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1월 8일 수요일 묵상구절 사58:1-12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금식>

Jeehyun 2025. 1. 8. 09:11

맥체인성경읽기

창세기 8, 마태복음 8, 에스라 8, 사도행전 8

묵상구절

58:1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금식>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58:2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58:3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58: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58: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58: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58: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58: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58: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58: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여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58: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58:12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존오웬 시리즈 칼럼]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참된 믿음의 증거(32)-정성우 담임목사]


매튜헨리/옥스퍼드

옥스퍼드 주석


백성에게 대한 책망 (이사야 58:1,2)

우리 주 예수께서는 보혜사를 보내기로 약속하시면서 "그가 와서 책망하시리라" (요 16:7, 8)고 덧붙여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깨닫게 하는 책망은 위로를 예비하며 귀한 것과 천한 것을 구분하며 위로받을 자를 선정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선지자에게 자기 백성들을 위로하도록 지시하셨는데(사 40:1) 여기서는 그들을 책망하여 죄를 보여 주도록 선지자에게 지시하신다.

Ⅰ. 그는 그들이 실제로 얼마나 악한가를 그들에게 말해야만 한다(1절).

1. 그는 충실하고도 솔직히 그들에게 말해야 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라, 야곱의 집이라 일컬어진다 해도 비록 그들이 명예로운 칭호와 성격으로 지닌다 할지라도 또 이로써 여러 가지의 영광스러운 특권에 관계가 있는 백성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아첨하지 말며 오히려 그들에게 그들의 죄와 범죄를 낱낱이 보여 주며 그들의 잘못을 말하라. 그들은 자기들 사이에서 어떤 범죄가 자행되고 있는지 그들이 몇 가지 일은 개혁했다고 해도 또 다른 일로써는 여전히 악하다는 것을 알려 주라. 그들에게 허물과 죄를 보여 주라. 다시 말해서 그들의 죄 가운데 있는 모든 허물과 그들 마음속에 있는 모든 죄와 허물을 보여 주라(레 16:21).

(1)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야곱의 집에 있는 죄를 보시고 노여워하신다.

(2) 그들은 왕왕 자신의 죄를 간과하기 쉬웠고 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 줄 필요가 있고 "너는 이러이러한 일을 행했느니라" 고 말해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그는 이 일에 있어서 격렬해야 하며 열렬해야 한다. 그는 "크게 외치고 아끼지 말아" 야만 한다(1절).

그는 그들을 아끼지 말아야 하며(마치 다칠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밑바닥까지 살펴서 뼈 속까지 들춰야 한다) 자신이나 자신의 수고도 아껴서는 안 되었다. 그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큰 소리로 외쳐야 했다. 그는 자기의 힘과 생기를 다 소모했고 그것으로 인하여 악감을 사고 욕설을 얻어먹었다. 그러나 그는 아껴서는 안 되었다. 그는 목소리를 나팔처럼 높여야 했다. 충고와 권면이 전달될 때 귀머거리가 되기 쉬운 사람들이 자기 잘못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주의를 끌고 싶어하는 자답게 가장 힘있고 절박한 방법으로 책망해야만 했다. 나팔은 불확실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 소리는 높고 날카롭긴 하지만 아주 뚜렷하다. 죄의 치명적 결과에 대한 그의 경고도 나팔소리 같지 않으면 안 되었다(겔 33:3).

Ⅱ. 그러나 그는 그들이 외견상으로는 얼마나 선하게 보이는지 인식해야만 했다. "그러는 그들은 날마다 나를 찾는다" (2절).

선지자가 돌아다니면서 그들의 허물을 말해 주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 수 없노라고 항변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 부지런하고 꾸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이상 더 무엇을 원하시는가?

1. 하나님은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신다.

외식하는 자도 선한 것을 행하는 한 그것에 대한 칭찬을 거절당하지 않을 것이다. 위선자는 이것을 최대한 활용한다. 그들은 경건한 모양을 가진다는 것이 인정되고 있다.

(1) 그들은 교회에 다니며, 기도 시간을 준수하라. "그들은 날마다 나를 찾는다" (2절). 그들은 신앙 생활에 꾸준하며 결코 빠뜨리거나 거르는 일이 없으며 다른 일로 신앙 행위를 회피하는 일도 없다.

