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7월 25일 월요일 묵상구절 수 7:1-26 아간의 범죄

하나지기 2022. 7. 25. 07:55

맥체인 성경읽기

사사기 8, 사도행전 12, 예레미야 21, 마가복음 7

묵상구절

7:1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7:2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7:3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7:4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7:5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7:6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7:7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7:8 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7:9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7:10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7:11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7:1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7:13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
7:14 너희는 아침에 너희의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 뽑히는 그 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그 가족은 그 남자들이 가까이 나아올 것이며
7:15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의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이라 하셨다 하라
7:16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의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7:17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7:18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7:19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청하노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하니
7:20 아간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참으로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이러이러하게 행하였나이다
7:21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
7:22 이에 여호수아가 사자들을 보내매 그의 장막에 달려가 본즉 물건이 그의 장막 안에 감추어져 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는지라
7:23 그들이 그것을 장막 가운데서 취하여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가지고 오매 그들이 그것을 여호와 앞에 쏟아 놓으니라
7:24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과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그 외투와 그 금덩이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딸들과 그의 소들과 그의 나귀들과 그의 양들과 그의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7:25 여호수아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오늘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7:26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매튜 헨리 / 옥스퍼드

▶ 스페셜 포인트

그들은 여호와의 능력이 임했을 때 두꺼운 성벽들이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 것인지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스라엘 군대의 사기는 충천하였으며 어느 세력도 그들 앞을 가로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들은 불과 이삼천 명 정도의 병력만으로도 층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던 조그만 성읍 거민에게 여지없이 페배하고 말았다. 이스라엘 군대의 패인은 한 가지, 바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서 떠나셨기 때문이다. 여리고 전쟁의 승리는 전적으로 여호와의 임재에 의한 승리였으며, 가나안 정복 전쟁의 첫열매로서 사람과 가축과 은금을 비롯한 모든 기구 등 여리고에 속한 모든 것은 여호와께 바쳐진 것이었다. 그런데 여호와께 바쳐진 것을 이스라엘이 취함으로 화가 이스라엘에 임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결을 명하시고(7:13) 범죄자를 색출케 하신 결과, 즉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범죄자 아간과 그의 가족들과 그에게 속한 모든 소유들을 돌로 치고 불로 사르고 돌무더기를 쌓게 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셨다(7:26).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말은 사소한 범죄인 것처럼 비쳐질 수 있으나, 그 시점상 신약의 교회 공동체가 태동하는 출발 시기였다. 그처럼 중요한 시기에 성령을 속이는 기만과 탐욕이 교회에 침투하는 것을 방치한다면 태동 시기에 있는 교회 공동체에 심각한 훼방거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여호와의 군대에게 있어서 성결의 상실은 곧 패배를 의미한다. 오늘날 진정한 의미에서 십자군의 전쟁을 싸우는 그리스도인들이 여호와의 함께하심과 승리의 감격을 맛보지 못하는 것은 바로 여호와 앞에서의 성결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제 가나안 정복 전쟁의 초기에 오직 여호와만을 의지하고 거룩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이스라엘 군대가 한 사람의 죄로 인해 오염되어 전체 가나안 정복 전쟁에 차질이 생기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방치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 성 전투의 패배와 아간의 처형은 다시 한번 가나안 정복 전쟁이 여호와께 속한 거룩한 전쟁임을 확인시키고, 그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 앞에서 성결함을 유지하는 것임을 교훈하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아간의 처형은 가혹한 처사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신약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범죄(행5:1-11)의 경우와 비교할 때 정확한 깨달음의 빛을 얻을 수 있다.
여호수아의 탄원에 대해, 여호와께서는 왜 그들을 떠나셨는지 그 이유가 이스라엘 내부에 있음을 밝히셨다. 그것은 바로 여리고 진멸 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여호와께 바쳐진 것을 몰래 자기 것으로 취한 유다 지파의 자손 아간의 죄 때문이었다.
제 일차 아이 성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입은 손상은 단순한 전력상의 손실이 아니었다. 전사자는 삼십육 인에 불과하였지만 이스라엘 군대의 사기가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잘 알다시피 칼과 창을 무기로 하여 몸과 몸이 부딪쳐 피를 흘리며 싸워야 하는 재래식 전쟁에서 군인이 싸울 용기를 잃어버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스라엘 군대가 가나안 토착 세력에 비해 앞선 것이 있었다면 만군의 여호와가 그들 군대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이었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한 승리를 얻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담대한 용기였다. 그런데 그들은 가나안 전쟁의 두번째 전투에서 여지없이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여호수아가 비교적 많지 않은 전사자를 내고서도 티끌을 무릅쓰고 여호와께 탄원하였던 이유는 층분하다. 여호와의 기사에 의한 이스라엘의 요단 도하 소식에 절망하고 사기가 저하되었던 가나안인들이(5:1), 이제는 아이 성 전투 소식을 듣고 모두 단결하여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서 끊어버리려 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에게 임했던 것이다(7:9).
이스라엘의 아이 성 일차 공격의 실패는 한마디로 이스라엘을 공포와 충격 속으로 몰아넣은 사건이었다. 이스라엘 군대의 뇌리 속에는 철옹성 여리고를 무너뜨린 감격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 아간의 범죄가 부른 재앙 (여호수아 7:1-5)

본 장은 "그러나" 라고 하는 말로 시작한다(KJV). 앞장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명성이 그 온땅에 퍼지니라" 라는 말로 끝나고 있다.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계속해서 "점령하고 정복해 나가는" 일을 해 나갈 것이다. 그는 올바르게 행동했고 그리고 사사건건 여호와의 명령을 지켰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범죄를 저질렀고" 그래서 여호와께서 이들을 거부하시었다. 따라서 여호수아의 이름과 명성도 그의 지혜와 용기도 아무런 도움이 될 수가 없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잃게 된다면 우리는 친구들도 잃게 되며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어 주시지 아니하시면 그들도 우리를 도울 수가 없다.
Ⅰ. 아간이 범죄하다(1절).
여기서는 죄를 범한데 대한 일반적인 언급만이 나와 있다. 우리는 나중에 자신의 입으로부터 보다 자세하게 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그 죄는 "바쳐진 물건을 취한 것" 으로 이야기되고 있는데 그것은 명령에의 불복종이며 경고에 대한 도전이었다(6:18). 여리고를 포위했을 때 그들은 어떠한 생명체도 남기지 말며 어떠한 재물도 취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우리는 생명체를 남기지 말라는 전자의 금지령은 지켜진 걸로 본다(그들 중에는 어떠한 긍휼도 베푼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후자의 금지령은 파기되었다. 연민은 없어질 수 있었고 율법에 억제되었으나 탐욕은 억제되지 못했다. 세상에 대한 사랑은 어떤 것보다도 더 그 뿌리를 뽑아 내기가 어려운 쓴 뿌리이다.
그러나 아간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수천의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유일한 범죄자였음을 밝히 보여주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범죄가 더 많이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우리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도 듣게 되었을 것이다. 아간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이상스러울 정도다. 유혹은 강렬했었다. 이토록 많은 귀한 것들이 불태워질 때 무엇 때문에 이것들을 이렇게 소각시켜야 하는 가라는 아까운 마음을 가지기가 쉽다. 성들을 약탈하게 될 때 생각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일들은 비밀이 지켜질 것이라든가 벌은 받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되기가 쉬웠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민족들은 할례와 그들이 늦게나마 지키게 된 유월절과 같은 하나님의 규례와 그들에게 관심을 쏟아 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훈계와 심판을 두려워하며 자기들의 하나님에게 순종하기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부정할 수 있는 생각들을 만들어 놓았었다.
그러나 비록 죄를 지은 사람이 단 한 사람뿐이었다고 해도 이스라엘 자손들이 "범죄 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 지체중의 하나가 범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들과 따로 떨어진 사람도 아니었으며 관련이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들이 범죄 했다. 아간 한 사람의 행위가 그가 한 구성원이 되어 있는 그 전체 사회에다 유죄선언을 가져온 것이다. 이 일은 범죄가 많은 사람들을 더럽히고 불안하게 만들지 않도록 우리들로 하여금 조심하게 하며(히 12:15) 죄인들의 범죄에 가담하지 않도록 더불어 사귀고 짝하는 일에서 우리들을 조심하게 해 주는 경고가 되어야 할 줄로 안다.
사려 깊은 많은 상인들이 무분별한 동업자 때문에 파산한 경우가 많이 있다. 타인들의 죄악이 우리들의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죄를 막기 위해서는 서로서로 관심을 가지고 조심해야 한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언약 공동체로서 운명을 같이하는 민족이기 때문. 신약 교회의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한 지체이므로 한 개인의 범죄가 교회 공동체 전체에 나쁜 영향을 끼치고 교회를 위태롭게 할 수 있음을 기억하여 스스로를 돌아보아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럼 없는 생활을 해야 한다.


