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7월 26일 화요일 묵상구절 수8:1-29 아이 성을 점령하다

하나지기 2022. 7. 26. 09:31

맥체인 성경읽기

사사기9, 사도행전13, 예레미야22, 마가복음8

묵상구절

8: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8:2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 너는 아이 성 뒤에 복병을 둘지니라 하시니

8:3 이에 여호수아가 일어나서 군사와 함께 아이로 올라가려 하여 용사 삼만 명을 뽑아 밤에 보내며

8:4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성읍 뒤로 가서 성읍을 향하여 매복하되 그 성읍에서 너무 멀리 하지 말고 다 스스로 준비하라

8:5 나와 나를 따르는 모든 백성은 다 성읍으로 가까이 가리니 그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에게로 쳐 올라올 것이라 그리 할 때에 우리가 그들 앞에서 도망하면

8:6 그들이 나와서 우리를 추격하며 이르기를 그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 앞에서 도망한다 하고 우리의 유인을 받아 그 성읍에서 멀리 떠날 것이라 우리가 그들 앞에서 도망하거든

8:7 너희는 매복한 곳에서 일어나 그 성읍을 점령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너희 손에 주시리라

8:8 너희가 그 성읍을 취하거든 그것을 불살라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였느니라 하고

8:9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매복할 곳으로 가서 아이 서쪽 벧엘과 아이 사이에 매복하였고 여호수아는 그 밤에 백성 가운데에서 잤더라

8:10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백성을 점호하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더불어 백성에 앞서 아이로 올라가매

8:11 그와 함께 한 군사가 다 올라가서 그 성읍 앞에 가까이 이르러 아이 북쪽에 진 치니 그와 아이 사이에는 한 골짜기가 있더라

8:12 그가 약 오천 명을 택하여 성읍 서쪽 벧엘과 아이 사이에 매복시키니

8:13 이와 같이 성읍 북쪽에는 온 군대가 있고 성읍 서쪽에는 복병이 있었더라 여호수아가 그 밤에 골짜기 가운데로 들어가니

8:14 아이 왕이 이를 보고 그 성읍 백성과 함께 일찍이 일어나 급히 나가 아라바 앞에 이르러 정한 때에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나 성읍 뒤에 복병이 있는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8:15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그들 앞에서 거짓으로 패한 척하여 광야 길로 도망하매

8:16 그 성읍에 있는 모든 백성이 그들을 추격하려고 모여 여호수아를 추격하며 유인함을 받아 아이 성읍을 멀리 떠나니

8:17 아이와 벧엘에 이스라엘을 따라가지 아니한 자가 하나도 없으며 성문을 열어 놓고 이스라엘을 추격하였더라

8:18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넘겨 주리라 여호수아가 그의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그 성읍을 가리키니

8:19 그의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그들의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성읍으로 달려 들어가서 점령하고 곧 성읍에 불을 놓았더라

8:20 아이 사람이 뒤를 돌아본즉 그 성읍에 연기가 하늘에 닿은 것이 보이니 이 길로도 저 길로도 도망할 수 없이 되었고 광야로 도망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그 추격하던 자에게로 돌아섰더라

8:21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그 복병이 성읍을 점령함과 성읍에 연기가 오름을 보고 다시 돌이켜 아이 사람들을 쳐죽이고

8:22 복병도 성읍에서 나와 그들을 치매 그들이 이스라엘 중간에 든지라 어떤 사람들은 이쪽에서 어떤 사람들은 저쪽에서 쳐죽여서 한 사람도 남거나 도망하지 못하게 하였고

8:23 아이 왕을 사로잡아 여호수아 앞으로 끌어 왔더라

8:24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광야로 추격하던 모든 아이 주민을 들에서 죽이되 그들을 다 칼날에 엎드러지게 하여 진멸하기를 마치고 온 이스라엘이 아이로 돌아와서 칼날로 죽이매

8:25 그 날에 엎드러진 아이 사람들은 남녀가 모두 만 이천 명이라

8:26 아이 주민들을 진멸하여 바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고

8:27 오직 그 성읍의 가축과 노략한 것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이 탈취하였더라

