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9월 5일 목요일 묵상구절 전9:1-12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Jeehyun 2024. 9. 5. 22:10

맥체인성경읽기

사무엘상 29, 30, 고린도전서 10, 에스겔 8, 시편 47

묵상구절

9:1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9:2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9:3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9:4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9:5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9:6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 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

9: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9:8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9: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9: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9:11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9:12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섭리와 신비 (전도서 9:1-3)

현자의 돌(philosophers stone 연금술사들이 구하던 신비한 돌로서 납 따위의 비금속을 금이나 은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다고 상상되었다)을 찾는 자들은 그들이 비록 구하던 것을 찾을 수 없었지만 탐구하는 도중 많은 다른 유용한 발견과 실험에 마주치게 된다는 사실을 관찰하였다. 이처럼, 솔로몬도 앞 장의 결귀(結句)부분에서, "하나님의 행사를 알려고 자기 마음을 기울였고," 탐구하는 데 많은 고충을 겪었지만,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그의 탐색에 대한 보상을 풍부히 발견하여 다소 만족을 얻었는데, 여기에서 이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그는 마음을 다해 이 모든 일을" 살피고 그것을 심사숙고하여 헤아려 보았으니, 이는 그가 이 일을 "선포"하여 타인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꼭 선언해야 할 일이 있다면 우리는 선포하기 전에 먼저 그것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한 번 말하기 전에 두 번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살펴 생각해 본"일이라면 그것을 "선포"해야 한다.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연구하다가 부딪친 큰 난점은 편안과 고난이 착한 사람, 악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대동소이하게 분배된다는 것과, 사건이 선인과 악인에게 무차별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이었다. 이런 점은 다수의 지자들과 사색가들에게 곤혹을 안겨주었다.

솔로몬은 본문에서 이 점에 대해 논술하는데, 그는 이런 "하나님의 행사"를 규명하려고 하지는 않으나 이것이 우리에게 거침돌이 되지 않도록 얘기하고 있다.

Ⅰ. 그는 강한 힘을 가진 유혹을 서술하기에 앞서 한 가지의 크고도 명명백백한 진리를 제시한다.

그는 이 진리를 고수하겠다고 다짐하는데, 이 진리는 굳게 믿기만 한다면 유혹의 힘을 충분히 분쇄시켜 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는 바로 이것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다. 욥은 이 문제에 대한 진술을 하기에 앞서,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시다는 교의를 제시한다(욥 24:1). 한편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원리로서 내놓으며(렘 12:1), 또 다른 예언자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교훈으로서 못박는다(합 1:13). 이에 대하여 시편 기자는 자기 백성에게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특유한 은총을 든다(시 73:1). 솔로몬이 여기에서 단단히 믿고 고수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비록 선과 악이 무차별 대우를 받는 것 같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백성만큼은 특별히 보살피고 생각해 주신다는 점이다. "의인과 지혜자와 그들의 행하는 일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며," 그의 특별하신 보호와 인도 하에 있다.

그들의 모든 일은 하나님께 의해 그들에게 유익하도록 처리된다. 그들의 지혜롭고도 선한 모든 행위는 "그의 손에 있어서," 이 세상에서 보상되지 않더라도 저 세상에서는 보상을 얻을 것이다. 그들은 마치 "그들의 원수 손에" 넘어가 버린 것같이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면 그들에게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한다."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도 우연히 일어나는 게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되어진 것들이며, 그의 의도가 저들이 볼 때에는 극히 자기들에게 해로운 것 같았던 것도 실은 그들을 위한 것임이 표명될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간에 하나님의 모든 성도들은 그의 수중에 있다는 점을 생각하여 안심하도록 하자(신 33:3; 요 10:29; 시 31:15).


 📖9:1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Ⅱ.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미움이 인간의 외적인 형편으로써 측량되거나 판단될 수 없다는 것을 하나의 법칙으로서 설정하고 있다.

