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1월 3일 금요일 묵상구절 사55:1-13 <하나님의 긍휼>

Jeehyun 2025. 1. 3. 22:50

맥체인성경읽기

창세기 3, 마태복음 3, 에스라 3, 사도행전 3

묵상구절

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55: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55: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55:4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55: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55: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55: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55: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55:10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55: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55:12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55:13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옥스퍼드 주석


 

복음적 초대(1) (이사야 55:1-5)

Ⅰ.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가 새 언약 속에서 가난한 영혼을 위해 마련하신 양식의 혜택을 와서 받으라고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있다. 새 언약은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다" (54:17). 그것은 미래 기업일 뿐만 아니라 현재 받을 잔이기도 하다(1절).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초대 대상자.

목마른 자라면 "누구든지" (한글 개역에는 이 말이 생략되었다) 초대 대상이 되고 있다. 구원의 말씀을 맨 먼저 받은 유대인도 초대받지만 가난한 자다가 병신, 소경, 저는 자라고 할 수 있는 이방인들도 그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는다. 길과 산울가에서 데려올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초대를 받는다(눅 14:21-23). 이 말씀이 시사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 모든 개개인을 충족시킬 만한 것이 있으며 따라서 그의 사역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구원을 제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 시대의 초대는 이전 보다 광범위하게 시행되어야 하며 이방인에게도 초대장이 발송되어야 하고 복음의 언약은 스스로 제외되지 않는 자면 누구나 제외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초대는 근청(謹廳)이란 말과 함께 공표되고 있다(원문에는 주의를 끄는 간투사가 들어 있음:역주, 다음의 초댓말을 주의하라는 뜻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2. 환영받는 자의 필요 조건.

이 초대에서 환영을 받으려면 목마르지 않으면 안 된다. 복음의 은혜를 영접한다는 조건 위에서만 모든 자가 복음의 은혜의 환영을 받게 될 것이다. 세상과 세상의 향락을 분깃으로 만족해하는 자는 목마르지 않은 자이다.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행복을 구하지 않는 자는 목마르지 않은 자이다.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여 이를 이루려고 하며 그리스도와 그의 의에 대한 필요성을 발견하지 못하는 자는 목마르지 않은 자이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궁핍을 인식하지 못하며 자신의 영혼에 대해 아픔을 느끼지도 불안해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겸비하여 그리스도께 신세질 생각이라곤 전혀 없다. 그러나 목마른 자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은 쉼을 위해 그리스도께 초대받듯이 물가로 초대된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곳에서는 먼저 은혜에 대한 갈급한 마음을 주시며 은혜에 대한 갈급함을 주신 곳에서는 기필코 은혜를 주신다는 점을 명심하자(시 81:10).

3. 초대 장소.

"물로 나아오라" . 너희는 물가로 나아오라. 상품이 수입되는 항구, 선창, 부두로 나아오라. 그리로 와서 사라. 왜냐하면 그곳은 외국 상품의 판매지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의를 들여오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영원히 그런 상품과는 생소할 뻔하였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라. 그는 열린샘이요 치는 반석이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의 성을 기쁘게 하는 시내 곧 거룩한 예전과 법도로 나아오라. 너희에게는 마치 물처럼 평범하고 흔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 의미가 포도주와 젖 같아서 풍부한 영양분과 원기를 제공해 줄 것이다. 너희는 치유하는 물로 나아오라. 생명수로 나아오라. 구주께서는 이점을 언급하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7).

4. 초대의 목적.

(1) "와서 사라" .

상인은 이득을 노려서 상행위를 벌인다. 그러나 어떤 상인도 그리스도처럼 고객을 끄는 사람은 없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쪽만 이득을 보라고 호객 행위를 하고 있다. "와서 사라. 우리는 너희가 틀림없이 수지 맞는 거래를 하게 된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다. 너희는 이 거래를 후회하거나 이 거래로 손해 보지 않을 것이다. 와서 사라. 복음의 은혜를 너희들 자신에게 적용함으로써 이것을 너희의 것으로 만들어라. 그리스도의 거래 조건대로 응하여 이것을 너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라. 아니, 어떤 값을 부르든지 너희는 이것을 사서 너희 소유로 만들어라. 값에 대해 망설이지 말고 그 거래 조건에 응할 것인지 아닌지 심사숙고하지도 말라."

