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창세기 11, 마태복음 10, 에스라 10, 사도행전 10
묵상구절
59:1 <선지자가 백성의 죄악을 규탄하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59:3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59:4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
59:5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59: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
59:7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59:8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죄의 만연과 그 결과(1) (이사야 59:1-8)
선지자는 여기서 하나님과 다투어 왔던 사람들의 잘못을 바로 잡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끔 금식을 했었고 기도를 했었으나 구원은 이룰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58:3). 자 이제 다음을 살펴보자.
Ⅰ. 그것은 하나님 탓이 아니었다.
그들은 원수의 손에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하여 하나님을 비난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는 여전히 도울 능력이 있었다.
"그의 손은 짧아지지 않았다." 그의 능력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으며, 제한되지 않았으며 단축되지 않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의 한계나 효과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마음대로 능력을 행사할 수 있으시며, 전과 같이 강한 팔을 펼치실 수 있다. 교회의 구원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주목하라. 더구나 그것은 약화되지도 않았으며,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민 11:23)고 하셨다.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그는 그런 생각이 들게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시간의 길이나 적의 강함이나 기구의 약함이나 어느 것도 하나님의 능력을 짧게 할 수도 감소시킬 수도 없다. 많건 적건 간에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이시다. 하나님께는 수가 많든 적든 구원하기가 매 한가지다.
2.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대한 응답을 해 주실 준비가 여전히 되어 있으며, 기꺼이 도울려고 하고 있었다. "그 분의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함도 아니다" (1절).
비록 그에게는 듣고 응답할 기도가 많더라도 그리고 그는 오랫동안 기도를 들으셨지만 아직도 여전히 기도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정직한 자의 기도는 과거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즐거워하시는 일이다. 기도하는 중에 탄원을 했던 약속들은 여전히 긍정을 받을 것이며, 침해받을 수 없을 만큼 확실하다. 여기에는 표현된 것보다 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 분의 귀는 둔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그는 듣기를 속히 하신다. 비록 "그들이 부르기 전일지라도 그 분은 대답하고 계신다" (65:24). 만약 우리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우리가 기다리는 구원이 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느라고 피곤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기도드리는 데 피곤해서이며 우리가 응답받지 못하는 것은 그 분께 말할 때 우리의 귀가 둔하기 때문이다.
Ⅱ. 그것은 그들 자신의 탓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가로막고 자기 문에다 빗장을 질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오시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분을 못 오도록 방해했다.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렘 5:25).
1. 죄가 어떤 해를 끼치는지 살펴보자.
(1) 죄는 우리에게로 오는 하나님의 자비를 막는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 놓는 간막이 벽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본질상 무한한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는 상통하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죄가 하나님과 인간을 불화 가운데 놓았다. 그래서 당연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성을 내도록 했고 부당하게도 인간을 하나님께로부터 소외시켜 놓았다. 이와 같이 죄는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분리시켜 놓는다. "그는 너희의 하나님이시며 신앙 고백으로 너희의 것이 된다. 그러므로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는 죄에는 그만큼 악함과 해가 더 많은 셈이다. "죄는 우리들로부터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운다(2절). 이것은 커다란 노여움을 의미한다(신 31:17).
죄는 그 분으로 하여금 화가 나서 은혜스러운 신령함을 물리치게 만든다. 그는 은혜 베푸시는 것을 지연시키며 도와 줄 것을 연기하신다. 그 분은 보이거나 말을 들을까봐 얼굴을 숨기신다. 여기서 죄의 본색을 살펴보자. 피조물을 뒤로 잡아당겨 창조주께 충성하지 못하도록 하는 죄의 모습은 얼마나 죄스러운가! 여기서 죄의 결과도 살펴보자. 죄는 피해를 입히는 존재다.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분리시킨다. 죄는 또한 우리를 모든 복에서 분리시킬 뿐만 아니라, 죄는 모든 화를 향해 우리를 분리시키기도 하며(신 29:21) 그것은 바로 저주의 본체이다.
(2) 죄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을 방해한다. 죄는 하나님을 격동시켜 그로 하여금 얼굴을 숨기시게 한다.
그는 1장 15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듣지 않으실 것이다. 만약 우리가 "마음속에 죄악을 품으며 불의에 탐익하고 그것을 허용한다" 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이다" (시 66:18). 우리가 그분께 무례한 것을 하는 한 그 분이 우리에게 대면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2. 이제 선지자는(자기에게 맡겨진 책임대로 그들로부터 얼굴을 숨기시고 그들과 논쟁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들의 죄악이 얼마나 많고 컸는가를 개략적으로 설명한다(58:1).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허물을 보여 주라." 죄는 그들을 치려고 작성된 검은 고발장이다. 그 고발장은 많은 항목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항목들 중 어느 하나라도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들 사이를 갈라놓는데 충분치 못한 것은 없다. 이제 이러한 탄핵 조항들을 적절한 항목으로 나누도록 해 보자.
(1) 우리는 먼저 그들의 생각을 가지고 시작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모든 죄악은 생각에서 시작되며 거기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다" (7절).