8:28 이에 여호수아가 아이를 불살라 그것으로 영원한 무더기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황폐하였으며

8:29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 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 질 때에 명령하여 그의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

 

매튜 헨리 / 옥스퍼드

▶ 아이성 공격령 (여호수아 8:1,2)

👀 아이 성 재공격 명령과 정복 작전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아이성 제 1차 공격 당시 하나님께 묻지도 하나님의 지시도 받지 않고 스스로 공격을 개시했던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이번 제 2차 아이 성 공격은 틀림없어 성공하게 될 것을 시사해 줄니다. 참으로 죄는 모든 것을 망치고 잃게 하지만 죄에서 돌이킬 때 하나님은 모든 은혜를 다시 허락해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아이성 정복 작전으로 지시하신 것은 매복 작전이었습니다. 따라서 아이 성 전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이적에 의존한 여리고 성 전투와는 달리 인간적인 수단이 동원되었습니다. 물론 아이 성 전투나 여리고 성 전투 모두 하나님에 의해서 전략이 수립되었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의 상황에 따라 적절한 방법으로 도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같은 지휘관을 둔 이스라엘은 너무나 행복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지휘관으로 모신 여호수아는 더욱 행복했었다. 여하한 난관이 생긴다고 해도 그는 자기의 물음이 응답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질문을 미리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너무나 가까이"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전략 회의를 소집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여호수아는 기로에 서 있었다. 아간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준 충격의 소용돌이에서 여호수아는 아직 완전히 평정도 되찾지 못한 상태에서 과연 아무런 두려움도 떨림도 없이 전진해 나갈 수는 없는 것 같았다. 이스라엘 진 가운데 또 다른 아간과 같은 사람이 있을지 누가 알랴!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 말씀하셨다. 이전처럼(5장) 칼을 뽑아든 전사의 모습으로 보여준 환상이든 혹은 판결 흉패로든 간에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까지는 절대로 안 된다. 또한 기독교인이 그의 사역과 전장에서 어떻게 계속해 나갈 것인지를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지시해 주셔야 그가 우리와 화해되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 7:10과의 비교

7:10 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찾아 오셔서 말씀하신 상황은 아이 성 공격에서 실패한 이스라엘과 여호수아가 절망 가운데 있을 때였다. 이 때에 백성들은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었고(7:5), 여호수아는 옷을 찢고 티끌을 무릅쓰고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려 탄식했다(7:6-9).

그때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셔서 아이성 전쟁에 실패한 원인을 밝혀 주셨다(7:11). 그래서 범죄한 아간을 처형하여 (7:24-26), 정복 전쟁을 수행하는 그의 선민 이스라엘이 영적 순결을 회복하도록 하셨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루어지자 여호와께서는 본문에서 다시 두번째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말씀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을 계속 수행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것이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적절한 때에 자신의 목적과 뜻을 이루기 위하여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백성이 위기에 처할 때 그리고 죄를 근절하고 성결케 된 이후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그의 백성들에게 먼저 찾아오셨던 것이다.

우리는 가나안 정복 초기에 있었던 아이성 전투에서의 실패와 승리, 그리고 신앙의 실패와 회복을 기록한 7,8장을 하나의 단락으로 볼 때, 그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셨던 시점그 정황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언약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삶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죄를 근절해야 한다는 것, 즉 성결에 대한 강조의 말씀이며 (7:10), 또한 언약의 성취를 위한 싸움, 즉 믿음의 전진에 대한 말씀이다(8:1).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싸워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깨끗게 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결하지 못한 성도는 승리하여 영적 진보를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성도가 영적으로 진보하는 삶을 사는 것을 보시기 위해 하나님은 오늘도 믿는 자의 거룩한 삶에 대해 말씀하시고 문제를 삼으시는 것이다.

 

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진군하도록 격려하심.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1절).

