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9월 8일 주일 묵상구절 전11:9-12:8  <젊은이에게 주는 교훈>

Jeehyun 2024. 9. 8. 05:15

맥체인성경읽기

사무엘하 2, 고린도전서 13, 에스겔 11, 시편 50

묵상구절

11:9 <젊은이에게 주는 교훈>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11:10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

12: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12: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12:3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12:4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12:5 또한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니라

12:6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12:8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매튜헨리/옥스퍼드

 

서론

 


📖 11:9-12:8 📖

  1. 인생의 한창 시절에 조차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해보며, 생이 매우 감미롭고 우리가 죽음을 아주 망각하기 쉬운 때에도 생명에 대한 생각을 하라는 경고. "설령 사람이 많은 해를 산다고 하더라도 그는" 다가오고 있는 "어두움의 날을 생각할지어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여름 낮은 즐길 수 있는 날로 생각된다. 즉 인생은 오래 오래 계속되며 많은 해를 살 수도 있으며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생은 안락한 것이 될 수 있고 사람은 "그 모든 해를 기뻐"할 수도 있다. 이 세상에는 "많은 해를 사는"자들이 있다. 그들은 많은 위기를 모면하고 구사일생의 많은 자비로운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낙도 자기들에게 부족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해도 자기들에게는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한다. 그래서 그들은 꼬리가 길어도 밟히지 않을 것이며, 그토록 빈번하게 우물에 가도 하나도 상하지 않고 안전하던 쪽박은 결코 깨지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 올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많은 해를 살면서 그 모든 세월을 하나같이 기뻐할 자"가 그 누구이냐? 슬프게도 그런 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단 몇 시간의 기쁨을 가질 뿐이지만 슬픔의 시간은 달포가 넘는다. 그러나 어떤 자는 자기들이 누리는 세월 즉 많은 해를 딴 사람들보다 더 기뻐하는 것이다. 만약 순풍에 돛을 단 것같이 형통하는 상태와 즐거워하는 심령, 이 두가지가 구비된다면, 한 인간이 그 모든 세월을 능히 즐거워하도록 하는 데에 참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형통하는 상태라 하더라도 그 안에 불순물이 섞여 있기 마련이고, 가장 쾌활한 마음에도 실망의 그림자는 끼여 있다. 희희낙낙하는 죄인들에게도 우울하면서 꺼림직한 가책이 있고, 명랑한 성도들에게도 은혜로운 슬픔이 있다. 따라서 한 사람이 "여러 해를 살고 그 모든 세월을 늘 즐거워한다는" 것은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며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2) 이 여름낮이 지나면 겨울 밤이 오리라는 것을 예상해야 한다. 그러나 이 건장한 노인은 "캄캄한 날들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날들은 많은 것이기 때문이다."

[1] 캄캄한 날들이 오고 있으니 그것은 우리가 무덤에 눕는 날들이다. 거기에서는 우리 몸이 어두움 속에 누워있게 될 것이다. 거기에서는 눈이 보지 못하며 태양이 빛나지 않는다. 죽음의 암흑은 생명의 빛에 대적(對敵)된다. 음부는 "흑암의 땅"이다(욥 10:21).

[2] 그 "캄캄한 날들은 많을" 것이다.

우리가 지하에 누워 있는 날들은 우리가 지상에서 살아 있는 날들보다 많을 것이다. 그 어둠의 날들은 많기는 하나 무한하지는 않다. 비록 그 캄캄한 날들은 많을지라도 그 날은 헤아린 바 되었으며, "하늘이 더 이상 있지 아니 하는" 때면 끝이 날 것이다(욥 14:12). 가장 긴 낮도 밤이 있는 법이며, 가장 긴 밤이라도 그 새벽은 오는 법이다.

[3] 우리가 자만으로 우쭐대고 세상의 안전 속에서 잠자거나, 헛된 환락으로 인해 방탕 생활에 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종종 그 "캄캄한 날들을" 기억해 보는 것이 유익하다.

[4] 생이 오래 계속되고 많은 위안물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캄캄한 날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날들은 반드시 올 것이며, 만약 우리가 미리 그 날을 생각해 본다면 그 날이 올 때에 우리의 두려움은 훨씬 덜 할 것이기 때문이다.

