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2월 14일 수요일 묵상구절 욥42:1-6 <욥의 회개>

Jeehyun 2024. 2. 14. 08:49

맥체인성경읽기

창세기 47, 누가복음 1:1-38, 욥기 13, 고린도전서 1

묵상구절

42: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42: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42: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2: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매튜헨리/옥스퍼드

1. 옥스퍼드 서론

💡 절정 부분을 마감하는 부분

  • 40:15-41:34에 나오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한계를 규명하는 하나님의 후기 선언을 들은 후 욥이 취한 태도를 다룬다.
  • 욥의 새로운 신앙 고백과 회개로 요약될 수 있다.

과거에 욥은 무척 많은 말을 하였다.

욥과 친구들 간의 논쟁의 시발점이 된 초기 독백이 있었고(3:1-26) 욥과 친구들 간에 총3차에 걸친 변론에 있어서도(4:1-27:22) 세 친구들이 번갈아 가면서 했던 말보다 욥이 한 말이 휠씬 더 많고 길었다.

하나님께서 후기 선언을 주신 이유

그리고 논쟁의 전환점을 이루는 후기 독백도(29-31장) 무려 세 장에 이른다.

이처럼 인간과의 논쟁에 있어서는 적극성을 보였던 욥이 하나님의 초기 선언을(38:1-39:30) 들은 후에는 단지 두 절로만 답변하였다(40:4, 5). 욥의 이 짧은 대답은 더 이상 대답할 말이 없으므로 대답하지 않겠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이 세상을 섭리하시는 방법을 네가 아느냐?’ 라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하여

‘알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함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권능을 인정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허물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을 간과한 채 자신의 의를 지나치게 주장한 것에 대해 회개하는 신앙의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이었다.

즉 이 대답에는 철저한 회개의 말이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욥의 대답을 미흡하게 여기셨기 때문에, 욥을 완전히 복종시키고자 인간의 통제가 불가능한 하마와 악어의 위용을 통해 당신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한계를 선언하는 후기 선언을 주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한계의 대한 하나님의 지속된 선언으로 인하여 드디어 욥은 변화되기에 이른다.

본장에서 표현된 욥의 회개

  1. 그리하여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오묘한 섭리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할(2절) 뿐 아니라,
  2. 자기 의를 주장하였던 과거의 완악함을 시인하고(3절),
  3. 진심으로 회개하였던 것이다(6절).
  4.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계속되는 교훈을 요청하였고,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들은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였다(4.5절).

이러한 욥의 변화된 자세로 인하여 1-6절 단락 이후에는 세 친구에 대한 하나님 책망은 나오나 욥에 대한 책망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후 욥은 중보 역할을 하게 되며 고난 당하기 이전보다 갑절의 측복을 받게 된다. 이 모든 변화의 전환점이 바로 본절 이하에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욥의 대답이므로 이 단락은 매우 중요하다.


2. 옥스퍼드 해설/매튜헨리 주석

욥의 겸손한 고백(욥기 42:1-6)

자기 스스로를 의롭다고 합리화시키던 욥의 말은 31장 40절에서 끝이 났다. 그 후로는 욥이 그런 취지로 더 이상 말한 것이 없다. 자기 자신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욥의 말은 40장 4, 5절에서 시작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같은 취지로 말을 계속하고 있다. 비록 그의 인내심은 그 온전한 공업을 쌓지 못했으나 자기의 성급함에 대한 욥의 참회는 그 온전한 것을 이루었다.

여기에서 그는

  • 자기의 우행과 무모한 언사에 대하여 철저한 겸손을 나타내며,
  • 또 그는 그 죄를 용서받는다.

선량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행하도록 하려면 다소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들도 필경은 자기들의 과오를 깨닫고 그 잘못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피조물 속에 나타난 자기 자신의 크심과 권능을 모두 욥에게 말씀하신 즉 "욥은 그제서야 여호와께 대답하였다(1절)."

곧 반박이라는 형태로서가 아니라(그는 대답지 아니하겠다고 약속했었다. 40:5), 순종의 모습으로 대답하였다. 우리도 이와 같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야 한다.

