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열왕기상 7, 에베소서 4, 에스겔 37, 시편 87, 88
묵상구절
예언 증거 문서의 봉함과 거짓 예언의 징계
(관련 문단, 왕하21:1-18; 대하33:1-20)
8:16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르라>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
8:17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8:18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8:19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8:21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8:22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성경의 중요성 (이사야 8:16-22)
이 대목 속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또 성경이 위탁되어 있음으로써, 말할 수 없는 특권을 누린다. 그들은 만군의 여호와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 그를 그들의 두려움으로 삼고, 그가 성소염을 발견하기 위해 "증거의 말씀을 싸맨다" (16절).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 거룩한 계시라는 더없이 값진 보배를 두셨다는 것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와 사랑을 나타내는 중대한 일례이다.
1. 그 계시는 "증거의 말씀이며 율법" 이다.
이 예언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고통과 환란이 닥쳐올 때,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안전하게 보존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입증하셨고 요구하셨다. 증거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을 명한다. 율법으로서의 그것은 우리의 실천을 명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진리에 동의하는 동시에 그 교훈에 복종해야 한다.
2. 이 증거의 말씀과 율법은 싸매어지고 봉인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에 무엇을 더하거나 제하여 버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보내신 편지로서 국새를 찍고서 싸매어지고 봉인되어졌다. 구약 성서를 싸매고 봉인한다는 것은, 많은 예언서들에 대한 상세한 해설은 신약 시대를 위해 보류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라(인치라)" (단 12:4). 그러나 그 때에 싸매어지고 봉인되어졌던 것이 이제는 펼쳐지고 공개되어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어" 졌다(마 11:25). 그러나 다른 세상에 대한, 그리고 미래의 상태에 대한 사실에 관해서는 여전히 그 증거의 말씀은 싸매어지고 봉인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분적으로밖에는 모르며 부분적으로밖에는 예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그 말씀은 "선지자들의 자손과 언약의 자손" 의 제자들의 손에 신성한 기탁물로서 위임되어 있다(행 3:25).
이것은 그들에게 맡겨진 훌륭한 것이며, 그것을 그들에게 보관할 책임이 있다(딤후 1:13, 14). 예언자들을 자기들의 보호자로 가지고 있던 자들은 계속 그 기록된 말씀을 잘 지켜야 한다.
📖8:16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르라>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
Ⅱ. 우리는 이 특권을 잘 사용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 의해서 그것을 배울 수 있다.
1. 그 예언자 자신이 행실과 결단에 의해서이다(17, 18절). 그는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당한 여러 가지 낙심 가운데서도 그는 그것으로부터 위로를 얻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 만족스럽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한 사역자들이라야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장 잘 추천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1) 그 예언자를 낙심시켰던 괴로운 일들이 있다. 그는 다음 두 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1] 하나님의 불쾌한 표정이다.
그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불쾌한 표정을 하시는 것이 그를 낙심케 했다. 왜냐하면 그는 백성들의 권익에 마음을 크게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야곱의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고, 현재 그들을 무시하시는 듯 보이며 그들을 그의 진노의 표적 아래 두셨다" 고 했다.
그 예언자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알리는 일을 맡았지만, 그는 재앙의 날을 바라지 않은 자였으므로 이처럼 그것을 슬퍼했다. 야곱의 집이 야곱의 하나님을 버렸을 때, 그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그의 낯(은총)을 가리우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2] 사람들의 멸시와 비방이다.
그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에게 퍼부어진 멸시와 비방이 그를 낙심케 했다. 율법과 증거의 말씀이 그들에게 일임되어 있었다.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징조와 예표가 되었다." 즉 "우리는 괴물들이나 기이한 사람들처럼 주시당하며 우리가 길을 갈 때 손가락질당한다고" 했다. 그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이 예언적인 이름은 아마도 그 마을의 불경스러운 조롱자들에 의해 조소당하고 희롱당했을 것이다. "나는 무리에게 이상함이 되었나이다" (시 71:7).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특이함으로 인해,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않기 때문에(벧전 4:4) 세상에 이상한 존재가 된다(슥 3:8).
