 특히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게 한다.

Ⅴ. 빌닷은 욥이 교만하고 오만한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까지도 흔들어 놓으려 한다고 책망한다.

"너를 위하여 땅이 버림을 당하겠느냐? 분명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한 사람의 마음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의 법칙이 바뀌고, 통치의 원리가 변동될 리가 없다. 욥, 네가 없으면 세상이 설 수 없다고 생각하며, 네가 망하면 모든 세상도 망하고, 너와 함께 버림을 당한다고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스스로 정당화시키는 욥에 대한 책망으로 보고 있으며, 욥이 악인이었거나,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고 하나님께서 땅을 버리시고 만세 반석을 옮기시라고 추측해야 된다는 그릇된 견해를 시사하고 있다. 그것은 오히려 그의 격렬한 원망에 대한 당연한 책망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사건을 가지고 논쟁을 벌린다면, 우리가 어떤 일을 당했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는다.

  1. 섭리는 영원한 목적과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다.
  2. 그것은 기록된 말씀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우리가 매일 죄를 범하므로 우리는 그것에 대한 징벌을 각오해야 한다.
  3.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인 방법과 관례, 그리고 섭리의 법칙에 의한 것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우리를 즐겁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이 바뀌고 그의 방법이 달라지고 그의 말씀이 실현되지 않기 바라는 것은 어리석고 불합리한 생각으로서, 마치 "우리를 위하여 땅이 버림을 당하고,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악인의 비참한 상태(1)(욥기 18:5-10)

빌닷의 나머지 연설은 모두 악인의 비참한 상태를 훌륭히 묘사해 놓은 것으로서, 여기에서 많은 진리가 들어있다. 그리고 잘 음미해 본다면, 악인의 상태는 슬픈 것이며, 그가 죄를 회개하지 않을 때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게 하는데 매우 훌륭한 유익을 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눈에 볼 수 있고 또 누구나 알 수 있게 비참한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큰 환난과 고통에 빠지는 자들은 "따라서" 악한 자로 간주되고 판단 받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빌닷이 이러한 사실을 욥에게 쉽게 적용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확실한 것도 아니고, 또 공평한 것도 아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악인의 멸망이 흑암으로 비유되고 예언되었다(5, 6절).

"악인의 빛은 꺼지리라."

그의 빛 중에 가장 훌륭하고 밝은 것이라 할지라도 꺼질 것이다. 그가 기뻐했던 것조차 그를 실망시킬 것이다. 또는 이 말은 큰 환난 가운데 빠져 있으며, 이제 곧 침상으로 삼아야 할 그 흑암에 대해 욥이 불평하는 것을 지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그렇다." 빌닷은 말했다. "너는 근심에 둘러 싸였고, 곤경에 처했다. 그리고 비참한 상태가 되어 더 나아지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악인의 빛은 꺼지므로, 너의 것도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악인은 잠시동안 안으로는 빛을 얻고, 즐거움과 기쁨을 그리고 소망을 어느 정도 누릴 것이며, 밖으로도 재물과 영예의 능력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빛은 일순간의 섬광일 뿐(5절), 곧 꺼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타서 사그라지고 쉽게 꺼지는 등불에 지나지 않는다(6절). 그것은 여호와의 빛(곧 햇빛)이 아니라, "그의 불빛"이며 "그가 피운 횃불"이다(사 50:11).
  2. 그의 빛은 드디어 조용히 꺼질 것이다. 그리하여 한 줄기의 빛도 남지 않아, 다른 횃불을 피울 수 없을 것이다. 그가 그의 장막 안에 있는 한, 즉 그가 영원의 장막인 육신 안에 있는 한(고후 5:1), 그 빛은 어두울 것이다. 그는 참되고 견고한 위로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를 만족시킬 기쁨도 얻지 못하고, 그를 지탱시켜 줄 소망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 안에 있는 빛이 어두워진다." 그러면 "그것은 얼마나 어두울 것인가." 그러나 그가 죽음에 의해 그의 장막을 벗어나게 될 때, 그의 빛은 그와 함께 꺼질 것이다. 그의 생명이 끝날 때 그의 모든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고, 모든 그의 소망은 끝없는 절망으로 변할 것이다. "악인이 죽을 때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잠 11:7), 그는 슬퍼하며 누우리라."

