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11월 7일 목요일 묵상구절 사26:1-19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승리를 주시리라>

Jeehyun 2024. 11. 7. 08:57

맥체인성경읽기

열왕기하 20, 히브리서 2, 호세아 13, 시편 137, 138

묵상구절

26:1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승리를 주시리라>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26:2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

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26:4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26:5 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26:6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

26:7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26:8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26:9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26:10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26:11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나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들을 사르리이다

26:12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

26:13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26:14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

26:15 여호와여 주께서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고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나이다 스스로 영광을 얻으시고 이 땅의 모든 경계를 확장하셨나이다

26:16 여호와여 그들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

26:17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 앞에서 그와 같으니이다

26:18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

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매튜헨리/옥스퍼드

💡서론


복음의 노래 (이사야 26:1-4)

복음의 은총에 관한 예언에 이어 하나의 노래가 부가되어 있는 것은 매우 합당하다. 그것은 그 노래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들에게는 은혜로운 위안을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날에," 곧 구약 교회의 승리와 확장의 날이 상징해 주고 있는 그 복음의 날에(아마도 본문은 이러한 날을 우선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날에 이 노래를 부르리라." 즉 그때에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그 노래를 부를 만한 동기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게 될 것이다.

그 노래는 복음의 교회의 상징이었던 "유다 땅에서" 불리워질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계약은 "유다 집" 에 세워졌다고 적혀있기 때문이다(히 8:8).

이 대목에는 하나님의 교회에 관한 영광스러운 모습들이 언급되어 있다.

Ⅰ. 교회가 악한 것들을 대비하여 튼튼히 방비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견고한 서읍이 있음이라" (1절). 그것은 영원한 언약의 현장에 의해 형성된 성읍이다. 또한 그 헌장에 의해 해방된 모든 사람들을 맞아들이기에 적합하다. 그들에게 일을 주고 환대하는 성읍이다. 예루살렘 주위에 성읍이 밀집해 있을 동안 그 예루살렘이 튼튼했듯이, 하나님의 교회도 튼튼한 성읍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 주위의 불 성벽이 되어 주신다. 어느 대적도 자기들이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 갈" 수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있으리 만큼 예루살렘은 한때 강했다(애 4:12). 교회는 강한 성읍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성과 곽" 을, 또는 가파른 외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교회를 구원하시기 위해 방어 하시기로 약속하셨다. 구원을 받기로 예정된 자들은, 그 약속이 그들의 보호가 됨을 발견할 것이다(벧전 1:4).


💡26:1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승리를 주시리라>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Ⅱ. 교회가 선한 자들로 가득 채워지며, 따라서 교회를 보다 더 튼튼히 만들게 되리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거민들이 마땅히 되어야 할 자들이 되기만 한다면, 예루살렘의 보장(힘)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슥 12:5).

본문에는 "진리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도록" 성문을 열라는 명이 나와 있다(2절). 이전에는 죄악으로 인하여 추방되고 쫓겨났으나, 이제는 그 죄악에 대한 율법이 취소되었으므로 그들은 다시 들어올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또는, 어느 민족이든 간에 예루살렘에 와서 정착하리라고 격려함으로써 모든 의인들에게 동일한 귀화령이 발의된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장소나 어떤 백성에게 위대한 일을 행하신 후에는, 이처럼 그들에게 행해진 은혜에 따라 보답할 것을 기대하신다. 즉 그런 은혜를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친절해야 하며, 그 백성을 보호하고 살피라고 하신다.

다음 사실 주목하자.

  1. 하나님의 진리, 즉 전체 생활의 질서를 잡을 견고한 믿음을 지키는 것이 의로운 자들의 특성이다.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선한 원칙은 마음속에는 선한 결단력, 생활 속에는 선한 행실을 유발한다.
  2. 그러한 자들을 장려하고 환대하는 것이 나라의 이익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라에 축복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26:2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

  • 계 21:25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 살후 3:2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Ⅲ.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고 편안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확신하는 가운데 마음의 거룩한 안심과 평정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1. 여기에 그 약속의 내용이 있다(3절).