Ⅰ. 그는 하나님의 권세와 지식과 통치가 무제한적이란 진리에 동의를 표하여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에서 말씀하신 말씀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증명하고자 하였다(2절).

  • 썩어빠진 정열과 부정한 행위는 어떤 부패한 원리로부터 발생하거나, 아니면 진리의 원리에 대한 불신과 태만에서 기인된다.
  •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진리의 인식"에서 출발한다(딤후 2:25).

욥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위대성과 영광 및 온전하심에 대해 확신을 얻은 자기 판단을 고백하고 있는데,

이로부터 당연히 귀결되는 것은 하나님께 불경스레 발언함으로 나타내 보인 욥 자신의 철없는 행위에 관하여 그의 양심이 내리는 유죄 판결이다.

1. 그는 하나님께서 무슨 일이든 행하실 수 있다고 고백한다.

하마와 악어를 만드신 분이며, 또 그들을 자기 마음대로 요리하실 수 있는 분에게 어려워서 할 수 없는 일이 어찌 있을 수 있는가? 그는 이 사실을 이전에도 알고 있었고, 그 문제에 대해 아주 잘 표현해 왔었지만, 이제는 마음을 쏟아 그 일을 깨닫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권세가 자기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한 번 말씀"하셨는데도 그는 그것을 두 번 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다툰다는 것은 생각해 낼 수 있는 것 중 가장 미친 짓거리이며, 엉터리없는 행동이다.

"주께서는 무소 불능하십니다. 그러므로 당신께서는 이 비천한 상태로부터 나를 끌어 올리실 수 있으십니다. 나는 어리석게도 나의 이 비참한 상태가 개선된다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자포자기해 버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당신께서 이 일을 행하실 수 있는 줄 믿습니다."


 💡 42: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한계를 선언하는 하나님의 후기 선언을 들은 뒤 욥이 내밸은 첫마디 말

‘콜 투칼’

  • ‘당신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 ‘당신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라는 의미까지 지님.
  • 즉 이러한 하나님의 무소불능하심은,
    • 비단 ‘어떤 것을 할 수 있다’라고 하는 ‘능력’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 그 능력을 베푸는 대상에 대한 소유 ⇒ 즉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인정의 의미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하나님의 ‘무소불능’ 하심과 관련하여 지난날 읍은 다옴과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 즉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세상의 불의한 일들에 대하여 침묵하고 계시는가(24:1.12)라는 것이었다.
  • 특히 자신이 당하는 고난과 관련해서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에게 이러한 일을 행하시는가라는 말을 내뱉으며 하나님의 행사에 대해 원망과 불평하는 말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하나님의 ‘무소불능’하심에 대하여 욥은 견지하고 확신있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본절에서 욥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무소불능’ 하심은 욥이 이미 주장해 왔던 많은 것들을 수정하는 의미가 있다.

  1. 즉 과거 욥은
    • 세상에서 벌어지는 불의한 일들을 들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대해 의문을 표하기도 하였다.
  2. 그러나 이제 욥은
    • 자신이 가진 생각과 이해가 제한적인것이며, 한계를 지닌 것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3. 그리고 이제
    • 하나님은 한계를 가진 인간의 제한된 생각에 묶일 수 없는 절대 주권을 가진 분이시라는 인식을 확고히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바른 인식은

  •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행사, 곧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일들에 대한 - 전적인 수용
  • 그 모든 일을 행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께 대한 - 전적 신뢰에로 연결된다. 

2.그는 "어떤 생각도 하나님께로부터 차단되어 보류되는 것은 없다"고 고백한다.

 💡 42:2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 ‘주께서는 어떤 계획이나 목적이든지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

욥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그 계획과 목적은

  • 넓게는 : 우주 전체를 통치하시는 것으로,
  • 좁게는 : 세상의 인간사만 아니라 인간이 인식할 수조차 없으며 이해할 수조차 없는 크고 작은 피조물 전체에 걸쳐

온전하게 구현되어지고 있음을 고백한다.

  • 즉 욥은 자신이 인식하건 그렇지 못하건 상관없이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는 피조 세계 구석구석에 서 지속적으로 온전히 구현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 당신이 계획하신 것, 목적하신 것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이루신다.
  • 욥이 고백하는 바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진행시키시고 성취하시는 데 있어서 그 어떤 것에도 영원히 훼방받지 않으시는 절대적 주권을 소유하신 하나님이시다.
    ⇒ 이러한 욥의 고백은 과거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 대한 자신의 원망을 극복한 것이다.

