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출애굽기 6, 누가복음 9, 욥기 23, 고린도전서 10
묵상구절
8: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8: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8: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8: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8: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8: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8: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매튜헨리/옥스퍼드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영광파 만물의 통치를 인간에게 위임하신 하나님의 은혜 찬양

☞본시는 시편 전체에 총 29편이나 나오는 감사 예배시 가운데 첫번째 시.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과 땅과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 곳에 펼쳐진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마음껏 찬양하며 이러한 자연을 인간에게 다스리도록 위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였다.
실로 다윗은 자연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고 그 가운데 인간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 확인하는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탁월한 시인이었다. 우리 역시 자연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권능과 영광을 발견하며 더 나아가 창조의 최고 걸작품인 인간의 본문인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찬양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는 복된 인생이 되어야 한다.
저술 배경
본시에는 저술 배경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본시 가운데는 하늘의 달과 별, 그러고 땅의 우양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 등 하나님의 다양한 창조물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다윗이 목동으로 생활하던 젊은 시절에 지었거나, 혹은 그 이후 그 시절을 회상하며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함 (시편 8:1,2)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하나님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드리고 있다. 하몬드(Hammond)박사는 이 시편의 표제를 그것이 지어지게 된 동기와 관련시켜 추측하고 있다. Gittith은 일반적으로 음율이나 혹은 악을 가르키는 것으로 여기에 맞추어 이 시편이 노래 되어졌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Gittith"를 "Gittite," 즉 싸움에 패하여 죽임을 당했던 "가드 사람 골리앗"(Goliath the Gittite) (삼상 17)으로 보고 있다. 그 대적은 자기에 비해 젖비린내 나는 갓난 아기에 불과한 다윗에 의해 잠잠케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만일 이와 똑같은 표제를 갖은 다른 두 시편을(81과 84) 발견하지만 않았다면 이러한 추정도 충분히 가능한 것으로 받아 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 ‘깃딧에 맞춘’
깃딧 : 본래 볼레셋 땅 가드에서 사용되던 악기의 이름이거나 가드풍의 군대 행진곡 리듬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
다윗은 여기에서 다음 두 가지 사실에 대해 감탄하고 있다.
Ⅰ. 하나님은 얼마나 명백하게 그의 영광을 스스로 나타내시는가(1절).

☞ ‘여호와 우리 주여’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비천한 인간을 만물 중에 존귀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본시는 성도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편 중 하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영화로움을 찬양하면서 가장 먼저 ‘여호와 우리 주'를 부른다. 이 호칭은 특별히 스스로 존재하셔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을 부각시키는 명칭이다.
‘여호와'
본질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의존하고 있는 것과 달리, 그분은 그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셔서 다른 것들을 존재하게 하시는 원인자가 되신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창조주이시다.
이러한 ‘여호와'란 신명(Siting)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의미를 함축한다.
이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찬양하는 본시 전체의 내용과도 긴밀한 연관을 지닌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 사역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
‘통치자', ‘주권자', ‘주인' → 즉 이 명칭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섬겨야 할 우주의 주인이심을 부각시킨다.
특히 다윗은 그분을 ‘나의 주여' 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 주여'라고 말함으로써
모든 인간이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을 자신의 주로 인정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왕적 측면을 강조한다.
그는 모든 겸손과 경외감을 갖고 주님이신, 그리고 그의 백성들의 주님이신 하나님께 스스로 아뢰고 있다. "여호와 우리 주여!"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가 우리의 것임을 주장하고 인정해야 한다. 그는 우리의 것이다. 그는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특별히 돌보신다. 그는 우리의 것임이 틀림 없으므로 우리는 그에게 복종하고 굴복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긍휼을 보여달라고 탄원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러 올 때뿐만 아니라,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그를 찬미하러 올 때에도 이러한 그 관계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 해본다면 우리는 결코 그에게 충분한 영광을 돌릴 수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1. 이 낮은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은 얼마나 찬란하게 빛나는가.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창조물들과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존재와 능력과 온전함의 근원이 되시며 최고의 통치자, 강력한 보호자, 모든 창조물의 너그러운 은인되시는 무한하신 존재자가 있음을 온 세상에 명시하고 선포한다. 온 땅에서 그의 이름은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혁혁하며 얼마나 장엄한가. 그 빛은 어느 곳에서나 사람의 얼굴에 비취인다(롬 1:20). 만일 그들이 그것에 대해 눈을 감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과실이다. 그 속에는 언어나 말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이 들리거나, 들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향하고 있다. 전에는 오직 이스라엘에서만 거룩한 계시에 의해 크게 알려졌던 하나님의 이름은 온 땅에 퍼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땅 끝까지 이처럼 "하나님의 크신 구원을 얻게" 되었다(막 16:15, 16).

