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 성경읽기
사사기 6, 사도행전 10, 예레미야 19, 마가복음 5
묵상구절
5: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 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5:14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5:1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매튜 헨리 / 옥스퍼드
👀 본문은 가나안 입성을 이룬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가나안 정복 전쟁을 수행하기에 앞서 그 최종 준비 단계로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정립을 위한 의식을 거행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는 5:2-15의 마지막 단락입니다.
여기서는 길같에서의 유월절 준수 사실을 보도한 지난 단락(10-12절)에 이어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출현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것은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골고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즉 이제 막 가나안 정복 전쟁을 시작할 시점이었습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가나안 정복 전쟁 개시 시점에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것은 이제 전개될 가나안 정복 전쟁이 단순히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민족간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과 함께하여 싸워 주시는 성전임을 시사해 줍니다. 이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라고 한 사실로 확인됩니다. 이는 40년 전 모세가 출애굽 지도자로 소명받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같은 것으로(출3:5)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하심을 나타내 줍니다.
한편 오늘날 영적 싸움을 싸우는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군대 장관으로 사단의 권세를 이미 꺾어 주심으로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인내로 이 싸움을 끝까지 수행하기만 하면 승리의 면류관을 얻고 하늘 가나안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 여호와의 군대 장관 (여호수아 5:13-15)
우리는 이 때까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종종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보아왔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이 그에게 나타났다는 것은 읽은 적이 없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 부닥치는 역경이 커지자, 거기에 비례하여 그에게 주어지는 격려도 커진다.
Ⅰ. 여호수아가 환상을 보는 은혜를 받은 때.
그것은 여호수아가 할례와 유월절을 아주 엄숙하게 지킨 바로 직후였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그에게 알려 주셨다. 우리들도 우리의 의무를 다하고 그의 거룩하신 규례들을 근면하고 성실하게 지켜 나아가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여호수아가 이 환상을 본 장소.
그곳은 "여리고 곁" 이었다. 그러나 말하자면 그것은 "여리고에서" 였다. 아직까지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믿음과 소망으로 혹은 생각과 기대에서 볼 때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었다. 아마도 이 일은 여리고 도성 바로 가까운 여리고 들판이었다고 본다.
이 사건에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하여 아주 단독적으로 위험에 대한 공포도 없이 나섰던 것이 틀림없다. 혹자는 여호수아가 거기서 명상과 기도 중에 있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이따금 자기 자신을 나타내신다. 혹은 여호수아는 거기서 여리고 도성을 살펴보며, 그 도시의 성채와 어떻게 이 도시를 공격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오셔서 지시하실 때 어떻게 접견할 것인지 속으로 당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주신다. Vigilantibus non dormientibus succrritlex-법은 잠자는 자가 아니라 깨어 있는 자를 도와준다.
Ⅲ. 그 환상의 내용.
여호수아도 사려 있고 사색적인 사람들이 늘 하는 것처럼, 눈을 아래로 주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가까운 거리에서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아주 놀랬을 것이며 그래서 눈을 치켜 뜨게 되었고 그의 명상에 전환이 왔다(13절). 그는 여호수아에게 사람으로서 나타났다. 그러나 위풍당당한 인물로, 일단 주의를 기울이기에 알맞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났다.
1. 우리는 그가 영원하신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과거에도 인간의 본성을 입으시고 이따금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었다. 여호수아는 그에게 신적 존귀를 돌렸고, 그는 또한 그것을 수락했다. 피조된 천사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여호와로 불리워진다(6:2).
2. 그는 여기서 "손에 칼을 뽑아든" 군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장막에 있었던 아브라함에게는 여행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고, 전장에 있는 여호수아에게는 무사로 나타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에게 그들의 신앙이 기대하고 갈망하는 바가 되어 주신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칼을 뽑아드셨다.
(1) 그것은 여호수아가 참여하고 있는 전쟁을 인정해 주며 그 전쟁이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살육의 임무를 맡기셨음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다.