이러한 본절의 ‘훼방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란 욥의 고백은

지금까지 욥에게 의문으로 남겨진 의인의 이유 없는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도 중요한 해답을 준다.

  1. 바로 이는 욥이 자신에게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까지도 더 이상 원망과 불평이 아닌 그분의 주권의 행사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욥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행사와 관련해 자신의 고난을 이해한 것이다.
  2. 그리고 이러한 욥의 이해는 → 자신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한 이해에까지 확산된다.
    즉 욥은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 자신이 인식하는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신 뜻을 따라 만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고백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욥이 이러한 성숙한 인식을 가지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한계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 욥은 하나님의 선언을 통해 1)인간의 한계와, 2)하나님의 무소불능과, 3)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 확고한 인식에 도달하였음.


 

(1) 하나님께서 인식하시기에 장애를 느낄 만한 우리의 생각은 하나라도 있을 수 없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한시라도 신경질적이고 불만족스러우며 불신하는 생각이 들어오지만 하나님은 그 생각을 지켜보고 계신 목격자이시다.

하나님과 투쟁한다는 것은 헛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의향과 계획을 그로부터 은폐시킬 수가 없으며, 만일 그가 우리의 생각이나 계획을 미리 알아 내버리신다면 그는 그것들을 좌절시킬 수가 있으시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 시행하시기에 방해를 받을 만한 자기 생각은 하나라도 있을 수 없다.

"여호와께서는 자기가 즐겨 원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이행하였다."

욥은

  • 23장 13절에서 "그는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그것을 행하신다"고 불평하여, 이 사실을 정열적으로 말하였던 것이나,
  • 이제는 "하나님의 경영이 시행될 것이라"고 기꺼이, 또 만족감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

만일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에게 예기치 않은 결과를 가져다 주기 위한 선한 생각"이시라면 일견 중도에 어떤 난관이 놓여 있는 것 같든지 간에 그는 자기의 은혜스런 목적의 성취를 보류하실 리가 없다.


Ⅱ. 욥은 하나님이 그 이야기의 서두에서 규탄하셨던 사실에 대하여 스스로 죄가 있는 자라고 자인한다(3절).

💡 42: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 본절에서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행위들어 어리석었다는 사실과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도저리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인정하며 고백한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

  • 여기서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하여 책망의 말씀을 하시면서 사용하신 ‘무지한 말’이란 표현을 그대로 받아서 되사용하고 있다(38:2).
    즉 욥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무지한 말’이란 자구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은
  • 이러한 욥의 답변은 → 욥 자신이 하나님의 하신 말씀에 적극 공감하고 있음을 뜻한다.
    • 욥이 하나님의 그 책망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 더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인식의 한계성을 철저하게 절감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무지한 말’

  • 욥에게 있어서 극한 고통 속에서 앞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지낄여댔던 생에 대한 여러 가지 불평, 그리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에 대한 원망의 소리들.

‘이치를 가리는’

  • 직역하면 : 하나님의 충고와 가르침을 감추었다는 의미.
  • 즉, 궁극적으로 하난미의 가르침을 바로 수용하지 못하였다는 의미.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 물론 욥이 했던 원망, 불평의 말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의 반영이기보다는 그가 겪는 극도의 고난을 참다 못해 내뱉은 탄식에 가까운 표현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 그러나 욥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탄식조로 내뱉었던 말들까지도 → 그것이 하나님의 ‘이치를 가리우는 것’ 임
    • 층분하게 인식하고,
    • 이에 대해 회개의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

사실 욥은 과거

  • 자신이 극심한 고난에 처해질만큼 직접적인 죄를 지은 일이 없다는 사실에 근거해 자신의 상대적 의를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제 욥은

  •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오묘한 섭리에 대한 계시를 접하고,
  •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주장한 것이 얼마나 완악한 행동이었는지를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

욥의 심경 : ‘자신의 무지함에 대한 한탄’, ‘하나님의 뜻을 흐리는 허탄한 말을 내뱉음에 대한 참회’의 심경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 이러한 본문의 자기 어리석음과 무분별에 대한 욥의 시인은 이제 욥의 영적 분별력이 → 과거보다는 진전되고 더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 욥은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말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있다. 