☞ 본절에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과 그 영광을 찬양한다.
‘주의 이름이’
구약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너무나 신성시하여 그것을 말로 직접 표현하기를 꺼려할 정도였다. 다윗이 여기에서 찬양하고 있는 여호와의 이름은
그분 자신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의 계시를 나타내고 있다.
→즉 하나님 자신과 창조를 통해 나타내 보이신 그의 계시는
온 땅에 편만해 있고 하늘을 초월해 있어서,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이 모른 체 할 수 없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본절에서 다윗은 ‘주의 이름'과 ‘주의 영광'을 병행시켰을 뿐 아니라 ‘온 땅'과 ‘하늘 위’를 병행시켜 ⇒
주의 이름과 주의 영광이 온 땅과 하늘 위 등 천지 만물 가운데 편만하여 있음을 - 감격에 겨워 노래하고 있다.
즉 그는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자연 만물을 통해 거기 구현된
하나님의 영광스러움과
탁월한 능력,
그분의 통치와 섭리를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지요’(앗디르)
단어 ‘앗디르'는 본래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삿 5:13; 대하 23:20).
→ 이는 주의 이름의 장엄하고 영광스러움이 그분이 창조하신 세상 만물 가운데 명백히 나타나 있음을 반영한 표현이다.
2. 저 위 세상에서 그것은 얼마나 더욱 찬란하게 비취일 것인가.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이 표현은 시인이 하나님이 만드신 궁창의 해와 달, 그러고 하늘에 운행하는 모든 벌들을 보고 그 모든 것 위에 새겨진 하나님의 영광을 찬탄하는 것.
이처럼 시인이 천지 창조를 연상시키는 듯한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점에서 이는 천지 창조가 기록된 창세기 제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 선언에 대한 인간의 화답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창세기 제 1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하나님의 피조물의 으뜯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과 대비되어,
여기서는 광대한 우주 속에서 지극히 작은 존재인 사람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이처럼 본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노래한다는 점에서 감사 예배시로 분류된다.
그리고 학자들은 이 시가 성전 예배나 장막절과 같은 절기에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는 찬양으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초대 교회 당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기념일에 불러위졌다고 견해진다.
☞ 본시의 성격
이처럼 본시는 감사 예배시적 요소가 있으며 실제로 감사 예배시로 사용되었지만 그 내용으로 보아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시로서의 성격도 지닌다.
또한 신약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본시의 내용을 메시야의 사역과 연관시킨다는 점에서(히2:6-9) → 메시야 예언시로서의 성격도 지닌다.
→ 이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며,
→ 태초에 이루신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는 ↔ 메시야를 통한 인간 구원과 그로 인한 재창조의 역사(고후 5:17; 계 21:5)와 긴밀한 관련을 지닌다는 점에 기언한 것이다.
이 면에서 본시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과 그의 자비,
이에 근거한 창조와 구원 사역을 망라하여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 하나님은 가장 고귀한 피조물들이나 매우 찬란하게 빛나는 것들보다도 더욱 무한히 영화로우시며 뛰어나시다.
(2) 땅 위에 있는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뛰어난 이름을 듣기만 하고 찬미하는 반면에, 위에 있는 천사들과 축복받은 영들은 그의 영광을 보며 그것을 찬미한다. 그러할지라도 그는 그들의 송축과 찬미보다 무한히 높이 계시다.
(3)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버지의 영광을 찬란하게 하고 그의 인격의 형성을 표현하신 주 예수를 하나님 우편에 높이 두심으로써 하늘 위에, 모든 주권과 권세보다 매우 높은 곳에 그의 영광을 두셨다.