(2) "와서 먹으라. 너희 자신의 소유를 더욱 증가시켜라. 단지 사기만 하면 무엇하랴! 먹어야 자신의 것이 더 많아진다고 할수 있다."

우리는 진리를 사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열해 두고 바라보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진리를 사는 것은 그것을 먹고 즐기기 위해서이며 우리의 영적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강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우리 영혼을 위해 필요한 양식을 사야 하며 우리가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의 은혜와 위로를 받을 수만 있다면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기꺼이 고별할 수가 있어야만 한다. 죄는 그리스도의 대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죄와 결별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의를 고집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경쟁적 위치에 서려는 것으로 우리는 그런 모든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심지어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우리의 이득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우리의 생 그 자체까지도 이별해야 하며 우리에게 극히 필요한 후원물까지도 내던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샀을 때 그 유용한 용도를 썩혀두지 말고 즐겨야 하며, 우리 손이 수고한 소산을 먹어야 한다. "사, 먹으라."

5. 제공되는 음식.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그것은 갈증을 덜어 줄 뿐만 아니라 깨끗한 물처럼 신체에 영양분이 되고 생기를 돋을 것이다. 세상은 우리의 기대에 달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적어도 그 안에 물이 있으리라고 기대하다가 "데마의 떼들" (욥 6:19)처럼 그것에 대해서 실망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대를 능가하신다. 우리는 물가로 가서 물을 보고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포도주와 젖도 발견하게 된다. 포도주와 젖은 유다 족속의 주산품이었다. 유다 지파의 실로는 포도주와 젖을 공급받아서 자기 백성들을 모으고 이를 즐기게 하신다(창 49;10).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창 49:12).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로 가서 어린아이들을 위한 젖을 얻어야만 한다. 갓 중생한 자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하고 그들을 소중히 키우기 위해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강한 자들도 그리스도에게서 자기들을 더욱 굳건히 만들 강장제를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또한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포도주도 마시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포도주와 젖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웅덩이 물 아니, 독수(毒水)와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6. 이 음식의 무료 전달

.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그것을 사라" (1절).

양식을 사는 방법이 이상하다. 준비한 돈도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물건을 구입할 때는 흔히 넉넉한 돈을 준비해 가지고 간다)한 푼도 아니, 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조차도 필요 없는 장사인 것이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와서 사라" 는 권면을 주목한 자들에게는 이것이 별로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적으로는 부요했지만 영적으로는 비참하고 가난하였던 것이다(계 3:17, 18). 우리가 돈 없이 물건을 산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암시한다.

(1) 우리에게 제공된 선물은 너무나도 귀중해서 가격을 매길 수 없다. 지혜는 금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2) 우리에게 이 선물을 주시는 분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우리는 그분께 보상할 수가 없다. 그가 이런 제의를 하시는 것은 이것을 팔아야만 할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주시고자 하는 의향 때문이다.

(3) 제공된 물건들을 이미 값을 치르고 산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제값을 온전히 치르시고 그것들을 사셨다. 그것은 돈으로 사신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써 사신 것이다(벧전 1:19).

(4) 비록 우리는 그 선물을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존재이며 가치 있는 것을 요구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우리는 그 약속의 은혜로 환영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은 어떤 가치도 없으며, 우리가 가지고 있거나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천국이 우리의 것이라면 우리가 값 없이 주신 은혜에 빚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Ⅱ. 우리가 간절한 요청과 설득을 받는 것은 이 초대를 받아들이라는 것과 우리 자신을 위해 이 수지 맞는 거래를 추진하라는 것이다(우리가 설득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1. 우리를 설득하고 있는 내용은 하나님과 그 분의 제안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다.

"부지런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한글 개역성서:나를 칭종하라, 2절) 내 말을 들을 뿐만 아니라 내가 말하는 것을 시인하고 너희 자신에게 적용하라. 너희 자신이 관심을 갖고 기뻐하는 것에 대해 귀를 기울이듯이 그렇게 "귀를 기울이라" (3절). 귀를 기울여 복음의 겸손한 방법에 거만한 마음을 굴복시키도록 하라. 주의하고 주목할 수 있도록 이쪽으로 귀를 기울이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 와서 나와 교섭할 뿐만 아니라 내게 응하고 내 조건에 따르라. 하나님께서 제의하시는 것들을 매우 유리한 것으로 받아들이라. 아주 적절하고 이치에 맞는 요구라고 여겨 그에 응하라.

2. 우리를 설득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논증.

