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출애굽기 19, 누가복음 22, 욥기 37, 고린도후서 7
묵상구절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3: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매튜헨리/옥스퍼드
서론
💡 서론
저술 배경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본시의 표제가 독립되어 있으나 원문에서는 1절의 일부로 나와 있다. 시편의 표제에는 일반적으로 저자, 연주 방식이나 사용된 악기, 저술의 시기나 배경 등이 언급되고 있으나 본시의 표제에는 단지 저자만이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본시가 다윗에 의해 지어진 것은 분명하나 언제 어떤 배경하에서 지어졌는 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 견해1: 본시 전반에 나타나는 평화로운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윗의 왕권이 확고하게 수립되고 주변 나라들과의 전쟁도 그친 다윗의 생애 후반기의 어느 평화로운 시기에 다윗이 과거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감사하여 지은 시라고 본다.
- 견해2: 혹자는 5절에 나오는 ‘원수'라는 표현과 6절에 나오는 주의 선한 인도와 여호와 집에 영원히 거하고자 하는 염원으로 보아 다윗이 고난에 처한 때, 특히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하여 여호와의 성소가 있는 예루살렘에서 떠나 있을 때 지은 시로 보기도 한다.
- 주요 견해:
- 그러나 본시 전반에 흐르는 잔잔한 논조와 평화로운 목가적 이미지, 그리고 축제의 이미지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급한 상황에서는 나오기 어려울 것이란 점에서 전자의 견해가 더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 즉 본시는 다윗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고난과 투쟁의 시절을 다 보내고 평화를 구가하던 만년에 푸른 초장과 맑은 물가로 양둘을 인도하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이를 인생의 목자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을 확신하는 노래로 승화시킨 것으로 보여진다.
본시 분류
한편 본시는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다윗의 굳은 확신으로(6절) 종결된다는 점에서 확신의 시로 분류되기도 하고, 승리의 측제에 대한 5절의 묘사로 인하여 감사의 시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러나 본시는 목자이신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축복을 고백하는 찬양시로 분류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이는 본시 전반에 걸쳐 과거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1-4절) 현재적 은혜 (5절), 그리고 미래의 임할 은혜(6절)까지 확신하며 그 은혜의 수여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본시의 특징 (심상/다윗의 마음)
이러한 본시에는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와 같은 전원적 이미지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산악의 이미지 그리고 원수 앞에서 상을 받는 법정과 축제의 이미지가 어우러져 있다. 그런가 하면 목자이신 하나님외 인도로 풍성한 꼴과 맑은 시내가 있는 곳에서 평화롭게 쉬는 정적 이미지, 의의 길로 인도함 받으며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하며 주의 지광이와 막대기로 안위받는 동적 이미지가 어우러져 있기도 하다.
이러한 본시는 실제 양을 처며 양육했던 다윗의 목동으로서의 삶의 경험과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그분의 자상하고도 완전한 보호를 받으며 안위를 누렸던 신앙적 경험이 바탕이 되어 작시된 것이다.
특별히 본시는 6절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임에도 불구하고 시편 가운데서도 백미로 꼽히며 시•공간을 초월하여 많온 득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애송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가 이처럼 특별한 위치를 점하며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 그것은 먼저 하나님과 시인 자신,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를 더할 나위 없이 친밀감 있게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 아울러 신앙 생활에서 너무나 절실하며 중요하지만 종종 너무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구원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문제를 너무나 평이하고 실제적이며 구체적인 이미지틀 내포하는 용어로 표현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추상적인 주제와 구체적인 소재의 결함을 통해 본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구원하심이 어떤 것인지를 독자의 가슴에 와닿도록 명약관화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문학적 특징
마지막으로 본시는 문학적인 측면에서도 심오한 깊이를 지닌다. 즉 본시는 짧은 만큼 각각의 문장파 문장 안에 포함된 표현들 가운데 깊은 의미가 압축되어 었다. 또 본시는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여호와의 집으로 그 배경이 역동적이면서도 스피디하게 변화한다.
그러나 이들 각각의 표현들은 개별적으로 분러되지 않고 본시 전체 6절 안에서 완벽한 조화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본시는 그야말로 시편 전체 150편 가운데서, 그리고 성경 전체의 많은 부분 가운데서도 가장 많이 애송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거룩한 목자 (시편 23:1-6)
다윗은 이 시편에서 세 가지의 매우 위안을 주는 전제로부터 세 가지의 매우 즐거운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으며, 우리도 역시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소망에 의해 구원을 얻으며 그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소망은 굳건한 토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주 하나님 안에서 격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와 우리와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그리고 그 관계에 따라 우리가 체험한 그의 선하심 속에서 위로를 얻도록 지시 받고 있다.
1-4절: 목자이신 여호와 안에서 양인 성도가 누릴 복락을 노래함
Ⅰ.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목자이시므로 그에게 유익한 어느 것도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추론하고 있다(1절).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라.
1.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크게 돌보신다.
그는 그들의 목자이시며, 그들은 그를 그렇게 부를 수 있다. 다윗 자신이 목자였던 때가 있었다. 그는 젖양을 지키는 중에서 택함을 받았었다(78:70, 71). 그러므로 선한 목자가 그의 양떼들에게 갖는 자상한 관심과 돌보심을 경험으로써 알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얼마나 목자가 필요한가 그리고 노련하고 성실한 목자가 그들에게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를 회고했다.
