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열왕기하 25, 히브리서 7, 아모스 1, 시편 144
묵상구절
14:1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로 건너가자 하고 그의 아버지에게는 아뢰지 아니하였더라
14:2 사울이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렀고 함께 한 백성은 육백 명 가량이며
14:3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으니 그는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었던 엘리의 증손이었더라 백성은 요나단이 간 줄을 알지 못하니라
14:4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건너가려 하는 어귀 사이 이쪽에는 험한 바위가 있고 저쪽에도 험한 바위가 있는데 하나의 이름은 보세스요 하나의 이름은 세네라
14:5 한 바위는 북쪽에서 믹마스 앞에 일어섰고 하나는 남쪽에서 게바 앞에 일어섰더라
14:6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14:7 무기를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14:8 요나단이 이르되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이리니
14:9 그들이 만일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하면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에게로 올라가지 말 것이요
14:10 그들이 만일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넘기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 하고
14:11 둘이 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이매 블레셋 사람이 이르되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들이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14:12 그 부대 사람들이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 있느니라 한지라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느니라 하고
14:13 요나단이 손 발로 기어 올라갔고 그 무기를 든 자도 따랐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지매 무기를 든 자가 따라가며 죽였으니
14:14 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가 반나절 갈이 땅 안에서 처음으로 쳐죽인 자가 이십 명 가량이라
14:15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앞장에서는 사울 왕과 그를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블레셋의 막강한 군사력과 비교할 때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상태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놓인 이스라엘에게 작은 희망의 불빛으로 제시된 사건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요나단이 단독으로 출전하여 블레셋 진영을 공격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본장은 앞장인 제13장과 여러 가지 면에서 연결된다.
우선 제13, 14장이 모두 요나단의 선제 공격을 사건의 발단에 소개함으로써 요나단을 부각시키고, 상대적으로 사울 왕을 비관적 시각에서 묘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요나단은 능동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는 구원자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정작 이스라엘의 구원자 역할을 하여야 할 사울 왕은 군사들이 도망가는 것을 방관할 수밖에 없고 군사나 계수하는 수동적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외세의 침략에 강하게 대처하기 위한 목적에서 그들이 요구한 왕이 자신들과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블레셋과의 전쟁이 벌어지기도 전에 도망가고 떨며 숨어버리는 어스라엘 백성들의 연약한 모습은 본장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사울이 사무엘로부터 1차 왕위 폐위를 선고받은 제13장과 결정적인 2차 왕위 폐위를 선고받는 제15 장 사이에 위치한 본장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불신앙적인 사울 왕의 모습이 어떻게 확대되어 다음 사건으로 이어지는지를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서 득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이렇게 사울의 불신앙을 부각시켜 보여주는 긴 이야기에서 가교의 역할을 하고 있는 본장은 신앙적 용기를 가진 요나단이 단독으로 블레셋을 공격하여 큰 견과를 올리고 지금까지 열세에 놓여 있던 전황을 바꾸어 놓은 전환적 사건을 다루는 1-15절로 시작된다.
블레셋의 군사들은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은(13:5) 반면에, 이스라엘군은 600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사울을 비롯한 이스라엘 군사들은 이미 전의를 잃은 상태였다. 그들은 감히 블레셋 군대에 대항하여 맞서 싸울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지만 사울의 아들 요나단만큼은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는 그의 병기 든 소년과 함께 단 둘이서 블레셋의 진영에 뛰어들 만큼 용감하였다.
그렇다면 요나단이 블레셋의 진으로 향하면서,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그 사실을 고하지 아니한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그의 작전어 성공하기 험든 것이었기에 사울의 소심한 성격상 요나단의 공격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면, 기습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나단은 이 사실을 백성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3절). 한편 저자는 요나단이 아비 사울에게조차도 자신의 출전 사설을 숨겼다는 본문의 언급을 통하여 사울이 요나단을 통한 여호와의 구원 사역에서 완전히 배제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요나단의 블레셋 진영 공격(사무엘상 14:1-15)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Ⅰ. 우리는 블레셋 사람들의 힘을 제한시켜 놓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비해 사울과 함께 한 백성들은 수적으로도 적었으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리하여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단번에 통째로 삼켜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원수들이 가지고 있는 적개심을 묶어버리며, 제한시키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Ⅱ. 우리는 사울의 연약함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나타난 사울은 어쩔 줄을 몰랐으며 조금도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1. 사울은 한 나무 아래 장막을 치고 있었으며, 다만 6백 명 가량의 인원이 그와 함께 있었다(2절).