"여호와여, 당신께서 하신 말씀의 첫 마디가 이것이었습니다. '지식이 없는 말로써 이치를 어둡게 하는 이가 누구냐?' 딴 말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 말 한 마디가 저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제가 그토록 무지 몽매한 인간이었음을 자백합니다. 그 말씀은 저의 폐부에까지 닿았고 내 죄를 목전에 나열시켜 주었습니다. 그것은 부인하기에는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었고 변명하기에는 너무나 죄질이 극악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식이 없는 무지한 이치를 은폐시켰던 것입니다. 저는 무식하게도 저를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향과 의도를 바로 보지 못하고 하나님과 논쟁하고자 하며, 제 자신의 정당성만 너무 과도하게 고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였나이다. 즉 나는 내 스스로가 하나님의 섭리가 시행되는 이치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하는 문외한이면서, 섭리의 지배를 판단하였습니다."

1. 그는 스스로가 하나님의 의도에 대하여 무지하다고 고백한다.

우리 모두가 다 마찬가지로 무지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판단은 아주 깊은 심연이어서 우리는 그 깊이를 잴 수가 없다. 하물며 그 깊은 심연의 근원을 우리가 찾아 낼 수 있으랴!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동하시는 것은 보지만 그가 왜 그것을 행하시는지, 무엇을 목표로 기도하시는지, 그 일을 어떤 결과로 이끌어 가실지 알지 못한다. 이 일들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놀랍고 기이한 일들이어서, 우리가 발견해 내기에는 우리 시야를 벗어난 일이며, 우리가 변경시키기에는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일이고, 우리가 판결하기에는 우리 재판권이 미치지 않는 관할권 밖의 일이다. 그 일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 일들에 대해서 의견을 내린다는 것은 전혀 우리 자격 밖의 일이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언쟁하는지의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까닭에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가 성취될 때까지는 캄캄한 중에 있는 것일망정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과거에 욥은 자신이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된 인식들이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이고 온전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지식의 근원이 되시며 만유, 곧 천체에서부터 번개와 우레, 비, 우박 등 천기, 그리고 지상에 사는 동물과 하늘을 나는 새들, 거대한 힘을 지닌 하마와 악어 등을 지으시고 그것들 모두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대면해 보니 →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은 지극히 부분적인 것들이며, 편협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 속에서 욥은 하나님의 계획과 하시는 일들을 인간적 지식으로는 도저히 다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특리 본절에서 욥이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언급하는 ‘놀라운 일들’이란

  • 욥이 반복하여 말하고 있는 바, 인간의 인식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신비의 베일' 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무한 광대하심.
  • 이제 욥은 이러한
    • 하나님의 면모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 그로 인해 과거 자신의 무지하고 무책임한 언사를 회개. 

2. 그는 자기가 이해하지도 못하는 일에 대해 의견을 토론해 보려고 기도해 본 것과, 자기가 판단할 수도 없던 일을 감히 나무랄려고 한 일에 있어서 스스로가 무사려 하고 주제넘은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그가 문제를 듣기도 전에 그 대답을 하는 자, 그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수치가 된다." 우리가 어떤 소송 사실에 대해 판정을 내릴 자격이 없는, 즉 해당 판사가 아니라면 그 송사를 결정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사건과 어울러 우리 자신도 그르치게 된다.


💡 4-5절

  • 앞선 3절에서 - 욥은 자신의 무지한 말로 하나님의 뜻을 가리우고 교만하게도 자신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확정적으로 말한 사실을 시인하였다.
  • 이제 본절과 5절에서는 -
    •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계속적인 교훈을 요청하는 내용과,
    • 불완전하고 관념적인 신지식이 아닌 경험적이고 정확한 신지식을 소유하게 되었음에 대한 감사의 고백을 올리는 내용이다. 

Ⅲ. 그는 대답은 하지 않을 것이나, 9장 15절에서 말했던 대로 "그의 심판자에게 탄원을 하고자 한다."