Ⅱ. 그는 또한 자녀와 같은 청년층에게 눈을 돌리고, 그들에게 이 글을 써서 죽음을 생각해 보도록 깨우쳐 준다(9, 10).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아이러니칼하게도 청춘의 허영과 쾌락을 용인하고 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 하라." 혹자는 이것을 무신론자와 쾌락주의자가 청년에게 주는 권고요 독약과 같은 제안이며, 솔로몬은 이 절의 끝부분에서 이 맹독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를 처방해 주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흔히 이해되는 바와 같이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에게 한 말이나("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임이니라"), 미가야가 아합 왕에게 한 말이나("라못 길르앗으로 올라 가소서. 그리하면 승리하리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처럼("이제는 자라") 이 부분을 반어법으로 해석한다면, 이 말은 더욱 강조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은이들아! 네 청춘을 기뻐하고 즐거운 삶을 살아라. 네 유희를 쫓고 네 쾌락을 취하라.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고, 청춘의 공상과 헛된 희망으로 네 가슴을 부풀케 하라. 너의 즐거운 꿈으로 자신을 흥겹게 하라. 네 마음이 원하는 길로 행하라. 네가 할 마음이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다 해봐라. 그리고 육욕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일이면 서슴치 말고 해보아라.

Quicquid libet, licet━즉 네 의지를 네 법으로 삼아라. 네 마음의 길로 행하라. 그리고 네 마음으로 하여금 네 눈을 따라 걷게 하라. 산만하고 한가한 마음은 배회하는 눈을 좇아간다. 네 눈에 즐거운 것이면 그것이 하나님의 눈에 드는 것이든 들지 않는 것이든 간에 행하여라."

솔로몬이 청년들에게 이처럼 반어적으로 말하는 것은 다음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1) 이와 같은 일은 그가 과거에는 행하고 싶어하던 일이었고 행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으면 하고 무척이나 탐내던 일이었으며, 자기 행복의 기준을 두었고 자기 마음을 두었던 일이었다.

(2) 그는 자기 주변의 모든 자가 이런 권고를 해 주고, 이와같이 멋있는 일들을 예언해 주었으면 하고 바랬었다. 그는 이에 상반되는 어떤 충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며, 자기더러 건실하고 진실하라는 권고를 하는 자는 원수로 간주했을 것이다.

(3) 이런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었으며, 육욕에 빠진 그릇된 인생 여정이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본문에 나온 이야기는 만약 사리를 전체적으로 보고 공평하게 판단한다면, 그런 삶을 영위하는 것이 이성에 얼마나 배치된 행위인가 하는 것을 단 번에 알 수 있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쾌락주의적 주장의 벽두부터 이런 결론은 충분히 나오는 것이며 이론의 여지가 없다.

(4) 만약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인생 향락에 탐닉한다면, 설사 하나님께서 그들을 육욕대로 살게 내버려 두시며, 그들의 마음의 욕망에 그들을 송두리째 내어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의사대로 행하도록"(호 4:7) 하신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는 것을 말해 준다.


 📖11:9 <젊은이에게 주는 교훈>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1. 이런 헛된 일들과 쾌락에 대해 강력히 견제하고 있다.

"너는 이 모든 일로 인하여 하나님이 너를 심판하실 줄로 알라. 이 사실을 충분히 참작하라. 그러고도 만일 네가 할 수 있다면, 감히 할수만 있다면 그런 호사스런 생활을 영위하여라."

이것은 앞에서 양보하고 용인하는 것처럼 말했던 것에 대한 콜라스테리온(kolasthrion), 즉 교정물(矯正物)이며, 청년의 욕망의 목에 걸어둔 고삐를 세차게 잡아 당기는 말씀이다. "그러나 만일 네가 이와 같은 자유, 아니 방종을 취한다면, 그것은 너의 영원한 파멸이 되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라. 하나님께서는 그런 행위를 벌하지 않고 지나치시지는 않으시며 너는 그런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것에 주목해야 한다.

(1) 장차 심판이 올 것이다.

(2) 지금은 우리가 아무리 그 혹독한 날을 우리로부터 멀리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누구든지 모두 심판에 회부되지 않으면 안 된다.

(3) 그 날에는 우리의 모든 육체적 환락과 감각적 쾌락에 대해 우리는 추궁받게 될 것이다.

