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민수기 30, 시편 74, 이사야 22, 베드로후서 3
묵상구절
100:1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100: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100: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100:4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100:5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매튜헨리/옥스퍼드
- 온 땅을 향하여 드높이는 여호와 신정 찬앙 촉구
(저자: 미상, 분류: 신정시)
서론
💡본시는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구속사를 그 근간으로 하여 창조자와 구속자로서 우주와 역사에 대하여 베푸시는 경륜과 섭리와 관련된 신정 사상을 노래한 일련의 신정시 모음집인 제95~100편의 여섯 편의 시들 가운데 마지막에 해당하는 시입니다.
이러한 본시는 비록 5절에 불과한 짧은 시이지만 그 내용을 보면 전우주적 통치자이신 여호와와 우러의 관계 및 여호와의 인자와 성실의 영원성이라는 심도 깊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탄력감 있는 운율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요약 제시함으로써 제95-100편 사어의 신정시 모음집을 인상적으로 마감하는 송영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본시의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 2절
여호와께 대한 환희의 찬양에로 온 땅을 초대하는 내용입니다.
3, 4절
창조자요 선민의 목양자로서 여호와의 절대 지위를 선포하며 선민을 향하여 그 여호와를 찬양하도록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5절
여호와를 찬양해야 할 이유로서 그의 인자와 성실의 영원성을 선언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찬양의 이유(시편 100:1-5)
Ⅰ. 찬양하라는 권고가 매우 집요하게 나타나 있다.
이 시편은(본문에 붙어 있는) "찬양의 시"라는 표제에 대한 실제적인 해답을 주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여러 번 읽은 바 있는 그 초청으로 시작된다. "너희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열방이 부르심을 받고 복음이 만민 중에 선포될 때, 이러한 소환은 완전히 응답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왕국의 통치(이 시편 앞의 네 시편이 메시야 시대에 적합한 것같이)로 인해 유대 교회는 기뻐하라는 부르심을 받는 것이 앞에 나온 시편이라고 이해한다면, 이 시편은 온 땅으로부터 유대인의 종교로 들어온 개종자들을 위해 씌어진 것이라 하겠다.
💡 표제 : <감사의 시>
이러한 본시의 표제는 ‘시’, ‘노래', ‘찬송' 등의 의미를 지니며, 한글 성경의 번역과 같이 ‘감사의 시'라는 의미를 갖는다.
시편의 표제에는 저자, 저작 시기나 배경, 연주 방식이나 사용 악기 등어 제시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본시의 경우에는 단순있 용도만이 제시되고 있다. 즉 이는 본시가 제의에서 사용된 감사 예배시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구분은 본시 전체의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다. 본시의 내용에는 비애나 원망의 말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온 땅을 향해, 하나님을 섬기는 온 백성을 향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자리에 초대하는 내용과 그의 영원하신 인자와 성실을 선언하는 내용뿐이다.
이러한 본시는 예배자들이 감사 에물을 가지고 성전 문과 성전 뜰을 지나갈 때 노래로 불렸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2절의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4절의 ‘그 문에 들어가며'와 ‘그 궁정에 들어가서’ 등의 표현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이를 인하여 혹자는 본시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성전에 어른 무리들이 성회의 진행에 따라 성전 문으로 들어가면서 불렀던 노래로 추정하기도 한다(Rawlinson).
1.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강력한 초청을 받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거나 우리가 가진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며" 우리 자신을 그의 예배에 바치게 하고 그런 일에 우리 자신들을 사용하려는 것이 그의 뜻이다. 우리가 그의 율법의 모든 조목들에 대한 복종에서 그를 섬길 뿐만 아니라, 그가 명하사 그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약속하신 규례를 통해서 "그 앞에 나아가는 것"도 그의 뜻이다(2절). 우리가 "그 궁정에 들어 가야 하는 것"(4절)도 그의 뜻이며, 그의 종들 가운데서 그를 섬기며 그가 지키는 궁전을 지키는 것도 그의 뜻인 것이다. 모든 경건한 예배에서 - 은밀히 행해지는 것이든 가족과 더불어 열리는 것이든 - 우리는 하나님의 존전에로 나아가며 그를 섬기게 되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그의 문으로 그의 궁정으로 들어 가는 것은 공중 예배에서 이루어진다. 일반 사람들은 성소에 들어 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제사장들만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들어 갔다. 그러므로 일반인들로 하여금, 저들이 용납되고 또 집회를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의 집의 궁정에 참예할 수 있음을 인해 감사하게 하라.