(2) 그들은 선한 가르침에 귀 기울이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나의 길 알기를 좋아한다" (2절). 그들은 요한의 말을 즐겁게 들었던 헤롯이나 기쁨으로 말씀의 씨앗을 받은 돌짝밭과 같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마치 "사랑의 노래" 와 같다(겔 33:32).

(3) 그들은 종교의 행사를 크게 기뻐하는 것 같고 예배 행위가 그들의 본령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한다" (2절). 이것은 그들의 접근 대상인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종의 즐거운 분위기가 사교나 축제를 위해서다.

(4) 그들은 자기들의 의무에 대해 캐묻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들은 알기만 원할 뿐 알고 나서 행하는 것은 문제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한다." 그들은 내게 공의의 규례를 묻는다.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기초가 되는 경건의 규칙들과 인간 관계에 있어서 밑바탕이 되는 공평의 규칙들은 곧 의로운 판단이요 공의의 구례이다.

(5) 세상 사람의 눈에는 그들이 마치 의무 이행을 본분으로 삼는 자처럼 비친다. "그들은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다" (2절). 타인들은 그들을 그런 자로 오인했고 그들 역시 그런 사람으로 자처했다. 그들의 신앙 행위와 배치되는 것은 전혀 중인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은 마땅히 되어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자로 보였을 뿐이다. 천국을 향해 큰 길로 가다가 도달하지 못하는 자들도 있다. 아니, 훌륭한 명성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자가 부지기수라는 것을 명심하자.

2. 하나님은 이것이 그들의 죄에 대한 은폐나 변명이 되긴 커녕 참으로 그들의 죄를 가중시켰다고 시사하신다.

선악에 대한 지식, 죄와 의무에 대한 지식, 또 그들에게 대한 양심의 책망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지은 그들의 죄를 알려 주라.


진정한 금식의 성질 (이사야 58:3-7)

Ⅰ. 위선자들은 자기들 스스로가 대단하게 여겼던 예배를 하나님이 열납하시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께 앙앙불락하였다.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나이까?" (3절) 그들은 가인의 길로 갔다. 가인은 자기 제사가 열납되지 않은 것을 큰 모욕으로 간주하고 분개하여 하나님께 화를 냈다. 그들은 외면적 형식적 예배로써 하나님을 속이려고 동분서주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자기들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지 않으신다고 해서 마치 자기들을 부당하게 취급하시기라도 했다는 듯이 하나님과 언쟁을 벌이려고 좌충우돌한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들은 얼마나 자화자찬하며 자기들의 행위를 얼마나 과장 하는가!

"우리는 금식했고 마음을 괴롭게 하였나이다. 우리들은 날마다 하나님을 찾았을 뿐만 아니라 보다 엄숙한 헌신의 시간들을 지켰나이다" (3절). 혹자는 이것이 연 1회의 금식(" 속죄의 날" 이라 불리웠다)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여 또 어떤 사람들은 경우에 따라 임의적으로 행하는 금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나이다" (눅 18:12)라고 말하는 바리새인처럼 신앙 행위를 자랑하는 일은 겸비치 못한 사람에게 흔히 있는 일이다.

2.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에서 무엇을 기대했는가?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크게 주목하시고 자기들에게 빚진 자라는 것을 인정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위선자들이 형식적 신앙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신실한 자에게만 약속하신 하나님의 열납을 스스로 기다리는 것은 향용있는 일이다. 그들은 의당 자기들이 열납되고 칭찬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3.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하신 은총의 표징을 주지 않으셨으며, 그들을 고통에서 즉시 건져내시지 않으셨으며 그들을 명예와 번영으로 이끌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들의 태도는 무척이나 가증스러웠다. 그들은 하나님을 불의하고 편파적인 분으로 비난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버릴 것을 결심한 것처럼 보이며, 하나님께 기도하나 얻은 것이 없다(욥 21:14, 15; 말 3:14)는 말로 신앙의 포기를 합리화 시키려 한다. 위선이 심해지면 대담한 불경건으로 돌변하며 하나님과 신앙에게 대한 공공연한 멸시와 비난으로 발전한다. 그들이 아무 얻을 것이 없다고 비난하는 때도 실은 그들이 진심으로 신앙 행위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니 그 이유는 자기들에게 있는 셈이다.