(1) 만약 우리가 이 초대를 소홀히 하거나 거절한다면 말할 수 없는 착오를 범하는 것이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돈을 소비하느냐?" 돈 없이도 내게서 포도주와 젖을 얻을 수 있을 때 너희는 어찌하여 마른 떡 아니, 거지의 음식도 나오지 않을 것을 위해 돈을 허비하느냐? "어찌하여 너희가 배부르게" 하지 못하는 마른 떡보다 "못한 것을 위하여" 애를 쓰며 "수고하느냐?" 여기서 다음 사실을 눈여겨 보자.

[1] 이 세상 만물의 허무함,

이 세상 것은 영혼의 양식이 되지 못하며 영혼에 대한 적당한 음식도 아니다. 이 세상의 사물은 적절한 자양분을 제공하거나 원기를 회복시켜 줄 능력이 없다. 빵은 생리적 삶을 지탱시켜 주지만 영적인 삶을 위해서는 전혀 뒷받침이 되지 못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부와 기쁨은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한 한 끼의 식사도 되지 못한다. 영원한 진리와 영원한 선과 이성적이고도 죽지 않는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과의 화해와 그에게 대한 복종에 있으며 그 분과의 결합과 교통에 있다. 세상의 사물은 전혀 영혼의 친구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들은 "배부르게 하지 못한다" . 그것들은 영혼에게 확실한 위로와 만족을 주지 못한다. 또한 그것은 "이제는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진다" 라고 말할 수 없다. 아니. 그것들은 신체의 욕구조차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사람들은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더욱 더 많이 소유하고 싶어 할 것이다 (전 1:8). 하만은 자신의 풍요 속에서도 만족하지 못했었다. 세상의 사물은 사탕발림은 하지만 채워 주지는 못한다. 세상 것은 배고픈 자의 꿈처럼 잠시 동안은 즐겁게 해 준다. 그러나 그가 잠에서 깨어 보면 그 영혼이 텅비어 허무함을 느낀다. 그들을 곧 시장하게 만들고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세상 것은 인간을 물리도록 먹이면서 만족시키거나 그를 정말로 편하게 하지는 못한다. 세상 사물은 모두가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다.

[2] 이 세상의 자녀들의 어리석음.

그들은 이러한 만족을 주지 못하는 불확실한 것들에게 돈과 수고를 소비한다. 부자는 돈으로 살고 가난한 자는 노동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둘 다 그들의 참 이익을 놓치고 있다. 전자가 세상을 위해 장사하고 후자가 세상을 위해 수고하고 있는 동안에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그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 양자는 세상에서 만족과 행복을 얻을 줄로 기대하고 있으나 그들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동정적으로 그들을 설득하신다. "무엇 때문에 너는 이와 같이 네 자신의 이익에 배치되는 행동을 하는가? 어찌하여 너는 스스로 사서 그렇게 고난을 겪는가?" 우리도 스스로를 그렇게 타일러 보자. 또한 이러한 설득의 결과, "썩은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려는" (요 6:27) 성스러운 결단을 하도록 하자. 우리는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실망을 통해 그리스도께로 가고 싶은 충동을 느껴야 하며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만족을 구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장차 확실하게 될 일을 확보하는 길이다.

(2) 만약 우리가 이 초대를 수락하고 그것에 응한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자선 행위를 베푸는 셈이다.

[1] 즉, 우리는 현재적 즐거움과 만족을 확보하게 된다.

"만약 너희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청종한다면 너희는 좋은 것을 먹게 될 것이다. 그것은 건강에 좋으며 즐겁게 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가 좋을 뿐더러 너에게도 좋다."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과 약속, 선한 양심, 그리고 선하신 성령의 위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복종하는 자들에게 끊이지 않는 잔치가 된다. 그들의 "마음은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 즉 그들의 마음은 가장 부유하고 가장 고마운 기쁨으로 즐거워할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초대는 "와서 사라" 는 초대가 아니다. 그것은 낙심시키지 않도록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 나오는 초대는 "와서 먹으라. 와서 즐기라. 그것은 풍성한 즐거움을 줄 것이다. 친구들이여, 먹으라" 고 하고 있다. 사람들 자신에게 지극한 복이 될 일인데도 사람들에게 이처럼 간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슬프기 그지없다.