(4) 이 점을 알고 명심하는 것이 모든 자에게 유익하며 특히 청년들에게 유익하다. 이는 그들이 청춘의 욕망에 방종함으로써 어린 양에 대한 진노, 곧 "저 진노하심의 날에 대비해서 자신들에게 노를 쌓아두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1. 이 모든 사실에서 경고와 훈계의 말씀이 유도된다(10절).

젊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에게 주의를 기울여서 자기 영혼과 육체, 마음과 신체를 모두 잘 관리해야 한다.

(1) 청춘 남녀는 그들의 마음이 자만심으로 우쭐대거나, 노여움이나 어떤 죄스러운 격정으로 동요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네 마음으로부터 근심"이나 분노를 "떠나게 하라." 이 말(슬픔, 혹은 근심, 분노)은 마음의 혼란과 동요를 의미한다. 젊은 사람들은 억제와 단속을 참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기들의 자존심을 꺾거나 굴욕을 주는 일이라면 화를 내고 초조해 하기 쉽다. 청년의 도도한 마음은 자기들을 방해하고 반박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딛고 올라 서려 한다. 그들은 감각을 유쾌하게 하는 것에는 너무나 애착심을 갖기 때문에 불쾌하게 하는 것은 참지 못하며, 그것은 그들의 마음에 근심을 동반해 오기까지 한다. 저들의 자존심은 흔히 그들을 동요시키고 불안하게 만든다. "그런 점을 떼내어 버리고 세상에 대한 애착심을 제거해 버려라. 그리고 피조물에 대한 네 기대를 낮게 두라. 그러면 너를 실망시키는 일들 때문에 슬픔(근심)을 느끼거나 분노를 경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근심이란 말을 9절에 나오는 육체적 환락과 동일하게 해석하는데, 환락의 끝은 쓰라린 괴로움과 슬픔이기 때문이다. 슬픔을 반사할 모든 일로부터 청년은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2) 그들은 무절제와 불결, 혹은 그 외의 어떤 육체적 욕망에 의해서도 몸을 더럽히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악이 네 몸에서 떠나게 하며, 네 몸의 지체들로 하여금 불의의 도구가 되지 않게 하라.

죄의 폐해는 형벌을 수반하는 폐해이다.

육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육체에 유익한 것이라고 좋아하는 것도 폐해로 판명될 것이며 해로운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네게서 그것을 멀리 하여라. 그 악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 좋은 것이다.


 📖11:10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


Ⅲ. 전도자는 노년층에게나 청년층에게 자기의 훈계를 역설하기 위한 효과적인 논거(論據)로써 자기 담화 중 대전제가 되는 것을 등장시키는데, 그것은 곧 현존하는 모든 것은 헛되다고 하는 것과 불확실하고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1. 그는 노인층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8절).

"장래 일은 다 헛되도다." "사람이 많은 해를 살며 그 모든 해를 항상 즐거워할"지라도 "장래 일은 다 헛되다." 사람들이 그 마지막 장면에서 무엇을 학수고대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지난 모든 일과 장차 올 모든 것은 전부가 "헛되다." 이미 있었던 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장차 되어질 일도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헛된 것" 이다. 그것들은 최상의 상태에 있을 때일지라도 전혀 "헛된" 것이다.

  1. 그는 젊은층에게도 이 사실에 대해 상기시켜 주고 있다.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어린 아이의 기질과 청년의 행동에는 아주 많은 주제넘음과 비행과 죄스런 허영이 깃들이 있는데, 젊은 사람들은 이에 대해 경계하고 이를 교정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소년기와 청년기의 즐거움이나 잇점도 결국 어떤 확실성이나 만족도 갖지 못하며 영속성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한 즐거움은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꽃들은 꼭 시들게 되고 꽃송이는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꽃들은 좋은 열매를 맺어서 그것이 오래 계속되고 중요한 가치를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전도서 12:1-7) 청년 시절의 신앙심에 대한 장려와 죽음 📖

이 문단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나온다.

Ⅰ. 청년들에게 젊었을 때에 하나님께 대하여 생각하며 그에게 대한 의무에 유념하도록 하라고 이른다. "네 청년의 때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

  1. 이 말씀은 왕으로서의 전도자가 자기의 설교 속에 세상의 허무성과 이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의 헛됨을 적용시킨 것이다.

