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2월 12일 월요일 묵상구절 욥33:1-37:24 <엘리후가 욥에게 하는 말>

Jeehyun 2024. 2. 12. 22:12

맥체인성경읽기

창세기 45, 마가복음 15, 욥기 11, 로마서 15

묵상구절

33장

33:1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내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

33:2 내가 입을 여니 내 혀가 입에서 말하는구나

33:3 내 마음의 정직함이 곧 내 말이며 내 입술이 아는 바가 진실을 말하느니라

33:4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33:5 그대가 할 수 있거든 일어서서 내게 대답하고 내 앞에 진술하라

33:6 나와 그대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33:7 내 위엄으로는 그대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손으로는 그대를 누르지 못하느니라

33:8 그대는 실로 내가 듣는 데서 말하였고 나는 그대의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33:9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고 불의도 없거늘

33:10 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시며 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사

33:11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33:12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33:13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

33:14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

33:15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에 환상을 볼 때에

33:16 그가 사람의 귀를 여시고 경고로써 두렵게 하시니

33:17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33:18 그는 사람의 혼을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을 칼에 맞아 멸망하지 않게 하시느니라

33:19 혹은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33:20 그의 생명은 음식을 싫어하고 그의 마음은 별미를 싫어하며

33:21 그의 살은 파리하여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던 뼈가 드러나서

33:22 그의 마음은 구덩이에, 그의 생명은 멸하는 자에게 가까워지느니라

33:23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중보자로 함께 있어서 그의 정당함을 보일진대

33:24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33:25 그런즉 그의 살이 청년보다 부드러워지며 젊음을 회복하리라

33:26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말미암아 기뻐 외치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의 공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

33:27 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범죄하여 옳은 것을 그르쳤으나 내게 무익하였구나

33:28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

33:29 실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

33:30 그들의 영혼을 구덩이에서 이끌어 생명의 빛을 그들에게 비추려 하심이니라

33:31 욥이여 내 말을 귀담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말하리라

33:32 만일 할 말이 있거든 대답하라 내가 기쁜 마음으로 그대를 의롭다 하리니 그대는 말하라

33:33 만일 없으면 내 말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지혜로 그대를 가르치리라

34장

34:1 엘리후가 말하여 이르되

34:2 지혜 있는 자들아 내 말을 들으며 지식 있는 자들아 내게 귀를 기울이라

34:3 입이 음식물의 맛을 분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34:4 우리가 정의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

34:5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부인하셨고

34:6 내가 정당함에도 거짓말쟁이라 하였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화살로 상처를 입었노라 하니

34:7 어떤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비방하기를 물마시듯 하며

34:8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패가 되어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34:9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

34:10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34:11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

34:12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34:13 누가 땅을 그에게 맡겼느냐 누가 온 세상을 그에게 맡겼느냐

34:14 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과 목숨을 거두실진대

34:15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34:16 만일 네가 총명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34:17 정의를 미워하시는 이시라면 어찌 그대를 다스리시겠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이를 그대가 정죄하겠느냐

34:18 그는 왕에게라도 무용지물이라 하시며 지도자들에게라도 악하다 하시며

34:19 고관을 외모로 대하지 아니하시며 가난한 자들 앞에서 부자의 낯을 세워주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라

34:20 그들은 한밤중에 순식간에 죽나니 백성은 떨며 사라지고 세력 있는 자도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제거함을 당하느니라

34:21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34:22 행악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

34:23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

34:24 세력 있는 자를 조사할 것 없이 꺾으시고 다른 사람을 세워 그를 대신하게 하시느니라

34:25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행위를 아시고 그들을 밤 사이에 뒤집어엎어 흩으시는도다

34:26 그들을 악한 자로 여겨 사람의 눈 앞에서 치심은

34:27 그들이 그를 떠나고 그의 모든 길을 깨달아 알지 못함이라

34:28 그들이 이와 같이 하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상달하게 하며 빈궁한 사람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들리게 하느니라

34:29 주께서 침묵하신다고 누가 그를 정죄하며 그가 얼굴을 가리신다면 누가 그를 뵈올 수 있으랴 그는 민족에게나 인류에게나 동일하시니

34:30 이는 경건하지 못한 자가 권세를 잡아 백성을 옭아매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34:31 그대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죄를 지었사오니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겠나이다

34:32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나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하였는가

34:33 하나님께서 그대가 거절한다고 하여 그대의 뜻대로 속전을 치르시겠느냐 그러면 그대가 스스로 택할 것이요 내가 할 것이 아니니 그대는 아는 대로 말하라

34:34 슬기로운 자와 내 말을 듣는 지혜 있는 사람은 반드시 내게 말하기를

34:35 욥이 무식하게 말하니 그의 말이 지혜롭지 못하도다 하리라

34:36 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

34:37 그가 그의 죄에 반역을 더하며 우리와 어울려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35장

35:1 엘리후가 말을 이어 이르되

35:2 그대는 이것을 합당하게 여기느냐 그대는 그대의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이냐

35:3 그대는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범죄하지 않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묻지마는

35:4 내가 그대와 및 그대와 함께 있는 그대의 친구들에게 대답하리라

35:5 그대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구름을 바라보라

35:6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35:7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35:8 그대의 악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요 그대의 공의는 어떤 인생에게도 있느니라

35:9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군주들의 힘에 눌려 소리치나

35:10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자가 없구나

35:11 땅의 짐승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가르치시고 하늘의 새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지혜롭게 하시는 이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이도 없구나

35:12 그들이 악인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부르짖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음은

35:13 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35:14 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판단하심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말하는 그대일까보냐

35:15 그러나 지금은 그가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고 악행을 끝까지 살피지 아니하셨으므로

35:16 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36장

36:1 엘리후가 말을 이어 이르되

36:2 나를 잠깐 용납하라 내가 그대에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말이 있음이라

36:3 내가 먼 데서 지식을 얻고 나를 지으신 이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

36:4 진실로 내 말은 거짓이 아니라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가 그대와 함께 있느니라

36:5 하나님은 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사

36:6 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며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며

36:7 그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들과 함께 왕좌에 앉히사 영원토록 존귀하게 하시며

36:8 혹시 그들이 족쇄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36:9 그들의 소행과 악행과 자신들의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36:10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

36:11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

36:12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

36:13 마음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이 속박할지라도 도움을 구하지 아니하나니

36:14 그들의 몸은 젊어서 죽으며 그들의 생명은 남창과 함께 있도다

36:15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

36:16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대를 환난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넉넉한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즉 무릇 그대의 상에는 기름진 것이 놓이리라

36:17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그대에게 가득하였고 심판과 정의가 그대를 잡았나니

36:18 그대는 분노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많은 뇌물이 그대를 그릇된 길로 가게 할까 조심하라

36:19 그대의 부르짖음이나 그대의 능력이 어찌 능히 그대가 곤고한 가운데에서 그대를 유익하게 하겠느냐

36:20 그대는 밤을 사모하지 말라 인생들이 밤에 그들이 있는 곳에서 끌려 가리라

36:21 삼가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 그대가 환난보다 이것을 택하였느니라

36:22 하나님은 그의 권능으로 높이 계시나니 누가 그같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36:23 누가 그를 위하여 그의 길을 정하였느냐 누가 말하기를 주께서 불의를 행하셨나이다 할 수 있으랴

36:24 그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높이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의 일을 찬송하였느니라

36:25 그의 일을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나니 먼 데서도 보느니라

36:26 하나님은 높으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의 햇수를 헤아릴 수 없느니라

36:27 그가 물방울을 가늘게 하시며 빗방울이 증발하여 안개가 되게 하시도다

36:28 그것이 구름에서 내려 많은 사람에게 쏟아지느니라

36:29 겹겹이 쌓인 구름과 그의 장막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깨달으랴

36:30 보라 그가 번갯불을 자기의 사면에 펼치시며 바다 밑까지 비치시고

36:31 이런 것들로 만민을 심판하시며 음식을 풍성하게 주시느니라

36:32 그가 번갯불을 손바닥 안에 넣으시고 그가 번갯불을 명령하사 과녁을 치시도다

36:33 그의 우레가 다가오는 풍우를 알려 주니 가축들도 그 다가옴을 아느니라

37장

37:1 이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떨며 그 자리에서 흔들렸도다

37:2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

37:3 그 소리를 천하에 펼치시며 번갯불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시고

37:4 그 후에 음성을 발하시며 그의 위엄 찬 소리로 천둥을 치시며 그 음성이 들릴 때에 번개를 멈추게 아니하시느니라

37:5 하나님은 놀라운 음성을 내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37:6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 적은 비와 큰 비도 내리게 명하시느니라

37:7 그가 모든 사람의 손에 표를 주시어 모든 사람이 그가 지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37:8 그러나 짐승들은 땅 속에 들어가 그 처소에 머무느니라

37:9 폭풍우는 그 밀실에서 나오고 추위는 북풍을 타고 오느니라

37:10 하나님의 입김이 얼음을 얼게 하고 물의 너비를 줄어들게 하느니라

37:11 또한 그는 구름에 습기를 실으시고 그의 번개로 구름을 흩어지게 하시느니라

37:12 그는 감싸고 도시며 그들의 할 일을 조종하시느니라 그는 땅과 육지 표면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명령하시느니라

37:13 혹은 징계를 위하여 혹은 땅을 위하여 혹은 긍휼을 위하여 그가 이런 일을 생기게 하시느니라

37:14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

37:15 하나님이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그 구름의 번개로 번쩍거리게 하시는 것을 그대가 아느냐

37:16 그대는 겹겹이 쌓인 구름과 완전한 지식의 경이로움을 아느냐

37:17 땅이 고요할 때에 남풍으로 말미암아 그대의 의복이 따뜻한 까닭을 그대가 아느냐

37:18 그대는 그를 도와 구름장들을 두들겨 넓게 만들어 녹여 부어 만든 거울 같이 단단하게 할 수 있겠느냐

37:19 우리가 그에게 할 말을 그대는 우리에게 가르치라 우리는 아둔하여 아뢰지 못하겠노라

37:20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어찌 그에게 고할 수 있으랴 삼켜지기를 바랄 자가 어디 있으랴

37:21 그런즉 바람이 불어 하늘이 말끔하게 되었을 때 그 밝은 빛을 아무도 볼 수 없느니라

37:22 북쪽에서는 황금 같은 빛이 나오고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

37:23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37:24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


매튜헨리 주석

33장

엘리후의 연설(3)(욥기 33:1-7)

엘리후는 여기서 욥을 설득하기 위해 몇 가지 주장을 하는데, 이것은 욥이 참고 들어줄 것을 부탁하는 말일 뿐만 아니라, 자기가 욥을 위해 호의를 보이려 꾀하고 있음을 믿고서 자기 주장을 친절히 받아들이며 자기가 하려는 가르침을 기꺼이 열납해 줄 것을 설득하는 말이기도 하다. 욥이 심사숙고해 줄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엘리후는 욥의 세 친구처럼 욥을 정죄하는데 가담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욥이 알기를 원했다.

그는 앞 장에서 그들의 처사를 혐오한다고 공언하였고 그들의 가설을 부정하였으며, 그들이 욥을 고정시키겠다고 택한 방법을 전면 폐기 처분하였다.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시오(1절). 그들은 모두가 같은 노래를 불렀고 모두가 같은 가락으로 소리쳤으나, 나는 색다른 방법으로 말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시오. 그 중의 일부만을 듣지 마시오."

그 까닭은 우리가 만약 어떤 한 이야기를 전부다 듣지 아니하고는 그 이야기를 판단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1. 그는 이 일을 엄숙한 본연의 의무로 삼고자 하였다. 즉 그는 지나가는 말로 단 한 마디로 잘라 말하거나 자기의 기지를 나타내는 임기응변식의 짧은 답을 주려하지 않았다.

오랜 침묵 뒤에 그는 신중히 그리고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그의 입을 열었다"(2절). 충분히 심사숙고를 하자마자 그는 벌써 입을 떼기 시작하였고, 만약 욥이 주의를 집중해서 들어줌으로써 자기를 격려해 준다면, 계속 말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1. 그는 자기가 생각한 대로 말하려고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으며 달리 말하지는 않을 작정이었다(3절).

"내 말이 내 마음의 정직함을 나타내는 것이며, 내 신념과 소감의 진정한 소산입니다."

욥의 세 친구가 그들의 이야기 가운데서는 자기들의 가설을 옹호하기 위하여 욥을 악한 자로 묘사하였지만, 그들의 양심의 밑바닥에서는 욥이 그토록 악한 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의심해 볼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런 일은 온당한 행위가 아니었다. 우리의 마음 속으로는 좋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면서도 어떤 이득을 위해 우리의 혀로 그들을 동시에 비난한다는 것은 야비한 짓이다. 엘리후는 정직한 자여서 그런 짓을 경멸하고 있다.

  1. 그가 말하는 것은 평이한 말이기 때문에 이해하기에 애매모호하거나 어렵지가 않았다. "내 입술이 아는 바를 진실히 말하리라."

욥은 즉각 그의 말뜻을 이해할 것이며, 그가 의도하는 바를 알아 들을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일을 강론하는 자들은 그 개념이나 표현에 있어서는 모든 모호한 점이나 혼란을 조심스레 피해야 하며, 가능한 한 분명하고 간결하게 말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그들이 말하고 있는 바를 그들 스스로가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낼 것이며, 또 그들이 정직하게 말하며, 그리고 그들이 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교화를 의도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낼 것이기 때문이다.

  1. 그는 자기의 이야기 중에서 하나님이 주신 이성과 총명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하였다. 즉 그는 "하나님의 신과 전능자의 기운으로부터 받은 합리적 혼, 즉 생명력을 최대로 이용하고자 하였다(4절).

그는 자기가 그의 연장자들과 맞먹을 만한 자격이 없음을 자인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자기의 연소함을 멸시하지는 않기를 원한다.

그 이유는 그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지으신 바요, 똑 같은 손으로 만들어졌으며, 같은 고귀한 권력과 기능을 부여받았고, 똑 같은 큰 목적을 위하여 계획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욥에게 선을 베푸시기 위한 도구로 자기를 사용치 못하시라는 법이 어찌 있겠는가?

이 점을 감안할 때 우리 역시 우리의 능력에 따라 우리의 위치에 선을 행하도록 스스로를 편달하여야 마땅하다(아마 엘리후도 그 점을 이용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선한 목적에 우리의 생명을 사용하도록 연구해야 하며, 하나님을 영화스럽게 해 드리는 일과 그의 뜻을 따라 우리 세대에게 쓸모있는 봉사를 하는 데 우리의 생명을 바칠 수 있도록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창조된 목적에 부합된 존재가 되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리가 헛되이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1. 그는 욥이 자기가 하는 말에 반박하며 이의를 제기해도 그 말을 기꺼이 들을 참이었다(5절).

"그대가 만일 할 수 있거든 내게 대답하시오, 만약 당신에게 그럴 만한 기력과 정신이 남아 있으며, 심신의 병과 논쟁으로도 아직 기운이 쇠진되지 않았다면, 당신의 말을 진술해 보시오. 그리하면 당신의 말을 참작하겠습니다." 이성에 맞는 이야기를 하는 자들은 또한 도리에 맞는 이야기를 들을 줄 안다.

  1. 욥은 하나님을 대리할 수 있는 사람이 그의 앞에 나타나기를 자주 원했다. 욥은 그에게 자유롭게 간언하며, 중재자로서의 그에게 자기의 모든 문제를 말해 줄 수 있기를 원했다.
  • 엘리후는 자기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6절). "나는 당신이 원했던 그대로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역주, 영어 성경과 우리나라 성경 사이에는 번역상의 차이가 있다).
  • 욥은 그런 사람을 간절히 원했다(16:21).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변백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그리고(23:3)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는 다만 "주의 위엄이 그를 두렵게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기만을 원했다(13:21).
  • 엘리후는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한 번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나를 쳐다보시오!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대와 쟁변에 나서겠고, 당신이 어느 점에서 하나님을 모욕하였으며, 하나님이 당신의 어떤 점을 반대하시는지 그대에게 나타내 보이겠소. 그대가 하나님께 하고자 하는 호소와 불평이 무엇인지 그것을 내게 말하시오."
  1. 엘리후는 자기가 능히 욥의 상대가 된다고 보았다.

"나도 또한 진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습니다. 나도 또한 맨 첫 번째 인간과(창 2:7) 마찬가지요, 나도 당신과 일반입니다."

욥은 이 점을 가지고 왜 하나님이 자기를 가혹하게 학대해서는 안 되는지의 이유로서 하나님께 몰아 세웠다(욥 10:9).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나이다."

엘리후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진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소." 어떤 이는 "나는 당신과 꼭 같은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소"라고 읽는다.

우리가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유익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흙에서 나왔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우리 자신들과 같은 사람을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다행한 일이다.

이스라엘의 큰 환난 날에도 그들의 소원에 따라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신 5:24). 하나님은 보물을 우리와 같은 질그릇에 담으셨다(고후 4:7).

  1. 엘리후는 욥이 자기의 공격에 대해 놀랄 까닭이 없다고 생각하였다(7절). "내 위엄으로는 그대를 두렵게 하지 못합니다."

(1) 당신의 친구들이 자기들의 변론으로 당신에게 겁주었던 일이 내게는 없습니다. 나는 그들이 행한 것 같이 당신을 꾸짖지도 아니하겠고, 그들이 몰아 세웠던 것같이 당신을 쳐서 힐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2) "또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에게 따지기 위해 나타나셔서 행하시는 일과 같은 것도 내게는 없습니다. 나는 당신 같은 입장에 서 있고, 나도 당신과 같은 모습으로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당연히 느낄 그런 공포를 나는 당신에게 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사물을 정당하게 깨닫게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치에 따라 해야 하는 것이지 겁을 주는 것으로 해서는 안 되며, 공정한 논리에 의하여서 하고, 완력에 의해서는 아니 된다.


엘리후의 연설(4)(욥기 33:8-13)

Ⅰ. 엘리후는 특히 욥에게서 나온 몇 가지의 무례한 표현을 책망하고 있다.

그것들은 욥이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깨달은 것들이다. 그는 자기 책망의 근거를 다른 이의 말에 두지 아니하고, 그 스스로 직접 자기의 귀로 들은 것들이다(8절). "당신은 그것을 내가 듣는 데서 말하였고, 또 이 자리에 있는 사람 모두가 듣는데서 말하였습니다."

그는 그 말을 간접적으로 듣지는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욥의 말이 그처럼 잘못된 것이 아니었기를 바랐을 것이다. 또 그는 그 말을 욥과의 은밀한 대화 중에서 들은 것도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고 한다면 그 일을 가지고 이렇게 공공연하게 되풀이해서 얘기할 만큼 엘리후는 교양 없는 자란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욥은 그 말을 공개적으로 터놓고 말했다. "뭇사람이 보는 앞에 죄짓는 자들은 뭇사람들의 면전에서 견책을 당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예를 손상하는 말을 어떤 말이든지 듣게 되면 의당 그 말을 공개적으로 반증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듣는 가운데에서 그릇 발언되는 것에 대해서는 이를 책망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너희는 고발하는 자와 대결할 내 증인이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까닭이다.

  1. 욥은 자기 자신을 결백한 자라고 주장하였다(9절).

"네가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죄가 없다고 하였다."

욥은 이 말을 totidem verbis-즉 그렇게 많은 말로 얘기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는 자신이 죄를 지은 자이며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지 못한 자라고 인정하였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신께서는 내가 악한 자가 아니며, 내가 의로움을 굳게 붙잡고 있음을 아시나이다" 등등. 엘리후는 이런 말들을 그의 책망의 근거로 삼고 있다.

욥이 온전하며 의로운 자였고 그 친구들이 주장한 것 같은 그런 자가 아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욥은 자신이 그런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괴롭히시고 확대하시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여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욥이 단지 커다란 죄악에 대해 의로우며 결백하다고 말한데 대해 엘리후는 그가 모든 죄에 대해 깨끗하며 결백하다고 주장한다고 말하며 욥을 책망한 것으로 아무래도 잘못된 책망으로 보인다. 과격하고도 경솔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오해받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들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보다 더 조심해야 마땅하였던 것이다.

  1. 욥은 흡사 하나님께서 시비를 걸 기회를 노리는 사람 모양으로 그의 잘못을 찾는데 혈안이 되셨고, 그를 헐뜯는데 열심이었다고 하여, 하나님에 대해 그는 혹독한 분이라고 표현하였다(9, 10절).

"하나님이 나를 칠 틈을 찾으시느니라."

이는 그런 때를 일부러 찾아내시는 것을 말한다. 욥은 이런 뜻으로 말한 바가 있다(14:16, 17). "주께서 나의 죄를 살피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나님은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다"라고 분명히 말했다(13:24; 19:11). "그는 내 발을 착고에 채우시나이다. 그리하여 나는 하나님께 항변할 수 없듯이 나는 또한 그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다"라고도 말했다(13:27). 또 그는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길을 살피신다"고 말했다(13:27).

Ⅱ. 엘리후는 욥이 이같이 말함으로 잘못 발언했다는 것과 욥이 그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그 말을 취소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노력한다(12절).

"보라! 이 말에 네가 의롭지 못하다." "이 점에서는 네가 옳지 못하다"라고 어떤 이는 읽는다. 엘리후가 욥에 대해 보여 준 책망과 욥의 다른 점은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지만, 엘리후는 단지 "이 말에 있어서, 이렇게 말하는 데 있어서는 네가 의롭지 아니하다"고만 말하고 있다.

  1. "당신은 하나님과 공정히 거래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의롭다는 건 모든 자에게 마땅히 그들이 받아야 할 것을 제공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만일 우리를 향하여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모든 섭리에 있어서 그가 공평하시고 인자하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즉 그가 그 모든 길에서 의로우시며 어쨌든 그는 선하시다고 인정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가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를 하나님께 우리가 바치지 않는 셈이 되며, 또한 우리는 그에게 의롭지 못한 자가 된다.

  1. "당신은 의로운 자의 언어로 말하지 아니합니다. 나는 당신이 그런 자임을 부인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 점에 있어서 당신이 의로운 자임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많은 의로운 자들이 어떤 특수한 사례에 있어서는 그들답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한다. 그러나 한편 비록 선량한 사람이라도 그가 실수하거나 잘못을 범하는 경우에는 우리가 그에게 잊지 말고 어디에 잘못이 있었는지 고해 주어야 하며, 과오와 혈기 속에 있는 자에게 아첨을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친절한 사람이 못 된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단 한 가지의 사례를 보고 그 사람의 성격을 판단지어서는 안 되며, 또 다만 몇 마디의 실언을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공정한 사람이 못된다. 우리 모두가 잘못하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책망할 때 공정하게. 해야 한다.

엘리후는 욥으로 하여금 자기의 실언을 깨닫게 하기 위해 그에게 두 가지 점을 생각해 보도록 제안하고 있다.

(1) 하나님은 우리보다 무한히 높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와 쟁변한다고 하는 건 미친 짓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이 그의 크신 권세를 가지고 우리에게 반박하신다면 우리는 그 앞에서 설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에게 대답하리라"고 엘리후는 한 마디로 말하고 있는데, 이 말에는 그것과 함께 "하나님은 사람보다 더 크시다"란 증거가 따르고 있다. 의심할 나위 없이 하나님은 무한히 위대하시다. 하나님과 사람간에는 비교할 수 있는 척도가 도무지 없다. 욥 자신도 하나님의 크심에 대해서나 그의 항거할 수 없는 권세와, 넘겨다 볼 수 없는 주권과 그의 무서운 엄위하심 및 측량할 수 없는 무한성에 대하여 아주 많이 얘기했고 또 꽤 잘 말하였다.

엘리후는 말한다. "자! 당신 스스로가 하나님이 위대하심에 대해 말한 것을 생각해 보시오. 그리고 그것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시켜 보시오. 그가 만약 인간보다도 더 크시다면 그는 당신보다 더 크실 것이요, 당신은 하나님께 대한 이 불손하고도 흉한 생각을 회개하고 당신의 어리석은 짓에 낯을 붉히며, 당신 자신의 억측을 생각하고 떨기에 충분한 이유를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보다 더 크시다"는 이 간명하고도 의심할 나위 없는 단 한 가지 진리에는 잘만 활용한다고 보면 그의 섭리에 대한 우리의 모든 불평불만과 우리를 다루시는 그의 처사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이의와 불복을 영원히 침묵시키고 그런 것들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도록 하기에 충분한 것이 있다.

그는 우리보다도 더 지혜로우시며 강하시다. 그러기에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하나님과 우리가 쟁변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뿐 아니라 그는 또 우리보다 더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선하시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성품이 가지고 계시는 초월적인 영광이요, 뛰어나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은 인간보다 위대하시며 그러므로 그를 흠잡는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짓이며, 이치에 벗어난 짓이다. 그는 정녕 정당하시다.

(2) 하나님은 우리에게 설명해 주어야만 할 의무가 있으신 분이 아니시다(13절). 그런데 "어찌하여 그대는 하나님과 쟁변합니까?" 하나님께 불평하는 자들은 그와 쟁변하며, 그를 반박하고, 비난하며, 그를 상대로 고소를 제기하는 자들이다. 그러면 그들은 어째서 그럴까? 무슨 이유로? 어떤 목적으로? 그들은 그렇게 할까?

우리들 약하고 우매하며 죄 많은 피조물들이 무한하신 지혜와 권능과 자비를 가지신 하나님과 쟁변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은 짓이다. 토기장이와 다투려는 진흙에게 화있을 진저! "왜냐하면 그는 자기 일에 대하여 어떤 것도 진술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우리에게 밝혀야 할 의무를 지니지 않으신 분이시며, 그가 행하시기로 계획하신 것을 우리에게 고할 의무도 없으시고(어떤 방법으로, 어느 시기에, 무슨 도구를 통하여), 왜 그가 그 같이 처리하시는지 이유를 우리에게 알릴 의무도 없으시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일 처리를 꼭 합리화하지 않으셔도 되고 우리 인간의 요구나 탐구심을 반드시 충족시켜야 하는 것도 아니시다.