"주께서 평강에 평강으로, 완전한 평강으로," 곧 내적 평강과 외적 평강, 하나님과의 평강과 양심의 평강, 모든 사건에서 언제나 누릴 수 있는 평강으로 "지키실 것이다" 라고 했다. 이 평강은 "주님께서 심지(心志)가 견고한 자" 에게 주시어 소유케 하실 그것이다. 그것은 "그가 의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통치 아래 두고, 그를 의지하는 것이 자기에게 매우 유익하리라고 생각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모든 선한 사람의 특성이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들은 마음을 그에게 두어야 한다. 또 모든 일에서 항상 그를 의탁해야 하며, 확고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그를 전적으로 만족히 여기면서 그를 신봉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영속하는 평강을 주실 것이며**, 그 평강이 그들을 지킬 것**이다.

흉한 소식이 퍼질 때도,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한" 자들은, 사태를 조용히 기다리며, 거기에서 야기되는 놀라움을 보고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마음이 "여호와를 의뢰하여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다(시 112:7).


💡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2. 그것은 계율의 내용도 되고 있다(4절).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편안케 하라.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평강을 약속하셨으니, 그 약속의 혜택을 잃지 말고,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자.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을 때에도, 언제나 그를 영원히 의뢰하자. 영원한 그 평강, 그 분깃에 대해 그를 의뢰하라."

우리가 세상에 대해 의뢰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일순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다 기대하는 모든 것은 시간의 한계 안에 감금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은 우리가 존속하는 한 지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 여호와 - 야 여호와," 곧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장차도 계실 주 안에서 믿음과 소망이 세워질 견고하고 영원한 초석, 만세 반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반석 위에 세워진 집은 폭풍에도 견딜 것이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들은 그 안에서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영원한 반석," 즉 그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영원히 있을 그 축복으로 데리고 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영원히 그를 의뢰하고 결코 그들의 신뢰를 버리거나 바꾸지 않게 하라.


💡26:4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로우심 (이사야 26:5-11)

여기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에게 영원히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를 계속 바라라고 더욱 격려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Ⅰ.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겸손한 자들로 하여금 교만한 그 원수를 이기도록 만드실 것이다(5, 6절).

스스로를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높은 데 거하는 자를 낮추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교만하게 처신하는 그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그들보다 위에 계시며 또 앞으르도 그러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높이 솟은 성읍 바벨론이나 니느웨까지도 낮아지게 하신다(25:12). 하나님은 그 성읍이 아무리 잘 요새화되었다 할지라도 그렇게 행하실 수 있다. 그는 흔히 그렇게 행하셨다. 그는 또 앞으로 그렇게 행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교만한 자를 대항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행하는 것이 그의 영광이다. 그는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심" 으로써, 그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입증하신다(욥 40:12).

반면에, 스스로를 낮추는 자들은 높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빈궁한 자의 발" 이 그 높은 성읍들을 밟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6절). 하나님은 큰 군대가 밟으리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빈곤한 자의 발이 그 성읍들을 밟을 것이라고 했다(말 4:3). "너희가 악인을 밟으리라." "오라, 너희의 발로, 이 왕들의 목을 밟으라" (시 147:6; 롬 16:20 참조).


💡26:5 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26:6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


Ⅱ.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길을 인지하시고 기뻐하신다(7절).

"의인의 길은 평탄하다" (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들은 복종과 거룩한 교제라는 평탄하고 한결같은 길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려고 노력하며 끊임없이 애쓴다.

" 내 발이 평탄한 데 서서" 평탄한 길을 가나이다(시 26:12).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서 그들의 길을 평탄하고 편안케 만드신다는 것은 그들의 행복이 된다.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또는 고르게) 하시도다," 그것은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제거하시어 아무 것도 그들을 해치치 못하게 하심으로써이다(시 119:165).

하나님은 그것을 "달아보신다" (라고 KJA는 읽었다). 즉 하나님이 하나님의 길을 고찰하시며, 그들에게 충분한 은혜를 주시사, 의인들이 자기들의 길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난관을 이길 수 있도록 하실 것이다. 이처럼 정직한 자에게 하나님은 그 자신이 정직하심을 보여 주실 것이다.


💡26:7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Ⅲ. 하나님을 기다리면, 아무리 어둡고 절망적인 때에도 그를 향한 거룩한 소망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우리의 위로가 된다(8, 9절).

이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키던 관례가 되어 왔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얼굴을 지푸리시는(노하신) 때에도 그러했다.