여기에서의 이 예언자는 그리스도의 한 모형이었다. 왜냐하면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자녀임을 입증하기 위해 이것이 인용되어 있기 때문이다(히 2:13).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로다." 부로들은 그들의 자녀를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로 여겨야 한다. 야곱도 그렇게 여겼다(창 33:5). 사역자들은 그들에게로 개심한 자들을 자녀로 여기고, 따라서 그들에게 은유해야 하며(살전 2:7), 또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자녀라고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유익을 주는 도구의 역할을 하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 곧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자기의 자녀로 여기신다(요 17:6).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 믿는 자들은 비방을 받고(눅 2:34)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행 28:22) 징조와 예표가 되고 있다.
📖8:17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2) 이러한 낙심에 처하여 이사야는 격려를 받았다.
[1] 그는 그를 낙심시키는 모든 것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손을 보았다. 그래서 거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야곱의 집에 어떤 환란이 있든, 그것은 하나님께서 낯을 가리우시기 때문이다. 아니 야곱의 집과 또 그 집의 친구들에게 어떤 멸시가 퍼부어지든, 그것은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가 시므이로 하여금 다윗을 저주하도록 명하셨다(욥 19:13; 30:11).
[2] 그는 하나님께서 시온산에 거하시는 것을, 그리고 그 자신을 그의 백성에게 나타내시고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들의 경의를 받으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았다. 하나님이 잠시동안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실지라도, 그들은 어디에서 그를 발견하며 되찾을지를 알고 있다. 하나님은 시온산에 거하신다.
[3]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바라고 그를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그가 낯을 가리우실 때일지라도, 그의 동작을 따르며 겸손한 확신을 가지고, 그가 긍휼의 길로 돌아오실 것을 기대하기로 결심했다. 믿음과 기도로써 하나님을 바라는 자들은 그를 소망과 기쁨으로 기다려도 좋다. 우리가 어떤 구체적 위로를 얻지 못할 때라도 우리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고 그에게 복종하면서 잠시간 기다려야 한다.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게 되리라" (슥 14:7).
📖8:18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 이사야가 그의 제자들에게 준 충고와 조언에서 배울 수 있다. 그들 중에 율법과 증거의 말씀이 봉인되었고, 또 그들에게 그 생명력 있는 신탁이 맡겨졌던 것이다.
(1) 이사야는, 그들이 환란의 날에 마귀와 거래하는 신접한 자에게 의논하고, 신접한 자의 조언을 구하며, 장차의 일을 짐작하기 위해 신접한 자의 말을 듣고자 하는 유혹을 받으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다. 이처럼 사울은 자기가 곤경에 빠졌을 때, 엔돌의 신접한 여인에게 둘었고(삼상 28:7, 15), 아하시야는 에글론의 신에게 물었다(왕하 1:2). 이 마술사들은 이상하고 기이한 동작과 어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지절거리며 속살거렸다" 고 했다. 그들은 머리를 싸매고 다녔으므로, 앞을 분명하게 볼 수 없었으며,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똑똑히 볼 수 없었다. 단지 서로를 엿볼 수 있는 정도였다.