Ⅱ. 이스라엘 진영이 같은 이유로 고통을 받는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그 범죄를 보지 못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보셨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 죄를 보도록 사건을 이끌어 가셨다. 아무튼 조만간 은밀한 죄들은 광명한 데로 나타나게끔 되어 있다. 사람들이 그 죄들을 찾지 못한 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찾아내실 것이며 이 일을 통해서 백성들을 일깨우실 것이다. 대부분의 집단들이 죄와 진노 아래 있으면서도 진노의 불이 터져 나올 때까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진노의 불길이 여기서는 재빨리 터졌다.

👀 아간: ‘괴롭히다'는 뜻의 잘 사용되지 않는 단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골치 아픈', ‘괴로운'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간은 그의 이름 뜻대로 이스라엘 전체에서 골치 아픈 존재가 되고 말았다. 대상2:7은 ‘아간'을 의도적으로 ‘아갈(괴롭히다)’로 표현하여 하나님 앞에서 그의 범죄를 부각시켰다.

본장은 여호와께서 진노하셨다는 진술로 시작되어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셨다'는 진술로 마무리된다. 본장 전체가 ‘여호와의 분노'라는 개념하에 일관성 있게 진행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간의 범죄는 여호와의 분노를 촉발시켰고 —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아이 성 전투에서 패해하고 — 그의 가족 전체가 진멸당하게 되었다.


1. 여호수아는 앞길을 막고 있는 다음 도시를 점령하도록 부대를 파견한다.
그것은 아이성이었다. 그는 아이성이 보잘 것 없으며 그 성을 점령하는 데는 많은 군대가 필요하지 않다는 정탐꾼들의 말에 따라 3000명만을 파견했다(2,3절).

👀 이스라엘이 여러고 성을 공략한 후 아이 성을 그 다음 공격의 목표로 정한 것은 가나안 남부와 북부를 공략하기에 앞서 중부 지역의 보다 튼튼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가나안 중부 고지대에 위치한 아이 성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그 후방의 적을 그대로 둔 것이 되어 작전 전개에 큰 어려움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여리고가 교통의 요지로서의 전략적 가치가 있다면 고지대에 위치한 아이는 다른 지역을 내려다보며 통제할 수 있는 지형적 이점을 가졌다는 점에서 전략적 가치가 있다. 따라서 아이 성은 보급로 확보와 남부와 북부의 고립을 위해서는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지형상 여리고는 해발 -240m의 저지대였고 아이는 해발 800m 로 험준한 고지대에 위치하였으므로 이스라엘의 정탐들이 여리고를 지나 아이 성까지 가는 길은 계속적으로 오르는 길이었다.

아이 성 전투와 여리고 전투의 차이점

이번 아이성 전투에 있어서는 이전 여리고 성 공격시에 있었고(6:2-5) 이후 아이성 2차 공격시에 있었던(8:1,2)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시가 없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로 볼 때 이번 아이 성 전투에서는 신앙적인 측면에서 여호수아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이해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이때에도 철저한 신앙적인 경각심이 있었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간절한 기도가 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아이성 전투의 참패라는 비극적 결과도 면할 수 있도록 해 주셨을 것이다. 즉 아이 성 전투에 임하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보다 중요한 것은 정탐꾼을 보내는 일이 아니라 신앙적인 경각심을 고취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번 원정에 이토록 작은 군대를 파견하게 된 것은 잘못된 확신이나 자만 행위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들이 여리고 점령에서 탈취물을 가지지 못하도록 되었었기 때문에 이번 원정에는 나갈 마음이 별로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정탐꾼들은 자기들의 주장이 관철되어 기뻤다. 그러나 여리고성이 점령되었을 때 비록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성벽을 무너지게 하셨지만 "그들 모두가 거기까지 가서" 그 성벽을 도는 "수고를" 같이 해야만 했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노력을 무겁게 생각하고 어떻게 그 노고를 덜어볼까 궁리하기 시작하는 것부터가 절대로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비록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신다고" 해도, 우리도 "우리의 구원의 사역을" 감당해 나가야 하는 것은 절대로 필요하다. 또한 원수를 너무 얕잡아 보는 것 때문에 결과가 나쁘게 나타난 경우도 왕왕 있다. "그들은 소수 뿐이라" 고 정탐꾼들이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소수였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너무 많은 원수였었다. 이 일은 "세상의 정사와 권세들과 싸우는" 기독교인들의 전투에 있어서 우리의 주의와 근면을 일깨워 주는 것이 될 것이다.

👀 실제로 아이 성에 거주한 사람들은 모두 만 이천 명이었는데(8:25) 전쟁에 참가하기 어려운 여자와 어린이들, 그리고 노인들을 맨 남자 군사의 수효는 이보다 훨씬 적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아이 성 거민의 수효에 대한 정탐꾼들의 보고는 비교적 정확했지만 아이 성 군사의 수가 적은 것만 보고 이 전쟁을 쉽게 승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것이었다. 고지대에 살고 있던 상대방은 이 산지의 지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고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은 여리고보다 훨씬 험준한 고지였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이들의 수가 적다는 이유만으로 아이 성 정복이 쉬울 것이라고 판단한 것은 정탐꾼들의 안일하고도 경솔한 생각에서 기인된 것이다.

아무리 소규모의 전투에서도 최선을 다해야 하며 특히 가나안 정복 전쟁 초기의 전투에서의 패배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무시한 것으로 전략상으로 보아서도 큰 오류를 범한 것이며,

동시에 신앙적인 측면으로 보아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인간적인 경험과 지혜에 더 치중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교만함을 보여 준 행위.


2. 여호수아가 파견한 부대는 아이성의 공격 시초에 패배를 당하고 약간의 손실을 입었다(4,5절).
"그들이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라"
그들은 말할 수 없이 사기가 꺾이고 반대로 그들의 원수들은 그들이 예견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있게 그리고 용기 백배하게 그들을 진격해 왔다. 도망치는 동안에 36명 정도가 죽었다. 이 정도의 손실은 실제로 큰 것은 아니라고 해도 어떠한 공격에서든지 간에 확실하고 손쉽게 그리고 분명한 승리 이외에는 어떤 것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던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놀라움이었다. 그러나 이 치욕의 패배 아래 넘어진 사람이 3000명만 이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이스라엘 전 군대가 거기에 있었다면 그들도 이 소부대와 마찬가지로 - 실제 그들도 범죄와 진노 아래 놓여 있었으므로-자기들의 땅을 지켜낼 수 없었을 것이 아닌가! 이 패배가 그들에게는 더욱 더 괴롭고 치욕적인 것이 되지 않았겠는가! 그렇다고 해도 이 사실은 분명 불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래의 교훈을 배우게 된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낮추시며 그들에게 언제나 "두려워 떨며 기뻐할 것" 을 가르치신다.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같이 자랑치 못할 것이니라."
(2) 가나안 족속들을 완악하게 하고 보다 안심하게 함으로써 실제 파멸이 닥칠 때 그들이 당할 공포가 더욱 더 무서운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3)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싫어하심을 나타내 보이셨고, 그리고 "묵은 누룩을 없애 버리라" 는 요구이다. 원칙적으로 이것이 패배의 이유였다.
3. 이 부대가 혼비백산 패배당하자 이스라엘 전체 진영이 공포에 빠졌다. "백성의 마음이 녹았다" 고 했다. 손실도 손실이려니와 실망이 더욱 컸다.
여호수아는 "사시는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것이다" (3:10)고 백성들을 확신시켰었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은 그 약속과 어떻게 부합될 수 있는가?
백성들 가운데 조금이라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이번 사건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표시로 나타났고 보다 더 불행한 운명의 전조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번 사건이 이토록 경악을 불러일으킨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원수의 편이 되사 자기들을 대항하여 싸우신다면", 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참 이스라엘 족속은 하나님이 진노하실 때 떨 수밖에 없다.