이 말로 미루어 보아 아간의 죄와 그 결과가 여호수아에게 얼마나 큰 실망을 안겨 주었는지 그의 마음이 거의 절망 상태에 빠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교회내의 부패는 외부의 적대자들보다도 훨씬 더 교회의 인도자와 조력자들의 손길을 약화시키고 사기를 꺾어 놓는다. 반역적인 이스라엘 백성은 악질적인 가나안 족속보다도 훨씬 더 두려워해야 할 바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낙담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그들의 원수의 파멸적 행위에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바로 그 능력이 그들을 스스로 파멸시키는 행위에서도 지켜 주실 것이다.

👀 이때 이스라엘 가운데 엄습한 두려움은 전쟁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이제 자신들과 함께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 즉 하나님의 임재가 더 이상 없는 자신들의 상황에 대한 총체적인 절망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범죄자 아간이 처벌되어 죄의 근원이 근절되자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던 하나님은 극렬한 분노를 그치셨고(7:26), 이제 당신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여호수아에게 확신시킬 필요가 있으셨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된 말씀의 내용은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두 정탐꾼을 보낼 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신 1:21),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지도권을 넘겨즐 때(신 31:8), 모세가 죽은 직후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동일하게 직접 하신 말씀이다(1:9). 따라서 여호수아에게는 이 격려의 말씀이 귀에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대적들에게 패하여 용기를 잃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이미 여러 번 주신 바 있는 ‘내가 너희들과 함께할테니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시의적절하게 용기를 복돋아 주셨던 것이다.

 

여호수아에게 용기를 주시기 위해서

1. 하나님은 아이성에 대한 승리를 확신시켜 주시며, 그 성은 전적으로 그의 것이며 오직 여호수아는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그를 너희 손(야드)에 주었도다."

그것은 여호수아에게 그 성에 대한 권리와 소유를 모두 주셨다는 말이며 오직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뿐이었다(시 44:3).

2.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탈취물을 소유하도록 허락하신다.

이성의 노략물은 여리고성의 것들처럼 하나님에게 바쳐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 성에서는 여리고성을 탈취할 때와 같은 범죄가 일어날 위험이 없었다. 금지된 탈취물을 훔쳤던 아간은 그의 생명과 전부를 잃었지만 바쳐진 물건에 대해 양심적으로 행동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순종에 대해 얼마나 빨리 아이성의 노략물로 보상을 받게 되는지 살펴보라.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바의 위로를 받는 길은 그가 우리들에게 금하시는 바를 삼가는 것이다. 자기를 부정함으로 손해를 보게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먼저 하나님에게 응분을 돌리고 나면 인간들의 모든 것이 분명하고 확실해질 것이다(왕상 17:13).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 "아름다운 성" 으로 그리고 "모든 좋은 것들로 가득찬" 집들로 이끌어 들이실 때 그림의 떡처럼 모양만 보고 애태우라고 이끌어 들이신 것이 아니다. 여리고성의 것은 첫 열매로 받으시고 아이성과 그리고 그 후에 그들의 손에 들어오는 모든 성읍들의 노략물들은 그들의 탈취물로 가지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 일반적으로 고대 근동에서는 전쟁중에 전리품이나 노획물을 취하는 것은 하나의 관습이었다. 하나님께서도 가나안의 일곱 족속에 포함되지 않은 민족과의 전투에서는 이스라엘이 여자, 어린이, 가축, 그리고 가치있는 물품이 포함된 전리품을 취득하는 것을 허용하셨다(신2 :34,35; 20:14.15).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으로 허락하신 가나안에 거주한 일곱 족속과 전쟁할 경우에는 가축과 물건들은 취하되 모든 사람을 다 죽이라고(신 20:16-18) 명하셨다.

이스라엘이 그들을 진멸하지 않으면 가나안의 우상 숭배 문화를 본받아 하나님을 떠나고 멸망의 길로 빠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사견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반면 가나안 정복의 첫관문인 여리고 성에서는 전리품 획득까지도 금지했는데(6:21,24) 그것은 여리고가 헤렘으로서 여리고의 전리품은 첫열매로 여호와 하나님께 모조리 바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가나안에서 앞으로 전개될 모든 전쟁의 승리와 모든 전리품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전쟁에서의 전리품 획득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전리품 획득은 전쟁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이며, 시간적으로 전쟁의 마지막 과정에서 행해진다. 이 전리품을 획득하는 순간은 전쟁중의 피비린내 나는 아비규환에 비하면 축제와 기쁨과 영광이 있는 과정이다. 특히 가나안 정복 전쟁이 언약 백성에게 있어서 언약 성취의 과정이라면 전리품 획득은 언약이 성취된 기쁨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리품 획득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순종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주어지는 축복이다.

