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신8, 시91, 사36, 계6
묵상구절
15:1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15:2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15:3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준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
15: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15:5
15: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15: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15: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15:9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15: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 본문은 선민이 지켜야 할 각종 율법들의 세부 조항을 제시하고 있는 모세의 고별 설교 제 2부 후반부 (12-26장) 가운데 주로 신앙 생활 관련 규례를 주고 있는 12:1-16:17의 연속 부분입니다. 이러한 본문에서 는 제 2 십일조 관련 규례를 주고 있는 지난 단락 (14:22-29) 에 이어 안식년과 관련된 채무 면제 규례를 주고 있습니다. 즉 매년 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에는 형제가 진 빚을 면제해 주고, 안식년이 가까웠다고 하여 꾸어 주는 일에 인색하지 말고 구제하는 일에 힘 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외 안식년 채무 면제 규례는 안식년이 돌아오면 모든 채무를 완전히 탕감해 주라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본문이 그러 한 규례라면 인간의 완악한 본성상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돈을 빌려 주는 일이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본문의 채무 면제 규례는 다만 안식년에는 채무자에게 빚 독촉하는 일을 금하여 안식년에 만큼은 그도 안식을 누리게 해 주라는 것업니다. 특히 이는 안식년의 휴경 제도(레15:2-7)와 관련이 있습니다. 안식년에는 누구도 땅을 경작할 수 없었는 바 당연히 소출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빚을 득촉한다면 채무자는 큰 심적 고통을 당하여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빚을 갚기 위해 안식년 에도 경작함으로써 안식년 휴경 제도가 무너질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안식년에는 채무 금하는 규례를 주어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본문은 하나님의 모든 율례가 근본적으로 인간을 향한 자비와 사랑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증거헤 주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의무(신명기 15:1-11)
Ⅰ. 가난한 자의 빚을 면제해 주는 율법이다.
그 대상은(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지불 불능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매 7년은 면제년이다.
이 때에는 땅은 경작하지 아니하고, 종들은 그 종살이에서 해방된다. 그러한 여러 가지 은혜의 행위들 중에는 돈을 빌린 자들이 그것을 지불할 수 없게 되었을 때에는 이 면제년이 되면 빚을 면제해 주는 일이 들어 있다.
👀 안식년에 땅을 경작하지 말고 쉬라는 규정은 출 23:10,11과 레 25:1-7에 나와 있으나, 빚을 면제해 주라는 규정은 신명기에만 나온다. 이러한 채무 면제 규례가 빚을 완전히 청산해 주는 것을 의미하는지 혹은 안식년의 기간 중에만 채무 이행을 중단케 해 주는 것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는 논쟁이 있으나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안식년 기간 동안에만 채무 이행을 촉구하지 말라는 명령을 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 안식년의 취지와 조화되기 때문이다. 즉 안식년에도 채권자가 빚 독촉을 계속하면 채무자는 안식년에도 편히 쉬지 못하고 돈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게 되거나 근심과 걱정 속에 살아가게 될 것이며, 그것은 진정한 안식이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안식년 기간 동안 채무를 동결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년의 기쁨을 실생활 가운데서 누리게 하셨으며, 동시에 안식년이 끝나게 되면 다시 힘써 일하며 채무를 정리하도록 조치하심으로 경제 정의를 세우신 것이다.
만일 꾸어갔던 자에게 능력이 생기면 그 후에 양심적으로 그것을 갚아야 하겠지만 그 후에도 채권자가 법으로 그것을 배상케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많은 훌륭한 주석가들은 이것은 면제년에 빚을 독촉하는 일을 금지만 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해에는 수확이 없어 빚을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에는 그 빚을 요구할 수 있고 배상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면제란 빚을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고 다만 어느 기간 동안 중단해 둘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이 빚의 면제는 영원한 것이라고 본다. 아마 이것이 더 맞는 견해인 것 같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분명한 제한이 있었다. 그것은 채무자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3절; 외국인은 이 율법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과 그가 가난해야 된다는 것(4절), 그리고 장사를 위해 빌려간 것이 아니라 자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빌려간 경우이며, 그것을 지불하게 되면 파국적인 빈곤에 떨어지고, 결국 다른 나라로 도피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하나님을 반역할 시험에 빠지는 그런 경우에 국한된다. 이 율법은 채무자나 그의 친구가 빚을 갚을 수 있는데도 채권자가 빚을 받지 말아야 하는 법은 아니다.