Ⅱ. 하나님께서 왜 그들의 금식을 받지 않으셨으며 금식날에 행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는지 그 참된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올바로 금식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슥 7:5) 그들이 금식을 한 것은 사실이나 자기들의 죄만큼은 여전히 고집하였으며 니느웨 사람처럼 각자가 자기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던 것이다. 금식의 날은 자신을 수치스럽게 하는 날이었고 자신의 수치를 고백하는 날이었다. 그날의 언약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금식의 날에 오락을 찾으러" 나가서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자기들 눈에 드는 것이면 무슨짓이든지 행하였다. quicquid libet, licet ---- 즉 그들은 자기들의 기분으로 법을 삼았다. 외견상으로는 그들이 자기 마음을 괴롭히는것 같았으나 실은 여전히 자기들의 욕망을 충족시켰던 것이다.

1. 그들은 여전히 탐욕스럽고 무자비하였다.

"너희가 너희 종에게 온갖 일을 시키며 율법대로 그들을 놓아주지 아니하며 엄한 종살이를 완화시켜 주지 않는도다." 이것은 바로 포로 전에 그들이 저지르던 과오였다(렘 34:8, 9). 그들은 모든 엄숙한 금식에도 불구하고 포로 후에도 마찬가지의 잘못을 범하였다(느 5:5). "너희는 너희가 받아야할 모든 것, 너희의 빚을 억지로 받아낸다" (혹자는 그렇게 해석한다). "너희는 사면의 선포가 있는 연례 금식일에 즈음해서도 가난한 자에게 엄히하며 착취하며 가혹하게 요구한다."

2. 그들은 분쟁적이었고 원한에 차 있었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고 싸우는도다." 금식은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키기 위한 탄원의 행위였다. 그들이 금식을 선포할 때는 하나님을 격동시켜 그의 심판을 초래하는 죄가 무엇인지 찾아낸다는 구실을 덧붙였다. 아마 그들은 이세벨의 금식일에 나봇을 무고했듯이(왕상 21:12)몇몇 특정 인사들을 거줄이 고소했을 것이다. 또는 금식일에 그들 스스로 파당을 지어 분쟁하며 서로를 맹렬히 비난했을 것이다. 한쪽이 "우리의 구원이 이룩되지 않는 것은 너희들 때문이다" 라고 소리지르면 다른 한쪽도 이제 지지않고 "너희 때문이다" 라고 응수했을 것이다. 금식일에 타당한 일은 스스로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를 정죄하였다. 그들은 "금식하면서 다투었다." 그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다투었다. 경쟁은 금식일의 가장 그럴듯한 모습이고 가장 어울리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툼을 위해 금식하였다" (원의는 그렇다). 금식일에 빚어진 일은 말다툼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주먹다짐도 하였다. "너희가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가혹한 주인은 자기 종들을 때리며 엄한 채권자는 파산한 채무자를 때려서 고통 주는 자에게 넘긴다. 그러나 이들은 악한 손으로 무죄한 빈자들을 학대했다. 그들이 이처럼 금식일의 의도 자체에 상반되는 죄를 계속 행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어떤 태도를 취하시지 살펴보자.

(1)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런 의식의 이용을 허락치 않으신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듯 너희 목소리로 높이 들리게 하며 서로 소란을 피우며 언성을 높이며 열을 올리거나 아니면 남에게 과시하고 체하기 위해 신앙 행위를 한다면 내가 너희로 금식하지 못하게 하겠노라. 이들 공허하고 시끄럽고 헛된 제물을 다시는 내게 가져오지 말라" (사 1:13). 신앙의 능력에 복종하려 들지않는 자들에게 신앙 고백의 영예가 금지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2) 하나님께서는 신앙 의식을 이용하는 그들 역시 열납하려고 아니하신다.

"너희는 금식하지 말지니라. 즉 너희가 하는 금식은 금식으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며 너희 금식날에 하는 기도 소리는 하늘에 상달되지 않을 것이다." 금식 기도를 하면서 사악한 길로 계속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자신을 기만하는 데 불과하다는 점을 유의하자.

Ⅲ. 여기에는 경건한 금식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참다운 금식의 특질에 대해 명백한 교시를 하고 있다.

1. 일반적으로 금식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을 존귀케 하고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하여.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느냐? 이것이 어찌 나의 택한 금식이겠느냐?" (원의는 그렇다) 금식은 하나님이 택하신 행위가 되어야 한다. 금식일은 "여호와께 열납될 날" 이 되어야만 한다. 금식의 의무 이행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시인받는 일과 은총받는 일을 위해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지 않는다면 그것은 금식이 아니며 요령 부득의 일이 된다.