그 목자는 한때 한 마리의 양을 구하기 위해 그의 생명을 내건 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에 의해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돌보심을 예증하고 있다. 우리 구세주께서 "나는 양들의 선한 목자라"(요 10:11) 하고 말씀하신 것은 이것을 언급하는 것 같다. 이스라엘의 목자이신(80:1), 보편적으로 온 교회의 목자이신 그는 믿는 자들 개개인의 목사이시다. 그는 가장 보잘것 없는 자라도 경히 여기지 않으신다(사 40:11). 그는 그들을 품에 안으시고, 양떼를 지키는 목자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주의 깊고 꾸준하게 돌보시고 보호하시며 공급해 주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목자와 같으시다면 우리는 양들처럼 순종하고 온순해야 한다. 양털깎는 사람 앞에서처럼 조용해야 하며, 또 도살자 앞에서처럼 유순하고 잘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목자의 음성을 알고 그를 따라야 한다.
💡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예흐와 로이’)
- 본시가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다윗 자신을 양으로 전제하여 -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과 절대 신뢰를 노래하는 시임을 함축적으로 전달한다. 이렇게 여호와를 목자로 사람을 양으로 비유한 예는 본문 외에도 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78:52 ; 80:1; 사 40:11; 렘 31:10; 겔 34:11).
- 그리고 이러한 비유는 대다수가 유목민으로서 삶을 살아왔던 본시의 일차 독자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
-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선택하셔서 언약을 맺으셨으며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면모를 강조하여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는 신명이다.
- 즉, 본시의 저자인 다윗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관련하여 부르는 신앙 고백적인 의미가 내포된 신명이었다.
따라서 다윗이 서두에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어름을 부르는 것은
- 자기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험악한 세파 속에서 구원하시고 거룩한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 바로
→ 자신을 신정왕국의 왕으로 선택하시고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여호와이심을 고백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의 목자’ - 하나님의 속성을 풍성히 고백함.
‘목자' 라는 말에는
- 여호와께서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목자가 앙을 돌보고 먹이듯이 양육하신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 더 나아가 이러한 의미 속에는 인간이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자연의 여러 가지 혜택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기도 하다.
이 단어의 의미 속에 내포된 ‘다스리다’ 라는 개념에 전제된 사실
- 양은 자신을 돌보고 양육하는 목자에 대해 절대적으로 따르고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 실제적으로 고대 근동의 목축 현장에서 양이 목자를 따르지 않을 때
→ 그 양은- 바로 사나운 맹수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처참하게 죽게되든지
- 길을 잃고 유리방황하다 뜨거운 광야에서 기진해 죽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었다.
- 실제적으로 고대 근동의 목축 현장에서 양이 목자를 따르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다스리신다는 것은
- 목자가 양을 다스리는 것같이 바로 자기 백성을 사자나 곰보다 더 무섭고 잔인한 이 험악한 세상에서 지켜주시고 복된 것으로 층족하게 채워주신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과 그 백성,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를
→ 목자와 양 사이에 설정되어 있는
- 사랑과 믿음,
- 다스림과 순종의 관계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의 표현은 하나님의 1)자애로우심과 2)은혜로우심, 3)주되심을 너무나 쉽고도 분명하게, 그러면서 풍성하게 전달해 주고 있다.
2.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 커다란 신뢰를 갖고 있다.
"만일 주님이 나의 목자, 나를 먹이시는 자라면 나는 내게 정말 필요하고 유익한 것은 그 어느 것도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단정할 수 있다."
만일 다윗이 이 시편을 그가 면류관을 얻기 전에 지었다면, 비록 그것이 그에게 예정되어 있었을지라도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부족함을 두려워할 만한 이유를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한때 그는 나발에게 청을 하러 그의 사람을 보냈었고 또 어느 때는 그 자신이 직접 아히멜렉에게 다시 요청을 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목자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그는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자기들을 먹이시는 자로 삼는 자들은 굶어죽을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표현에는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라"라는 뜻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뜻도 내포되어 있다.
"나는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공급받을 것이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나는 그것이 내게 합당치 않거나 유익하지 않다고 또는 합당한 때에 그것을 갖게 되리라고 단정할 수 있다."
💡 한때 목동 생활을 하였던 다윗은 양들이 목자의 인도와 돌봄으로 인하여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르고 순종할 때에 모든 것에서 풍족한 삶을 살게 되었음을 목자와 양의 관계에 비유하여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 본문은 ‘미완료형’ 으로
- 여호와를 목자로 하여 따를 때 부족함이 없이 충족하며 넉넉한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 본문에서 말하는 바는 어떤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것인가?
이는 단순히 자신을 목자라고 고백하는 다윗의 삶 가운데 평온함이 지속될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 사용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 ‘해(총)' , ‘내 원수의 목전'이란 표현들에서 알 수 있듯이 부정적이고 고통스런 상황 등을 배제할 수 없다.