 💡26:8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 26:9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1. 즉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라.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여전히 주를 기다렸나이다. 주께서 우리를 징계하실 때, 우리는 우리를 안위하실 주의 손 이외의 다른 손은 바라지 않았습니다." 종의 눈이 오직 "그 상전의 손을 바람같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렸나이다는 뜻이다(시 123:2).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 앞에서는 구할 것이 없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는 간청할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오래 계속될지라도, 그것이(그 문자가 의미하는 대로) "심판의 길" 일지라도, 계속 기다리는 일 만큼은 싫증을 내서는 안 된다.

2.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한 소망을 품으라.

우리의 고통이 아무리 심할지라도, 결코 신앙에 대한 생각에서 멀어지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는 안 된다. 여전히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해야" 한다. 그리고 밤에, 가장 어둡고 긴 환란의 밤에도 "우리 영혼은 주를 사모해야 한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간절한 소망은, 우리와 우리 이름이 어찌되든 간에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기다리고 기도해야 할 것은, "아버지,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그러면 우리가 흡족하겠나이다" 라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신 모든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으로 우리의 최대의 위안을 삼아야 한다.

(3) 하나님께로 향한 우리의 소망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 열렬하고 진지한 것이라야 한다.

(4) 가장 어두운 고통의 밤에도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태양이며 방패이신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5) 우리의 소망이 진정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를 발견하기를 원하고 그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자들처럼 그를 구함으로써, 그리고 일찌기 구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증거를 보여야 한다.

Ⅳ.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의도이다. 하나님은 심판을 내림으로써, 사람들이 하나님을 구하고 섬기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사" 모든 것이 황무케 되는 때에,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을 고백하던 백성들뿐만 아니라 "세계의(모든) 거민이 의를 배우리라" 는 것을 능히 기대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시정하고, 그들의 생활을 개혁하리라. 또한 하나님이 그들을 벌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 때문임을 인정하리라. 또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던 자기들의 불의를 회개하고는, 옳은 길로 행하게 되리라. 그들은 그렇게 될 것이다. 즉, 심판은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되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심판은 그들로 하여금 결과적으로 그러한 일을 하게 되는 자연적인 성향을 주며, 비록 많은 사람들은 계속 완고할지라도 세계 거민 중 일부분이라도 이러한 훈련을 통해 이득을 얻고 의를 배우게 하려는 것이 심판의 목적이다. 반드시 그들은 그렇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이상하리 만큼 미련한 자들이다. 환란이 닥치는 것은 우리에게 의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임을 명심하자. 하나님께서 친히 징벌하시며 가르쳐 주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시 94:12). Discite Justitiam, moniti, et non temnere divos -즉 이 견책으로 하여금 네게 의를 계발하는 것을 가르치게 하고, 신성한 것을 멸시하지 말게 하라 - 버질(Virgil).

Ⅴ. 그들을 진압시키고 개혁하기 위해 베푸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방법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정말로 사악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심판으로 그들을 엄하게 다스리는 일은 필요한 일이다.

심판은 다른 방법으로 굴복하려 들지 않는 자들도 굴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죄인들은 지극히 하나님을 거슬러 행하고 그들의 개심을 위해 사용된 수단에 순응하고 그 의도에 응하기를 완강히 거절한다(10절).


 💡26:10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1) 그들은 "은총을 입는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긍휼을 받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해로 그들에게 비취게 하시며, 그의 비를 내리게 하신다. 아니, 그는 그들을 번영케 하시며, 그들의 손에 풍성히 주신다. 그들은 그들보다 덜 사악한 자들까지도 멸망시킨 하나님의 심판의 강타를 많이 피했다. 여러 가지 경우를 보면 그들은 이웃보다 월등하게 하나님의 총애를 얻는 것이 나타난다. 이 모든 의도는 그들이 사랑에 정복되어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섬기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모두 허사다. "그들은 의를 배우지 아니한다" 고 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해 회개하려 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심판을 따에 보내시어, 남용된 당신의 긍휼로 인하여 사람들을 벌하시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2) 그들은 "정직한 땅" 에서 산다.

그 땅에서는 신앙이 고백되고 평판이 좋으며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많은 모범이 행해진다. "평탄한" 땅에는 다른 곳에서처럼 그렇게 많은 걸림돌은 없다. "징계" 의 땅에는 악과 불경건이 지지를 받지 못하고 처벌된다. 그러나 그 정직한 땅에서도 그들은 "불의를 행하고" 계속 사악한 길로 행한다. 사악하게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혼에게도 불의하게 대한다. 그리고 그 나라의 정의에 의해서 교화되려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예상해야 한다.