💡 100:1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 ‘하리우’ : ‘깨뜨리다’, 소리로 ‘귀가 먹게 하다’, 놀라거나 기뻐서 ‘소리치다’ 등의 의미를 지닌 ‘루아으’의 사역 명령형 동사.
- 본절의 이러한 표현은 왕의 행차를 인하여 큰 소리로 소리지르며 환호하는 고대 근동의 관습과 긴밀한 연관을 지닌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왕이 개선하거나 백성들 가운데 행차할 때 모든 백성들어 큰 소리로 환호하며 왕을 맞이하는 관습이 있었다. 신정시로 분류되는 본시의 시작 부분인 본절은 이러한 관습을 염두에 두고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를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환호하면서 맞이할 것을 명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온 땅이여’
- 큰 소리를 발하며 환호할 것을 명하는 대상으로 = ‘온 땅'을 들고 있다.
- 그러나 이는 단순히 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온 땅의 만민,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을 다 포괄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 즉 시인은 지금 만민과 모든 피조물을 향하여 왕이신 하나님 앞에 환호하며 기쁨과 감격의 소리를 발할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 이처럼 온 땅 만민, 그리고 땅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소리를 발하는 장면, 온 땅이 진동할 정도로 크고 우렁찬 소리를 발하는 장면은 왕으로서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 예배할 때 예배를 기쁨으로 드릴 커다란 격려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라"(2절).
이것이 복음 시대에 가면 기뻐할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이 시편은 이것을 예배의 규범으로 규정한다. 곧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라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거룩한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그를 기뻐하는 것은 그에게 영광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거룩한 기쁨으로 섬겨야 한다. 음을 예배하는 자들은 기뻐하는 예배자들이 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려면 우리는 그를 기쁨으로 섬겨야 한다. 우리는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 기뻐하고'(122:1),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영혼의 위로로 생각하면서 기뻐해야 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또 우리는 매일의 의무에서 하나님께 가까이하면서 "우리의 최고의 기쁨이신 하나님께"(43:4)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하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기쁨의 노래뿐만이 아니라 찬양의 노래를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가야 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 가라"(4절). 또 우리의 기쁨으로 우리 자신들을 위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즉
(1) 그의 예배에 용납되는 것을 은총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그에게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게 되는 것과 또 우리가 규례를 통해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받들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2) 우리는 모든 예배에 있어서 찬양과 감사를 드려야 한다. 이러한 황금실이 모든 의무를 관철해야 한다(히 13:15). 모든 일에서, 모든 의식(儀式)에서, 모든 준비에서 감사드려야 할 것이다.
💡 100: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영호와의 왕되심과 의로운 통치를 찬양하고 이에 감격하는 시인의 뜨거운 열정
본문은 5절로 구성된 짧은 시임에도 불구하고 원문에서 도할 7회의 명령형 동사가 사용되는데 이는 여호와의 왕되심과 그분의 의로운 통치를 찬양하고 이에 감격하는 시인의 뜨거운 열정을 잘 보여준다.
‘기쁨으로’ 섬길 것을 명함.
- 본문이서 ‘기쁨’과 ‘섬김’의 이미지는 시인이 이 시를 기록할 당시나 오늘날에나 서로 조화를 이루는 표현으로 보기 어렵다.
- 이는 ‘섬김'을 의미하는 단어 ‘아바드'는 본래 노예가 주인을 섬기는 것을 나타내며, 그런 성격의 섬김이라는 것은 불쾌해도 어찌할 도리 없이 취해야만 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여기서 시인은 여호와를 섬기되 넘처는 기쁨, 환희, 유쾌함으로 섬기라고 명령한다.