[2] 우리들은 이로써 영원한 행복을 확보하는 셈이다.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3절). 너희는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축복도 받으리라. 왜냐하면 이 정도의 것이 아니면 불멸의 영혼을 살리는 것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며, 영을 살리는 생명이고 (요 6:33, 63) 또한 생명의 말씀이다(행 5:20). 이 행복은 얼마나 쉬운 조건으로 우리에게 제공되는가! 그것은 바로 "들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3절)는 것이다.

[3] 크신 하나님께서는 은혜스럽게 이런 모든 것을 우리에게 확보해 주신다.

"나에게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3절). 내 자신이 너희와 계약 관계를 맺고 너희는 계약 약속 하에 있을 것이며, 그로 인해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 (3절) 위에 너희를 세우리라."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 첫째,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그 분에게로 간다면 그 분은 우리에게 좋은 것과 행복을 베푸시기 위하여 우리와 계약을 맺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우리들에게 대한 그 분의 겸손이며 우리를 위한 관심이다.
  • 둘째,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다. 그것은 영원 전부터 계획되고 영원까지 계속되는 언약이다.
  • 셋째, 이 언약의 혜택은 우리들의 경우에 적합한 자비다. 우리들은 비참하기 때문에 자비의 적절한 대상들이 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자비에서 유래하며 어느모로 보나 우리에게 대한 친절심에서 준비되었다.
  • 넷째, 그것들은 다윗의 자비 즉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자비이며(시 89:28, 29) 솔로몬은 "주의 종 다윗" 에게 베푸신 은총이라고 부르며 호소하고 있다(대하 6:42).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만큼 확실한 언약이 될 것이다(렘 33:25, 26). 다윗 왕의 언약은 은혜의 언약에 대한 예표였다(삼하 23:5). 또는 여기서 우리는 다윗을 메시야로 이해할 수 있다. 언약의 자비는 모두 메시야의 자비이다. 그는 모든 언약의 자비를 사셨다. 자비는 그에게서만 대망되고 약속된다. 자비는 그의 장중에 비장되어 있다가 우리들에게 시여된다. 그는 중보자이시며 계약의 수탁자다. 사도행전에서도 이것은 그리스도께 적용되고 있다(행 13:34). 그것들은 Ta o?sta(행 13:34 와 70인역 성서의 사 55:3 에는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음) ----즉 다윗의 거룩한 은사이다. 왜냐하면 언약의 은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의해 확증되고 (시 89:35) 세상에 성결을 진작시키기 위한 목적을 지니는 때문이다.
  • 다섯째, 그 은혜는 확실한 은혜이다. 언약은 확실하다. 하나님은 이런 은혜를 제공하심에 있어 진실하시며 성실하시며 간절하시다. 언약은 확실히 모든 사람에게 제의된 것이며 개개의 신자들에게 적용할 때도 확실하다. 하나님은 은사와 부르심은 후회가 없다. 그것은 다윗에게 허락하신 은혜이며 따라서 확실한 은혜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약속들은 전부가 가한 것이요 아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Ⅲ. 우리는 여러 가지 약속을 수락하도록 초대를 받았는데 그 모든 약속을 성취하실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되고 있다(4절).

그는 바로 자신의 은혜가 언약의 축복과 혜택이 되는 다윗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목적과 약속 가운데서 그를 세우셨고" (원의;주셨고)그를 임명하셨으며, 마치 이미 오신 것처럼 분명히 때가 차면 그를 틀림없이 보내셔서 이런 준비의 혜택을 얻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거저 값 없이 주셨다. 값 없이 주는 선물보다 고마운 것은 없다. 우리에게는 그런 은총을 받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우리는 약속의 혜택을 입도록 초대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기능인을 요구한다.

1. 그 약속의 진실성을 입증해 줄 자. 그래서 그리스도는 "증거" 로 세움을 입었다.

그는 하나님이 복음의 조건 위에서 우리를 기꺼이 받으려고 하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인이다. 그는 열조에게 하신 약속을 확증하여 우리로 완전한 만족감을 가지고 우리 영혼을 그 약속에 걸게 하신다. 그리스도는 충성된 증인이시며 우리는 그의 말씀을 보았을 수 있다. 그는 완전한 증인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품 안에 계셨고 전체적인 일을 완전히 알고 계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한 사람의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증거하신다. 그리고 믿는다는 것은 그의 증거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2. 우리를 그 초대에 응하게 하고 그 거래 조건에 따르도록 도울 자.

