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열왕기상 8, 에베소서 5, 에스겔 38, 시편 89
묵상구절
9:1 <평강의 왕>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9: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9:4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9: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매튜헨리/옥스퍼드
●메시야의 약속 (이사야 9:1-7)
본장의 서두에 있는 말들은 모든 일이 어둡고 우울하게 보였던 전 장(前章)의 끝부분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 즉 전 장에는 "보라,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 뿐이로다" 고 했다. 이것은 매우 암담하나, 그렇게 극심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며" (시 112:4), "어두워 갈 때 빛이 있게 되고" (슥 14:7), 전에는 고통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질적으로나 정도에 있어서) 그러한 흑암이 없으리로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1절). 최악의 사태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말이 한글 성경에는 불분명함) 그들의 고통을 어느 정도 완화시키고 진정시킬 수 있는 위로를 얻게 되리라는 것을 명심하자. 그들은 핍박을 당하여도 버린 바 되지는 아니하며(고후 4:9),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한다(고후 6:10). 상황이 가장 흑암 중에 있을 때에도, "빛을 지으시고 어두움도 창조하신" (45:7) 자가 그들의 한계를 정하시어, 서로 대조되게 하셨다는 것(창 1:4)은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일이다. 그 하나님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여지껏 흑암이 있었고 그것은 매우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있지 않게 될지니라."
Ⅰ. 여기에 다음 세 가지 사실이 약속되어 있다. 그 모두는 결국 복음의 은혜를 가리키고 있다.
그 당시의 성도들은 어둡고 흐린 날에는 그 은혜에 대한 소망으로 자신들을 위로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고통 중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 - 비록 그것이 지금은 그 당시의 그리스도의 첫번째 강림과는 큰 차이가 있을 지라도 - 으로 우리 자신을 위로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말일에 교회를 위해 모아 두신 그 긍휼은, 교회가 당하는 현재적 재난으로 인해 교회와 함께 애통하고 있는 자들에게 힘이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에 관한 약속을 볼 수 있다.
- 영화로운 빛에 대한 약속이다.
그것은 흑암을 점차로 축출할 것이며, 그 빛은 이전에 때때로 있었던 빛과는 다르리라고 했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그런 고통이 없으리라고 했다. 이제는 이전과 같이 어두운 때는 없을 것이다. 즉,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그 땅들은 외딴 곳에 있었으므로, 이웃의 대적들의 침입을 가장 많이 당했다),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다" 고 했다(1절). 아마도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찢으시고 그 사방을 치신" (왕하 10:32) 그 때를 가리키는 것 같다. 하나님은 더 큰 심판을 백성들에게 내리시기 전에 보다 작은 심판을 내려 그들의 반응을 시험하신다. 그러나 가벼운 고통이 겸손케 하고 개혁하는 데 소용이 없게 되면, 우리는 더 심한 고통을 당할 것을 예상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는, 항상 그가 이기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불론과 납달리 땅에는 흑암 시대가 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갈릴리에는 고통의 흑암" 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무지하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며(그들은 "율법과 증거의 말씀" 을 쫓아 말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빛이 없었다." 8:20) 그들이 당하는 고생과 외면적인 일에 대한 그들의 절망적인 마음가짐에서 볼 때도 그러하다. 우리는 그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읽을 수 있다(대하 15:3, 5). "이스라엘에는 참 하나님과 가르치는 예언자가 끊어졌으니, 그 시대에는 평강이 없었도다" . 그러나 경고된 그 흑암(8:22)이 그 정도로까지 크게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2절).
💡9:1 <평강의 왕>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1) 그 예언자가 살아 있을 때에 유다와 이스라엘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예언은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신봉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지시와 위로를 주는 큰 빛이었다. 기록된 말씀 이외에도 그들에게는 예언이 있었다. 그들에게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래갈는지를 알려 준 예언들이 있었다(시 74:9). 그것은(외부적인 고생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들이 "흑암 중에 앉아, 그늘진 땅에 거하던" 때에는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2) 이것은 우리 주 예수께서 하나의 예언자로서 나타나기 사작했을 때, 그리고 스블론과 남달리 땅에서 또 이방인의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을 때, 완전히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규약의 예언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모형이었다. 그가 오셔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에 거하셨을 때, 그때에 이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일컬어지고 있다(마 4:13-16). 다음 사실들에 주목하자.