만약 번영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실한 표시이고 고난이 그의 증오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우리가 악인과 경건한 자가 비슷한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을 보고 화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전제는 진실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 앞에 있는 모든 것으로써 사랑인지 미움인지 알 자는 아무도 없다." 즉 그 모든 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며 감각의 대상이 되는 사물로서 이것을 가지고는 어떤 사람도 사랑인지 미움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것으로써 그의 애증(愛憎)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마음을 다 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이로써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반목되는 육욕적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그의 진로 아래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내세에 있을 일, 곧 인간의 영원한 상태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 아래 있느냐 미움 아래 있느냐에 따라 인간이 행복하거나 불행해진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러나 인간의 행, 불행은 세상의 미소를 받느냐 찡그림을 받느냐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이 한 의로운 인간을 사랑하신다면(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확실하게)세상이 비록 그에게 눈살을 찌푸린다고 하더라도 그는 행복하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이 악인을 미워하신다면(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확실하게)비록 세상이 그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비참하다.

이와 같은 사실을 감지한다면 사건이 선악을 구별하지 않고 뒤죽박죽으로 분배된다는 데 대한 불쾌감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9:2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Ⅲ. 이런 원리들을 설정해 놓은 다음 그는 "모든 자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전에도 항상 그러해 왔으므로 지금도, 또 우리와 우리 가족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해서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혹자는 이 귀절에서 그 다음 12절까지는, 하나님이 섭리하신다는 교리에 반대하는 무신론자의 추리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것이, 한 발 양보해서 표현한 솔로몬의 말이라고 받아 들인다. 그가 이처럼 구애받지 않고 양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원칙으로 삼은 진리들이 자기가 허용함으로써 빚어질 어떤 진리의 오용에 대해서도 충분히 방어를 할 수 있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2절)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악인의 성격과 악인의 성격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몇몇 본보기로 이 큰 차이가 대조되고 있는데 이것은 비록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모두 일반"이지만 그래도 그것은 도덕적 선과 악사이가 영원한 구별을 추호도 혼동시키지 않으며, 그 차이는 불변하게 남는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1) 의인은 "깨끗하며 정한 손과 순수한 마음"을 가진다. 악인은 "깨끗하지 않으며" 불결한 욕망의 지배하에 있어서 아마 "저들 자신의 눈에는 순수"하게 보일지 모르나 "자기들의 더러움으로 부터는 정하게 씻기지" 못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현세에서는 이 양자의 구별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 다른 세계에서는 정녕코 "정한 자와 정하지 못한 자, 귀한 자와 천한 자 간에" 차이를 두실 것이다.

(2) 의인은 "제사를 드린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그를 공경하고 내적이고 동시에 외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본분으로 삼는다. 악인은 "제사를 드리지 않으니,"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는 태만하면서 자기 명예와 결부된 것이면 그 어떤 것도 내놓기를 싫어한다. "전능자는 무엇인가?" "그들은 그를 섬겨야 하지 않는가?"

(3) 의인은 "선하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며, 세상에서 선을 행한다. 그러나 악인들은 하나님의 법과 인간의 법을 모두 어기며 천인이 공노(天人 共怒)하게 하는 "죄인들"이다.

(4) 악인은 "맹세"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경외심을 품지 않고 오히려 성급하고도 거짓으로 맹세함으로써 그의 이름을 모독한다. 그러나 의로운 자들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며," 맹세를 하지 않고 경외심과 함께 맹세를 받는다. 그가 선서하기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맹세란 하나님을 증인과 재판관으로 삼고 그에게 드리는 엄숙한 공소(控訴)인 까닭이다. 그가 서약을 한 경우에는 그 맹세를 깨뜨릴까봐 두려워하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이 의로우셔서 복수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1. 이 세상에서는 의인과 악인의 처지 사이에 거의 차이가 없다.

이 양자가 겪는 사건은 "일반이다." 다윗은 부자인가? 나발도 부자였다. 아압은 전장에서 죽었는데 요시야도 그랬다. 요셉이 자기 왕 바로에게 총애를 받았듯이 하만도 그러했다. 나쁜 무화과는 바빌론으로 이송되었는가? 좋은 무화과도 마찬가지였다(렘 24:1). 그러나 전자와 후자에게 일어난 동일한 사건의 기원과 의도, 본질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또한 그 사건의 영향과 결과에 있어서도 대단히 상이하다. 비록 외양으로는 동일한 듯이 보일지라도 전자에게 나타난 섭리는 "생명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맛"이고 후자에게 나타난 동일한 섭리는 "죽음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맛"이다.