 

Ⅱ.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아이성의 공격법을 지시하심.

이 일은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처럼 시간을 들여서는 안 된다. 이런 방법은 전쟁을 너무 오래 끌고가게 할 뿐이다.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 7일간을 끈기 있게 기다린 자들에게는 아이성은 하룻만에 주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아이성은 여리고성처럼 순수한 하나님의 행위로 기적에 의해서 점령되어질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이들의 행위와 용기가 행사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해서 역사하심을 만들었으면 이제 그들도 스스로 분발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에게

1. 그들 모두가 탈취물을 취하는 일에 참여하고 행동하는 참여자가 되도록 온 백성을 동원하라고 지시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전에 아이성을 공격할 때 소부대를 파견한 일에 대해 말없는 꾸중을 하셨다(7:4).

2. 성 뒤에 복병을 배치할 것을 지시하신다.

이 방법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시지 않으셨다면 여호수아가 당시로는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은 그런 방법이었을 것이다. 비록 현재의 우리는 여호수아처럼 환상이나 음성이나 혹은 신탁에 의한 어떤 지시를 기대할 수 없다고 해도 공의회를 맡은 사람들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사려있는 제도를 시행해 나간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그렇게 하신 걸로 인정해야 한다. 농부에게 지혜를 가르치시는 그분은 분명 정치가나 장군도 가르치신다.

👀 매복을 통한 기만 전술은 치밀한 준비와 빠른 기동력이 요구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기적만을 바라거나 교만하지 않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사역은 외관상 이처럼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전권으로 행하시는 기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인간의 자발적인 참여와 헌신, 그리고 철저한 준비를 통해서 나타난다.

▶ 아이성의 함락 (여호수아 8:3-22)

우리는 본 장에서 전략적으로 아이성을 치는 이야기를 보게 된다. 여기에 사용된 전략은 정당하고 좋은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신 것이므로 우리는 다른 전쟁에서도 이와 같은 것은 정당하고 좋은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협정이 위반된 것이나 약속이나 맹세가 파기된 것이나 혹은 그와 비슷한 일이 저질러지지 않았다. 협상구실이나 평화조약 따위의 구실을 만들어 이러한 유리한 전세를 얻어 낸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것들은 신성한 일들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장난 삼아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차례로 서브를 넣는 것과 같은 것도 아니었다. 진실이란 일단 약속되면 적에게라 할지라도 지켜야 할 부채가 된다.

그런데 이 전략에서는 비진실이라고 할 만한 것이라곤 없었다. 자기들의 계획 이외에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이 계획은 적이 감히 공유할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속이지도 않았고 후퇴 이외에 아무것도 위조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후퇴라는 것도 공격을 계속할 수가 없어서 내린 당연한 혹은 필연적인 지령도 아니었다.

적들은 분명 감시병들을 두고서 성을 방어하도록 했어야만 했었다. 그들이 상식적인 사려만 있었더라도 자기들이 눈으로 추격하느라고 성을 무방비 상태로 버려두는 그런 모험을 감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백성들이 속기를 원한다면 속게 하라) 가나안 사람들이 그토록 쉽사리 속아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추격하느라고 전쟁의 모든 규칙과 합리적인 경영도 파기한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들의 분노와 경솔을 이용해서 우세한 입장을 견지한다고 해서 조금도 나무랄 일이 못된다. 또한 이 일은 하나님께서 "거짓을 행하지 않는 자녀들" 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그 특성과도 절대로 모순되지 않는다.