(2) 우리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하기 위하여.

금식일은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 이다. 죄에 대해 진정으로 슬픔을 표시하지 않고 죄에 대한 진정한 굴욕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금식이 아니다. 율법은 속죄일에 마음을 괴롭게 해야 한다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레 16:29). 아직 중생하지 못하고 성화(聖化)되지 못한 사람은 금식일에 자신의 심령을 참으로 괴롭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은 영혼에게 진정한 즐거움과 이익이 된다.

2. 그러므로 금식일에는 "여호와께 열납되는 것" 이 무엇이며 우리의 부패한 본성을 괴롭히고 굴욕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색하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1) 본문은 소극적으로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아니며 마음을 괴롭히는 금식이 아닌지 말해 주고 있다.

[1] 점잖은 표정과 근엄하고 우울한 태도를 지으며 시들고 상한 갈대처럼 머리를 숙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금식할 때에 의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마 6:16). 머리를 숙이는 것은 세리에게 참으로 어울렸다. 그는 마음이 낮아지고 죄에 대해 깨어져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였다(눅 18:13), 그러나 여기서와 같이 흉내에 지나지 않을 때 그것은 조소받아 마땅하다. 그것은 단지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는 것이어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으며 존중하지 않는다. 위선자가 머리를 숙이는 것은 갈대의 숙임과 같다. 마찬가지로 위선자가 희망으로 부풀어 오르는 것은 "갈대의 자람" 에 자나지 않는다. 이런것은 푸르러도 아직 벌때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 마른다(욥 8:11, 12).

[2] 죄의 몸이 전혀 무감각한데 고행을 하거나 신체를 약간 억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가 당분간은 약간 불편을 느낄지 모르나 돌아가서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를 켤 때에는 곧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암 6:4).

" 너는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 하겠느냐?" (5절) 그것은 다만 금식의 그림자요 잔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하라. "너는 어찌 이날을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고 하겠느냐?" (5절) 그에게 열납되기는 고사하고 그 위선은 그에게 가증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신앙의 과시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리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신앙의 본질 없이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을 것이다.

(2)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무엇인지를 적극적으로 듣게 된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받아드릴 금식날은 어떤 것이며 참으로 마음을 괴롭히는 것 즉 타락한 본성을 박살내고 뿌리채 뽑아버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듣게 된다.

어떤 사람은 5절을 다음과 같이도 생각한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루 동안 영혼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전 생애의 임무가 되어야만 한다.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요구되고 있다.

[1] 가혹하게 다루었던 사람들에게 정당할 것.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금식은 우리가 잘못했던 것을 취소하고 우리의 생을 개혁하는 데 있다. "그것은 흉악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이다" (6절). 우리는 그 결박에 흉악하게 묶였고, 어떤 사람들은 그 결박으로 옳은 것에서 절연되어 있으며 가혹한 대우에 예속되어 있다. 처음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당한 빛을 지불하게 하던 정의의 띠가 하나님께서 탕감해 주신 빚을 엄하게 강요할 때는 흉악의 결박으로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 흉악의 결박은 풀어져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흉악의 결박은 우리를 더욱 무서운 죄의 결박으로 몰고 갈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금식은 가난한 종의 등에 지워진 "멍에의 줄(중한 짐)을 끌러 주는 것" 이다. 그것은 그의 생을 쓰라리게 하는 압제로부터 압제당하는 자들을 자유케 하는 것이다. 빚 갚을 능력이 없는 죄수에게 부채를 탕감해 주고, 애먹이는 행동을 중지하며 종살이 기간을 초과하여 억지로 붙들어 둔 노예를 해방시켜 주어 이같은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다(6절). 부당하게 멍에를 맨 사람들을 풀어 줄 뿐만 아니라 다시는 멍에를 메지 않고 멍에 아래에 있지 않도록하기 위하여 노예의 멍에 자체를 꺾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금식관이다.

[2] 자비를 요구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

앞 절의 구체적 일들은 자비의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압제해온 자들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것은 정의이다. 그러나 우리는 딴 사람들에 의해 억압받는 자들의 구출과 속량에도 기여해야 하며 포로된 자들의 해방과 가난한 자의 부채 상환에도 이바지해야 한다. 이 구절 속에 나타난 것들은 "분명히" 자비의 행위들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인 것이다.