주권자가 칼을 뽑는다는 것은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며 부하들도 역시 싸우라고 허락해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칼을 뽑으실" 때 칼을 뽑는 것은 잘 하는 일이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깃발을 주시사 진리를 위해 달게 하신다" (시 60:4).
👀 구약 성경에 었어서 ‘칼(헤레브)'은 대부분 전쟁과 싸움의 문맥에서 사용된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을 향하여 칼을 드시는 자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주로 가나안 정복 과정에서의 이방 족속과의 싸움에서 나타난다(5:13; 6:2; 신33:29).
이처럼 칼을 드는 주체가 하나님으로 묘사된다는 사실은 이방 민족과의 이러한 전투는 바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와의 싸움인 거룩한 전쟁임을 보여 준다(사 31:8; 37:36). 이러한 맥락에서 칼을 든 하나님의 군대 장관의 출현은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둔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신적인 의지를 보여 준다.
(2) 여호수아를 힘있게 전쟁을 수행해 나가도록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의 손에 뽑힌 칼은 그를 힘입어 용감하게 싸울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고 구원해 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칼은 사방으로 움직인다.
Ⅳ. 여호수아가 그에게 다가가서 물은 대담한 질문.
여호수아는 하인을 보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다가가서 물었다. "당신은 우리편입니까? 우리의 적의 편입니까?" 이 질문은 만일 그가 자기들 편이라면 환영하고 적들의 편이라면 그와 싸울 각오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은 다음 사실을 의미한다.
1. 여호수아의 큰 용기와 결심이다.
그는 이 급작스럽게 나타난 모습에도 주춤하지 않았고, 그가 본 자의 용모에 틀림없이 나타났을 그 위엄과 용맹에도 겁을 집어먹지 않았다. 그는 위대한 장군처럼 침착하게 그에게 물어야 할 질문을 던졌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용기를 내라고 명령하시었었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 그는 실제로 그랬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그는 자기 백성 가운데서 은혜로 성취되게 하신다.
2.그 백성과 그들의 처지에 대한 여호수아의 지극한 관심이다. 여호수아는 너무나 열심히 자기 백성의 유익에 전념하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서는 그를 이길 수가 없었다. 그는 친구와 적을 대뜸 구별해 낼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여호수아가 그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대항하고" 그에게 도전하기 위해서 오는 골리앗과 같은 적으로 의심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가 때로는 우리를 크게 위해 주는 사람을 우리의 적으로 간주하기가 쉽다.
그 질문은 명확하게 이스라엘 족속과 가나안 족속, 그리스도와 바알세불 사이의 한편을 강요한다. 그것은 중립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해치는 자다."
Ⅴ. 자기 자신을 설명한 말(14절).
"너희의 적의 편이 아니라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나는 지금 왔노라." "너희들의 친구로서 뿐만 아니라, 너희들의 군대 사령관으로 왔다."
👀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전쟁은 신앙과 직결되는 행위로서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거룩한 전쟁임을 보여 준다. 성전의 승리 역시 이스라엘 모든 군대의 대상이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군대와 함께 싸우실 때에만 가능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로 묘사되었다(삼상17:45). 그러므로 본문에 나타난 ‘여호와의 군대 장관'도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 분이셨고, 육신을 덧입고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셨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유월절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는 일련의 의식들을 통해서(1-3절)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 앞에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나타난 이 사건은 이제 6장 이후부터 전개될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리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사건이었다. 신약의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사단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을 대항하여 영적 전쟁을 행하는 것이다(엡 6:10-12). 그러므로 이 영적인 전쟁에 참여하는 군사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나아갈 때에 이 전쟁의 주관자이며 전쟁의 용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서 승리할 수 있다.