"젊은 너희들은 청춘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일로 우쭐대지만, 이미 그런 것을 경험하고 시험해본 자들의 말을 믿어야 한다. 즉 그것을 영혼에게 확고한 만족을 만들어 주지 못한다는 말을 믿어라." 그러므로 너희가 이 허무한 것에게 기만을 당하지 않고 헛된 것으로 말미암아 교란 당하지 않도록 하려면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 그리하여 피조물의 허구성(虛構性)으로부터 야기되는 재난에 대해 스스로를 방어하도록 하라.

  1. 그것은 왕이자 치료자인 솔로몬이 청춘이면 누구나 겪는 질병에 대해 조제하여 주는 특효약이다. 그 병은 곧 환락을 사랑하는 것이며 관능의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이고, 소년과 청년이면 누구나 혹하기 쉬운 허영에 빠지는 것이다. 이것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해 "네 창조주를 기억"해야 한다.

(1) 우리에게 강요되는 큰 의무는 하나님을 우리의 "창조주로 기억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자신을 만든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므로 그는 우리의 올바른 주인이시며 진정한 소유자가 되신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가 우리의 창조자이심을 고려할 때 우리 자신을 그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으며, 창조주로서의 그에게 마땅히 드려야 할 존귀와 의무를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

"네 창조주들을 기억하라" 는 귀절은 욥기 35장 10절에서 "나를 지으신 하나님들이 어디 계시냐?"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복수형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인간을 만들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을 말한다.

(2) 이 의무를 행하기에 적당한 시기는 곧 "네 청년의 때, 네 선택의 날들"(어떤 이는 이렇게 해석함), 네가 가려뽑은 날들, 네가 선택하는 날들이다. "네가 네 존재를 얻어 가지게 된 그분을 네 날들의 시초부터 기억하기 시작하고, 그 좋은 시작대로 계속해 나가라, 네가 젊을 때 그를 상기하고 네 청춘의 모든 세월을 통해 그를 기억하라. 이와 같이 청춘의 유혹에서 스스로를 지키며, 청춘의 잇점을 활용하라."


📖12: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Ⅱ. 이 명령을 꼭 시행해야할 이유.

"악한(곤조한)날이 이르기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해야 한다.

  1. 그 일을 빨리 행하라.

(1) "질병과 죽음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을 속히 행하라. 네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 그 일을 행하여야 하며, 죽음이 너를 이 시험과 집행유예의 상태로부터 보상과 응보의 상태로 옮기게 될 때에는 그 일을 행하기에 너무 늦을 것이기 때문이다."

질병과 사망의 날들은 "곤고한 날"이며 자연인에게 두려운 날이고, 자기들의 창조주를 망각한 자들에게는 참으로 "악한 날"이다. 이 "악한 날들"은 조만간 "올" 것이다. 이 날들이 아직까지 이르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시며" 우리에게 "회개할 수 있는 여지"를 주시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계속은 사망의 자연에 지나지 않는다. 삶이 지속되고 죽음이 지체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안락하게 죽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죽음의 특성을 변경시키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2) 노년이 되기 전에, 그 일을 속히 행하라.

죽음이 막지 않는다면 늙는 것은 꼭 오고야 말 것이고, 노년은 "우리가 아무 낙이 없다고 말할 해"가 될 것이다. 그때에는 우리가 바실래(삼하 19:35)처럼 감각적 즐거움을 맛보지도 못할 것이며, 우리 신체가 허약해져서, 늙고 눈이 보이지 않게 되거나 다리를 절룩이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쓸모 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며, 우리의 "힘은 수고와 슬픔이"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친척들과 모든 옛 친구들과 이별하게 되거나 그들을 괴로워하게 되고, 그들이 우리를 귀찮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조금씩 죽어 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해들이 가까이 오고 있다." 그때에도 "장차 오는 일은 전부가 헛될" 것이며, 남은 달도 전부가 헛된 달이 될 것이다. 즉 땅 위에서의 좋은 생활을 회상하고 천국에서 누릴, 보다 나은 삶을 바라는 것 외에는 "아무 낙도 없을 것이다."


📖12: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 12:3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1. 그는 그 다음 본문에서도 이 두 가지 논증을 부연하고 있는데 단지 그 순서만 엇바꾸고 있다.

(1) 노경에 당하는 재난은 너무나 많다.