우리는 물가로 나아가는 길을 어떻게 발견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도자로 제공되셨다. 우리는 자격을 부여받고 분배에 참여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할 일을 가르쳐 주고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명령자로 주어졌다. 여러 가지 어려움과 방해물들이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우리의 길에 놓여 있다. 우리에게는 맞붙어 싸워야 할 영적 원수들이 있다. 우리가 그 투쟁에서 이기도록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같은 대장을 보내셨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대적들을 우리 발 아래 짓밟고 약속의 땅을 소유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인도자" 요 "명령자" 이시다. 그리스도는 그의 교훈으로써는 명령자요, 그의 모범으로써는 인도자이시다. 우리는 그분께 순종하고 따르는 일로 본분을 삼아야 한다.

Ⅳ. 잔치의 주인이 정해졌으므로 그 다음에는 잔치에 청할 손님이 나온다. 왜냐하면 그 음식은 낭비되어서는 안 되며 헛되이 만들어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5절).

1. 이방인들이 이 잔치에 초대받을 것이며 길과 산울가에서 청함을 입을 것이다(눅 14:23).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지어다(5절). 즉 이들은 전에는 부름을 받지 못했고 네 민족으로 인정되지 않던 자들이다. 네가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들을 보내던 것과는 달리 이들에게는 선지자를 보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종족들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높이 알고 계셨다. 이방인들은 전에는 결코 은혜받지 못했으나 이제부터는 은혜를 받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았다기 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다" (갈 4:9)

2. 그들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올 것이다.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이다" (5절). 오랫동안 그리스도에게서 멀이 떨어져 있던 자들이 그에게 가까워질 것이다. 그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있었던 사람들이 극히 신속하고 민첩하게 그에게로 달려올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이 폭주(輻輳)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땅에서 들리신 뒤 모든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이끄실 것이다. 이제 그 이유를 살펴보자.

(1) 왜 이방인들이 이처럼 그리스도께로 모이는가?

그것은 "여호와가 그의 하나님" 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권능으로써 그렇게 선포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 그의 하나님은 자기들과 관계 있는 분이시며 그의 아들에게 참예하지 않고서는 그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과의 이해 관계를 알게 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하신 중보자이시다. 그래서 그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로 오지 못한다.

(2)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에게로 이끄시는가?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요 약속에 신실한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교도들을 그의 기업으로 주심으로써 그를 영화롭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헬라인 몇몇이 그리스도께 대해 묻기 시작하자 그는 "인자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 (요 12:22, 23)고 말씀하셨다. 그가 부활과 승천으로 영광을 받은 것은 무수한 사람들을 자기에게 달려오게 한 증거였다.


복음적 초대(2) (이사야 55:6-13)

여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이루어진 은혜의 약속이 좀 더 깊이 설명되고 있다. 언약은 무엇을 필요로 하며 무엇을 약속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신앙과 신뢰를 확증시키고도 남을 만큼 풍족한 근거가 여기에 제시되고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대한 하나님의 선한 뜻의 재천명이다. 이런 은혜로운 발견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구약이나 신약에 국한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물며 바벨론 포로에게 국한된다는 것은 더 더욱 부당하다. 교훈과 약속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목마른 모든 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1절). 그런데 누가 받지 않는가? 이것을 들으라. 그러면 생명을 얻으리라.

Ⅰ. 여기에는 복음을 조건으로 불쌍한 죄인들에게 용서와 평화의 모든 행복을 주겠다는 은혜로운 제의가 나온다(6,7절).

1. 그들로 기도하게 하라. 그러면 그들의 기도는 상달될 것이며 응답될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6절). 너희는 전에 배반하여 떠났던 그분을 찾으라. 너희는 그를 격노케 하여 은총을 거두어 들이시게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상실했던 그분을 찾으라. 이제 그가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들릴 만한곳에 계실 때 그를 부르라." 다음을 살펴보자.

(1) 필수적 의무.

[1] "여호와를 찾으라.

신탁을 구할 때처럼 그를 찾고 그에게 물으라.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 하고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라. 네 분깃과 행복을 위해 그를 찾고 물으라.

그 분과 화해하고 친하기 위해 찾으라. 그의 은혜 가운데 행복하기 위하여 찾으라. 네가 그 분을 잃었던 것을 애석하게 여기라. 그분을 발견하기를 갈망하라. 그리스도를 너의 길로, 성령을 너의 안내자로, 말씀을 너의 규범으로 이용하여 그 분을 발견할 수 있도록 지정된 방법을 취하라.

[2] "그를 부르라.