지금 정직한 땅의 율법과 관례에 순응하지 않고 또 그 특권과 유익을 이용하지 않는 자들이, 장차 복된 땅에 거하리라는 기대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왜 그들이 그렇게 하려하지 않는가? 그것은 그들이"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계속 멸시하여 오던 그 율법과 정의의 저작자이신 하나님이 얼마나 위엄에 찬 하나님이신가를 믿으려 하지 않고 또 깊이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위엄은 그의 섭리의 모든 작용 속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존중치 않으므로, 그 섭리의 목적에 응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여호와의 긍휼을 받았을 때에도, 우리는 계속 "여호와의 위엄과 그 선하심" 을 돌아보아야 한다.

(3) 하나님은 경고를 주시사, 회개와 기도를 통하여 그들이 다시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도록 그의 손을 드신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주목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분노하시거나 치려고 오시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보지 아니한다" 고 했다. 보려하지 않는 자들, 죄책과 진노에 대한 가장 명료한 가책에 대하여 눈을 감아버리는 자들, 하나님의 견책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우연이나 운명으로 돌려버리는 자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들과의 전투를 시작하시려 할 때에도 그들 자신의 멸망에 대한 그 위협적인 징후에 개의치 않고 그들 자신에게 평강을 외치는 자들, 그런 자들처럼 눈먼 자들은 아무도 없다.

2. 하나님은 마침내 그들을 심히 엄하게 다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에 이기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려하지 아니하나 보게 될 것이다" 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분노하신다는 사실을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보게 될 것이다. 무신론자들, 비웃는 자들과 방심하고 있는 자들은, 그들이 지금은 믿으려 하지 않는 것, 즉, "하나님의 손에 떨어진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라" 는 사실을 멀지 않아 체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죄의 재앙, 특히 하나님의 백성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죄의 재앙을 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분노하셨다는 징표를 통해서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대한 불의를 자기 자신에게 대한 불의처럼 여기시고, 그에 따라서 그런 일을 심판하시고, 그 백성들의 사유를 들어 주시는 구원 사건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크게 해친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 백성에 대한 그들의 적개심과 사기심 그리고 좀 더 낮게 대해 주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악하게 다룬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악의를 지닌 자들은, 그것이 매우 우둔하고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것을 부끄러워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그리고 조만간에 그들은 그것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그것에 대한 기억으로 그들은 당황하게 될 것이다.

혹자는 11절의 말씀을 이렇게 읽고 있다. "그들이 그 백성의 열성을 보고 부끄러워할 것이다." 즉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베푸시는 열성때문에 부끄러워하게 된다고 풀이한다(한글 성경).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영예와 번영에 대해 매우 열심이신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이 그의 백성이 될 수도 있었으나 되려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고는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운명은 그들이 하나님의 친구들의 행복을 경시했기 때문에 "불의 주의 대적을 사르는 것," 즉 그 대적을 위해 계획된 그 불이 그들을 삼키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적 노릇을 하고 그들을 시기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대적으로 간주하시며, 그렇게 그들을 대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6:11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나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들을 사르리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 (이사야 26:12-19)

이 대목에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하나님께서 긍휼이든 심판으로든 그들에게 행하신 것을 회고하고, 그 두 가지에 대해 하나님께 찬송을 돌린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해 주시리라고 믿어지는 일을 희망하고 있다. 다음을 살펴보자.

Ⅰ. 이사야의 관찰과 반성이 섞여 있다. 그는 교회의 상태를 회고해 보고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고 있다.

1. 하나님은 여러 사례에서 그들에게 매우 은혜로우셨고, 그들을 위해 큰 일을 행하셨다.

(1) 일반적으로 말하면, "주께서 우리 모든 일을 우리 안에서" 또는 "우리를 위하여 이루셨나이다" (12절)고 했다.

우리를 통해 어떤 선한 일이 이루어지든지 간에, 그것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우리 마음속에 언제고 선한 생각과 마음이 있다면, 그것을 집어 넣으시고, "선한 일을 행할 뜻을 주시고 또 행하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Acti, agimus - 즉 우리는 작용을 받았기 때문에 작용한다. 만일 어떤 친절이 우리에게 베풀어지거나 우리의 어떤 일이 형통하고 성공적으로 된다면, 우리를 위해 그런 일을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의 위로에 도움이 되는 모든 피조물들, 모든 사업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렇게 되어진다. 그리고 때로 그는 우리에게 불리하게 보이는 일까지도 우리에게 유익하게 역사하신다.