게다가 우리가 늙도록 산다면 우리의 날들은 "아무 낙도 없는" 그런 날들이 될 것이다. 이것은 왜 우리가 "우리의 청년의 때"에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며, 그와 화해해야 하고 나이가 많아지도록 미루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죄악의 쾌락이 우리를 떠나게 되는 때에야 우리도 그들을 버리며 필연적으로 어쩔 수 없게 되어서야 하나님께로 돌아선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보답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날들 중 노른자위가 되고 정화가 되는 부분은 악마에게 내어 주고 밀기울이나 쓰레기나 찌꺼기 같은 부분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남겨 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최대의 부조리이며 배은망덕이다. 이것은 "찢긴 것과 저는 것과 병든 것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행위이다. 더구나 지금 꼭 해야 할 일을 쇠약과 병골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년까지 미룬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최대의 우행이다.

이 일은 우리의 기능이 한창 왕성할 때 나오는 가장 좋은 일을 필요로 하는 때문이다. 특히 어리석은 것은 죄악에 더욱 오래 오래 몸을 담고 양심의 죄를 보물 쌓듯 쌓아 올려서 무거운 나이의 짐에 이 죄의 짐을 추가시킴으로써 한결 무겁게 가중시키는 일이다. 만일 노년의 재난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우리는 노후에 우리를 유지시켜 주고 위로해 줄 것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때를 맞춰 우리 창조주를 기억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는 그에 대한 기억을 배제한 적이 없다고 하는 양심의 증언보다 더 우리를 힘나게 하고 위안시켜 주는 효과를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젊을 때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우리가 늙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리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으랴?(시 71:17, 18 참조)

[1] 노년의 쇠약과 병약이 여기에서 상징적 표현으로 우아하게 묘사되고 있다. 우리는 솔로몬 당시에 통용되던 일반적 언어와 은유에 익숙하지 못하여, 그 뜻을 파악하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전반적 의도는 명백한 것으로 노년의 때는 대체로 얼마나 안락하지 못한 때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2:4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 12:5 또한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니라