화해받기 위해 그에게 기도하라. 화해를 받았을 때는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위해 기도하라."

(2) 우리에게 이런 의무들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동기는 "그를 만날 만한 때에" ---- "가까이 계실 동안에" 란 것이다.

[1]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실 때에 발견될 것이라는 말이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그를 찾고 부르는 일이 허사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의 인내는 우리를 기다리시고 있고, 그의 말씀은 우리를 부르고 있으며 그의 영은 우리와 함께 노력하고 있다. 자 이제는 우리의 유리한 점과 기회를 활용해 보자. 왜냐하면 지금은 은혜받을 그러므로 나한 때이기 때문이다.

[2] 그러나, 그가 멀리 계셔서 만나지 못할 날이 오고 있다. 그의 인내의 날이 끝날 날이 오고 있다. 그의 영이 더 이상 분투 노력하지 않을 날이 오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교정할 수 없을 정도로 강퍅해질 그러한 때가 이 생에 올런지도 모른다. 죽음과 심판서에는 문이 틀림없이 닫힐 것이다(눅 16:26; 13:25, 26). 지금은 자비가 제공되고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자비 없는 심판이 거행될 것이다.

2.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여 마음을 고치게 하라. 그러면 그들의 죄가 용서닫을 것이다(7절).

여기서는 회개치 않은 자와 "악인" 과 "불의한 자" 를 향한 외침이 있다. 이 사악한 자들은 엄청난 죄를 짓고 살고 있으며, 불의한 자들은 명백한 의무를 소홀히 여기면서 살고 있다. 이 구원의 말씀은 그런 악인과 불의한 자에게 보내지고 있는 것이다. 참회하는 죄인에게는 하나님이 요서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한 모든 노력은 바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1) 회개는 무엇인가? 회개에는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1] 회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 이다. 회개는 죄를 "버리는 것" 이다. 죄를 떠나는 것이다. 죄를 싫어하고 혐오하여 떠나는 것이다. 결코 죄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악인은 자기의 사악한 길을 버려야만 한다. 마치 우리가 목적지인 행복으로 인도해 주지 않는 거짓된 길을 버리고 파멸로 이끄는 위험한 길을 버리듯 악한 길도 버려야만 한다. 악인은 악한 길로 한 발자국도 더 옮겨서는 안 된다. 아니, 그 길 뿐만 아니라 마음도 바꾸어야 한다.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려야" 만 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뿌리까지 뽑아 회개하라. 우리는 사람이나 사물에 관한 우리의 그릇된 판단을 바꿔야 하며 부패한 상상을 몰아내야 하고, 더러운 마음의 도피처가 되는 헛된 위선을 그만 두어야만 한다. 악한 행위를 중단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악한 생각에 대한 정지 신청을 내야만 한다는 데 유의하자. 그러나 회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2] 회개한다는 것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 이다. 회개는 우리가 이제까지 반역해왔던 지고무상하신 주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 분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를 화해시키는데 관심을 가지신 그분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회개는 생명의 셈이요, 생수이신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터진 웅덩이를 바라서 생명의 샘을 버린 존재였다.

(2) 이렇게 회개하도록 격려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가 회개한다면,

[1]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 죄에 합당한 대로 우리를 다루려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비참한 것은 자비의 대상이다. 우리는 죄 때문에 참으로 비참하게 되었다" (겔 16:5, 6). 그리고 우리는 회개로써 비참을 알게 되고 슬퍼하게 되었다(렘 31:18). 이 두 가지 즉 죄의 결과와 회개 때문에 우리는 연민의 대상으로 된다. 하나님께는 인자와 긍휼이 있다.

[2] "그는 널리 용서하시리라" (7절).

우리가 범죄를 증가시켰듯이 하나님은 용서를 "증가시키실 것이다" (원의는 그렇다). 비록 우리 죄가 매우 크고 많으며 또한 자주 배반하며 아직까지도 범죄하기 쉬울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반복하실 것이다. 비록 패역한 자녀라도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영접하실 것이다.

Ⅱ. 이 제한을 수락하고 우리의 영혼을 이 제안에 걸어보라는 권고가 나오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느 쪽을 보더라도 이 제안의 신빙성과 가치를 믿어도 좋을 만큼 충분한 확증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1. 하늘을 쳐다보면 그 뜻이 높고 초월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의 생각과 길보다 무한히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8,9절).

