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6월 4일 화요일 묵상구절 시편 114편

Jeehyun 2024. 6. 4. 22:46

맥체인성경읽기

신명기 8, 시편 91, 이사야 36, 요한계시록 6

묵상구절

114:1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114:2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114:3 바다가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니

114:4 산들은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 같이 뛰었도다

114:5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함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찌함인가

114:6 너희 산들아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들 같이 뛰놂은 어찌함인가

114:7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114:8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매튜헨리/옥스퍼드

- 선민사의 시발점인 여호와의 출애굽 구원 역사 회상 -

(저자: 미상, 분류: 감사 예배시)

서론

 💡 본시는 시편 150편 가운데 표제가 없는 34편 중 하나이다.

따라서 본시는 누가,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던 시절 익명의 시인이 귀환민들로 하여금 과거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출애굽 사건을 희상케 함으로써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구원의 역사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본시를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핵심내용

이러한 본시에서 시인은 특별히 출애굽 사건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

출애굽이라는 주제는 시편에서도 가장 빈번하게 등장할만큼 중요한 주제로서 구약 선민 이스라엘에게 뿐만 아니라 신약 선민인 성도들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선민의 구속 사건인 출애굽 역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만세 전에 택하신 백성들을 구속하실 사건을 예표하기 때문이다.

한편 본시는 제1할렐시로 분류되지만 본시를 시작하는 서두에 다른 할렐시의 경우와 같이 독자들을 찬양으로 초청하거나 권면하는 어떠한 서언도 나오지 않는다.

즉 시인은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간다.

혹자는 이를 마치 넘치는 시적 격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시인이 청중들의 찬양 촉구조차 생략하고 중심 주제로 곧장 뛰어들어간 것으로 이해한다(Spurgeon).

본시는 처음부터 마지막 절까지 매절마다 대구법을 사용하고 있어 외형상 조화와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 1,2절

선민사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출애굽 사건의 의의를 천명.

후반부 3-8절

출애굽 사건 과정에 있었던 여호와의 예표적 구원 역사를 회상.

특히 시인은 여기서 출애굽 사건 때 일어난 이적들을 특유외 의인법을 사용하여 생동감 있게 표현함으로써 시를 읽고 듣는 이들로 하여금 마치 출애굽 당시의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송축함(시편 114:1-8)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옛 시대" 즉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를 기억하면서, 저희의 조상들이 그들에게 말해 준 기적들을 회상하고 있다(삿 6:13). 죄책감이 없어져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이 자비에 대한 의식도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들 결코 잊혀져서는 아니 될 것이다.

Ⅰ. 하나님께서 높은 손과 내뻗치는 팔로 속박된 집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인도해내셨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다"(1절).

그들은 은밀하게 빠져 나오지 않았으며, 쫓겨서 추방당하지 않았으며, 공명정대하게 나왔고, 모든 영광의 표식들을 가지고서 행진해 나왔다. 그들은 저희를 야만스럽게 부리던 야만적인 민족으로부터 나왔고, "알지 못하던 말씀"(81:5)을 사용하던 민족으로부터 나왔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치 저희 자신들의 언어를 순수하게 보존한 것으로 보이며, 그들의 압제자의 언어를 배우려는 관심은 기울이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과 이러한 구별을 나타냄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구원의 징조를 간직했다.


💡 114:1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 야곱의 집안
    = 상반절의 ‘이스라엘’ 전체를 나타내는 대유법적 표현.
    • 특별히 애굽으로 내려갔던 사람들이 야곱 가족이었고 이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는 많은 숫자를 이루며 번성하였기에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야곱의 집'이라고 표현한 것.
  • 언어가 다른 민족
    • 애굽인들
    • 사실 애굽인들과 히브리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근본적으로 달랐으므로 애굽인들을 가리켜 ‘다른 언어를 말하는 민족' 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그러나 이에는 보다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시인이 여기서 이 표현을 사용한 이유
      1. 히브리인들과 애굽인들의 가치관이 확연히 다를 뿐더러 서로 융화될 수도 없고 융화되지도 않는 이질적인 민족이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2.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 ‘다른 언어를 말하는 민족'은 적대적인 민족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사 28:11; 렘 5:15).
    • 다시 말해 이러한 표현의 의도에는
      • 애굽인들이 하나님을 모르며,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과거 이스라엘 민족들을 너무나 가혹하게 다룬 민족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었다고 볼 수 있다.
      • 헬라어 구약 성경 역본언 70인역(LXX)은 이를 ‘야만인’ 이란 의미가 있는 ‘바르바루(poppdpou) '로 번역하였는데 이러한 번역 역시 그들의 폭력적이며 잔인한 성향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Ⅱ. 그가 스스로 저희의 세속적인 제도와 거룩한 제도를 조직하셨다는 사실이다(2절).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하나님이 그들을 저희의 압제자의 손에서 구출해 내셨을 때, 그것은 "그들이 그를 섬기게 하려 함이요, 거룩함과 의로움에서," 그리고 경건한 예배의 의무에서, 도덕적 율법에 복종하는 데서, 그들의 모든 생에서 그를 섬기게 하려 하신 것이다. "내 백성을 가게 하라.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나를 섬기게 하려 함이니라."