[1] 복음을 모르는 자들은 흑암 속에서 행하며, 자기들이 무엇을 행할지 또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사망의 그늘의 땅에, 짙은 흑암과 극도의 위험 속에 거한다.
[2] 복음이 어떤 곳에나 사람에게 들어오면, 빛 곧 큰 빛이요 더욱 더 빛을 발할 찬란한 빛이 들어오는 것이다. 흑암 속에 있는 자들에게는 빛이 반갑듯이, 우리는 복음을 반가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준비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최고로 유용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 자체를 증거해 주기 때문이다. 진실로 이 빛은 즐겁다.
2.영화로운 번영과 그것으로 인한 전 인류의 기쁨에 대한 약속이 있다(3절).
"하나님이시여, 주께서 이 나라를, 곧 주께서 긍휼을 예비해 두신 이 유대 민족을 창성케 하셨나이다. 비록 그것이 연이은 쓰라린 심판에 의해 감소되었을지라도, 이제 주께서 그것을 다시 창성케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다수의 사람이 근면하다면 그 민족의 수효는 그 민족의 힘이며 재산이 된다. 그리고 민족들을 커지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이 뒤따르고 있다. "주께서는 그 즐거움 - 정욕적인 기쁨과 환락, 그리고 그런 즐거움의 대상과 원인이 되는 것들 - 을 더하게 하시지 않았나이다(개역 한글판에는 "더하게 하셨나이다" 로 되어있음. 역주).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였나이다. 즉 그들 중에는 진지한 영적 기쁨이,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기쁨이 풍성하게 있습니다." 이것은 2절에 언급되어 있는데, 복음의 빛이 비치는 시대에 매우 잘 적용될 수 있다. 그때에는 하나님이 그 나라, 곧 복음의 이스라엘을 창성케 하셨다. (마소라 텍스트에 의하면)" 주께서 그 기쁨을 크게 하셨으니, 곧 그 빛을 받는 모든 사람에게니이다." 다음의 말들은 그러한 해석을 뒷받침 해 준다. "그들이 주(主) 앞에서 즐거워하나이다. 그들이 거룩한 의식 가운데 주 앞에 나와 크게 기뻐하나이다. 그들의 희락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의 것과 같지 아니하며(주께서는 그런 즐거움을 더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주의 은혜의 표적 안에 있습니다." 복음이 빛과 능력으로 들어올 때는 기쁨도 동반해 온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고 그 복음을 올바로 받는 자들은, 그것을 기뻐하며 또 기뻐할 것이다. 그러므로 열방의 전향이 이렇게 예언되어 있다(시 67:4). "열방을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라" (시 116:11 참조).
(1) 그것은 거룩한 즐거움이다.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 하나이다" 고 했다. 그들은(그리스도처럼, 눅 10:21) 영으로 기뻐하며 더욱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한다. 세상의 눈에는 그들이 항상 슬프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들이 항상 기뻐하고 있다(고후 6:10).
(2) 그것은 큰 즐거움이다.
그것은 "추수하는 즐거움 같다" 고 했다. 즉 눈물로 씨뿌리고 땅의 귀한 열매를 오래 참음으로써 기다려 온 자들이 기쁨으로 추수하는 즐거움 같다. 그리고 군인이 위험한 전투 후에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과 같다. 복음은 그것과 함께 풍성함과 승리를 가져온다. 그러나 그 기쁨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추수의 즐거움을 얻기 전의 농부처럼, 힘든 일을 각오해야 하며,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을 얻기 전의 군인처럼 전투를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그 즐거움이 왔을 때는, 즐거움이 수고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어 줄 것이다(행 8:8, 39 참조).