그의 심판은 틀림없이 그 심판 자체를 옳은 것으로 합리화시켜 준다. 만일 우리가 그것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잘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인간의 재판정에 세워 놓고 사실 심리를 행하며, 그가 행하시는 행위에 대하여 그 이유를 밝히라고 도전하고, 그에게 "당신은 무엇을 행하는 겁니까? 왜 당신은 그렇게 행하십니까?"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당돌한 불경이 된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읽기도 한다. "그는 자기의 모든 일에 대하여 다 진술해 주시지는 않으신다." 그는 우리가 알기에 적합한 만큼만은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지만(14절), 그래도 여전히 은밀한 일들은 있으며, 그 비사들은 우리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고, 또 우리가 들여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엘리후의 연설(5)(욥기 33:14-18)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취하신 처사의 의미에 관하여 자기를 완전히 캄캄한 가운데 두셨다고 하여 불평하고는, 하나님이 자기를 그의 원수로 취급하신다고 결론을 내렸다.

엘리후는 말하고 있다.

"아닙니다. 그는 당신에게 말씀하시건만, 당신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잘못은 당신에게 있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이 악의로 해석하게 되는 그런 처사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당신에게 진정한 유익이 되도록 계획하고 계십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복리를 위하여 매우 힘쓰시는 친구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느니라"(14절).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거리나 반목에도 불구하시고 그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즐겨하시는데, 그것이 곧 그의 은총의 표시이다. 그가 우리 자신의 관심사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기꺼워 하신다는 것은 그의 은혜로운 의도에 대한 증거이다.

또 무엇이 우리의 의무이며 어떤 것이 우리에게 이해득실이 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바라시고, 그가 우리에게서 요구하시는 일이 무엇이며 우리는 그에게서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 주기를 달갑게 여기시고, 우리의 잘못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위험을 경고해 주시기를 좋아하시고 우리에게 길을 나타내 보이시고자, 우리를 그 길 안에서 인도하시기를 바라심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획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일을 그는 한 번뿐 아니라 두 번까지도 그리고 계속해서 행하신다.

한 번 경고를 발해도 무시되면, 또 다른 경고를 내리신다. 이는 어느 누구라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교훈에 교훈을 더 해야 하고 말씀을 더 해야 한다." 이것은 죄인들이 용서받지 않은 채 남겨 두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

  1.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복리에 대하여 매우 못된 원수가 된다.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 즉 인간은 그것을 주의하지 않거나 상관하지 않고, 분간해 내거나 이해하지 않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알지 못하고 계시된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그에게 어리석은 짓 같이 여겨지기 때문에, 자기 귀를 막고, 자기 자신의 빛을 가로막아 스스로에게 그림자가 지게 하며, 자기에게 거슬리는 하나님의 권고는 거부하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람은 결코 그러지 않으며, 지혜 그 자체의 말을 거역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양심을 통하거나 그의 섭리 또는 목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말씀하신다. 엘리후가 대체로 여기서 욥에게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자기 의사를 말씀하고 계시는 동시에 그에게 자기의 자비를 행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비록 욥에게는 하나님이 자기를 암흑 중에 가두시고, 자기를 이방 사람같이 취급하시며, 그를 고통 중에 빠드리시고, 그를 한 원수처럼 대우하시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을지언정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당시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어떤 기록된 계시도 없던 때였기에(비록 요즈음에는 기록된 계시가 주요 방법이 되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방법들 중에서 그 계시의 기록이 여기에선 언급되고 있지 않다.

이 문단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들의 양심을 통하여 어떻게 가르치시며 훈계하시는지를 엘리후가 보여 준다.

Ⅰ. 이런 훈계를 위한 적당한 때와 기회(15절).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 즉 그 때는 사람이 번잡한 세속과 세상사와 속세의 이야기에서 벗어난 때이다.

그들이 잠자리 속에서 고독하고 적막할 때, 그때는 스스로의 마음 속으로 침잠하며, 자신의 마음과 교제하기에 좋은 때이다(시 4:4). 그런 때야말로 하나님이 인간과 친히 말씀하시기 위하여 택하시는 시간이다.

  1.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실 때, 특히 자기의 심부름을 위하여 특별한 사자들을 보내실 때는, 보통 그런 때를 택하셔서 자기의 메시지를 전달하신다.

그때는 인간에게 엄습해 오는 깊은 수면으로 인하여 육체적 감각은 모두 폐쇄되고, 마음은 하나님이 하늘의 광명으로 직접 전달해 주시는 바를 즉각 받아들이기에 더욱 자유스러워지는 때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환상과 꿈을 통하여 자기의 마음을 선지자들에게 알리셨고(민 12:6), 그와 같이 아비멜렉과(창 20:3), 라반과(창 31:24), 요셉(마 1:20)에게 예고하였으며, 역시 바로왕과 느브가네살 임금에게 나중 일어날 일을 알게 하신 것도 이런 방법이시었다.

  1.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자기의 대리자 곧 양심을 일깨워서 그 직분을 다 수행하도록 하고자 하실 때는 깊은 잠이 인간에게 임하는 때의 기회를 포착하시거나(비록 꿈이 대개는 공상으로부터 오든지 아니면 어떤 것은 양심에서 나오는 수도 있지마는), 혹은 조는 때를 이용하기도 하신다.

그 때는 사람이 완전히 수면에 빠진 것도 아니요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중간 상태에서, 오늘 하루의 지난 일을 밤에 생각하고 다음에 다가 올 날의 일을 아침에 계획하는 때이다. 그 시간은 그의 심령이 이미 잘못 행한 것에 대해 자신을 꾸짖고, 이제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스스로에게 다짐하기에 적당한 때이다(사 30:21, 참조).

Ⅱ. 그 교훈을 내려 주실 때의 권능과 힘(16절).

하나님께서 인간 자신의 양심에 확신을 주고 명령을 하심으로써 인간의 유익을 도모하실 때에는 다음과 같이 하신다.

1. 그들에게 교훈받을 허락을 내리시사 그들로 하여금 교훈에 주의를 기울이게끔 만드신다.

"그는 이 때에 인간의 귀를 여신다." 인간의 귀는 술사의 소리에도 막혀 있었다(시 58:5).

  • 그가 루디아의 마음을 여셨듯이 인간의 마음도 열어 주시고 또 귀도 열어 주신다.
  • 하나님은 귀를 막고 있는 것을 제거해 주시며,
  • 그리하여 확신이 제 길을 찾거나 억지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신다.
  • 아니, 그는 영혼 속에 역사하시사, 양심의 지배에 승복하게 하시며, 양심의 규칙에 순응하게 하신다.
  • 그것은 하나님이 귀를 열어 주신 결과이다(사 50:5).
  • "하나님이 내 귀를 여시매 내가 거역하지 않았도다."

2. 하나님은 그의 훈계가 인간의 마음 속에 있을 거처를 만들어 주시고, 그것들이 거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

"하나님은 인치듯 교훈하시는데" 그것은 그들을 위해 계획된 교훈이며 그들에게 부합되는 교훈이다.

하나님은 저희 영혼으로 하여금 이 교훈이 주는 깊고도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받을 수 있도록 흡사 봉인의 밀랍같이 만드신다. 인간의 심령이 마치 주형을 뜰 때 주물이 틀에 담기듯 하나님의 교훈 속에 던져지면 모든 일은 잘 진행된다.

Ⅲ. 보내어진 훈계의 목적도 의도.

1. 사람을 죄악으로부터 특히 자만의 죄에서 멀리하시기 위하여 훈계하신다(17절). "이는 그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꾀를 버리도록 하고자 함이다."

  • 즉 사람이 자기의 사악한 목적으로부터 물러나도록 하며, 자기 마음의 성질이나 자기 인생의 진로와 그 취향이나 기질을 변하게 하든지, 아니면 그가 빠질 위험이 다분한 죄를 예방하게 하고자 하심이다. 또 그는 인간이 자기의 일에서 물러나도록 하고 인간의 일 즉 세상과 육신을 위해 하는 일을 중단하게 하는 동시에 그가 하나님의 일에 착수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 많은 사람들이 죄 많은 출세 가도에서 자기 양심의 온당한 억제에 의하여, 곧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이 가증한 일을 행하지 말아라"고 제지하는 양심의 소리 때문에 멈추어서는 일이 많다.
  • 특히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신다."
    • 즉 인간이 자랑할 만한 일들을 그에게서 감추시며,
    • 그가 겸손해야만 하는 이유를 그의 앞에 제시함으로써,
    • 교만이 그 안에 머물지 못하도록 인간의 마음을 제어하신다(어떤 이들은 이를 이렇게 읽기도 한다). "그는 인간에게서 교만을 제거해 버리려 하심이라."
  • 즉 이것은 하나님이 그토록 많은 죄악의 원인이 되는 고통의 화근을 발본색원 해 버리심을 뜻한다.
  • 하나님께서 자비를 위하여 비축해 두신 모든 자들은 겸손해지고 교만을 멀리할 것이다. 교만은 사람들이 자기 목적을 수행하는데 열심을 가지게 하는 동시에 그 일에만 달라붙도록 만든다. 그들은 그들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자만심을 굴종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꾀에서 물러나게 하신다.

2. 인간들을 파멸로부터 구해 내시기 위하여 훈계하신다(18절).

죄인들이 악한 꾀를 좇고 자기들의 자만에 탐익하고 있는 동안, 그들의 영혼은 함정과 칼을 향해 달려가며, 이 세상에서의 멸망과 앞으로 닥쳐올 세상에서의 멸망을 향해 걸음을 빨리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양심의 훈계를 통하여 그들이 범죄하지 않도록 막으실 때에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그들이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그들의 영혼이 무저갱으로 "떨어지지 않게 제지하시며," 하나님의 복수의 "칼날"에 멸망할 그들을 멸망으로부터 건지신다. 그리하여 불의가 그들의 파멸이 되지 않는다. 죄에서 사람을 돌이키게 하는 것은 그들을 지옥으로부터 건지는 것이며, "한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것이다"(약 5:20).

깨어 움직이는 양심의 제재 아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자비한 일인지를 참작하라.

우리의 친구가 당한 상처는 신실하며 그가 묶인 속박은 인자하다. 왜냐하면 그것들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이 영원한 멸망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엘리후의 연설(6)(욥기 33:19-28)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멸망의 길로 가지 못하도록 그들 자신의 양심을 통하여 한 번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죄악의 길로 행할 때에 그들의 마음에서 솟아 나는 죄에 대한 억제심이 곧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자기들의 마음이 우울한 탓으로 돌리거나, 그들의 교양이 깊은 때문인 것으로 여긴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두 번씩이나 말씀하고 계신다.

그는 두 번째로 말씀하신다. 그리고는 죄인들을 각성시키고 개심시킬 딴 방법을 시험해 보신다.

  • 섭리에 의하여 그것은 괴로움을 주는 것 일 수도 있고,
  • 자비로운 방법일 수도 있으며(이런 일에서도 그는 두 번씩이나 말씀하고 계신다),
  • 그런 것과 병행하여 훌륭한 목회자들의 때맞은 교훈에 의해서도 행하신다.

욥은 자기 질병에 대하여 많은 불평을 하였고, 자기 병들을 보건데 하나님은 자기에게 노여워하고 계신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의 친구들 역시 그런 판단을 하였다.

그러나 엘리후는 그들이 모두 잘못 이해했다고 설명한다.

그가 내세운 이유는

  • 하나님이 육체적 고통을 주시기는 하나,
  • 그것을 사랑으로 주시는 것이어서,
  • 결국에 가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영혼을 유익하게 하시려는 은혜로운 계획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엘리후의 연설 중에서 이 부분은 병세의 쾌차를 위해서 투병 중인 자에게는 매우 되움이 되는 말이다. 하나님은 병 중에, 병을 통해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Ⅰ. 여기에서는 극도에 달한 환자가 묘사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질병에서 어떤 임무를 띄워서 보내실 때에는 질병이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지 유의해 보라(19절 이하). "이 일을 행하라고 하면 그것은 그대로 행하느니라."

  1. 병자는 전신에 고통스럽지 않은 곳이 없다(19절).

"그는 병상의 고통으로 징계를 받는다."

그것은 그를 병상에 유폐시켜 버릴 만큼 고통을 주는 것이며, 또 그 고통은 너무나 심해서 그는 편안함을 얻을 수 없고, 평안히 자신을 쉬게 해 주던 침대 위에서조차 안락을 얻을 수 없다. 솜털로 된 부드러운 침대가 고통과 병으로 인하여 가시로 된 침대로 변하게 될 것이며, 그 침상 위에서 편안히 잠들던 그가 이제는 날이 샐 때까지 그 침상 위에서 이리저리 딩굴게 되었다.

그가 아프다고 호소하며 신음하는 것은 살이 아리는 고통이 아니라 뼈를 깎는 듯한 아픔 때문이다. 그 고통은 내부에 뿌리박은 고통이다. 사지 중 한 팔, 한 다리의 뼈만 아픈 게 아니라 사지 백체의 "무수한 뼈들이" 마디마디 그렇게 시달림을 당한다. 비록 외부의 상처는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육체 안의 원인 때문에 이와 같이 아플 수 있다는 것을 볼 때, 우리가 가진 육체가 얼마나 연약한 것이며, 얼마나 지긋지긋한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또한 죄가 저지르는 결과가 어떤 것이며 그것이 끼치는 화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관찰하라. 고통은 죄의 열매이다.

그렇지만 육체의 고통도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혼에게 유익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1. 그는 질병의 일반적 증세대로 자기의 식욕을 아주 상실하였다(20절).

"그의 마음"은 가장 필수적인 음식인 "식물을 싫어하며," 이전에는 그가 아주 즐기고 아주 굉장한 기쁨으로 입맛을 다시던 "별미를 싫어하게" 되었다. 이것은 왜 우리가 "진수성찬을 탐하지 말아야 하는"데 대한 좋은 이유가 되는데, "이는 그것들이 간사하게 베푼 음식물"이기 때문이다(잠 23:3).

지금 당장은 그 맛있는 음식을 우리가 좋아하지만, 얼마 아니 되어서 곧 그것에 물리게 된다. 유복할 때 호화롭게 사는 자들도 병으로 인하여 고량진미를 냄새조차 맡기 싫어하게 되는 날에는, 그 징벌 가운데서 자기 죄를 비탄과 치욕으로 깨닫게 된다. 우리는 분수에 맞지 않는 식도락을 즐기지 말자. 왜냐하면 그 음식을 보기조차 싫어하게 될 때가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시 107:18).

  1. 그는 껍질과 뼈만 앙상하여 완전히 해골처럼 되었다(21절).

병으로, 아마도 며칠간의 병고난으로, 비대하고 으젓하던 "그의 육체가" 감히 볼 수 없을 정도로 "파리해졌다." 그의 살이 놀랍게도 야위고 빠졌다. 그리고 그의 살 속에 깊숙이 묻혀 있던 "뼈들이 이제는 드러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갈비뼈를 셀 수 있게 되었으며, 그의 모든 뼈들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병이, 생명의 떡으로 영양을 공급받은 영혼을 야위게 할 수는 없으나, 신체의 변화는 곧 일으키게 할 수 있다.

전에는 그처럼 아름답던 풍모에

마음대로 행하며, 위풍당당하던 사람이

야윈 빰에 유령처럼 패인 눈이 되도록

(심하게 변하매) 친구들이 놀라는구나!

전에는 도톰한 살 속에 숨겨졌던 뼈들이

살갗 위로 불매불툭 튀어 나왔구나!

R. 블랙모어 경

  1. 그는 죽은 자라고 하여 포기되었고, 그의 생명은 살 가망이 없다고 생각되었다(22절). "그의 혼은 구덩이에 가까워지느니라."

즉 임종의 모든 징후가 그 위에 나타나며, 그의 주변에 있는 것과 그 자신의 것을 살펴 보건대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란 뜻이다. 죽음의 괴로움이, 여기서는 멸하는 자라고 일컫는데, 이제 막 그를 엄습하려 하고 있다. 사망의 줄이 그를 두르고 있다(시 116:3). 아마 이런 말들은 모두가 죽음이 멀리 있을 때는 자기에게 절실하지 못한 일로 경시하던 자들이 그것들을 눈 앞에서 응시하게 되자 파멸시키는 자로서의 죽음을 느끼게 되는, 바로 그런 두려운 불안을 암시할 것이다.

이전에는 사생관이 어떠했든지 간에, 정작 결정적 시기에 다다르면 죽는다는 것이 심각한 일이라는 데 모두가 일치하게 된다.

Ⅱ. 그를 교훈시키기 위해 준비하신 것이 묘사되고 있다.

그가 당한 고난을 성스러이 사용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준비물을 마련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런 방법으로 말씀하심으로써

  • 인간이 듣고 이해하며,
  • 그의 말씀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23절).

인간의 병 중에 그를 시중하며 깨닫게 하고 충고하며 위로해 줄 "사자가 있다면" 또 하나님이 뜻을 풀이하고 그 의미를 해설해 줄 "해석자"가 있다면, 또 그 채찍의 소리와 그 해석을 알아 듣고 해석해 줄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복된 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재난을 통하여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가 흔히 그 고난의 언어를 잘 알아 듣지 못하므로 해석하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만약 그런 통역자가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병 중에 있는 자에게는 명의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목사님의 조언과 도움이 필요하고, 환자는 그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그 목사가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고 드높이는 데에 뛰어난 기술을 소유한 분인 경우에는 더욱 더 그래야만 된다. 그가 만약 그럴 경우에는 "일 천인 중 한 사람"에 해당하며, 그에 따라 귀중히 여김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때에 그의 일을 "인간에게 정당히 행할 것을 보이는 것이다." 그의 정당함이란 하나님의 정당함을 의미할 수도 있다. 즉 하나님은 미쁘심 가운데에서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기 때문에 조금도 인간에게 악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고생을 통하여 사람이 바람직한 향상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는 그렇게 하여 깨닫게 해 주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말은 인간이 정당히 행할 것이나 정직을 의미할 수도 있다.

1. 그 정직은 이렇다.

만약 그 병자가 참으로 경건한 사람일 것 같으면, 해석자는 욥의 친구들이 행한대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며, 욥이 고난을 받는다고 해서 그를 외식하는 위선자로 증명하는 일이 자기 본분이듯이 행하지 않을 것이며, 그 반대로 그가 고생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로움을 드러내어 그가 위로를 받게 하며, 결과야 어찌 되든지 간에 편안히 해 줄 것이다.

2. 그 정직은 곧 개혁이며, 생명과 화평을 지향하는 것이어야만 된다.

의로움의 길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길임을 사람이 알게 되고 그 길을 택하여 그 길을 따라 행하게 되면 일은 다 이루어진 것이다.

Ⅲ. 그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은혜 가운데 받아 들이신다(24절).

진정한 회개와 정직은

  • 복음을 온전하게 이루는 것인데,
  • 그것이 의무인 동시에 자기 이득도 된다는 깨달음을 병자가 정말로 얻었다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게 되면,
  • 은혜를 주시려고 대기하시다가 참다운 회개가 보이기 시작하는 즉시 - 자비를 보이실 하나님께서는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만나시는 대로 자기도 그에게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서 만나 주신다.
  • →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사," 그를 자기 은총과 생각 속으로 영원히 끌어들이신다.

1.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기 위해 은혜로우신 명령을 내리실 것이다.

그가 이르시기를 ***"그를 건져서(즉 그를 구출하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죄의 삯인 사망에 이르지 않게 하라"***고 하실 것이다. 병고가 그 역할을 다 해내고 나면 그 질병들이 물러 갈 것이다.

우리가 의무의 길로 행하여 하나님께 돌아 갈 때에는 하나님께서도 자비의 길로 우리에게 돌아오실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에 순종하리 만큼 그의 사자들을 영접하고 그의 해석자들을 올바로 이해하는 자들은 구원을 받아 구덩이에 이르지 않게 될 것이다.

  1. 하나님은 이 목적을 위하여 은혜로운 이유로 말씀하실 것이다.

"나는 대속물" 또는 보상물을 "얻었다"고 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대속물이시기 때문에 엘리후는 그를 대속물이라고 칭하고 있으나, 욥은 그를 자기의 구속자라고 불렀다.

→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값을 내는 분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치르어지는 값도 되시며, 제사장인 동시에 희생 제물도 되시기 때문이다.

영혼의 값은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뿌리는 보혈 이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구속할 수가 없으며, 죄로 말미암아 받은 상처는 너무나 심한 것이어서 하나님의 독생자의 피로밖에는 대속할 것이 없다. "그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 주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찾아내신 대속물이요, 무한한 지혜자의 고안품이다. 우리로서는 그 대속물을 찾아낼 수도 없었고, 천사들도 그것을 결코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신비에 쌓인 하나님 지혜이며, 감추인 지혜이다. 그것은 비밀을 들여다 보고 싶어하는 제왕들과 권세자들이 세세무궁토록 기이히 여기고 경이롭게 여길 만큼 아주 기묘한 창안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발견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시는지 본문에서 관찰해 보자. "내가 대속물을 찾았노라. 그것을 얻었노라(e[urhka( e[umrhka). 나는 바로 내가, 그 일을 해낸 자이다."

Ⅳ. 병자의 회복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원인을 제거하라. 그리하면 그 결과도 그치리라. 아픈 사람이 뉘우치게 되면 어떤 축복된 변화가 뒤따르는지 살펴 보자.

  1. 그 몸이 건강을 되찾는다(25절).

이것은 꼭 병자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결과만은 아니고, 때때로 그렇다는 것뿐이다. 병세의 회복이 죄의 사하심에서 온 것일 때 병에서 놓여 남은 참으로 긍휼하심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자기 등뒤로 던지시사," 우리의 육체를 "썩음의 구덩이에서 건지심은" 우리의 영혼에 대한 사랑이 있으시기 때문이다(사 38:17). 이것이 복된 회복이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마 9:2, 6).

이와 같이 본문에서도 그를 대속물이라고 한 점은 관심을 끈다. 그리고 나면 "그의 살이 어린 아이보다 연하여져서," 그가 앓았던 병이 흔적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는 소년 때를 회복할 것이다." 그는 소년 시절에 가졌던 아름다움과 강건하던 힘을 회복할 것이다.

자연스런 본성을 억압하던 질병이 물러갈 때는 너무나도 신기하게 자연 그 자체가 저절로 낫게 한다. 그런 현상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과 인자하심은 감사하여 마땅하다. 병고가 일으키는 이와 같은 자비로운 섭리로써 하나님은 한 번 아니 두 번씩이나 인간의 아들 딸에게 말씀하시사(저희가 깨닫기만 한다면), 저들로 하여금

  • 저희가 하나님께 의존해야 할 것과,
  • 그가 저희를 인자하심으로 측은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다.

2. 그의 영혼이 평안을 되찾는다(26절).

(1) 병자는 참회하는 자가 됨으로써, 탄원하는 사람이 되고 기도하기를 배우게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총을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자가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것이며," 용서를 위하여, 건강을 위하여 기도를 드릴 것이다. "고통을 당하는 자나, 아픈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를 드릴지니라."

그가 자기의 병고가 나음을 보게 된다고 하여 더 이상 기도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통의 성별을 위해서 못지 않게 자비의 성별을 위하여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2) 그의 기도는 열납된다.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요," 그를 아주 기쁘게 여기실 것이다. 그의 진노가 그에게서 돌이켜질 것이며, 하나님의 얼굴이 그의 혼에서 빛을 비취실 것이다. 그리고는 또 다음과 같은 일이 뒤따르게 된다.

(3) 그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위로를 얻을 것이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자기에게서 그 낯을 숨기셨던 것이다. 이제 그는 그 얼굴을 기쁨으로 바라 볼 것이다. 무슨 광경을 본들 이보다 더 활기를 소생시켜 줄 것인가(창 33:10, 참조). "내가 마치 하나님의 얼굴을 본 듯하도다……"

모든 진실된 참회자들은 어떤 번영이나 어떤 쾌락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보다도 즉 어떤 일에서 보다도 하나님의 은총이 돌아옴에서 더 큰 기쁨을 얻는다(시 4:6, 7).

(4) 그는 마음의 복된 평정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줄 깨닫는 데서 연유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사람에게 그의 의로움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그는 속죄, 곧 그 위로를 얻을 것이다(롬 5:11). 의로움을 그에게 돌리실 것이며, 그 위에다 평강과 희락과 기쁨을 말씀하실 것이다.

비록 그가 고통의 때에는 그것들을 들을 수가 없었으나 이제는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도 그를 의로운 자로 취급하실 것이며, 그에게는 만사가 순조로와질 것이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의를 얻으리라"(시 24:5).

하나님은 그에게, 가서 그 이상 더 죄짓지 말라는 은혜를 주실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그가 회복된 후 그의 생활이 새로운 혁신을 하게 됨을 의미할 것이다.

  • 그가 이전에는 업신여겼던 하나님께 기도드릴 것이므로,
  • 하나님도 이전에 자기가 학대하였던 인간에게 그의 의를 회복시켜 주실 것이며, 보상하여 주시고 장래에는 정당하게 대하실 것이다.

Ⅴ. 하나님께서 그 자손된 인생을 취급함에 있어 의거하실 일반 법칙이 이 사례에서 추론될 수 있다(27, 28절).

병자들이 유순히 복종함으로 인하여 완쾌되듯이, 자기 죄를 회개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께 자비를 입을 것이다.

  1. 여기에서 죄악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 보자.

우리가 죄의 본성과 그 폐해를 알고 있는가? 그것은 올바른 것의 반대이다. 그것은 아주 부당하고도 비이성적인 것이다. 그것은 창조주께 대한 피조물의 반역이며, 영에 대한 육의 찬탈과 지배이고 선악간에 대한 영원한 법칙과 영원한 이성을 반박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것이다"(행 13:10). 그러므로 죄의 길은 "굽은 길"이라 일컬어지고 있다(시 125:5).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않는다."

암흑의 일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들이다. 죄악의 모든 이득을 전부 합쳐 그 손익을 저울질 해 본다면, 죄로 인한 모든 이익이 그 손해를 상쇄시키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진정으로 참회하는 모든 사람은 이 점을 쾌히 인정한다. 그것은 억울한 대가가 아닐 수 없다. "이제는 너희가 부끄러워하는 그 일들에서,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롬 6:21)

2. 회개란 무엇이며 우리가 참회해야만 할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 보자.

우리는 자신들이 진정으로 회개한 자들임을 시인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우리 죄를 고백해야만 한다(요일 1:9).

  • 우리는 범죄 사실을 "내가 범죄하였나이다"하고 고백해야 하며, 혐의 사실을 부인하거나, 우리 자신의 의로움을 옹호해서는 아니 된다. 우리는 죄의 잘못을 고백해야 하며, 불의와 죄의 부정직도("나는 옳은 것을 굽게 하였나이다") 고백해야 한다.
  • 우리는 죄악의 어리석음을 고백해야 한다.-"내가 너무나 어리석었고 무지하였음은 죄가 내게 무익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이상 더 죄악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우리가 이와 같은 참회의 고백을 왜 해야 마땅한지 그 충분한 이유가 없겠는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대하고 계신다.