→ 이는 그 섬김을 받는 대상이신 여호와의 인격과 사역, 그분의 거룩하심에 기인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섬기는 것에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하고 착취하고 학대하는 것이란 의미가 배후에 깔려 있다. 그러나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그것과 전혀 다르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며 위기에서 구원을 베푸시며 모든 쓸 것을 은혜 가운데 베푸시며 의롭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기쁨으로 섬기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기쁜 것이다.
- 일반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섬기는 것에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하고 착취하고 학대하는 것이란 의미가 배후에 깔려 있다. 그러나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그것과 전혀 다르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며 위기에서 구원을 베푸시며 모든 쓸 것을 은혜 가운데 베푸시며 의롭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 그런데 지금 시인은 그 섬김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겨졌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제한하지 않고 모든 민족과 열방, 온 땅의 모든 만물을 향해 명하고 있다.
- 여기에는 하나님의 유일하심, 즉 그분만이 참 신이시며 만유의 주이시며 절대 주권자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 원문의 의미를 감안할 때, ‘기쁨의 환호로써’ 로 바꿔 번역할 수 있다.
- 특히 이는 전쟁에서 어기고 돌아온 왕이 개선 행진할 때 백성들이 울리는 개선의 함성을 지칭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이 역시도 앞선 ‘기쁨으로’ 에 해당하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앞선 1절의 ‘즐거이 부를지어다'의 또 다른 표헌으로 볼 수 있다.
- 시인은 이처럼 유사한 뉘앙스의 표현을 반복 사용함으로 그분을 향해 천하만민, 천하만물이 나타내는 반응, 나타내야 할 반응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전달한다. 이러한 표현은 이면적으로 만왕의 왕,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이 얼마나 큰 것이며 하나님의 통치가 세상 모든 만민과 만물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 것인지를 암묵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그 앞에’
- ‘그 얼굴 앞에’ -
- 얼굴 (’파님’) 은 보통 - ‘하나님의 임재’ 앞에
- 또한 구약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그 얼굴 빛을 비추신다는 표현의 의미.
-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온전한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 이는 대제사장 아론이 백성들에게 베푸는 축복의 기도문인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5, 26)는 표현을 통해서 구체적으 로 확인할 수 있다.
본절에서도 이는 마찬가지 의미를 전달한다.- 즉 여호와의 얼굴은
= 그의 은총의 근원이요, 그의 영광과 복을 상징하는 은유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 그러므로 ‘그 앞에’ 즉 ‘그의 얼굴 앞으로' 나아가라는 촉구는 하나님의 은총과 영광을 얻으러 나아가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 즉 여호와의 얼굴은
- 이처럼 복되신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얼굴 앞에 나아가는 자들에게 시인은 노래하면서, 즉 기쁨의 소리를 발하며 나아갈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 100:4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인은 이처럼 하나님의 성전의 문을 향해 나아'가면서, 그리고 왕이신 하나님의 뜰, 곧 그의 궁정에 들어가면서 감사와 찬송을 가지고 들어갈 것을 명한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감사함으로, 찬송함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 본래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같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범죄로 얼룩진 사람은 걸코 하나님 앞에 나아같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 설 경우 죽음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출 33:20; 사 6:5).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당신이 보살피시는 양으로 삼으신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들로 하여금 당신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허락하셨다(사 1:18).
→이는 앞선 3절 하반절의 표현 즉 ‘그의 백성', ‘그의 기르시는 양’ 이란 표현과 같은 맥락의 내용임과 동시에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목자가 양을 돌보시는 것처럼 여러 가지 은혜로운 일들을 베푸시기도 하지만,
멀찍이서 당신의 백성 양떼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채워주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까지 허락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처럼 크신 은혜와 긍휼, 자비하심을 인하여 그 앞에 나아가는 자가 마땅히 지녀야 할 것은
-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다.