그들의 상상도 그렇다. 그들은 계속해서 악한 것을 상상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이런 저런 악과 해를 안출한다. 그들의 계획과 의도는 그렇다. 어떻게 하면 비열한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하고 골몰한다. "그들은 공상과, 목적과 계획과 결심 속에서 잔해를 잉태한다" (태아가 형태와 생명을 갖추듯이). 그리고 나서 그들은 죄악을 생산한다. 시기가 무르익으면 그 악한생각을 실천에 옮긴다. 섭리의 반대와 양심의 제지를 무릅쓰고 죄악을 생한다는 것은 아마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악한 목적을 달성하면 마치 사내 아이가 나기라도 한 것처럼 자만감과 기쁨을 가진다. 그러므로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으니라" (약 1:15). 이것은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는 것이라고 표현되고 있다(5절). 이것은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는 것이라고 표현되고 있다(5절). 사악한 자들이 어떤 생각과 계획을 품으며 어 일에 머리를 쓰는지 살펴보자.
[1] 그것은 고작 미련하고 경박한 것에 대한 생각이다.
그들의 생각은 거미줄을 치는 것과 같이 헛된 생각이다. 이 가련한 곤충은 아주 많은 수고를 한다. 그러나 갖은 애를 다 써서 줄을 다 쳐 놓아도 그 줄은 보잘 것 없고 약한 것이며, 그 장소만 더럽히는 수치거리며 순식간에 청소되고 말 허무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상상을 즐기며 공중 누각을 짓고, 공상으로 즐거워하는 것도 바로 거미줄을 짜는 것과 같다. 거미는 그 손으로 매우 빨리 잡을 수 있다. 그러나 거미는 자기를 지키지 못한다.
[2] 그 생각은 악의와 원한에 차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독사나 살무사의 알을 깐다. 독사는 맹독이 있으며 독액을 머금은 알을 낳는다. 악행에 기쁨을 느끼는 사악한 자들의 생각도 이와 같다. 그 알을 먹는 자(즉 악인과 거래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즉 이모저모로 어떤 화를 당할 위험에 빠질 것이다). 그 알을 먹기 위하여 깨뜨리거나 어떤 유용한 새가 부화될 것이라고 기대하여 깨뜨리면 독사가 나올 것이다. 그 알을 만지고 있다는 것은 목숨을 건 행위이다. 그들의 전 사업은 학대와 괴로움을 입히는 일의 연속 과정이다.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다" (6절). 머리에 있는 폭력의 기술과 마음속에 있는 폭력의 사상에 따라 그들의 손에서 폭력이 행사되는 것이다.
(4) 이런 억울한 일을 시정하고 이런 학대를 개혁할 조처가 전혀 취해지지 않고 있다. "어떤 사람도 공의를 부르는 자가 없다" (4절).
정의의 신성한 법을 위반해도 불평하는 자가 없으며 부당하게 고통받는 자를 바로 잡아 주려고 노력하는 이도 없다. 또한 악과 신성 모독, 그리고 수치스런 외설 행위를 금하여 법을 실시하려고 하는 이도 없다. 국가 의 해독이 될 위험이 있는 것은 법대로 처리해야 하는 법이다. 공의가 행하지 않을 때 공의를 행해야 할 위정자도 비난을 받지만 공의를 따라 소송을 제기해야 하는 백성들도 비난을 받는다. 사사로운 사람들은 숨은 악을 찾아냄으로써 공공의 선에 이바지해야 하며 권세자들에게 악을 처벌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공공의 선에 기여해야만 한다. 그러나 방백들이 악하게 다스리고 백성들이 그런 악한 현실을 용납하는 나라는 불행하다. 진리는 배척을 받는다. 진리를 위해 변호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 옳은 일을 옹호하고 사악한 일을 반대하기 위해 나설 만큼 용기와 양심을 지닌 이도 없다. 악이 판을 치고 형통하는 사회에서는 사기 행위와 그릇된 행의에 대항하는 것이 모험이기 때문이다. "평강의 길" 은 진리의 길 만큼이나 존중받지 못한다. 그들은 "그 길을 알지 못한다." 즉 그들은 어떻게 하면 평화를 이룩할 수 있을지 연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평화가 깨지는 것을 방지하거나 처벌할 생각이 전혀 없다. 이웃간의 의견 차이를 조정하기 위한 어떤 배려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조용하고 평화롭게 보이는 것과는 완전히 담을 쌓은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거세게 몰아치고 소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들을 사랑한다.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도다." 그들의 행위에는 정의감이 전혀 없다. 공정은 그들이 전혀 중요시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정의가 악하고 탐욕스러운 계획에 방해가 될 때는 언제든지 공의의 모든 담을 쉽사리 허물어 버린다.
(5) 이 모든 그들의 행동은 매우 어리석다. 그들의 행위는 이 성과 공평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에도 위배된다.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은 "허망한 것을 신뢰한다" (4절). 그것들은 틀림없이 그들을 속일 것이다. 그들이 아주 교묘하게 그리고 부지런히 짜놓은 거미집은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다" (6절). 그들이 짠 것은 몸을 보호하는 것도 장식하는 것도 되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악한 계획으로 남을 해칠 수는 있을지 모르나 자기 자신에게는 어떤 유익이나 혜택도 얻지 못한다. 죄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익은 아무 것도 없다. 손해와 이익을 계산하게 될 때 이것은 분명히 나타났던 것이다. 죄의 길은 "구부러진 길" 이다(8절). 그 길은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것이며 그들을 여행의 종착지까지 인도해 주지 못할 것이다. 그 길로 계속 가도 평강을 얻는다고 말하지만 그리로 가는 자는 누구든지 자신을 기만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다음에 나타나듯이 그들은 평화를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