Ⅳ. 그는 이 일이 지혜롭고 선한 자들에게는 매우 불공평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이것은 해 아래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 악한 것이니, 즉 가장 난처한 일이다(3절).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한 가지라는 점보다 나를 더 동요시킨 것은 없다. 그것은 무신론자들을 더욱 강하게 해 주며 행악자들의 손을 더 강화시켜 준다. 왜냐하면 이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은 악으로 가득하게 되며 나쁜 짓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들 안에서 충분히 발동하게 되는 까닭이다(전 8:11). 그들이 의로운 자나 악한 자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매 한 가지임을 보게 되면, 그들은 이 사실로부터 하나님께는 자기들이 의롭든 악하든 매 일반이라는 악한 결론을 추리해 낸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을 충족시킴에 있어서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게 된다."


📖9:3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Ⅴ. 그는 의로운 자들의 행복이란 원리를 가지고 이 담화를 시작했듯이(의인들이 어떤 고난을 당하든지 간에 그들과 "그들의 일은 하나님의 손에 있어서", 선하신 손에 있는 그들은 더 행복할 수밖에 없다), 악인의 불행이란 원리를 가지고 결론지음으로써 이 큰 난제를 한층 명백하게 풀어낸다.

그들은 아무리 번영을 누린다고 하더라도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그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간다." 악행하는 자들의 번영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지금 미친 자들이다.

그들이 현재 복으로 누리고 있는 것 같이 보여지는 그들의 모든 즐거움은 단지 정신 이상자의 즐거움 꿈과 공상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우상에 미쳤으며"(렘 50:38),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데 미쳤다(행 26:11). 탕자가 회개했을 때는 "그가 제 정신이 들었다"고 표현하였는데(눅 15:17)이는 그가 이전엔 제 정신이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1. 그들은 곧 죽은 자들이 될 것이다.

"그들이 사는 동안에는" 굉장한 소란을 피우며 요란하게 살지만 "잠시 후면" 그들은 "죽은자들에게로 돌아가게 되고", 그들의 모든 허세와 세력에는 끝장이 온다. 그 때에 가서는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미친 짓과 죄에 광분한 것에 대하여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비록 차안(此岸)의 죽음에서는 의인과 악인이 매일반의 죽음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피안의 죽음에서는 이 양자 간에 굉장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죽음의 결과와 적절한 생의 향락 (전도서 9:4-10)

솔로몬은 앞서 초조한 마음에 "산 자보다 죽은 자를 더 칭찬"하였었으나(전 4:2), 여기에서는 죽음에 대비하고 더 나은 생에 대한 소망을 확실히 하는 데에는 생명이 더 유리하다는 것을 고려하고 마음이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Ⅰ. 그는 산 자가 죽은 자보다 더 유리하게 갖는 혜택을 보여 준다(4 - 6절).

1. 생명이 있는 곳에는 "희망이 있다." Dum spiro, spero 즉 "내가 호흡하는 동안에는 소망이 있다."

산 자의 특권은 그들이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또 상업이나 교제로 써 "산 자 중에 참예한다" 는 점이다. 설령 인간의 형편이 아무리 나쁜 경우에 봉착해 있더라도 그것이 시정될 "소망은 있다"(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것이다). 설령 "마음에 악이 가득하며 그안에 미친 것이 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이 있는 한 "소망이 있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다음에 복된 변화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자에게 돌아간"(3절) 다음이면 그 때는 너무 늦다. 과거에 불결했던 자는 여전히 불결한 채로 남을 것이며, 영원히 더러울 것이다. 사람이 비록 무용지물로 팽개쳐진다해도, 그들이 산 자와 결합되어 있는 동안에는 다시 뿌리를 박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 살아 있는 자는 무엇인가 유용하며 어떤 유익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죽은 자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더 나은 것이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미천한 걸인도 살아 있으면 이 세상의 위안물을 누리고 그것에 봉사하나 가장 위대한 군왕도 일단 죽으면 이 세상에 대해 아무런 봉사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2. 생명이 있는 동안은 죽음에 대비할 기회를 가진다.