이러한 감사의 제사, 찬송의 제사는 사람이 드릴 수 있는 어떤 예물보다 고귀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50:14, 23; 69:30, 31)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 축복이란 높은 자가 낮은 자를 향해 하는 것으로서, 아버지가 아들을(창 49장), 왕이 백성들을(왕상 8:14) 향해 축복한다. → 그렇다면 본문의 ‘빠라쿠'는 이와 같은 의미의 축복이 아니다.
- 또한 실상 하나님은 복이 부족하여 다른 존재로부터 복 빌을 받아야 할 분도 아니다.
- 그분은 스스로 자족하시고 충만하신 분으로서, 모든 복이 그분을 통해서만 흘러나온다.
-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을 향해 복을 빌어 드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는 의미이다.
Ⅱ. 찬양하는 일과 그 동기는 매우 중요하다(3,5절).
하나님 자신이 어떠한 분이며 그가 우리에게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한다. 지식은 예배와 모든 복종의 어머니다. 맹목적인 예배는 보시는 하나님을 결코 기쁘게 할 수 없다. '그것을 알라. 그것을 생각하고 행하라. 그러면 너희는 그를 예배하면서 더욱 밀접하고 진실하게 되고 더욱 영적이며 진지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경건한 예배의 행위에서 주 여호와에 관해서 다음 일곱 가지의 사항을 알아야 한다.
1. 그는 주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유일하게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시며 그는 무한하게 완전하고, 자존(自尊)하고, 자족(自足)하신 존재이시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시지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다. 그는 영원한 성령이시고 이해할 수 없고 독자적인 분이시며 제일 원인이시며, 마지막 끝이 되신다.
이방인들은 저들 자신의 공상으로 만든 피조물을 예비했다. 일군들이 그것을 만들었으므로 그것은 신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를 지으시고 온 세상을 창조하신 자를 예배한다. 그는 하나님이시며 신을 가장하는 다른 모든 것들은 공허하며 거짓된 짓이다. 결국 그는 저들을 이기신다.
💡 100: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 직역하면, ‘너희들은 여호와 그가 하나님이심을 알지어다’시인은
- NASB는 본문을 ‘여호와 그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이심을 알라 (Know that the Lord Himself is God)' 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 이는 오직 그만이 참 신이시라는 말이다.
- 여호와는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대로 ‘우리 하나님' 곧 그 백성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호와는 그들의 민족 신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곧 유일하신 하나님으로서 만던의 주권자요 통치자로 유일하게 섬김을 받아야 할 신인 것이다. 시인은 바로 이 사실을 선포하고 있다.
2. 그는 우리의 창조자이다.
"우리를 지으신 이는 그이며 우리 자신이 아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지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어디에서 왔나, 누가 나를 만들었나? 나의 창조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고 물어야 한다.
그는 주 여호와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존재를 주었고 이러한 생명을 주었다. 그는 우리의 육체의 형성자이며 우리의 영혼의 아버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만들지 않았고 지을 수도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권이다. 우리의 존재는 파생적이며 의존적이다.
💡 이와 같은 본문의 표현에는 이방 우상에 대한 비판과 냉소의 의머도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고대 근동의 신들 각각은 그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 이 신들 각각의 형상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으로 그 신이 지닌 특별한 능력이나 주관하는 바를 나타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사람이 만들어낸 형상일 뿐이었다.
- 그것은 결코 생명도, 호흡도, 능력도 없는 것이었으며 사람들이 구하는 바 기도를 들을 귀조차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나무 조각이나 금속 주물에 불과한 우상에 절하고 복을 빌었다. 이는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만들어내거나 지어낸 존재가 아니시다.
- 그는 여느 우상과 전혀 다른 존재로, 사람을 지으시고 만물을 조성하신 창조주이시다. 따라서 하늘과 땅, 온 피조 세계 가운데 유일하게 경배를 받으실 참되신 하나님은 바로 하나님밖에 없다.
시인은 본절 앞선 구문에서 여호와께서 유일한 하나님되심을 선포하였는데 본문에서 그 대표적인 증거로 그분의 창조주되심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3.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당연한 주인이다.