그가 선택하고 신뢰하였던 3천 명의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갔는가?(13:2)
그가 절대로 신임하였던 그 사람들은 그가 그들을 꼭 필요로 하는 그 때에 그를 배반하였다. 그는 기브아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으숙한 곳인 그 성읍의 변경 지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그는 석류나무 아래 있었다. (글자 그대로 보면) 림몬(Ha Rimmon) 아래 있었다. 그런데 기브아 근처 림몬 바위에 있는 굴 속에 베냐민 사람 6백명이 숨었던 일이 있다(삿 20:47). 어떤 사람은 사울이 피할 곳을 찾아 그 곳에 갔었다고 본다. 이처럼 사울의 정신은 얼빠지고 소침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노여움 아래 있었으며, 블레셋 사람들의 침공만을 기다리는 가운데 사무엘의 경고가 그대로 실현되어 가고 있었다(13:14). 하나님의 보호하심에서 떠난 자는 결코 안전할 수가 없다.
2. 사울은 제사장을 불러오고 하나님의 궤를 모셔 오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그리하여 제사장은 실로에서 왔으며, 하나님의 궤는 기럇여아림에서부터 왔다(3,18절).
사울은 한 번 자기 스스로가 제사를 드림으로써 잘못한 일이 있었다(13:9). 그는 이제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제사장을 모셔 왔다. 그리고 여전히 마음을 겸손하게 가지지 못하고, 변화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어떤 특정한 부분만을 개혁함으로써 전능하신 하나님과 타협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였다. 그는 여호와의 선지자신 사무엘의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사울은 여호와의 제사장인 아히야를 자기에게 오라고 명령함음으로써 그 손실을 보상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무엘이 자기에게 행했던 것과 같이 그가 자기를 견제하거나 꾸짖게 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자기가 그를 명령하고자 하였다(18,19절).
👉 왜 사울은 대세자상인 ‘아히야’를 블레셋과의 전쟁터까지 대동하였는가?
본문은 요나단이 소년으로 하여금 병기를 들게 하여 도움을 얻으려고 했던 것처럼, 사울은 ‘아히야’ 에게 에봇을 입혀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도움을 얻으려 했음을 암시하는 표현을 사용한다. 요나단과 그의 병기 든 자, 사울과 에봇을 입은 아히야는 본장에서 정확히 대조를 이루는 인물들로서, 과연 누구에게 하나님의 도움이 임하게 되는가를 질문하게 하는 구조이다. 전자의 인물들은 신앙 용기에 근거해 블레셋 군사를 20명 가량 도륙하여 그 땅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반면(15절), 후자의 인물들은 기껏해야 하나님의 법궤를 이용하여 전쟁에서 이기려한 인본주의적 인물로 묘사된다(18절).
한편 대제사장의 본분은 성소에 남아 성직을 수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왕의 개인 비서처럼 전쟁터에 따라 나서 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은 본분에 어긋난 일이다. 사무엘로부터 왕위 폐위를 선언받은 사울은(13:13,14) 더 이상 그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자 대제사장 아히야를 대동함으로써 종교적 구색을 갖추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에봇을 입은 아히야'가 전쟁터에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한 사울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아히야 또한 순수하게 대제사장직을 수행하지 못하고 정치 권력의 시녀 노룻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3:12-14의 엘리의 가문에 내린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 선언과 연관해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엘리 가문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엘리의 증손 아히야는 대제사장직을 을바로 수행할 수 없었고, 엘리의 후손인 ‘아히멜렉’ 과 85명의 제사장들이 사울에 의해 죽임을 당하며 (22:7-23),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은 솔로몬 시대에 아도니야의 반역에 가담함으로써 제사장직에서 파면당하게 되는 것이다(왕상2:26.27). 엘리 가문에 대한 이러한 일련의 내용을 기록함으로써 본서 저자는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한 말씀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성취되었음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사역자를 가지고자 원하며, 설교도 그들이 듣기 좋은 말이 되기를 원한다. 또 사역자는 제사장으로서 무조건 자기들을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기만을 바란다. 그리고 충실하게 그의 일을 하며 공정하게 자기들을 대해주는 사역자에 대해서는 적의를 품는 수가 많다.
사울은 언약궤를 가져오게 하였다. 아마 그것은 그의 통치 기간에 언약궤를 조금도 이용하지 못하게 하였던 사무엘을 비난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울은 언약궤를 가져옴으로 사무엘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 때는 누구도 다시는 언약궤를 진영 속으로 가져올 필요가 없없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것은 최근에 언약 궤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았겼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의 진수는 잃어버리고 단지 그림자만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버림받은 왕이 여기서 역시 버림받은 제사장을 꾀고 있다.