"산 자는" 죽은 자가 아무런 지식을 갖지 못 하는 일에 대해 "안다." 특히 그들은 "자기들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며" 이 지식을 장차 확실히 올, 또는 갑작스럽게 닥쳐올지도 모르는 큰 변화에 대비하도록 해 준다. "산 자는 자기들이 죽을 줄을 알 수"밖에 없다. 즉 그들은 자기들이 꼭 죽어야 하는 존재임을 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죽음의 사형 선고 하에 있음을 안다. 그들은 이미 죽음의 사자에게 구금당하고 있으며, 스스로 쇠퇴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것은 유용하고도 꼭 필요한 지식이다.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에게 할 일이 있다면 죽음을 맞을 준비하는 것 외에 무잇이 있으랴? "산 자는 그들이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올 일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죽은 자들은 자기들이 죽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때는 너무 늦는다. 그들은 이미 큰 심연이 가로 놓인 저쪽 편에 있는 것이다.


 📖9:4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3. 우리에게 있어서는 생명이 가버릴 때에는 이 모든 세상이 함께 가버리는 것이다.


📖9:5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1) 죽음과 함께 우리가 알고 지내던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끝났다. "죽은 자는" 그들이 생전에 그토록 익히 알던 것을 "아무 것도 모른다."

또한 죽은 자들은 그 후손이 행하는 일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른다. 그들은 "어두움 속으로" 옮겨진다(욥 10:22).

(2)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던 모든 향락에도 종말이 온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애썼던 자기들의 노고에 대해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고," 자기들이 획득한 모든 것을 타인들에게 남겨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죽은 자가 얻는 상은 거룩한 행위에 대한 것이지 세속적 행동에 대한 것이 아니다. 양식과 배(腹)는 함께 멸망당할 것이다(요 6:27; 고전 6:13). 이것은 6절에서 설명되고 있다. 저희가 "영원한 분깃"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던 일과 "해 아래서 행하여" 얻어지는 일에서 "저희는 영영히 분복을 얻지 못한다." 이 세상의 일들은 영원한 분깃이 되지 못하기에 영혼에 대한 분복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세상 것을 택하여 "자기들이 좋은 것"으로 삼는 자들은 "이 생에서" 만 "분깃"을 받는 자들이다(시 17:14). 이 세상은 이생에서만 종신 연금이 될 수 있고, "영원한 분복"이 될 수는 없다.

(3) 그들의 이름에도 종말이 온다.

그 이름이 오래 살아 남는 자들은 아주 극소수일 따름이다. 무덤은 망각의 땅이니, 이는 거기에 들어간 자들의 "기억이" 곧 "잊혀지는 까닭이다." 그들의 "장소는 그들을 더 이상 알지 못하며", 그들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우던 땅조차 그들을 알지 못한다.

(4) 그들이 애정과 우정과 증오에도 종말이 온다.

"그들의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이제는 없어졌다." 그들이 사랑했던 좋은 일들과 미워했던 나쁜 일들, 그리고 그들이 시기했던 남들의 번영이 이제는 전부 그들에게 종언을 고한다. 죽음은 서로 사랑하는 자들을 이별하게 만들며 그들이 우정에 막을 내린다. 또한 서로 미워하는 자들도 헤어지게 만들며 그들의 분쟁에 종말을 고한다. Actio moritur cum persona 즉 "사람과 그의 행위는 함께 죽는다." 죽음의 땅에서는 우리가 친구 때문에 더 나아질 수도 없으며(친구의 사랑도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원수 때문에 더 고생하는 법도 없다 ─ 즉 그들의 증오와 시기도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한다. "거기에는 악인의 행패가 끝이 난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흠뻑 사랑해주고 충족시켜 주는 것들이, 또 우리가 그토록 관심을 갖고 그렇게도 질투하는 것들이 거기에서는 모두 끝이 난다.


📖9:6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 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


Ⅱ. 여기에서 그는 우리 생이 계속되는 동안 우리 삶을 가능한 대로 잘 이용하고, 그 삶에 존재하는 것을 현명하게 처리해 나가는 게 지혜롭다고 추론한다.