또는 본문에 사용된 이 두 단어("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다")는 그들의 음성과 말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들은 제비나 학이나 비둘기같이(38:14) 나지막하고 울림이 있고 파열적인 음성으로, 똑똑히 발음도 하지 않은 채, 때로는 슬픈 어조로써 말한다. 그들은 여호와의 예언자들과는 달리 담대하고 명료하게 말하지 못하고, 백성들을 교훈하기보다는 그들을 재미나게 해 주기를 원하는 자들과 같이 말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들을 찾아가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행하도록 권할 정도로, 비참하게 주책스러운 자들이 있었다. 심지어는 더 나은 것을 알고 있었던, 그 예언자의 제자들에게도 그런 자들과 "맹약한 자가 있다" 고 하는 말을 말하지 말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이러한 악을 금지한 분명한 율법이 있었지만(레 19:31; 20:27), 아직도 그런 일이 이스라엘에서 발견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민족에게서 지금도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신앙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생각만 해도 놀라게 될 것이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마술과 주문을 사용하는 것, 그리고 은밀한 기교로써 운수를 말해 주는 척하며, 병을 고쳐 주고 잃은 것을 찾아 주는 척하는 자들과 의논하는 것을 무서운 일로 알라. 왜냐하면 이것은 극악한 죄이며, 사실상 위에 계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8:19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2) 이사야는 그들에게 이 유혹에 대한 대책을 주고 있다. 곧 그들의 입에 말을 넣어 주고 있다. "혹이 이처럼 너희를 꾀려하고든,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라. 사람들은 자기들의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1] 즉 "사람이 자기들의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것이 신앙의 원리라고 그들에게 말하라. 그런데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게 구해야 하며, 그와 의논해야 하고, 신접한 자들과 의논해서는 안 된다.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으로 행하리로다(미 4:5). 일월성신으로 자기의 신을 삼은 자들은 그것들을 구했다(렘 8:2). 죄 아래 있고, 환란 가운데 있는 백성들이라면 자기들의 하나님께 용서와 평안을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의심 가운데 있고 궁핍과 위험 가운데 있는 백성이라면, 자기 하나님께 지시와 도움과 보호를 구하지 않겠는가?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의 백성이므로, 우리가 그에게 구하는 것이 분명 우리 의무이다" 라는 것이다.
[2] 또한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우상에게 구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도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말하라" 는 것이다. 생명이 없는 신상에게 생명과 또 생명력 있는 위로를 구한다는 것, 그리고 죽은 친구들 - 그들을 신격화하고 그들에게 기도를 드리면서 - 에게 우리를 위해 그런 일을 해달라고 하는 것은 더 할 나위없이 어리석은 일이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다(전 9:5, 10). 그러므로 산 자가 그들에게서 위로 받기를 기대하여 그들에게 아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무당들은 엔돌의 신접한 여인처럼 죽은 자에게 물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우둔함을 공개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산자 곁에서 살아야 하며, 죽은 자 곁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 빛과 생명이 없는 자들에게서 어떻게 빛과 생명을 구할 수 있겠는가?
(3)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의논할 것을 명하고 있다. 그들 중에 있는 예언자들이 그들에게 매사에 대한 것을 직접 말해 주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기록된 말씀이 있었고, 그들은 거기에 의뢰해야 했다.
성경책을 선용하는 방법을 아는 자들은 결코 마술사에게 의논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구하는 방법과 그의 마음의 지식에 이르는 방법을 알고자 하는가?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으라." 거기에서 선한 것을, 그리고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율례를 우리의 상담자로 삼으라. 그러면 우리는 올바른 상담을 얻을 것이다.
[1] 우리는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보자.
우리는 "이 말씀에 맞게 말해야" 한다. 즉,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기준으로 삼고, 그것에 순응하며, 그것으로부터 충고를 받고, 거기에 호소해야 한다. 그리고 매사에 그것에 의해 지배되고 결정하며, 올바로 고치는 말씀에 착념하고(딤전 6:3),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들을 말해야 한다. 그 율법과 증언에 거스르는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치 않고, 그것에 맞게 말해야 한다.
[2] 왜 우리는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이렇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보자.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가장 큰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지 않는 자들은 "그들에게는 정녕히 빛" 곧 "아침빛이 없다" 는 것을 입증한다. 그들은 사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선과 악, 참과 거짓의 구별도 못한다. 하나님의 계시를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인간적 총명도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이성(理性)의 말을 옳게 인정하지 못한다.