Ⅱ. 악인의 멸망에 대한 비유가 덫에 잡힌 짐승과 새, 혹은 체포된 후 처벌하려고 가두어 둔 범인으로 묘사되어 있다(7-10절).

  1. 사탄이 그를 멸망시키려고 준비하고 있다. 그는 "몸을 올무에 얽는 자"이다(9절). 그는 처음부터 살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약탈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유혹자로서 죄인들이 가는 곳마다 올무를 놓아 그들을 얽을 것이다. 만일 사탄이 그들을 자기처럼 죄를 짓게 만든다면, 그는 또한 그들을 자기처럼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 그는 "귀한 생명을 노린다."
  2. 그는 계속 죄의 길로 행하여 그 자신의 멸망을 스스로 자초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진노의 날에 임할 진노를 쌓는다." 하나님은 그를 버리사 그의 뜻대로, 원하는 대로 행하게 내버려 두신다. 그리하여 그는 "그 베푼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다"(7절). 그의 악한 계획과 탐구가 그를 재앙 속에 빠지게 한다. "그 발이 스스로 그물에 들어가"(8절), 그 자신의 멸망을 초래하여,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힌다"(시 9:16). 또 "그의 혀가 그를 해한다"(시 64:8). "악인의 범죄함에도 그를 얽는 덫이 있다."
  3. 하나님은 그의 멸망을 준비하고 계신다. 죄인은 그의 죄로써 연료를 준비하고, 하나님은 진노로써 불을 마련하신다. 다음을 살펴보자.

(1) 죄인은 매우 열심히 스스로 덫에 얽혀든다.
하나님은 악인이 열중하고 있는 것을 멸하실 것이다.

(2) 그는 크게 낭패케 된다.
"그 강한 걸음이," 그의 강한 계획과 노력이 "곤비하여 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뜻한 것을 이루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빠져나가려고 할수록 더욱 단단히 묶일 것이다. 악인은 더욱 패망케 된다.

(3) 그는 감금되어 그를 좇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 발꿈치는 창애에 치일 것이다." 그가 그를 쫓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것은 사람이 추격자로부터 도망하는 것보다 더욱 어렵다.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신다"(벧후 2:9).


악인의 비참한 상태(2)(욥기 18:11-21)

빌닷은 악인들을 위해 저 세상에 마련되어 있으며, 또 때로는 이 세상에서도 그들에게 엄습하고 있는 멸망에 대해 여기에서 묘사하고 있다. 죄인의 끝나는 날이 얼마나 비참한 가를 와서 보라.

Ⅰ. 악인이 자기의 죄책감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끊임없는 공포 때문에 놀라고 낙담하는 것을 보라(11, 12절).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랠 것이다."

양심의 가책에서 오는 두려움이 그를 괴롭히므로, 그는 결코 편할 수가 없다. 그가 어디를 가든지, 이것은 그를 따를 것이다. 따라서 그가 어디를 보든지, 이것은 그를 정면으로 노려볼 것이다. 그 자신이 모든 피조물의 대항을 받고 있으며, 하늘이 그를 향해 얼굴을 찡그리고, 지옥이 그를 행해 입을 벌리며, 땅이 그를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는 떨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의 가슴 속에 자신을 고소하고 괴롭히는 양심을 가진 자는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양심의 가책 때문에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는"(잠 28:1), 악인과도 같이  그의 발을 쫓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발도 그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그의 발은 올무에 단단히 얽혀있기 때문이다(9절). 죄인은 잠시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이기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힘에서 도망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암 9:2, 3). 죄인이 두려움으로 인하여 용기를 잃고 당황하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 왜냐하면 그는 그의 멸망이 다가옴을 보기 때문이다. "그 곁에는 재앙이 기다릴 것이요," 공의가 명할 때면 언제고 그는 잡히어 "졸지에 황폐케 될 것이다"(시 73:19).
  2. 왜냐하면 그가 그것을 피하거나, 그 밑에서 견뎌낼 수 없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가 의지하던 "그 힘"(즉 그의 부귀와 권력, 허영, 친구 그리고 그 영의 가혹함)은 그것이 필요할 때에는 "기근을 인하여 쇠할 것이다." 즉 그것은 굶주린 자가 굶주림을 물리치기 위해 일하고 싸우는 것보다도 더 나은 도움을 그에게 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일들이 그에게 두려움을 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죄악의 길은 두려움의 길이며, 영원한 혼돈으로 인도 한다. 이 불결하고 불안한 양심에 대한 공포는 가인과 유다에게서와 같이 영원한 파멸의 전조이다.