여호수아의 간곡한 중재기도 (여호수아 7:6-9)

우리는 여기서 이 슬픈 사건에 대한 여호수아의 깊은 심려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공직에 있는 그는 이 놀라운 손실에 대해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욱 더 책임을 느꼈다. 또한 이 사건에서 그는 제왕들과 위인들에게 한 본보기가 되어, 자기 백성들에게 닥치는 재난에 대해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하는가를 가르쳐주고 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그의 부하들의 피는 그에게 있어서 귀한 것임을 보여주었다(시 72:14). 다음을 살펴보자.
Ⅰ. 그가 얼마나 슬퍼했는가?
"그는 옷을 찢었다" (6절). 그것은 이번에 당한 백성의 손실에 대한 큰 슬픔의 표시였으며 특별히 하나님의 싫어하심에 대한 두려움의 표시었다. 이번 사건은 분명코 하나님의 싫어하심에서 기인되었었다. 이번 사건이 전쟁에 흔히 있을 수 있는 그런 일이었다면(우리는 너무나 쉽사리 그렇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이토록도 전체 회중을 실의에 빠지도록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노하실 때는 이런 것을 깨닫고 느끼는 것이 지도자의 의무요 명예다. 육체를 소유한 사람치고는 아무리 용감한 자라고 할지라도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떨었다" (시 119:120). 그는 "여호와의 전능하신 손아래 자기를 낮추어 땅에 엎드렸다."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자기를 낮추는 것은 절대로 모욕으로 생각되어지지 않았다.
그는 자기 눈을 "여호와의 궤" 를 향하게 함으로써 이것을 경외의 표시로 삼았다.

👀 왜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렸는가?

‘여호와의 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따라서 이 궤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정체성 자체였고, 이스라엘로 이스라엘 되게 하는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가나안에 들어선 이스라엘이 처한 가장 위급한 위기 상황에서 여호수아를 대표로 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 섰다고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이 앞에서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의 뿌리와 생활의 근본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여러 예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본문은 우리의 인생 가운데 실패하는 순간 가장 먼저 어디를 향해 무릎을 끓어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본문에서 ‘여호와의 궤'가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여호와의 임재' 앞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인데 그 이유는 바로 그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 가운데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살아있는 하나님의 ‘임재의 현현'이기 때문이다.

땅에 엎드린 여호수아의 모습은,

그는 지극한 낭패감과 깊은 슬픔 가운데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다른 열한 명과 더불어 가나안을 정탐했을 당시 확신에 찬 믿음으로 그 땅을 바라보던 여호수아 자신마저도 지금 이 순간에는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의 좌절감과 극도의 의욕 상실 가운데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인간의 무력함을 실감하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신앙적인 행동이기도 하였다. 결국 여호수아는 이런 과정을 지나고 난 뒤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10-13절) 들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죄악의 근원을 잘라 버릴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땅에 엎드려' 있을 수밖에 없던 현실에서 벗어나 적의 머리를 땅에 엎드리게 하고 그 ‘왕들의 목을 발로 밟는'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10:24). 이 사실은 우리의 신앙에 교훈을 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고 범죄하게 되면 이 세상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억압의 대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으며 우리의 자존감은 낮아져 스스로를 비하하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벗어나는 길 역시 제일 먼저 자신을 성찰하여 우리 가운데 뿌리 밖고 있는 죄악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께로 겸허하게 나아가는 것이다.


이스라엘 장로들도 이 사건에 책임을 느꼈고 또한 여호수아의 행동에 감동을 받아 여호수아와 함께 엎드렸고 깊은 겸손의 표시로써 애곡자로서 뿐만 아니라 참회자로서 "머리에 티끌을 썼다." 하나님이 이렇게 그들과 다투시는 것은 (비록 그들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여하튼 무슨 죄가 있음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므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진노의 과정을 거두어 주시기를 탄원했다. 그들은 이 일을 "저물 때까지" 계속했다. 그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 순간적인 감정의 결과가 아니라, 만일 하나님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진노하사 자기들을 떠나시면 그들이 얼마나 비참해지며 위험해지는가에 대한 깊은 확신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여호수아는 적군의 세력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가져온 정탐꾼들이나 군대들의 비겁한 행위를-이것들은 실제 책망을 들을 만한 것들이었지만-비난하지는 않았다. 그는 오직 자기 진영에 제거하지 못한 무슨 죄악이 있는가 알기 위해서 "여호와에게 눈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하나님의 분노의 이유를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었다. 그것만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 ‘주 여호와여’

주 여호와여'란 표현은 여호수아서에서 아주 독특하게 사용된 표현으로서 본문에서만 단 한 차례 사용되었다. 여호수아는 ‘모든 것의 주인이신 언약에 층실하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이러한 이름을 불러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이 어려운 국면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해답을 얻으려고 하였다. 결국 이같은 간구는 이스라엘이 당시에 느끼고 있던 위기 의식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를 잘 알게 한다.


Ⅱ. 그가 어떻게 기도, 아니 탄원을 했는가?
얼마나 겸손하게 이 문제를 하나님께 간청했는가? 그는 "하나님께서 웃사에게 진노하셨을" 때의 다윗처럼 시무룩하게 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에서 했다. 그는 정신이 흐리고 당황한 가운데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기도를 못할 만큼 당황하고 있지는 않았었다. 그는 참으로 겸손한 어조로 하나님에게 자기의 고충을 토로함으로써 자기의 감정을 억제해서 기도를 잘 끝맺는다.
1. 그는 요단강 건너편 쪽 두 지파의 땅을 모두 나누어 가졌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7절).
차라리 그곳에 머무르고 모자라게 사는 것이 여기까지 건너와서 패배당하기보다는 더 낫지 않았을 것인가라고 그는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해 지나친 불신을 풍기는 것이다. 그토록 대중을 위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 당하는 놀라움과 실망이 오죽했겠느냐고 하는 것이 이러한 인사에 대해서 부분적인 변명이 될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절대로 이러한 생각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요단을 건너게 하셨나이까?" 하는 이러한 말들은 불평자들이 자주하던 말과 너무나 흡사하다(출 14:11, 12; 16:3; 17:3; 민 14:2, 3). 그러나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은 이러한 언사가 불평자들과는 다른 정신에서 토로되고 있음을 아셨다. 그러므로 그가 실수로 말한 것에 대해 오점을 찍으려고 하시지 않으셨다. 만일 여호수아가 자기들이 휘말려든 이 혼란이 분명코 이따금 자기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잘못 저지른 뭔가에 대한 값이라고 생각했었더라면 그것은 쉽사리 고쳐질 수도 있었을 것이며 다시 전력을 정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함부로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라고 하는 언사는 결코 발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는 모르고 있다고 해도 자기가 행동하시는 바를 알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하는 바는 하나님의 절대로 우리를 해롭게 하신 일도 없으며 하시지도 않으신다는 것이다.

👀 옥스퍼드 견해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요단 동편에서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전멸시킨 그때를 회상하며 그곳에 머물러 있었으면 오늘과 같은 뼈저린 패배는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거나 항변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서는 안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가나안 정복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이루는 과정에 중대한 차질이 생겨난데 대한 당혹감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해결책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여호수아의 심경은 그가 가나안 정복의 실패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비극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이름을 훼손시키는 것이란 신앙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던 데서도(9절) 잘 드러난다.