👀 ‘다 스스로 예비하라(4절)’

본문은 악한 자들과 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백성들로 최선을 다하여 그들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람이 온갖 것을 예비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앞장서서 전쟁을 수행하지 않으시면 전쟁에 승리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은 분명한 진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준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오히려 전혀 준비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믿음의 자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일하기를 기뻐하시며 준비된 자를 사용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사실 여리고 성에 대한 전쟁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제로 전쟁에 대한 전술적인 방범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다. 이와는 달리 아이 성에 대한 싸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철저한 준비를 요구하고 계신다. 물론 싸움의 승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철저한 준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준비된 전쟁에 의해서 성취될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 일을 이루시려고 하신 것이다.

성도 역시 일상 생활에서부터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을지라도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성실한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이 행하는 일의 모든 결과는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잠 21:31).

 

본문의 이야기에 따라 아래의 문제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Ⅰ. 이 일을 효과 있게 성취시키기 위해서 선발된 숫자에 약간의 난점이 있다.

본문에 따르면(3절) "용사 30,000명을 뽑아 밤에 보내며" 라고 되어 있다. 이들에게는 성이 비워지는 순간 성을 놀라게 할 책임이 주어졌었다(4,7,8절). 그런데 그 후에 보면(12절), 여호수아가 "5,000명을 택하여" 성 뒤에 "복병으로 매복시켰다" 라고 되어 있으며, 이들은 성으로 들어가 성을 "불지르도록" 되어 있었다(19절).

1. 어떤 사람들은 복병으로 파견된 것이 2개 부대라고 한다. 즉 처음에는 30,000명을 보내고 후에 또 길목들을 지키고 서서 목숨이나 건지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도망치는 것을 가로막기 위해서 혹은 처음 파견된 자들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5,000명을 더 보냈으며 그리고 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군사 전체를 데리고 노골적인 공격을 한 것이라고 한다. 석학 패드릭(Patrick) 감독도 "군사를 다 거느리고" (1절)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가지고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2.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 앞에 진을 쳤을 뿐이며 그들 중에서 여호수아가 30,000명을 선발해서 행동 부대로 만들고 그 중에서 5,000명을 복병으로 매복하도록 파견했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의 숫자라야 발각되지 않고 행군할 수 있었을 것이다(더 많은 숫자는 발각될 가능성이 많으며 그렇게 되면 계획은 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25,000명을 데리고 여호수아는 공개적인 공격을 했다고 생각한다(Masius). 그러나 칼빈은 공격의 목적으로 30,000명을 데리고 있었고 이 30,000명 외에 5,000명을 복병 부대로 파견했다고 본다. 이들이 생각하는 바에 따르면 이 5,000명이 비록 구체적인 숫자는 12절에 가서야 명기되지만 성 뒤에 매복해서 기다리도록 "밤에 보낸" (3절) 바로 그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만일 우리가 이 이야기의 순서에서 이와 같은 외관상의 혼란을 인정한다면 복병은 5,000명으로 구성된 한 부대뿐이었을 것이며 이 정도면 이러한 목적으로는 충분했을 걸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Ⅱ. 그러나 이야기의 줄거리는 아주 분명하다. 즉 파견된 부대는 성 뒤쪽으로 몰래 진격해 갔고 성 바른편 쪽에는(이러한 상황은 매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 여호수아와 그와 함께한 부대가 성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이성의 주둔 부대는 이들을 향해 사기충천하게 공격을 감행했고, 따라서 이들은 물러서고 또 물려서며 마침내는 교란된 모습을 드러내고 광야 길로 무질서하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아이성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을 눈치채게 해서 군대를 총동원해서 이스라엘 군대를 추격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계획은 적중되고, 복병으로 매복되어 있던 부대는 적기에 성을 장악한 후 여호수아와 그와 함께 한 부대에게 연기로 신호를 보냈었다. 이와 더불어 여호수아의 부대는 되돌아서서 추격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이성 사람들이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나 늦었었고 그들의 퇴로는 차단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살육 당했었다. 이와 비슷한 사례를 사사기 20장 30이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아래의 사실들을 찾아 볼 수 있을 줄로 안다.

1. 여호수아가 얼마나 용감한 지휘관인가 하는 것이다.