Ⅱ. 악인이 비참한 죽음에 삼키우는 것을 보라. 그의 생이 매우 안이하고 즐거웠을지라도, 악인의 죽음은 정말 비참하다.

  1. 악인이 죽는 것을 보라. "사망의 장자"(일반적인 죽음보다도 더 무섭고 강한 즉 고린도 후서 1장 10절에서 "이같이 큰 사망"이라고 일컫고 있듯이 놀라운 힘과 무서움을 지니고 있는 죽음의 사신)에 의해 체포되고 "그 지체를 먹는" 죽음의 선발대에 의해 쇠약해 질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그의 뼈를 썩게 하고 삭아 닳도록 만들 것이다. "그가 그 의뢰하던 장막에서 뽑힐 것이다"(14절). 즉 그를 도우리라고 믿던 그 모든 것이 그로부터 떠나, 그는 의뢰할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심지어 그 자신의 장막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의뢰했으나, 땅에 걸리적거리는 나무와도 같이 그의 몸의 장막에서 뽑혀질 것이다. "네 영혼이 너를 떠날 것이다."
  2. 악인이 죽은 것을 보라. 그리고 믿음의 눈을 통해 그가 어떻게 비치는가를 보라.

(1) 악인은 "공포의 왕"에게로 잡혀간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무서움으로 둘러싸여 있었고(11절), 죽음은 모든 두려움의 왕이었다. 모든 두려움의 죽음의 이름으로 죄인을 대적하여 싸웠다. 죄인들이 "일생에 매어 종노릇 하는" 것은 죽음 때문이었다(히 2:15). 마침내 그들은 정복자에게 붙잡힌 포로와도 같이 그들이 오랫동안 두려워했던 곳으로 잡혀갈 것이다. 죽음은 만물에게 두려운 것이다. 우리 주님도 "아버지여 나를 이 때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악인에게 이것은 특별히 "두려움의 왕"이 되어, 그 인생들에게 행복의 종지부를 가져다 주고, 또 그들에게 끝없는 재앙의 길을 열어 준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얼마나 행복하고 얼마나 큰 주 예수의 은혜를 입고 있는가! 주 예수는 그들의 죽음을 면케 하셨고, 그 양상을 달리하여 두려움의 왕을 친구와 종이 되게 하셨던 것이다.

(2) 악인은 "광명 중에서 흑암으로 몰려 들어가고"(18절), 이 세상 빛과 그 속의 번영하던 상태에서 흑암, 무덤의 흑암, 빛을 볼 수 없으며(시 49:19), 가는 빛줄기도 볼 수 없고, 그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완전한 흑암으로 몰려 들어간다.

(3) 악인은 "세상에서 쫓겨날 것이다."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처럼, 그의 뜻과는 반대로, 죽음의 사자에 의해 급히 세상에서 쫓겨 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의 낙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여기에 머무르고 싶어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그는 떠나기를 싫어하나, 가야만 한다. 모든 세상이 그를 싫어하여 그를 쫓아내려 하고 있으므로, 그를 제거하는 것을 기뻐한다. 이것이 악인의 죽음이다.

Ⅲ. 악인의 가족이 망하고 죽임당하는 것을 보라(15절).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그의 머리와 가슴 뿐만 아니라, 그의 집에도 역시 임하여, 그들과 함께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른다(슥 5:4). 죽음은 그의 장막에 거하고, 그를 쫓아낸 후 그 집을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온갖 두려움과 멸망만을 남겨다 줄 것이다. 그가 거하던 곳까지도 그 주인의 잘못으로 인해 멸망시킬 것이다. "유황이 그 처소에 뿌려질 것이다." 이것은 소돔 땅 위에 유황이 빗발처럼 내려 멸망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서 빌닷은 욥의 양들과 그의 종들이 하늘로부터 내린 불로 타 죽은 사건을 지적하며 욥을 책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의 장막이 이처럼 멸망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나와 있다.