👀 이방인에게는 독촉할 것
: 안식년의 규례는 이스라엘 내에서의 가난을 덜어 주고 언약 공동체 내의 일원들 사이에 형제에 대한 자비를 베풀며 안식의 진정한 의미를 살려 지키라는 취지에서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공동체를 벗어난 곳에서는 적용될 수 없었다. 더구나 이스라엘 공동체 밖에 있는 이방인들은 안식년에도 쉬지 않고 일했기 때문에 안식년 부채 상환 면제 규례와는 무관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방인들에게는 안식년에도 빚의 면제를 요구할 수 있었다. 이 말씀은 인정사정 없는 모습을 보이라는 뜻이 아니라 외국인에 대해서는 안식년이라 할지라도 채권자의 정당한 권리를 포기하지 말라는 뜻이다.
👀 내 형제에게 꾸인 것은 면제할 것
: 이는 외국인과 분명한 대조를 보이는 명령이다. 안식년 부채 상환 면제 규정이 언약의 공동체에 속한 자들 사이에서 는 철저하게 지켜져야 한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구성원들 이 서로를 형제로 여긴다는 것은 세속적인 이해 관계를 뛰어넘는 피를 나눈 형제와 같은 돈독한 유대 관계가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 율법의 존재 이유는
1. 안식년에다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이다.
"이 해는 여호와의 면제년이라 칭함이니라" (2절).
매주의 안식일이 그들 자신들과 그들 종들과 가축을 위한 하나님의 날인 것과 같이 이것은 그들의 땅을 위한 하나님의 해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땅을 휴경케 함과 또 그들의 빚을 면제케 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들에게 당신의 섭리에 의지하라는 것을 가르치셨다. 이 면제년은 복음의 은혜를 상징한다. 즉 복음의 은혜 안에는 주님께 우리가 영접되는 해가 선포되어 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 빚의 면제, 즉 우리 죄의 용서를 받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또 받기를 바라게 된다. 한편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해 주라는 교훈도 배우게 된다.
👀 독촉을 하지 말아야 한다
- 본문에서 독촉을 하지 말라는 단어의 의미는 애굽의 고달왔던 시절을 기억게 하기 위한 의도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본문에는 과거 애굽의 그 잔혹한 자들의 모습과 같이 궁핍한 자에게서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언약의 상호 반응,
- 채주의 관점에서는 자기의 권리 포기를 선포해야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여호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신앙인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채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빚에 대한 보상을 해 줄 것을 믿고 여호와를 바라보며 자기의 권리 포기를 선포하는 것이다.
- 현실 속에서 직접적으로 상대하는 자는 형제들이지만 그 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와 세우신 언약 때문이다.
- 이스라엘 사람 중 누구든지 극도의 궁핍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서이다. 4절의 난 외에 보면(흠정역 : 한글 개역과는 다름), "너희 중 가난한 자가 없게 하기 위하여" 라고 읽었다. 아무도 비참하고 수치스러울 정도로 가난하여 그들의 민족과 신앙에 치욕을 돌리는 일이 없도록, 저들의 명예를 잘 보존해야 되었던 것이다.
- 여기에는 또한 만일 그들이 무엇이든지 그들의 가난한 채무자들 때문에 손해 본 것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들의 재물과 사업에 축복을 내리사 그것을 보충해 주신다는 약속이 보장되어 있다(4-6절).
👀 여호와 말씀만 듣고 지켜 행하면
- 이 순종은 맹목적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힘써 지켜 가려는 목적을 가지고 순종하는 것이다.
- 말씀에 지속적으로 행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이 따라야 한다.