  • 첫째, 그 때는 "해"와 그 "빛", "달"과 "별"들, 그리고 그들로부터 나오는 빛이 "어둡게 될" 것이다.
  • 이러한 것들은 시력이 감퇴된 노인들에게는 침침하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용모는 구름이 끼여서 그 아름다움과 광채는 어둡게 된다. 그들의 영혼에게 있어서는 빛과 같던 지적인 능력과 기능이 약화되어 버리며, 그들의 총명과 기억력은 그들을 실망시킨다. 그들의 이해력도 과거처럼 그렇게 민첩하지 못하며 그들의 상상력도 이전같이 활발하지 못하다. 그들의 환락의 날도 지나가 버렸고(빛은 흔히 기쁨과 번영을 상징한다)그들은 낮에 교제하는 즐거움도, 밤에 휴식하는 즐거움도 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해"와 "달"도 그들에게는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 둘째, 그 때는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난다."노인들은 흔히 주룩주룩 내리는 비와 같이 분비되는 눈물, 콧물 따위로 고생한다. 이 폭우 다음에는 더욱 많은 구름이 일어나서 습기를 메꾸어 주는 것처럼 노인도 계속 분비되는 콧물로 괴로움을 겪는 것이며, 그 몸은 결국 계속 녹아 없어지는 셈이 된다.
  • 날씨가 궂으려고 하면 하나의 구름이 지나가자마자 또 다른 구름이 새로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가지 고통이나 병에서 놓여나자마자 또 다른 병고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 노인의 실태이다. 그래서 그들의 병고는 "매우 비가 많이 오는 날 연속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과 같다." 이 세상에서 한 가지 고통의 끝이란 또 다른 고통의 시작에 불과하다. 깊음이 깊음을 부르는 것이다.
  • 셋째, 그 때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다."
  • 모든 위험이 갑자기 접근해 오며 위기가 덮칠 때마다 망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머리가 떨리고 신체를 보존하기 위해 준비된 팔과 손도 떨릴 것이다. 자기 방어를 위해 행사되곤 하던 동물적인 심령의 강인한 힘도 별 수 없게 되며 그 소임을 다 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노인들은 쉽사리 의기소침해지고 낙심을 잘하는 것이다.
  • 넷째, 그 때에는 "힘 있는 자들도 구부러질 것이다."
  • 신체를 지탱시켜 주고 체중을 견디던 다리와 대퇴부도 굽으며, 이전처럼 움직여 주지 않고 곧 피곤해 한다. 한창 때에는 "강한 자들"이라고 하던 사람들이 "나이"로 인해 약하게 되며 구부러진다(슥 8:4). "여호와는 사람의 다리를 기뻐하지 않으신다"(시 147:10). 그 이유는 그들의 다리 힘은 곧 약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 여호와께는 영원한 힘이 있다." 그에게는 영원하신 팔이 있다.
  • 다섯째, 그 때에는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다."
  • 우리가 음식물을 저작하고 그것을 혼합시켜 소화를 돕는 데 쓰는 이도 "그 수가 적으므로" 역할을 중단하게 된다. 치아는 썩고 부러지며 아마 통증으로 인해 뽑혀 버리게도 될 것이다. 어떤 노인들은 이가 몽땅 빠지고 없는 경우도 있으며 몇 개만 남아 있는 자들도 있다. 치아가 빠지고 없어 잘 씹지 못하면 음식이 소화가 잘 되지 않으므로 치아의 쇠퇴라는 노약은 한층 무시할 수 없는 것이며, 다른 어떤 노쇠에 못지 않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 여섯째,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다."생명의 빛이 꺼지기 전에 눈의 빛이 먼저 없어지게 되므로 우리는 시력을 갖고 있는 동안에 시력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 이삭의 눈과(창 27:1) 아히야의 눈처럼(왕상 14:4) 시력이 어둡게 된다. 120세가 되어서도 좋은 시력을 지녔던 모세는 매우 드문 예이고, 보통 노인들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눈이 빨리 쇠퇴한다. 안경을 만드는 기술이 나와서 시력을 보조하게 된 것은 노인들에게 있어서는 감지덕지할 일이다.
  • 일곱째, "길거리의 문들이 닫혀질 것이다."
  • 노인들은 집안에서 두문불출하며, 행락을 위해 나다니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입의 문이라고 할 수 있는 입술이 음식을 먹을 때에는 닫혀지고 "맷돌질하는 소리가 작아지는데, 이것은 이가 없기 때문이며 그래야 입 안에 든 음식을 맘대로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음식물을 소화시킬 수가 없으므로 한 번 빻은 곡식을 또 방앗간에 가지고 가야 한다.
  • 여덟째, 노인은 "새 소리에도 일어날 것이다."
  • 그들은 젊은이들 같이 단잠을 자지 못하고 조그만 소리에도 잠을 깨며, 심지어 새의 지저귐 소리까지도 그들에게는 방해가 된다. 그들은 기침 때문에도 편히 쉴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일찍이, 새벽 닭우는 때면 기상하게 된다. 그들은 시기하고 소심하고 걱정하기 쉬으므로, 이것이 그들의 잠을 방해하고 그들을 일찍 일어나게 만들기도 한다. 혹은 그들은 미신을 믿기 쉬워서 점쟁이들이 불길하다고 하는 까마귀나 올빼미 따위의 "새 소리에도" 깜짝 놀라 "일어난다."
  • 아홉째, 노인들과 함께 "음악하는 모든 딸들도 다 쇠하여지게 될 것"이다. 노인들은 노래부를 능력도 들을 능력도 없다. 그들은 스스로 노래할 수도 없고, 솔로몬이 젊었을 적에 "노래하는 남녀와 악기"로 즐거움을 누렸던 것처럼(전 2:8) 음악에서 어떤 즐거움을 취하지도 못한다. 노인들은 귀가 먹게 되어 여러 가지 소리와 음성들을 구별할 수 없게 되기가 쉽다.
  • 열째, 그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높은 곳의 꼭대기에 올라가기를 두려워할 것이다. 숨이 차서 높이 오를 수 없거나, 머리에 현기증이 일어나거나 다리에 힘이 없어서 높은 곳에는 감히 올라갈 엄두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 혹은 그들은 "높이 있는 것"이 자기들 위에 떨어질까 봐 두려워한다. "길에서 놀랄 것"이다. 그들은 이전같이 담대하게 말타지도 못하며 걸을 수도 없다. 길에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그것들이 자기들을 넘어지게 할까봐 두려워한다.
  • 열한째,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다."
  • 노인의 머리카락은 희어져서 그의 머리는 살구나무 꽃이 만개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살구나무는 다른 어떤 꽃보다 일찍 꽃이 핀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아가 사람을 얼마나 속히 좀 먹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는데 적절하다. 노년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도래한다. 흰 머리카락이 사람들의 머리 여기 저기에 나타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 열두째, "메뚜기도 짐이 되며 원욕이 그칠 것이다."노인들은 아무 생각도 없어지고 의욕도 없어져서, 감각적 즐거움도 그들에게는 무미건조하고 흥미 없는 일이 된다.
  • 노인은 아무것도 질 수 없다. 가장 가벼운 것이라도 그들의 몸과 마음에는 다 무겁게 느껴진다. 그래서 조그만 것이라도 그들을 주저앉게 하며 쓰러뜨린다. "메뚜기"는 아마 매우 소화가 잘 되는 것으로 간주되던 어떤 음식이었을 것이다(세례 요한의 음식도 "메뚜기"였다). 그 메뚜기 음식조차 노인의 위에는 심한 부담이 되며, 따라서 "원욕이 그친다." 그는 음식에 구미가 전혀 당기지 않을 것이며, 다니엘서 11장 37절에 나오는 임금처럼 "여인의 사모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2] 솔로몬이 이 말씀을 기록한 때는 그 자신이 노년에 접어든 때였던 것 같다. 그러기에 그는 노년이 지니는 여러 가지 취약성에 대해 실감나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가 관능의 쾌락에 열중하고 방종하였던 까닭에 그는 더욱 이런 것을 확신했을 것이다. 노쇠 현상을 보일 때 딴 노인들보다 더 원기가 좋은 노인들도 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노년의 날은 "곤고한 날"이고, 또 "곤고한 날"이 될 것이며 즐거운 낙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인들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하도록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인들은 이같은 원통한 일들을 상쇄시켜 줄 만한 일을 가질 수 있으며, 그들의 비탄을 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왜 "우리가 청년의 때에 우리 창조주를 기억해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그와 같은 "곤고한 날들이 이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은총으로써 우리를 기억해 주시며, 감각적 기쁨이 그와 같이 닳아 없어질 때에도 그의 위로하심은 우리의 영혼을 즐겁게 하실 것이다.