—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원래의 주인으로부터 부당하게 취해 지녀온 것이었으므로 그는 그 기쁨을 기대할 수 없고 또 그것이 지속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의 자손들도 그와 함께, 혹은 그 후에 멸망할 것이다(16절). 즉 "아래에서는" 그 자신 안에 있는 "그 뿌리가 마르고, 위에서는 그 가지(그 집안의 모든 자손)가 찍힐 것이다." 이처럼 여로보암의 족속들과 바아사, 아합의 족속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 어느 누구도 살아 남지 못했다. 땅에 뿌리박은 자들은 이처럼 말림을 당하리라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는다면, 우리의 잎들도 시들지 않을 것이고, 뿐만 아니라 가지도 잘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 가문의 참된 영예와 그 가지의 번영을 생각하는 자들은 죄로 인해 그것이 시드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다.

악인의 집안이 근절됨이 다시 언급되어 있다(19절).

"그는 아들도 없고 손자도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재산을 즐기거나 그의 이름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거하던 곳에는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을 것이다." 죄는 후손들에게 저주를 임하게 하며, 아버지의 범죄가 때때로 그 자손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여기에서 빌닷은 욥의 자손과 종의 죽음을 상기하면서, 욥이 사악한 자라는 것을 더욱 책망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자손이 없었던 자들이 모두 은혜를 입지 못한 자들은 아니다. "자녀보다도 더 나은" 것도 있기 때문이다.

Ⅳ. 악인에 대한 기억이 그와 함께 묻히거나 또는 추한 것으로 남는 것을 보라. 그는 잊혀지거나, 아니면 명예스럽지 못한 화제에 오를 것이다(17절).

"그의 기념이 땅에서 없어지리라." 만일 그것이 그곳에서 없어진다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도들의 이름과는 달리 결코 하늘에 적히지 않기 때문이다(눅 10:20). 그의 모든 영예는 흙 속에 묻혀 소멸되거나, 영원한 오점으로 얼룩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이 거리에서 전함이 없을 것이며," 아무도 그것을 원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죽은 후에도 그의 영혼이 비참하다는 표시로서, 그리고 영원한 수치와 치욕과 함께 심판의 날에 일어서게 되리라는 증거로서, 하나님의 심판이 죽은 후에도 이 세상에서 이처럼 그를 따른다.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으리라"(잠 10:7).

Ⅴ. 악인의 패망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놀라는 것을 보라(20절).

그처럼 갑자기 그 상황이 변하고, 그처럼 무서운 처벌이 가해지면, 그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그처럼 위협적인 것을 보는 자들은 매우 놀랄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좇다가 그 소식을 들은 자들도 놀랄 것이다. 그들의 귀는 쭈뼛해지고 가슴은 떨려 "주의 심판은 어찌 그리 두려운지요" 하고 외칠 것이다. 완전히 멸망한 장소나 사람은 "놀램거리가 될"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신 28:37;  고후 7:21; 렘 25:9, 18). 무서운 죄는 놀라운 심판을 초래한다.

Ⅵ. 족장시대의 일치된 의견을 보라.

그것은 하나님의 지식과 그 섭리에 대한 세심한 관찰에 근거한 것이다(21절).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즉 형편)도 그러하니라." 이 악한 세상의 사악함의 발단과 종국은 어떠한가 보라.

  1. 그 발단은 하나님을 모르는 고의적인 무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해 이미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용서 받을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모든 죄를 범한다. 바로는 여호와를 몰랐으므로 그의 음성에 복종하려 하지 않았다.
  2. 그 종말은 완전한 파멸이다. "불의한 자의 집은 이처럼" 비참하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형벌이 임하게 된다(살후 1:8). 명예를 빼앗아, 그것이 없는 자에게 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운 마음을 품고,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자. 죄의 결과는 반드시 비참하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