💡26:12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


(2) 구체적으로 말하면, "여호와여 주께서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나이다(15절). 그리하여 하나가 천이 되었나이다(애굽에서 그들은 놀랍게 증가되었고 후에 가나안에서는 그들이 그 땅을 채웠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일에서 주께서 스스로 영광을 얻으셨나이다" 고 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증가되는 것은 왕의 영예이며, 또 그럼으로써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많은 민족의 아비가 되게 하시리라는 언약을 성실히 지키시는 영광을 얻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증대하는 나라이며, 그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따라서" 교회, 곧 거룩한 나라의 증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자기의 과업으로 삼는 자들의 증대이기 때문에, 기쁨의 제목이 되어야 한다.

2.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견책하셨다.

(1) 이웃 민족이 때로 그들을 압제했고 학대했다(13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는 우리를 홀로 다스릴 권리를 갖고 계시오며, 우리는 주의 신하와 종이니이다. 주(당신)외에 다른 주(主)들이 우리를 관할한 사실을 주(당신)께 신원하옵나이다(우리가 그밖의 누구에게 우리의 딱한 사정을 아뢰리이까?)" . 사사들의 시대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하나님은 자주 그들을 그 원수들의 손에 팔아버리셨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그들이 (스스로) 팔렸다" (52:3-5). 그들이 하나님 예배에 태만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원수로 하여금 그들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시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다른 나라를 섬기는 일" 과의 차이점을 알 수 있게 하셨다.

그 본문은 죄의 고백, 즉 그들이 다른 신을 섬기고 그 이웃의 미신적인 법과 관습에 복종한 죄를 고백한 마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 죄로 인해 하나님 이외에 다른 주(主)들이 그들을 관할하였던 것이다(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우상을 바알 곧 주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것이 더 이상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약속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주만 의뢰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우리가 주만 경배하고 오직 주께서 제정하시고 명하신 방법대로만 행하리이다."

우리 회개의 반성도 이와 같을 수 있다. "주 이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나이다." 즉 온갖 정욕이 우리의 주였고, 우리는 그것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게 이처럼 그릇 행해온 것은 적지 아니한, 매우 긴 기간이었다. 그러므로 이와 똑같이, 이제부터는 우리가 하나님만 의뢰하고 주의 이름만을 불러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의 의무를 철저히 지키고 결코 그것을 버리지 않겠다는 경건한 결심을 해야 한다.


 💡26:13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 26:14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

(2) 그들은 때로 그들의 원수들 앞에서 포로로 잡혀갔다(15절).

"제일 처음으로 주께서 크게 하셨고 또 뿌리 박도록 하신 나라를 이제 주께서 줄어들게 하셨고 뽑아버리셨으며(신 30:4; 28:64 에서 경고되어 있는대로) 땅 끝까지 흩으셨고 하늘가로 쫓으셨나이다."

그러나 다음을 주목해 보자. 그들을 크게 하신 것에 대한 언급과 그들을 제거하신 것에 대한 언급 사이에는 "주께서 스스로 영광을 얻으셨다" 는 말이 적혀 있디.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영예를 위해 그 백성들을 그들의 죄로 인해 심판하시며, 동시에 그는 또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26:15 여호와여 주께서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고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나이다 스스로 영광을 얻으시고 이 땅의 모든 경계를 확장하셨나이다


(3) 이 예언자는, 그들이 이처럼 학대 당하고 사로잡혀 갔을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은 사실을 상기하고 있는데,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그들이 아주 하나님을 버린 것도 그로부터 버림 받은 것도 아니었다는 좋은 증거였으며, 그들이 받은 심판 속에는 자비로운 의도가 있었다는 좋은 증거이다. "여호와여 백성이 환란 중에 주를 앙모하나이다" (16절).

이것은 우리가 사사들의 역사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흔히 있는 일이었다. "다른 주들이 그들을 관할하였을" 때, 그들은 "스스로 겸비하여 가로되,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하였다" (대하 12:6).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환란의 필요성을 보자.

그것은 기도를 자극하는 데에 필요하다.