2. 여호수아는 이 사건이 뜻하는 의미를 모르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다(8절).
"근래에 그토록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 이 땅을 완전히 소유하도록 약속해 주신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그들의 원수 앞에서 등을 보였으니(원래는 목이라는 의미)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팔이 짧아진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예'도 되고 '아니오'도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이런 일들은 무엇입니까? 이 모든 일들은 다시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헛것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까?" 하나님의 섭리의 방법은 너무나 묘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아무리 지혜롭고 박식한 사람이라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러나 "후에는 알게 될 것이다" (요 13:7).
3. 그는 이스라엘이 지금 당하고 있는 파멸의 위험을 간절히 호소한다.
그는 모든 것을 단념한다. "가나안 족속들이 우리들의 보호자가 떠나고 자기들의 때가 왔다고 생각하여 우리를 둘러싸고 치리니, 우리는 과거에 무서운 존재였던 그만큼 이제는 경멸의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어버릴 것입니다" (9절).
이와 같이 비록 선한 사람이라도 일들이 조금만 자기들에게 불리하게 진행되면 곧 최악의 경우를 걱정하게 되고 실제보다 훨씬 더 불행한 결론을 쉽사리 내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러한 간청이 포함되어 있다. "여호와여 이렇게도 당신에게 소중하고 세상에서 큰 당신의 이스라엘의 이름을 끊어지게 마옵소서."
4. 그는 만일 이스라엘이 패망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수난을 받고 하나님에게 치욕이 돌아갈 것이라고 호소한다. "그들이 우리의 이름을 없애 버릴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그는 자기의 주장을 스스로 장정이나 해 버린 것처럼 이야기한다. 우리들의 보잘 것 없는 이름이야 어떻게 된들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그는 생각하게 된다). (우리들의 이름이 끊어지는 것은 사소한 손실이다).
그러나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 고 한다. 그는 이것이 재난을 일층 더 크게 악화시키는 것으로 보고 슬퍼한다. 그는 이 일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그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영향을 미칠까봐 두려워했다. 애굽인들은 뭐라고 할 것인가? 신실한 성도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하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이 없다. 그는 또한 자기의 공포를 예방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회복을 위한 간구로 이 주장을 계속한다. 여호수아의 이야기 속에서 용기를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라는 말이며 그는 또한 이 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자기 이야기를 끝맺는다. 하나님의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위대한 이름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우리는 그가 자기의 이름을 위해서 일하실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위해서 일하시도록 기도하며 또한 "그것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도 더욱 더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소원들의 궁극적인 여기에다 우리의 눈을 고정시키고, 또한 여기에서 우리의 모든 소망의 바탕이 되는 용기를 얻어내야 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 이것보다 더 좋은 간구를 우리는 생각해 낼 수 없다. 하나님만이 만사에 영광을 받으시게 하라. 그리고 그의 온전하신 뜻을 환영하라.

👀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나안을 정복하러 들어갔으나 결국 가나안의 정복은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가나안 사람들에게 에워싸임을 당하여 멸망할 위기에 처해 있다고 생각한 여호수아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크신 이름과 영광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님 자신이 무엇인가를 행하시기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여호수아는 아이 성 군사들에게 쫓겨 가나안 땅에서 진멸될 위기에 처한 자신들을 구원하는 것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하여 내신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금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이러한 여호수아의 간구 가운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멸망한다면 가장 해가 되는 것은 다름아닌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는 신앙적인 생각이 담겨 있다. 이적과 기사를 통해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광야를 무사하게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나안 땅까지 다 들어와서 멸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 자신에게 가장 커다란 불명예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감히 하나님께 상기시킴으로써 하나님께 멸망의 위기에 봉착한 자신들을 도와 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여호수아의 적극적이고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의 즉각적인 응답으로 이어겼다.

▶ 심판의 준비 (여호수아 7:10-15)

우리는 여기서 여호수아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듣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로는 이 응답은 여호수아가 엎드려 있었던 언약궤 위에서 신탁으로 들려졌을 것으로 본다(6절).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소원을 가지고 살아 있는 신탁 앞에 서서, 지혜의 문에서 지혜의 응답을 기다려야 한다(잠 8:34).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표를 받은 자들은 그에게 "불평" 할 것이 아니라 그에게 "간구하라." 그러면 평화의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한 응답은, 다니엘에게 이루어진 것처럼(단 9:20 이하), "그가 아직 말을 마치기도 전에" (사 65:24) 즉시 도달했었다.
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 사건의 현장에서 여호수아가 겪는 낙심 상태와 그가 가진 어둡고 우울한 생각에서 그를 격려하신다(10절).
"일어나라. 너의 마음을 이토록 의기소침하게 만들지 말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여호수아가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표적을 받았을 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슬퍼한 것은 의심없이 잘한 일이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충분하다고 말씀하셨다. 그 암담한 상태에 그를 더 이상 두시려고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참회자들이 용서와 평안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자기 자신들을 괴롭히는 슬픔에 빠져 있게 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애통의 날들은 끝나야 한다. "일어나 티끌을 떨어버릴지니라" (사 52:2).
여호수아는 "저물 때까지" 애통을 계속했다(6절). 이제 범죄자를 찾아내기에는 너무 늦었다. 밤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까지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니엘과(단 9:21) 에스라는(스 9:5, 6) "저녁 제사드릴 때까지만" 애통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일어났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 시간이 지나기까지 계속했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그를 일으키신다. "일어나라. 온밤을 거기에 엎드려 있지 말라." 그러나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한 중보의 기도에서 40일 40밤을 여호와 앞에 엎드려 있었던 사실을 기억한다(신 9:18).
여호수아는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에게는 거기에 누워있는 것 이외에 또 다른 할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증된 일을 찾아내어 처리해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더욱 좋다. 여호수아는 그 일을 해야될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상복을 벗어 던지고 그의 법의를 입으며 "열심으로 애통의 겉옷을 삼아야" 할 때이다. 애통이 파종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시기가 맞을 때에 아름다운 것이다. 스가나가 이와 비슷한 경우에 에스라에게 이야기한 말은 이 일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을는지도 모른다(스 10:2-4).

👀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만 해결책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는 여호수아와 당신의 백성들을 위로하시며 그들이 더 이상 절망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다시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기를 원하신다.


Ⅱ.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 재난의 참된 그리고 유일한 원인을 알려 주신다. 그리고 그가 이스라엘과 다투시는 이유를 보여주신다(11절).
"이스라엘이 죄를 범했도다."
하나님의 마음이 변했다거나 그의 팔이 짧아졌다거나 혹은 그의 약속이 실패했다거나 생각지 말라.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것은 죄악 때문이다. 곧 크나큰 불행을 만드는 것은 죄악이다. 그것이 현재의 하나님의 은총을 가로막았으며 너희들에게 이 파멸을 가져온 것이다" 는 뜻이다.
죄는 설명되면서도 죄인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는다. 특정한 범죄인을 찾아낼 때까지 이스라엘 총회 전체의 행동인 것처럼 이야기되어지고 있다. 마침내 이들의 "경건한 슬픔은" "자신의 깨끗함을" 명백히 나타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고후 7:11). 여기에서 바로 그 범죄가 얼마나 무서운 죄성으로 나타나게 되는지 살펴보라.

👀 원어 성경으로 살펴보면 ‘또한' 이라는 단어가 5번 반복된다. 이는 이스라엘의 죄를 더욱더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잘못된 행동을 하였다는 사실을 ‘또한(감)'의 반복을 통하여 조목조목 진술하고 있다.