혹자는("빛이 없다") 그 말을 하나의 경고로 해석하고 있다. 즉 "만일 그들이 이 말씀에 맞지 않게 말하면, 그들에게는 빛 곧 축복이나 위로나 위안이 없을 것이다. 오직 그들은 암흑과 절망 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라는 뜻이다. 그것은 그 다음 구절과 상통한다(21, 22절). 사울은 그가 신접한 여인에게 의논했을 때 무슨 빛을 얻었는가?(삼상 28:18, 20) 또는, 빛들의 아버지에게서 떠난 자들이 무슨 빛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4) 그는 신접한 자들에게 찾아가고, 하나님의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파멸을 읽고 있다. 그들에게는 빛 곧 위로나 형통함이 없을 것이며, 온갖 공포와 비참함을 예상해야 한다(21, 22절).
[1] 그들이 두려워한 환란이 그들에게 임할 것이다.
그들은 "이 땅을 헤매" 정착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침입해온 대적의 사나운 힘에 의해 이곳 저곳으로 쫓겨다닐 것이다. 그들은, 그 나라가 매우 황폐하여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고, 그들 자신과 그들의 친구마저도 매우 가난하게 되어, 그들이 가질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생활 필수품을 얻기 위해 어디로 갈지 몰라 "곤고할" 것이다. 그러므로 배불리 먹던 자들이 굶주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게는 모든 복이 떠난다는 것을 기억하자.
[2] 그들은 이러한 고통을 불만스럽게 여기고 참지 못함으로써 매우 불안정하게 될 것이다. 선한 사람은 궁핍할지라도 자기를 진정시키며 마음 편히 지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 백성들은 "주릴 때에 안달하며," 그들의 분을 채울 만한 것이 없을 때, 그 자신들의 마음을 괴롭힐 것이다.
[3] 그들은 그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아니, 그들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매우 성가시게 할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모든 방법이 끊어지고 그들의 지혜가 다한 것을 발견할 때, 그들은 의무와 품위에 대한 모든 규율을 잊게 될 것이며, 패역하게 "자기의 왕을 저주할" 것이며, "자기의 하나님" 을 모독적으로 저주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심중에 그리고 침방에서" 저주하는 것 그 이상이 될 것이다(전 10:20). 가장 선하고 가장 지혜로운 왕들도 성공을 보장할 수 없을 그런 때에, 그들은 그들의 왕이 공무를 더 잘 처리하지 못한다고 해서, 마치 그것이 그의 과오인 것처럼 여겨 그를 저주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 충성의 멍에를 끊어버렸을 때 그들의 신앙의 멍에도 곧 매지 않으려 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그 다음에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한다. 또 그를 저주하고 죽는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그들을 해한 것처럼, 그의 섭리와 다루며 그것을 비방한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그 다음에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한다" (잠 19:3). "우리의 마음이 속에서 뜨거울 때에" "우리의 일에 재갈을 먹이는" 비결을 배우라. 왜냐하면 대개 성급하여 하는 말은 지극히 죄악적인 말이 되기 때문이다.
[4] 그들은 그들 자신을 절망 속에 내던질 것이며, 어느 길을 보든지 위로의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위를 바라 볼 것이나, 하늘이 그들에게 낯을 찌푸리고 침울한 표정을 할 것이다. 그들이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때는 그렇게 될 수밖에 더 있겠는가? 그들은 땅을 굽어 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싸우고 있는 자들에게 무슨 위로가 주어질 수 있겠는가? 거기에는 환란과 흑암, 그리고 고통뿐이다. 모든 것들이 위협적이다. 한 줄기의 유쾌한 빛이나 소망스러운 전망도 없다. 그들은 그들의 격렬한 두려움에 의해 흑암 중으로 쫓겨들어갈 것이다. 이것은 그들 주위의 매사가 암담하고 두렵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빛을 보지 못하리라는 이사야의 말을(20절) 설명해 준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대해 눈을 감는 자들은 당연히 흑암 속에 버려질 것이며 끝없이 방황할 것이다. 또 자기들이 붙인 불은 아무런 도움이 못 될 것이다.
📖8:21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 8:22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