  • 첫째,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공급하여 주는 것이다.
  •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잠시라도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을 우선시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주권자에게 식물을 나워 주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강탈한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얻은 네 식물빵이어야만 하며 너 자신이 필요로 하는 식물이어야만 하며 네 몫의 식물이어야만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그에게 주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만 한다. "금식의 날에 너 자신과, 네 가족의 식물을 아껴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는다면 이득을 볼려는 수전노가 하는 금식에 불과하다. 그런 금식은 세상을 위한 금식이지 하나님을 위한 금식은 못된다. 굶주린 자들에게 너의 떡을 떼 주는 것이 참 금식인 것이다. 이미 떼 놓은 음식을 줄 뿐만 아니라 일부러 떼 주며, 떡 부스러기로 쫓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떡덩이를 나누어 주는 것이 참 금식이다.
  • 둘째, 숙박을 원하는 자들에게 숙박을 시켜 주는 것이다.
  • 그것은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는 것이다" (7절). 그들은 자기 거소로부터 강제로 끌려나왔다. 그들은 집과 피난처를 등졌으며 반역자처러 쫓겨났다(혹자는 그렇게 해석한다). 그러기에 이런 자들을 보호하는 데는 위험과 부담이 뒤따른다. "만약 그들이 부당하게 고난을 겪는다면, 그들의 보호를 조금도 어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의 숙소를 마련해 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숙박비도 지불해 주라.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친절 행위는 그들을 네 집으로 데려가서 네 손님으로 삼는 일이다. 나그네 대접하는 일을 잊지 말아라. 아브라함과는 달리 너는 이로써 천사들을 대접할지 모할지 모르나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의로운 자의 부활시에 갚아 주실 것이다. "내가 나그네되었을 때에 너희는 영접하였도다" (마 25:35).
  • 셋째, 옷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옷을 주는 것이다.
  • 벗은 자를 보면 입혀 주라. 이것은 일기의 피해에서 보호하는 것인 동시에 그의 이웃에게 떳떳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에게 옷을 주어 교회로 들어올 수 있게 하라. 이런 일과 다른 일에서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말아라.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협의로 해석하여 친족에게 대한 자선 행위라고 한다. "만약 네 가족과 친족이 몰락하는데도 돌아보지 아니하면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다" (딤전 5:8).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더 일반적으로 이해한다. 인간의 본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더 일반적으로 이해한다. 인간의 본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 자신의 골육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똑 같이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서 우리 자신을 숨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불쌍한 청원자가 우리를 찾을 때 그를 회피하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또한 자비와 동정의 대상이 나타날 때 딴전을 피워서도 안 된다. 그들은 우리의 살 중의 살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동정해야만 한다. 결국 그들에게 선을 행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육체와 영혼에 선을 행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고 좋은 저당을 잡히는 셈이 된다(딤전 6:19).

참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격려 (이사야 58:8-12)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귀한 약속이 나온다. 그것은 믿음으로써 누릴, 자유롭고도 즐거운 잔치의 약속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런 잔치를 자기들에게 마련해 주신 것을 알아야 한다.

Ⅰ. 의무 이행에 대한 설명이 더 나오는데 이것은 이런 약 속의 혜택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이다(9,10절).

여기서 요구하는 것은 앞에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정당하게 행동하며 자비를 사랑하며 악행을 버리고 선행을 배우라는 것이다.

1. 우리는 온갖 폭력 행위와 기만 행위를 삼가야만 한다.

"너는 너희 중에서 네 인격 속에서 네 마음 중에서 그런 것들을 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는 피해 입히는 행위를 금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려는 성향과 기질도 전부 억제해야 한다. 또는 네 백성 중에서 이런 것을 제하라. 권세자들은 스스로도 학대자가 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할 구역 내에서 억압을 방지하기 위한 모든 조처를 취하기도 해야 한다. 그들은 "멍에를 꺾버버릴 뿐만 아니라" (6절) 멍에를 제해야 한다. 그래야 억압받던 자들이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다(렘 34:10, 11). 또 그들은 "공갈을 그치고" (엡 6:9) 손가락질을 제해야 했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도 종종 있다. 이런 행동은 징계할 의사나 분노의 표시였던 것 같다. 불쌍하고 불행한 자들에게 손가락질을 하여 수치를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무례하고도 약올리는 짓거리나 심술궂은 행위는 모든 사회에서 추방되어야 마땅하다. 그들은 아첨이든 기만이든 허망한 말을 해서는 안되었다. 그들의 모든 행위는 성실성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손가락질이 뜻하는 것은 아마 위선일 것이다. 체하는 위선은 우정을 파멸시키는 원흉이다(잠 6:13 참조). 또는 이것은 반지낄 손가락을 내미는 것이리라. 반지는 권세의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불의를 말하는자 즉 불의한 판결을 내리는 자는 가락을 내민다고 할 수 있다.