-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이 완벽하며 충족할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 즉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 하나님께서는 시인 자신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선한 목자와 같이 그의 영혼과 삶을 지키셔서
- 필경 ‘의의 길'로 인도하사
- ‘목자' 이신 ‘여호와의 집 ' 에 영원히 거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목자의 인도를 따라가는 길에서
- 양들은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를 만난다.
- 간혹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기도 하지만, 목자는
- 강한 손으로 양을 넉넉히 건지고 보호할 뿐 아니라
- 궁극적으로는 풍성한 상을 베풀며 영원한 축복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한편 이처럼 양의 풍족함이 목자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 인간은 목자이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만족한 삶을 누릴 수 없다.
- 이러한 사실을 주님께서도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는 말씀을 통하여 명시적으로 확인시켜 주고 계신다. - 따라서 인간은 그가 가진 권세나 명예, 부요함에서 진정한 만족을 찾을 수 없다.
- 그러한 것들은 인간에게 일시적인 기쁨과 풍요를 누리게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결국에는 사라지고 말 허무하며 덧없는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알고 있던 다윗은 자신이 지은 또 다른 시에서 본문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다시 반복하고 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34:9.10).
울창한 수풀이나 바위틈에 웅크리며 노략물을 향해 달려드는 혈기 왕성한 젊은 사자가 궁핍해지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맹수들이 설혹 주리는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충만케 하심, 보호하심으로 인해 영원히 만족하는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Ⅱ.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선한 목자로서의 직책을 이행하신 것으로부터 그는 그가 당하게 될 큰 위험이나 어려움에 대해 어떤 두려움도 느낄 필요가 없음을 추론하고 있다(2-4절).
그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어 돌보아 주시는 이로움을 체험하고 있으므로,
그가 그 유익을 매우 필요로 할 때 그것을 또한 얻으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다음을 살펴보자.
1. 살아 있는 성도들이 얻는 위로.
하나님은 그의 목자이시며 하나님은 모든 의도와 목적을 충족히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러하심을 발견했으며 우리도 그래야 한다. 하나님의 초장에 있는 양들과 같은 성도들의 행복을 보라.
(1) 그들은 좋은 곳에 안치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도다."
💡 ‘푸른 초장'
- 푸른 초장은 단순히 양이 먹을 수 있는 풀이 많이 나 있는 녹지대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 이는 거주할 수 있는 곳, 즉 광야의 뜨거운 햇빛을 피하여 쉴 수 있는 그늘진 곳도 포함하는 이상적인 목초지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
- 거친 광야와 험한 산지가 대부분인 팔레스틴에서 - 이러한 목초지는 풍요와 안식을 상징하기에 충분하였다.
‘그가 나를 .. 누이시며’
- ‘눕다, ‘엎드리다’ ⇒ 이는 양들이 푸른 목초지에서 배불리 먹고 그곳에 누워 평화로이 쉴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자연스레 연상케 한다.
- 다윗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안식’이 얼마나 완전한 것인지를 선명하고도 아름답게 나타내주고 있다.
- 즉 목자가 앙을 푸른 초장에 인도하고 그 양들이 원하는 대로 풀을 뜯고 평안히 쉬는 것과 같이 여호와께서는 피곤한 인생들에게 쉴 수 있는 참된 안식처를 제공하신다는 것이다.
- 따라서 푸른 초장에 한가롭게 누워 있는 양들의 모습은
= 바로 지치고 피곤한 인생들의 참된 안식에 대한 분명한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혜 인류의 구속을 위해 오시고 영원한 안식처를 예비하신 주님은,
- 사람들을 구원에로 초청하시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참된 안식처로 인도하시는 목자가 바로 주님 자신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내셨다(마 11:28).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손으로부터 이 생애의 도움과 위로를 받고, 우리 아버지 되시는 그로부터 매일의 양식을 얻는다.
- 그 충만함이 악인에게는 메마른 초장에 지나지 않는다. 악인은 오직 관능적인 즐거움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모든 즐거움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비록 세상에 속한 것은 거의 갖고 있지 않을지라도 믿음으로써 그것을 즐기는 자들에게는 푸른 초장이 된다(37:16; 잠 15:16, 17).
- 하나님의 명령은 = 곧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푸른 초장이다.
하나님은 그의 성도들로 눕게 하신다.
- 즉 그들의 운명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들 아음에 평안함과 만족함을 주신다.
- 그들의 영혼은 그의 안에서 편히 거하며 모든 초장을 푸르게 만든다.
- 우리는 명령의 푸른 초장으로 축복받고 있는가 그곳을 지나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말고 그 위에 눕고 거기에 거하도록 하자. 이것은 영원한 나의 안식이다.
- 영혼이 살찌는 것은 꾸준한 은혜에 의한 것이다.
(2) 그들은 잘 안내받고, 인도된다. 이스라엘의 목자는 요셉을 양과 같이 인도하신다. 그리고 모든 믿는 자들은 그와 같이 인도아래 있다.
"그가 나를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먹고 사는 자들은 그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 그는 그들을 그의 섭리로써, 그의 말씀, 그의 성령으로써 인도하신다.
- 그의 뜻대로 가장 선하게 그들의 일을 처리하시며,
- 그의 명령대로 그들의 감정과 행동을 주관하시고,
- 그들의 눈과 길과 마음을 그의 사랑 안에 두도록 지시하신다.
