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유가 무엇인가
- 스페셜 포인트를 꼭 읽는게 중요하다. 배경을 알아두는게 좋다.
7가지 비유들은 천국에 관해 깨닫게 된 제자들에게 복음에 관한 내용을 주지시키는 가르침이다. 오늘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이다.
이 비유에 대한 교리적 원리
율법의 기능이 올바로 작동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 찾을 수 있을까? 칼빈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우리가 칼빈주의라고 말하면서 칼빈의 가르침을 왜 안따라가는가? 그는 신학은 신앙이라고 했다. 그런데 신학이 신앙이 되지 않는 사람은 칼빈주의가 아니다.
율법의 기능이 한번 죄인이 됐다고(겸비해졌다고) 없어지는게 아니라, 성화가운데서도 계속 부패가 일어나기 때문에 내 안에서 율법의 기능을 통해 자기 부인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청교도가 가르치고 있는 바탕, 단계가 있는데 단계를 뛰어넘어서 (=죄인됨을 참되게 깨닫지 못하고, 그것없이 곧바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을까?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
만약, 죄인됨을 깨닫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그냥 이성적인 원리, 종교심일 뿐이다.
말씀이 실질적으로 나에게 정죄를 하고, 죄인됨을 깨닫고 있는가?
이 경험을 말해보자.
은혜로 인한 경험도, 죄로 인한 경험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면 어떻게 내가 성경을 통해서 나라는 존재와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아는가? 여기서 그 비유가 너무나 적절하게 나타나고 있다.
19절을 읽어보자.
이 내용이 내면의 원리를 말하는가, 외면의 원리를 말하는가?
학문은 실질적으로 배운대로 사느냐, 안사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머리로 이해를 하고 습득을 했는지 안했는지만 중요하지, 그대로 살고있느냐 아느냐를 따지지 않는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것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사람은 각자마다 다 자신의 기준, 본성적인 틀이 있다.
그 중심적 틀이 때에 따라 가지를 친다고 본다.
예를 들어, 돈에 관심이 없고, 인형에 관심이 있으면 그 사람은 돈은 막 줄 것이다. 그런데 인형에 탐심이 있으면 인형은 안 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가방에, 신발에 다 다르다.
탐심이 중심되고, 가지는 탐심으로 부터 나온 틀이 된다.
이거는 줄 수 있지만, 저건 절대 안된다라는 틀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틀이 꺾여진 사람이 중생한 사람이다.
중생의 원리 안에서는 그 틀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며, 절대로 자기 기준을 내세우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해 어떻다는 것을 배웠지만, 실질적으로 그 하나님이 경험되지 않으면 나랑 하나님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몰랐는가?
그들의 열정은 바울도 인정할만큼 엄청났다.
바울은 그 열정이 뭔지 알았다. 자기의를 엄청 내세웠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리새인과 똑같아질 수 있다.
이성적으로만 주님을 외치지만, 외치는 것도 자기 기준에서 외치다보니까 외치는 것도 자기의가 된다. 이게 어떻게 보면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길가에 뿌려진 씨를 보자.
깨닫는다는 단어는 실질적으로 경험이 되어진다는 말이다.
지식, 지혜는 같은 말이 아니다.
기독교 강요에서는 지식은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우리에게는 믿음이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깨달아지는 것. 그게 믿음으로 나타나는 것. 그게 효과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지혜이다.
아는 것을 응용하고 효과적으로 내 삶에 나타낼 때 지식이 지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배워서 내 삶에 실질적으로 나타내려면 흉내낸다고 될까?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혜가 잠언서에는 예수님을 의미하고 있다.
영적인 것들은
말씀을 전하는데, 깨닫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하니까, 재미가 없다. 집중도 못한다. 흥미를 잃는다. 배울려고 하는 노력도 없어진다.
길가에 뿌려진 사람들이 아주 심각한 것이 뭐냐면, (종교심만으로 들으면) 듣긴 듣는데 관심이 생기질 않는다. 무엇때문에 뭔가 마음에 흥미와 관심이 일으켜지고, 뭔가 알고 싶은 마음이 들면 하나님이 무엇인가 삶에 역사해주신 것이다.
목사가 전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질 수 있는 마음인가를 보는 것이다.
영적 상태, 들을 수 있는 마음인가를 보는 것이다.
심겨지는 마음은 호감이 가고, 들으려고 하고, 알려고 한다.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누가 듣든 말든 그냥 앉아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경하신다고 했다.
청교도는 기경을 율법으로 보고, 죄를 깨닫게 하고 심각하게 죄됨을 알게 한다고 본다.
칼빈은 맹신하지 말라고 하고, 관념 또는 신념도 아니라고 가르쳤다. 맹신은 배움이 없는 원리이고, 신념 또한 마찬가지 원리이다.
20절에 돌밭에 뿌려진 씨앗을 보자.
이런 자의 문제가 뭔가?
그 속에 뿌리가 없었다. 돌밭이니까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여야 되고, 그리스도를 통해 새싹이 올라와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행동으로 취하지 않는다. 기뻐하고 안다고 얘기하지만 신앙을 훈련할 때 의로움으로, 선으로 나타내야 더 참된 신앙의 원리로 뿌리를 내리는데, 신앙의 원리안에서 의와 선한 행동이 없고, 기쁘다고 하고 안다고 얘기하지만 아는 것과 의지가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이 제일 힘들다.
진짜인 것 같고, 막 기뻐하고 신앙인 것 같다.
금방 싹이 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한다.
이들은 실질적으로는 어떠한 행동이 없다.
그러니까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내면은 연결고리가 있다.
하나님을 알 때 우리 자신을 알게 되어있고, 우리의 비참함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다는 원리이다. 하나님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비참할 때 울부짖게 되는데 이게 은혜이다.
은혜는 항상 내 자신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하게 된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더 자신의 비참을 알게 되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두려움이 생기고, 두려움을 통해 간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