💡 114:2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유다 = 이스라엘 전체.

‘성소’

  • 하나님임재의 상징적 처소.
  • 따라서 유다가 하나님의 성소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유다에 임재하시겠다는 의미이다. 이는 다시 말해 유다로 지칭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의미이다.
  • 사실 그 이전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그러나 출애굽을 계기로 그들이 시내산에서 언약을 수여받았고 하나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성막이 그들 가운데 세워짐으로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지금 시인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다’

  • ‘영토’ = 영토의 의미만이 아니라 ‘통치’ ‘통치권’의 의미도 있다.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통치하에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 된다.
  • 본절에서 시인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지금까지 애굽의 통치를 받던 이스라엘이 출애굽으로 인하여 이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즉 이스라엘은 구약 선민으로 부름 받은 영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항상 그 백성 위에 임할 것이라는 확실한 보증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1.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 그의 성소를 두셨으며, 거기에서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특별한 표징들을 보여 주셨으며, 그들의 경의와 예물을 받기로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성소를 모시고 있는 자들은 행복하다(출 25:8; 겔 37:26 참조). 더욱이 여기 나타난 유다와 같이 그 "성소"가 되며, 하나님이 사시는 성전이 될 때 더욱 더 행복하며, 그들에게는 "여호와께 경외함"이라고 기록된다.

2.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그의 나라를 세우시며, 그 자신이 저희의 율법수여자요, 심판자가 되셨으며, 따라서 저희의 나라는 신정(神政)이 되었다.

"여호와가 저희들의 왕이 되셨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토이지만, 이스라엘은 특별히 그러하다. 하나님의 성소라는 것은 그의 영토임에 틀림 없다. 그들은 단지 그 율법에 따르는 그의 집의 특권을 가질 뿐이다. 이러한 결과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속하셨으며 그는 우리를 하나님의 예배에로 인도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거기에 참여케 하신다.

Ⅲ.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 앞에서 홍해가 나누어지고, 그들에게는 구원이 되고 그들의 적에게는 파멸을 초래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요단강이 나누어지고, 그들에게는 영광이 되고 그들의 적에게는 공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3절).

"바다는 이를 보았다."

즉 거기에서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이 그의 영토가 되는 것을" 보았고 결국 "도망하였다." 그리하여 "요단은 물러갔으며," 그의 물결에는 대적할 수 없는 제방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머리였으며, 따라서 물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길을 내어 주고 그들을 위한 자리를 제공하고 물러나야 했으며,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물은 그 본성과는 달리 퇴거해야만 하는 것이다.


💡 114:3 바다가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니

  • 앞선 1, 2절에서 시인은 선민 역사의 시발점이 되는 출애굽 사건의 의의를 선언하였다.
  • 이제 본절 이하 8절에서는 출애굽 사건 과정에 있었던 여호와의 예표적 구원 역사를 회상한다. 여기서는 대구법과 더불어 특히 의인법과 과장법이 사용되어 시의 활력을 더하고 있다.

‘그 바다’ = 홍해

  • 히브리어 어순상 본절의 문장은 동사와 주어의 위치를 도치시켜 ‘바다’를 강조한다.
  • 이처럼 바다를 강조하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신격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바다조차 하나님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음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 본문의 자구만으로는 바다가 무엇을 보고 달아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문맥상 1,2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여호와의 구원의 역사를 바다가 보고 놀란 것으로 의인화하여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본문은 바다가 초자연적언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달아났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사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발행할 때부터 하나님은 구름기등과 불기등으로 이스라엘을 밤낮없이 돌보시고 인도하셨다. 바다는 이러한 구름기둥, 불기둥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임재와 보호를 보고 이스라엘이 갈 길을 열어주기 위해 달아났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도망하여’

  • 홍해가 양 옆으로 갈라지고 바닥을 드러내는 모습을 의인화시켜 묘사한 것.