악인은 악한 길과 생각을 버리고(7절)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촉구받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길과 생각을 하나님의 길과 생각에 일치시키고 부합시키도록 권고받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 생각과 길은 너희와 다르다. 너희들의 생각과 길은 다만 아래에 있는 것들에만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땅에 속해 했다. 그러나 나의 생각과 길은 위에 속해 있다. 그것은 마치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과 같다(9절).

만약에 너희가 진실한 참회자라는 것을 인정받고자 원한다면 너희의 행위와 생각 역시 위의 것이 되어야만 한다. 너희의 애착은 위의 것에 두어져야 한다" 고 하나님은 말하시기 때문이다. 또는 이 말씀은 회개시에 하나님의 죄사함의 약속을 신뢰하라는 격려로 이해할 수도 있다.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화해하시기를 원치 않으신다고 걱정하기 쉽다. 왜냐하면 아주 비열하게 자주 자기들을 화나게 하는 자가 있다면 그와 화해 할 마음이 조금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있어서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훨씬 높은 것이다" (9절)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다른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죄와 그리스도와 거룩함에 관한 인간의 감정들과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대한 인간들의 감정들은 하나님의 것과 무한히 다르다. 그러니 화해에 관한 문제 역시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화를 잘 내시고 용서를 꺼리신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는 한 번 용서를 하시면 두 번 다시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베드로는 "일곱 번" 의 용서를 많은 것이라고 생각했다(마 18:21). 사람들은 우리에게 백 데나리온의 부채도 탕감해 주기를 아까워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는 죄인을 자비로이 맞아 주시고 용서해 주신다. 그는 거저 용서해 주시며 꾸짖음이 없이 자비를 베푸신다. 우리는 남을 용서해 준다고 하면서 그 사실을 마음에 새겨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 주실 때는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 대해 선한 생각을 품으시고 당신께 돌아오라고 죄인들을 권유하신다(렘 31:20).

2. 우리가 이 땅을 내려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거기에서 능력에 차 있으며 효과를 발휘하며 그 모든 의도에 부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10,11절).

(1) 하나님의 말씀은 자연계에서 어떤 효능을 가지는지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눈에게 땅 위에 내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눈이 올 시기와 양과 적설 기간을 지정하신다. 하나님은 "적은 비와 큰 비도 그같이 내리게 하신다" (욥 37:6).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것들은 하늘로부터 내린다. 이는 므릇 하나님의 명하시는 것을 세상에 이루려 함이며, 그것이 징벌을 위해서든 토지를 위해서든 긍휼 베푸심을 위해서든 무엇을 위해서든지 간에 하나님의 명하심대로 순종한다(욥 37:12, 13). 그것은 re infecta 즉 그 목적을 수행하지 않고 돌아오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시 104:13)고 일컬어 진다.

땅에 물 주는 것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싹이 나서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 왜냐하면 땅의 소산물은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을 맞고 자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것을 "먹는 자에게 양식을 주며" 그와 그 가족을 부양시켜 줄 뿐만 아니라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어 다음 해에 양식을 얻게 해 준다. 농부는 먹는 자 뿐만 아니라 파종자도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곧 그가 가진 모든 것이 다 바닥날 것이다.

(2) 섭리와 은혜의 왕국에서 그 분의 말씀의 효능도 전자만큼 확실하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러하리라. 내 말은 섭리의 손으로 강력히 시행되듯 선지자의 입으로도 강력히 시행되리라.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11절). 보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거나 극복하지 못할 반대를 받는 일이 없으리라. 그것은 나의 뜻을 이룰 것이다(왜냐하면 그것은 만물에 대해 역사하시는 그의 계획대로 행하시는 의지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준다.

[1] 하나님의 약속들은 모두가 적절한 시기에 완전한 성취를 이룰 것이며 그 일점 일획이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왕상 8:56). 자비와 은혜의 약속들은 믿는 자들의 영혼에 실질적인 효과를 미칠 것이다. 비가 땅에 내려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처럼 자비롭고 은혜로운 약속은 믿는 영혼을 성결하게 하고 위로하는 데 효력을 나타낼 것이다.

[2] 말씀은 보내시는 용도에 따라 상이한 효력을 미칠 것이다. 만일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되지 않는 경우라면 그 말씀은 사망을 좇아 사망에 이르게 하는 냄새가 될 것이다. 만약 말씀이 양심을 각성시키거나 부드럽게 하지 않는다면 양심을 마비시키고 마음을 강퍅하게 할 것이다. 말씀이 천국을 위해 익지 않으면 지옥을 위해 익을 것이다(사 6:9). 하나님의 말씀은 이 길로든 저 길로든 효과를 거두며 실시될 것이다.