- 이로 보건대 도덕주의자들이 하는 것처럼 단순히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행하기 위하여 말씀을 지켜 가려 한다든지 혹은 율법주의자들이 하는 것처럼 규정 자체에 자구적 의미를 부여하여 말씀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정작 말씀을 주신 구체적인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든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조건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들의 의무에 대해서 배려해 주라. 그리하면, 하나님은 그들이 빚을 관대히 면제해 준 것으로 손해를 보지 않도록 축복을 내리사 그해 마지막에 가서 그들의 재물이 넉넉케 하실 것이다. "너희가 여호와께 복을 받게 될 뿐 아니라" (4절). 그가 "너희에게 복을 주신다" (6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풍성히 주셔서 우리가 넉넉할 뿐만 아니라 남은 것이 있는데, 우리가 우리의 가난한 형제들이 요구에 완고하고 혹독하다면 그것이야말로 전혀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풍성함이, 두 극단 사이에 있는 그러한 불평등을 없게 하기 위하여(고후 8:14) 적어도 그들의 궁핍을 채워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땅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선물이요 그 모든 소산은 그 땅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결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에게 명령하시고 지시하시는 그대로 그들의 재산을 사용하고 처분하여 그분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 채주로 대변되는 우리 성도는 현실과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 현실 가운데서는 어쩔 수 없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자를 바라보며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하며,
- 미래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확실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바라보며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 두 눈을 동시에 가질 때에만 안식년의 채무 면제 규례를 지키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요 믿음의 표현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현실적이어서만도 안되고 영적이어서만도 안되며 하나님의 약속을 현실에 접목시키는 실제적인 삶이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일 그들이 그들의 가난한 형제들에게 빌려준 작은 금액을 면제한다면, 그들의 부유한 이웃들 곧 "여러 민족들에게 까지" (6절), 큰 액수의 금액을 빌려줄 수 있게 되고, 그들의 이윤만으로도 부유하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빚진 자가 채주의 종이 되는" 것과 같이(잠 22:7), 여러 민족들이 그들에게 복종할 것이요 그들을 의존하게 될 것이다. 꾸어줄지언정 꾸지 아니하는 것을 우리는 큰 자비로 생각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그 저울대를 바꾸시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물로 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까닭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6절, 원어 성경은 분명하게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의 말씀에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약속이 분명하게 새겨 있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7:13; 출 23:25).
뿐만 아니라 본문의 약속이 상황에 따라 일시적으로 주시는 그러한 약속이 아니라 한번 말씀하신 바를 영원히 지키시고 성취하는 확고한 약속임을 알려 주고 있다.
하나님이 행하심은 결코 상황에 따라 변화되는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태초 전에 목적하신 바를 말씀으로 드러내시고 그 말씀의 계시에 따라 정확하고 확실하게 이행하시는 불변적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도 어떤 때는 임하다가 어떤 때는 철회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영원히 동행하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는 자는 가변적인 세상의 것에 마옴을 둘 것이 아니라 오직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소망을 두어야 할 것이다
Ⅱ. 가난한 채무자들이 앞에 나온 율법으로 인하여 피해를 입지 않도록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라는 율법이 또한 나타나 있다. 사람들은 채무자에 대하여 이렇게 된다면, 즉 면제년 전에 채무가 지불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잃고 말텐데 그럴 바에야 차라리 꾸어주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말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너희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라는 것이 본문의 율법이 지정하고 있는 한 뜻이다.
- 그들 중에는 돈을 빌리고 꾸어가야 할 처지에 있는 가난한 자들이 있을 것이 가정되어 있다(7절). 그러므로 자비를 받아야 할 자들은 이 지상에서 결코 중단되지 아니할 것이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리라" (11절). 비록 극단적인 빈곤에 떨어지는 그런 사람은 없다 할지라도, 지불 기일이 늦어지고 돈을 꾸어야 할 형편에 놓이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며, 이러한 사람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자비를 베풀 마음을 가지면 자비를 베풀 기회는 언제나 나타나는 것이다.
- 이러한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능력과 그 경우에 따라서 꾸어주든지 그냥 주든지 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너는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라" (7절).
손을 움켜쥔다면 그것은 강퍅한 마음의 표이다.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전 11:3). 동정의 주발은 풍성한 보답을 낳을 것이다(약 2:15, 16).
👀 강퍅히 하다 = 완고하다.