성경은 이 사건이 일반적인 절도 행위와 같은 부류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해서 마침내는 이스라엘과 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 버릴 수도 있는 심각한 범죄 행위라고 하는 것을 확실히 그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이같은 반복을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또한(감)'이란 단어를 반복하실 때마다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이스라엘의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놀라움과 한탄을 금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였고 또한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바친 물건 중에서 얼마를 취하였으며, 또한 도적질하였으며, 또한 속였으며, 또한 자기들의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1. "그들이 나의 언약을 어기었다."
형벌이 따른 명확한 계율이 거기에 붙어 있었다. 여리고성의 모든 노략물은 하나님이 소유하시며 그리고 가나안의 여타 도시의 노략물들은 그들이 소유할 것으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것을 자기 몫으로 도둑질했으니 "그들은 이 언약을 어겼다."
2. "그들은 (아주)바쳐진 물건을 취했다."
하나님의 소유를 감히 훔치려 드는 자에 대해 그토록 엄숙하게 선언된 저주를 무시하고, 마치 그 저주가 아무런 무서움도 아닌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을 취했었다.
3. 그들은 또한 "도적질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전지에서 그것을 숨길 수 있는 것처럼 몰래 그 짓을 했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보지 못하실 것이라" 고 혹은 이토록 노략물이 많은 가운데서 이 정도 작은 것은 못보고 지나가실 것이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는 말이 있다(시 50:21).
4. 그들은 또한 "사기했다."
전투가 끝났을 때 여호수아는 온 지파들을 불러모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노략물들을 성실하게 잘 처리했는지를 물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떤 범죄 행위든지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고 선언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간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총회에서 무리의 선언에 가담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먹고 입을 씻음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치 아니하였다" (잠 30:20)라고 하는 음녀와 같이 태연했었다.
5. 아니 그들은 이 선별된 물건을 "자기들의 가구 가운데" 갖다 두었었다.
마치 자기들의 소유물의 하나를 가지는 것처럼 당연하게 그리고 절대로 책임 추궁을 당하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결코 반환하지 않을 것처럼 소유했다. 다른 모든 일에 대해서는 비록 현명하고 용감한 여호수아라고 해도, 인간이 전연 모르고 있는 세상의 모든 은밀한 악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야기해 줄 때까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 때에 이 일을 행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여호수아에게 말씀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다.
(1) 그것은 범죄자를 찾아내는데 여호수아의 이스라엘의 열심을 연습시키기 위해서.
(2) 죄인이 스스로 회개하고 자백할 여유를 주시기 위해서이다.
여호수아는 즉시 온 진영에 이와 같은 범죄가 저질러졌음을 분명히 선포했다. 만일 아간이 스스로 자수하고 자기의 범죄를 자백하고 조사하는 일을 예방했더라면 물건을 상환함으로써 율법에 따라 "성물에 대하여 그릇 범과한" 사람들로부터 속죄제를 받으시는 율법의 은전을 받게 되었을는지 누가 알겠는가?(레 5:15, 16)
그러나 아간은 제비가 그를 찾아낼 때까지 절대로 자기를 나타내지 않은 걸 보아 그의 마음의 완악함을 잘 입증해 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비를 받지 못했다.
Ⅲ.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더 깊이 조사하도록 경성시킨다.
1. 이 사건만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다투시는 이유이며 다른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 저주받은 물건을 없애기만 하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모든 것은 다 잘 될 것이다. 성공의 물결은 이 하나의 장해물이 제거될 때 옛날과 같이 힘있게 흘러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2. 만일 이 성별된 물건을 없애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총의 임재는 절대로 돌아올 수 없음을 말씀하신다.
분명한 말로 "너희가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 바친 것" 이란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을 훔침으로써 저주를 받게 된 사람까지 뜻한다. 저주받은 것은 파멸되어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칼을 차도록 명령한 사람들은 만일 그들이 그 땅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오는 그런 악한 일들을 두려움 없이 처치하지 않는다면 공연히 칼을 차는 것이 된다. 개인적인 회개와 변화에서 볼 때 우리는 마음속에서 이 저주받은 것을 없애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 일을 하지 않는 한 우리는 절대로 복되신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것은 죄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만인들로 알게 하라. 만일 이 죄악이 겸손하게 회개되고 버려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원히 우리와 하나님을 분리시켜 놓을 것이다.
Ⅳ.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어떤 방법으로 조사하고 처형할 것인지를 지시하신다.

👀 ‘너는 일어나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얕잡아 보았던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가나안 정복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한 채 깊은 슬픔 가운데 있었던 것은 그들의 죄악의 골이 너무나 깊었기 때문이다. 그 죄는 단 한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아 이스라엘에게로 들어왔으나 그 영향력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미쳤는데 이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어나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죄의 자리, 절망의 자리에 더 이상 머물지 말고 새로운 마음과 결심으로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1. 그는 이제 밤중에 "백성을 성결케 해야 한다."
설명된 대로한다면 그는 백성들에게 "스스로를 성결케 하도록" 명령을 내려야 한다(13절).
치리자이든 교역자이든 성화를 위하여 더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타나 하나님의 면밀한 검사에 부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규례를 지키고 모범을 보여야 한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조사하기 위해서 오시는데 그들의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을 받을" 때도 스스로를 성결케 하라는 명령을 받았었다(출 19:). 그런데 지금은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때이므로 그리해야 한다. 두 경우 모두다 지극한 경외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너희들 가운데 저주받은(바쳐진) 물건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 자신을 성결케 하라." 말을 바꾸면 무죄한 자들은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도록 하라. 그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는 데보다 더 주의하라는 것이다. 마치 근친상간의 추문이 고린도 교회의 복된 개혁의 기회가 된 것처럼 해야한다. 타인의 죄악은 우리들의 성화를 촉진시키는데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고후 7:11).

👀 12절에서 ‘바친 것을 멸하지 아니하면 이스라엘과 다시는 함께 있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는데. 본절에서 이스라엘에게 ‘성결케 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성결케 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이스라엘과 영원히 함께하지 않고 떠나실 의도였다면 본문처럼 말씀하여 그들이 변화되기를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본문에서 ‘성결함’이라고 하는 개념은 그들 가운데서 탐욕의 근원이 되었던 대상을 제거하는 제비뽑기를 하기 이전에 먼저 영적인 성결을 회복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과거 이스라엘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오기 바로 직전에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함을 인정받아야 했던 사건과 자연히 연결된다. 제 3장에서 그들이 정결 의식을 통해 영적 정결함을 얻음으로써 가나안의 모든 땅을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영적인 자격을 부여 받았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이 영적 거룩함이 여리고 성의 함락 과정에서 아간의 범죄로 인해 훼손되었고 그것은 그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성결한 백성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순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선택함으로써 다시 거룩한 백성의 지위를 회복하느냐, 아니면 그들이 ‘바친 것', 다시 말해 ‘헤렘'을 선택함으로써 하나님을 포기하느냐 하는 두 갈래의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아이 성 전투에서의 참패는 이스라엘의 훼손된 거룩함을 재건해 요단강을 건널 때 이스라엘이 얻었던 거룩함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요단강을 건넌 목적인 가나안 정복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리는 신호였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교회에 대해서도 매우 중요한 영적 진리를 제공한다. 성도의 삶에 오게 되는 실패에 대해 주님이 성도를 향해 말씀하시는 메시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거룩함의 회복이며 이것을 위한 회개는 무너진 신앙인의 삶을 다시금 일으키어 거룩을 회복케 하는 지렛대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이 이 ‘거룩한 전쟁 (Holy war) '에서 승리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했던 것은 그들의 군사적인 능력을 키우는 열심이 아니라 범죄의 근원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이는 마치 사사 기드온이 이스라엘의 대적 미디안을 치러 가기 전에 그의 아비 집에 있는 바알의 단과 아세라 상을 헐고 찍는 일을 먼저 이행해야만 했던 사건(삿 6 :25-27) 과 유사하다. 신앙인에게 있어 어떤 시련과 좌절에 부딪혔을 때 가장 우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가치관과 잣대 안에서의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이 아니라 죄의 싹을 제거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다.


2. 그는 모든 백성을 불러내어 제비를 뽑는 면밀한 조사를 거치게 해야 한다(14절).
죄인이 끼어 있는 지파가 우선 제비로 찾아내어져야 한다. 그리고는 그 족속이, 그리고 그 가족이, 그리고 최후로 그 개인이 발견되어져야 한다. 이와 같이 죄인이 뛰어들어 자수하도록 주어졌었던 그 영역이 점점 유죄의 판결로 그에게 좁혀져 들어왔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도 멸망에 이르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제비가 떨어지는 지파와 족속과 가족을 따라 세우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왜냐하면 "제비의 처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 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것이 우연한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무한의 지혜와 정의의 지시에 따라 되는 것이며 죄인들의 죄악이 죄인들을 찾아내도록 할 때는 하나님이 이 제비를 인정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죄인들을 움켜잡는 것도 하나님이시며 체포하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와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셨다" (창 44:16). 그것은 또한 의로우신 하나님이 행하시는 확실하고 무오한 심판을 알게 해주고 의인과 죄인을 구분 못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잠시 동안은 그들 모두가 제비를 뽑을 때에 온 지파가 그랬던 것처럼 동일한 정죄에 포함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손에 키를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은 결과적으로 "비천한 자들로부터 고귀한 자들을 골라내도록" 배려하신다. 그래서 비록 죄인이 들어있는 지파와 족속과 가족 중에 의인이 끼어 있다고 해도 그들은 결코 "악인과 같이" 취급되지는 않을 것이다(창 18:25).