2. 우리는 자비와 은혜의 모든 행위 속에서 충만해야만 한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의 궁핍에 따라 구제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1) 우리는 거저 그리고 기꺼이 주어야만 하며, 자비의 원리에서 주어야만 한다.

우리는 "주린 자에게 우리의 심정을 동해야 한다" (원의:끌어내야 한다). 돈을 끌어내고 손을 뻗칠 뿐만 아니라 아까와함이 없이 진심으로 마음으로부터 이 일을 행해야 하며 비참하게 보이는 자에게 우리의 자비심이 동하는 것처럼 인자한 애정으로 구제해야만 한다. 마음과 구제가 동행하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구제하는 자를 사랑하시며, 도움받는 가난한 자도 역시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를 먹이시고 고쳐 주신 것은 그들에게 대한 측은지심 때문이었다.

(2) 우리는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감질나지 않게 하고 만족케 하려면 풍성하게 그리고 아낌없이 주어야만 한다.

굶주린 자를 먹일 뿐만 아니라 괴로워하는 자들의 소원도 채워 주라. 만약 네게 능력이 있다면 그들을 편하게 해 주어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빈 자들에게 행할 수 있는 온갖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태어났으며 육체적 정신적 능력과 재산은 무엇을 위해 소유하는가? 게다가 가난한 자들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다.

Ⅱ. 이 의무의 수행에 수반되는 축복과 은혜가 여기서 충분히 설명되고 있다.

만약 일개인이나, 가족이나 국가가 이와 같이 선한 모든 것을 하고자 원한다면, 그들은 위로삼아야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관대한 보답자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의 자선 행위는 투자이며 그 투자는 풍족하게 보상될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큰 괴로움 후에 자비로이 돌아오셔서 그들을 놀라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오래고 어두운 밤이 지나 밝아오는 새벽 빛같이 환영을 받을 것이다.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칠 것이며(8절). 너의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할 것이다(10절). 비록 네가 오랫동안 생매장당해 있었다고 하더라도 너는 명성을 회복할 것이다. 비록 네가 오랫동안 슬픔에 압도되었다고 하더라도 너는 밝아오는 아침처럼 또 다시 즐겁게 보일 것이다. 선행을 즐거워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선한 향락 속에서 기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전 2:24). 자비를 베풀었던 사람들은 바리오움을 입을 것이다. 욥은 형통할 때 선한 일을 매우 많이 했다. 그러나 그가 몰락하자 친구들이 그를 지원했다. 이것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일이었다. 그들은 그를 물질로써 도왔다. 그래서 그의 빛은 흑암 중에서 발했던 것이다. 사랑스러운 불빛뿐만 아니라 건강도, 오랫동안 한탄했던 상처의 치유도 급속히 일어날 것이다. 너의 모든 괴로움은 시정될 것이다. 너의 젊음이 다시 새로워질 것이며 원기가 회복될 것이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자들은 자기 차례가 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을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영광을 베푸실 것이다. 선한 일들은 선한 이름으로 보상될 것이다.

이것은 흑암 중에서 발하는 빛 속에 포함되어 있다. 비록 혈통이 비천하고 가문이 미미하여 외면적으로는 명예를 얻을 만한 점이 없는 자라도 자기 위치에서 선을 행한다면 존경과 숭배를 받게 될 것이다. 그의 어두움은 이로써 낮과 같이 될 것이다. 즉 그는 아주 유명하게 될 것이며, 자기 당대에 혁혁한 자가 날 것이다. 자신을 유명하게 만드는 비결 중 가장 확실한 길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그것은 곧 선을 행하고 유익을 끼치는 데 노력하는 것이다. 모든 자 중에서 가장 크게 되고 가장 사랑을 받으려는 자는 겸손과 근면으로써 자신을 만인의 종으로 만들도록 하라. 네 의가 네 앞에서 행할 것이다(8절). 많은 사람들이 네 의로인해 너를 존중하며 너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다. "네 의가 네게 표징이 될 것이다" (창 30:33). 네 의는 비난을 침묵시킬 것이다. 아니 그것은 네 겸손으로 인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칭찬을 너에게 나타내 줄 것이다.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있으리라(시 112:9).