- 이 동사의 강의형은 헤스본 왕 시혼의 경우처럼(신2:30) 자기 것을 남에게 열어 놓지 않고 베풀지 않는 완악함을 표현할 때도 쓰였다. 이러한 동일한 의미의 동사를 여기서 사용한 것은 그들이 최근에 목격한 이방인의 완악함같이 결코 형제에게 그러한 마음을 보이지 말 것을 분명하고도 강하게 명령하기 위한 것이었다.
- 7절, 본문의 명령의 배후에는 ‘네가 만일 마음을 계속 완악하게 하면 내가 너의 마음을 오히려 완악하게 하여 심판을 당하게 할 것이다' 라는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다.
- 요일3:17 “누가 이 세상 제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 마음을 강퍅히 하고 손을 움켜쥐는 태도는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마음이 열리면 손 또한 열리게 되는 것이다.
- 약2:15-17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너희는 "너희 손을 활짝 펴서 넉넉히 꾸어주라" (8절).
👀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은 마음을 여는 것과 관련 있다. ‘손을 여는 것'은 내면적으로는 마음이 열리는 결과로서 손이 열리는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때로는 그냥 주는 것 못지 않게 사려 분별있는 꾸어줌이 또한 더 자비가 된다. 그것은 꾸이는 자에게 근면과 정직을 행케하여 그로 하여금 스스로 자립하는 길로 들어서게 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어떤 자비를 베풀 대상이 나타날 때 우리는 무언가 주어야 할까 아무것도 주지 말까, 혹은 적게 줄까 많이 줄까를 선택해도 좋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한 명령이 나타나 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노니" 줄 뿐 아니라 "너희 손을 활짝 펴서 넉넉히 주라" (11절).
👀 빌려 주는 것이 단지 의무감에서 출발되어서는 안 된다. 형제가 만족할 만큼 충분히 빌려 주어야 한다. 본문의 명령은 부족함을 지닌 자가 먼저 와서 무언가 요구할 때 그 필요를 채워 주는 것만이 아니라, 가진 자가 먼저 부족한 자의 형편을 헤아려서 그 부족한 부분을 충분히 채워주는 것까지 의미한다. 즉 가난한 자를 돕는 자는 항상 적극적인 자세로 그 형제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율법의 실천은 결코 주변 상황이 요구하는 것에 제한되어 소극적으로 부응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며 능동적으로 상황을 살펴 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 선을 행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 여기에는 채무를 면제해 주라는 전술한 율법을 생각하고 자비로운 대부(代負)를 해주지 않으려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는 경고가 주어져 있다.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9절).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그러므로 꾸어주면 떼일 것이 분명하니 꾸어줄 수 없다고 하지 말라." 그래서 너희가 꾸어주기를 거절한 가난한 형제가 하나님께 호소하여 그것이 너희에게 죄가 되고 큰 죄가 되지 않게 하라.
(1)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이 율법은 영적인 것이요, 마음에 품는 생각에 대한 제한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은 우리 마음 속의 생각은 모르고 계시며 감시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 9절 본문은 ‘너는 스스로 너를 향해 경계하고 세심히 살피라"로 번역할 수 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경계하고 세심히 살피라는 것은 모든 악은 외부적인 요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 안에 있는 죄성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2) 하니님의 선한 율법으로부터 악한 생각을 끌어 낸다는 것은 정말 사악한 마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용서의 자비를 베푸셨는데, 그들은 남에게 주는 자비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3) 우리가 그 일을 함에 있어서 우리의 의무에서 떠나게 하거나 우리의 용기를 잃게 하는 모든 은밀한 암시들에 대항하여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죄의 행위에서 떠나고자 하는 자들은 바로 그 죄의 생각을 마음에 품는 데서 떠나야 하는 것이다.
👀 우리 성도들은 모든 행동의 근원지인 마음이 사단에게 삼키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하며, 그 마옴 중심이 하나님께로만 향하여 항상 하나님 뜻 안에 거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4) 우리에게 꾸어주는 자비를 베풀 기회를 가지게 될 때, 우리가 채무자를 신용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꾸어주라. 그리고 이 세상에서 다시 받으리라 바라지 말고 오직 바로 그 부활의 때에 그것이 보상되리라고 생각하라(눅 6:35; 44:14).