인간들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 그들이 다음에 행할 일이 무엇인지, 즉 그들이 계속하여 죄를 저지를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반성하여 돌이킬 것인지를 살피기 위해서 "인간들을 바라보신다."
  • 그는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 하고 말하는 자가 있을까 하여 귀를 기울여 듣고 계신다(렘 8:6).
  • 그는 동정의 눈길로 죄인들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서 이 말을 듣고 싶어하신다.
  • 왜냐하면 그는 저들의 파멸을 기꺼워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 그가 저들을 응시하다가 저들 안에서 이와 같은 회개가 역사하여 일어남을 알게 되는 즉시로 마치 돌아오는 탕자를 맞으러 뛰어나가는 아버지같이 저들을 격려하시고 기꺼이 영접하신다(시 32:5, 6).

(2) 회개의 고백은 우리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이익을 줄 것이다. 약속은 전반적인 것이다.

[1] 그가 누구든지 간에 스스로를 이와 같이 낮춘다면 그는 정죄를 당하지 않고, 닥쳐올 진노로부터 구함을 받을 것이다.

"그는 그의 영혼을 건져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할 것이니 그것은 곧 지옥의 구덩이다." 그는 불의로 말미암아 파멸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다.

[2] 그가 누구이든 이와 같이 스스로 겸비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과 기쁨으로 복받을 것이다.

"그의 생명은 빛을 볼 것이다."

즉 온갖 선을 보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향유하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이와 같이 지극한 축복을 얻을 수 있다면 가령 선지자가 아무리 큰 일을 행하라고 명했다 한들 우리가 그것을 행치 아니할 것인가? 하물며 그가 우리에게 이르신 것이 오직 "씻고 깨끗함을 얻으라." "죄를 고백하고 사함을 받으라." "회개하라. 그리하여 구원을 얻으라"라는 말씀들인데 우리가 그것을 행치 아니할 것인가?


엘리후의 연설(7)(욥기 33:29-33)

우리는 이 문단에서 엘리후의 연설 중 첫 부분의 결론을 대하게 된다.

1. 그는 이제껏 자기가 말한 모든 것을 간략히 요약하여,

→ 인간의 자손을 향한 하나님의 이 모든 뜻을 베푸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원대하시고 은폐로운 계획은 저들을 영원한 참상에서 구원하시는 일임과 아울러서 저들을 영원한 복락으로 인도해 들이시는 일임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29, 30절).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사람에게 행하시고 계신다."

  • 그는 저들과 거래하실 때 양심에 의해서나, 섭리로, 또 목사나 자비로운 행위나 고통을 주는 일에 의하여 관계하신다.
  • 그는 저들을 아프게 하시다가 또 낫게도 하신다. 이 모든 일은 다 그의 작업이시다. 그는 "이것과 저것을 병행하게 하신다."(전 7:14).
  • 그러나 그의 손길은 그 정부를 총괄하신다.
  • 우리를 위해 만사를 행하시는 자는 하나님이시다. 모든 섭리는 사람에게 작용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로 여겨져야 하며, 인간과 투쟁하시는 그의 노력이라고 간주되어야 한다.
  • 그는 인간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구사하신다.
    • 만약 한 고통으로 되지 않으면 다른 불행을 가지고 시험해 보실 것이다.
    • 만약 어느 것으로도 성과가 없을 때에는 자비를 써 보실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자를 보내시어 이 양자를 다 해석시키실 것이다. 그가 이와 같은 일들을 두 번 세 번 행하시는 때가 비일비재하시다. 14절을 참고하면 본문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신다."
    • 만약 한 번으로 효과가 없다면 그는 두 번 아니라 세 번이라도 역사하신다.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처럼 고심을 하시는가? 그것은 "인간의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들이키기 위한 것"이다.
    • 그는 자기가 시행해 보셨던 방법을 바꾸어 보셨다가("우리는 피리를 불어보기도 하였고, 애곡도 해 보았노라"), 또 꼭 같은 그 방법으로 다시 돌아가서 반복하여 동일한 적용을 해 보신다.
    •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관심하는 것보다 더. 우리에게 대하여 신경을 써 주시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비참해 질 수밖에 없다.
    •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파멸시키고자 하건만, 그는 우리로 하여금 구출되게 하시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멸망시킬 방법에서 우리를 구하여 방법을 은혜 중에 고안해 내신다.
    • 꿈이나 환상과 같은 전에 말한 방법은 "혼이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18절). 즉 죄를 예방하여 우리가 그것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 질병과 말씀에 의한 이 방법은 죄에 빠진 자들을 회복시키며, 그 혼을 끌어 돌이키기 위한 것이다. 이는 저들로 그 속에 누워서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참회로 말미암아 구덩이에서 끌어올려진 모든 자에 대해서는 "생명의 빛으로 비취시도록 하신다." 다시 말해서 저들이 현재의 위로와 영원한 복락을 누릴 수 있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죄와 암흑 세계인 음부에서 구해 내시는 자들은 그가 천국에 인도해 들이시고 빛 가운데에 있는 성도들의 기업에 참여시키실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그가 자기의 모든 교훈과 그 모든 섭리에서 노리는 주안점이다. "여호와여! 인간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이처럼 그에게 찾아 오시나이까!"이 방법은 영원히 멸망당할 자들이 변명할려고 해도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게 할 것이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온갖 수단이 백방으로 동원되었지만 치료받기를 원치 않은 저희의 변명이 서지 않게 할 것이다.
    • 이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계획에 순응하게 하고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그의 역사에 참여하게 하며, 그에게 반대하지 않도록 우리를 사역하신다.
  1. 엘리후는 자기가 이제껏 제시했던 것에 대하여 욥이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고, "그것을 잘 주목하라"고 욥에게 부탁한다(31절).

우리의 이익을 위해 의도된 모든 것은 우리의 주의를 요구하며, 우리가 주목할 것을 환기시키고 있다.

(1) 만약 욥이 들은 말에 대해 깊은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말에 대해 할 수 있는 그 어떤 이의나 반대도 욥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였다(32절).

"만일 당신이 당신 자신을 위해서나, 당신 자신의 변호를 위해서 할 말이 있다면 내게 대답하시오. 나는 젊고 당신은 늙었다고 할지라도 말로써 당신을 욱박지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의롭게 하려 하노니 말하시오. 나는 당신을 정죄하려 한 당신의 다른 친구들과 같이 아니합니다."

엘리후는 이길 목적만을 위해 입씨름을 한 욥의 세 친구들과는 달리 오직 진리만을 목적 삼아 쟁론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나무랄 사람들을 의로운 자로 인정하려 하며, 그들이 비난의 대상이 된 자기 잘못을 스스로 일소하는 걸 보고 싶어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모든 가능한 기회와 격려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2) 만일 욥이 엘리후의 말한 것을 듣고도 이의를 제기할 것이 없다면, 자기가 얘기할 것이 더 많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욥이 끈질기게 귀를 기울여 줄 것을 요망하고 있다(33절). "잠잠하라. 내가 지혜로 너를 가르치리라."

지혜를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 자들과 지혜를 배우고자 하는 자들은 양쪽이 다 귀를 기울이고 침묵을 지켜야 하며, 듣는 데에는 민첩하고 말하는 데에는 느려야 한다.

욥은 지혜롭고 선하였다. 지혜롭고 선한 자들이라도 더 지혜롭고 더 선한 자들이 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지혜와 은혜를 이용하여 그들은 더 발전하는 일에 스스로를 종사시켜야만 한다.


34장

엘리후의 연설(8)(욥기 34:1-9)

Ⅰ. 엘리후는 자기 스스로를 낮추어서 청중에서 말하며, 웅변자와 같이 저들의 호의와 호감어린 주의를 획득하려고 노력한다.

  1. 그는 저들을 "지혜 있는 자들"이라고 칭하며 "지식 있는 자들"이라고 부른다(2절). 분별력을 가진 자들과 교분을 맺는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판단하라"(고전 10:15). 엘리후는 그들과 의견을 달리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를 지혜롭다, 지식 있는 자들이라 칭하고 있다. 편벽뇐 논쟁자들은 자기와 의견이 같지 아니한 자들이면 무조건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몰아 붙이기 일쑤다. 비록 우리의 감정이 그들과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할 만큼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사의를 표하는 것이 공의의 일부를 행하는 것이다.

  1. 그는 그들의 판단에 호소하며, 따라서 저희의 심판을 달게 받는다(3절). 지각 있는 자의 "귀가 말을 분별하며," 그 말이 진실된 것인지, 아니면 허위인지, 옳은 건지 그릇된 것인지, 그 시비곡직을 분별한다. 그러므로 말하는 자는 지식 있는 자의 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우리가 우리 귀에 들리는 모든 말을 그대로 믿지 아니하고 검증해야 하듯이, 우리가 하는 말이 검증받는 것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용납해야 한다.

  1. 그는 이 문제를 정밀히 검토하고 토론하는 일에 있어서 그들과 제휴할 것을 주장하였다(4절). 그는 유독 자기만이 옳은 것처럼 독단적으로 행치 아니하고, 정당하고 선한 일이나 부당하고 악한 일을 혼자 말하려 하지 않으며, 그것을 찾아 내는 일에 있어 그들과 공동으로 하기를 기꺼이 여기고 상의하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적개심과 반목질시와, 편견을 버리고 우리가 한 때 매달려 고집하던 매몰찬 태도와, 반박하며 젠체하던 거동을 모두 합심하여 지양합시다. 그리하여 옳은 판단을 우리가 택합시다. 정당한 원칙을 택하여 이제 계속하며 말할 것에 적용하도록 하고, 그리함으로써 진리를 발견하는 데 올바른 방법을 취하도록 합시다. 무엇이 선하며 무엇이 선하지 않은가에 대한 우리의 근거나 이유를 상호전달하고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우리끼리 보도록 합시다."

우리가 그것을 밝혀 내고 탐색하는 일에 상호 협력하기를 동의한다면, 옳은 것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을 것 같다.

Ⅱ. 그는 욥이 한 몇몇 과격한 언사를 열심히 책하고 있다.

욥은 하나님의 처사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어째서 자기가 법정에 출두해서는 안 되는지, 또 그 일로 해서 견책을 받아야 하는지 미심쩍어하는 소청을 제기하였다.

  1. 그는 자기가 기억해 낼 수 있는대로 가능한 욥의 말들을 간신히 인용하고 있다.

(1) 욥은 자기 자신의 무죄함을 고집하였다.

그가 이르기를 "나는 의롭다"고 하였다(5절). 또 그는 자기 죄를 시인하도록 촉구당하자 완강히 자기 항변을 주장하였다. "나는 무죄이다. 내가 정직하나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합니까?"(6절) 욥은 이런 취지로 이야기하였다. "내가 나의 의를 굳게 붙잡고 놓지 아니하리라"(27:6).

(2)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불공정하게 취급하셨다고 흠을 잡았다.

즉 하나님이 자기에게 고통을 내리사 자기를 학대하셨으며, 자기를 의롭게 여기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의로운 판단을 제하셨다"라고 욥은 말하였다(27:2).

(3) 욥은 구원을 절망적으로 포기하였고 하나님이 자기를 도울 수도 없으며 돕고자 하지도 않으신다고 결론을 내렸다.

"내 상처가 낫지 못하게 되었으며 죽을지 모를 정도로 되었으되 나는 허물이 없도다. 내 손에는 어떤 불의도 없도다…"(욥 16:16, 17).

(4) 욥은 하나님께 봉사하여도 실제로 얻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 어느 사람도 자기 종교로 인하여 종국에 가서는 더 나아질 것도 없다고 말하였다(9절).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이 사람에게 무익하다"고 생각하는 듯한 의심스런 말을 하였다. 종교에는 현재적 즐거움도 있다고 인정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며 그와 교제하고 그와 하나가 되어 협력하며 마치 에녹이 그러했듯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 이외에 종교에 있다면 무엇이 있겠는가?

이것은 종교에 관한 진정한 개념이며 아울러 즐거운 것에 이르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헛된 것"인양(말 3:14), 그 이득을 부정하고 있다.

이 점을 엘리후는 욥의 견해로 추리하며, 욥이 한 발언 가운데에서 풍자하여 말한 것이다(욥 9:22). "그는 순전한 자나 악한 자를 다 멸망시킨다." 물론 이 말 가운데에는 진리가 일면 내포돼 있기도 하나(왜냐하면 만물이 결국은 마찬가지로 되기 때문에), 그 말이 잘못 표현되었고, 따라서 이런 비난을 야기 시키기에 족하였다. 그런 까닭에 욥은 그 말을 듣고도 잠잠히 앉아 있었고, 자기 자신의 변호를 시도하지 않았다. 카릴(Caryl)씨는 그 점을 잘 관찰하여 선량한 사람들도 때로는 자기들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보다 더 심하게 말하는 수가 있으며, 착한 사람이 어떤 비난받을 만한 짓을 저질렀을 때에는 자기 변명을 하기는커녕 그가 받아야 마땅한 것 이상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였다.

  1. 그는 그 일에 대하여 욥을 아주 통열하게 책망한다.

대체로 "어느 사람이 욥과 같으랴?"(7절) "당신들은 욥과 같은 사람을 안 적이 있습니까? 여지껏 그처럼 호언장담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는 욥을 다음과 같은 자로 묘사한다.

(1) 경멸하는 자들의 자리에. 앉은 자.

"그는 훼방하기를 물 마시듯 합니다." 즉 "그는 하나님과 자기 친우들을 모두 비난할 만큼 굉장히 분방한 자유를 누리며, 그렇게 하는 데서 기쁨을 얻고, 자기 세상에 있어서도 매우 구애를 받지 아니합니다." 혹은 "그는 타인들이 자기 형제에게 퍼부어 대는 경멸과 멸시를 듣기를 아주 좋아하며, 그런 자들을 즐거워하여,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기조차 합니다." 혹은 몇몇 사람이 해석하는 대로 "그의 이 어리석은 발언으로 인하여 그는 자신을 괄시받을 표적으로 삼고, 자신을 비난의 무방비 상태로 내어놓으며, 타인들로 하여금 자기를 비웃게 할 틈을 내 보이고 있습니다. 그 반면에 그의 종교는 그의 잘못으로 인하여 수난을 당하며, 그 명예는 그의 탓으로 훼손당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우매한 자에게 욕먹을" 말이나 행동을 우리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지 마실. 것을 기도드릴 필요가 있다(시 39:8).

(2) 불경건한 자들의 진로로 나아가며, 죄인의 길에 서 있는 자

"그는 악한 일을 행하는 자와 사귀며, 악인과 함께 다닌다"(8절).

이것은 그가 담소하면서 그들과 사귄 게 아니라, 그의 생각으로 악인들에게 호의를 가지며, 그들을 묵인하고 그 손을 강하게 한 것을 말한다(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9절에 나오듯). 하나님을 기뻐하나 사람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면 왜 그는 악을 행하는 자들과 더불어 가축에게 하듯 자기의 욕망의 목에 고삐를 채우지 아니하였던가? "내가 내 손을 씻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도다"라고 말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궤휼을 행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시 73:13, 14), 자기 대적들을 배불리 충족시키며 그들이 말하는 대로 얘기하는 자이다.


엘리후의 연설(9)(욥기 34:10-15)

엘리후가 한 이야기의 목표는 욥을 자기 고통과 화해시키며, 자기 병에 만족하게 하여, 비록 병고 중에서라도 그 심령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하여 그는 앞 장에서 나타내 보이기를, 하나님은 비록 그에게 고통을 내리시지만 그를 해치려는 뜻을 가지신 게 아니라, 그의 영적 은혜를 위해 그 고통을 작정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장에서 엘리후가 제시해 보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욥을 괴롭히시고 학대한 일은 없으며, 그가 당해 마땅한 벌보다 더 지나친 형벌이 그에게 내려진 게 아니란 것이다. 이 문단에서는 그의 이야기를 그 일행 모두에게 향하여 하고 있다. "총명한 자들이여! 내 말을 들으시오(10절). 내가 말하는 것에 동의함으로써 당신들이 지식 있는 자들임을 표하시오." 그가 말하는 것은 곧,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피조물에게 결코 악을 행치 아니하였으며, 어떤 해도 끼치지 아니하실 것이고, 그의 길은 공평하되 우리 길은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장되는 진리는 하나님의 모든 처사가 정당하며, 공평하다는 것에 관해서이다. 이 구절에서 관찰할 것은 다음과 같다.

Ⅰ. 이 진리가 얼마나 명백히 단정되고 있는지 주목해 보라. 소극적으로도 단언하고 적극적으로도 잘라 말하고 있다.

1. 그는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사악한 일을 행하실 수가 없으시며 전능자는 또한 불의를 행치 않으신다"(10절).

그런 행악은 그의 본성의 온전하심과 모순이 되는 것이며, 그의 의지의 순수성과도 또한 조화되지 아니한다(12절).

"하나님은 악하게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로운 판단을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그는 악행을 할 수도 없으며 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어떤 사람도 가혹하게 다루지 아니하신다. 그는 죄악의 폐해를 보시는 곳 이외에선 징벌의 해를 주지 아니하시고, 또 죄악의 폐해가 눈에 띄는 곳이라 하더라도 터무니없이 부당한 정도의 징벌을 내리시지는 않으신다. 그렇게 부당한 징벌을 가하신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 자체가 불의를 자행하는 일이 되고, 악행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이 소청을 받으시거나 최종적 판결을 내리신다고 할 때에는 그 호소받은 사건이나 판결을 내리실 일의 시비곡직을 유의하시는 것이지, 사람의 체면을 봐서 차별을 두시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정실에 흘러 사람을 차별하신다고 할 것 같으면 판결을 굽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라도 결코 부당히 행치 아니하시며, 어떤 자에게도 그가 의로움을 부정하지 아니하신다. "하늘들이 그의 의로움을 곧 선포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신 고로 무한히 온전하시며, 거룩하셔서, 죽지도 거짓말하지도 못하시고, 자기 스스로를 억제하지도 못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악행하지도, 사람들의 악행을 묵인하지도 못하신다. 그는 전능자이실지라도 이 세상 강자들이 흔히 하듯 불의를 옹호하기 위해 자기 권세를 사용하시는 일을 결코 행치 않으신다. 그는 shaddai-즉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악에게 시험을 받아" 불의를 행하실 리가 없다(약 1:13).

  1. 그는 모든 자에게 공의를 행사하신다(11절).

"그는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신다."

선행은 보상을 받을 터이요, 악행은 그에 따라 벌을 받거나, 보응을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조만간에 이 세상에서나 올 세상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행한 길에 따라 보응받게 됨을 깨닫게 하실 것이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실에 따라 보응받게 하는 것은 공의를 집행하는 철칙이다. "의로운 자에게 고하라! 그들은 무사하리라." "악인에게는 화로다. 그들은 해를 입을 것이니라." 참을성 있게 계속하는 봉사가 지금 당장은 보상받지 못하고, 고칠 줄 모르고 계속 범하는 죄가 당장은 응징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그 공력에 따라서 자기가 지체한 데 대한 이자까지 붙여서 완전히 보응할 날이 이를 것이다.

Ⅱ. 그것을 얼마나 격앙한 어조로 주장하는지 주목해 보라.

1. 그 일의 진실성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주장하고 있다. "진실로" 그렇다(12절).

그것은 부인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진실이다. 하나님이 사악하게 행치 않으시리라는 것은 우리가 당연지사로 받아들이고, 누구나가 다 일치하게 인정하는 사실이다.

2. 이에 반하여 바로 그런 생각과 정반대의 것을 혐오한다(10절).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실 의향은 그에게 추호도 없으시며," 우리도 그건 상상조차 할 마음이 없어야 하고, 그런 기미를 보이거나 하나님을 험집는 것같은 말을 하거나 하는 일은 일체 없어야 한다.

Ⅲ. 두 가지 논증에 의해 그 사실이 명백하게 증명되고 있다.

1. 그의 독립되고 절대적인 주권과 지배(13절).

"누가 땅을 그에게 맡겼으며," 누가 그를 이 지상 인간의 만사를 처리하도록 위임하였느냐? 더욱이 누가 온 인간 세상을 정하였느냐?

그는 인간의 열국들을 통치하는 유일하신 분이시며, 그 일을 스스로 행하시고, 누군가에게서 위탁받은 것도 아니며, 다른 누구에게 맡기신 것도 아니다.

(1) 분명한 것은 정사가 그의 것이며, 하늘 위나 땅에서나 모든 무리들에게 그는 자기 뜻에 따라서 행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불공평하다는 비난을 받을 수가 없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까?"(창 18:25) 만일 "그에게" 어떠한 "불의라도 있거나," 있을 수 있다고 하면, 어떻게 그가 세상을 다스리거나 심판하겠느냐?(롬 3:5, 6) 그런 무제한의 권세를 가지신 분은 자기 안에 흠없는 순정함을 정녕코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또한 왜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처사를 잠자코 따라가야 마땅한가 하는데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온 세계를 정하신 자가 우리와 우리의 관심사를 정하지 않겠는가?

(2) 확실한 것은 그가 자기 권세를 다른 누구에게서 빌어오지 않았으며, 그의 권세가 누구에게서 위탁받은 분배품이 아니라, 원래적인 것이고, 그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가 완전하게 공정하지 못하다면 온 세계와 세상만사는 곧 극도의 혼란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 지구상에서 최고의 권력자들이라도 자기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며, 그들은 그에게 책임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함부로 불의를 자행할 수는 도저히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위에 아무도 없으므로 어떤 통제받을 필요가 있는 일을 하나님이 행하신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그의 본성의 온전하심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절대적 주권자라면 우리는 그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호소할 더 높은 권세자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덕행이나 선행은 필수적으로 행해야 할 일이다.

  1. 항거할 수 없는 그의 권세(14절).

"만약 그가 사람과 다투시기로 인간에 대한 자기 마음을 작정하신다면," 더욱이(어떤 사람들이 읽는 대로) 만약 그가 인간을 멸하시기로 "자기 마음을 정하신다면," 또 만일 그가 인간을 멸하시기로 "자기 마음을 정하신다면," 또 만일 그가 인간을 다루심에 있어서 summu etestas-즉 오직 주권에 의거하여서 하시거나, 혹은 summum Jus-즉 엄격한 공의에 의하여 하실 것 같으면,

—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영과 기운은 곧 사라질 것이며, "모든 혈기있는 자는 일체 다 멸망할 것이다"(15절).

많은 사람들의 정직함도 따지고 보면 순전히 저들의 무력함에서 연유한다. 그들은 악이 행해지더라도 더 이상 그것을 지탱할 수 없기 때문에 악을 행치 않거나, 악을 행할 능력이 그들 안에 없기 때문에 악을 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인간이라 하더라도 쉽사리 또 갑자기 그를 분쇄하실 능력이 있으시지만 임의대로 어떤 사람을 자기의 권세를 가지고 멸망시키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의 무한한 온전하심이며, 또 그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실 수 있는가?

그는 우리를 금방 티끌로 돌아가게 하실 수가 있다. 이렇게 하시는 데는 그의 전능하신 능력에서 보면 적극적 행동조차 필요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가 우리 생존의 근거가 되는 그의 섭리를 한꺼번에 회수하시기만 하면, 만일 그가 맨 처음에는 자기 수중에서 나왔고 아직도 그의 장중에 쥐어 있는 바로 "그 신과 기운을 자기에게 거두어 들으신다면," 우리는 공기가 빠진 동물 장난감처럼 즉시 소멸하고 말 것이다.

(2) 그는 우리에게 악을 행함이 없이도 어떻게 우리를 처리할 수가 있으신가?

그는 자기가 주신 존재 자체를 회수하실 수가 있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존재에 관한 한 자의대로 행할 수는 없는 차용인에 불과하며, 또한 우리는 그것을 몰수당하는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존재가 계속되는 동안 다른 어떤 위안물이 제거당하든 간에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엘리후의 연설(10)(욥기 34:16-30)

엘리후는 이 문단에서 욥에게, 보다 더 직접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욥의 친구들에게는 엘리후가 "총명한 자들"이라 규정하고 말을 걸었었는데(10절), 이제 욥에게 이야기하면서도 "네가 총명이 있거든"이란 "전제"를 걸고 있다. "네가 총명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을 주목하라(16절)라고 한다.

Ⅰ. 이 말을 들으라.

즉 다음과 같은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자기가 행동하신 어떤 일로도 사람에게 불평이나 시비를 당치 않으신다. 욥이 불만을 품고 행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처사를 캐묻고 정죄한다는 것은 무엄하고 외람된 짓이다.

1. 그것은 정의에 대한 공공연한 협잡꾼에게 권세를 쥐게 하는 것과 다름없이 얼토당토 않은 짓이다. "공의를 미워하는 자시면 어떻게 처리하시겠느냐?"(17절)

의로우신 여호와께서는 의로움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욥이 비록 온전하고 의로운 자라 하더라도 하나님과 비교한다면 욥조차 공의를 증오하는 자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가 처리하겠는가? 그런 그가 하나님을 지도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로 잡겠다고 나설 수 있겠는가? 우리와 같은 불의한 피조물들이 의로우신 하나님께 권세를 부릴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인가?

우리는 우리 본성의 부패함과 우리의 내면에 있는 모순성을 영원하신 공평의 통치(법칙)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하나님에게 명령을 내린다는 일이 얼마나 무례하고 경건치 못한 일인가를 깨닫지 않을 수 없다.

2. 아주 의롭고 무죄한 인사를 법정에 세우고 그를 불리하게 정죄한다는 일은 가령 그가 아주 공정하였다는 사실이 재판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고 하더라도 이만저만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니다.

"너는 그 모든 길에 있어 의로우신 자를 정죄하겠느냐? 또 그럴 수밖에 없느냐?"

3. 그같은 짓은 권세 가진 군주에게 "너는 악하다"고 말하며 재판석의 판사들에게 "너희는 경건치 못하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당치도 아니하고 더 어울리지 않은 일이다(18절).