- 그가 그들을 인도하시는 쉴 만한 물가는 유쾌한 전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목마르고 피곤할 때 풍성한 청량제와 활력제를 준다.
⇒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음식과 휴식뿐만 아니라 원기회복과 즐거움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 성령의 기쁨은 곧 이 쉴만한 물가이며,
성도들은 살아 있는 물의 근원에서 흘러나오고 우리 하나님의 성을 기쁘게 만드는 시냇물가로 인도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부패하고 더러운 물이 고여 있는 물가나 사나운 바다, 급히 흐르는 강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잔잔하게 졸졸 흐르는 물가로 인도하신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은 하나님을 향해 조용히 흐르는 그들이 심령과 가장 일치하기 때문이다.
💡 원문으로 볼 때 본절의 의미,
- 하나님이 나를 누이시는 곳이 = 바로 푸른 초장이고,
-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곳이 = 바로 쉴 만한 물가임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은 목자가 양들의 휴식을 위해서
- 아무런 곳에나 자리를 잡는 것이 아니라
- 가장 적당하고 좋은 곳을 선택하여 양들을 쉬게 한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쉴 만한’
- ‘평온한 거처’, ‘안전하게 쉴 수 있는 곳’ = 양들이 쉴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위치의 장소.
- 특히 여기서 이 단어는 복수형으로 사용되어 →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이러한 장소틀 여러 곳에 마련하여 두셨음을 나타낸다.
- 실제적으로 우기와 건기가 뚜렷하며 물이 부족한 팔레스틴에서 목자들은 앙들이 물을 먹는 장소에 각별하게 신경을 써야 했다.
- 그러나 물만 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 왜냐하면 주번에 사나운 맹수들이 호시탐탐 양들의 생명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이러한 사실이 잘 나타나고 있다.
양들이 누구 때문에 또는 무엇 때문에 마음껏 휴식을 취하며 안전하게 쉴 수 있는가?
- 그것은 바로 양들을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할 뿐 아니라, 그곳에서 양들이 쉬는 동안에도 그 양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불철주야로 지키고 있는 목자가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험악한 세상에서 안전하게 쉼을 누릴 수 있는 것은
- 여호와께서 볼꽃 같은 눈동자로 그의 백성들을 지키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철주야 당신의 백성을 지키고 계시는 하나님을 한 무명의 시인은 "너를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러로다"라고 노래하고 있다(121: 4).
그들에게 베풀어진 거룩한 인도하심은 이것에 대한 은유를 벗겨 주고 있다(3절).
즉 그가 나를 "의의길로," 의무의 길로"인도하시도다."
그 속에서 나를 그의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양심과 섭리로 지시하시는도다. 이 길은 모든 성도들이 인도받고 지키기를 원하며, 결코 거기서 빗나가지 않기를 원하는 길이다. 이렇게 의의 길을 행하는 자만이 위로의 잔잔한 물가로 인도받는다. 의무의 길은 진실로 즐거운 길이다. 화평한 것은 의의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길로 그리고 이 길에서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행할 수 없는 것이다.
💡 ‘자기 이름을’ 위하여
-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계시하신 거룩한 이름의 명예를 필연적으로 지키시는데 이를 위해 곤경에 처한 자기 백성, 곧 당신이 기르시는 양으로 삼으신 다윗과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소성케 하시며 의로운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 성경 여러 곳에서 증거하는 바
- 질병 가운데 고통 당하는 자를 고치시고 놓임을 주시는 사역,
- 가난한 자에게 새 힘을 주고 강하게 하시는 사역,
- 실의와 절망에 잠겨 죽을 위경에 처한 자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과 용기틀 부여함으로 승리케 하시는 사역 등은
-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행사는
→ 일면 당신의 거룩하심과 탁월한 권능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성격을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는 것 = 하나님께서 다윗을 의의 길로 인도하는 것
- 즉, 최고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관단에 거리낌이 없는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것.
- ‘길’ = ‘좁은 길’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표현
- 주님께서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그 길이 좁고 협착하다고 말씀하고 계신다(마 7:13; 눅13:24).
- 그러나 그 길은 여호와께서 인도하시는 길이므로, 결국 생명으로 통한다.
- ‘인도하시는도다’
- ‘앞서가다’, ‘안내하다’ ⇒ 목자가 양을 이끌고 앞서가는 모습.
- 다윗이 홀로 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먼저 의로운 길로 앞서 가시기 때문에 의의 길을 같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
(3) 어떤 것이 그들을 괴롭힐 때 그들은 충분히 도움을 받는다. 그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도다".
💡 “영혼”
- 이 단어는 인간의 존재의 본절로서 ‘영혼'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만 이에 더하여 ‘생명’(창 1:30), ‘마음’(창 27:4). ‘몸’(레 21:1), ‘기력’(욥6:11) 등 인간의 전존재와 관련해서 사용되는 표헌이기 때문.
-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목자가 되서서 쉴 만한 물가, 푸른 초장으로 시인을 인도하시고 안식케 하심으로 - 그의 전존재가 회복되고 소성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것어 적합하다.
‘소생시키시고’
- ‘돌이키다’, ‘회복시키다’, ‘새롭게 하다’ 란 의미의 ‘슈브’ 파생.