  1. 우리는 우리가 사는 동안에 생의 위안을 맛보고 생의 향락 중 우리 몫을 즐겁게 취하도록 하자.

솔로몬은 그 자신이 감각적 즐거움의 함정에 빠져서 그것을 남용했었기 때문에 타인들에게 그 위험을 경고해 주는데, 그는 향락에 대한 전면적인 금지를 하지는 않고 건실하고도 적당하게 선용하도록 하라고 가리켜 준다. 우리는 세상을 이용해도 좋으나 남용해서는 안 되며,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취해도 되지만 그 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1) 이 즐거움에 대한 개개의 사례가 규정된다. "네가 맥이 빠지고 우울해지거든 네 길을 가라. 너는 바보처럼 만사를 잊고 가서(원래 우리는 우매한 자이지만)보다 나은 기분을가져라."

[1] "네 마음을 편하고 즐겁게 가져라. 그리고 나서 네 안에 기쁨과 즐거운 마음을 품어라."

"선한 마음은"(위의 단어는 이러한 뜻이다) 육욕적 환락과 감각적 즐거움에서 구별된다. 육체적 쾌락은 마음의 악이며, 마음에 있는 많은 악한 것의 증후가 되기도 하고 그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자신을 즐기는 동시에 친구들과 우리 하나님도 즐겁게 해야 하며 우리의 선한 양심을 지키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는 이런 즐거움을 누리는 동안 아무 것도 우리를 동요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것을 사용하는 가운데에 그를 즐거움으로 섬기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을 타인들한테 전달하는 데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지나친 걱정과 근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해야한다. 우리는 이스라엘인들과 같이 "애곡하는 중에" 우리 "떡을 먹어서는 안 되고"(신 26:14), 그리스도인들처럼 "기쁨"과 관대한 "마음"으로 떡을 먹어야 한다(행 2:46)(신명기 28:47 참조).


📖9: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2]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위안물과 향락물을 이용하라. 네 떡을 먹고 네 포도주를 마시라. 즉 네 것을 먹고 마시되, 남의 것을 먹고 마시지 말아라. 기만의 떡은 먹지 말며 폭력의 술은 마시지 말고, 정직하게 얻을 것을 먹고 마시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먹고 마셔도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할 것이며 그것에서 아무런 축복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네 떡과 네 포도주는 네 지위와 처지에 어울리도록 먹고 마셔야 하며, 네 형편 그 이상으로 사치하거나 그 이하로 옹색한 음식을 취하지 말아라. 너는 단지 청지기로서 하나님이 네게 주신 것을 그 맡은 목적에 합당하도록 쓰도록 하자."

[3] "너의 유쾌함을 증명하라(8절)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라. 네 비용의 지출을 균제하라. 네 긍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음식을 너무 줄여서 먹지 말며, 네 육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옷을 너무 초라하게 입지도 말아라. 깔끔해라. 깨끗한 세마포를 입으며 지저분하게 하지 말아라."

혹은 기쁨과 즐거움의 표시로 "네 의복을 희게 하라"라고 해석할 수 있다. 기쁨과 즐거움은 흰 옷으로 표현되었다(계 3:4). "그리고 기쁨의 표시로 한 걸음 더 나아가 네 머리에 적당한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향연에서 이 향유의 즐거움을 허용하셨고(마 26:7), 다윗은 하나님의 아낌없는 선물 중에서 이 향유의 즐거움을 중히 여긴다(시 23:5). "주께서 네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나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관능의 즐거움에 행복을 두고 그것에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절제와 현명이란 한계 안에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않고, 가능한 한 안락하게 이용하라는 말이다.