맛소라 학파들은 히브리 원문에서 한 철자를 고침으로써, "그는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는 그의 것이며 우리는 그에게 속해 있다"고 읽는다. 이 문장을 함께 연결시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지 우리 자신이 우리를 만들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며 그의 것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는 우리와 만물에 대해서 명백한 권리와 소유권을 갖고 있다. 우리는 그의 것임으로 그의 권능에 의해서 활동하고 그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그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
4. 그는 우리의 최고의 통치자이다.
"우리의 그의 백성이며" 신민이다. 그는 우리에게 율법을 도덕적 동인(動因)으로 주며 우리가 행한 것을 우리에게 판단해 줄 우리의 왕자요, 교구 목자요, 지배자이다. "여호와는 우리의 심판자이시며 여호와는 우리의 율법수여자이시다.' 우리는 우리가 의도하는 것을 자유롭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켜야 할 행동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5. 그는 우리에게 은혜를 풍성하게 베푸시는 자이다.
우리는 그에게 속해 있는 그의 양일 뿐만 아니라 그가 돌보는 "그의 목장의 양"이다. "그가 먹이시는 무리이며," "그 손의 양이다." 왜냐하면 그의 뜻에 달려 있는 그의 목장의 양이기 때문이다"(95:7). 우리를 지으신 그는 우리를 보존하시며 우리에게 기뻐할 모든 좋은 것을 주신다.
💡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란 표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에 국한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앞서 강조된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면모와 더불어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양처럼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면모를 강조하는 표현어라 할 수 있다.
본문의 이러한 표현에는 위대하신 하나님, 온 땅과 하늘 위에 홀로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백성으로 삼으시고 양처럼 돌보시는 사실에 대한 감격이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시 전체의 맥락, 즉 온 땅을 향하여 하나님의 왕되심을 선포하고 그분 앞에 즐거어 부르며(1절), 그를 섬기며 노래하며 나아같 것을 촉구하는 내용(2절),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열방에 선포하는 본절 상반절의 내용을 감안할 때 이는 이스라엘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까지도 포괄하는 표현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즉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들을 ‘그의 백성이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며 이스라엘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의 기르시는 양’ 이란 표현도 가능한 것이다. 물론 당시 시인이 신약 시대에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백성어 되며 목자어신 하나님의 언도를 받게 될 것이란 사실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예언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본시 전체의 표현들과 연결시켜 볼 때 본문어 장차 있을 구원의 확산과 모든 만민들이 앙과 같이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될 장면을 그려주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6. 그는 무한한 자비와 선하심의 하나님이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5절), 선을 행하신다. "대저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그것은 결코 마르지 않는 샘이다. 자비로 성화된 사람인 성도는 영원까지 자비의 영광스런 기념이 될 것이다.
7. 그는 신성한 진리와 신실의 하나님이다.
"그 성실하심이 때때로 미치리로다."
그의 어떠한 말씀도 낡은 것으로 철폐된 것으로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약속은 모든 자손에게 대대에 신실하게 지켜질 것이다.
결론
💡 이상에서 살펴본 본시는 제95편 이후 계속되어온 저자 미상의 신정시 모음집에서 마지막에 배치된 시로서 이 시들의 결론적인 성격을 지닌다.
즉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노래하는 신정시 모음집 마지막 시인 본시에서 시인은 창조자요 목양자로서의 하나님의 면모를 부각시키고 여호와의 인자와 성실의 영원함을 선언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찬양해야 하는 필연성을 간결하면서도 함축 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특히 본시가 계속적으로 명령형 동사를 사용하여 하나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경배할 것을 촉구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의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신정시 모음의 마지막 시에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 찬양의 명령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만민에게 주어지는 것은
- 하나님이 만민의 하나님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 메시야의 오심으로 복음이 만민에게 확산되는 신약 시대를 내다본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시편은 구약 시대 성도들의 노래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보다 선명하게 느끼고 있는 신약 시대 우리 성도들어 더 크게 소리 높여 불러야 할 노래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