- 대개 ‘슈브' 동사는 범죄한 인간이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나타낼 때 자주 쓰인다.
- 여기서도 이 말의 의미는
- 연약하기 그지 없는 다윗이 헤어나기 어려운 곤경에 처하여 있을 때,
→ 하나님께서 다윗을 돌이키심으로써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는 그 생명을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 비단 곤경에서 벗어나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즉 양이 목자의 인도로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에 도달하여 쉼을 얻고 소성함을 얻는 것과 같이
- 연약해진 시인이 하나님의 공급과 안식케 하심으로 영육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의미도 지닌다.
- 연약하기 그지 없는 다윗이 헤어나기 어려운 곤경에 처하여 있을 때,
[1] "내가 방황할 때 나를 소생시키신다.
"양처럼 쉽게 한눈을 파는 짐승은 없을 정도로 양들은 길을 잃어버리기 쉽고 또 길을 찾아 되돌아 오기가 어렵다.
가장 훌륭한 성도들도 "잃은 양같이 유리하는" 자기들의 성향을 깨닫는다(119:176). 그들은 길을 잃고 샛길로 접어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잘못을 보여 주시고 회개케 하시고 다시 그들의 의무로 돌아 오게 하심으로써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끝없이 유리하여 파멸했을 것이다.
한 가지 죄를 범했을 때 다윗의 마음이 그를 징계했고, 또 다른 죄를 범했을 때는 나단이 보내어져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그에게 말해줌으로써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소생시키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죄에 빠지게 하실지라도 - 그들로 하여금 계속 그 속에 누워있게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2] "그는 내가 병들 때 나를 회복시키시고, 내가 기진할 때 활력 있게 해 주시며 내가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그는 우리를 치료하시는 우리 주 하나님이시다(출 15:26). 우리가 믿지 않았다면 여러 번 활기를 잃었을 것이며, 우리를 기절하지 않게 하시는 것은 선한 목자이시다.
2. 죽어가는 성도들의 용기를 보라(4절).
지금까지 여섯 번, 일곱 번 환난을 겪을 때에 "나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했으므로 나는 결코, 마지막 극한 상황에서도 그를 불신하지 않으리라.
여지껏 나를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신 것은 나의 어떤 업적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고, 단지 그의 이름을 위해 그의 말씀을 준행하고 그의 약속을 이행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의 특성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 대한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은 계속 나의 강한 성이 될 것이며, 나를 일생 동안 인도하시고 먹이시는 그가 끝까지 나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확신케 해 주실 것이다. 여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절박한 위험이 가정되어 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즉 죽음의 위험 속에 놓일지라도, 골짜기처럼 깊고 그림자처럼 어두우며 죽음 그 자체처럼 두려운 위험 가운데 처할지라도," 또는 오히려 "내가 죽음에 사로 잡히고 나 자신 안에 죽음의 판결을 닫으며 모든 면에서 이 세상에서 죽어가는 자로 여길 수밖에 없을지라도, 나는 평안하리라."
💡 2절에 나오는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 와 대조되는 장소
- 이러한 장소의 급격한 전환을 통해 다윗은
- 자신이 항상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대변되는 평온하고 풍족한 삶만 살았던 것이 아니라,
- 이와 정반대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다녔음을 보여준다.
- 그리고 이는 단순한 과거의 상황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도 얼마든지 닥칠 수 있음을 전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윗 자신이 이러한 표현을 하는 것은
- 자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싸기 즉 고난과 환난 가운데 빠져 헤어나올 수 없었음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 오히려
- 극심한 고통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건져주신 구원의 은총을 바탕으로 하여
- → 이제와 앞으로 살아가게 될 미래에도 어떤 환난어 닥친다 할지라도 두려움 없이 그것들을 맞이할 수 있다는 고백을 더욱 진솔하고도 확고하게 을려 드리기 위헤 이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
“다닐지라도”
- 이는 ‘어떤 길을 걸어갈지라도', ‘어디까지 가더라도'라는 의미가 된다.
- 이는 이미 지난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고통의 길을 걸어갈 때에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와 앞으로 그러한 길을 같지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 즉 이러한 표현을 통해 다윗은 지난날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총이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데 있어 얼마나 강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윗의 신앙 고백은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 즉 지난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의 거울이 → 오늘과 내일의 삶을 밝게 비추어주고 있는 다윗의 상황을 통하여
- 우리는 역사 속에서 어느 한 시기에 우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 온갖 위기와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인생의 전영역에 걸쳐서 얼마나 값 진 영적 자본이 될 수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병든 자들과 연로한 자들은 자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여기에 정말 끔찍스럽게 여겨지는 한 마디 말이 있다. 그것은 "사망"이라는 말로서. 우리가 항상 생각해야 하는 문제다. "이 전쟁에서 벗어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망에 대한 가정 속에서도 두려움을 약화시키는 네 가지 단어가 있다. 즉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정말로 사망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
[1] 사망의 "음침함"(그림자)이다. 그 속에는 본질적인 해는 없다. 뱀의 그림자가 독을 뿜을 수 없으며 칼의 그림자가 죽일 수는 없는 일이다.