만약 그같은 말을 한다면 제왕의 위엄이나 판사직에 대한 참지 못할 모독으로 간주될 것이다. 어떤 왕이나 귀인도 그런 말에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통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하여 우리는 반증이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 한 이미 내려진 판결은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면전에서 "당신은 악하오"라고 왕에게 말한다는 것은 적합치 못하다. 나단 선지는 다윗왕에게 비유를 사용하여 견책하였다. 대제사장이나 선지자가 어떻게 했든간에 일반 신민들이 권세 가진 자들에게 그렇게 대담하게 말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물며 하나님께 그런 불손한 말을 한다는 것, 즉 인간의 체면을 돌아보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부정한 일을 행하시도록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는 분에게 불공평하다는 누명을 돌린다는 것은 얼마나 더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그는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시지는 않으신다." 그러므로 그가 다스린다는 것은 합당하며, 우리가 그에게 비난을 퍼붓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19절).

빈부를 막론하고 하나님께는 평등한 존재다. 위대한 자라고 해서 자기 부귀나 위대함 때문에 더 행복해 지거나 은총을 받는 게 아니다. 빈궁한 자라고 해서 자기의 가난 때문에 더 불행해진다거나 정당한 주장이 무시당하는 일은 결코 없다.

욥은 그가 가난하게 된 이상 자기가 부자일 때만 하나님께 은총을 얻으며 그의 보살피심을 받아야만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심을 받은 바가 되기 때문이다."

저희의 신체도 그러했다. 가난한 자도 부자와 마찬가지로 동일하신 손으로 지음을 입었고 동일한 바탕의 틀로 창조되었다. 그들 형편도 그러했다. 가난한 자도 부자가 돈이 많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가난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빈궁한 자들이 자기의 분깃, 즉 운명 때문에 더 불행하게 되는 것은 아니며, 그 가난함은 그들의 잘못도 아니다.

Ⅱ. 이 말을 들으라. 즉 하나님은 자기가 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감사를 받으며 복종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엘리후가 여기서 욥에게 깨우쳐 주는 여러 가지의 다양한 의견들은 욥의 마음 속에 하나님께 대한 크고 높은 존경심이 일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며,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설득시키고 나아가서는 하나님과 더 이상 논쟁하지 않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1.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자기가 사람들을 정죄하시고자 하신다면 인간 중 가장 강한 자라 하더라도 처치하실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20절).

하나님이 하시고자 할 때에는 아무리 수가 많더라도 민족의 일단인 "백성들도 떨며 없어지고" 혼란을 일으켜 무질서 속으로 빠져들게 하신다. 인간들 중에서 아무리 존귀하고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세력있는 자" 즉 왕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입을 열기만 하시면 그의 왕좌에서 "폐위될 것이며," 산 자의 영역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들은 죽어 버리고 말 것이다. 사망의 권세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계신 그가 행하실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 이런 파멸의 돌연함에 주목하라.
    • "순식간에 저들은 죽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교만한 원수를 끌어 내리는 일이란 시간을 요하는 일이 아니다. 그가 하시고자 하실 때에는 순식간에 행해지는 일이다. 그가 저들에게 예고하실 필요도 없고 한 시간의 여유를 두고 경고를 하시기로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라."
  • 이 일이 일어나는 시기에 주목하라.
    • "저들은 한밤중에 고통을 당할 것이다." 곧 저희가 안전하고 근심이 없이 지내는 시간이라고 할 때, 저희가 자신들을 구할 수 없을 때에 이런 일이 임한다. 마치 첫 소생들을 잃었던 애굽인의 경우와 같다.
    •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행하시는 일이시다. "손을 댐이 없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눈에 띄지 않는 심판에 의하여 그들은 제함을 받는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시키지 않고 또 어떤 인간의 도움 없이도 가장 강대한 폭군이라도 비천하게 꺾으실 수 있으시다.
  • 자기 목적을 달성하심에 있어서 그가 어떤 손을 쓰시든 간에 그가 필요로 하시는 것은 없으며, 그 일을 하심에 있어서 사람의 손을 쓰시지 않고도 해 내실 수가 있다.

그가 이와 같이 압도하여 이길 수 있는 것은 일개 강력한 개인에 국한하는 게 아니다. 수 많은 무리에도 해당된다(24절).

"그는 세력있는 자들을 조사할 것 없이" 궤멸시키실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연합세력이라도 전능하신 이에게 거스려 설 수는 없는 까닭이다.

하나님이 폭정을 망하게 하신다 할 때에도 그는 무정부를 도모하시는 건 아니다. 가령 학정을 자행한 자들이 망했다고 하더라고 그 결과 인민들에게 지배자가 없게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권세있는 자들을 꺾으실 때에는 더 선정을 베풀 "딴 사람들을 그 대신 세우시는" 까닭이며, 만약 그들 역시 잘 통치하지 않는다면 그들 또한 밤중에나 어떤 밤에 "엎으실 터인즉 그들 역시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25절). 벨사살 왕의 경우가 이를 증거한다. 만일 그가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실 의향이 있으실 때에는 그들을 당장 진멸하시지는 않으시고, "그는 그들을 악한 자로 여겨 치신다"(26절). 그들에게는 비천하게 하고 굴욕을 주는 모종의 심판이 내려진다. 이들 악한 지배자들은 딴 악인들과 마찬가지로 치심을 입는다. 곧 그들의 신체나 재산이나 혹은 그들의 가족이 확실하게 또 아프게 두드려 맞는다. 이것은 그들의 이웃에 대한 경고가 된다. 이 치심은 in terrorem-즉 타인들에게 대한 경종으로 내리시는 것이며, 그러므로 "타인들의 목전에서" 치신다. 이로써 그들 또한 하나님의 정의 앞에서 보고 두려워하며 떨게 하려고 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왕들조차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면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말해 무엇이랴!

2.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 극히 은밀한 일이라도 알아 내실 수 있다.

최강자라도 그의 팔을 당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장 교묘한 자라할지라도 그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자들이 우리 생각에 요량되는 정도보다 다소 더 벌받거나 덜 징계당하는 경우가 있다고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불평하기 보다는 그것이 하나님 혼자만 아시는 어떤 은밀한 이유 때문에 그렇다고 판단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일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세상만사가 그 앞에는 드러나 있는 까닭이다(21절).

"그의 눈은 인간의 길을 주목하신다." 만사가 그의 시야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눈이 그들 위에 머물러 있어서 하나님은 사실상 그들을 감찰하시고 또 그들을 조사하고 계시기까지 하신다. 우리가 어디를 가고자 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주목하에 있다. 선악간을 불문하고 우리의 모든 행동은 사찰을 받으며, 기록되어져서, 그 책들이 펼쳐져서 심판을 받게 되는 날까지 보관되어 있다.

(2) 이러한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감추이거나 은폐될 수가 없다(22절).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게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찾아내시는 시선과 복수의 손길로부터 "자기들을 숨길 만한 은밀하고, 두텁고, 고적하며 빛과는 멀리 떨어진" 그런 "흑암이나 어두운 그늘이 없다."

[1]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동산의 나무들 사이에 숨었던 아담과 같이 할 수만 있다면 세상의 눈으로부터는 수치로 인해 자신을 감추고자 하며(그들은 아마 세상의 눈은 속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눈으로부터는 공포로 인해 스스로를 감추려고 한다.

권력을 가진 자들과 두령들이 자신을 숨기기 위하여 바위와 산을 찾는 날이 올 것이다.

[2] 그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느니 보다 차라리 사망의 그늘에 숨는 일이라도 그것을 기뻐하고, 무덤 속에 숨어 거기서 영원히 누워 있기를 더 좋아할 것이다.

(3)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우리를 추적하실 때에는 그의 공의로부터 도망치려고 생각하거나 행방을 감추려고 도모하는 일이 헛된 짓이다.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사람에게서 자신을 숨길 방편과 책략을 발견해 낼 수는 있어도, 하나님께로부터 피해 날 재간은 없다. "그는 그들의 행위를 아신다"(25절). 곧 그들이 무엇을 행하며 무엇을 계획하는지 알고 계신다.

  1. 하나님은 의로우시나 자기의 모든 처사에 있어서 공평의 법칙에 따라 행하신다. 비록 그가 권세자들을 엎으시고 그들을 산산조각으로 파하실 때에라도 "그는 사람에게 받아야 마땅한 정도 이상으로 손대지는 아니하신다"(23절-역주 영어 성경과 우리말 성경 사이에 차이가 있다). 무죄한 자를 벌하지 않으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범죄한 자라고 해서 그들의 불의에 대해 마땅히 보응을 받아야 할 것 이상을 그들에게 강요하시지는 않으신다. 죄와 벌의 비율에 있어서는 무한하신 지혜자가 심판관이 되실 것이다. 그는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자기를 혹독하게 대우하셨다고 불평할 만한 명분을 인간에게 주지 아니하실 것이요, 어떤 사람도 "하나님과 함께 재판에 들어가게"는 아니하실 것이며, 하나님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도록 하지도 않으실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더라도 판결시에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분명히 하셔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불평 때문에 책망을 많이 받았으며, 여기서도 그의 소송을 취하하도록 종용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패소하거나 소송이 기각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전능자와의 재판에 들어 갈 의도를 한다는 것은 도대체가 어불성설이다"고 어떤 이들은 전체 구절을 읽고 있다.

욥은 가끔 하나님 존전에서 자기 이유를 변호하기를 원하였다. 엘리후는 의문을 제기한다.

"무슨 목적으로? 당신에게 대해 이미 내려진 판결은 확정될 것입니다. 그 안에서 어떤 오류도 발견할 수 없으며 그것에 적용된 것에는 어떤 예외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결국 그것은 현재 그대로 남을 것이 틀림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정당하며 또 그러함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권세있는 자들을 멸하시거나 "그들을 악한 자로 여기어 치실 때에라도 당연한 보응 이상으로 그들을 벌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는 그들의 사악함이 무엇이었는지를 나타내 보이신다(27, 28절). 누구라도 그 악함과 징벌을 비교해 보고 나서 그들이 당연히 받을 벌을 당하였는지 아닌지 판단해 보라고 하신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공정하게 심판하실 이들 불공평 한 재판관들은 결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을 돌아 보지도 아니하였다"(눅 18:2).

(1)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자였다.

"그들은 그에게서 돌이켜 떠났으며," 그에 대한 경외심을 끊어 버렸고 바로 그에 대한 생각들을 버렸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모든 길을 무관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의 교훈에 주의하지도 않았으며, 그의 뜻에 유의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이 없는 세상인 양 살았던 까닭이다. 이것은 악인의 사악함이 근본이며,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중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들이 하나님을 존중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존중하고자 아니 하려 하기 때문인 것이다.

사소하게 얕잡아 보는 것은 경건치 못함에서 연유하며, 따라서 모든 부도덕함에서 발생된다.

(2) 그들은 온 인류에 대한 폭군이었다(28절).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께 부르려고 하지 아니하고,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되게 하였는데," 이제 그 부르짖음이 그들을 고소하였다.

그들은 빈한한 자들에게 해를 주며 그들에게 억압적이었고, 학대하며 착취하였고, 그들을 더 한층 가난하게 하며,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고통을 더 하여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절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평을 호소하였고 그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들의 이익을 변호하시게 되었다. 가난한 자들이 쳐서 하는 기도와 눈물을 받는 자는 그 입장이 곤란하게 된다. 왜냐하면 압제받는 자의 부르짖음은 조만간에 억압하는 자들의 머리 위에 복수를 내리게 할 것이기 때문이며, 아무도 이 일이 "정도에 지나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출 22:23).

4.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일에 있어서 억제할 수 없는 주권을 행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공동체든 특정 개인이든 간에 그에 상관되는 것은 무엇이든 이끄시고 지배하시므로, 그가 의도하시는 일은 결코 꺾이지 아니 할뿐더러, 그가 행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결코 변경될 수가 없다(29절).

(1) 온 세상의 빈축도 하나님이 자기 미소를 평온하게 해 주시는 자들을 혼란시키지 못한다. "그가 평강을 주실 때에 누가 감히 말썽을 일으키겠느냐?"(29절)

하나님이 평강을 주신다고 말하신 자와 그를 위해 평안을 만들어 낸 자들에게 소란을 피운다는 것은 지옥과 땅의 모든 권세에 대한 도전이다. 만일 하나님이 한 민족에게 외적 평화를 부여하신다면 그는 자기가 주는 바의 것을 보장하실 수가 있으시며 그 민족을 교란시키고자 하는 원수도 폐하실 수가 있다.

만일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내적 평강을 주신다고 하면 의로움의 결과인 이 평온과 영원한 확신에 대해 사단의 고소나 현재적 고통이나, 죽음 자체의 사로잡음조차도 곤란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평강 중에 거하는 영혼들"을 무엇이 불안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빌 4:7  참조)

(2) 하나님이 찡그리심으로 혼란을 주고자 하신 자들은 온 세상의 미소로서도 편안하게 해 줄 수가 없다.

만약 하나님이 불쾌히 여기셔서 "자기 얼굴을 가리우시고" 자기 은총의 위로를 주시지 않는다면 "누가 그를 바라 볼 수 있으랴?" 누가 하나님의 진노하심 중에 견디어 내면서 성내신 하나님을 바라다 볼 수 있으며, 그것을 돌이키게 하겠는가? 누가 숨으시기로 결심하신 때에 그의 얼굴을 나타내게 만들 수 있으며, 그의 주위에 둘러있는 구름과 흑암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자가 누구이냐? 그렇지 않으면 누가 불안한 죄인에게 영원한 구원을 베풀면서 그 죄인을 바라다 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대적이 되신 자에게 친구로 서 있을 자가 누구이랴!

아무도 하나님 없이는 외적인 상태의 고통을 구제할 수가 없다.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않으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울 수 있을 것인가?"(왕하 6:27) 아무도 하나님과 그의 두려움에서 마음의 괴로움을 구하지 못한다. 만약 그가 죄지은 양심에 그의 진노하심의 감각으로 표시를 해 두신다면 피조물이 바치는 온갖 위안물도 아무 효과가 없다. "초산에 식초를 타듯 무거운 심정에는 노래도 별 무소용이다."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불가항력은 공동체와의 거래나 특정 개인의 처리에 있어서나 불문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행하시는 것은 결코 제어할 수가 없다. 공공의 입장에서 "한 민족에게 행해진 것이든" 개인의 사사로운 일에 있어서 "한 사람에게만 행해진 것이든" 절대로 인간이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강대한 나라를 다스리는 바로 그 섭리가 가장 미약한 개인의 관심사도 주관하고 계신다. 저 민족의 힘도 그의 권세에 저항하지 못하고, 일개 개인의 조그마한 것도 그의 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가 행하시는 것은 결국 성취되고 또 승리를 얻을 것이다.

5. 하나님은 지혜로우시사, 공공의 복리에 관심하신다. 그러므로 "사특한 자가 권세를 잡아 통치하는 일이 없도록" 수배하시니, "이는 백성들로 함정에 빠져 해를 입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30절).

(1) 사특한 자들의 자만을 보라.

그들은 권세를 잡아 다스리기를 도모한다. 인간들의 칭찬이나 이상 권세가 그들의 노리는 목적인데 이것이 그들의 상급이다.

(2) 독재자들의 책략을 보라.

그들은 스스로 출세하고자 꾀할 때에 때로는 종교를 자기들의 야심을 가장하고 은폐하는 데 사용하여 사특하게 제위에 오른다.

(3) 사특한 자들이 권세를 잡을 때에 백성들이 처하게 되는 위험을 보라.

백성들은 죄의 올무에 빠지거나 고통의 덫에 걸리거나 혹은 이 둘에 다 방해받기가 쉽다. 위선자들의 수중에 들어간 권력은 흔히 민중의 자유와 권리를 파괴하는데, 그들은 강압적으로 빼앗기보다는 감언이설로 더 쉽사리 속아 빼앗긴다. 이처럼 경건한 모습으로 위장한 권세 때문에 참 경건한 권세에 많은 위해가 가해졌다.

(4) 이런 위험을 방지하지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백성에 대해 취하는 보살핌은 곧 "사특한 자가 권세를 잡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특한 자가 전혀 권세를 잡지 못하거나 잡는다고 해도 오래도록 통치하지 못하도록 하신다. 만약 하나님이 민중에 대해 자비심을 준비해 두고 계신다면 그는 위선적인 통치자들의 발호를 막거나 혹은 그런 사특한 지배자의 종말을 재촉하시거나 하실 것이다.


엘리후의 연설(11)(욥기 34:31-37)

Ⅰ. 엘리후는 이 문단에서 욥이 자기의 고통 중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다(31, 32절).

욥의 불평하는 격렬한 언사를 책망하고 난 뒤였으므로, 엘리후는 이제 더 좋은 말들을 욥의 입에 담도록 가르친다. 우리가 잘못된 것에 대해 견책할 때에는 선한 것도 지시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우리의 꾸짖음으로 하여금 "훈계의 책망"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잠 6:23). 그는 이런 말들을 사용하라고 욥에게 강요하지는 않고, "말하기에 알맞는 것"으로 그에게 권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엘리후는 고난을 당하는 중에 있는 욥으로 하여금 자기의 비행과 품위없는 표현을 회개시키고자 하였다. 욥의 다른 친구들은 욥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악인이라고 자인시키려고 하였으며, 그들은 지나친 행동 때문에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엘리후는 욥으로 하여금 이 논쟁의 처리에 있어서 욥이 "자기의 입술로 지각없이 말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하기만 하면 되었다. 우리는 책망을 할 때 이 사실을 기억하고, 일을 현 상태보다 더 악화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범죄의 확대가 기소를 앞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엘리후는 요점을 맞추어 바로 행했고 그에 따라 성공하고 있다. 그가 욥에게 지시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자기 죄악에 대해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낮추며 그 죄악에 대한 징벌을 감수할 것을 가르친다.

"나는 징계를 받았사오니, 내가 당하는 고통은 바로 나를 엄습하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그것을 감수하고 그 징계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롭다고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의 선하심을 시인합니다."

많은 자들이 징계를 받지만, 그 징계를 견디어 내지 않고 잘 참지도 않으며, 그래서 실제로는 징벌을 전혀 인내로 감수하지 않는다. 참회하는 자들이 만약 진지하다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을 잘 받아들이며, 낫도록 의도하는 외과적 수술과 같은 징계를 견디어 낼 것이다.

  1. 하나님이 자기의 죄악들을 욥 자신에게 드러내 주십사고 기도할 것을 가르친다(32절).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여호와여, 돌아보건데, 나는 내게서 많은 잘못을 발견하였사오며, 나로 말미암아 지절러진 많은 잘못을 발견합니다마는, 내가 알지 못하는 더 많은 잘못과 더 큰 가증스런 일들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무지 와 실수와 나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것으로 인하여 나는 이러한 잘못들을 보지 못합니다. 여호와여! 나로 그런 잘못들을 볼 수 있게 해 주시오며, 나의 양심이 깨어서 자기 본분을 충실히 다 해 낼 수 있도 록해 주시옵소서."

선량한 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좋지 못한 점을 알려고 하는데 인색하지 않으며, 특별히 역경 중에서는 하나님이 무슨 이유로 자기와 다투시며, 자기를 교정하시기 위해 무슨 의도를 가지고 계신지 지적받기를 갈망한다.

  1. 개량의 약속을 드릴 것을 가르친다(31절)

"내가 더 이상 범죄치 않겠나이다."

"만약 내가 불의를 행하였다면(내가 잘못 행한 것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더 이상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당신께서 내가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고 하면 내가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 무엇이든 나는 당신의 은혜로 말미암아 장래에는 그것을 고치겠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범죄하였다고 고백하는 것을 의미하며, 진정한 후회와 그 범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과 우리에게 고통을 내리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겸손히 동의하는 것을 암시한다. 이 징벌은 우리와 우리 죄 사이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참회하는 자들은 이렇게 하여 자기의 회개를 성취시킨다. 왜냐하면 우리 죄에 대한 유감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여서 우리는 가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아야 하며, 여기에서처럼 다시는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으로 우리를 붙들어 매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확고한 목적 안에서 말해야 하며 엄숙한 약속과 맹세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말씀을 드려야 마땅한 것들이다.

Ⅱ. 엘리후는 욥이 고통 중에 있으면서 자기의 고난에 대한 불만과 불안함을 가지고 있음을 보고 그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33절).

우리는 우리에게 관계되는 일이면 무엇이나 우리가 원하는 그대로 되기를 즐겨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엘리후가 제시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그렇게 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합리하고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네 뜻대로 되어야 하겠느냐? 아니다. 그럴 이유는 무엇이냐?"

엘리후는 하나님의 뜻과 지혜와 그리고 그 안에서의 만족에 지당함을 표하면서 말하고 있다. 만사가 하나님의 의사에 따라 되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또한 그는 스스로 뻐기며 자기 자신의 살을 베어 먹는 자들의 자부심을 경멸하여 얘기한다. "그것이 네 의사에 따라야 하겠느냐?" 우리는 우리가 항상 즐기고 싶어하는 좋은 것만 누려야만 할 이유가 있는가? 만약 그렇게 하면 우리는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게 될 것이며, 어리석게도 우리 자신을 함정에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이 고통받을 의사가 없다고 해서 결코 고통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죄인들이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게 가당한 일이면, 학자들이 학문적 훈련을 받지 않아야 온당하다는 것인가?

설사 우리가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맞을 매를 우리가 택할 수 있어야 옳다는 것인가? 아니다, 만사는 하나님의 의사에 따라서 되어져야 마땅하며, 우리 뜻대로 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창조자이시며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무한히 지혜로우시며, 그 총명이 한량없으시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들이며, 근시안적이다. 그는 한 가지 마음을 가지고 계시나 우리는 마음이 수만 갈래 가운데서 우왕좌왕한다.

  1. 그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허사이며 아무 이득이 없으리라는 것이다.

"그는 당신이 거부하든 택하든지 간에 그 일을 갚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길을 취하실 것이며, 자기 뜻을 이루실 것이며, 당신이 싫어하든지 좋아하든지 간에 자기 자신의 공의의 판결에 의거하여 보상하실 것입니다. 그는 절대로 당신의 승낙을 구하지도 않으실 것이며, 당신의 조언을 바라지도 않으실 것이고, 자기가 좋으실 대로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평안히 가지고 만부득히 행해야 할 것은 결단코 그대로 행하는 것이 당신의 지혜입니다. 현재 주어진 것은 최선을 다해 활용하시오. 왜냐하면 그 일을 달리 만드는 것은 당신의 권능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취사선택하기를 요구한다면 다시 말해서 당신이 하나님께 지시하고 그가 하시는 행위를 기피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해 보시오.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그가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 잠자코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아는 것을 말하시오. 당신은 반대할 것인지 복종할 것인지 당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말하시오.

문제는 명백하게 당신 앞에 놓여 있습니다. 바로 보고 정곡을 찌르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지 내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Ⅲ. 엘리후는 욥이 한 말 속에 많은 죄악과 어리석음이 있는지 없는지의 유무를 모든 지식 있는 중립적인 인사들에게 호소하며 묻고 있다.

  1. 그는 이 문제가 철저하게 심사 받기를 원하였고, 결말이 나게 되기를 원하였다(36절).

"내가 바라는 것은 욥이 끝까지 시험을 받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만일 누구라도 욥이 한 말의 정당성을 주장해 보겠다고 나설 자가 있으면 한 번 해보십시오. 만약 없거든 우리 모두가 욥의 말이 도무지 의롭지 못함을 증거하는데 하나같이 나섭시다."

욥이 당하는 고통은 그의 시험이라고 이해하는 분들이 많다.

"그의 고통이 계속되어 그가 완전히 낮아지며 그의 교만한 정신이 꺾일 때까지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가 자기의 오류를 깨닫게 되고, 무엄하게도 하나님과 그의 섭리에 대해 뇌까린 그의 말들을 취소하게 되기까지 그의 고난이 계속되게 해 주소서. 결과가 얻어질 때까지 그의 시험이 계속되게 하소서."

  1. 엘리후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모두 하소연하는 동시에 이 일에 대해 양쪽의 심판을 다 원하고 있다.

(1) 어떤 이들은 36절을 하나님께 대한 호소로 읽는다.

"오! 나의 아버지여! 욥으로 하여금 시험을 받게 하소서." 그 말에 대한 성서의 난외주도 같은 식으로 "내 원과 내 아버지"를 의미하고 있다. 그래서 엘리후가 "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여! 욥이 항복할 때까지 시험을 받게 하소서!"라는 의미로 이 말을 했을 때는 자기 눈을 들어 쳐다 보면서 이 말을 하였을 거라고 상상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고통이나 타인들의 고통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주목하면서 기도해야 한다. 이는 그 고통들이 아버지로서의 교정이며, 우리들 자신에 대한 교육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히 12:7).

(2) 엘리후는 곁에서 방관하고 있는 이들에게 질문을 호소하고 있다(34절).

"총명한 자들이여! 내가 한 말보다 욥의 말을 더 호의를 가지고 좋게 해석할 수 있는지 내게 말하시오. 또 욥이 그릇되게 말하지 않았는지의 여부와 peccavi-즉 내가 잘못 행하였나이다 라고 부르짖어서는 안 되는 것인지 내게 말하시오."

엘리후가 욥이 한 말 중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욥은 자기 자신조차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면서 어리석게 말하였다(35절).

엘리후는 욥이 지식도 없고 지혜가 없는 자라고 말 할 수는 없으나, 이 문제에 있어서는 "욥이 무식하게 말하였으며" 그의 마음은 어떠했든지 간에 "그의 말이 사려없는 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욥이 자기 아내에게 한 말이 이제는 욥 자신에게 되돌아 오고 있다(그가 어리석은 자들 중 하나가 얘기하듯 말하는구나). 그래서 같은 이유로 우리가 하나님의 손으로 되어진 일이니 "좋은 일과 아울러 악한 일이라고 해서 받아들이지 아니하겠느냐?"(2:10) 때로는 우리가 타인에게 내린 견책을 우리 스스로 필요로 하는 수도 있고 또 용납할 가치가 있다. 하나님의 지혜를 비난하는 자들은 실로 자기 자신의 지혜를 꾸짖는 셈이 된다.

[2] 욥은 하나님을 마땅히 존중해야 했으나, 온당한 경의를 표하지 않고 악하게 대꾸하였었다. 만일 욥이 한 말이 끝까지 시험을 받는다면, 즉 만약 누가 욥의 말을 극도로 과장하여 가장 악의로 받아들인다면, 다음과 같은 결과로 나타나 버리고 말 것이다.