Ⅱ. 그는 그의 가장 연약한 피조물에 의해 얼마나 강력하게 그것을 선포하시는가(2절).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이암아 권능을 세우셨다." 또는 그 찬미를 온전케 하셨다(마 21:16).

☞ 8: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본절의 두 부류의 사람
1.주의 대적 : ‘당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자들’
2.어린아이와 젖먹이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주의 대적’ : 사방을 에워쌈으로써 괴롭게 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
본문에서 이들은 온 세계 가운데 자명하게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오히려 대적하는 완악한 자들을 지칭.
이들은 스스로에 대하여 강하고 힘있다고 생각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들이다.
다윗은 이들을 어린아이와 젖먹이에 대조시키고 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
약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자들을 지칭.
그런데 이처럼 연약한 자들이 주님의 권능을 칭송하는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는 자의 오만함을 깨뜨린다고 다윗은 찬양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힘만 믿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던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소년의 몸으로 물리친 다윗 개인의 경험과도 관련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삼상 17장).
다윗이 물맷돌만을 가지고 나아가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틈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삼상 17:45-47)고 외치며
—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이 바로 본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원수와 보수자를 잠잠케한 실례가 되는 것이다.
본절에 나오는 다윗의 이 말은 후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실 때 - 주를 찬양하는 아이들을 비난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면서도 사용된 바 있다(마 21:16).
이런 점들을 통하여 본절의 ‘어린아이'와 ’젖먹이'는
표면적으로는 : 나이 어린 아이들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이면적으로는 : 자신을 낮출 즐 아는 겸손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마11:25; 고전 1:27).
실로 주의 권능을 찬양할 수 있는 자는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심정을 가지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이다.
그리고 이들의 찬양은 - 교만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힘을 지닌다.
1. 이것은 자연의 왕국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시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어린 아이를(그들이 어떤 동물들 보다도 가장 무력한 상태로 이 세상에 처음왔을 때)돌보시는 하나님의 배려, 그들이 받는 특별한 보호, 그리고 자연이 그들에게 주는 혜택 등을 우리 각자는 그의 능력과 선하심을 보여 주는 큰 예로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은혜를 입고 있는 우리는 더욱 예민하게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않도록 무릎이 우리를 받았고, "우리로 유방을 빨게 한" 혜택을 우리가 입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주의 영광에 대한 대적자들을 영원히 잠잠케 만들 수 있는 주의 선하심의 일례입니다."
2. 섭리의 왕국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시사하고 있다.
이 낮은 세상을 통치함에 있어서 그는 사람의 자손들, 곧 그를 아는 자들과 알지 못하는 자들(사 45:4), 그리고 어린 아이와 젖먹였었던 자들을 사용하신다. 아니, 그는 때로 지혜와 힘이 약한 자,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 보다도 더 나을 것이 없는 자들을 종으로 쓰시어 그의 목적을 돕도록 하시는 것을 기뻐하신다.
3. 또한 은혜의 왕국, 메시야의 왕국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시사하고 있다.
어린 아이에 불과한 자로서, "본래 학문이 없는 범인(凡人)"으로서(행 4:13),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자로서 간주되어졌던 사도들과 그들의 어리석은 가르침에 의해, 여리고 성벽이 나팔소리에 무너진 것처럼 마귀의 왕국이 무너질 것이라고 여기에 예언되어 있다.
복음은 "여호와의 팔," "그의 힘의 막대기"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것은 이적을 행하도록 규정되었다. 이 복음은 철학자나 웅변가, 정치가나 정객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매우 극단적인 역경 속에 놓여 있는 초라한 어부를 무리의 입을 통해 나온 것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고 그를 멸시하며 거절했을 때 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외치는 것을 듣는다. 그러므로 우리 구세주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시어(마 21:16) 그의 대적들을 잠잠케 했다.