(1) 그의 행동과 사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성 뒤에 복병을 매복시키도록 힌트를 주셨다(2절). 그러나 자세한 명령을 내리는 일은 여호수아에게 일임하셨다. 그 일을 그는 아주 잘 해 내었다. 그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지혜자로서 열 사람의 장군보다도" 더 능력이 있었다(전 7:19).

(2) 그의 관심과 근면(10절).

그는 시간을 잃지 않으려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그것은 그의 마음이 얼마나 이 일에 관심을 두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영적 전투를 계속해 나가려는 사람들이 안일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3) 그의 용기와 결단.

비록 이스라엘 족속의 한 부대가 아이 사람들 앞에서 패한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두 번째 몸소 부대를 통솔하고 싸우러 나갈 결심을 하고 있다(5절). 그는 또한 장로의 몸으로써 이스라엘의 장로들도 그와 함께 이 공격에 가담하게 한다(10절). 이러한 여호수아의 모습은 적으로서의 그들과 싸우러 나간다기보다는 그들을 범죄자들로 심판하러 가는 모습과도 같다.

(4) 그의 용의주도함(13절).

그는 공격에 필요한 군대의 배치를 위해서 그리고 모든 것이 질서대로 움직이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 밤에 골짜기 가운데로 들어갔다. "석학 패트릭(Patrick) 감독은 여호수아가 이 일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도록 기도하기 위해서 혼자 골짜기로 들어갔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5) 그의 견인.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향해서 그의 창을 내밀었을 때(18절) (이 창은 마치 모세의 지팡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원수들에게 있어서는 무섭고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결코 그 손을 내리지 않았다. 전투에서의 그의 손은 마치 중보의 기도를 드리던 모세의 손처럼 해가 질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영적 원수들을 대적해서 손을 내민 사람들도 절대로 그 손을 돌이켜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여호수아가 전략으로 실행한 것은 그가 모형이 된 우리 예수님에게도 그대로 일치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마치 자기가 정복된 자처럼 해서, 즉 패배를 통해서 이겼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 예수께서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떠나가셨을 때 마치 죽음이 그에게 승리하고 그와 그의 모든 관심사가 파괴되고 실패되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서 그가 다시 소생하사 어둠의 권세들을 철저하게 소탕하시고, 발 뒤굼치에 상처를 받으심으로 뱀의 머리를 때려부수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전략인가!

2.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순종을 잘했는가 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명령하는" 바를(8절) 그들은 불평이나 원망없이 그대로 했었다.

벧엘과 아이 사이에 복병으로 잠복하도록 파견된 무리들은(이 두 도시는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서 동맹하고 있었다) 위험한 지역에 처해 있었으며 만일 발각되는 날에는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었으나 그들은 그런 모험을 견디었다. 이스라엘 군대도 퇴각하고 도망치는 마당에서 그것은 창피스럽고 위험한 짓이었지만 여호수아에게 순종하며 그대로 했었다.

3. 아이성의 왕이 얼마나 얼간이었느냐 하는 것이다.

(1) 그는 척후병들을 통해서 성 뒤에 매복되어 있는 복병들을 찾아보지 않았다(14절).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자기들의 영화에 도움이 되는 것들도 분별하지 못하도록 눈멀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자기들을 노리는 복병을 알지 못하게" 하신 사건은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드러낸 한 실례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자기가 어떤 형편에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가장 위험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다.

💡 그 성읍 백성과 함께

‘에노쉬’ : ‘개인, 사람’이라는 뜻. 인간의 약함이나 인간성을 부각시키는 단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 차이를 강조하는 표현. 그런 의미에서 본문이 아이 성의 백성들을 ‘에노쉬' 라고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는 이스라엘 백성과 대조적인 그들의 신분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에노쉬'로서의 아이 성 백성 (군사)들은 그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해 용감히 싸울지라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와 지지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 군사들을 물리치기에는 너무나도 무기력하고 나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에노쉬'로서의 아이 성 군사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가나안 땅에서 추방 당하게 될 가나안 일곱 족속의 무상한 운명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2) 이스라엘 백성이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자, 성을 지키거나 혹은 퇴로를 혹보하기 위한 군사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온 군대를 동원해서 이들을 추격하게 했다(17절). 이와 같이 교회의 원수들도 때로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자기들 스스로의 분노와 난폭 때문에 자멸하는 수가 있다. 바로도 이스라엘을 추격하는 데 정신이 팔려 홍해에 자기 자신을 던졌다.