  • 첫째, 욥은 하나님의 원수들의 편을 들었다는 것이다.
    • "그의 대답이 악인들을 위하고" 있다. 곧 그가 한 말들은 악인의 손을 더 강하게 하며, 악인의 마음을 더 완악하게 하는 것 같다. 욥은 악인이 번영하고 있는 문제를 필요 이상으로 너무 세세히 끌고 갔었다. 악한 자들은 바알처럼 자기들이 하고 싶거든 스스로 번영하고 변호하게 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악인들을 위해 대답해 주며, 그들을 역성들어 한 마디라도 할 필요는 추호도 없다.
  • 둘째, 욥은 하나님의 친구들을 모욕했으며, 그들에게 고함을 질렀다는 것이다.
    • "그가 우리 중에서 자기 손뼉을 치는구나." 그리고 만약 그가 철저히 시험을 받아 완전히 낮추어지지 않는다면, 마치 자기가 승리하여 우리 모두를 잠잠하게 만들었다는 듯이 더 한층 건방지고 의기양양하게 될 것이다. 나쁘게 말하는 건 아주 좋지 못하다. 그러나 마치 실수와 과격 때문에 승리한 양 손뼉을 치며 우리가 한 일을 의기양양해 하는 건 더 한층 나쁘다.
  • 셋째, 욥은 스스로 하나님을 거역하며 말하고, 자기가 한 말을 고집하며, "자기 죄 위에 패역을 더 하였다"는 것이다.
    • 우리가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말하며, 오직 그를 위해 말해야 마땅한 터에, 비록 한 마디 말이라고 할지언정 하나님을 거역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아주 큰 죄악이다. 하물며 우리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더 오래 말하려는 듯이 그를 거역하는 말들을 더 많이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닌가? 앞에 말을 취소하기는커녕 반복해 말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죄를 범한 자들이 회개하도록 부름을 받고서도 이처럼 계속 완악하게 버틴다면 저희 죄악 위에 패역함을 추가하는 것이며, 그것을 극도로 죄악되게 만드는 셈이 된다.
    Errare Possum, Hareticus esse nolo.-즉 나는 실수에 빠져 들 수는 있을지언정, 이단에 뛰어들지는 않겠다.

35장

엘리후의 연설(12)(욥기 35:1-8)

Ⅰ. 엘리후가 욥을 책망하여 들려 준 심한 언사(2, 3절). 그는 욥의 말들이 악함을 증명하고자 욥 자신에게 직접 호소하며, 욥 자신의 맑은 생각을 향해 깊이 반성할 것을 간청하고 있다. "너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이 말은 엘리후 자신이 지금 내리고 있는 책망이 정당하다고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그는 그 판단을 욥 자신에게 맡길 수 있었다. 진리와 공평을 자기편에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조만간에 만인의 양심을 자기편에 오도록 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욥에 대한 엘리후의 호의를 암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욥이 그 말보다 그 생각에 있어서는 더 착하여서 비록 말은 잘못하였을지언정, 자기의 실언을 깨달은 이상 그 잘못된 말을 고집하지는 않으리라고 욥을 선의로 해석하는 견해를 암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옳지 않은 말을 성급히 내었다고 할 때,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그것이 그릇된 말임을 깨달아 알게 되었노라고 자인하게 된다. 엘리후는 두 가지 일로 욥을 꾸짖는다.

  1.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 스스로를 더 의롭다 하였음에 대한 책망으로서, 이것은 처음으로 그를 성나게 했던 일이었다(32:2). "당신은 사실상 '내 의로움이 하나님의 의로움보다 더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즉 '나는 하나님이 여태껏 내게 행해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하나님께 바쳤노라. 그래서 손익을 회계해 보면 그가 내게 채무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마치 자기의 봉사에 대한 지불이 실제보다 더 박하게 보상되었고, 자기 죄악은 실제로 받아야 마땅한 징벌보다 더 심하게 벌 받은 것처럼 생각하였는데, 이것은 누구든 품어서는 안 될 아주 부당하고도 악한 생각이었으며, 특히 이런 말을 입 밖에 낸다는 것은 더욱 더 그러하였다. 욥이 자기의 순전함을 그토록 강조하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푼 처사의 혹독함에 대하여 계속 주장하였을 때는 그가 실제로는 "내 의로움이 하나님의 의보다 더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착하고 우리의 고통이 아무리 극심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의롭지 못하다고 책망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그런 불의를 돌릴 수는 없다.
  2. 욥이 이런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종교가 주는 특전과 유리한 점을 부인한 데 대해서. "내가 내 죄에서 깨끗하다고 한들 내게 무슨 유익함이 있으리오?"(3절) 이 말은 욥기 9장 30, 31절에서 끌어 온 말이다. "내가 내 손을 아무리 정하게 한들 나의 가까이 나아가는 곳은 어디입니까? 당신께서 나를 도랑에 처넣으셨나이다." 또 10장 15절에는 "내가 악하다고 할진대 나에게 화가 있을 것이 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매일반이니이다"라고 하였다. 시편 기자는 시편 73편 13절에서 자기의 고통과 악인의 융성함을 비교해 보고는 시험을 받아 "내가 내 심령을 정하게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욥도 그렇게 말하였다고 할 것 같으면 사실상 "내 의가 하나님의 의보다 더 하다"(2절)고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자기 종교로부터 아무 것도 얻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욥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보다 욥에게 더 많이 신세를 진 셈이 된다. 그러나 비록 이것이 다소 사실인 듯 보이긴 하나 욥 자신이 형통하는 악인들의 악한 말들을 인용하고 나서(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이익을 얻으랴? 12:15), 그 말들을 즉각 부인하는 것을 볼 때 이 말들을 욥이 한 것으로 책임을 지우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니라"(21:16). 사람들이 명백히 잘라 부인한 말을 가지고 자기들 견해의 결론으로 미루어서 책잡는다는 것은 공명정대한 논박 방법이 아니다.

Ⅱ. 엘리후가 이 말에 대해 답변해 준 좋은 대답(4절). "내가 너와 및 너와 함께 한 동무들에게 대답하고자 하노라." 네가 한 말은 시인하며 그들 중에서 너를 의롭다고 기꺼이 인정하고자 하는 모든 자들이나, 네가 말하듯이 꼭 그렇게 말하는 모든 다른 사람들이 곧 네 동무들이다. 내게는 그들을 모두 잠잠하게 만들 수 있는 말이 있도다.

이 일을 위하여 그는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시다"는 그의 옛 금언을 사용하고 있다(33:12). 이 말을 적절하게 잘 사용한다면 많은 선한 목적에 소용이 되는 진리이며, 특별히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도 채무자가 아님을 증명하는 말이다. 인간들 중 가장 큰 자라도 가장 천한 자에게 빚을 진 자가 될 수 없으나, 신과 인간 사이의 불균형은 너무나 한량없이 차이가 나므로, 위대하신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가 없다. 따라서 위대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떤 의무도 져야할 리가 없다. 하나님이 자기 의사에 의해서 또 자기 약속으로 인하여 의무를 가진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만 돌릴 일이다.

그것은 어떤 인간도 결코 응할 수 없는 도전장이다. "누가 먼저 하나님께 드려서 갚으심을 다시 얻을는지" 시험해 보게 해라(롬 11:35).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는 종교로 인한 이득을 보지 못하는 때에 우리는 우리 종교로 말미암아(욥이 그런 것같이 보이는데) 이익보기를 꼭 받을 빚 독촉하듯 요구해야 마땅하단 말인가?

  1. 엘리후는 하나님이 사람보다 뛰어나게 높다는 사실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것은 누구나가 다 일치하여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엘리후는 높은 궁창과 구름 따위의 시각적 증명을 통하여 우리와 욥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노력한다(5절). 그것들은 우리보다 훨씬 높이 떠 있으나 하나님은 그들보다도 더 높은 데 계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 죄악이나 예배가 미치기에 너무 높은 데 좌정하고 계신 게 아닌가!

"하늘을 쳐다보며 구름을 바라보아라."

하나님은 인간이 바로 서 있도록 창조하셨다. 그래서 Caelumque tueri jussit-즉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을 쳐다보게 명하셨다. 우상 숭배자들은 위를 쳐다보고 하늘의 천군들과 해나 달 따위의 일월 성신에 경배 드렸으나,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보기는 하되 만군의 여호와께만 경배를 드려야 한다. 일월성신이 우리 위에 높이 떠 있으나, 하나님은 그들보다 무한히 높이 계신다. "그의 영광은 하늘 위에 계시며"(시 8:1), 그에 대한 지식은 하늘보다 높다(욥 11:8).

  1. 그러나 엘리후는 추단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의 행하는 일에 의하여 이리저리 영향을 받는 분은 아니시라는 것이다.

(1) 인간은 우리 인간의 소행에 따라 더 개선되기도 하고, 더 손상되기도 하는 존재라고 그는 인정하고 있다(8절).

"네 악은 아마 너와 같은 인간을 해할 수" 있으며, 사람의 외적 관심사에 있어서 고통을 야기시킬 수 있다.

악인은 자기 이웃을 다치게 하거나 강탈하거나 중상하기도 하며 또 그를 죄중으로 끌고 들어가, 그의 영혼에 손해를 입히게 할 수 있다. 너의 의로움과 네 정의, 네 자비, 너의 지혜나 경건은 아마 "인간에게 유익"을 줄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선함은 "땅에 있는 성도들에게까지 뻗친다"(시 16:3). 우리와 같은 인간에게는 해를 끼칠 능력도 인자를 베풀 능력도 우리는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에 있어서 만유의 주시요 심판관이신 여호와께서는 스스로 관계하실 터이니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상 주실 것이요, 제 동포나 같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자들은 벌하실 것이다.

(2) 그러나 지구상의 어떤 인간이나 가장 위대한 인간이 행하는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참으로 손해를 입으신다든지, 이득을 보신다는 것에는 그가 전적인 부정을 표하고 있다.

[1] 극악무도한 죄인의 죄도 그에게는 아무런 피해를 줄 수 없다(6절). "당신이 고의로 범죄한들, 하나님께 가해할 계획을 품고서 고압적으로 범죄한다고 한들, 아니 당신의 죄악이 관영하며, 악행이 아무리 자주 행해진들, 당신이 하나님께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말은 육욕을 가진 심령에 대한 도전장이며 가장 담대한 죄인에게라도 마음대로 해 볼테면 해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장 악한 원수도 하나님께는 실질적 손해를 입힐 권세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하나님의 크심과 영광을 웅변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죄악이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죄인이 그런 계획을 하며 하나님도 그렇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영예에 대한 훼손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나님께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가 없다."

죄인의 악한 뜻도 무능한 악의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그의 존재나 온전하심을 파괴할 수도 없고, 그의 권세와 주권의 보좌에서 그를 끌어 내리지도 못하며, 그의 재산이나 소유를 줄이지도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평강이나 안식을 어지럽힐 수도 없으며, 그의 의도나 계획을 패배시키지도 못하고, 그의 본질직인 영광을 훼손시킬 수도 없다. 그러므로 "내가 내 죄에서 정하게 되는 것이 어떤 유익함을 주랴?"라고 한 욥의 말에는 잘못이 있다.

하나님은 욥의 개심으로 말미암아 아무 이득을 보시지 않는 분이시다. 그렇다고 할 때 만약 욥이 득을 보지 않는다면 누가 이익을 얻는단 말인가?

[2] 가장 훌륭한 성도의 섬김도 그에게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7절). "네가 의롭다고 한들 그에게 네가 무엇을 드리겠느냐?" 그는 우리의 봉사도 필요 없으시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일이 완성되기를 바라신다면, 그에게도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더 훌륭한 수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종교도 하나님이 경축해 마지않는 것에까지는 전혀 도달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입으신 것은 얼토당토 않은 일이며, 도리어 우리가 그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그는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주시며 우리의 의를 용납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것도 요구할 수가 없고, 가령 우리가 우리의 기대하는 바를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등 불평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받았음을 감사해야 할 이유만 있다.


엘리후의 연설(13)(욥기 35:9-13)

엘리후는 욥이 했던 다른 말에 대한 대답을 여기서 하고 있다. 그는 욥의 이 말들이 하나님의 공의와 인자하심에 대한 많은 것을 반영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한 마디의 언급도 없이 지나쳐서는 아니 되겠다고 여겼던 것이다.

Ⅰ. 욥이 불평을 품었던 것들은 어떤 일들인가? 그것은 이러하였다. 곧 하나님은 압제당하는 자들이 압제자들에 대하여 부르짖는 바를 돌아 보지 않으셨다는 것이다(9절). "많은 억압으로 인하여, 오만불손한 독재자들이 가난한 자에게 내리는 많은 신고와, 폭군들이 저들에게 주는 야만적인 대우가 학대받는 자들로 하여금 부르짖게 하나, 그 울부짖음이 전혀 헛되도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시정하시는 것 같지가 않구나. 그들은 소리쳐 부르짖으며 자기들 위에 무겁게 누르고 있는 세력있는 자의 팔로 인하여 울부짖기를 계속하고 있도다." 이 말은 24장 12절에 나오는 욥의 말을 가리키는 것 같다. "성 중에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신음하여 상한 자의 혼이 압제자들에 대하여 부르짖되,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어리석음을 놓지 않으시며" 그 일로 인하여 그들과 셈하지 않으시도다. 이것은 욥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고, 하나님의 공의와 그의 처리하심을 두고 생각하더라도 조화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계시는가? 계신다면 그가 그토록 천천히 들으시며 그같이 둔하게 보실 수가 있겠는가?"

Ⅱ. 엘리후는 난점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학대받는 자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다면 그 잘못은 하나

님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기꺼이 듣고 도우실 준비를 갖추고 계시다. 그러나 잘못은 저들 자신에게 있다. "그들이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그들이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약 4:3).

"그들이 세력있는 자의 팔로 인하여 부르짖거나," 그것을 불평하는 부르짖음이요, 통곡의 부르짖음이며, 회개하고 기도하는 부르짖음이 아니다. 또 본성과 욕정의 부르짖음이지, 은혜의 부르짖음이 아니기 때문이다(호 7:14  참조). "그들이 침상에서 슬피 울면서도, 성심으로 내게 부르짖지 아니 하였도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응답받고 구원받기를 기대하겠느냐?

  1. 그들은 그들의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며,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10절). "그러나 나의 창조주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하고 말하는 이가 하나도 없구나.

고통은 우리가 하나님을 일찍 찾도록 지시하기 위하여 보내지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하도록 재촉하기 위해서 내려지는 것이다(시 78:34). 그러나 중한 억압하에서 신음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관계치 아니하며, 그들의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만약 하나님을 상관하며 그 손길을 깨닫는다면 그들의 고통을 더 인내성 있게 견딜 수 있으며, 그 고난으로 인하여 더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을 당하고 억압을 받는 다수의 무리 중에서 자기의 환난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유익함을 제대로 취하는 자들은 거의 없다. 그들은 자기 고통으로 인하여 마지 못해서라도 하나님께 돌아가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 인류 중에서, 빈궁하고 비참한 지역 인구에게서 경건한 종교를 찾기가 힘든다는 사실은 통탄할 만한 일이다. 누구나가 자기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법이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조성하신 이, 곧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냐?고 말하는 이가 없다." 즉 누구도 자기 죄를 회개하고 자기를 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아무도 하나님의 낯과 은총을 찾지 아니하고, 외부적인 그들의 환난을 상쇄시켜 줄 그의 위로를 하나님에게서 구하려 하지 아니한다.

그들은 그들의 비참한 상황 속에 완전히 사로 잡혀 있으면서도, 마치 그것이 하나님을 찾지 않고 세상살이를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변명이라도 되는 듯이 처신하는데, 오히려 그들은 그 고난으로 인하여 더욱 더 굳게 하나님께로 밀착하여야 마땅하다.

(1) 하나님은 우리를 조성하신 분이시요, 우리 존재를 지으신 이로서, 우리는 그런 개념에서 볼 때 하나님을 존중하고 기억해야 한다(전 12:1). "나를 지으신 이들은 하나님"이란 복수적 표현은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예시가 아니라면, 신성의 통일에 있어서의 삼위일체의 암시이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26-28).

(2)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아 묻는 일은 곧 우리의 의무이다. 그 분은 어디 계시는가? 우리가 우리의 충성을 바치고 그분께 대한 우리의 의존성과 그에게 대한 우리의 의무를 고백해 드릴 그는 어디에 계시는가? 우리가 생존과 보호를 요청할 수 있는 분, 율법을 전수 받을 수 있으며, 그 은총 안에서 우리의 행복을 구할 수 있는 그 분, 우리가 또 그의 권능에서부터 우리의 존재를 부여받은 바 그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3) 인간의 자손으로서 그를 찾아 묻는 이들이 그토록 드물다는 사실은 통탄할 일이다. "환란은 어디에 있느냐? 부귀는 어디에 있느냐? 유리한 매매물품은 어디에 있는가?"고 모두들 묻고 있지만,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묻는 자는 아무도 없다.

  1. 그들은 그들의 고통 중에, 그들의 환난 하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주목하지 않으며, 그 고통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도 없고 따라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고통으로부터 구출해 주시리라는 기대감을 가질 수도 없다.

(1) 그는 우리의 내적 위로와 우리의 외적 고통 하에서의 기쁨을 준비하여 제공해 주신다. 우리는 그 점을 이용해야 하며, 그가 우리의 고난을 없이해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는 밤중에 노래하게 하신다." 즉 우리의 형편이 대단히 암담하고 아무리 슬프고 우울한 지경에 처해 있을 때에라도, 하나님 안에는 또 그의 충분한 약속과 섭리 안에는 우리를 지탱시켜 줄 만한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기쁨과 위안으로 가득 채워 주는 동시에, 매사에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감사를 드리게 하고, 곤고한 때에라도 즐거워 하게 할 것이 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만을 곰곰이 생각하기만 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비장해 두신 그의 위로를 소홀히 여기면, 하나님으로서는 우리의 기도를 마다하시는 것이 지당하시다.

(2) 그는 우리의 이성과 이해력의 사용을 우리에게 남겨 주신다(11절). "우리를 교육하시기를 땅의 짐승에게 하심보다 더하게 하시는 이가 누구시냐?" 즉 누가 짐승들이 받은 것보다 더 고귀한 능력과 기능을 우리에게 부여하셨으며, 더 훌륭한 쾌락과 직업을 영구히 소유할 능력이 있도록 하셨는가?

[1] 이제 여기에서 나타내는 바는 비록 고통의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중에라도 우리에게 감사할 만한 일들을 내려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빼앗긴 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에게는 죽지 않는 영혼, 즉 온 세상보다 더 가치가 있는 보석들인 우리 영혼이 빼앗기기 않고 계속 남아 있다. 몸을 죽이는 자들이라 하더라도 "영혼"은 해할 수가 없다. 만약 우리의 고통이 영혼의 기능을 행사하지 못하게 방해할 만큼 기승을 부리지 못하고, 우리가 이성의 활용과 우리 양심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재난이 어떤 압박을 준다 하더라도 우리는 감사할 만한 큰 이유가 있다.

[2] 왜 우리가 고통 중에라도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을 찾아야 하며 그에게 구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이것은 나타낸다. 이것은 이상의 가장 훌륭한 점이다. 곧 그것은 우리에게 종교의 능력이 되며, 우리가 "금수보다 더 많은 가르침을 받는다"는 사실에서 특히 그러하다. 짐승이나 새는 먹이나 약을 찾아내는 일과, 피난처를 구하는 일에 있어서 놀랄 만한 본능과 지혜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내 조성자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하며 물을 수 있는 짐승이나 새는 하나도 없다. 논리학과 철학, 정치학 따위와 비슷한 것들이 야성의 피조물들 사이에서 관찰돼 오고 있으나, 신성이나 종교에 대한 것은 결코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억압을 받는 자들이 "강대한 자의 팔 때문에" 부르짖기만 하고 하나님을 쳐다보며 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상처를 입을 때만 호소하는 짐승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그들은 인간이 짐승보다 월등히 진보할 수 있었던 수단인 교훈과 지혜를 망각한 셈이다. 하나님은 야성의 조수가 그 기능의 가장 선한대로 그에게 부르짖기 때문에 그것들을 구제해 주신다(욥 38:41; 시 104:21). 그러나 하나님을 자기의 창조주로 찾을 능력이 있으면서도, 야수와 별반 다르지 않게 부르짖기만 하는 인간들은 구원을 기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1. 그들은 그들의 고통 중에도 그 교만을 꺾이지 아니하였다. 그들이 받은 고통은 그들을 고행시켜 정화되도록 하고 그들에게서 교만을 감추기 위하여 내리신 것이다(12절). "그들이 거기서 부르짖으나"-그들은 거기에 누워 그들의 압제자들로 인해 소리지르며 그들의 주위에 있는 모든 자의 귀를 그들의 불평으로 가득 채우고, 하나님과 그의 섭리를 상고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으나,-"응낙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구원을 베풀지 아니하며, 사람들도 그들을 눈여겨 보지 아니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악인의 교만 때문"이다. 그들은 사곡한 인간들이다. 그들은 "그 마음 속에 있는 불의를 존중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할 것이다(시 66:18; 사 1:15). "하나님은 그런 죄인의 소리는 듣지 아니하신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사악함을 인하여 스스로를 고난 속으로 몰아 넣었다. 그들은 악마의 수중에 떨어진 불쌍한 노리개이다. 그런데 누가 그들에게 연민의 정을 품겠는가? 그러나 비단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교만하여서 하나님께 구하지 아니하며(시 10:4), 가령 그에게 부르짖는다고 한들 하나님은 응낙하지 않으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은 "겸손한 자의 소원" 뿐이며, 그는 자기가 먼저 그 은혜로 예비해 두셨다가 구원에 합당하도록 만들어 두신 그의 섭리에 의해서 저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겸손하도록 요구하는 고통을 당하는 중에도 심령이 겸비하지 아니하며 자만심이 꺾이지 않는다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이제 경우는 빤하다. 만약 우리가 현재 당하고 있는 억압이나 고통이 물러나게 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부르짖으나, 그것이 제해지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손이 짧아서도 아니요 그의 귀가 들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고통이 아직 제 할 일을 다 마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리 겸손하다고 해도 충분히 자기를 비하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하여 겸손하는 일을 스스로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그들은 진지하지도 않고 정직하지도 않으며, 하나님께 대한 탄원에 있어서도 마음 속에서부터 우러나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듣지도 아니하시며 응답하지도 아니하신다(13절). "하나님은 헛된 것을 듣지 아니하신다." 즉 위선적인 기도는 헛된 기도여서 거짓된 입술에서 나온다. 하나님이 그런 기도에 귀 기울이실 줄로 생각한다는 것은 망상이다. 하나님은 심령을 감찰하시고 "내면의 진리"를 요구하신다.

엘리후의 연설(14)(욥기 35:14-16)

Ⅰ. 엘리후가 욥에게 힐책하는 다른 버릇없는 욥의 말이 여기에 나온다(14절). "너는 네가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고 말하는구나."

  1. "당신은 당신이 그의 엄격한 처사가 뜻하는 바를 이해치 못하겠다고 불평하며, 그의 처사가 목적하고 의도하는 바를 분간하지 못하겠다고 불평합니다"(욥 23:8, 9).
  2.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돌이킴을 보지 못하리라고 포기하며, 황금시절을 다시 보기 어려우리라고 절망하여, 만사 휴의라고 쉽사리 단념해 버립니다." 마치 "나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라"고 한 히스기야와 같다(사 38:11). 우리가 번영할 때는 우리 산이 결코 낮아지지 않으리라고 기꺼이 생각해 보는 것과 같이, 우리가 역경에 처해 있을 때에도 우리는 우리의 골짜기가 결코 메꾸워지지 않으리라고 굳이 생각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모두가 다 "내일도 오늘과 다름없이 마찬가지임에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이는 일기가 맑거나 궂거나 간에 항상 같으리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는 불합리한 생각이며, 만조가 항상 밀물로서만 흐를 것이라거나, 혹은 간조가 언제나 썰물로서 빠져 나가려니 하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터무니 없는 생각이다.

Ⅱ. 욥이 말한 이 절망적인 말에 대하여 엘리후가 내리는 대답은 이와 같다.

  1. 그가 하나님을 향해 쳐다보는 동안에는 욥이 이처럼 자포자기하여 말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판단은 그 앞에 있다." 즉 하나님은 자기가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알고 계시며, 모든 일을 무한하신 지혜와 공의로 행하실 것입니다. 그는 섭리의 전 계획과 모형을 자기 앞에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르지만 그는 자기가 행할 일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행하시는 일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앞에는 심판의 날이 있습니다. 즉 표면적으로 혼란한 일인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들이 바르게 나타나고, 그 일들의 어두웠던 내막이 밝히 설명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에는 이들 알 수 없던 사건들의 완전한 의미와, 이들 음울한 사건들의 최종적 결말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그의 얼굴을 기쁨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신뢰하시오. 그를 의지하고 그를 기다리며, 최후에는 결과가 유익하게 될 것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시며 의로우시고 신실하신 분이시며, 더욱이 그가 심판의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살펴 볼 때(사 30:18), 그로부터 오는 구원을 단념할 만한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없으며, 오히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둘 만한 온갖 이유를 발견할 수가 있다 .구원은 적당한 때에 가장 적절한 시기에 올 것이다.
  2. 만일 욥이 아직 자기 고통의 종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그가 이와 같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그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은 데 있다는 것이다(15절). "그것이 그렇지 않으므로, 당신이 그와 같이 하나님께 신뢰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당초에는 사랑으로부터 나온 고통에, 이제는 불쾌하심까지 혼합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노여움 가운데에서 당신을 찾으셨고, 당신이 마음 속에서 그를 신뢰하기를 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그토록 완악한 의구심을 품은 데 대해 불쾌하게 여기셨습니다." 만일 우리의 고난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섞여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의 탓으로 돌려야 한다. 우리가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올바로 처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언쟁하며 초조해 하고 참을성이 없으며 신의 섭리에 대해 불신감을 가지고 있다. 욥의 경우가 바로 이러했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며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 19:3).