(2) 그는 죽음이 우리를 얼마나 판이하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보여 준다. 죽음은 노년의 참상을 예방하는 것이 되거나 아니면 말년의 비참한 것에 대한 종지부가 될 것이다. 그 외 어떤 것도 늙으막에 당하는 불행을 막거나 치유시킬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청년의 때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 왜냐하면 죽음이 확실히 네 앞에 있으며 아마 네게 아주 가까이 있을지 모르고, 죽는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는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부지런히 죽음에 대비하도록 해야 한다.

[1] 죽음은 우리를 불변의 상태로 고정시킬 것이다.

그 때에는 "사람이 자기의 오랜(영원한) 집으로 돌아갈" 것이며, 노인이 지니는 이 모든 병약과 노쇠는 그 두려운 이 주인 죽음에 대한 예고이자 전조가 된다. "사람은" 죽으면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모든 일과 향락으로부터 떠나게 된다. 그는 현재의 상태에서는 영영 떠나게 된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그가 나그네였고 순례자였을 뿐이다. 영혼과 육체가 모두 자기들이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7절). 그는 안식처로 돌아가며 그곳에서 정착한다.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며 자기의 세상 집으로"(이렇게 번역하는 이도 있음) 돌아가는데, 이는 이 세상은 그의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오랜 집으로" 돌아가는데 이는 그가 무덤에 누워 있는 날들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는데 이 집은 이 세상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고 영구히 머물러야 할 집이다. 우리가 죽으면 "집으로 돌아간다"는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기꺼이 맞아들이게 해 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찌하여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동경하지 않는가?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오랜 집"으로 "영원한 처소"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채비를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2] 죽음은 우리를 사랑한 친구들에게는 슬픔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면 조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된다." 조객에는 진심으로 슬퍼하는 자들이 있다. 우리들은 이러한 진정한 조문 자들을 길거리를 걸어다닐 때 그들의 복장이나 행동거지에 의해 확실히 구별할 수 있다. 한편 의식에서 죽은 자를 위해 곡하도록 고용된 조문자들도 있는데, 이들은 진심으로 애도를 표현하며 진정한 슬픔이 되도록 자극을 시킨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우울한 집으로 이주하는 동시에 우리 뒤의 우울한 집을 남겨두고 떠난다. 눈물은 죽은 자에게 바쳐지며, 이것은 딴 여러 사례 중에서는 죽는다는 것을 심각한 일로 만든다. 우리가 "초상집에 가서" "조객들이 거리를 왕래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빈소에서 진지하고도 경건한 조문객이 되는 데에 아무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은 헛된 일이다.