💡9: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3.영광스러운 자유와 해방에 대한 약속이 있다(4, 5절).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며, 거기에는 좋은 이유가 있는데,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애를 꺾으시어, 그들을 편케 하셨고, 더 이상 노역을 하지 않게 만드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 곧 오랫동안 의인에게 머물러 있던 악인의 막대기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미디안의 멍에가 기드온의 힘으로 이스라엘의 목에서 꺾어져 나갔던 것과 같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전에 베푸신 구원의 역사를 우리를 위해 역사할 사건에 대한 모형으로 삼으신다면, 우리는 거기서 격려를 얻어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고 그를 찾아야 한다(시 83:9). "주는 미디안에게 행하신 것 같이 저희에게도 행하소서!"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현세적인 구원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산헤립이 예루살렘의 주인이 되지 못하도록 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손에 의해 "미디안의 때와 같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싸움들은 보통 매우 소란스럽고 많은 피의 댓가로써 승리를 얻지만, 그 승리는 조용하게, 그리고 시끄럽지 않게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여기서는 산헤립을 뜻함 - 역주)의 영광 밑에다가 불을 놓으실 것이다" (10:16). 그리하여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멸하리라" (욥 20:26). 그러나 의심할 바 없이 본문은 더 앞의 사건 곧 흑암 속에 있는 자들에게 찾아올 저 큰 빛의 복된 열매와 결과를 내다보고 있다. 그것은 자유를, 곧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눅 4:18) 가져올 것이다.
(1) 복음의 의도와 그 은혜의 의도는 죄와 사탄의 멍에를 꺾는 것, 죄와 타락의 짐을 제거하고 우리를 그 압제자의 막대기에서 자유케 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스러운 자유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형식적인 율법의 멍에를 꺾으시사(행 15:10; 갈 5:1)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건지시어, 우리가 그를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셨다(눅 1:74, 75).
(2) 이것은 불같이 역사하시는 성령에 의해 행해진다(마 3:11). 그것은 전투하는 용사들이 어지러이 싸우는 것처럼 그렇게 행해지지는 않는다. 우리 싸움의 무기는 현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싸움은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수행된다(4:4). 그것은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미디안의 날(때)과 같이"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드온이시다. 이적을 행하는 것은 그의 칼이다.
💡9:4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 9: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Ⅱ. 그러한 교회를 위해 이 큰 일들을 수행하고 성취시킬 자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
이사야 예언자는 그 위대한 일들이 메시야를 통해서 되리라고 했다(6, 7절). 그는 이사야가 예고한 대로 처녀의 아들로서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 이라 했다(7:14). 그는 예언자들의 문체를 따라, 그것이 이미 이루어진 일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한 아이가 났다." 그 사실은 마치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확실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성육신 전에도 교회는 "여자의 후손" 에 관한 첫번째 약속 덕분에(창 3:15) 메시야의 업적에서 오는 큰 이득과 혜택을 이미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었던 것과 동시에 "창세 때부터" 태어난 아이였다(계 13:8). 하나님께서 구약의 교회를 위해 베푸신 모든 큰 위업은 영생의 말씀인 메시야를 통해서 된 일이며, 중보자인 그 때문에 된 일이다. 그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였고, 하나님께서 살피시는 자였다(시 84:9).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얼굴 빛을 그의 성소에 비추시는 것은, 우리 주님 곧 주 그리스도를 인함이다(단 9:17). 유대 민족, 특히 다윗의 집은 그 축복을 간직한 자들이므로, 여러 차례 절박한 멸망에서도 보존되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지극히 큰 긍휼을 그의 교회를 위해 보존해 두셨고, 그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의 특별한 배려 아래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가 이보다 더 안전할 수 있었겠는가?
갈대아 의역본은 그것은 영존할 자 곧 그리스도에 대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본문 구절은 그와 그의 나라에 대한 유명한 예언이다. 의심할 바 없이 주로 이 구절에 근거하여 있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자들은 때때로 이것을 되돌아보았고 즐겁게 이것을 읽었다.