‘요단은 물러갔으니’

  • 요단강 도하 사건은 이보다 40여년 견에 었었던 홍해 도하 사건과 분명히 다른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둘 다 유사한 모티프를 지닌 것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을 주시기 위하여 베푸신 초자연적인 사건이다.
  • 따라서 시인은 출애굽 시작과 마지막에 있었으며 앙자 간에 40여년의 시간적 간격이 있는 이 두 사건을 같은 구절에서 언급한 것이다. 

시편 기자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하여 시적인 음률로 묻는다(5절).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찜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찜인고?" 그리고 바다는 대답한다(7절). 그것은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었다.


 💡 114:5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함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찌함인가

시인은 이러한 이적의 역사를 일으킨 주체에 대한 강조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무생물들이 대답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바다와 강들을 대상으로 그것들이 일으킨 행동들에 대한 원인을 직접 질문한다.

결국 이는 진정한 찬양과 경탄의 대상은 놀라운 일을 일으킨 자연물들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이러한 놀라운 일을 일으키신 원인자이신 여호와임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었다.

1. 기적의 사실.

즉 그 기적은 자연의 힘이나 어떤 자연적 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말씀을 주시는 "주 앞에서" 것이다.

2. 기적의 자비.

"네가 도망함은 어찜인고?" 그것은 희롱하기 위한 것이었는가? 그것은 단지 사람들을 놀리기 위한 것이었는가? 아니다! 그것은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된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친절에서 이뤄진 것이다. 택한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은 이같이 "강에서 노여워하시며," 예언자가 말한 바대로 "바다를 대하여 성내셨다"(합 3:8-13; 사 51:10; 시 58:11).

3. 기적의 경이와 놀라움.

누가 그러한 일에 해서 생각할 수 있었는가?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위하여 자연 과정이 변화되며, 그 기본적인 법칙이 폐지될 수 있을 것인가? 물론이다. "에돔 방백은 놀라고, 모압 영웅은 떨림에 잡힌다"(출 15:15).

4.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영광이 주어졌다.

이스라엘은 바다를 능가하도록 가르침을 받았으며, 요단은 그 앞에 설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때가 그의 백성의 구속을 위하여 임하시면 바다도 요단도 깊지 못하며 넓지 못하다. 그 때에는 바다가 자체를 고집한다고 하더라도 둘로 나누어지며, 뒤로 물러선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에 적용된다.

(1) 세상에서 그리스도 교회의 성장에 적용된다.

사탄과 어둠의 전세가 떨며 그 같이 진동하며 굴종하는 것은 무엇인가?(막 1:34) 이방 선지자들이 떨고 침묵하며 귀머거리가 되며 죽은 자처럼 떨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저희의 우상 숭배자들과 마술사들이 떨며, 복음 앞에서 사라지며, 햇볕을 받는 눈과 같이 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복음의 박해자들과 압제자들이 떨며, 그들이 저희의 의도를 단념하고 죄책감으로 머리를 감추며, 은둔처를 위한 반석과 산을 찾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계 6:15) 복음과 함께 수반하는 권능은 "주 앞에" 있다.

(2) 마음에 나타나는 은총의 역사에 적용된다.

어떤 흐름이 재생된 영혼에서 나타나는가? 탐욕에 빠진 자와 부패한 자가 떨며 뒤로 숨으며, 편견이 없어지고, 전 인격이 새롭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공상이 "파해지는 것"(고후 10:5)은 하나님의 성령 앞에서 이뤄지는 일이다.


Ⅳ.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위하여 시내산에 내려오셨을 때, 땅이 흔들렸고 떨었다는 사실이다(4절).

"산들은 수양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같이 뛰놀았다."

그 때에 그들은 놀랐거나 즐겁게 뛰었다. 흐르는 물을 고정시키며 멈추게 하는 바로 그 권세가 똑같이 굳건한 산들을 흔들며 떨게 한다. 왜냐하면 자연의 모든 권세가 자연의 하나님의 감시 아래 있기 때문이다. 산들과 작은 산들은 하나님 앞에서 수양과 어린 양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크며 높은 산맥일지라도 "그들이" 목자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같이, 그에 의해서 지배된다.