그러나 엘리후는 욥이 그처럼 지독한 궁지에 몰려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해야만 마땅한데도 이 점을 알고 있지 못하고, 뼈저리게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엘리후는 "욥이 헛되이 자기 입을 열었다"고 결론짓는다(16절). 즉 그는 그의 불평을 호소하며, 그것들에 대한 교정을 부르짖고, 자신의 의로움을 정당화하여 그 자신의 결백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헛된 일이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아니하며, 기다리지 아니하고, 자기의 고통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올바른 존경심을 품지 아니하는 까닭이다. 그가 "말은 많이 하였으며" 아주 많이 지껄였으되, 전부가 "지식이 없는 말"이었으며 모두가 전혀 헛된 말이었다. 이는 그가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를 담대히 하지 않으며, 그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지 않은 까닭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호소를 하거나 우리 자신의 무죄를 고집한다고 하더라도, 만일 고통을 보내신 목적에 대하여 해답을 얻으려고 궁리해 보지 않는다면 헛된 일이며, 또 만일 우리가 구원해 주시길 바라서 기도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만약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그 어떤 것도 얻을 것을 기대"하지 말라(약 1:7). 혹은 이 16절 말씀은 욥이 한 모든 말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욥의 이야기 중 몇몇 구절은 불합리한 점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같은 식으로 그의 무지와 실언을 열매맺는 다른 많은 구절이 있다고 엘리후는 내린 것이다.

엘리후는 욥의 친구들과 같이 욥을 위선자라고 비난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심령이 격하였을 때 "자기 입술로 무분별하게 말한" 모세의 죄가 욥에게도 있다고 질책하였다. 어느 때라도 우리가 그런 행동을 하는 때에는(말에 범죄치 않는 자가 누가 있느냐?) 그 잘못에 대하여 꾸중하는 것이 바로 고마운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이 행한 것처럼 그것을 참을성 있게 받아들이고, 정중하게 받아들여서, 우리가 실언하였던 말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그 말들을 취소해야 한다.


36장

●엘리후의 연설(15)(욥기 36:1-4)

한 번 더 엘리후는 청중의 인내를 구하며, 특별히 욥이 참고 들어줄 것을 부탁한다. 이는 자기가 해야 할 말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 말들을 속에 오래 담아 놓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읽는다) "내 주변에 잠깐 더 서 있으라"(2절). "잠시만 더 여러분의 주의를 기울여 주십시오. 그리하면 나는 이번 한번만 말하겠고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간명하게 또 아주 효과 있게 말하겠습니다."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그는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으며, 고귀한 동시에 아주 효과가 많은 주제를 가지고 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오히려 할 말이 있음이라." 그는 하나님을 위한 변호사로서 말했던 것이고, 따라서 그가 법정이 경청해 줄 것을 기대함은 정당하다.

어떤 자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말하는 것처럼 가장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 말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진지하게 나서서 하나님의 명예와 진리를 위하여 또 그의 길과 그의 백성을 위하여 말하는 사람들은 어떤 다른 사람의 가르침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며("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로 같은 시각에 그들이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 저희의 명분과 상급을 잃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주제가 다하여 막히지나 않을까 겁낼 필요도 없다. 이제껏 그토록 많은 것을 말했던 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위하여 얘기할 것은 아직 얼마든지 더 찾을 수가 있다.

  1. 그가 제시하는 바의 일은 범상한 것이 아니며, 세속적 관찰의 상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내가 먼데서 지식을 취할 것이다"(3절). 즉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우리의 제일 원리하며, 우리가 어떤 목적을 충당하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최고 개념에 우리는 의존한다."

하나님께 대한 이런 지식을 찾기 위해 멀리 가서 그 지식을 캐고 또 그것을 얻기 위해 여행에 나서는 일은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노고에 대한 보상을 해 줄 것이며, 아무리 멀리서 취해 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직 비싼 대가를 치렀다고 할 수 없다.

  1. 그의 의도가 정직하였다.

그가 하고자 도모한 모든 것은 자기의 조물주께 의로움을 돌리는 것이었고, 하나님은 그의 모든 행사에 있어서 의로우시다는 이 진리를 주장하고 분명히 하는 일이었다. 하나님께 대하여 말하고 그를 대변하는 일에 있어서 그가 우리의 조물주이심을 기억하는 일은 좋은 것이며, 그를 그렇게 부르는 일은 유익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기꺼이 조물주라고 부르며, 그의 나라의 이익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봉사를 아끼지 아니하는 것은 선한 일이다. 그가 만약 우리의 조물주이시라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그로부터 온 것이고,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유를 들어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며, 우리는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1. 그의 경영하는 바는 아주 공정하고 공평하였다(4절).

"내 말이 거짓이 아닙니다. 내 말들은 대상 그 자체에 불일치하는 것도 아니며, 내 자신의 생각이나 이해에 어긋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변호하는 것은 진리이며, 더욱이 나는 진리를 위하여 가능한 모든 성실함과 명료함으로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는 간명하고도 확고부동한 논증을 구사하리라는 것이며, 소위 학자들이 하듯 미묘하고도 모호한 용법을 쓰지는 않으리란 것이다. "지식에 있어 온전하고 똑바른 자가 이제 당신과 따지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의 말을 공정하게 잘 들을 뿐만 아니라, 그가 말하는 바를 선의로 잘 해석하여 그 의미를 잘 파악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얻은 우리 지식의 온전함이란 곧 진리를 탐구하는 일이나, 그 진리를 우리에게 적용함에 있어서나,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을 타인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일에 성실하고 정직해야 할 것을 말한다.


엘리후의 연설(16)(욥기 36:5-14)

하나님을 대변하여 말하려고 하고 자기 조물주께 특별히 의로움을 돌리려 하는 엘리후가 이 문단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신의 섭리의 조처란 모두 신의 의지가 하고자 하는 영원한 계획에 의거하여 베푸시는 것이며, 영원하신 공평의 법칙에 따라 행해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치리자로 행동하시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Ⅰ. 하나님은 그의 수하인들 중 가장 비천한 자에게 주목하는 일을 가치없다고 생각지도 않으시며, 곤궁한 자나 미미한 자들이라 하여 자기 은총에서 멀리 떼어놓지 않으신다. 만일 강력한 힘이 있는 인간이라면 저명하거나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자에게는 거만하게도 경멸의 눈길을 주기 쉬우나, "하나님은 전능하시나," 무한한 능력이 있으시면서도, "아무도 멸시치 아니하신다"(5절).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낮추사 가장 비천한 자의 일까지도 심리하시고, 그들에게 공평을 베푸시며 인자하심을 나타내 보이신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즉각 모습을 나타내시지 않으신다고 하여, 자기 자신과 자기의 일이 등한히 여김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엘리후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시치 않으십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점은 우리가 왜 누구든지 존경해야 하는가 하는데 대한 이유가 된다. "그는 힘과 지혜에 있어 능력이 크시나" 정직히 꾀하는 자들이면, 힘과 지혜가 보잘 것 없는 자들이라 하여도 무시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이 이런 이유 때문에 아무라도 멸시하지는 않으시는데, 그것은 그의 지혜와 힘이 버금할 것이 없도록 무한하심으로서이다. 그러므로 그가 자기 은혜를 겸손히 베푸신다고 해서 그에게 감소되는 것은 없다. 현명하고도 선량한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에게도 냉소와 경멸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Ⅱ. 하나님은 아무리 위대한 자들이라도 악한 사람들이면 편들지 않으신다(6절).

"그는 악인을 살려 두지 않으신다."

악인들의 생명이 연장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특별히 베푼 보살핌 아래서 그런 것 아니라, 단지 섭리의 일반적 보호하에서 그런 것일 따름이다.

욥은 "악인이 살고, 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다"고 말했다(욥 21:7). 그러나 엘리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만에, 하나님이 악인들을 장수하도록 허용하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의 생명을 그들이 기대한 만치는 오래도록 보존하지도 않으시며, 참으로 우리의 생명이라고 할 만한 그 위로와 만족으로써 저들을 살게 하지도 않으십니다. 더욱이 그들을 보존해 두시는 것은 진로하심의 날을 위한 예비에 불과합니다"(롬 2:5).

Ⅲ. 하나님은 조금이라도 피해입은 자들에게 언제든지 기꺼이 신원해 주실 준비가 돼있으시며, 그들의 이익을 위해 즉시 옹호해 주신다(6절).

"그는 고난받는 자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그들의 박해자들에 대한 그들의 불평을 복수해 주시사, 그들의 박해자가 강탈해 간 모든 것을 되려 보상해 주도록 강제권을 발동하신다. 사람들이 피해 입은 불쌍한 자들을 정당하게 회복시켜 주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이 신원해 주실 것이다.

Ⅳ. 하나님은 자기의 선량한 백성들을 보호하는 데 특별하신 배려를 해 주신다(7절). 그는 그들을 내려다 보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도 않으신다.

"그는 그 눈을 의인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신다."

그들이 때로 소홀히 취급당하는 것 같고, 망각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하나님의 계획이나 뜻이 간과해 버리는 것 같으나, 그들의 하늘 아버지의 자상하신 시선은 결코 그들을 떠나지 않고 계신다.

만약 우리의 눈이 의무 가운데서 늘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한, 하나님의 시선도 자비하심 가운데에서 우리 위에 머물러 계신다. 우리가 가장 낮은 데 처하여 있을 때에라도 그의 눈은 우리를 빠뜨리지 않고 바라 보신다.

  1. 때때로 하나님은 선량한 백성을 신뢰와 명예로운 자리에 앉게 하신다(7절).

그들은 "왕과 함께 위에 앉히신다." 그래서 모든 단들이 의인의 단에게 절하게 된다(창 37:7). 의로운 사람이 존귀와 권세의 자리에 올라가게 되면 그것은 그들 의인들에게 대한 자비에서 그렇게 된다. 왜냐하면 의로운 인사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의인들로 하여금 고관으로 등용되는 데 뒤따르는 유혹에 이기게끔 무장을 시켜 주시는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주어진 선행의 기회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그들이 다스리게 된 자들에게도 자비심이 된다. "의로운 자가 통치를 맡으면 온 성읍이 즐거워한다." 의로운 자가 출세하면 확고부동하게 선다. 존귀한 중에서 선한 양심을 지키는 자들은 그 선 자리가 확실한 기초 위에 있기 때문에, 높은 자리나 고관대작이 타인에게는 미끌어지기 쉬운 자리라 하지만 의인들에게는 높은 처소가 그다지 미끄러운 땅이 아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권세있는 대인으로 되는 것을 보기는 드물기 때문에, 이 구절은 의인들이 존귀한 자리에 오르게 되는 때 곧 그들의 구속자께서 후일에 땅에 서실 때 받을 존귀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는 그 때라야만 그들이 영원히 높임을 받으며, 무궁토록 확고한 자리에 앉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에는 태양처럼 그들이 빛을 발하며, 우리 하나님께 왕과 제사장으로 세움을 입을 것이다.

  1. 하나님이 그들을 언제든지 고통 속으로 밀어 넣으시더라도 그것은 그것의 영혼을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다(8-10절). 일부의 선량한 사람들은 존귀와 권세의 자리에 등용되지만 또 다른 선인들은 고통을 받는다.

(1) 고통의 예상(8절). "혹시 그들이 누설에 매이거나."

요셉같이 감옥에 갇히거나, 다른 어떤 "환난의 줄에 얽히거나," 고통의 질병에 유폐되며 빈궁의 족쇄에 속박 받는다면, 또 저들 자신의 의견 가운데 갇힌다면 그들의 모든 투쟁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런 환난 속에 오래도록 붙잡혀 있게 된다. 욥의 경우가 바로 이러하였다. 그는(어떤 사람이 읽듯이) "번뇌의 줄"에 붙잡혀서 옴짝달싹하지 못하였다.

(2)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같은 궁지로 몰아 넣으실 때 가지시는 계획을 살펴보자. 이것은 그들의 영혼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이점을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고난과 화해하게 되고 그 고난을 좋게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실 때 의도하시는 세 가지 일들은 다음과 같다.

[1] 지나간 죄과를 우리로 하여금 발견케 해 주며, 우리가 새삼스레 기억해 내도록 해 준다는 점이다. 그런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들이 전에는 보지 못했던 그들 자신 속의 잘못을 나타내 보이신다. 그는 죄악의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는 그들의 소행을 보여 주신다." 죄악은 우리 자신의 소행이다. 만일 우리 속에 어떤 선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행위이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죄악으로 말미암아 빚어낸 행위가 어떤 것인지 살펴 보는 데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죄악의 과오를 드러내셔서 그것들이 하나님의 법을 범한 것임을 그들에게 보이시고, 그것으로써 죄악의 죄스러움 즉 "그들이 도를 지나쳤으며," 측량할 수 없이 죄 많음을 가르쳐 주신다. 진정으로 참회하는 자들은 자기 스스로에게 부담을 지우고, 자기의 죄를 가볍게 보지 않으며, 자신의 죄를 더 악하게 보고 자기가 죄 중에서 지나치게 행했음을 고백한다. 고난은 때때로 죄에 대한 해답이다. 고난은 양심을 일깨우는데 소용이 되고, 사람들로 심사숙고하게 만든다.

[2] 우리의 심령이 현재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도록 마음이 내키게 하신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신다"(10절). 하나님은 자기가 단련시키는 자를 "교훈 하시며"(시 94:12), 고통은 사람들이 즐겨 배우게 만들며, 마치 밀랍을 녹이는 것같이 사람의 심령을 부드럽게 만든다. 이는 도장이 쉽사리 찍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일은 저절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고통과 함께, 고통으로 인하여 역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귀를 열어 듣게 하며, 심장을 열게 하는 분은 그이시니, 그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3] 미래를 위하여 우리가 불법을 행치 못하게 제지하며, 우리를 불의로부터 떼어 놓으신다. 환난이 보탬을 받는 것은 이런 심부름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불의로부터 돌아 오라"는 명령이며, 죄악과는 더 이상 관계를 맺지 말라는 명령이고, 불법을 싫어하여 그것으로부터 돌이키라는 명령인 동시에 다시는 이 이상 더 죄악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죄악으로부터 돌이키라는 명령이다(호 14:8).

  1. 만일 환난이 자기 할 활약을 다하고, 특파된 소임을 성취할 때에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리신 고통의 시간에 따라서 그들에게 다시금 위로를 내리실 것이다(11절).

"그들이 청종하고 그를 섬긴다면"-즉 그들이 하나님의 계획에 응하여 그의 이런 처사에 있어서 그의 취지를 받는다면, 또 고통이 물러가고도 그들이 환난의 아픔 중에 있을 때와 다름없는 심정으로 계속 행하며 곤고할 때에 행한 맹세를 수행해 나간다면, 또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들 특히 하나님의 예배와 경배에 관련된 명령들에 순종하여 살아가고, 모든 사례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양심껏 지킨다고 할 것 같으면 그들은 다시금 "형통히 날을 보내며," 그리고 "즐거이 해를 지내게 될 것이다." 경건은 번영과 열락에 이르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길이다. 이것은 확실한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으려하는 이들은 적다.

(1)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긴다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유익을 위하는 것인 한, 외부적인 번영의 약속과 현재 이생의 소망 및 그 위로가 우리에게 있다. 누가 그 이상 더 이 세상에서 복락 누리기를 소원할 것인가?

(2)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신실하다면, 우리에게는 내적 쾌락의 소유와 하나님과 교제하는 중에 얻는 위로와 선한 양심, 또 그 위에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자들이 가지는 큰 평강이 있다. 만일 우리가 주 여호와 안에서, 영생의 소망 중에서 항상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 잘못이다. 우리는 무슨 더 좋은 즐거움 속에서 우리의 해를 지낼 수가 있단 말인가?

  1. 만일 환난이 그 소임을 다하지 않을 때에는 용광로가 일곱 배나 더 뜨거워져서, 마침내 그들이 다 타서 재가 되리라는 것을 그들은 예상해야 한다(12절). "만일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면," 만약 그들이 그들의 환란에 의해서도 개선되지 않고 교정되지 않으며 개혁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칼에 멸망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채찍에 치료되지 않는 자는 그가 칼로 죽이실 것이다. 그리고 청순하게 연마하는 불길이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면 소각시켜 버리는 불이 뜻을 이루리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때에는 그가 압도해 버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그는 멸망하도록 결정되었다"(대하 28:22; 렘 6:29, 30). 하나님이 환란을 통해 그들을 교훈하고자 하시건만 그들이 훈계를 받으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에게 내리시는 암시를 받아 들이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식없이 죽을 것이다." 그들이 알기 전에 그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이전의 경고를 새삼스레 깨닫기도 전에 죽을 것이다. 혹은 그들은 축복으로 받았던 지식의 수단에도 불구하고 "지식이 없으므로 죽을 것이다." 지식이 없이 죽는 자들은 은혜를 얻지 못하고 죽는 것이어서 영원히 망하게 된다.

Ⅴ. 하나님은 사곡한 위선자들 즉 자기 왕국의 은밀한 원수들에게(엘리후가 묘사한 대로:12절) 파멸을 내리신다. 그들은 비록 엘리후가 먼저 이야기한 의인들 중 하나로 계산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며, 불순종과 흑암의 자녀가 되어 진노와 멸망의 자식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들은 "그 마음이 사곡한 자"들이어서 "분노를 쌓아 올리는 자"들이다(13절). 위선의 본질을 알아보자. 위선은 마음 가운데에 놓여 있다. 이 마음은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과 종교를 위하는 것같이 보이더라도 세상과 육체를 향하는 마음이다. 겉치레나 말로서는 성자이면서 마음 속에는 외식이 가득한 자들이 많다. 그 원천이 썩어있는 이상 그곳에는 악한 보물만 있다. 위선의 해로움을 살펴보라. 사곡한 자들은 "분노를 쌓아 올린다." 그들은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그런 짓을 매일매일 행하고 있으나, 그 모든 것은 저 큰 날에 모두 합쳐서 셈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진노의 날에 임할 진노를 쌓는도다"(롬 2:5).

그들의 죄악은 "하나님께 쌓이고 그 창고에 봉해져 있다"(신 32:34, 약 5:3). 수증기가 위로 증발하여 소나기가 되어 내리듯 죄악도 회개하지 않으면 올라가서 진노가 되어 내려 온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자기들이 재산을 쌓으며 부귀공명을 축적하는 것 같으나, 정작 창고를 열어 보는 날에는 그들이 진노하심을 쌓아 놓았다는 사실이 판명될 것이다.

  1. 진노를 쌓아 올리는 것은 그들이 무엇을 했기 때문인가? 그처럼 노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속박하는 때에도 그들은 부르짖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환난 중에 있을 때, 고통의 줄로 속박을 당하는 때 그들의 마음은 강퍅하며 고집이 세며 겸손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않으려 하며 그에게 의뢰하지 않는 까닭에 그렇다. 그들은 목석같이 미련하고 지각이 없어서 여호와의 시련을 경멸한다.

  1. 그 진노하심의 결과는 어떤가?

"그들은 젊어서 죽으며 그 생명이 남창과 함께 있다"(14절). 이것은 외식하는 자의 분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위선자들에 대해 많은 화가 있으리라고 선언하셨다. 만약 그들이 계속 회개치 않으면 다음과 같은 죽음을 당할 것이다.

(1) 그들은 급작스런 죽음을 당하여, "젊어서 죽는다."

청년기에 있어서 죽음은 급작스런 기습이다. 사특한 자의 죽음(다시 말해서 그 결과)은 항상 그렇다. 젊어서 죽는 자들은 살고 싶어할 때에 죽듯이, 위선자들도 죽어서 천국에 가고 싶어하지만 지옥에 가게 된다. "사악한 자가 죽으면 그의 기대는 사라져 버린다."

(2) 그들은 두 번째 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들의 생명은" 사후에(그것은 여기에서 그런 것으로 나타나지만) "불결한 자들 중에 있으며"(어떤 사람이 읽듯이), 사통하는 자들과 함께 망하고, 그들의 그럴듯해 보이는 직업에도 불구하고, 죄인들 중 가장 악한 자들과 가장 흉칙한 자들 중에 있다. 그들의 생명은 남색하는 자들과 함께 망한다(끝부분은 그렇다). 그들은 불결하고 비열한 자들이어서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다"(유 7). 악인의 영혼도 사후에 살기는 살되, 그들은 불결한 자들, 곧 불결한 영들 중에서 악마와 그 추종자들 중에서 거하며, 새 예루살렘으로부터 영원히 격리된다. "어떤 더러운 것도 이 새 예루살렘 안에는 들어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후의 연설(17)(욥기 36:15-23)

이 문단에서 엘리후는 욥에게 더욱 가까이 접근한다.

Ⅰ. 만약 욥이 자기 환난 중에 아주 겸손하였더라면, 하나님께서 이 일에 앞서 그에게 어떻게 해 주셨으리라는 것을 엘리후는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곤고한 자를 그 고통 가운데서 즉시 구원하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신 분임을 모두들 알고 있습니다(15절). 그는 항상 그러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곧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을 가진 자를 하나님께서는 친절하게 대하시고, 그들이 곤고한 중에 있을 때에는 기꺼이 도우십니다. 그는 그들의 귀를 열어 주시고, 그들이 비록 학대를 받고 있더라도 희열과 즐거움을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그가 지금까지는 아직 그들을 구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들에게 좋은 말과 위로의 말을 해 주심은 그들의 믿음과 인내를 담대케 하고 그들의 공포감을 침묵시키며 그들의 비통함을 상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의 섭리에 복종하면서 스스로 잘 처신하였던들 하나님은 당신에게도 그와 같이 행하셨을 것입니다(16절). 그가 당신에게 구원을 베푸사 당신을 위로하셨을 것이고, 우리는 이런 불평을 조금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였더라면 당신의 자유와 풍부가 당신에게 회복도어 유리하였을 것입니다."

  1. "당신은 더 크게 되었을 것이고, 당신의 질병과 치욕에 이처럼 갇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당신을 좁지 않고 넓은 곳으로 옮겼을 것이며, 당신을 벌써 이처럼 꼼짝 못하는 속박에서 벗어나 당신의 모든 헤아림과 수단을 털어버렸을 것입니다."
  2. "당신은 부하게 되어서 이처럼 궁핍한 처지에 놓여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상이 그득하도록 펼쳤을 것이며, 음식으로 편리하게 펴놓을 뿐만 아니라, 가장 고운 밀가루와(신 32:14  참조) 고기 중 가장 살찐 것으로 진설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환난 중에 만약 우리가 더 착하다면 만사가 우리에게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게 될 때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잠잠해 질 수밖에 없다. 만일 우리가 고난의 결과에서 해답을 얻을 때에는 그 고통이 물러갈 것이고, 우리가 즉각 받아들일 준비를 갖출 때는 구원도 올 것이다. 만일 우리 스스로가 잘 처신하였더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잘 해 주셨을 것이다(시 81:13, 14; 사 48:18).

Ⅱ. 엘리후는 욥이 스스로를 함정에 빠뜨렸다고 책망하며, 욥이 욥 자신의 고통의 화근이요 원인이라고 주장한다(17절).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네게 가득하였다." 즉 "당신의 진면목은 무엇이든 간에 당신은 이 일에 있어서 악인과 같이 행동하였으니 악인과 같이 말하며 행동하였고, 악인들을 만족시키며 그들의 명분에 영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심판과 공의가 당신을 악인으로 취급합니다. 이것은 당신이 그들 악인들과 동행하며, 마치 당신이 그들과 이해를 같이하는 양 행동하여 그들을 방조하고 교사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악인의 변호를 위해 주장하였습니다. 사람의 주장이 그러하면 하나님의 심판도 그에게 그렇게 임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패트릭 감독은 해석한다. 잘못된 편에 선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대역죄의 종범도 주범으로 취급된다.

Ⅲ. 엘리후는 욥이 자기의 완고한 고집을 하지 말도록 욥에게 주의를 주고 있다. 이런 취지로 그는 몇 가지 유익한 경고를 하고 있다.

  1. 욥이 하나님의 복수를 가볍게 여기거나, 그 자신이 마치 그런 위험을 당하지 않을 것처럼 안전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18절).

"분격함을 인하여(즉 하나님은 의로운 통치자시기 때문에 자기의 통치에 대해 던지는 모든 모욕을 원통하게 여기시고 분개하십니다. 그는 인간이 모든 불경건과 불의를 다스리려고 하늘에서부터 자기의 분노를 나타내 보이셨기 때문에, 또 당신이 하나님의 불쾌하심 아래 있는 것을 두려워할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당신은 하나님의 일격으로 그가 당신을 갑자기 데려 가시지나 않을까 근신하고, 당신은 지혜롭게 하나님과 급히 화해하여, 그의 진노하심을 당신에게서 돌이키도록 하십시오." 욥도 자기 친구들에게 이런 취지의 경고를 한 일이 있다(19:29).

"너희는 칼을 두려워할지니라. 이는 분노가 칼의 형벌을 부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다투는 자들은 너무나도 대담하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서로 연합해서 맹세하게 하고, 그의 진노하심을 들어 서로 위협하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착한 양심을 지닌 자들은 교만한 자들의 무기력한 위협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엘리후의 말은 욥에게 대한 우호적인 경고였고 필요한 주의이기도 하였다. 선한 사람조차도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면서 자기 의무를 굳게 지킬 필요가 있다. "당신은 지혜롭고 선량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가 당신을 데려 가시지 않으시도록 근신하시라. 왜냐하면 가장 지혜로운 최선의 인간도 그 자신 속에 하나님의 치심을 받을 만한 것을 충분히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노하심이 자기를 향하여 불타오를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치심을 피해 나갈 길이 있다고 욥이 즐겨 바라지도 말라는 것이다.

(1) 돈으로 피해 나갈 수도 없으며, 은이나 금 따위의 그런 썩어질 것으로 사하심을 살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정죄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큰 대속물이라도 당신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공의는 뇌물을 주어 삶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어떤 사자들도 뇌물로 유혹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재산을 보고 중히 여기시며, 당신의 부요함으로 인하여 형벌을 감해 주실 것입니까? 천만에, 황금으로도 그렇게는 하지 못합니다(19절). 당신이 여태껏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당신을 편안하게 해 주지도 못할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징계로부터 당신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지도 못할 것이니, 그 진노의 날에는 재물도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잠 10:4;  49:7, 8  참조).