때로 하나님의 영광은 어린 아이들 속에서 놀라웁게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금방 젖을 떼고 품에서 떨어진" 그러한 자들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신다"(사 28:9). 하나님의 능력은 때로 매우 보잘 것 없고 마땅치 않은 도구들로 하여금 그의 교회에 큰 일을 행하도록 하며, 세상의 비천하고 약하고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귀하고 지혜있고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그것은 어떠한 인간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고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온 그 능력의 뛰어남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도록 하기 위함이다(고전 1:27, 28). 그의 "대적들로 인해," 즉 그들이 무례하고 오만하기 때문에 그들을 조용히 만들고 침묵을 지키고 부끄러워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행하신다. 그렇게 함으로서 복수자 위에 정당한 보복이 내려지는 것이다(행 4:14; 6:10 참조). 마귀는 큰 대적이며 복수자이다. 그러나 복음이 전파됨으로써 그는 매우 조용해졌으며 그의 연설은 잠잠해졌다. 그리고 그의 대변자들은 부끄러워했고 정결치 못한 영들은 말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을 노래함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께 그이 위대하신 이름에 대한 영광을 돌리도록 하자.
그리고 높이 들리심을 받은 구속자께서 병거에 오르시어 승리하시기 위해 병거에 타셨을 때, 그의 복음의 능력으로 그가 행하신 그 위대한 일들에 대한 영광을 돌리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찬미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장 큰 소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힘이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부터 나오도록 명령될 때 찬미는 온전케 되는 것이다(즉 하나님은 가장 지고하게 영광 받으신다).
●하나님의 겸양 (시편 8:3-9)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특히 인간 그리스도 예수를 영화롭게 하신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여기에서 계속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고 있다. 거룩한 은혜의 겸양은 거룩한 영광의 높임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찬미해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친절하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셨는가를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놀라움과 감사함을 품고 관찰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Ⅰ. 그로 인하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겸손한 은총을 사모하도록 인도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전체의 광채와 영향력에 대한 통칠이었다(3절). "주의 하늘"과, 특히 그 속의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옵니다."
그러나 그는 왜 그 모든 것을 능가하는 해는 보지 않는가? 아마도 그것은 그가 해가 사라지고 오직 달과 별들만이 있었던 밤에 달빛 속을 걸으면서 묵상하기를 즐겼고 그 속에서 그 스스로를 가르쳤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것들이 모두 해처럼 그렇게 유용하지는 못하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창조주의 지혜와 권능과 선하심을 해에 못지않게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다음을 살펴보자.
1. 하늘을 주시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다. 볼 수 밖에 없다. 여러 가지 사실 가운데서 이러한 점에 의해 사람은 동물과 구별된다. 즉 그것들은 몸의 구조가 땅을 내려다 보도록 만들어졌으나 사람은 하늘을 향해 올려다 볼 수 있도록 세워져 있다. Os homini sublme dedit, coelumque tueri jussit- 즉 "인간에게 그는 직립한 얼굴을 주셨으며, 하늘을 응시하도록 명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이 위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도록 하셨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가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2. 우리는 항상 하늘을 하나님의 하늘로 생각해야 한다.
즉 이 세상 모든 것, 심지어 땅과 그 위의 모든 것조차도 그의 것으로 여겨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특별하게 여겨야 한다.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다"(115:16). 그 곳은 그의 영광이 거하는 곳이며 우리는 그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해야 한다.
3. 하늘은 그의 손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그의 것이다.
그는 그것을 만드셨고, 그것을 쉽게 만드셨다. 하늘을 펼치실 때 그는 팔을 펴실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주의 손가락"만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매우 진지하고 훌륭하게 예술가가 손으로 만든 훌륭한 작품처럼 그것을 만드셨다.

☞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직역하면, ‘당신의 손가락의 작품’
손가락 = 하나님의 창조의 권능을 상징.
작품 = 하나님의 사역의 결과물.
⇒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은 당신의 권능과 영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현시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작품에 빗댈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얼마나 섬세하게 이루어졌는지를 나타낸다.
이 천체들(heavenly bodies)은 → 그것을 보는 인간으로 하여금 놀라움과 탄성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것들인데, 다윗은 바로 그토록 광대한 우주와 헤아릴 수 없어 많은 천체를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지으셨다고 노래한다.