옛날에 있었던 마하나임(창 32:2) 즉 두 개의 군대가 지금 여기에 있게 되었다. 하나는 가나안에 들어 갈 준비가 된 이스라엘 민족의 군대이며 또한 군대는 거기서 이들을 보호해 줄 천사의 군대였다. 그분은 바로 이 양군대의 대장으로 이스라엘의 군대를 지휘하고 천사의 군대가 이스라엘 군대를 돕도록 명령하신다. 이 일에다 비유해서 볼 때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의 대장" 으로(히 2:10) 불리워질 수도 있으며 "백성들의 지도자와 사령관" 으로(사 55:4) 일컬어질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대장을 소유한 백성들은 승리할 수밖에 없다. 그는 지금 군대를 열병하고 그들에게 새 힘을 주며 여리고를 점령하는데 필요한 명령을 내리기 위해서 대장으로 오시었다.
Ⅵ. 이분이 어떤 분인지 알았을 때 여호수아가 보인 큰 존경.
여호수아는 이 분이 말씀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직감적인 암시에 의해서 이분이 신적 인물이며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1. 여호수아는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
즉 여호수아는 "자기 얼굴을 땅에 대고 경배했다."
여호수아 자신도 이스라엘 군대의 장군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위에 여호와의 군대의 대장으로서의 임무를 받은 이 낯선 사람에 대해서 전적으로 질투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분의 주장을 논박하지 않고 도리어 기꺼이 자기의 사령관으로 이분에게 복종했다.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라도 하나님께 대한 태도는 겸허하고 경건해야 될 것이다.
👀 여호수아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자로부터 ‘내가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다' 라는 말을 듣고 그가 대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신적 권위를 가진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앞에 엎드려 경의를 표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군대를 맡은 지도자로서 그 군대의 대장되시는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굴복하고 복종하는 신실한 믿음을 보여 준다. 영적 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우리 믿는 자들의 대장되신 하나님께 철저하게 의존하고 순복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다.
2. 여호수아는 그에게서 명령과 지시를 요청했다.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이까?"
여호수아의 먼젓번 질문이 용감하고 군인다웠던 것만큼이나 지금 그의 질문은 경건하고 성자다운 것이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일을 다루어야 할 때 자신을 낮춘다는 것이 절대로 여호수아의 위대성을 꺾어 놓는 것이 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면류관을 쓴 머리라고 해도 "왕의 왕" 이 되신 주 예수님의 보좌 앞에서는 아무리 낮추어도 지나치게 낮아질 수가 없다(시 2:10, 11; 72:10, 11; 계 19:16).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가 자신과 그리스도 사이에 가지는 관계는 그리스도는 그의 주님이 되고 그는 그의 명령을 받는 종이며, 그리스도는 그의 대장이시고 그는 그의 분부하시는 바를 행하는 휘하의 졸병이다(마 8:9).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모든 순종의 근원은, 우리의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 자신을 종으로 겸손하게 바치는데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시 16:2).
👀 ‘종’
‘주인(아돈)’과 대조적인 단어. 일반적으로 주인을 섬기는 ‘하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외에도 ‘왕의 봉신', ‘신하', ‘속국의 사절단' 등 자기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공손하고 겸손한 말로 사용됨. 그리고 나아가 이것이 종교적인 문맥에서 사용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사용하는 자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부르는 호칭이었다. 또한 ‘종'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긴밀한 관계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즉 이는 낮고 천하고 억압받는 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주인을 향한 충성스러운 섬김의 측면을 강조한다. 본문에서도 여호수아는 신적 권위를 가진 상대에 대하여 전적인 순종을 다짐하는 의미로 이러한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오늘날 성도 역시 모두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선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사고와 삶을 가져야 한다. 즉 믿는 이는 자기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고 자신은 그분의 종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2) 이러한 관계를 이루는 질문이 있다. "나의 주여 무슨 말씀을 하시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의 뜻을 알려고 하는 간절한 열망과 그 뜻을 기꺼이 이행하려고 하는 결심과 각오를 내포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자신을 하급 장교로 세우고 명령을 받는다. 이러한 마음의 태도는 그가 지금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적격 인물이 됨을 보여준다. 최선의 명령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순종할 줄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 본문은 여호와의 중인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군대 장관 앞에서 순종하려 하는 내적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여호수아는 종의 신분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이 보내신 군대 장관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 그리고 명령에 대한 순종을 전제로 한 태도로서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신실한 자세로 종의 사명을 감당하려 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오늘날 믿는 이들이 자신이 하나님의 종 된 자라는 사실을 말로는 인정하면서도 많은 경우에 그 내적 관심을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에 두지 않고 자기 자신의 계획과 방법에 두는 것은 종으로서의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어리석은 행동이다.