1.스스로를 낮추신 그를 보라.
"전능하신 하나님" 이신 바로 그가 "한 아이로 태어 나셨다." 신이 잠간 동안의 생을 사는 아기로 되셨다. "영존하시는 아버지" 는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아들" 이시다. 이러한 것이 우리의 모습을 취하신 그의 겸양이시다. 이처럼 그는 그 자신을 낮추시고 비우심으로써, 우리를 높이시고 채우셨다. 그는 우리 인간 세상에 태어 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그는 타락한 상태에 있는 우리의 입장이 요구하는 모든 것이 되시기 위해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는 "우리에게 났다." 우리에게, 곧 죄지은 천사들에게가 아니고 우리 인간을 위해서 주신 바 되었다. 이 사실은 매우 의기양양하게 언급되어 있으며, 그 천사가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눅 2:11)고 말하면서, 메시야가 오신 것을 목자들에게 전한 것은 바로 이 말씀을 주목하여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가 태어 나시어 우리에게 주신 바 된 것은 가장 큰 슬픔과 두려움의 날에도 우리 소망의 큰 초석이며, 우리 기쁨의 초석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2.높이 들리우신 그를 보라.
우리에게 주신바 된 이 아이, 이 아들, 이 하나님의 아들, 이 인자(人子)는 우리에게 큰 자비를 베푸실 능력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최고의 존귀와 능력을 부여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의 친구가 되신다면,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1) 그가 도달하게 된 위엄과 모든 이름 위에 있는 그의 이름을 보라. 그는 "기묘자, 모사" 등으로 불리워질 것이다(그리고 우리도 그가 그렇게 불리우고 있는 것과 불리워질 것을 확신한다). 그의 백성은 이 이름을 통해 그를 알고 섬길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에 충분히 응하는 자답게 그들은 그에게 복종하며 의지할 것이다.
[1] 그는 "기묘자요 모사" 이다.
그가 "기묘자" (wonderful)라 불리우는 것은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사랑은 천사들과 영화롭게 된 성도들의 경탄의 대상이다. 즉 그의 탄생, 사망, 부활, 그리고 승천에서 그는 실로 놀라우셨다. 끊임없는 경이(이적)가 그를 따랐고 논쟁할 여지도 없이 그에 관한 경건의 비밀은 심대했다. 그는 "모사" (counsellor) 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인생들에게 훈계하시며 그 속에서 우리의 번영을 도모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계하" 시는 것은 그를 통해서이다(시 16:7; 계 3:18). 그는 아버지의 지혜이시며, 또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지혜를 주신다.
혹자는 이것을 함께 연결시키고 있다. 즉 그는 기묘한 모사, 모사들의 기묘 또는 기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다른 점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모사(상담자)라는 점에서 아주 탁월하시며, 아무도 그와 같이 가리칠 수 없다.
[2]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 - 하나님, 전능자" 이시다.
그는 자기의 사업을 수행하실 지혜를 가지고 계시듯, 또한 힘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가장 완전한 구원을 이루실 능력이 있다. 그것이 바로 중보자의 과업이니,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 이하의 것은 그것을 이룰 수 없다.
[3] 그는 "영존하시는 아버지" 또는 "영원의 아버지" 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아버지와 함께 한 자이시다. 그의 백성에 대한 그의 아버지다운 배려와 자상함은 영원하다. 그는 그들에 대한 영생과 행복의 창조자이시다. 따라서 그들에 대해서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아버지이시다. 그는 천사들에게가 아니라 그에게 복종케 된(히 2:5) "장차 오는 세상의 아버지" (칠십인 역은 그렇게 해석했다), 곧 복음의 나라의 아버지이시다. 그는 영원 전부터 위대한 구속 사업의 아버지이셨다. 그는 늘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구원은 "모사" 로서 그의 지혜의 소산이었고, "영존하시는 아버지" 로서 그의 사랑의 소산이었다.
[4]그는 "평화의 왕" 이시다.