(5) 우리를 거스려 고발하는 가난한 자의 소리는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귀를 저들의 소리에 귀울이실 것이고 그들에게 동정하시어 그들에게 가혹하게 대한 자들을 분명히 헤아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6)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지혜롭다고 생각한 일이 결국 죄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면제년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꾸어주기를 거절한 사람은 자기가 현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들을 가리켜 "스스로 좋게 한 자라고 칭찬할것이다." (시 49:18). 그러나 여기서는 그는 사악하게 행한 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자기의 형제에게 몹쓸 일을 행한 자로 정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진실에 따라 집행" 될 것임을 우리는 확신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악이 되는 일이라고 선포하신 일은, 우리가 만일 그것을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파멸을 줄 것이다.
Ⅲ. 여기에는 우리가 남에게 자비를 베풀 때는 무엇이든지 즐겁게 주라는 명령이 나타나 있다.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라" (10절).
선한 일에 돈쓰는 일을 억지로 하거나 그것을 잃는다고 생각지 말라. 네 형제에게 친절을 베푸는 데에 인색하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를 불신하지 말라. 그와 반대로 너는 네 소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영화스럽게 하며 선한 일을 행하며, 네 형제를 편안케 하며, 다가올 때를 위해 네 자신의 안녕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에 즐거움과 만족을 가지고 행하라.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 9:7).
👀 본문이 명령하는 바는 단순히 동정어린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보다 위에 있는 입장에서 가난한 사람의 형편을 생각하여 긍휼을 베풀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당연히 주어야 할 것을 줌으로써 절대적인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라는 의미이다. 사람이 지닌 소유는 궁극적으로 모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절대적인 권위와 소유권을 가지고 그 소유권이 대리자일 뿐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의 소유를 나눠 주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이다. 이로 보건대 가난한 자가 부유하고 넉넉한 형제로부터 도움을 얻을 때에 궁극적으로 감사할 수 있는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남에게 구제하는 자는 결코 어떤 생색을 내거나 손해를 본다는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이기심
-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 = ‘네가 지닌 사단의 마음'에 굴복한 마음의 결과를 갖지 말 것을 경고하신 것.
- 본문은 단순히 주기 싫어서 아끼는 마음보다 훨씬 더 근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기심의 근원은 인간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악이며, 이러한 악으로 말미암는 이기심이야말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 따라서 성도는 경각심을 가지고 사소하게 여겨지는 이기심일지라도 마음 속으로부터 완전히 몰아내도록 노력해야겠다.
Ⅳ. 여기에는 이 생에서의 보상도 약속되어 있다.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은 너희에게 축복하실 것이다."
탐욕의 사람들은 "주는 것은 헌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니다. 기쁘게 구제하는 것은 우리를 부하게하고 "창고를 가득차게 "할 것이다(잠 3:10). 그리고 그 영혼에게는 참된 위로를 충만케 할 것이다(사 58:10, 11).
👀 이 축복은 원어 성경의 의미를 따르면, 물질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축복의 대상인 그 인격체 자신에게 내리는 것이다.
인격체 자체가 하나님께 복을 받아야 하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하는 사건 하나 ⇒ 창32:26에 언급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는 장면.
- 그곳에서도 한글 개역 성경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했지만 원어 성경을 보면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 이다. 야곱은 이미 물질의 축복을 누렸지만 그것이 진정한 축복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고, 그제야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이 측복을 받아야 된다는 사실에 절박해진 것이다. 그 결과 당시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으나(창 32:29) 어떤 물질적인 결과가 잇따르지는 않았다. 그 대신 야곱은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지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창 32:30) 오히려 그의 다리를 절게 되는 악화된 상황을 맞지만 자기 육신에 하나님의 손길의 흔적을 가지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창 32:31).
하나님의 진정한 측복
- 단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나 우리들의 하는 일에만 제한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일을 행하는 주체가 되는 우리 자신에게 임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축복을 가늠할 수 있는 증거는 우리의 일이나 조건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물론 우리의 힘이 미치는 모든 영역에 관심을 가지시지만 그것보다 그 영역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축복하셔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을 하나님의 측복을 받은 자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심으로써 어떤 상황에서도 물질적인 것에만 연연하지 않으며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매일 아침마다 정리해주는 찬미자매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