👀 인간 여호수아는 비록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으나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사건의 전모를 처음부터 다 알고 계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의 눈을 피해 아무리 깊숙한 곳에 은밀히 죄를 숨길지라도 전지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며 다 알고 계신다.


3. 범죄자가 발견되었을 때는, 그는 "사정없이" 그리고 온갖 거룩한 증오의 표현으로(15절) 죽임을 당해야 한다(히 10:28). 그와 그가 가진 모든 것은 불에 태워져야 하며 그들 가운데 저주받은 것이 절대로 남아 있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 격렬한 선언이 내려진 이유는 범죄자가
(1) 하나님을 크게 모욕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범했다." 하나님은 특별히 자기의 거룩한 언약의 존귀에 대해서 질투하시는 분이시다.
(2) 하나님의 교회에 크게 피해를 끼쳤기 때문이다.
그는 "이스라엘에게 치욕을 가져왔고, 모든 이웃 나라들로부터 "지혜 있고 사려 있는 백성으로" 우러러 뵈던 이 나라에 수치를 끼얹었으며 하나님에게 성별된 이 나라에 오점을 만들어 놓았고 하나님이 친히 보호자가 되시는 이 나라를 괴롭혔다.
이러한 것들은 그 죄성이 너무나 극악스럽고, 너무나 유해한 결과와 본보기가 되므로, 다른 경우면 이런 형벌은 잔인하다는 비난을 듣게 될 것이지만 이 경우만은 필요한 정의의 한 부분으로 박수 갈채를 받게 된다. 그것은 "신성 모독" 의 죄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유를 따로 떼어내어 자기의 사용으로 전가시킨, 하나님의 권리에 대한 침해였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쳐지고 그리고 그의 성소에서 섬기는 일에 이용되도록 정해진 것이었다. 이것은 마땅히 심하게 형벌을 받아야 할 범죄 행위였다. 왜냐하면 만세에 모든 백성들에게 경고를 발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을 도적질하는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 아골 골짜기의 내력 (여호수아 7:16-26)