3.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 항상 안전할 것이다. 네 의가 네 앞에서 행할 것이다. 앞에서 너를 돌격하는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너의 의가 선도자로써 활약할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8절).

지쳐서 낙오하는 자들은 끌어모아 전진시키실 것이며 아말렉처럼 배후에서 엄습하는 적으로부터 너를 안전하게 지키실 것이다. 선한 사람들은 어느 편에서든지 아주 안전하다. 그들은 앞을 보나 뒤를 보나 간에 스스로 안전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재앙의 두려움으로부터도 안전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그들의 방어가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의 때문이다. 여호와의 영광은 그리스도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서다. 또한 그 분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대장이시다. 이는 그가 우리의 의요 우리의 주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뒤에 계신 분도 그이시다. 우리의 죄가 우리를 추적하여 막 붙잡으려 할 때 우리가 안전을 위해 의지할 수 있는 분은 그 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섭리와 은혜로 친히 네 인도자로서 네 앞에 행하실 뿐만 아니라, 뒤에서 엄호하는 보호자로서 네 뒤에서 너를 수행하실 것이며 이것은 네 의의 대가가 될 것이다. 또한 의로움에 대한 보답자 되신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될 것이다.

4.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듣기 위해서 항상 가까이 계실 것이다(9절).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는 자가 부르짖으면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실 것이다.

한편 가난한 자들에게 관대한 사람의 기도는 고넬료의 경우처럼(행 10:4) 하나님 앞에 기억되고 그의 구제가 상달될 것이다. 금식날은 기도의 날이 되어야 한다. 금식날에 네가 부르짖으면 그때 여호와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네가 어떤 고통 중에 처해 있거나 갑작스러운 놀라운 일이 있을 때는 부르짖어라. 그러면 그분은 친히 나는 여기 있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자진하여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아주 친절하신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말씀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실 때 "여기 우리가 있습니다. 주께서 종에게 이르실 것은 무엇인지요?" 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아라, 내가 여기 있다" 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다. 마치 그분이 먼 거리에 있는 것처럼 그분에게 소리친다면, 그분은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알려 주실 것이다. 그는 우리가 생각했던 곳보다 더 가까이 심지어 우리 오른편에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실 것이다. "내니 두려워 말라." 위험이 가까울 때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은 즉시 돕기 위해서 더 가까이 계신다. "내가 여기 있다" 란 말은 "네가 원하는 것을 너에게 주고, 네가 바라는 것을 해 주실 준비가 되어 있다" 는 것을 뜻한다. "너는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시 130:2). 그들이 그에게 부르짖자 마자 그는 "준비가 되어 있다" 고 응답하신다. 그들이 어디서 기도하든지 그는 "여기서 내가 듣고 있다. 나는 너희 중에 있다" 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신다(신 4:7).

5. 하나님께서는 어렵고 의심스러운 모든 경우에 지시해 주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를 항상 인도할 것이다" (11절).

여기 이 세상 광야에 있는 동안,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계속적인 지시를 필요로 한다. 언제든지 우리 멋대로 내버려둔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우리의 길을 그르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 모든 경우에 지시하기 유익한 지혜를 주시며(전 2:26) 그들의 눈이 되실 것이다(민 10:31). 그의 섭리는 그들의 길을 평탄케 해 줄실 것이며 그들의 의무와 큰 위로가 될 일을 용이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6. 하나님께서는 그들 자신의 마음속에 풍요한 만족을 주실 것이다.