"백성이 환란 중에 주를 앙모하였나이다" 라는 말은, 그들은 평안하고 형통하였을 때에는 하나님께 이방이었고 그를 멀리 했으며, 마치 세상이 그들에게 미소지었을 때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거의 그의 곁에 오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2] 환란에 의해 우리가 흔히 얻는 유익을 보자.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끈다. 우리에게 우리의 의무를 촉구하며 우리는 그에게 의존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전에는 거의 그를 바라보지 않았던 자들이 이제 그를 앙모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주 나아오며, 다정하게 되고, 그의 호의를 구한다. 전에는 조금씩 조금씩 기도가 나왔으나, 이제 그들이 "기도를 쏟아 놓는다" (우리 성경 - "간절히 기도한다"). 이제는 증류기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샘에서 솟는 물처럼 기도가 나온다. 그들은(난외에 있는 것처럼) "은밀한 말" 을 쏟아 놓는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언어이기 때문에 은밀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다.

환란은 우리를 은밀한 기도로 이끌어야 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공개적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자유롭게 더 상세하게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것이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구하는 일에 게을렀던 자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는 그를 간절히 구할 것이다(호 5:15). 고난은 사람으로 하여금 열렬하고 간절히 기도하게 만들 것이다. "그들은 주의 징벌이 임하면, 전제(제사 술)를 붓든 기도를 쏟아 놓는다." 그러나 징벌이 제거될 때 - 인간은 흔히 그렇다 - 예전의 무관심 상태로 점차 돌아가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26:16 여호와여 그들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


(4) 이사야는 그들이 그들의 자유를 위한 매우 괴롭고 위험스런 투쟁을 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사실을 원망하고 있다(17, 18절).

[1] 그들은 무서운 고통과 아픔을 받았다. "우리가 고통으로 울부짖는 잉태하는 여인 같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도우려고 매우 수고하고 고심했으나, 우리의 고통은 그 노력들로 인해 오히려 커졌을 뿐입니다."

그것은 모세가 이스라엘을 건지려고 왔을 때, 그들이 만들어야 하는 벽돌 수효가 두 배로 된 것과 같았다. 그들의 기도는 고통의 에리함으로 인해 촉진되었고, 쓰라린 진통 중에 있는 여인의 울부짖음같이 강하고 격려했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앞에 이러하니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주목하고 계신다는 사실, 그들의 모든 비참함을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환란 중에 있는 그들을 안위하고 만족케 했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시 38:9). 그들이 와서 원망과 탄원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현신(現身)하러" 나왔을 때마다, 그들은 진통하고 있는 여인처럼 고통 가운데 있었다.

[2] 그들은 그들이 바라고 원했던 그 결과와 성공에 다다르지 못했다.

"우리가 잉태하였나이다. 즉 우리는 빨리 행복하게 구원될 것을 크게 기대하여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에 아기가 태어난 기쁨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고통을 잊게 만드리라고(요 16:21) 우리 자신을 위로하였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가 나은 것은 바람같아서, 그것이 거짓된 착상임이 입증되었습니다. 우리 기대는 좌절되었고, 우리의 고통은 산고라기 보다는 죽음의 고통이었습니다. 우리는 유산하는 태와 말라 붙은 유방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은 실패임이 입증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또는 우리 친구와 우리 편을 위해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오히려 우리 자신과 그들의 형편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또한 우리가 세계의 거민을 생산치 못하였나이다. 우리는 그들의 능력이나 소망에서 그들과 겨루어 왔었으나 그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교만하고 오만한 상태에 있나이다." 의로운 사유라면 기도와 노력에 의해 하나님과 사람에게 강력하게 호소할 수 있다. 그러나 얼마 동안은 구름 속에 가리워져 의도한 바를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기억하자.


💡26:17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 앞에서 그와 같으니이다


💡 26:18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


Ⅱ. 이사야의 전망과 희망은 매우 즐겁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12절), 즉 우리의 사정이 요구하는 필요한 모든 선한 것을 베푸시리이다" 는 것이다.

교회가 어떤 평강이나 소망을 갖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얼마동안 어떠한 환란이 정해져 있든지간에, 마침내 평강이 오리라고 자위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의 결국은 평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 모든 일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다면," 그는 우리에게 평강을 베푸실 것이다(의의 길은 평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그것은 세상이 줄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참되고 영원한 평강이다. 그 평강을 지닌 자들에게 있어서, "밤과 낮의" 율례처럼 그 평가은 변함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통해 우리는 그가 계속 우리에게 선을 행하시리라는 소망을 갖도록 스스로를 격려할 수 있다. "주께서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입니다(시 10:17). 그리고 이 평강이 우리에게 베풀어질 때, 그 때에 우리가 주만 의뢰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13절). 우리가 그것에 대한 영광을 주께만 들리고 다른 것에게는 돌리지 않겠나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를 그렇게 하도록 만들 수 있는 주의 은혜만을 의지하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그의 이름을 찬양할 수 없다. 특히 여기에서 그 예언자는 다음 두 가지 전망으로 교회를 위로하고 있다.