Ⅶ. 이 신적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요구한 경외의 표시가 자세히 나타나 있다(15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 이것은 경외와 존경의 표시였다(이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모자를 벗는 것으로 의미된다).
-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인식으로써 하나님의 임재가 계속되는 한 그곳을 거룩하게 그리고 존귀하게 하는 태도를 지닌다는 표시였다.
👀 ‘거룩’
카다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에서 나오는 능력과 신비와 완전이다. 하나님께서 애굽 땅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언약의 백성으로 부르신 목적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기 원하셨기 때문이다(출 19:6).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뿐 아니라 그들의 신앙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백성된 목적인 거룩함을 유지하였다(레 11:44,45).
여호와의 군대 장관과 여호수아가 만나고 있는 땅은 원래부터 거룩한 곳은 아니었다. 단지 하나님께서 임재하셨기 때문에 그 장소가 거룩한 땅이 되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래 거룩한 자는 아니었으나 하나님의 거록함을 부여 받을 때에 언약 백성으로서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정립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편 본절에서 하나님의 군대 장관이 출현하여 여호수아와 더불어 대화를 나눈 것은 거룩한 용사 되시는 하나님 자신께서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싸우시며 가나안 정복 전쟁에 깊이 관여하실 것을 보여 준다.
흔히들 말하는 대로 우리가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밟는 땅까지도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도 이 신적 인물에 대해서 경외를 보여야 했고 그분이 서 있는 땅을 그의 더러운 발로서 밟아서는 안 되었다(전 5:1).
👀 ‘발'
고대 근동의 신발은 발바닥만 보호할 정도의 가죽에 끈을 달아 발등이나 발목을 묶는 ‘샌달(sandal)' 모양이었다. 따라서 ‘발'은 가장 더러워지기 쉬운 부분이었다. 이러한 발은 사람의 죄를 상징하였고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먼지 투성이의 발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 자신의 수치스러운 죄악을 드러내는 행위였다. 그리고 신발을 벗는 이러한 장면은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받을 때 모세가 이미 경험하였던 일로서(출 3:5)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앞에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 앞에서 쓰임받기 위해서 자신을 죄로부터 멀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서 요구되어졌다.
내적 경외의 외적 표현과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경외는 우리가 엄숙한 율례를 따라 하나님에게 나아갈 때마다 언제나 요청되는 바이다.
패트릭(Patrick) 감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기 위해서 모세를 보내실 때 가시덤불에서 모세에게 주셨던 명령도 바로 이러한 명령이라는 사실을 주목한다(출 3:5). 그분은 이 명령을 통해서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같이 여호수아도 친히 함께 해주겠다고 한(1:5) 최근의 약속에 대한 신앙을 확증시켜 주신다. 모세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았을 때 그 땅을 거룩하게 했었고 여호수아도 그렇게 했다.
👀 오늘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교회 역시 자아를 버리고 낮아진 태도로 겸허하게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이런 태도야말로 하나님의 중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자세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여리고 성의 함락에 관해 여호수아에게 전하려고 하셨던 지시들을 받으라고 준비시킨다. 이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이스라엘이 이 성을 소유하도록 돕기 위해서 지금 오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