우리는 위의 본문에서 아래의 사실들을 찾아볼 수 있다.
Ⅰ. 제비로 아간을 찾아내는 것은 비록 그것이 점진적으로 진행된 것이라고 해도 완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생각에는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자기가 머리가 되어 있는 그 몸의 가장 아픈 질병이 무엇인지 알고 그리고 확실한 치료 방법까지 가지게 되었을 때 안심과 만족감에서 푹 잠들 수 있었을 걸로 안다. 그러나 그는 "아침 일찍이 일어났다" (16절). 그만큼 그는 저주받은 일을 제거하는데 마음을 쏟고 있었다. 우리는 다른 경우에서도 여호수아가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아 왔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이 회복되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그의 뜨겁고 간절한 소원을 보여주고 있다. 범인 색출 장면에서 생각해 보자.
1. 범죄 지파로 뽑힌 것은 유다 지파였다.
이 지파는 모든 지파 중에서도 가장 존귀하고 본보기가 되는 지파였었고, 또 그런 지파가 되어야 했었다. 그런데 이것은 이 지파의 존귀에 대한 오점이 영광이 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치욕이 되는 사람도 여기 한 사람 있는 것이다. 아무리 명문의 집안이라고 해도 그 집안에 슬픔과 수치를 끼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못된다.
유다 지파는 가나안에서도 최초로 그리고 가장 큰 몫을 차지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몫을 기다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소유를 도둑질한다면 이 지파의 사람으로서는 더욱이나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유대인의 전승에 따르면 유다 지파가 제비에 뽑히자 유다 지파의 무사들은 모두 자기들의 칼을 뽑아들고 그들 자신이 범죄자가 처형되고 자신들이 무죄하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게 될 때까지 결코 칼집에 꽂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고 한다.
2. 마침내 범죄자가 확정되고 "네가 그 사람이로다" 하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18절).
아간이 자기가 죄 지은 줄을 알고 또 그 제비가 점점 자기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도 피할 생각을 하거나 고백함으로 은총을 받으려 하지 않은 것이 너무나 이상스럽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죄의 속임수에 빠져 완악해져 있었고", 그것이 자기 자신의 파멸을 초래했었다. 우리는 그의 안색이 어떻게 달라졌을는지 그리고 그가 범죄자로 마지막으로 뽑혀졌을 때 곧 이스라엘의 모든 눈길이 그에게 고정되고 모든 사람이 그를 향해서 "오 우리들의 대적이여! 우리가 너를 찾았도다!" 라고 덤벼들려고 했을 때 그가 어떠한 공포와 혼동에 사로 잡혔을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 스스로 죄를 은밀하게 감추려 하는 자의 어리석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어두움의 숨겨진 일들을 광명한 데로 끌어내시며 열매 없는 일에 계속적으로 가담하는 자들을 수치와 파멸에로 끌어내신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공중의 새도 그 소리를 전한다" (전 10:20; 시 94:7 이하 참조).
(2) 하나님께서 우리와 다투실 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간과 같이 우리의 진영을 괴롭히는 바로 그 죄가 무엇인지 찾아내기 위해서 지대한 관심을 두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피고 주의 깊게 양심의 기록을 살펴서 저주받은 것들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며 거룩한 욥처럼 "여호와여 당신이 나와 다투는 이유를 가르쳐 주옵소서" 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배신자를 찾아내라. 그러면 그는 더 이상 숨어있지 못할 것이다.
Ⅱ. 고소와 심문(19절).
여호수아는 재판석에 앉는다. 그리고 이미 제비에 의해서 그의 죄가 확실하게 드러났지만 그로 하여금 참회의 고백을 하도록 강요하는데 그것은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에게 살아남을 수 있는 소망의 여지는 줄 수 없다고 해도 그 고백을 통해서 저 세상에서 그 영혼이나마 구원 얻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1. 여호수아는 모세의 참된 제자답게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온유와 자비로 그에게 말을 건넨다. 그는 당장이라도 "도둑놈" 이니 "반역자" 라느니 "라가" 혹은 "바보" 라고 불러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범죄자를 향해서 "아들아" 라고 부른다. 여호수아는 그에게 마치 대제사장이 우리 주님에게 그랬던 것처럼 고백하도록 엄포를 놓을 수도 있었고 고문으로 고백을 강요하는 위협을 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사랑으로 그에게 간청한다. "청하노니 자백하라." 비록 범법자가 자기 자신의 악행 때문에 끌려 나왔다고 해도 궁지에 있는 이들에게 모욕을 주지 않고 도리어 그 범죄자들을 온유한 마음으로 다룬다는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우리 자신들의 꾀에 그냥 버려두셨다면 우린들 어떻게 되었을는지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 누가 알랴! 이것은 또한 정의를 실현시키는 사법관들에게는 엄격하고 사려있는 손길로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고 아무리 도발적인 범죄자를 향해서라도 천박한 행동이나 언사를 행사하지 않도록 하라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인간의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심판은 하나님의 것이며 그는 진노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범죄자들을 회개에 이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2. 여호수아는 범죄자에게 사실을 고백할 것을 권한다. 그 사실을 범죄 때문에 진노하신 장본인이 되시는 하나님께 고백할 것을 권한다. 여호수아는 지금 하나님 대신으로 범죄자 앞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회중이 그의 죄에 대해서 심문하는 일을 그는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의 고백은 또한 그의 회개의 표시가 되기도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이후에라도 자기와 비슷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시키는 경고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여기서 목표하는 것은 이 일을 통해서 무한의 지식과 능력의 하나님, 그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비밀도 숨겨지지 못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이스라엘에게 불순물이 섞이게 되는 것을 특별히 분개하시는 그 하나님에게 존귀를 돌리는 것이었다.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들에게는 수치스런 일이나,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노하심은 당연한 일이므로 하나님의 의를 고백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고백을 증거로 우리를 심판하는 구실을 삼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벌하시더라도 역시 미쁘시고 의로우시겠지만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시니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심을 또한 믿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죄를 범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명예를 손상시켰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 그 손상을 보상하시었다. 그러나 우리는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명예에 대한 우리의 선한 뜻을 나타내 보여주어야 하며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할 의무가 있다. 패트릭(Patrick) 감독은 사마리아판 역대기를 인용해서,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한 말을 이렇게 쓰고 있다. "네 눈을 들어 천지의 왕이 되신 그분을 바라보라. 그리고 아무리 작은 비밀이라도 모두 아시는 분에게 아무 것도 숨길 수 없음을 시인하라."
Ⅲ. 그의 고백.
마침내 더 이상 자기의 범죄를 고의로 숨길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자유롭게 그리고 솔직하게 고백한다(20,21절).
1. 잘못에 대한 참회의 시인.
"참으로 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제가 저지른 죄악은 부정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며 변명의 여지가 없는 악한 일입니다. 나는 그것을 고백합니다. 나는 그것을 슬퍼합니다. 그것을 백일하에 끌어내신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입니다. 나는 죄를 범했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죄로 병들고 그 양심은 죄로 눌리어진 참회자의 언어이다. "나는 세상의 누구에게도 불평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내 자신에게 뿐입니다. 저주받은 물건은 나와 함께 있습니다. 나는 의의 길을 굽게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도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습니다." 더욱 더 악화된 것은 그 죄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대항해서" 저질러진 죄악이라는 것이다. 그도 이스라엘 족속의 한 사람이었으며 영광된 민족의 백성들과 더불어 그 특전을 나누어 가질 한 사람의 공유자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께 범죄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다. 따라서 이 죄는 그 범죄자를 가장 야비한 반역과 상상할 수 없는 배은망덕의 죄책 아래 놓이게 했다.
2. 사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
"여차여차히 행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바쳐진 물건의 일부가 없어져 버렸음을 일반적인 말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었다. 그런데 이제 그 자세한 품목들에 관한 이야기를 아간의 입을 통해서 끌어내신다 이렇든 저렇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혀가 그들 자신을 해하도록" (시 64:8) 하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자기 입으로 참회하게 하신다면 그 혀가 그들의 고발자가 될 것이며 그들의 일깨워진 양심은 수천의 증인을 대신해 줄 것이다. 참회자들이 하나님께 자기들의 죄를 고백할 때는 아주 구체적인 말이 필요하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저렇게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죄로 이끌리게 된 모든 동기들에 대한 뉘우침과 그 죄를 악화시킨 모든 환경과 그리고 "내가 이렇게 이렇게 행했습니다" 라고 하는 죄에 대한 모든 참회를 나타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는 고백한다.
(1) 도적질한 물건에 대해서.
여리고성을 노략할 때 그는 어떤 집에서 훌륭한 바벨론산의 송 한 벌을 발견했다. 여기에 사용된 말은 법의라는 말인데 그것은 제왕들이 왕좌에 나타날 때 입는 옷으로서, 아마도 이 옷은 여리고성의 왕의 옷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벨론에서 수입해온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채색옷" 이라고 번역한다. 그 옷이 어떤 것이었든 간에 아간의 눈에 그것은 아주 호화로운 전시품으로 여겨졌다. "이런 귀한 것을 불태워 버리다니, 말도 안돼" (라고 아간은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아무도 입지 못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만일 이 옷을 내가 가진다면 두고 두고 가장 좋은 옷으로 입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이러한 구실을 가지고 그는 대담하게도 이 물건을 불에 태우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니 그의 손은 계속해서 "200세겔" 즉 100온스의 은이 든 돈주머니에 가서 닿게 되었고 "50세겔" 즉 25온스의 "금덩어리" 에 가서 닿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을 취하게 된 이상 그는 이것들을 "불에서" 건져냈다고 하는 변명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왜냐하면 "은과 금" 은 여호와의 "곳간에" 쌓아두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죄를 짓는데 감히 사소한 구실을 갖다 붙이게 되는 자들은 두 번째는 이러한 구실 없이도 대담하게 죄를 범하게 될 정도로 마음이 완악하게 된다. 죄의 길은 내리받이 길이기 때문이다. 아간이 이 필사적인 모험을 감행한 그 보상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그리고 이 흥정 때문에 그가 당한 손실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잘 살펴보라(마 16:26 참조).
(2) 그는 자기가 그 물건들을 훔칠 때의 양상을 고백한다.
[1] 죄는 눈에서 시작했다.