왕으로서 그는 그의 나라에 평화를 보존하시며, 평화를 명하신다. 아니 그는 평화를 창조하신다. 그는 우리의 평화이시다. 그리고 그의 백성들의 마음을 지키며 주관하는 것은 그의 평화이다. 그는 평화를 애호하는 왕이시며 그의 통치자 평화로울 뿐 아니라 모든 선의, 곧 그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현재와 미래의 축복이 되는 모든 평화의 창시자이며 수여자이시다.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2) 그가 도달된 주권과 모든 주권 위에 있는 그의 보좌를 보라(6절).
"그 어깨에는" 또 오직 그의 어깨에만, "정사를 멜 것이다." 그는 자기 어깨에 권력의 뱃지(" 다윗 집의 열쇠" 22:22)를 달게 될 뿐만 아니라, 그 권력의 짐을 지게 될 것이다. 그 아버지께서 그에게 그 짐을 지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양도될 수 없는 통치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수행하실 것이다. 따라서 분명 그의 나라는 잘 다스려질 것이다. 그가 정권을 어깨에 메실 것이며, 모세처럼 자기의 짐이 중하다고 결코 불평하지는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 수 없나이다" 라고 모세는 불평했었다(민 11:11, 14).
그리스도의 통치에 관해 영광스러운 것들이 여기에 언급되어 있다(7절).
[1] 그것은 번창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것은 증가될 것이다. 그의 나라의 영역은 더욱 더 확대될 것이며 날마다 많은 사람이 거기에 더하여질 것이다. 그 광채가 더하여질 것이며, 그것은 이 세상에서 더욱 더 눈부시게 빛날 것이다. 지상의 군주들은 모두 그에게 비하면 초라한 자들이다. 따라서 금으로 시작되어 철과 진흙으로 끝나고, 각 군주국은 점차로 시들어 버린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나라는 성장하는 나라이며 마침내는 완전케 될 것이다.
[2] 그것은 평화의 왕이신 그의 성품에 합당한 평화로운 통치가 될 것이다.
그는 사랑으로 다스릴 것이며 사람의 마음을 다스릴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통치가 있는 곳은 어디에나 평화가 있을 것이며, 그의 나라가 번창함에 따라 평화가 더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복종할수록 우리는 더 편하고 안전하다.
[3] 그것은 의로운 통치가 될 것이다.
다윗의 아들인 그가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에게 맡겨진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실 것이라" 고 했다(눅 1:32, 33). 유대인과 이방인이 연합되는 복음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군림하시는 거룩한 산 시온이다(시 2:6).
[4] 그 나라는 신중하게 또 정의롭게 다스려져, 그 통치의 위대한 목적에 부합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 나라의 기초이다. "그가 그것을 굳게 세우고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모든 일은 잘 처리되고 있으며 또 처리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백성 중 어느 누구도 결코 불평할 이유가 없게 될 것이다.
[5] 그것은 영원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 정사(government)의 더함이 무궁할 것이라" 했다(그것은 계속 성장할 것이다). 평화의 더함이 무궁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나라 백성들의 행복이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며, 아마도 in infinitum - 영원히 진보될 것이다. 그는 "지금부터 영원토록" 다스리실 것이다. 즉 모든 세대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그 나라가 하나님 곧 아버지께 넘겨 질 때까지 구속자와 구속함을 얻은 사람들 모두의 영광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6] 하나님께서 친히 이 모든 것을 수행하셨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즉 그 손에 모든 능력을 지니시고 모든 창조물을 지휘하시는 여호와께서 이를 이루시리라. 다윗의 위에 평화의 왕이 거기에 앉혀질 때까지, 다윗의 위를 보존하실 것이다. 그의 열심이 그것을 행하실 것이다. 그 자신의 영예, 그의 약속의 신빙성, 그리고 그의 교회의 유익에 대한 그의 빈틈없는 배려가 그것을 행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 중에 있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진보에 크게 마음을 기울이신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이 사실은 그 나라가 잘 되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매우 큰 위안이 된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 이 모든 도전을 극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