세상은 방황한다는 점에서 광야와 같으므로 그들이 끊임없는 인도를 받아야만 하듯 부족하다는 점에서도 광야와 같다. 이 때문에 그들에게는 계속적인 공급이 필요하다. 이것은 마치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적으로 구름 기둥으로 인도받았을 뿐만 아니라 만나를 얻었고, 반석에서 물을 얻었던 것과 같다. 이것은 마른 곳에서도 영혼을 만족케 하는일이다. "마르고 목마른 땅에 물이 없도다" (시 63:1). 하나님께서는 선량한 사람에게 지혜와 지식 뿐만 아니라 기쁨도 주신다. 그는 양심의 법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확신으로 만족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너의 영혼을 만족하게 할 것이며, 네 마음속에 기쁨을 줄 것이며 괴로움 속에서도 너를 도울 것이다. 이것들은 너의 뼈를 견고케 할 것이다(11절). 그것들을 골수로 채울 것이다. 뼈가 몸을 지탱시키듯 너를 힘이 될 것이다. 지탱시킬 기쁨을 네게 주실 것이다. 여호와의 기뻐하심이 너의 힘이 될 것이다. 그 구절을 이렇게도 읽는다." 그분께서는 너의 뼈를 편히 쉬게 하실 것이다." 이 안식은 그들이 당하던 고통과 그들이 징계받던 병으로부터의 안식이다. 이것은 자비로운 자에게 대한 약속과 일치한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여기시어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 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실 것이다(시 41:3). "너는 물댄 동산 같을 것이다" (11절). 그러므로 은혜와 위로 속에서 번창하여 열매를 맺을 것이다. 샘물같이 샘물을 가지고 있는 동산같이, 가뭄에도 서릿발에도 그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선한 사람들에게 있는 거룩한 사랑의 원리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이 될 것이다(요 4:14). 끊임없이 시냇물을 흘러 보내면서도 항상 차있는 샘물처럼 자비로운 사람은 선행을 많이 하면서도 선이 충만하며 후히 도와 주면서도 더 가난해지지는 않는다. 물을 주는 자는 자신이 물을 받을 것이다.

7.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세인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

다산적이고 유용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실제보다 더욱 많은 치하를 받는 다는 것을 좋은 보상이 된다. 특히 그들의 자손들까지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보수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것이 약속된다. 이제 네게 속한 자 즉 네 왕들과 방백과 큰 자들은 이전에 가져보지 못했던 권세와 영향력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12절). 네게서 날 자들 곧 네 자손은 네가 네 세대에 대해 유용했던 것처럼 그 세대 사람들에게 이바지를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선한 자 뒤에 날 자손이 그가 죽고 나서도 선을 행하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세상에 대한 그의 만족은 더욱 완전해진다.

8. 그들은 오랫동안 황폐했던 도시를 다시 세울 것이다.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다" (12절). 그곳은 오랫동안 폐허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한 재건은 아주 절망상태에 있었다. 이것은 포로들이 돌아와서 유다의 도시들을 수축하고 그 도시안에 들어가 살 때 성취되었다. 이스라엘의 많은 도시들도 역시 열지파가 끌려간 이래 황폐된 채로 남아 있었다.

9. 그들은 오래 전에 시작된 그 선한 일을 계속 수행해서 끝마칠 것이며 그 일의 진행에 방해가 되었던 방해물을 제거하도록 도움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그 건물을 꼭대기까지 쌓아올릴 것이다. 그 건물의 기초는 오래 전부터 놓여 있었으며 여러 세대동안 쌓아져 있었다. 이 일은 성전 건축이 다녀간 정지되어 있다가 다시 재개되었을 때 성취되었다(스 5:2). 또는 그들은 장차 여러 세대동안 존속될 기초를 쌓아 올릴 것이다. 그들은 지속적 결과를 남길 선을 행할 것이다.

10. 그들은 그들 주위의 모든 자에게서 축복과 칭찬을 받을 것이다.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니라(12절). 그리고 그런 칭송은 네 명예가 될 것이다."

그것은 원수가 성을 포위하고 성벽을 무너뜨림으로 입은 파괴이다. 파괴된 곳을 메꾸거나 다시 수축할 수 있는 용사와 재주꾼은 누구나 칭송할 것이다. 덕이 빠져 나가고 심판이 들어오는 틈(무너진 데)을 메꾸는 자는 복이 있다. "너는 길을 수축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 길은 안전하고 조용한 길이다. 그 길은 여행하는 길일 뿐만 아니라 거하는 길이다. 그 길은 너무나 안전하고 조용하여 사람들이 쉽사리 그 길 곁에 집을 지을 것이다." 종합적으로 말해서 만약 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러한 금식을 지킨다면 그는 그들을 또 다시 평화와 번영 속에 둘 것이다. 거기에는 그들을 두렵게 만드는 어떤 것도 없을 것이다(슥 7:5, 9; 8:3-5 을 참조하라). 이것은 우리에게 공의와 자비를 행하는 사람들은 이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