그는 마치 이브가 금단의 과실을 보듯 이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았고 이상스럽게도 그 모양에 매혹당했었다. 눈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겪어야 할 마음의 고통을 살펴보라. 또한 만일 우리가 방황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그것 때문에 반드시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이 계약을 우리의 눈과 채결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살펴보라. "붉은 포도주를 쳐다보지 말며", 아름다운 여자를 눈여겨보지 말라. 너를 실족케 하는 이런 것에 대해 오른쪽 눈을 감아라. 그러면 그 눈을 뽑아 던져야 하는 일을 미리 막을 수 있을 것이다(마 5:28, 29).
[2] 그것은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왔다.
"내가 그것들을 탐내었습니다" 라고 그는 고백한다. 이와 같이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게 되었다. 죄짓는 행동에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자들은 죄의 욕망에서 스스로를 억제하고 재갈 먹어야 한다. 특별히 이 세상의 재물에 대한 욕망을 억제해야 되는데 우리는 이것을 특별히 "탐욕" 이라고 부른다. 오,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가 되느니라! 아간이 이 물건들을 신앙의 눈으로 보았더라면 그것들은 저주받은 것들임을 알았을 것이며 그리고 그것들을 두려워했었을 텐데 육욕의 눈으로만 바라보니 그것들이 아름다운 것들로 보이고 탐심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그를 파멸시킨 것은 보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육욕이었다.
[3] 그가 이 물건들을 범했을 때 그는 부지런히 그것들을 감추려고 했다.
금지된 물건들을 취하게 되자 그것들이 발각되지나 않을까 겁이 나서 자기가 얻은 물건을 감추어 두고 절대로 내놓지 않겠다는 결심의 하나로 그것들을 "땅속에 감추었다." 이처럼 아간은 사건의 전모를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리시는 선고를 정당화시켰다. "죄의 속임수" 를 살펴보라. 일을 저지를 때는 즐겁던 것이 되돌아보면 쓰라린 것이 되고, 마침내 그것은 뱀처럼 사람을 물어뜯고야 만다. 특별히 부정으로 얻은 재물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라.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자들이 어떻게 기만당하는가!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다시 토할 것이다" (욥 20:15).
Ⅳ. 유죄판결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제비를 뽑아서 그를 단죄했다. 그는 자기 입으로 고백함으로써 스스로를 단죄했었다. 아무리 이러한 절차에 대해서 불만을 품었던 이스라엘인이 있었다고 해도 이제는 더 구실이 필요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의 장막을 수색해서 그가 고백한 그 물건들을 찾아내도록 함으로써 더 깊이 그의 죄를 확증했다. 수색하도록 파견된 사자들이 급히 서두른 사실이 특별히 주목되어 있다. 그들은 "장막으로 달려갔다" (22절). 이것은 여호수아의 명령에 순종하는 그들의 신속성을 보여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장막에서 저주받은 물건을 찾아내어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이 얼마나 초조하게 움직이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깨닫는 자들은 죄를 멀리하는 일을 미루지 않으려고 마음을 쓰게 된다. 연기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머뭇거릴 시간은 없다.
훔친 물건들을 가져왔을 때 그것을 "여호와 앞에 두었다" (23절). 그것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아간에 대한 증거를 명백히 볼 수 있도록 해서 이와 같이 작은 물건들을 훔치는데 대해서 그토록 맹렬하게 형벌을 가하시는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과 또한 바쳐진 물건에 대해 자기의 권리를 견지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정의를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해서 영원히 이와 같은 종류의 범죄 행위를 백성들로 하여금 두려워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호와 앞에 그 물건들을 갖다 놓음으로써 그들은 그 물건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하고 이것들에 대해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렸다. 하나님을 속이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속일뿐이다. 하나님에게서 빼앗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이 도로 찾으실 것이며(호 2:9) 결과적으로 인간만이 손실자가 될 뿐이다.
Ⅴ. 정죄 받았다.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선고를 내린다(25절).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선고의 근거가 여기에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오 너는 우리를 얼마나 못살게 굴었는가!" 라고 읽기도 한다. 여호수아는 이 저주받은 물건을 가지지 못하도록 경고를 내릴 때 했던 "이스라엘 진으로 저주를 받거나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하라" 는 말을(6:18) 이야기한다. 죄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죄인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도 그렇다. "이를 탐하는 자는" 아간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집을 해롭게 할" 뿐만 아니라(잠 15:27), 자기가 속해 있는 모든 공동체들을 해롭게 한다. 이제 "하나님께서 너를 괴롭히실 것이다" (여호수아는 말한다). 아간이 이토록 심하게 처벌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괴롭게 했기 때문이다. 그의 머리 위에는 아합처럼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 아간" 이라고 하는 죄명이 씌어져 있었다(왕상 18:18). 그러므로 "하나님이 너를 괴롭히실 것이라" 고 하는 이것이 곧 그의 파멸인 것이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을 반드시 형벌로 갚아 주실 것" 이다(살후 1:6). 남을 괴롭히는 자들은 괴롭힘을 받을 것이다. 어떤 유대인 학자들은 "오늘" 그를 괴롭게 한다는 것은 오는 세상에서 고통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육은 멸망당해도 영은 구원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형벌은 실제로 그다지 흑심한 것이 못된다. 그가 저지른 죄악이나 혹은 그가 당한 형벌의 기사에서 그가 끼친 고통을 통해서 볼 때 아간 이라고 하는 그의 이름에 분명한 암시가 있다고 본다. 역대상 2장 7절에서는 그를 아갈 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괴롭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자기 이름에 들어맞았다.
Ⅵ. 형벌의 집행. 집행 유예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썩어빠진 지체는 즉시 짤라내야 한다. 그가 저주받은 인간이며 진영을 괴롭힌 자라고 하는 것이 증명되었을 때 모든 백성이 들고일어나 "없애 버리라. 죽여버리라. 그를 돌로 치라. 돌로 쳐죽여라" 라고 아우성치며 몰려들었을 것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1. 집행 장소
: 그들은 그를 진지 밖으로 끌어냈다. 이것은 "악한 인간을 그들과 멀리 떼어놓는다" 는 표시였다(고전 5:13). 우리 주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서 저주받은 몸이 되셔서 고통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게 하셨을 때 "영문 밖에서" 우리의 치욕을 지시고 저주받은 몸으로 고통을 받으신 것이다(히 13:12, 13). 형의 집행은 진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아간의 범죄로 교란된 진영이 그의 죽음으로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2. 그의 처형에 고용된 사람들
: 그것은 온 이스라엘의 행위였다(24,25절). 그들은 모두가 그 일의 참관자들이었다. 그것은 그들로 보고 두려워하게 함이었다. 공개 처형은 공공의 본보기가 된다. 나아가 그들 모두가 그의 죽음에 동의하고 있었으며 매우 많은 사람이 그의 처형에 적극적이었다. 그것은 아간의 신성 모독적인 행위를 그들이 다같이 가증히 여긴다는 표징이요, 그 일로 인하여 자기들에게 하나님이 분노하신 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징이기도 하다.
3. 아간과 함께 처형된 자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 죄악으로 망한 자가 그 사람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22:20).
(1) 도적질한 물건들이 함께 멸망되었다.
옷은 원래 여리고성 안에 있던 가소성 물질과 함께 불태워져야 했고 은과 금은 때려부수어 녹이고 파손하여 절대로 다른 곳에 사용되어지지 못하도록 아간의 다른 재물과 함께 "돌무더기" 아래 있는 한 잿더미 속에 묻혀야 했다.
(2) 그의 다른 모든 소유도 멸절되어졌다.
장막과 가구뿐만 아니라 "소와 나귀와 양들" 까지도 멸절되었다. 이것은 부당하게 얻은 재물들, 특히 신성모독으로 얻어진 재물들은 다른 곳에 이용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물건들이 덧붙여져 있던 여타의 소유물까지도 망하게 되고 황폐케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우화에 나오는 독수리가 제단에 놓여 있는 고기를 훔쳐 달아났는데 그 고기에 석탄 불이 붙어 있어서 자기의 둥우리를 모두 태워 버렸다는 것과 같다(합 2:9, 10; 슥 5:3, 4). 자기 몫보다 더 많이 긁어 모으려 하는 자는 자기 것까지 잃는다.
(3) 그의 자녀들도 그와 함께 처형되었다.
어떤 이들은 자녀들을 그들의 아버지의 처형에 참관자가 되도록 "이끌려져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24절).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도 그런 아버지와 함께 처형된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것은 25절이 의하는 바에 의지한 것이다. 거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을 돌로치고 그 후에 그들을 불태웠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통치자들이 아버지의 죄 때문에 자녀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분명히 말씀하시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은 그 율법에 구속당하지 않으신다. 이 경우에도 하나님은 범죄자와 그리고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불태우라고 분명히 명령하셨다(15절). 아마도 자녀들이 이 악행의 보조자와 교사자들이 되어 그 저주받은 물건을 훔치는 일을 도왔을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물건을 숨기는 일을 도왔을 것이라는 생각은 상당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사후(事後) 종범이 된 것이다. 만일 그들이 이 범죄에 지극히 적은 가담자였다고 해도 그것은 너무나 무서운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리하여 벌의 공유자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일로도 영광을 받으셨고 집행된 심판은 더욱 더 두려운 것으로 되었다.
4. 아간에게 가해진 형벌
: 그는 돌에 맞아 죽었다(어떤 사람들은 아간이 안식일 범법자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신성모독의 범죄가 안식일에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그의 몸은 저주받은 물건이므로 불태워졌고 조금도 남지 못하게 되었다.
이 처형에서 온 백성이 일치했다고 하는 것은, 악과 신성모독의 죄악을 제거하며 "죄악은 백성을 욕되게 한다" 는 태도를 새롭게 하려는 일을 위해서 자기들이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대한 국가적인 관심사인가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실제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돌을 던진 것이다.
5. 하나님의 진노가 누그러짐(26절).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셨다." 참된 회개와 개혁에 의해서 죄를 제거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며 그것만이 확실하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원인을 제거하라. 그러면 결과도 끝날 것이다.
Ⅶ. 아간의 정죄와 처형에 관한 기록. 후손들에게 경고와 교훈을 주기 위해서 이 일의 기억을 주의 깊게 보존해 두어야 한다.
1. 아간이 처형된 곳에 돌무더기가 쌓여졌다. 회중들이 하나씩 던진 돌이 무더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간의 범죄에 대한 증오의 표시가 되었다.
2. 그곳에 명칭이 새롭게 붙여졌다. 이것은 아간의 이름에 대한 영원한 모욕의 징표가 되었고,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소유에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영원한 경고가 되었다. 아간에 대한 이 엄숙한 처벌을 통해서 지금 초기 단계에 있는 여호수아의 통치의 명예는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고, 약속의 땅의 문턱에 서 있었던 이스라엘은 생명을 내걸고 그들이 움켜잡은 이 약속의 땅에 대한 단서와 조건을 지켜야겠다는 각성을 하게 되었다. "아골골짜기" 는 "소망의 문" 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들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저주받은 것들을 치워버릴 때 그때에 거기에는 이스라엘의 소망이 시작되기 때문이다(호 2:15; 스 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