📖9:8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4] "네 친족에게 기분 좋도록 해 주어라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기쁘게 살지어다. 네 주위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 아랑곳 하지 않고 네 자신만 중시하여 네 즐거움에만 열중하지 말고, 그들도 너와 함께 즐거움을 나누게 편안하도록 해 주어라. 아내를 얻어라. 그 이유는 낙원에서 조차 사람이 혼자 있는 게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 아내 즉 한 아내만을 갖도록 하고 아내를 많이 얻지 말아라"(솔로몬은 이 일의 불행을 이미 발견하였었다). "한 아내만 고수하고 그 외의 딴 여인들과는 아무 관계도 맺지 말아라." 만약 자기 아내를 속이면서 부정직하게 산다면 어떻게 그가 그 아내와 기쁘게 생활할 수 있겠는가? "네 아내를 사랑하라. 네가 사랑하는 아내라면 너는 그녀와 함께 즐거이 살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 관계의 임무를 다 할 때 우리는 그들로부터 위안을 기대할 수 있다. 잠언 5장 19절을 참조하라. "네 아내와 함께 살며 그녀와 어울리는 것을 즐거워하라. 네 아내와 즐겁게 살아라.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있을 때 제일 즐거워 하라. 네 포도나무와 감람나무인 가족을 기뻐하라."

(2) 이 즐거움에 필요한 조건.

"만일 하나님께서 네가 한 일을 이제 열납하시거든 기뻐하고 즐거운 마음을 품어라. 만일 네가 하나님께 화해되고 용납된다면 너는 즐거워할 만한 이유를 가지는 것이며, 그렇지 못하다면 즐거울 만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아! 즐거워하지 말라.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이는 네가 행음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 갔음이라(호 9:1)."

우리의 첫째 되는 관심은 하나님과 화해하여 그의 은총을 얻는 것과 그가 받아들이실 만한 일을 행하는 데 있어야 한다. 그러고 난 뒤 "네 길을 가서 네 식물을 기쁨으로 먹으라."

하나님께 그 일들이 열납된 자들을 즐거워할 만한 이유가 있으며 또 즐거워해야만 한다. "네가 너의 제사 떡을 기쁨으로 먹으며 네 제주(祭酒)를 즐거운 마음으로 마신다면 하나님은 네가 하는 일을 기쁘게 받으신다. 네 경건한 예배가 거룩한 기쁨으로 수행될 때 그것은 하나님께 즐거움이 된다. 하나님은 자기의 종들이 일하면서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시며, 찬송은 그를 선하신 주인이라고 선포한다.


 📖9: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3) 즐겁게 살아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이 모두가 이 세상을 통과하는 네 길을 편안하고 안락하게 해 주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네 평생의 날들은 네 헛됨의 날이다. 이곳에는 고통과 실망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네가 어쩔 도리가 없을 때 슬퍼하고 한탄하게 되는 시간이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할 수 있을 때 즐거이 살고 내일에 대한 생각과 염려로 괴로워 하지 말아라. 그 날 걱정은 그 날로 족하니라. 은혜로운 마음의 평정은 세상의 허무성에 대한 해독제이다."

[2] "그것이 네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전부이다. 그것은 이 생의 일들에서 얻은 네 분복이다.

네가 얻을 보다 나은 분복을 하나님과 저 다른 생에 있으며, 네 수고에 대한 보다 나은 보상은 신앙 생활에 있다. 그러나 해 아래서 있는 일들로 고심하는 너의 그 수고에 대해서는 이것이 네가 기대할 수 있는 전부이다. 그러므로 너는 이것을 스스로 금하지 말라."

  1. 생명이 지속되는 한 우리는 이 생의 일에 전심전력 몰두하고, 또 일에 적당할 정도로 그 향락을 누려야 한다. "그러므로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먹되 네 영혼이 안심할 정도로 먹지는 말고(눅 12:19 처럼), 네 영혼으로 하여금 한층 더 고심하게 하여서, 여호와의 기쁨이 네 영혼의 힘이 되게 하고 그 수레 바퀴의 기름이 되게 하라"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10절).

📖9: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여기에서 다음 사실에 주목하자.

(1) 이 삶 속에는 획득해야 할 일 뿐만 아니라 행해야 할 일도 있으며, 우리가 탐구해야 할 주요 선(主要善)은 "우리가 행해야 마땅한 선"이다(전 2:3). 이 세계는 봉사의 세계이고, 장차 올 세계는 보상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영원에 대한 시련과 준비를 하는 세계이다. 우리는 이 땅에 용무가 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선한 행동을 목표로 하는 일이다.