이처럼 크신 영광과 위엄,능력을 지니시고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비천한 인간에게 특별한 관심을 지니사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은,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보오니’
다윗은 어느 날 밤하늘을 우러러보았을 것어다. 거기에는 밝게 빛나는 별들이 하늘을 수놓고 있을 뿐 아니라 환하게 버추이는 달이 조용하게 하늘에 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천체들을 유심히 보면서 다윗은
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미천하기 짝이 없는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큰 은총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와 감격에 북받쳐
하나님의 영광스러움과 은혜로우심을 찬양하게 되었던 것이다.
4. 좀 열등한 빛들, 곧 달과 별들까지도 하나님 빛의 영광과 권능을 나타내며, 우리에게 찬미의 일을 부여한다.
5. 천체는 거룩한 권능의 창조물일 뿐만 아니라 그 거룩한 통치에 의해 다스려진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베푸셨다." 그러한 하늘의 법도는 결코 변경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찬미하기 위한 이러한 것이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가?
(1) 윗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빛나는 가를 생각할 때에, 즉 우리가 그가 인간처럼 천한 창조물을 인지하신다는 사실과 가장 빛나고 축복된 창조물 속에 거하시는 그가 스스로를 낮추시어 이 세상에서 행해지고 있는 일들을 바라보신다는 사실에 매우 경탄하게 될 것이다(113:5, 6 참조).
(2) 하늘이 땅 위에 있는 사람에게 얼마나 유익하며, 어떻게 하늘의 빛들이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되었는가를 생각할 때(신 4:19; 창 1:15), 우리는 당연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여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그와 그의 유익을 위해 하늘을 베푸셨으며, 하늘의 빛을 만드시고 그 운행을 명하시어 그를 즐겁고 편하게 하셨나이까!" (4절)
Ⅱ. 그는 어떻게 그 경탄을 표현하고 있는가?(4절)
"주여 사람이(주를 잊어 버리고 주에 대한 의무를 잊을 정도로 사악하고 연약하며 비참한 사람이)무엇이관대 주께서 이처럼 저를 생각하시며 그와 그의 행동과 일들을 인지하시고 세상을 지으실 때 그를 존중하셨나이까!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자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먹이시고 입히시며, 저를 다른 창조물들과 같게 보호하시고 부양하실 뿐만 아니라, 친구를 방문하시듯 저를 찾으시어 그와 더불어 교제하시고 관심을 기울이기를 기뻐하시나이까! 사람이(이처럼 비천한 창조물이) 대면하시고 총애하시나이까!"

다윗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관심을 감동적으로 노래한다.
☞ 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사람(에노쉬)
이 단어는 사람을 나타내는 여러 히브리어 중에서도, 특히 연약하고 유한한 인간의 특성을 강조할 때 쓰이는 단어이다.
우주는 창조된 이래로 그 찬란한 빛을 지속적으로 발하고 있지만, 인간은 칠, 팔십이 되면 유명을 달리헤야 하는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인간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다.
인자(뺀 아담)
아담 : ‘붉다’란 의미.
‘붉다'란 뜻에서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가 나온 것은 사람이 붉은 흙에서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자' 즉 ‘뺀 아담' 역시 흙으로 만들어졌으며 장차 죽어 티끌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즉 본절에서 다윗은 거듭 인간의 연약함을 나타내는 단어를 사용하여 인간의 한계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신약 성경 히브리서에서는 본시의 ‘사람', ‘인자'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킨다(히 2:6-9).
즉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사실을 묘사하면서 이 표현이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구약 시대 당시 다윗이 본시를 쓰면서 장차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고 4-6절을 기록했다고는 볼 수 없다. 다만 계시의 점진적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본시를 메시야적 예언시로 해석했다고 볼 수 있다.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사랑
‘생각하다’
원형 ‘자카르’ :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미완료형) 인간은 하나님을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인간을 잊지 않고 항상 기억하신다.
‘권고하다’
어려움에 처한 자기 백성을 찾아와 돌보신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동사.
(미완료형) 여기서도 하나님의 그러한 돌보심이 계속됨을 표현한다.
그리고 특히 이 단어에는 [자기 백성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낮추시는 (condescending) 하나님의 겸손함]이 담겨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
하나님의 뜻을 총족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줄곧 그를 거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찾아와 위로하시고 돌보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다.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광대하심을 찬양
이를 앞선 3절과 비교하면 그 의미가 확연히 드러난다.