[3]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은 마치 이슬이 하늘에서 내리듯이(호 14:5) 헛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모이지 않으면 그는 이방인의 전향으로 영광받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은혜를 거절할 때 은혜의 돌봄은 이방인에게 베풀어져야만 한다. 이는 혼인 잔치에 손님이 없어서는 안 되며 복음이 헛되이 돌아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3. 우리가 교회를 특별히 주시해 보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얼마나 큰 일을 해 오셨으며 앞으로도 행하실 것인가를 발견할 수 있다(12,13절).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다" (12절).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1) 유대인이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돌아온다는 것.

그들은 포로에서 놓여나와 그들의 고토로 인도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들 앞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했듯이 틀림없이 그들 앞에서 인도하실 것이다. 그들은 떨면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의기양양하게 나갈 것이며, 바벨론과의 석별을 아쉬워하거나 도로 데려갈까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평안으로(12절) 나아갈 것이다. 산을 넘어 고국으로 돌아오는 여로는 즐거울 것이며 그들은 경유국 주민들의 호의와 인사를 받게 될 것이다. 작은 산들과 그 주민들은 기쁨을 이기지 못해 노래를 발할 것이다(12절). 사람들이 잠잠하다면 들의 모든 나무가 손바닥을 치고 환호성으로 배웅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의 고토에 돌아오면 그 땅도 기꺼이 그들을 맞이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질려와 가시나무가 그 땅을 뒤덮고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잣나무와 화석류가 대신할 것이기 때문이다(12절). 비록 거칠게 내버려져 있다곤 하나 그 땅은 안식을 누린 셈이다(레 26:34). 안식년 후의 땅처럼 그 땅은 포로기가 끝나자 더욱 더 좋아졌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할 것이며 그에게 "명예" 가 될 것이다.

(2) 의심할 나위도 없이 그것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영원한 표징" 이 될 것이다(13절).

[1] 유대인들의 바벨론 속량은 복음시대와 관련된 약속들의 확증이 될 것이다.

그 큰 구원에 관련된 예언의 성취는 모든 다른 약속의 이행에 대한 서약과 보증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로써 약속하신 분은 신실한 분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2] 그것은 약속된 축복의 설명이 되며 그 약속의 예표와 표징이 될 것이다.

  • 첫째, 복음의 은혜는 죄와 사탄에게 예속된 자들을 자유로이 놓아 줄 것이다.
    • 그들은 나아가며 인도함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줄 것이며 그 때라야 그들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것이다.
  • 둘째, 복음의 은혜는 우울하던 자들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할 것이다.
    • "야곱은 기뻐하고 이스라엘은 즐거워할 것이다" (시 14:7). 땅과 아랫 피조물들은 이 구원의 기쁨을 나누게 될 것이다(시 96:11, 12).
  • 셋째, 복음의 은혜는 인간들의 성격에 큰 변화를 줄 것이다.
    • 가시와 찔레처럼 아무짝에도 쓸모 없이 아궁이에 들어갈 수밖에 없을 만큼 해롭고 성가시게 하는 자들이 잣나무와 화석류처럼 은혜롭고 유용한 자가 될 것이다. 가시나무와 엉겅퀴는 죄와 함께 들어온 저주의 소산물이다(창 3:18). 이 같이 아름다운 나무의 재배는 율법의 저주가 제거되고 복음의 축복이 도입됨을 의미한다. 교회의적들은 가시나무와 엉겅퀴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 대신에 친구들을 일으키셔서 교회의 보호물과 장식물이 되게 하실 것이다. 또는 그것은 보다 선한 세계의 성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가시나무와 엉겅퀴의 세대 대신에 잣나무와 화석류의 세대가 올 것이다. 자녀들은 부모들보다 더 지혜롭고 선하게 될 것이다.
  • 넷째,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일로 영광을 받을 것이다.
    • 그것은 하나님께 명예가 될 것이다. 그는 그 이름으로 알려지고 찬송 받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로써 용기를 얻을 것이다. 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표징이 될 것이다. 잠시 동안은 가릴지 모르나 결코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는" 것을 확신시켜 줄 것이다. 은혜의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다. 왜냐하면 언약의 현재적 축복은 영원한 축복의 표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