(2) 기회는 의무의 여행(勵行)을 지시해 주며 그것을 촉진시켜 준다. 우리 손이 "행하려고 찾아 낸" 일이나 기회가 요구하는 일은 행해야 한다. 활동적인 손은 언제나 행해야 할 가치있는 일을 찾아낸다. 우리 손은 꼭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될 일을 행함으로써, 그 일에서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잠 17:16).

(3)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아무리 좋더라도 우리가 그 기회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그 행하는 과정중에 우리가 봉착하는 어려움과 실망이 아무리 크더라도 우리는 "우리 힘을 다하여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되며" 신중하고도 활기있게, 또 결단력을 가지고 행해야 한다.

추수일은 분망한 날이다. 우리를 햇볕이 쬐는 동안 건초(乾草)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우리의 구원을 이룩해 내는 일은 "우리 안에 모든 것으로" 행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 모두를 합해도 오히려 부족한 것이다.

(4) 여기에는 "때가 낮인 동안 우리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행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으니 "밤이 오면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요 9:4). 우리는 이제 일어서서 손 발이 닳도록 부지런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우리의 작업 시간이 곧 끝날 것이며 우리는 그 시간이 얼마나 속히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이 마감될 때 평생해야 할 이 종신의 사업이 끝나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영영 그것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네가 장차 들어가는 음부에는 할 일도 없고 행할 계획도 없으며 사색할 수 있는 지식도 실천을 위한 지혜도 없다." 우리는 누구할 것이 없이 다 무덤을 향해 가고 있다. 하루 하루가 지나갈수록 우리의 발걸음은 무덤에 더 가까워진다. 우리 발이 일단 무덤에 들어 설 때는 이미 살아서 저지른 잘못을 고친다는 것은 너무 늦으며, 회개하여 하나님과 화해한다는 것도, 영원한 생명을 위해 어떤 것을 저축한다는 것도 너무 늦은 일이다. 그런 일은 지금 행하지 않으면 영영 하지 못한다. 음부는 암흑과 침묵의 땅이다. 그러므로 거기에서는 우리의 영혼을 위한 어떤 일도 행할 수 없다.

그 일은 지금 행하지 않으면 다시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요 12:35).


희망의 좌절 (전도서 9:11,12)

전도자는 여기에서 세상의 헛됨을 한층 세밀히 증명하고 "우리의 모든 행사가 하나님의 손에 있으며" 우리 손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기 위하여, 미래사의 불확실성을 제시해 주며 장차 일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번번히 우리의 예상과 상반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행해야 할 일이라면 "우리의 힘을 다하여" 행하도록 하라고 우리에게 훈계하였었다(10절). 그러나 여기에서는 우리가 행할 일을 다 행하고 나면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두어야 하며, 그 성사를 확신하지 말도록 하라도 상기시켜 준다.

Ⅰ. 우리는 크게 기대했던 좋은 일들이 예상에 어긋나서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11절).

솔로몬은 친히 이 점을 관찰하였는데, 공적인 일이나 사적인 일을 막론하고 그 일들이 매우 합리적인 전망 및 확률과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Nulli fortunatam dedita est ut multa tentanti ubique respondeat, 즉 "행운은 인간의 기도(企圖)가 제아무리 우수하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성공을 확증해 줄 만큼 어느 누구에게도 쉽게 항복하지 않는다"(세네카). 일의 결과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을 만큼 모든 사람의 기대에 어긋나는 수가 많다. 이는 가장 높은 자라고 해서 주제넘지 못하게 하며 가장 낮은 자라도 낙심하지 않게 하고, 모두가 하나님께 의존한 가운데 살게 하기 위함이다. 모든 자를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9:11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1. 수단과 방편을 보아서는 극히 고무적이고 승산이 있던 일이 기대에 어긋나게 되는 경우를 그는 열거하고 있다.

 

(1) 누구든지 가장 발이 가벼운 자가 경주에서 우승하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빠른 경주자라고 해서 항상 선착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우발적 사고로 그들이 지체케 되거나, 아니면 너무 안심하고서 태만하다가 그들보다 느린 자들에게 기선을 빼앗긴다.