(3) 전번 공격 때 이스라엘군 3,000명중에서 36명을 죽였다고 해서 지금 그가 싸워야 하는 이스라엘의 이 막강한 군대를 모두 죽여 없애버릴 것으로 생각했다(6절).

"그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 앞에서 도망한다." 어리석은 자의 번영이 얼마나 스스로를 파멸시키며 스스로 파멸하도록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라. 하나님께서는 아이성의 사람들을 바쳐진 물건에 손을 대는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는 채찍으로 사용하시었었다. 이 일이 이들로 하여금 자만심에 부풀게 해서 이 무서운 침입자들로부터 자기들의 나라를 구원하는 영광을 차지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자기들의 실수를 목격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하나님과 화해되었을 때 이들을 대항할 수 있는 힘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이스라엘을 꾸짖기 위한 목적을 위해서 이들을 이용하셨을 뿐이며, 일들이 바로 되어지자 그 막대기는 불에 던져질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뜻은 이같이 아니하며 그의 마음의 생각도 이같이 아니하고 오직 그 마음에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도다" (사 10:5-7).

4.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이스라엘이 아이성을 치고 얼마나 완전한 승리를 얻었는가 있는 것이다.

각각 자기들이 맡은 일을 잘 해냈다. 양쪽으로 나뉘어 있던 이스라엘 군대는 약정된 신호에 의해서 서로서로 연락이 되었고 모든 일들은 계획된 대로 성공되었다. 따라서 승리를 자신했던 아이성 사람들은 자기들이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대항할 힘도 달아날 곳도 없었다. 오직 자기들의 목숨을 침입자들에게 내어 맡기는 불가피한 운명 아래 놓이게 될 뿐이었다.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의 함성과 아이성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어느 것이 더 큰지 말하기는 어려울는지 몰라도 그토록 의기양양했던 그들이 이토록 어두운 절망에로 별안간 떨어지게 되었을 때 그들의 마음 속에 넘쳐흘렀을 공포와 혼란이 어느 정도였을 것이라는 것은 상상하기 쉬울 줄로 안다. 악인의 승리는 잠깐이다(욥 20:5). 그들이 "높아지는 것은 잠시뿐이며" 더 무서운 파멸과 몰락에 빠지게 될 것이다(욥 24:24).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모시지 않은 자들에게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쉽사리 파멸이 오는지 살펴보라.


▶ 아이 성의 완전 몰락 (여호수아 8:23-29)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 성을 점령하고 승리를 거둔 내용에 관해 계속해서 읽게 된다.

1. 그들은 모든 것을 칼로 진멸했다.

들판에서뿐만 아니라 성중에서도 그렇게 했으며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도 그렇게 했다. 살아남은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24절).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이 악한 사람들에 대해서 이와 같이 선고를 내리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심부름꾼일 뿐이며 하나님의 파멸의 선언에 대한 집행자들이었을 뿐이었다.

💡 ‘칼’은 구약 성경에서 대부분 전쟁의 문맥에서 사용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을 향하여 칼을 직접 드시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며 (5:13; 6:2; 신33:2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배후에서 싸우시는 것을 묘사할 때도 하나님께서 칼(헤레브)을 드시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사31:8; 37:36). 본문의 문맥에서는 물론 이스라엘 군사들의 칼날이 아이 거민들을 살륙한 것으로 나오지만 이러한 용례들로 볼 때 그 칼날의 움직임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아이 성 거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칼에 의해서 진멸당하는 심판을 받았던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만 단 한번 벧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이 사람들과 동맹을 맺은 걸로 나타나 있다(17절).