"들으소서! 나는 당신께 간구하나이다. 내가 말은 하겠사오나(4절), 원고나 피고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13:22), 겸손한 하나의 청원인으로서 말하겠사오며, 가르치고 훈령을 내리려는 자로서가 아니라, 가르침을 받고자 열망하며 훈령을 기꺼이 받고자 하는 자로서 말하겠나이다.

여호와여! 심히 어려운 질문을 저에게 더 이상 퍼붓지 마소서. 나는 당신께서 제기하신 수 천 가지 질문 중 한 가지도 당신께 답변할 능력이 없는 까닭에서입니다. 오히려 당신께로부터 훈계를 청할 수 있도록 제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것을 제게 거절치 마시고 저의 우행과 자만심을 책망하지 마소서"(약 1:5).

이제 욥은 엘리후가 자기에게 훈계하였던 기도를 드리게 된다. "당신은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 42: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 하나님의 계속적인 교훈을 요청함.

과거 욥의 요청과 현재 요청의 차이점

  • 사실 ‘말하겠사오니 대답해 달라'는 욥의 요청은 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던 일이다(13:22; 19:7).
  • 그러나 지금의 요청은
    • 자신이 당하는 까닭 모를 고난과 관련해 욥이 하나님에 대하여 스스로 판단하고 자신의 의로움을 규명하기 위하여 - 성급하고 무모하게 내세웠던 이전의 요청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1. 자신의 무지함과 연약함을 깨닫고
    2. 겸손히 하나님께 그분의 완전한 교훈을 구하는 것이다.

욥의 교훈 간청의 목적

이는 하나님의 더 큰 지혜와 능력을 얻기 위한 욥의 간청으로 볼 수 있다.

‘말하겠사오니’ (’따바르’)

  • 이 단어는 말 뿐 아니라 실제적 행위까지도 포괄하는 용어.
  • 따라서 욥의 이 말은 의미상으로 ‘말과 행위를 함께하겠사오니' 라는 뜻을 가지는 것이다.
  • 이 표현에는 원문상 욥의 강한 의지가 잘 드러나고 있다.

사실 고난 중에 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지 않는 어간에 욥은

  • 말과 행위가 따로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 있었다.
    • 무소불능의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에 대해 말하면서도
      ↔ 그 하나님께 대하여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는 행동이 따르지 못하였으며(9:12),
    •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품고 있었으나
      ↔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절망을 피력하였다(13:15; 22:10).
  • 그리고 이러한 이중적이고 모순적 태도는
    ⇒ 욥을. 더 깊은 고민과 갈등에 빠트리고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난 후에는

  • 자신이 알고 있던 그 하나님에 대하여 말과 행동을 일치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주는 들으시고

  • ‘말하겠사오니’와 같은 의미를 함축.
  • 이 말 역시 - 단순히 귀로 듣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들은 바에 대하여 ‘행동으로 응답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단순한 질문의 성격을 넘어서서 ‘물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의논’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위와 같은 말들을 하는 이유

  • 본절에 나오는 이러한 표현들 속에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물었던 질문들이나, 욥이 하나님께 물었던 여러 가지 질문들이 - 모두 하나님께만 그 답이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Ⅳ. 욥은 스스로 참회자의 자세로 돌아가서 올바른 원리 원칙에 의거하여 행동한다. 진정한 회개에는 죄의 확신이 있어야만 할 뿐 아니라, 그 죄악에 대한 깊은 뉘우침과 경건한 비탄 즉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어야 한다(고후 7:9).

자기 죄에 대한 욥의 비애도 그러하였다.

1. 욥은 자기의 회개 중에 하나님께 눈을 돌리고 하나님을 존중하게 되었으며, 그 태도를 자기 참회의 근본 원리로서 견지해 나갔다(5절).