여호와 앞에서 산들이 떠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고서도 요동치 않는 인간의 자녀들의 어리석음과 고함을 부끄럽게 한다. 시편 기자는 산들과 작은 산들에게 무엇이 그들을 이같이 뛰며 떨게 하였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그는 바다를 향한 것과 같이 그들에게 답한다. 산들 뿐만 아니라 땅 자체도 "주 앞에서" 떨 수밖에 없었다고(7절)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죄를 향한 저주 아래 놓여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시 104:32; 사 64:3, 4 참조). 이와 같이 작은 산들과 산들을 뛸 수 있게 하신 자는 원한다면 그의 적대자들 중 가장 교만한 자의 힘과 영혼을 소산(消散)시키며 그들을 떨게 하실 수 있다.


💡 114:4 산들은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 같이 뛰었도다

‘뛰놀며’

  • 기뻐서 춤추듯이 뛰어오르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표현.
  • 본문에서는 율법 수여시 발생한 지진을 산들이 여호와의 역사를 기뻐하여 추는 춤으로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앞선 3절에서 여호와의 역사하심에 두려워 떨며 도망하는 강과 바다의 모습을 묘사하였던 시인은, 본절에 이르러 오히려 기뻐하며 춤추는 산들의 모습을 묘사한다.

시인의 이러한 묘사는

  • 단순히 강과 바다가 두려움을 느끼고 산둘이 기쁨을 느꼈음을 대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역사하심에 온 천지가 너무나 확연한 반응을 보였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 본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처럼 사람만이 하나님외 구원 역사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들도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 이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위대함과 전우주성을 함축하는 표현들이라 할 수 있다.

💡 114:6 너희 산들아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들 같이 뛰놂은 어찌함인가

산들도

  • 여호와의 위엄과 영광, 그러고 그의 역사하심 앞에 두려워하기도 하고 또 기뻐 뛰기도 하듯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하심을 경험한 인간들도

-그분을 진정으로 경외하며,

-또한 그분의 은혜 베푸심에 대해 진정으로 기뻐해야 한다.


💡 114:7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이적의 현상들보다는 그 이면에 역사하시며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그 앞에 두려워해야 했다.

오늘날 우리도 신앙 생활에 있어서
-눈에 보이는 현상에 집착하기 쉬우나,
-믿음의 눈을 밝혀 그 이면에서 역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아야 할 것이다.


Ⅴ. 하나님께서 반석으로부터 물을 공급하시며, 메마르고 모래뿐인 사막을 통해 그 백성을 인도하셨다는 사실이다.

땅과 그 모든 거민들이 "반석을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는"(8절) 하나님 앞에서 떠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이 행할 수 없는 것을 누가 그렇게 이루었을까? 전능한 권세가 물을 변하여 이스라엘에게 벽과 같은 바위가 되게 하시며(출 14:22), 똑같이 바위를 이스라엘에게는 우물이 되도록 변화시킨다. 기적에 의해서 그들이 보호받은 것과 같이 그들은 또한 공급받았으며, 기적 앞에 서게 되었다. 높이 선 물이 그러했고, 물의 샘이 바위로, 차돌 바위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그 바위는 그리스도였다"(고전 10:4). 왜냐하면 그는 그의 이스라엘에게 생명수의 원천이며, 그로부터 이스라엘은 은혜 위에 은혜를 받기 때문이다.


💡 114:8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본절은 반석에서 물을 내신 여호와 하나님의 초자연적 이적을 찬양하는 내용이다(출17:6).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물이 없어 모세를 원망하였고, 이때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이적을 베푸셨다. 본절에서 시인이 반석이 번하여 마치 물이 고여 있는 연못이 된 것처럼 묘사한 것은 과장법을 사용한 문학적 표현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반석에서 연못을 이를만큼 많은 물을 나오게 하시는 분이므로 7절에서처럼 땅이 떨며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론

 💡 이상에서 살펴본 본시는 바벨론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어 해방되는 사건에 즈음하여 이 일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대표적인 구원 사건 가운데 하나인 과거 출애굽 사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언 역사하심에 의하여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지어진 시로 보인다.

즉 시인은 선민사의 시발점인 출애굽 구원 역사를 희상하며 새로운 역사의 분기점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다시 확인할 수 있도록 독자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광장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제105편이나 제135편도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본시와 유사한 점이 많다.

그러나 본시는 매우 짧음에도 불구하고 시 전체에서 대구범•의인법•과장법등의 다양한 문예적 기교를 사용하며 간결하고 힘이 있는 문체를 구사하여 독자들에게 매우 강렬하고도 흥겨운 감동을 전달하는 특징적인 시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