이들은 자기들의 왕을 모시고 있었으며(여호수아가 죽인 31왕들 가운데 벧엘 왕이 계산되어 있는 걸로 봐서) 아이 왕에게 속해 있지는 않았다고 해도(12:16) 아이 성이 더 강한 성이기 때문에 이들은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의 손을 더 강하게 하기 위해서 가담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우리가 생각건대는) 이들도 모두 진멸 당했었다. 이처럼 자기들의 파멸을 막으려고 한 짓이 도리어 파멸을 더 빨리 촉진시켰을 따름이었다. 살육 당한 사람 전체가 12,000명으로 나와 있는데 이 숫자는 이스라엘 수만의 군대를 대항하기에는 상대가 안되는 집단이다.

하나님께서는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자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신다.

💡 25절, 그날에 아이 사람의 전부가 죽었으니 …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에서 이스라엘이 기업으로 받을 땅 가나안에서 코로 숨을 쉬는 자는 남녀 노유를 가리지 말고 다 죽여야 할 것을 말씀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를 온전히 순종한다(신 20:16,17).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은 그의 자비로우신 성품에 비추어 보았을 때(출34:6) 모순된 것 같고 너무 가혹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므로(신20:18) 오히려 죄악과 우상 숭배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잘 반영한 것이다. 더불어 이는 가나안 땅을 죄의 그늘이 없는 거룩한 땅으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잘 반영한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26절) "여호수아는" 살육이 끝날 때까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다" (18절).

어떤 이들은 여호수아가 내밀고 있었던 그 창은 적을 진멸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군대를 격려하고 힘을 내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어떤 종류의 깃발이나 혹은 휘장이 그 창끝에 매어져 있은 걸로 생각한다. 또한 어떤 이들은 여호수아의 이러한 행동을 자기 부정의 실례로 생각한다. 그의 가슴에 끊어 오르는 용기의 불길은 그로 하여금 손에 칼을 잡고 앞으로 달려 나아가 열전을 감행하도록 자극했지만 그는 하나님에게 순종해서 깃발을 들고 선 보잘 것 없는 자리를 그대로 지켰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 일을 그만두지 않았었다. 창을 내밀어서 그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을 기대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지도했다.

2. 그들은 성을 약탈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노략물들을 마음대로 가졌다(27절).

이처럼 죄인의 재물은 의로운 자를 위해서 쌓이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이웃에서 얻은 노략물들을 그들은 광야에서 보살펴 준 회막을 짓는데 그 대부분이 바쳐졌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여기서 이자까지 붙여 도로 받게 된 것이다. 아마도 여기서 탈취한 노략물들도 모두 함께 모아져서 미디안족을 쳤을 때처럼 여호수아가 적절한 비율로 나누어주었을 것 같다(민 31:26 이하). 무질서하게 그리고 무법적으로 마구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와 공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3. 그들은 아이성을 잿더미로 만들고 또 그대로 남아있게 했다(28절).

이스라엘은 아직 장막에 거주해야 한다. 그러므로 여리고와 마찬가지로 이 도시도 불태워 버려야 한다. 비록 이 성을 재건하는 자에게 따르는 저주는 없었다고 해도-우리가 오랜 후에 읽게 되는 아이성이 바로 이 도시가 아니라면-재건되지 않았을 걸로 본다(느 11:31).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이 이 성에서 한번 패했기 때문에 도시의 폐허 속에 그 기억을 묻어 버리기 위해서 절대로 이 성을 재건하지 않았을 걸로 생각하기도 한다.

4. 아이성의 왕은 포로로 잡혀 와서 죽임을 당했는데 전사로서 전쟁의 칼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의의 칼에 의해서 악인으로 죽임을 당했다.

여호수아는 그를 목메어 달도록 하고 그의 죽은 시체를 아이성문에 던져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도록 명령했다(23,29절). 이토록 가혹하게 아이성의 왕을 다룬 데는 틀림없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짐작컨대 그는 소문난 악인이었고 아마도 이스라엘 군대의 첫 번 공격시에 그들을 물리친 일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그의 시체가 던져진 바로 그 성문에서 그는 재판 자리에 앉아 그가 그토록 자랑했던 그 위엄으로 수많은 불경스러운 짓들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불의의 판결에 대한 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가 집행하시는 심판을 통해서도 자기를 나타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