"나는 주께 대하여 귀로 들어 왔사온데, 나의 어릴 때 내 스승들로부터 청문한 적이 부지기수로 많사오며, 최근 얼마 전에도 내 벗들로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크심과 권세와 지고하신 주권에 대하여 약간 알고 있기는 하였습니다만, 그런데도 내가 들은 것만으로써 내가 마땅히 당신께 승복해야 할만큼 당신께 스스로 굴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일들에 관해 품었던 나의 견해는 내가 말하는 데만 도움이 되었을 뿐, 내 사고 자체에는 충분한 영향을 입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방금 당신께서는 직접적인 계시로써 당신의 영화스러운 위엄 가운데에서 저에게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이제는 제가 그전에 관념으로서만 알고 있었던 그 진리들의 권능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되었사오며, 그러므로 이제 저는 참회하옵고 지금까지 우매하게 말한 바를 취소하옵니다."


💡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본절에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직접 들은 욥의 진한 감동이 잘 드러나고 있다.

  • 즉 욥은
  • 과거에 가졌던 불완전하고 관념적인 신지식이 아니라
  • 경험적이고 훨씬 정확한 신지식을 가진 데 대해 감사의 심정을 고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 자신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만 들어왔음을 강조.
  • 이는 욥이 지금까지 조상들의 교훈과 종교적 전통, 그리고 친구들의 말, 신학적 이론을 통하여서만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었음을 뜻한다.
     지금까지 욥이 알고 있었던 하나님은
    = 어떤 ‘매개체'틀 통하여 아는 하나님이었다.
    • 그런데 어떤 매개체를 통하여 인식된 욥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
    • 불완전하고 관념적인 것에 불과했다.
  • 그러나 욥은 이제 “그 어떤 매개체 없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다.

‘귀’, ‘눈’

  • 귀 = 하나님에 대한 간접적인 체험
  • 눈 =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
  1. 사실 욥이 어떤 매개체 없이 직접 하나님을 보고 대면한 것은
    • 그가 엄청난 고난과 시련 속에서 간절하게 열망했던 바가(19:27) 실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2.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직접적 체험은
    • 그동안 욥에게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여러 가지 부정적 의식들과 의구심들을 깨끗하게 털어버리고,
    • 새롭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립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3. 욥이 이렇듯 하나님을 직접 대면함으로써 →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물을 소재로 하여 끊임없이 욥에게 말씀하셨던 질문 공세와 설득이 있었기 때문이다.
    • 즉 제38-41장에서 전개된 욥을 향한 하나님의 그 많은 물음과 권면의 말씀들은 마침내 욥이 깨달은 바,
      • 하여금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용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 그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절대 순복하는 일만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하였다.
    • 즉 하나님의 선언은
      ⇒ 욥에게 정확한 신지식과 함께 근본적 인식의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다

(1)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과 목회자들의 훈계로써 좋은 교육을 받으며 하나님의 일들을 알게 됨은 크나큰 자비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는 것이고" 또한 그 믿음은 우리가 주의 깊게 그리고 "귀의 들음"으로써 경청할 때 가장 오기 쉬운 법이다.

(2) 우리의 오성이 은혜의 영에 의한 조명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우리가 이전에 알고 있던 지식보다 훨씬 능가하는데, 이는 시각적 설명에 의한 지식이 전문이나 일반 세평에 의한 논증보다 월등한 것과 같다. 인간의 가르침에 의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갈 1:16), 따라서 "우리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시키신다"(고후 3:18).

(3)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기의 말씀의 견책과 섭리의 책망을 통하여 자기 스스로를 그의 백성에게 아주 환히 나타내시기를 즐겨하신다. "내가 지금까지 고통을 받아 온 후에야, 내가 이제껏 내 과실에 대하여 훈계의 말씀을 들어 온 뒤에야 겨우 나는 내 눈으로 당신을 뵈옵나이다."

"매와 책망은 지혜를 주십니다. 주께서 시련하시어서 가르치는 자는 복있는 사람입니다."