[2] 정말 깊고, 어둡고 더러운, 음침한 "골짜기"이다. 그러나 골짜기는 비옥하므로 죽음 자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비옥한 위로가 된다.
[3] 이 골짜기를 "다니는"것에, 한가하고 즐겁게 걷는 것에 불과하다.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쫓겨나며 그들의 영혼은 요구 당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세상을 떠날 때처럼 즐겁게 저 세상으로 간다.
[4] 골짜기로 통과해(trough) 다니는 것이다. 그들은 이 골짜기에서 잃어버리지 않고 저편에 있는 향기의 산에 안전하게 다다를 것이다.
💡 대개의 본시 독자들은 본시 초반부의 배경이라 할 수 있는 ‘푸른 초장', ‘맑은 시냇가'란 표현에 너무 큰 무게를 두고 그것을 깊이 각인하고 있기에,
본절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나 이어지는 5절의 ‘내 원수의 목전' 등 어듑고 고통스런 이미지에 대헤서는 큰 무게를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4-5절의 표현은
-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상징하는 1,2절의 목가적 이미지에 더해 하나님의 완전하신 보호와 인도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1,2절과 대등한 비중을 가진 내용이라 할 수 있다.
- 아울러 이는 시인 자신 뿐만 아니라 성도들 각자의 삶과도 직결된 내용이다.
이는 성도의 삶이-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으로 충족함을 누리기도 하지만,
- 참되고 영원한 안식이 있는 ‘여호와의 집'을 향해 가는 동안
→ 때로 거친 광야와 험한 골짜기를 지나며,
→ 무수한 대적자들의 공격과 마주헤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이 위험은 훌륭한 근거에 의해 경하게 될 것이고, 또 극복될 것이다.
사망은 두려움의 왕이나 그리스도의 양들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도살당할 양이 그러한 것처럼 사망에 대해 떨지 않는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이 어느 것도 나를 요동케 하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자녀는 마음의 거룩한 안심과 평정을 갖고서 죽음의 사자를 맞이하고 그 소환에 응할 수 있을 것이다. 젖먹는 아이는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할 수 있다. 그리고 은혜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떠나는 어린 아이는 "사망아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는가"라고 바울처럼 죽음에 거룩한 도전을 하면서 뱀의 굴에 손을 넣을 수 있다.
이러한 확신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1]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악이 없기 때문이다.
사망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없다. 그것은 몸을 죽이나 영혼을 건드리지는 못한다. 이처럼 해로운 것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왜 두려워해야 하겠는가?
[2] 성도들은 죽어가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를 얻기 때문이다.
그때에 그는 그들의 우편에 계신다. 그런데 왜 그들이 요동하겠는가? 선한 목자께서 그의 양들을 먹이를 노리는 짐승들이나 으르렁거리는 이리들에 의해 공격당할 위험이 있는 이 골짜기에서 지휘하고 호송하신다. 그는 그들을 호위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위로를 매우 필요로 할 때 그들을 안위하실 것이다.
그의 임재는 그들을 안위해 줄 것이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지난날 다윗은 환난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돕지 아니하시며 멀리 떨어겨 계신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22:1).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심한 환난에서 소생케 된 다윗은 그러한 생각들을 말끔히 떨쳐버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이 환난을 겪을 때에 더욱 가까이에서 돌보시며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다윗으로 하여금 이제와 앞으로 환난이 닥친다 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방황하지 않을 수 있는 토대가 되고 있다.
이처럼 환난 속에서 담대할 수 있는 근거로서의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 다윗이 친히 환난의 현장에서 체득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임마누엘의 신앙은
- 다윗 뿐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환난과 곤고 가운데서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잃지 않고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할 수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할 수 있다(출33:14; 신 31:6-8).
그의 칼과 성령이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그들을 안위하실 것이다.
- 이것은 목자의 지팡이나 양들을 세기 위해 그 아래로 통과하게 했던 막대기(레 27:32), 양들을 흩어지게 하거나 못살게 구는 개들을 쫓아내기 위해 목자가 썼던 장대를 언급하고 있다.
- 성도들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지하시고("그는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아신다"), 그 원수를 꾸짖으시며, 그들을 그의 막대기로 안내하시고 그의 지팡이로 떠받치시리라는 것은 그들을 안위해 준다.
- "복음은 주의 권능의 홀"이라 불리우고 있으며(110:2), 그 속에는 성도들이 죽게 될 때 그들을 위로 하기에 충분한 것들이 있다. 그들 "아래"에는 "영원하신 팔"이 계신 것이다.
💡 “하나님의 섬세한 돌보심의 손길”
여기서 다윗이 말하는 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 목자가 양을 맹수들로부터 지키듯이 험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대신해 대적들과 싸우시고 닥쳐오는 여러 가지 위험과 어려움으로부터 건지시는 것을 나타내기 위헤 사용한 것.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앞선 2,3절과 관련해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 먼저 앞선 2.3절이 목자가 양들에게 풍족한 덕이와 안전을 제공해 주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다윗을 비롯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삶의 펄요틀 채워주심을 나타낸 것이라면,
- 본절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여호와께서 마처 양떼들을 위헤 목숨을 걸고 싸우는 목자와 같이 그 양무리들을 안심시키시고 위로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특히 이 단어는 미완료형(반복,계속) → 보호하시고 안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라는 다윗의 확신을 잘 드러내고 있다.