1. 교회의 원수들이 놀라운 멸망을 하리라는 전망이다(14절).

"그들은, 곧 우리를 관할하던 다른 주들은 죽었다."

하나님께 대항하고 사람들 중에 있는 그의 나라를 거스리는 사유는 얼마 동안은 형통할지 몰라도 마침내는 필연코 침몰할 것이며, 그것에 부착되었던 모든 것은 그것과 함께 멸절된 것임을 기억해 두자.

유대 학자들은 이것을 19절과 비교하면서 죽은 자의 부활은 오직 유대인에게만 속한 것이며, 다른 민족의 죽은 자는 부활하지 못하리라고 추론한다. 그러나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무덤에 있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게 된다" 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본문은 그리스도의 원수의 최종적인 멸망, 즉 둘째 사망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2. 교회의 친구들의 놀라운 부활(19절)에 대한 전망이다. 비록 교회가 진통을 겪어 "낳은 것은 바람같았고" 따라서 그 사내 아이의 출생을 기뻐하지 않았을지라도(18절), 그 실망은 그만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죽은 자들이 살아나리라." 죽었다고 생각되었던 자들, 사형 선고를 받았던 자들, 마치 자연적으로 죽은 것처럼 버려두었던 자들이 다시 이전의 생기를 되찾아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나와서 죽임을 당한 증인들에게도 들어갈 것이며, 그들은 다시 예언하게 될 것이다(계 11:11). "마른 뼈가 살아 극히 큰 군대가" 될 것이다(겔 37:10).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죽은 자의 부활, 즉 마지막 날 우리 시체의 부활을 욥이나 여기에서의 예언자처럼 믿는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교회의 광채와 기력이 회복되리라는 약속을 우리 자신이 쉽게 믿게 해 줄 것이다. 하나님의 때가 임했을 때는, 교회가 지금까지 아무리 비천하게 되었을지라도, 죽은 자들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독수리들이 모이는, 시체처럼 누워있는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까지도 그때에는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교회가 당신의 것임을 항상 시인하고 있으며, 이사야도 그렇게 말한다. 예루살렘은 일어날 것이다. 재건되고 다시 번영할 것이다. 그러므로 티끌속에 있는 것처럼 거하는 초라하고 처량하며 우울한 그 거민의 남은 자들로 하여금, "깨어 노래하게" 하라.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절기를 지키는 성, 안정된 처소" 예루살렘을 다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33:20). 새벽 이슬이 온종일 햇볕에 시달린 초목에게 생기와 활력을 주듯이,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이 예루살렘(교회)에 그렇게 작용할 것이다. 그리고 봄 이슬이 땅을 적시고 그 속에 묻혀있는 식물이 나오고 싹이 트게 만드는 것처럼, 죽은 자들이 다시 번성할 것이며, "땅이" 초목의 뿌리를 내어 놓은 것 같이 "죽은 자를 내어 놓을 것이다." 죽은 자들이 그 속에서 없어진 것처럼 보였던 땅은 그들의 소생에 이바지할 것이다.

교회와 교회의 권세가 회복되어야할 때가 오면, 하늘의 이슬이나 땅의 비옥함도 모두 그 회복을 위해 할 역할을 유감없이 다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스겔의 환상은 이 말씀에 주석이 된다)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잘 적용될 수 있다.

(1) 죄가운데 죽엇던 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은혜의 능력에 의해 영적으로 부활할 것을 말해 준다. 라이트 푸드(Light foot) 박사는 그것을 그렇게 적용시키고 있다(Hor Hebr. in Joh 12:24). "이방인들이 살아나리라. 내 몸과 함께 그들도 일어날 것이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불러내어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와 함께 일어나서 하늘의 처소에 그와 함께 앉을 것이다. 아니(그는 말한다) 그들은 내 몸을 일으킬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이 되어, 그의 지체로서 부활할 것이다."

(2) 죽었던 성도들이 살아 그리스도의 죽은 몸과 함께 일어날 저 마지막 부활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처음 열매로서 일어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자들은 그들이 그와 연합되어 그의 부활에 참예할 것이기 때문이다.


💡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