💡 6절,

  • 앞선 2절은 욥이 하나님의 섬러와 절대 주권에 대한 새로워진 믿옴을 고백하는 내용이었다.
  • 그리고 3절은 욥이 무지한 말로 하나님의 뜻을 가리우고 교만하게도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행사에 대하여 확정적으로 말하였음을 고백하는 내용이었다.
  • 또한 이에 이어지는 4,5절은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들은 감동에 대한 고백과 하나님의 계속적인 교훈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 이러한 내용에 이어지는 본절은 욥의 진심어린 회개를 다루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욥의 직접적인 체험은 그로 하여금 온전히 자신을 부인하는 ‘회개'의 자리에 이르게 하였던 것이다

2. 욥은 자기의 참회 중에 스스로를 향해 눈을 돌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치 엄중히 생각하였으며, 그의 죄악에 대하여 비탄을 표명하였습니다(6절).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를 혐오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 욥의 자기 부인

  • “거두어들이고”의 (원형 ‘마아쓰) : ‘멸시하다, 가볍게 여기다, 거절하다’
  • 이렇듯 자기 스스로를 멸시하고 거절한다는 욥의 말은
    • 그가 지난 날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자기 기준에 근거를 두고 행동한 그 모든 일을 혐오하듯이 깊이 반성하고
    •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굳은 의지를 가졌음을 보여 준다.

→ 이것은 하나님을 만난 자가 경험하는 자기 부인이다.
→ 그리고 이러한 ‘자기 부인'은 ⇒ 곧바로 철저하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회개'로 이어지고 있다.

‘티끌과 재’

  • ‘비탄과 신음’, ‘회개’의 상징.

‘회개하나이다’

  • 원형 ‘나함’ : 문자적 의미 - ‘슬퍼하다, 애통하다’ ‘마음을 바꾸다, 의견을 뒤집다’
  • 원문으로 볼 때 이 단어에는
    • 과거에 대하여 크게 슬퍼하고 애통해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 자신의 생각과 마음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철저한 각성과 변화에 대한 결단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 

(1) 우리의 관심사는 우리가 깨달은 죄악에 대하여 깊이 겸손해야 할 것과, 아울러서 그 죄악들로 인하여 스스로에 대한 미온적이고도 피상적 불쾌감 정도에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회개할 만한 크나큰 범죄 행위를 저지르지 않은 선량인들까지라도 자만과 혈기와 심술 및 그들의 모든 성급하고도 무분별한 언사가 작용하고 표출되는데 대하여 영혼상으로나마 크게 고통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도 마음의 찔림을 받으며 비통함을 느껴야 한다. 원수가 충분히 낮추어 질 때까지는 평화가 불안전할 것이다.

(2) 경건한 후회는 외적인 표현을 통하여 참회가 잘되게 해준다. 욥은 티끌과 재 가운데서 통회하였다. 내적인 변화가 수반되지 않은 이런 행위는 다만 하나님을 조롱할 뿐이다.

그러나 영혼의 진지한 참회로부터 이런 행위가 우러나오는 경우에는 죄인들도 이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스스로에게는 치욕을 돌리고 또 타인들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 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전에는 욥의 고난이 그를 재에 덮이게 만들었으나(2:8  그는 "재 가운데 앉았다"), 이제는 그의 죄악이 그를 재 속으로 보냈다. 진정한 참회인들은 그들이 과거에 어떤 외적 고통 때문에 비탄하였든지 간에 그보다 못지 않게 그들의 죄악에 대해서도 심심한 비애를 느끼며, 마치 외아들이나 맏자식을 잃은 만큼 비통중에 지낸다. 그 이유는 그들이 고통 중에서 보다 자기의 죄 중에서 더 많은 악을 발견하게 되는 까닭에서이다.

(3) 자기 혐오는 언제나 참회의 진정한 반려자이다. 그들은 그들이 범한 악을 인하여 스스로 싫어하게 될 것이다(겔 6:9).

우리는 우리가 범죄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영혼에게 입힌 과실과 손상에 대해서 스스로 성내지 않으면 안 될 뿐만 아니라, 죄악을 인하여 우리 스스로를 순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미운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증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차마 불의를 바라 보실 수가 없으신 분이시다.

만약 죄악이 진실로 우리가 가증히 여기는 것이라면,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죄는 특별히 우리가 싫어하는 바가 될 것이다. 죄가 우리에게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 징그러운 존재가 될 것이다.

(4)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위험을 대면하면 할수록 우리는 죄의 비열함과 밉살스러움을 더 보게 되며, 죄악 때문에 우리 자신의 악함과 가증스러움 또한 더욱 더 알 수 있게 되고, 그로 인해 우리는 더욱 더 우리 스스로를 격하시키며 증오하게 될 것이다.