(2) 구조에 의하여 도피할 수도 없다. "모든 강한 군대를 휘하에 거느리고 아무리 많은 신복들을 소집하여 하나님의 복수의 손길로부터 당신을 빼앗아 내도록 하기 위해 당신 앞에 나타나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헛된 일이니 하나님은 끄덕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의 손에서 구해낼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3) 도망침으로써 피할 수도 없다(20절). "밤을 사모하지 마시라. 밤은 흔히 패배한 군대의 퇴각에는 유리하여 도주를 엄폐시켜 주지만, 당신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피할 수 있을 줄로 생각지 마시오. 왜냐하면 흑암도 그에게서 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시 139:11, 12; 욥 34:22  참조). "밤에는 사람들이 자기의 처소로 물러나서 자기 침상 위에 올라가기 때문에 하나님도 자기 처소로 올라가셔서 당신을 보지 못하시는고로 들키지 않고서 도망치기에 수월한 줄로 생각 마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졸지도 않으시고 자지도 아니하십니다. 그의 눈은 인간의 자손들을 감찰하십니다. 어느 장소를 물론하고 어느 때든지 항상 그의 눈은 인간을 향해 뜨고 계십니다. 반석이나 산도 우리를 그의 시선으로부터 피하게 하는 피난처가 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구절을 사망의 밤에 대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밤은 사람들이 "자기 곳에서 제함을 받는" 밤을 의미하며, 욥도 삯군이 저녁을 바라듯 그 밤을 진심으로 갈구하였다(욥 7:2).

그러나 엘리후는 "당신은 그 밤을 사모하지 마시라. 당신은 사망의 밤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죽음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피난처로 삼고자 희망하여, 죽음을 열심히 소원하는 자들은 아마 잘못 생각한 것일 게다. 진노는 그 밤 속으로까지 들어와 그들을 찾아낸다.

  1. 욥이 하나님과 그의 섭리에 대한 부당한 언쟁을 중단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고난에 승복해야 하는 때인데도 여태껏 언쟁을 고집해 왔었다(21절). "주의하시라. 네 자신의 심령을 잘 살피고 불의를 돌아보지 말며, 그것에게 돌아가지 마시라(혹자가 읽듯이). 만일 당신이 그렇게 행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생명을 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죄에 대한 후한 생각을 감히 품지 말고 죄에 탐닉하지 말며 빠지지 말자.

엘리후는 욥이 이런 훈계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그가 "고난보다 오히려 불의를 택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 승복함으로써 고난의 굴욕을 겸손히 참거나 징벌을 감수하기보다는 하나님과 다투는 일에서 자신의 긍지와 기분을 만끽하려는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서 생각해보면 고난보다 불의를 택하는 자들은 아주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죄 많은 쾌락으로 그들의 근심 걱정을 달래며, 불의한 추구에 의해서 재물을 늘이고 죄 많은 계획으로 그들의 고통을 도피시키며, 그들의 양심을 거스려 가면서까지 죄스러운 영합으로써 의를 위한 수고로움을 회피하는 이들은 후회하고야 말 선택을 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최대의 고난 속에서 보다는 최소의 죄악 중에서 더욱 많은 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악이며 오직 악일 뿐이다.

  1. 욥은 감히 하나님께 지시하지 말며 그에게 자기의 수단을 가르치지도 말라는 것이다(22, 23절).

"하나님은 그 권능으로 큰 일을 행하신다." 즉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자를 세우실 수도 또 끌어내릴 수도 있으며, 또 그렇게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나도 그와 다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찬미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겸손히 낮추고 더 비천하게 만드는 셈이다.

(1) 하나님은 절대적 주권자이시다.

"그는 그 권능으로 큰 일을 행하신다." 다른 이에게서 연유된 힘으로 큰 일을 행하시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기뻐하는 이들을 높이시며 자기가 백성에게 부여한 힘과 권세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고 내쫓김을 받은 자들을 높이신다. 그러므로 "누가 그에게 그의 길을 정하여 주었단" 말인가? 누가 하나님의 길에서 그 위에 주재한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자신의 임무를 부여받고 또 책임을 져야하는 더 우세한 자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 자신은 지고의 존재로 독립하는 분이시다. 누가 그로 하여금 자기 길을 생각나도록 한다는 말인가?(어떤 이는 그렇게 해석한다) 영원무궁한 마음이 기억하게 해 주는 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의 길과 하나님의 길도 항상 그의 앞에 있다. 그는 아무에게서도 명령이나 교훈을 받지 아니하셨으며(사 40:13, 14), 그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으신다. 그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그들의 길을 정해 주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그 길을 지정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이 세상의 통치는 그에게 맡겨야 한다. 그는 그 일에 적합하시다.

(2) 그는 비교할 수 없는 선생이시다.

"누가 그같이 교훈을 베풀겠는가?" 그 스스로가 빛과 진리와 지식과 교훈의 근원이신 분을 우리가 가르치려고 한다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런 일인가! "사람에게 지식으로 교훈 하시는 자가," 그것도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는 분이 "알지 못하시겠는가?"(시 94:9, 10) 우리가 촛불을 가지고 태양을 밝힐 수 있는가?

엘리후가 지배자로서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 그는 하나님을 선생으로 찬양하였다. 왜냐하면 통치자는 교훈을 베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시다. 그는 같은 인간의 줄로서 동이신다. 다른 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일에 있어서도 그를 따를 자가 없다. 하나님에게 하나님 자신의 행동을 지시하는 일에 있어서 당신 자신만치 적격인 분은 아무도 없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고 계시며, 가장 잘 행하는 방법을 알고 계셔서 어떤 정보나 어떤 충고도 필요치 않으시다. 솔로몬왕 조차도 자신을 충고하는 추밀 고문관을 두었으나 왕 중 왕이신 하나님은 아무도 두지 않으신다. 또 하나님만치 우리의 행동을 지시해 주시기에 적격인 분은 없다. 하나님이 하시는 만치 그렇게 권위로써 훈육하며 확신에 넘치는 증거를 가지고서, 겸손과 긍휼로써 가르치시는 분은 아무도 없고, 그만치 권세와 효과로써 훈계하시는 이도 없다. 그는 성서로써 가르침을 베푸시는데 성서는 최상의 책이다. 그는 또 자기 아들로써 훈계하시는데 그는 가장 선한 선생님이시다.

(3) 그는 그의 모든 처사에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공정하시다.

누가 "당신께서는 불의를 행하셨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그렇게 말할 자는 없다. 감히 그렇게 말하는 자가 누구이랴?(불의를 행하는 자가 많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 일을 말하는 자들은 자기의 생명을 걸고서 그렇게 고하는 법이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말할 수 있는가? 누가 그런 말을 낼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가? 그 일을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을 증명할 자가 누구인가? "왕 중의 왕이 그릇되게 행할 수 없다"는 말은 무제한하게, 의심할 나위 없는 참된 격언이다.


엘리후의 연설(18)(욥기 36:24-33)

엘리후는 여기에서 욥에게 하나님이 크고 높으신 분이라는 생각을 주입시키려고 힘쓰며 또 욥을 설득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흔쾌히 수락하도록 만들려고 노력한다.

Ⅰ. 그는 하나님의 사업을 개괄적으로 혁혁하고 현저한 것으로써 묘사하고 있다(24절).

하나님의 전체 사업이 그러하다. 하나님은 시원찮은 일은 하나도 행하지 않으신다. 이점은 우리가 어째서 우리 주변에 세부적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섭리에 대하여 잠자코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된다. 하나님의 가시적인 업적들 즉 자연계의 삼라만상과 대체로 세상과 관계된 모든 것들은 우리가 감탄하고 칭찬할 만하다. 그것들 가운데서 우리는 창조자의 지혜와 권능과 인자하심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관리와 우리의 일상사에 대한 신의의 계획을 비난할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행사를 생각해 보도록" 요청 받고 있다(전 7:13).

  1. 그것은 우리의 눈 앞에 명백하며,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바"이며 외눈만을 가진 자라도 그 일을 볼 수 있으며, 그것을 멀리서도 누구든지 볼 수 있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어느 길이든 바라보라. 우리는 하나님이 지혜와 권세가 지어내신 산물을 보게 된다. 우리는 그 일이 행해지고 또 행하는 것을 보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며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여호와께서 하시는 행동이시다. 모든 사람이 멀리 떨어져서도 하늘과 그 모든 광채를 바라보고 전능자의 작품임을 알 수 있고 땅과 그 모든 소산물을 보아서 전능자의 솜씨임을 알 수 있다. 하물며 우리가 바로 곁에서 가까이서 그들을 바라 볼 때에는 어떻겠는가? 자연의 가장 미세한 작품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아라. 그것들이 진기하게 나타나지 않는가? 창조주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의하여 "분명히 보여 이해가 된다"(롬 1:20). 어느 사람이든, 신적 계시의 은혜를 입지 못한 자들조차도 이 점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 자연의 항존적 전도자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는 언어도 없고 말도 없기" 때문이다(시 19:3).
  2. 그것이 우리 눈에 경이롭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작품의 우미하고 훌륭함은 그 모든 부분 부분의 조화된 짜임새와 아울러 우리가 잊지 않고 찬양하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 흠잡을 데 없을 정도로 그 작품을 정당하고 선하다고 인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혜롭고 영화스러운 것으로 높이 칭찬해야 하며,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렇게 안출해 내거나 생산해 낼 수 없다는 것을 시인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작품을 볼 수 있으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식별해 낼 능력이 있으므로(짐승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은 그들을 인하여 찬양과 영광을 하나님께 드려야 마땅하다.

Ⅱ. 그는 그것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무한하시고 탐색할 수 없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26절).

존재와 능력과 완전의 흐름은 우리를 그 원천으로 인도해 준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무한히 크시다. 능력에 있어서 위대하시다. 그는 전능하시고 독립하시기 때문이다. 부요에 있어서 크시다. 그는 자족하시며 모든 걸 자족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에 있어 크시며, 그의 모든 일에 있어서 크시다. 그는 위대하시기 때문에 크게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 그는 크시므로 "우리는 그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가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 수는 있어도 그가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의 참 모습이 아니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의 참 모습이다. 우리는 부분적으로는 알고 있으나 완전히는 알지 못한다. 이 점이 왜 우리가 하나님의 처사를 나무라서는 안 되는지, 또 왜 그가 하시는 행동을 비난해서는 안 되는지의 이유로서 여기에 나타나고 있다. 이는 그 일이 우리가 이해하고 있지 못한 일을 악평하는 일이기도 하며 우리가 듣기도 전에 대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 기간을 알고 있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 기간은 영겁이기 때문이다. "그의 년 수"는 절대로 "계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무궁하신 까닭이다. 그의 년 수는 없다. 그는 시작도 없고 계속도, 기간도 없는 "존재"이시며, 그는 이전에도 존재하셨고 앞으로도 늘 존재하실 것이며, 항상 동일하게 계셔서 위대하신 "나는 존재하고 있다"는 분이시다. 이것은 우리가 어째서 그에게 명령해서는 안 되는지, 왜 그와 다투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그러하듯이, 그의 운용도 전혀 우리의 손이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Ⅲ. 그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주권과 몇몇 본보기를 제시하고, 보통의 섭리가 베푸신 것들 중에 나타난 실례를 드는데, 이 장에서는 구름과 거기서부터 내리는 비로 시작한다.

우리는 이 품위 있는 이야기의 어법이나 철리를 검토함에 있어서 조금도 비판적일 필요가 없다. 그 일반적 범위는 하나님이 무한히 크신 분이라는 것과, 그가 만유의 주 여호와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제일 원인이시자, 지고한 지휘자시고, 그가 "천지간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심을 나타내는 데 있다(그러므로 우리는 모는 겸손한 존경심을 가지고 그를 경배해야 하며, 그를 좋게 말해야 하고, 그에게 존귀를 드려야 마땅하다). 더욱이 엘리후가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또한 우리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의 방법이나 법칙을 하나님께 지시한다거나, 천체에 대한 일반적 섭리의 운용이 그토록 다양하며 그토록 신비스럽고 불가사의하건만 그들에 대한 설명을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기대하는 일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인가 하는 것이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장엄하심과 지엄한 통치권을 들어 욥에게 감동감화를 주고자 그에게 구름을 쳐다보라고 지시한다(35:5). 이 구절에서 엘리후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우리가 구름 속에서 무엇을 관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 구름들을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만드신 창조주의 영화로우신 성취물을 고찰하기에 이른다. 구름을 곰곰이 생각해 보자.

  1. 구름은 하계에 대한 샘이며, 습기의 근원과 보고로서, 습기가 순환하기 위해 드나드는 큰 방축이다. 구름은 아주 필요한 공급품이다. 만약 그것이 침체하면 혈액의 침체가 인체에 해를 끼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하계에 큰 해를 끼친다. 이 보통의 일에서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찰해 봄직하다.

(1) 위에 있는 구름은 아래에 있는 땅 위에 물기를 떨어뜨려 내린다. 하늘이 놋이 되면 땅은 철이 된다. 그러므로 이처럼 풍부의 약속이 흘러 내린다. "나는 하늘의 소리를 들을 것이며, 그들은 땅의 소리를 들을 것이다." 이것은 모든 좋은 선물이 위로부터 즉 빛의 아버지이시며 비의 아버지이신 분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임을 우리에게 시사해 주고, 우리가 그 분께 기도 드리며 그를 쳐다보아야 할 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2) 그것들은 "사람 위에 쏟아져 내린다"고 여기서 묘사되어 있다(28절). 하나님은 "사람 없는 광야에 비가 내리도록 만드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38:26; 시 104:11) 여기서는 관심이 특별히 사람에게 주어지는데, 이것은 모든 하등동물이 죄다 인간에게 소용이 되도록 창조되어 있고, 실질적인 찬사는 인간에게서 되돌려 받으시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비"를 인간 중에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다같이 내리게 하신다"(마 5:45).

(3) 구름은 빗물을 "작은 방울"로 내리고 "하늘의 창들이 열린 때"와 같이(창 7:11), 물기둥으로 쏟아져 내리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한 때 자기가 폭우로써 물에 잠기게 했던 그 땅을 비로 적시되, 그 일을 다른 모습으로 처리하시는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얼마나 그의 마음대로 좌우될 수 있는 존재이며, 그가 얼마나 자비하신 분인가 하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곧 그가 인자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비가 내리시되 빗방울로 오게 하시는 일에서 나타난다. 그 혜택은 인공 분수에 의해 하는 것과 같이 더 멀리 더 골고루 뿌릴 수 있는데 있다.

(4) 빗방울이 때로는 아주 소량으로 내리고 또 다른 때는 폭우로 쏟아지지만, 이런 강우의 차이는 그렇게 내리도록 명령하는 하나님의 섭리에 귀착된다.

(5) 비록 비가 방울로 내린다고는 하지만, 사람 위에 "풍부하게" 쏟아진다(28절). 그러므로 그것은 "물이 가득한 하나님의 강"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시 65:9).

(6) 구름은 그들이 이끌어 올린 "증기에 따라 쏟아져 내린다"(27절). 그와 같이 하늘은 땅에게 공평하지만 땅은 그 만들어 내는 보답에 있어서 그렇지 못하다.

(7) 구름의 산물은 때때로 땅에게 큰 공포가 되나, 다른 때에는 큰 은혜가 된다(31절). 하나님이 원하실 때 "그는 구름을 이용하여" 자기가 노여워하시는 "백성을 심판하신다." 땅 위의 소산물을 뿌리 채 뽑고 홍수를 야기시키는 폭풍우나, 호우와 과다한 강우도 구름에서 생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보통 그는 구름으로부터 양식을 풍부히 주신다. 구름은 "양떼로 입힌 초장과, 곡식으로 덮힌 골짜기"에 기름을 떨어뜨린다(시 65:11-13).

(8) 비가 다가 올 것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 보자. 다른 일들 중에서 "그 소리는 비에 대해 표시해 준다." 우리는 "풍부한 비의 소리"에 대하여 읽었고(왕상 18:4), 또(끝부분에서와 같이) 비가 오기 전에 "그 울리는 시끄러운 빗소리"를 읽었는데, 그 때는 그 빗소리가 반가운 전조였다. 소리와 같이 하늘의 기상도 그것에 대해 나타내 준다(눅 12:56).

가축들도 또한 진지한 본능에 의해 가까이 다가오는 기상 변화를 알아 차리고 피할 곳을 찾아나서는데, 이를 생각하면 악을 미리 내어다 보지도 않으려 하고 또 스스로 숨지도 않는 인간은 수치를 느껴 마땅하다.

  1. 구름은 상계의 그림자이다(29절).

"누가 구름이 폐임을 깨달을 수 있는가?" 구름은 휘장과 덮개와 같이 지상에 펼쳐져 있다. 비록 우리가 매일 그같은 현상을 보면서도 구름이 어떻게 그렇게 되며, 어떻게 펼쳐지고 현 상태와 같이 어울릴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우리로서, "빛을 가리우는" 구름의 펼침이 어떻게 그리되는지 설명하지 못하면서도(32절), 성격과 경우가 그토록 다양한 인간의 자손들에 대하여 내린 하나님의 공평한 처리가 어떤 이유와 방법에서 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고 자처할 것인가?

(1) 구름은 "사이에" 끼이는 것이다(32; 26:9). 그리고 우리는 구름이 우리와 태양 사이에 끼이므로 인해서 때로는 혜택을 입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구름은 태양의 극열한 뜨거움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우산의 일을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태양의 폭염이 우리를 사정없이 내려 쬘 것이다. "추수기의 더위에 내리는 운무"는 아주 대단히 상쾌한 것으로 묘사된다(사 18:4).

(2) 때로는 우리가 구름으로 인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일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구름은 정오에도 땅을 어둡게 만들며, 태양광선을 가린다. 죄악은 구름에 비유되기도 하는데(사 44:22), 그것은 죄가 우리와 하나님의 은혜 사이에 끼어서 하나님 얼굴에서 비취는 빛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름이 태양을 일시적으로는 어둡게 하고 폭우를 쏟아 내리지만(Post nubila Phoebus-즉 비온 뒤에 태양이 빛난다), 그가 구름을 지치게 한 뒤에 "그는 그의 빛을 그 위에 펼치신다"(30절).

"비온 뒤에는 밝은 비췸이 있다"(삼하 23:4). 양광은 앞으로 발사 되어서 "바다의 맨 밑바닥까지도 덮을" 지경에 이르르고, 거기서 수증기의 새로운 공급을 토하여 내어, 구름에 대한 보충을 하게 해 준다(30절). 우리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잊지 않고 찬양해야 한다.


37장

●엘리후의 연설(19)(욥기 37:1-5)

천둥과 번개는 보통 함께 일어 나는데 하나는 귀에, 또 하나는 눈에 감각을 준다. 그것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존엄, 권능과 두려움에 대한 지각할 수 있는 증좌이다. 하나님은 이들을 이용하여 자기의 크심을 증거하지 아니한 채 스스로 방임하시지는 않으시는데, 이것은 그가 하늘로부터 내리는 비와 열매를 많이 내는 계절을 통하여 자기의 인자하심을 가장 우둔하고도 지각없는 자들에게까지 증거하지 않은 채 자신을 방임하지는 않으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비록 거기에는 과학자들이 그 까닭을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자연의 원인과 그 결과가 있다고는 하나, 주로 창조주께서 잠자고 있는 인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며 각성시켜서 그들 인간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려는 창조주의 의도가 있는 것같이 보여진다.

눈과 귀는 두 개의 배우는 감각기관이다. 그러므로 비록 그런 경우가 있음직 하기는 하나 실제로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에다가 귀머거리인 사람은 잘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신의 교훈은 귀를 통해 마음으로 전달되며, 눈을 통해서는 그의 작품인 자연에 의거하여 하나님의 교훈이 전달된다. 그러나 저 일상적인 장면이나 음향은 인간에게 적절한 감화를 주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번개불로써 그 인간들의 눈을 놀라게 하기 좋아하시며, 천둥으로써 인간의 귀를 놀라게 하시기를 즐거워하신다. 엘리후가 말하던 그 때에 천둥이 치고 번개가 빛났다고 하는 추측은 매우 그럴 듯하다. 왜냐하면 그가 그 현상을 현재로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께서 바야흐로 곧 말씀하려던 때였으므로(38:1), 그후 시내산 위에서도 그랬듯이 이들 천둥과 번개는 주의와 경외심을 끌기에 적당한 서언이었던 까닭이다.

  1. 천둥과 번개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의 영광에 엘리후가 얼마나 영향을 받았으며, 그가 그것들을 가지고 욥을 감동 감화시키기를 얼마나 열망하였는가를 살펴 보자(1, 2절). "나로서는 내 마음이 그로 인하여 떨립니다. 내가 비록 자주 천둥소리를 듣고 번개를 흔히 보아왔을 망정 아직도 여전히 그것들은 내게 두려우며, 나의 온 마디가 떨도록 만들어서, 내 마음은 마치 자기 처소에서 떠날 듯이 고동을 칩니다"고 엘리후는 말한다. 천둥과 번개는 악인들에게 두려운 바가 되었다. 칼리굴라(Caligula) 황제는 천둥과 번개를 무서워하여 한 구석에 달려가 숨거나 침상 아래로 뛰어들기도 하였다. 우리는 아주 심하게 놀라는 자들을 "우레에 놀란 자"라고 말한다. 심지어 선량한 사람들조차 뇌성벽력은 무섭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그들을 더욱 무섭게 만드는 것은 낙뢰에 의한 상해이며, 많은 자들이 벼락으로 죽어갔던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도 벼락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죄 많은 세상에게 대하여 무엇을 하실 수가 있었으며, 마지막 날에는 예비해 두신 불에 의해 그가 어떻게 "행하시리란" 것을 알려 주는 본보기이다. 우리의 심령도 엘리후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여 뇌성 벽력에 떨어야 한다(시 119:120). "하나님의 음성 곧 다 소리를 주의 깊게 들으라." 아마도 아직까지는 뇌성이 멀리서 울려서 잘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혹은 벽력 자체는 들릴 터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포착하여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던 일이 무엇이든 간에 그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아주 주의 깊게 마음을 열중하여 들을 필요는 있다 .뇌성은 "여호와의 소리"로 일컬어지는 데(시 29:3), 이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가지고 인간의 자손에게 말씀하사,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세상을 처음으로 지으신 그 전능하신 말씀을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까닭이다. 그 말씀은 벽력이라고 일컬어진다. "당신의 뇌우 소리에 그들은 빨리 갔도다." 곧 하수들이 하나님께서 "한 곳으로 모이라"고 말씀하시자 서둘러 갔다(시 104:7). 하나님의 크심에 스스로 감화받은 자들은 다른 사람도 감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1. 그가 그들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살펴 보자.

(1) 저희의 원래 모습.

제 이차적인 근거가 아니라 제 일차적인 근거를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뇌우를 지도하시며, 번개도 그의 것이다(3절). 그들의 생성과 운동은 우연히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향에서 생기며, 우리에게는 우발적이고 제어하지 못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지시하고 지배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다.

(2) 저희의 활동 영역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뇌성이 울리면 "온 하늘 아래" 펼쳐져서 원근에서 들린다. 그와 같이 번개도 또한 "땅 끝까지" 발사되어 나간다. 그들은 하늘 아래 한편에서 나와 가지고 저쪽 다른 편까지 비췬다(눅 17:24). 동일한 번개와 천둥이 비록 모든 장소를 포괄하여 미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일순간에 아주 먼 곳까지 이르고, 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이들 경보가 이제나 저제나 찾아 가지 않을 장소는 없다.

(3) 저희의 순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번개가 먼저 그 길을 가고, "그 후에 음성을 발한다"(4절). 물기 있는 구름 속에서 만들어진 불빛과 음성은 실제로는 동시적이다. 그러나 빛의 운동은 소리의 속도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에 우리는 천둥소리를 듣기 전에 번개를 보게 된다. 이는 마치 우리가 대포 소리를 듣기 전에 멀리서 쏘는 대포의 불빛을 보는 것과 같다. 천둥은 여기서 "하나님의 위엄의 소리"라고 칭하는데, 이것은 그가 뇌성 벽력에 의하여 자기의 초월적인 권능과 위대하심을 선포하시기 때문이다.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시 68:33).

(4) 그 맹열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번개 빛을 금치 아니하신다." 곧 그는 그것들을 막거나 억제할 필요가 없으시다. 이는 그것들이 겉잡을 수 없게 되어 버려서 규제하지 못할 정도로 그의 능력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들로 하여금 제 진로를 취해 가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즉 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가라" 하면 그들은 가고, "오라" 하면 그들은 온다. "이것을 하라"고 명하시면 그들은 그것을 행한다. "그는 보통 천둥 후에 따라 오는 비와 소나기를 멈추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이것에 대해서는 36:27, 29 에서 언급하였다). "그는 그의 음성이 들릴 때"에 땅 위에 소나기를 쏟으실 것이다. 뇌우는 쓸어 가는 비이며 그는 그들을 위해 "번개를 만드신다"(시 135:7).

(5) 그는 이 모든 일로부터 추리를 한다(5절).

하나님은 자기 목소리로 이처럼 기이하게 벽력을 울리시느냐?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다른 일들도 위대하시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크시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한 가지 사례를 보고서도 우리는 모든 것을 입증할 수 있다. 곧 그가 펴시는 섭리에는 우리의 반대나 대항이 도무지 문제가 안 될 만치 너무나 강성하시고 너무 크신 데가 있으며, 우리가 나무라거나 언쟁하기에는 너무나 높고 깊은 데가 있다는 것이다.


엘리후의 연설(20)(욥기 37:6-13)

비가 오든 오지 않든, 덥든지 춥든지 간에 기상의 변화와 극단적인 천기는 우리의 많은 일상 화제나 관찰의 대상이 된다. 그렇지만 이런 일들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하면서도 엘리후와 같이 천기의 감독자이신 하나님, 곧 일기를 통하여 자기의 권능을 보여 주시고 자기 섭리의 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경외의 념을 품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우리는 천둥이나 번개 뿐만 아니라, 더욱 통상적으로 바뀌는 천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깨달아야 한다. 이 이상 날씨는 그다지 무섭지도 아니하며, 그렇게 큰 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Ⅰ. 눈과 비 가운데서 깨달아야 한다(6절).

천둥과 번개는 보통 여름에 생기지만, 그는 여기서 겨울철 날씨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그는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고 하신다." 그는 눈이 어디에 내릴 것이며, 거기에 얼마나 오랫동안 쌓여 있을지를 위임하고 명령하며 지정하신다.

그가 말씀하신 즉 그것은 그대로 시행된다. "빛이 있으라"고 하신 세계의 창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일반 섭리가 하시는 일에 있어서도 "눈을 명하여 땅 위에 내리라"고 하신다. 말과 행동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비록 각기 다른 별개의 두 사항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명령과 시행이 다른 두 가지 일이 아니다. 그가 말씀을 하시면 그가 원하는 대로 "작은 비"는 내리고 "큰 비"는 쏟아진다.