Ⅲ. 하나님이 그에게 하사하신 좋은 선물에서 그는 그의 인자하심이 견고하고 영원하다는 사실을 추론해 내고 있다(5,6절).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롭게 베풀어 주신 것을 매우 높이 찬양하고 있다(5절).
"주께서 내게 상을 베푸시나이다. 주께서 나를 위해 생명과 경건함를 모두 지킬 수 있는 것들을, 현세와 내세에서 육신과 영혼 모두에 필요 불가결한 것들을 모두 마련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모든 백성들에게 관대한 은인이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의 선하심을 크게 표명하도록 만든다.
💡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수 앞에서 상을 베푸신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원수들이 대적하고 있는 상황을 전제한 것이다. 즉 본문의 상황은 시인이 아직 승리를 거둔 상태가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자기 앞에 있는 대적들로 인해 결코 패배하거나 멸망하지 않고 목자이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반드시 승리할 것을 확신하였다. 그래서 본문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가 거둘 승리를 미리 축하라도 하듯이 원수들 앞에서 상을 베푸셨다고 노래한다.
다윗은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1) 하나님은 좋은 음식을 갖고 계셨다. 베풀어진 상과 가득 채워진 잔, 그의 굶주림을 채울 고기, 갈증을 채울 음료를 갖고 계셨다.
(2) 하나님은 그를 위해 그것을 배려 깊게 쾌히 마련해 주셨다. 그의 상이 펼쳐진 후에 어떤 음식이 그 위에 놓여진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앞에 베풀어져 있었다.
(3) 그는 절약하거나 궁핍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풍족히 갖고 있었다.
"나 자신과 내 친구들에게도 충분할 정도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
(4) 그는 필수품뿐만 아니라 장식과 즐거움을 위한 것도 갖고 있었다.
"주께서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나이다."
사무엘이 그를 안으로 기름 부었고, 그것은 더 큰 은총에 대한 확실한 담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를 풍족하도록 축복하셨다는 일례이거나 또는 특별한 친구들의 머리에 감람유를 붓는(눅 7:46) 독특한 환대를 언급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그가 아직도 그 자신을 양으로서, 주인의 음식을 먹고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눕는 그러한 "가난한 자의 작은 암양"(삼하 12:3)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고귀하게 뿐만 아니라 이처럼 자상하게 돌보심을 받는다.
그들의 풍족한 양식이 그들의 몸과 영혼을 위해, 현재와 미래의 생명을 위해 마련된다. 만일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자연적인 생명을 위해 이처럼 풍성한 것들을 베풀지 않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 영적인 축복으로 보상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의 잘못 때문이다.
💡 고대 근동에서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귀한 손님의 머리에 값비싼 기름을 발라주는 풍습이 있었다(45:7; 133:2; 눅 7:46).
- 이는 보통 그 집의 종들이 하는 일이었다.
- 그런데 여기서는 - 잔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발라주신 것으로 나온다.
- 이는 주인의 극전한 대접을 의미한다.
- 또 ‘바르셨으니’ = ‘기름을 붓다’, ‘만족케 하다’ 란 뜻.
- 그 기름붓는 주체가 하나님이며 단지 기름을 머리에 바르는 정도가 아니라 풍성하게 부어주셨음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다.
- 이러한 의미에서 ‘여호와께서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다윗을 매우 존귀하게 하셨다는 의미.
이렇듯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한 다윗의 존귀한 상태를 확연하게 나타내주는 것어 본절 말미에 기록된 ‘넘치나이다’ 라는 표현.
- 단순히 채워지는 상태가 아니라 포화 상태가 되어 넘쳐흐르는 상태를 나타낸다.
- 여기서 ‘내 잔’ 은 다윗이 누리는 축복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16:5).
- 따라서 본문은 다윗어 단순히 원수들의 위협에서 벗어나 목숨을 보존하는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축복 가운데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사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번영을 구가했던 왕이었다.
- 자신을 괴롭게 했던 사울이 지니고 있던 이스라엘의 왕위를 하나님으로부터 넘겨받았을 뿐 아니라 당시까지 계속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블레셋, 암몬, 모압 등을 완전히 제압하였다.
- 또 이스라엘 주번의 열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으며 그 자신의 명성이 온땅에 미칠 만큼 커다란 축복을 구가하였다.
- 한편 이처럼 원수들의 목전에서 상을 받으며 잔이 넘치게 되는 풍성한 축복은 다윗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그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측복어기도 하다.
2. 그는 하나님의 은총이 계속될 것을 매우 확신하고 있다(6절).
그는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했었다(1절).
그러나 이제 그는 더욱 긍정적으로, 더욱 알기 쉽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로다." 시련 당함에 따라 그의 소망이 자라나고 그의 믿음이 강해지고 있다. 다음을 주목하라.
(1) 그가 그 자신에게 약속하고 있는 것은,
선하심과 인자하심,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인자하심의 모든 시냇물, 용서하시는 긍휼, 보호하시는 긍휼, 부축해 주시는 긍휼, 마련해 주시는 긍휼이다.