"이제 내 눈은 내가 노엽게 한 분이 어떤 하나님이신지 뵈옵고, 임의의 죄악으로써 내가 그 얼굴에 침을 뱉었던 그 존엄의 휘황찬란함을 바라보며, 내가 일축하였던 그 자비심의 부드러움을 바라봅니다. 이제 나는 내가 그 분노를 자초했던 그 분이 얼마나 공의로우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이신지를 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스스로를 증오하나이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 하나님은 욥에게 "교만한 자들을 발견해 내어 그들을 비하시키라"고 촉구하셨다(40:11, 12). "제가 그 일을 해 낸다고는 흉내조차 낼 수 없습니다. 다만 저는 제 자신의 교만한 마음을 꺾어 겸손하게 하며, 비천하게 하고, 낮추는 데는 충분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심령을 잘 지배하는 일만은 그의 은혜의 힘 안에서 우리의 본령으로 삼도록 하자.


3. 옥스퍼드 결론 : 그러면 본문에서 욥이 회개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 그러면 본문에서 욥이 회개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 그것은 분명 욥의 친구들이 도식적 인과응보의 틀을 가지고 지적하는 바 특정한 행위와 관련된 구체적 범죄가 아니다. 다시 말해 31장 전반에 걸쳐 스스로 단호하게 부정하였던 바 사회적, 도덕적, 윤리적 범죄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바 비통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한 내용은 무엇인가?

1. 먼저 고난에 처한 욥이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 취한 태도를 들 수 있다.

과거 욥은 의인이 고통 받고 악인이 번영하는 현실적 모순 상황과 관련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신의 고난에 대해 해명해 달라고 하나님께 항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욥의 태도는 인간적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욥이 한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 그것은 욥이 하나님께 그 자신의 고난의 이유를 물으며 항변하기 이전에,
  • 피조물로서 절대적 주권을 가진 하나님 앞에 절대 순복하는 자세를 가겨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욥은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이에 대해 항변하고 원망한 것이다.

  • 비록 그는 직접적으로 특정한 죄를 범하지는 않았지만,
  • 그의 자세는 결코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것이 아니었다.
  • 하나님께서 등장하셔서 그의 죄의 유무를 가리시거나 그의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지 언급하지 않으시고 다만 당신의 절대 주권과 위대하고 섬세한 섭리에 대해서만 선언하시며 열거하신 것도 이 때문이다.
  • 즉 욥으로 하여금 인생은 초월자요 창조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유한한 사고로 그분의 무한한 섭리를 판단하기 전에 그분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그저 거기에 순복해야 함을 교훈하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과 선포를 전해들은 욥은

⇒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 그분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다 하여 항변하며 원망했던 자신의 태도를 회개할 수밖에 없었다.

2. 다음으로 욥 자신이 행해 온 의로운 행위에 대해 그 스스로 집착했던 것을 들 수 있다.

욥은 하나님을 대면하기 전 자신의 도덕성과 의로운 삶을 상당히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과의 변론에서 자신이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도 지금까지의 행실에 대해 당당히 변백할 것이라고까지 말하였다.

⇒ 이러한 사실은 그의 변론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그의 번론 말미의 윤리적 삶에 대한 회상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제31장 한 장 전체에 걸쳐 계속되는 욥의 회상은,

  • 자신의 과거의 삶에 대한 솔직한 회상이며 고백이지만,
  • 지나치게 자신의 의를 강조한 것으로 들려질 소지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욥의 윤리적 삶에 대한 회상은 물론, 그가 이와 같은 극심한 고난을 당할 만큼 자신이 직접적으로 특정한 죄를 범치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것에 근거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로움을 증거하겠다고까지 한 것은 교만한 것이 아닐 수 없다(9:34, 35; 13:3; 31:35).

결국 욥은 하나님과 대면한 이후

  • 하나님의 무한한 섭리를 인간의 제한된 이성과 지식으로 함부로 판단한 자신의 태도가 얼마나 그릇된 것이며,
  • 자신이 내세웠던 도덕적•윤리적 삶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지를 확고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욥은 본문에서와 같이 티끌과 재 가운데서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교만함을 한하며 회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