즉 하나님은 그 손가락만으로 온 우주를 창조하신 크고 위대한 분이다.
↔ 반면 인간은 이 광대한 우주 가운데 그 존재조차 찾기 힘든 먼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을 기억하시며 돌보신다는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은혜'라는 말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능력과 위엄에 있어서만 광대하신 분이 아니라 그 은혜로우심에 있어서도 광대하고 놀라우신 분이다.
따라서 시인은 이에 탄복하며 본절에서와 같이 도무지 자신으로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광대하심을 헤아릴 수 없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 이것은 일반적인 인간을 가르키고 있다. 비록 인간이 벌레이고 인자가 구더기일지라도(욥 25:6) 하나님께서는 그를 존중하시며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신다. 사람은 이 아래 세상의 모든 창조물들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이 총아이며 귀염둥이이다. (5절)

☞ 8: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본절은 인간의 존엄함을 나타낸다.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창세기에 나타난 창조 기사에 따르면(창 1:26-28)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당신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당신의 속성을 반영하는 존재로 살도록 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인간의 위치가 피조물들 중에서 특별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1) 인간은 매우 영예로운 부류의 존재에 속한다.
우리는 사람이 이 낮은 세상에 거하는 만물 중에 제일 웃자리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정말조금 못하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몸을 통해 부서져 버리는 땅이나 짐승들과 관련되어 있을지라도, 영적이고 영원한 그의 영혼에 의해 그는 그 거룩한 천사들과 매우 가까운다. 따라서 실지로 그는 단지 "천사보다 조금 못할"뿐이라고 말할 수 있고, 또 순위로는 그 다음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의 위대한 영혼이 흙으로 된 집에 갇혀있는 동안에는 단지 천사들보다 조금 못할 뿐이나 부활의 자녀들은 "천사와 동등"하게 되어(눅 20:36) 더 이상 그들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
(2) 그는 귀한 자격과 능력을 부여받는다.
'주께서 저를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그의 존재를 부여하시는 그가 저를 구별하시며 열등한 창조물들을 지배할 권한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지혜 주시기를 땅의 짐승과 공중의 새에게 주심보다 더하게 주시어(욥 35:11) 저로 그들을 다스리기에 합당하게 만드셨다. 그들은 인간에게 다스림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 인간의 이성(理性)은 그의 영광의 면류관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소홀하게 사용함으로써 그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나타내는 단어를 인간에게 적용시켜
→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가치를 극상시킬 뿐 아니라,
미완료형 동사를 사용함으로
→ 하나님은 세초부터 세말까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위치를 잃지 않도록 항상 지켜 주시고 계심을 묘사한다.
이러한 본문의 표현은 -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극진한 관심과 배려를 서술한 4절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3) 인간은 하나님 아래서 자기보다 열등한 창조물들을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 받았고 그들의 주인으로 선정되었다. 그들을 만드시고 그들을 아시며 그들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이 "저로 그들을 다스리게"하셨다(6절).
인간이 창조되던 그날에 그는 이러한 권한을 갖게 되는 특허장을 지녔고(창 1:28) 그것은 노아의 홍수 후에 갱신되었다(창 9:2). 하나님은 만물을 사람의 발 아래 두시어 스스로 자급자족하게 하셨다. 즉 노동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열등한 창조물의 소산물과 생명에 의해서도 필요한 물건을 얻도록 하셨다. 그들은 모두 그이 손에 양보되었다. 아니, 그들은 모두 "그의 발아래 두어졌다."
그는 몇 가지의 하등 동물들을 열거하고 있다(7,8절).
즉 사람들이 돌보고 양육하는 우양뿐만 아니라 들짐승도, 그리고 인간 활동 범주가 다른 곳에 사는 "공중의 새"와 보이지 않게 지나가는 "바다의 어족"을 열거하고 있다.

☞ 본절에서
‘우양' : 특히 사람들이 길들여 이용하는 가축들을 가리키며,
‘들짐승’ : 야생동물들을 가리킨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마지막 날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축복하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것을 명하셨다.
뿐만 아니라 땅을 정복하고 바다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창 1:28).