(2) 그것이 전달되는 방법.
그것은 광야를 통과하는 이스라엘의 출정군을 따르던 바위의 물처럼 나를 "따를"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곳이나 상황에도 따라올 것이며 항상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3) 그것의 지속.
그것은 "나의 평생에," 마지막 날까지도 나를 따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를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4) 그것의 불변함.
"나의 평생에," 새날이 오듯이 어김없이 온다. 그것은 매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려진 만나와도 같이 "아침마다 새로울"것이다(애 3:22, 23).
(5) 그것의 확고함.
"정녕" 그렇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진리의 하나님이 하신 약속처럼 확실하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누구를 믿어 왔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6) 미래의 상태에는 축복의 온전함이 있으리라는 전망이 있다.
💡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계속적으로 추구하고 사모하면서 살겠다는 다짐의 의미)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구절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이 세상에서 평생토록 나를 따랐으므로, 내 생명이 끝날 때에도 나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기 위해 더 나은 세상으로, 거할 곳이 많은 위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집으로 갈 것이다. 내가 지금 가진 것으로 충만히 기뻐할 것이며, 내가 바라는 것으로 더욱 충만히 즐거워할 것이다".
이 모든 것, 그리고 또한 천국을 즐거워하리라! 그때 우리는 선한 주인을 섬기게 된다.
3. 그는 하나님과 그의 의무에 집념하기로 매우 단호하게 결심하고 있다.
우리는 마지막 절을 다윗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으로 볼 수 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내가 살아 있는 한) 거하리로다. 그리고 내가 존재 하고 있는 한 그를 찬미하리로다."
우리는 영원히 그를 섬기기 위해 문기둥에 귀를 대고 구멍을 뚫은 종처럼 그의 집에 거해야 한다. 만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찬란한 대낮을 위해 점점 더 빛나는 아침 햇살 같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 곧 사라질 아침 구름이나 아침 이슬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집에 있는 충족함으로 만족을 얻으려는 자들은 그 의무를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 다윗은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와 공급, 원수로부터의 보호와 승리 및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직접적으로 체험하였다.
즉 그는 목자이신
- 여호와의 인도로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에서 쉼과 안식을 누리기도 하였고,
-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기도 하였지만 결국 자신을 위험하는 원수들 앞에서 상이 베풀어지고 잔이 넘처게 되는 축복을 경험하였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 이러한 내용 전체의 귀결로서 본절에서는 시인이 최종적으로 도달하여 영원히 거할 곳으로 ‘여호와의 집’ 을 언급하며 그곳에 영원히 거하겠다고 다짐한다.
- 이 표현은 본시의 말미에 위치하여
- 그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결단의 표현임과 동시에 본시 전체의 내용을 일괄적으로 결론짓는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아울러 이는 종말론적인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 즉 여호와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 그리고 원수들 앞에서 상을 받으며 잔이 넘치는 축복을 경험한 성도들이 마지막으로 도달할 곳을 언급하는 것으로도 풀이된다.
‘여호와의 집'
- 일차적으로 당시 예루살렘에 옮겨진 하나님의 언약궤를 둔 성막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는 공간적인 제한을 받는 특정한 처소를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 삶의 전영역에 있어서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가지겠다는 고백으로도 볼 수 있다.
- 아울러 이 집은 앞의 5절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목자이신 여호와께서 양이 되는 다윗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어 주시는 축제의 집으로 볼 수도 있다.
- 또한 ‘집'은 이스라엘에 었어서 공동체를 나타내는 가장 보편적인 표현이란 점에서 여호와의 집에 거하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어떤 의미로 보든 이는 본시 말미에 위치하여 본시 전체의 결론을 형성하고 이 시를 읽는 모든 독자들로 하여금 종말에 거할 곳, 거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거하리로다’ (완료형)
- 히브리어의 완료형 = 과거를 나타낼 대 주로 쓰임.
- ‘영원히’는 미래의 의미.
→ 이처럼 미래를 나타냄에도 불구하고 완료형을 사용한 이유
: 다윗 자신이 영원토록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고도 확실한 것이며 결코 변하지 않을 다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결론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어 다윗은 6절밖에 안되는 짧은 분량의 본시에서 견원의 이더지와 산악의 이미지, 그러고 법정과 축제의 이미지 등 풍성한 소재를 동원하여 간결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복락, 원수들에 대한 빛나는 승러, 하나님으로 언한 영원한 측복을 깊어 었고 풍성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또한 본시는 목자와 양 ,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 사망의 골짜기, 지광이, 막대기, 상, 기름, 잔 , 집 등 너무나 친근하고 평이한 소재들을 사용하여 심오하고 근원적인 문제들을 담아내고 있다.
이처럼 본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성도들어 누리는 은혜를 절제된 언어를 사용하였지만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 짜임새 있게 담아내고 있으므로 많은 성도들의 입에서 지금도 회자되고 었으며 또 그만큼 많은 사람둘의 사랑을 받고 었는 것이다.
자신의 앙에게 안전한 휴식과 풍부한 꼴을 주시며 고난 속에 보호와 인도, 승리, 그러고 넘처도록 풍성한 축복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행사는 다윗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성도들 역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시는 다윗의 노래일 뿐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성도들의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