(2) 전투에서는 가장 수가 많고 강력한 군대가 언제나 승리하며, 일대 일의 승부에서는 용기 있고, 힘센 투사가 승리의 월계관을 차지하리라고 누구든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항상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무수한 블레셋인들은 한 때 요나단과 그 부하에게 패주를 당하였던 것이다. "너의 중 하나가 일천 인을 쫓을 것이다." 선한 명분은 왕왕 가장 무서운 세력과 대결하여 승리를 거둔다.

(3) 사람들은 보통, 식견이 있는 자들이 자산자가 되며, 세상을 살아 나갈 줄 아는 사람이 풍부한 생계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큰 재산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꼭 그렇지 않다. 심지어 "떡"조차 "지혜자에게 늘 돌아가는 것은 아니며", "재물이" 언제나 "명철한 자에게 돌아가는 것은 더욱 아니다." 세상에서 번창할 것 같은 많은 재간군들과 사업가들이 이상하게도 쇠퇴하게 되며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4)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인간을 잘 이해하며 경영의 기술을 가진 자가 언제나 출세하여 언제나 윗 사람의 총애를 얻을 것 같다. 그러나 많은 재줏군들이 기대와는 달리 낙망하고 미미한 가운데에서 세월을 허송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치욕 속에 떨어지기도 한다. 아마 입신양명하기를 바라서 취한 바로 그 방법들 때문에 파멸의 길을 걷게 된 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기능자"라고 해서 꼭 "은총을 입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니, 우매자가 총애를 얻는가 하면 지혜자가 빈축을 사는 수도 있다.

  1. 그는 예상이 빗나가는 이 모든 일들을 번복시키는 권세와 섭리의 작용으로 귀결시킨다.

섭리가 하시는 일은 우리에게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보이며 우리는 그들을 "우연"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그것은 하나님의 결정된 계획과 예지에 의한 일인 것이다. 이 "우연"은 섭리의 책에서는 "시기"라고 기록되어 있다(전 3:1; 시 31:15). "시기와 우연은 이 모든 자에게 임하느니라." 지고하신 섭리는 인간들의 계책을 깨뜨려 버리며 그들의 희망을 헛되게 하고, 인간의 길이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의지에 속해 있는 것임을 인간에게 가르쳐 주신다. 우리는 수단을 이용해야 하지만 그것을 신뢰해서는 아니 된다. 즉 우리가 성공하는 경우에는 하나님께 찬미를 돌리지 않으면 안 되며, 실패하는 경우에는 그의 뜻에 묵묵히 따르고 우리의 분수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Ⅱ. 우리는 거의 두려워하지도 않던 재앙에 깜짝 놀라게 되는 수가 이따금 있다(12절).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이 시기는 그의 재난과 타락과 사망의 시기를 뜻하며, 성서에서는 "우리의 날"과 "우리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1. 우리는 우리 앞에 어떤 환란이 있을지 모르며, 무슨 일이 우리로 하여금 사업에서 손을 떼게 하고, 우리를 이 세상에서 빼내어 갈지 모른다. 또 우리는 어떤 "시기와 우연이 우리에게 임할지" 모르며, "한 날에" 혹은 한 밤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시기를", 즉 우리 자신의 시간조차도 "알지 못하며" 우리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존재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캄캄한 중에 두시는 것은 그의 지혜이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준비하고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
  2.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최대의 만족과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바로 그 일에서조차 난관에 부딪칠지도 모른다. 물고기와 새들은 그들을 유혹하기 위해 미끼를 단 올무와 그물을 보고 욕심을 내어 달려 들다가 걸리고 만다. 이와 같이 인간들도 종종 자기들에게 갑자기 닥치는 "악한 시기"를 미쳐 감지하기도 전에 그것에 유혹을 받고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도 역시 "모두에게 한 가지로 일어난다." 인간은 그들이 행복을 구하던 곳에서 파멸을 발견하며 횡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죽음을 당하곤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심하지 말고 변화에 대비하여, 비록 불시에 변화가 임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거나 우리의 공포가 되지 않도록 하자.

📖9:12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