7-8절에서 다윗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측복과 명령을 상기하면서 대자연을 인간에게 위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것들을 잡을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다. 그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사람보다 더욱 강하거나 더욱 날렵할지라도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는 그들을 지배한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버러지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다"(약 3:7). 그는 또한 필요한 경우에 그것들을 사용할 자유를 갖고 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행 10:13). 우리는 생선이나 새고기를 식사할 때마다,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것에 대한 사람의 주권을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우리의 우두머리 되시는 주님께 복종해야 하고 그의 다스리심에 복종해야 하는 이유이다.

☞ 9절,
다윗은 본시의 첫머리를 이와 동일한 문구로 시작하고, 마감구 역시 동일한 문구로 맺고 있다.
이러한 수미쌍관식 구조를 통해 다윗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이 하나님의 행사 앞에 가져야 할 자세와 삶은 하나님의 역사와 그 이름의 아름다움을 묵상하며 이를 송축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홀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천지 만물에 대한 당신의 대리 통치자로 세우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단독적이고도 경이로운 행사 앞에
— 시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경탄에 마지않으며 하나님의 놀람고 아름다운 이름을 송축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러나 이것은 특별한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그에 관한 설명을 히브리서(2:6-8)에서 읽을 수 있다.
거기에서 사도 바율은 하늘과 땅에 대한 그리이스의 통치권을 증명하기 위해 그가 바로 그 사람임을, 인자임을, 즉 여기에 쓰여진 대로 하나님께서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고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신" 자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인류에게 보여 준 것 중에서 가장 큰 은총과 인간성에 부여된 가장 큰 영예가 주 예수의 성육신과 높이 들리심 속에서 예증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창조와 섭리로써 우리에게 베풀어진 은총과 영화는 매우 큰 것이고 우리가 받을 만한 것보다 더욱 많은 것이긴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높이 들리심은 그러한 것들을 크게 능가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 속에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평가하고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모해야 하는 것이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성품을 취하시고 그 속에서 그 스스로를 낮추셨다.
그는 "인자"를 곧 육체와 피를 취하신 자가 되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권고하셨는데 어떤 사람은 이것을 그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일에 적용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죽음의 고난을," 진노의 권고를 "받으심을 인하여 그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고 일컬어지기 때문이다(히 2:9) 하나님은 그를 권고하셨다. 즉 그에게 우리의 모든 죄악을 씌우신 후에 그를 죄인으로 간주하시어 막대기와 회초리로 그를 권면하셨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고침을 받을 수 있게 했다. 그는 "잠간 동안"(그 사도는 그것을 그렇게 풀이하고 있다)천사들보다 못하게 되시어 종의 형체를 취하셨고 자리를 비워 놓으셨다.
(2) 이러한 성품 속에서 그는 높이 들리우시어 모든 것의 주님이 되셨다.
그가 자기를 낮추셨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높으셨고 "영화와 존귀로." 즉 세상이 있기 전에 그가 갖고 계셨던 그 영화로 관을 씌우셨다. 그리고 그를 그의 우편에 두셨고 그로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것들을 다스리게"하셨다. 또한 만물을 그의 손에 주셨고, 은혜의 왕국과 관련을 맺고 또 그것에 종속되어 섭리의 왕국을 통치하시도록 그에게 위임하셨다.
모든 피조물이 그의 발 아래 있다. 그리고 그가 육신을 입으신 날에도 그는 바람과 바다를 명하시고, 물고기로 찬미를 받으셨을 때와 같이 그들에 대한 그이 여러 가지 권능을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훌륭한 이유와 함께 시편 기자는 그가 시작했을 때와 같은 구절로 이 시편을 이렇게 끝내고 있다.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구속자가 계심으로 인하여 주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었고, 그것은 그의 복음으로 인해 여전히 밝혀지고 있으며 그의 지혜와 권능으로써 다스려지고 있다.
이것을 노래하고 간구함에 있어서 우리는 특히 그 열등한 피조물이 우리에게 주는 유용함 속에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을 참된 마음으로 인정하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주 예수가 우리의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우리 주님으로서 그에게 복종하며, 만물이 그 아래 있고 모든 그의 대적들이 그의 발 아래 엎드림을 볼 때까지 기다림으로써 우리는 특별히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