70인역 성서(LXX)는 "겨울 비"라고 번역하는데, 이것은 그들 지방에서는 겨울이 지나가면 비도 그치고 내리지 않는 까닭이다(아 2:11). 히브리어에 있어서 작은 비와 큰 비의 차이는 이렇다. 즉 전자는 "비"의 소나기라 불리우며, 후자는 "비들"의 소나기 곧 한꺼번에 내리는 많은 소나기로 칭한다. 그러나 모두가 다 "그의 힘의" 소나기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집 꼭대기까지 짓이기다가 그 앞의 모든 것을 쓸어가버리는 호우에서도 찾아 볼 수 있으나 그에 못지 않게 땅 속까지 스며드는 세우에서도 관찰되어진다.

밭에서 일하는 농부와 여로에 오른 길손은 다 같이 그들에게 반가운 비든 달갑지 않은 비든 어떤 비 속에서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인식할 수 있다. 일기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일은 죄악이며 어리석은 짓이다. 하나님이 눈과 비를 내리시는데 우리가 그것들이 오지 못하게 막을 수 있는가? 혹은 우리가 눈비에 대한 성을 낼 것인가? 우리 자신이나 우리 소유에 대한 하나님의 어떤 다른 처분이라도 우리가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엉터리 없는 짓이다. 지독한 겨울 날씨가 가져오는 결과는 사람이나 짐승이 어쩔 수 없이 들어 앉게 만들며, 밖에 나가는 일이 불편하고 안전하지 못하게 만든다.

  1. 사람들은 밭에서 하는 그들의 노동을 그만 두고 집으로 돌아와 집안에 틀어 박힌다(7절). "그가 각 사람의 손을 봉하신다." 서리와 눈 속에서 날씨가 지독하면 농부나 상인이나 여행자도 그들의 생업과 사업에 종사할 수가 없다. 쟁기는 방치되고, 선적하는 일도 중단되며, 아무 일도 할 수가 없고, 아무 것도 벌 수가 없다. 그래서 자기들의 일 손을 뗄 수밖에 없게 된 사람들은 "그의 일을 알 수 있게 되며," 그것을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그 일로 인하여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며, 그들의 손들을 봉하는 일기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참작함으로써, 그의 다른 놀라우시고 크신 일들을 칭송하게끔 인도된다.

우리가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의 세상사에 종사하지 못하게 되고 손을 떼게 될 때는 어리석게도 한가한 놀음이나 유흥으로 소일하지 말고, 경건과 헌신하는 일에(우리 스스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잘 알도록 힘쓴다든지 그 하나님의 일들을 찬양하는데) 시간을 바쳐야 된다.

우리의 손이 봉해질 때 우리의 마음은 이처럼 열려야 하며, 어느 때든지 우리가 세상에서 할 일이 적어질수록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우리가 집에 유폐되다 시피 틀어 박혀 있을 때는 그로 인하여 우리는 성서를 무릎 꿇고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짐승 역시 그들의 숨는 곳으로 들어가서 그 굴에 머문다"(8절). 이것은 야수를 의미하는데 들짐승들은 야생으로 지내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숨을 곳을 찾아야 하며, 그들은 본능으로 피난처를 찾아간다. 한편, 길든 짐승은 사람에게 유용하므로 우리도 지어 주고 사람의 보살핌에 의해 보호를 받는다(출 9:20). 나귀에게는 굴이 없으나 주인의 말구유가 있다. 나귀는 그리로 가면 안전하고 따뜻할 뿐만 아니라 배불리 먹을 수도 있다. 자연은 모든 피조물에게 폭풍우로부터 피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 그런데 사람에게만 홀로 방주를 제공해 주지 않을 것인가?

Ⅱ. 다른 방 위에서 불어 와서 다른 효과를 내는 바람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9절).

"은밀한 처소에서 회오리 바람이 나온다."(이렇게 해독할 수도 있다) 이 선풍은 빙빙 돌기 때문에 어느 지점에서 그것이 불어온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바람은 용어 그대로의 의미대로 "밀실" 즉 "은밀한 방"에서 나온다. 나는 이 "남방"이란 말은 그다지 잘 해석할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 이는 엘리후가 17절에서 남방에서 나오는 바람은 회오리 바람이기는커녕 따뜻하고 고요하게 부는 바람이라고 말하는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에는 엘리후가 아마 회오리바람 구름이 남방에서 나와서 점점 자기들에게 접근해 오는 것은 보았던 모양이며, 그 속에서 여호와가 잠시 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욥 38:1). 혹은 만약 소나기를 몰고 오는 광풍이 남방에서 나온다면 한냉하고 건조한 질풍은 북방에서 이르러 수증기를 흩어지게 하며, 그 공기를 맑게 할 것이다.

Ⅲ. 서리 속에서 까달아야 한다(10절. 역주, 우리 성경과 영어 성경의 번역이 다르다). 서리의 원인을 살펴 보라. "그것은 하나님의 호흡에 의해 생긴다." 즉 그의 권능의 말씀과 그의 의지와 명령에 의해 생긴다. 혹은 다른 자들이 이해하듯 우레가 하나님의 목소리이듯 하나님의 호흡인 바람에 의해 생긴다. 그것은 북방에서 나오는 바람 곧 찬, 얼게 하는 바람으로 인하여 생겨난다. 그 결과를 보자. "물의 넓이가 좁아진다." 즉 퍼져서 자유로이 마음대로 흐르던 하수가 결정체의 착꼬에 묶여서 응결되고, 마비되고 구속되 버린다. 이것은 진귀하다면 진귀하고 기적과 다를 바 없는 하나님의 능력의 본보기이다.

Ⅳ. 구름 속에서 깨달아야 한다. 구름은 엘리후가 이미 언급하였지만 물이 포함되는 모든 대기 현상이 잉태되는 모체이다(36:28). 그가 말하는 구름은 세 가지 종류의 구름이다.

  1. 강우를 회태하고 있는 빽빽하고 시커멓고 짙은 구름이 있다. 그는 습기를 가진 이 구름들을 "피곤하게 하신다"(11절). 즉 구름은 스스로 소모하며, 그들이 용해되고 분해되어 버리는 비로 인하여 고갈되 버린다. 다 쓰고 없어져서 더 이상 쏟을 것이 없을 때까지 물을 뿌린다.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피조물들을, 심지어 우리 위에 있는 것들까지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 살펴 보라. 구름은 그들이 다 할 때까지 땅에 물을 준다. 저 구름들은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스스로를 소모시키고 소비되어 버리는데, 이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정죄한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는 일이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각기 자기 입장에서 행하는 극히 조그마한 선을 생각해 볼 때, 구름은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들고 정죄하기 때문이다. "물을 주는 자는 그 자신도 또한 물을 공급받을 것이다."
  2. 밝고 옅으면서 물 없는 구름이 있다. "그는 이 구름을 흩어 버린다." 그들은 저절로 흩어져 버린다. 그러나 비로 응결되어 내리지 않으며, 그들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늘이 붉게 물든 저녁에는 밝은 구름이 흩어진다. 그 밝은 구름은 날이 본격적으로 맑겠다는 것을 증명한다(마 16:2).
  3. 날아 다니는 구름이 있다. 이 구름은 빽빽한 구름처럼 줄기찬 비로 용해되지도 않고, 바람의 날개에 실려 이곳에서 저곳으로 떠다니며 가는 곳마다 소나기를 내린다. 이 구름은 그의 뜻을 따라 "두루 돌아 다닌다"고 일컬어진다(12절). 일반 민중은 비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이 천체라고 말들 하는데 이것을 그릇된 미신만치 나쁜 생각이다. 비는 하나님의 의향에 의해 인도되며 규제되고, 하나님의 뜻은 가장 우연한 일처럼 보이거나 가장 미세한 것 같은 사물에 이르기까지 확대 적용된다. "그들은 그가 명하는 것은 무엇이든 행한다." 폭풍이나 그 폭풍에서 밀려 다니는 구름도 그의 말씀을 성취시킨다. 이런 수단으로 그는 "한 도시에 비를 내리게도 하고 다른 도시에는 비가 내리지 않도록 하신다"(암 4:7, 8). 이와 같이 그의 뜻은 "지구 위의 세계상에서" 이루어진다. 즉 인간의 자녀 중에서 그의 뜻이 행해지고, 하나님은 이 모든 일 가운데에서 그들을 주목하시며, 그들에 대해 일컬어지는 바로는 그가 "그들을 온 땅의 지면에 거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행 17:26). 도덕적 행위를 할 능력이 없는 하등 피조물은 상급과 징벌을 받을 능력도 없다. 그러나 인간의 자녀에게는 하나님께서 비가 내리도록 하시는데, 이것은 그의 토지를 징계하시기 위함이거나, 그것에서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에서 이다(13절).

(1) 비는 때때로 심판으로 변한다. 그것은 죄 많은 땅에 대한 채찍이다. 비가 한 때에는 전세계의 멸망을 위해 사용되었듯이, 이제는 일부 지역의 교정과 징벌을 위해 동원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 비를 구사하여 파종과 수확을 방해하며, 하수를 범람시키기도 하고 결실을 손상시키신다. 어떤 사람은 우리 나라가 강우의 부족보다 많은 강우에 의한 피해를 더 많이 입어 왔다고 말하기도 한다.

(2) 다른 때에는 비가 축복이다. 이 비는 "그의 토지를 위한 것"이다. 곧 이 토지가 비옥하도록 해 준다. 더욱이 그는 그 토지를 기름지게 하고, 더욱 결실을 많이 내도록 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을 "긍휼히" 제공해 주신다. 꼭 같은 사물이 주어지는 분량에 따라 큰 심판될 수 있고 큰 긍흉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필수적으로 의존하고 있는지 살펴 보라.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는 소나기도 밝은 빛도 가질 수 없다.


엘리후의 연설(21)(욥기 37:14-20)

엘리후는 욥에게 친근히 얘기하면서, 자기가 지금까지 말한 것을 욥이 스스로 자문해 보도록 열망하고 있다. 그는 욥이 이 이야기를 경청해 줄 것과 잠시 동안만 가만히 생각해 볼 것을 간청한다(14절).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기묘하신 일을 궁구하라." 우리가 듣는 일도 만약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다면 우리에게 유익되지 아니하기가 쉬우며, 만일 우리가 가만히 서서 그 일을 침착하게 생각해 보지 않는다면 곰곰이 생각하기조차 어렵다.

하나님의 일은 기묘하기에 우리의 고찰을 필요로 하며, 우리가 궁리해 볼 가치가 있다. 그 일들에 대한 온당한 성찰은 우리를 그의 모든 섭리와 환해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엘리후는 욥의 겸손한 자기 비하를 위해 다음의 사실을 욥에게 제시한다.

Ⅰ. 욥은 자연의 원인에 대한 통찰을 하지 못했고, 그 근원도 헤아려 보지 못하였으며, 그 결과도 예견하지도 못하였다(15-17절). "너는 이것을 아느냐? 너는 지혜가 온전하신 자의 기묘한 일을 아느냐?"

여기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지식의 완전성,

그가 지혜에 있어서 온전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스런 완전성 중의 하나이다. 그는 전지하시다. 그의 지식은 직관적이시다. 그는 눈으로 "보시며" 풍문으로 알지는 않으신다. 그의 지혜는 소상하며 전체적이다. 그는 사물을 사실대로 알고 계시며, 외관으로 알고 계시는 게 아니다. 철저하게 속속들이 아시고, 부분적으로 조금 알고 계신 것이 아니다. 그의 지식에는 먼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가까운 것 뿐이다. 미래적인 것은 없으며, 전부가 현재적이다. 숨기워진 것은 없고 전부가 개방적인 지식이다.

우리는 그의 모든 기묘한 일들 가운데에서 이 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들이 자기가 하는 행위를 알고 있는 분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의미를 알지 못하는 그 기묘한 일들 안에 있는 우리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2. 우리 지식의 불완전함.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도 자연의 능력과 일에 대해 어두운 점이 많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역설적인 존재이며, 우리에 대한,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불가사의한 신비이다. 신체들의 중력과 물질의 부분들의 응집은 확실한 현상이나, 설명할 수가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무지를 깨달을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의 무지를 고백하였는데, 이것을 고백하지 않는 무리들은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우리가 하나님의 정책에 대하여 얼마나 무능한 재판관인가 하는 사실을 추리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하물며 하나님의 공학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극소수이겠는가!

(1)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름에 대하여 내리신 명령이 무엇인지 또 무슨 명령을 내리실지 알지 못한다(15절). 우리는 만사가 결정에 의해서 또 계획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그러나 무엇이 결정되었으며, 무엇이 계획되었고, 언제 그 계획이 작성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종종 "자기 구름의 빛"이 무지개 속에서(이렇게 해독하는 자도 있다), 번개 속에서, "번쩍번쩍 빛나게 하신다." 그러나 그가 언제 그렇게 하실 지 우리가 미리 볼 수 있느냐? 예언할 수 있느냐? 만약 우리가 일기의 변화를 통속적 관찰로 수 시간 전에 미리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청우계로 기상 관측을 시작하는 때이기는 하지만, 이런 것들이 기상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목적하시는 의도를 도대체 얼마나 나타내 줄 것인가!

(2)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구름이 어떻게 공중에서 균형을 잡는가 하는 것, 즉 "평평하게 뜨는가" 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기묘한 일들 중 하나이다.

그들은 너무도 균형을 잘 취하고 잘 펼쳐져 있어서, 결코 우리에게서 태양의 은혜를 빼앗아가지도 아니하며(흐린 낮조차도 낮은 낮이다), 평형을 유지하여 그들은 갑자기 떨어지는 법도 없고, 돌연 물 기둥이나 큰 비로 쏟아져 내리지도 않는다.

무지개는 구름이 이 세상을 물로 멸망시키지 못하도록 그들을 균형잡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암시이다. 그들은 평평하게 떠있어서 저희 비를 지면에 무사공평하게 분배하고, 따라서 이제나 저제나 모든 곳은 제 몫을 받는다.

(3) 겨울이 지나가면 어떻게 아늑한 변화가 생기는지 우리는 모른다(17절).

[1] 춥다가 어떻게 기후가 따뜻해지는가? 우리는 우리 의복이 어떻게 따뜻해지는지 알고 있다. 즉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가 따뜻해지는 이유와 같이 우리가 옷을 입으면 어떻게 따뜻해 지는지 알고 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없다면 우리가 옷을 입더라도 따뜻하지가 않다(학 1:6). 그러나 하나님이 일기를 명하신 즉 극한의 날씨에는 우리를 따뜻하게 보호해 주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옷도 우리에게 따뜻하게 된다.

[2] 폭풍우에 어떻게 평온이 오는지? 봄이 오면 "그가 남풍으로 땅을 고요하게 하신다." 그가 살을 에이고 거세게 불어 제치는 북풍을 가지고 있듯이, 그것을 녹여 주고 평온하게 해 주는 남풍도 가지고 계신다. 성령은 이 양자에 다 비유가 되는데 이는 그가 확신시키기도 하시며, 위로해 주기도 하시는 까닭이다(아 4:16).

Ⅱ. 욥은 태초의 천지 창조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18절).

"너는 그와 함께 하여 궁창을 펴내었느냐?" "당신은 그가 없이도 하늘을 펼쳐내었다고 자부할 수가 없습니다. 또 그와 연합하여 그것을 펼쳤다고 주장할 수도 또한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고안해 내는 일에 있어서나 활동하는 데 있어서나 어느 누구의 조력을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 존재하여 우리가 보는 하늘 즉 가시적 궁창의 무한한 공간을 창조하신 것은(창 1:6-8) 신적 권능의 영화로우신 본보기이다.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은 다음과 같다.

  1. 비록 궁창이 유동적이라고는 하나 그런데도 그것은 견고하다. 그것은 "강하며" 그 이름을 그것의 안정성에서부터 가져온다. 그것은 여전히 과거의 하늘 그대로이며, 조금도 쇠하지 않으며, 차용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소멸될 때까지 하늘의 법칙은 변경되지도 않을 것이다.
  2. 비록 궁창이 광대하다고는 하나 그것은 밝고 청명하여 아주 진귀하게도 정묘하다. 그것을 "주조한 겨울"과 같이 매끄럽고 광택이 나며 극미한 흠이나 갈라진 틈도 없다. 거울에서처럼 하늘에서도 우리는 "신의 영광을 바라 볼 수 있으며 그 손으로 하신 일"의 지혜를 볼 수 있다(시 19:1).

우리가 위로 하늘을 쳐다볼 때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이 거울이나 면경이로되, 우리 자신의 얼굴을 비춰 주는 것이 아니라, 천성 세계의 순정과 위엄과 밝음 및 그곳의 영화스러운 주민들을 희미하게 보여 주는 거울이라는 사실이다.

Ⅲ. 그도 그들도 다 실체의 공적에 준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말 할 수는 없다(19, 20절).

  1. 그는 욥이 만일 그 임무를 맡을 엄두라도 낸다면 자기들의 감독자가 되라고 요구하며 나선다. 그는 이 말을 풍자적으로 하고 있다. "당신이 만일 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그에게 무엇을 말할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오(19절). 당신은 하나님과 논쟁을 해 볼 생각이 있고,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하나님과 다투어 주도록 원하였오.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가 이야기할 바를 가르쳐 주시오. 당신은 우리보다 이 심연을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습니까? 만일 당신이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이 발견한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며 우리에게 교훈을 공급해 주시오."
  2. 그는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일에 있어서나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는 일에 있어서나 다 자기의 부족을 자인하고 있다. "우리는 암흑의 연고로 우리말을 진술할 수 없다." 가장 최선의 인간이라도 신적 본성의 영화로운 완전성이나 신적 통치의 경영에 대하여는 어두운 점이 많다.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자들도 알려져야 하는 것과 알려질 것에 비교하면 아는 게 거의 없으며, 아니 전혀 없으며, 온전한 것이 와서 수건을 벗겨질 때에 비교하면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말한다고 할 때에도 우리가 하는 말은 당황 중에 한 뒤죽박죽이 다 된 말이며, 아주 불확실한 말이고, 우리는 이윽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좌초하고야 만다. 이는 재료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말의 부족 때문이다.

우리가 실언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경외심과 두려움으로 말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De Deo etiam Vera dicere periculosum est-즉 하나님께 대하여 진실된 것을 주장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위험한 부담을 안고 있다.) 우리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가지고 말을 끝맺지 아니하면 안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아무리 잘 얘기한다고 하더라도 더 잘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엘리후 자신도 자기딴에는 하나님의 이익을 위하여 잘 말하였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수를 바라거나 하나님이 그 일로 인해서 자기에게 빚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거나, 그가 하나님께 조언을 드리기에 적합한 자격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1) 그는 자기가 말해 왔던 것들이 부끄럽기조차 하였다. 그가 부끄러이 여긴 것은 자기 진술의 근거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근거를 처리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였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어찌 그에게 고할 수 있으랴?" 혹은 "내가 말하는 것이 그에게 전해질 것인가?"(20절) "내 말이 그의 주목을 받을 가치가 있는 말로, 기특한 봉사의 일로서 그에게 보고될 것인가? 단연코 안 된다. 결코 입에 올리지도 말라." 그의 실제의 진상이 자기가 진술을 떠맡음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얼굴이 형편없는 화가로 인해 망쳐지듯 손상을 입지나 않았는지 전전긍긍해 한다. 또 그는 자기의 연출이 감사하다는 치사를 받기는커녕 도리어 사죄를 구해야 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였을 때에도, 우리는 자신이 무익한 종이었음과 자랑할 것이 조금도 없다고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그는 더 이상 말하기를 꺼려하고 있다. "만일 사람이 말하면," 만약 그가 하나님의 변호를 맡겠다고 나선다면, 하물며 그가 하나님을 고소하겠다고 제안한다면 "정녕코 그는 삼키울 것이다." 만약 그가 터무니없는 말을 한다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곧 그를 불사를 것이다. 만약 아주 잘 얘기한다고 해도 그는 곧 신비지경 속에서 자신을 잃어 버리고 말며, 하나님의 광채에 의하여 압도되고 말 것이다. 그는 경악으로 인하여 눈이 보이지 않으며 귀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엘리후의 연설(22)(욥기 37:21-24)

엘리후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거룩한 경외감을 품고서 그것에 대한 몇몇 짤막하고도 위대한 말로써 자기의 이야기를 끝맺는다. 그 자신이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성스런 경외심을 가지고 남에게도 인상깊이 하나님의 영광을 심어 주기를 원하였다. 그는 간결하게 서둘러서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이제 곧 그 일을 자기 수중에 직접 장악하시려고 한다는 사실을 그가 감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1. "짙은 흑암 중에 거하시며, 그것으로 자기 장막을 삼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이(대하 6:1; 시 18:11) "구름과 캄캄함"에 둘러쌓이신 채(시 97:2, 9) 흡사 심판을 위해 자기 보좌를 준비하러 오시는 것과 같이 그 두려운 병거를 타시고 그들을 향해 나아 오시는 것을 엘리후는 관찰한다. 그는 그 가슴에 회오리 바람을 품고 남방으로부터 나오는 구름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너무나 짙고 검어진 채 그들의 머리 위로 몰려 와서 그들 중 아무도 조금 전까지도 "구름 중에 있던 밝은 빛을 볼 수"가 없었다. 태양 빛도 이제는 어두워졌다. 이것은 그에게 흑암을 상기시켜 주었고, 이로 인하여 그는 말할 수가 없었으며(19절), 이 캄캄함은 그로 하여금 계속 말하는 게 두렵도록 만들었다(20절). 이와 같이 제자들도 "구름 속에 들어 갔을 때 두려워하였다"(눅 9:34).

그러나 그는 북쪽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그 쪽은 그것이 밝게 보였기에 그는 그 구름들이 대홍수를 일으키려고 모이는 것은 아니라는 희망을 가진다. 그들은 덮여 있기는 하나 빽둘러 쌓여있지는 않았다. 그는 "바람이 지나가서 그들을 깨끗이 쓸어 줄 것"으로 기대하는데, 그 바람이 하나님의 은총이 다시 돌아옴을 상징하여, 노아의 홍수의 물결로부터 땅이 들어나도록 지면 위로 불었던 바람과 같은 그런 바람이었다(창 7:1). 그리고 나면 "맑은 날씨가 북방에서 나올 것이며" 만사가 괜찮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찡그리지는 아니하실 것이며 영원히 다투지는 아니하실 것이다.

  1.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고 하기 때문에 서둘러 결론을 맺는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의 총결산으로서 소수의 말들로 많은 것을 전달하고자 하는데, 만약 잘만 고려한다면 자기가 지금껏 박아 오던 쐐기를 완전히 때려 넣어 확정을 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에 대한 길을 닦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관찰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다."

그는 영광의 하나님이시며, 자기의 모든 시종들에게 경외하는 생각을 줄 수밖에 없고 자기의 모든 대적들 위에 두려운 생각을 넣을 수밖에 없는 그런 초월적이고도 온전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는 두려운 찬양이 있다"(이렇게 해독하는 이도 있다). 왜냐하면 그는 찬송하기에도 두려운 분이시기 때문이다(출 15:11).

(2) 우리가 "전능자에 대하여 언급"할 때에는 "우리가 그를 발견해 낼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자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유한한 오성은 그의 무한하신 온전성을 포착하지 못한다(23절). 우리가 계란껍질 속에 바다를 담아 넣을 수 있느냐? 우리는 그가 자기의 섭리 가운데에서 취하시는 발자국을 추적할 수 없다. 그의 길은 바다 가운데 있다.

(3) "그는 권능이 지극히 빼어나신다."

하늘에서나 땅에서 그가 하고 싶은 일이면 무엇이든 그가 행하실 수가 있다는 것은 그의 권능이 빼어남이다. 그의 능력의 우주적인 범위와 그것의 항거할 수 없는 힘은 그 권능이 지극히 크심이다. 어떤 피조물도 그와 같이 그토록 강한 팔, 긴 팔을 가지지 못했다.

(4) 그는 지혜나 공의에 있어서도 못지 아니하게 빼어나신다. 즉 "심판과 풍부한 공의에 있어서" 지극히 크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의 권능이 지극히 크다고는 도무지 할 수 없다. 무슨 일이든 다 행하실 수 있는 그가 무슨 일이든 다 가장 선하게 행하시리라는 것은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는 그가 무한히 지혜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또 그가 어떤 일에 있어서도 그릇 행하지 않을 것도 확신할 수가 있다. 이는 그가 무한히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죄인에게 심판을 행하실 때에는 그 행사에는 무한한 공의가 있어서 그는 죄인들이 마땅히 받을 벌 이상은 절대로 내리시지 않는다.

(5) "그는 벌을 내리시고자 원하지 않으신다. 그는 벌을 내리지 않으실 것이다."

즉 그는 즐거워하는 가운데 벌을 내리지는 않으신다. 인간의 자녀에게 괴로움을 주는 일이 하나님께 즐거움이 되지 못하는 터에, 자기 자신의 자녀에게 벌을 내리는 일은 말해 무엇하랴! 그는 당연한 이유가 있을 때와 꼭 해야 할 필요가 있는 때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벌 주지 아니하신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괴로움의 과중한 짐을 지우지 않으시고, 우리의 골격을 참작해 주신다.

이 구절을 이렇게 해독하는 이들도 있다. "전능자는 우리가 찾아 낼 수 없으신 분이며, 그의 권능이 크시나 심판으로 괴롭히지 않으시고, 그에게는 풍부한 공의가 있다." 그는 우리의 그릇된 행동이 무엇인지를 주목하는 일에 혈안이 된 분은 아니시다.

(6) 그는 자기들의 생각에 지혜롭다 하는 자들의 비난은 귀하게 여기지 않으신다.

"그는 그들을 돌아보지 아니하신다"(24절). 그는 그들에게 친절히 보살펴 주고자 하시는 그의 뜻을 변경시키지 않을 것이며, 그에게 지시하려고 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원하는대로 그가 행하시도록 강요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하고, 그를 이기지도 못할 것이다. 그는 겸손한 자의 기도는 돌아보시나 간교한 자의 책략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신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인간보다 지혜롭다(고전 1:25).

(7) 이 모든 사실로부터 하나님은 위대하시므로 그는 크게 경외해야 할 분이라는 것을 추론해 내기는 어렵지 않다. 아니, 그는 은혜로우셔서 괴로움을 베풀지 않고자 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경외함이 마땅하다." "사유하심이 주께 있으심은 주를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이다"(시 130:4).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만인의 의무요 이득이다. 조만간에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게 될 것이다. 여호와와 그의 선하심을 경외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은 그의 물병에서 진노하심의 물이 쏟아질 때는 영원히 벌벌 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