[3] 죽음은 우리의 생리적인 구조를 분해할 것이며, 이 땅에 있는 장막 집을 헐어버릴 것인데 이것은 6절에서 우아한 필치로 표현되어 있다. 그 때에는 영혼과 육체를 놀라우리 만치 굳게 묶어둔 "은줄이 풀릴 것" 이며 그 신성한 매듭이 풀어질 것이고, 그 오래된 옛 친구들은 서로 작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 때에는 "금그릇이 깨어질 것"인데 이 금그릇은 우리를 위해 생명수를 담고 있던 것이다. 또한 우리가 생명을 항구적으로 유지시키며 그 쇠퇴함을 복구시키기 위해 물을 긷는 도구로 사용하던 "항아리가" 바로 샘 곁에서 깨어져 더 이상 물을 긷게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바퀴가(영양분을 수집하여 분배하는 데 종사하는 체내의 모든 기관들) "깨어져서" 더 이상 그 직분을 수행하지 못 하게 될 것이다. 몸은 태엽이 끊어지고 모든 바퀴의 운동이 멈춰져서 가지 않고 정지한 시계처럼 될 것이다. 기계는 산산조각이 나버리게 되었다. 즉 심장은 더 이상 맥박을 치지 않으며 혈액은 더 이상 순환하지 않는다.

이것을 인생의 장식물이나 일용도구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부자들도 죽으면 저희의 화려한 의상과 "은"과 "금"으로 된 가구들을 남겨두지 않으면 안 되며,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질 "항아리"를 두고 가야하고 물 두레박은 그 "바퀴가 깨어질 것"이다.


 📖12:6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


[4] 죽음은 우리를 우리의 제일 원리로 환원시킬 것이다(7절).

인간은 신비한 종류의 피조물이어서 그 안에는 하늘의 한 줄기 광선이 땅의 한 덩이 흙과 결합되어 있다. 그러다가 죽으면 이 둘은 분리되어 각각 그것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 첫째, 진흙 덩어리인 몸은 그것이 원래 속했던 "땅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흙으로" 지어졌으니 아담의 몸도 흙에서 나왔고 우리도 마찬가지다.
  • 몸은 진흙으로 된 집이다. 그것은 죽으면 "흙"(땅) 속에 눕혀지며 순식간에 흙으로 환원되어 보통 흙과 조금도 다룰 바가 없이 될 것이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고하신 대로이다(창 3:19). "너는 티끌(흙)이니 티끌(흙)로 돌아가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욕심에 빠지거나 몸이 요구하는 것을 포식하지 말며(몸은 곧 구더기의 양식이 될 것이기 때문에), "죄로" 하여금 "우리의 죽을 몸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자"(롬 6:12). 왜냐하면 우리 몸은 죽을 운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둘째, 한줄기 빛인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하나님이 "지면의 흙으로 인간을 지으셨을" 때, 그는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그가 "산 영혼"이 되게 하셨다(창 2:7).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 안에 각 사람의 영을 만들어 주신다. 불이 장작을 태우면 불길은 올라가고, 재는 그 나무가 자라났던 "땅으로 돌아간다." 이와 같이 영혼도 신체와 함께 죽지 않는다. 영혼은 "음부의 권세에서 구제된다"(시 49:15). 그것은 신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으며, 육체에서 분리되면 어두운 등피를 벗겨 냈을 때 촛불이 더욱 밝게 타는 것과 마찬가지로 더욱 빛나게 된다. 그것은 영들의 세계로 이주하여 그 세계에 합류된다. 영혼은 대재판장인의 "하나님께" 가서 자신에 대한 진술을 하고 그 몸이 행한 것을 따라 "감옥에 있는 영들과 함께 기거하게 되거나"(벧전 3:19), 아니면 "낙원에 있는 영들"과 기거하게(눅 23:43)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악인들에게는 죽음이 두려운 것이 된다. 그들의 영혼은 복수 자로서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자들에게는 죽음이 편안한 것이 된다. 그들의 영혼은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그들 자신을 그 손에 즐겨 맡길 수 있는 것은 중보자가 계시기 때문이다. 반대로 죄인들은 이 중보자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을 당연히 두렵게 여기는 것이다.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 12:8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