Ⅲ. 우리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용기와 신앙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왕관을 쓸 자격에 있어서는 그가 그의 아버지보다 훨씬 더 적격자였다.
👉600명의 군사력은 블레셋의 군사력과 비교하던 상대가 안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믿음의 사람 2명만을 사용하셔서 블레셋을 물리치심으로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입증하셨다.
- 그는 아무도 모르게(in cognito) 블레셋 진영으로 가고자 결심하였다.
그는 아버지에게도 자기의 계획을 말하지 않았다. 그가 이 일을 금지시키줄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또 사람들이 알아도 그의 용기를 좌절시키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요나단은 반대를 받고자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말도, 또 그들의 충고도 듣지 않기로 결심하였다(1,3절). 하나님의 뜻이 그를 충동하여 이 일을 시킨다는 것을 깨닫고 요나단은 제사장의 의견을 듣지 않고서도 그의 나라를 위해 그처럼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다.
적진으로 가까이 가는 길은 매우 어려우며, 천연적인 요새로 둘러쌓인 길이었다고 기록되었다(4,5절). 그러나 그는 조금도 용기를 잃지 않았다. 바위가 아무리 굳고 날카로와도 그의 결심을 무디게 하거나 꺾지 못하였다.
👉요나단이 전쟁을 주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적진으로 건너가는 용감한 모습을 지리적 배경과 관련하여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음.
위대하고도 관대한 심령은 반대에 부딪힐 때 오히려 생명력이 힘차게 솟아오르며, 그것을 뚫고 나가는 데서 큰 기쁨을 찾는다.
- 그는 그의 병기를 든 소년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어, 그를 따라서 이 멋진 모험에 뛰어들에 하였다(6절).
"우리가 목숨을 걸고 원수들의 부대로 가자.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혼란에 빠뜨리게 하나 보자" 고 말했다. 요나단이 어떻게 해서 그 소년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는지 보자.
(1)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다. 우리처럼 그들의 몸에 계약의 표지를 가지지 못했다. 두려워 하지 말라.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할례의 표지가 있지만 그들에게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지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리가 우리의 적을 이렇게 여길진대 하나님도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기에 우리는 그들을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 할례 받지 않았다는 말의 의미 (이방인)
‘이 할례 없는 자들’ 이라는 말은 블레셋인들의 실제적인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기보다는 요나단이 이스라엘의 ‘선민 사상’을 근거로 이방인들을 경시한 말임을 알 수 있다. 이 문구는 삼손이 블레셋에서 아내를 데려오는 것을 반대한 그의 아버지에 의해서 사용되었고(삿14:3), 다윗도 역시 골리앗과 맞섰을 때에 이 문구를 사용하여 골리앗을 경시한다(17:26, 36). 특히 본문에서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징표를 뜻하는 의미로 쓰였으므로 ‘할례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무관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삼손과 사울은 모두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의 손’ 에 죽는 것을 수치스러워했던 것이다(삿 15:18; 31:4). 결국 요나단의 이와 같은 말은 블레셋 군대에 대한 승리를 확신하는 말이며,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2)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이 숫자가 많아도 하나님은 우리 두 사람이 이기게 하신다. 여호와께는 어떤 제한이 없으시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에게는 어떤 한정이 있을 수 없다. 여호와의 구언은 숫자가 많든지, 적든지 매한가지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이다. 전능자에게는 그 일을 하시는 데 도구가 상관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떤 특수한 경우에 이를 적응시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적고 힘도 없을 때에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도움도 받으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신앙이 있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신앙으로 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비겁한 자를 용감하게 하자. 이러한 신앙을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우리의 두려움을 극복하자. "강한 자나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줄 이가 없다" (대하 14:11).
(3) "우리를 이용하여 영광을 드러내실 그분이 우리를 도우시지 않겠는가?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해 기사와 이적을 베푸시리라."
👉 이러한 고백 속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를 인정하는 겸손한 신앙이 담겨져 있으며, 이는 법궤를 앞세우면 무조건 승리를 주실 것이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릇된 주술적 신앙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4:3).
여기서 요나단어 ‘여호와의 전쟁' 을 선포한 것은 실제적으로 블레셋과 대적하는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병기 든 소년 두 사람밖에 없지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다면 승리는 반드시 이스라엘의 것이라는 그의 깊은 믿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소수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승리가 임한 사건은 사사였던 기드온에게서 그 모티브틀 발견할 수 있다(삿 7:2-8). 하나님께서는 소수를 통하여 승리를 주심으로 ‘성전’은 인간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치러지는 것임을 알러시는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본문에서 요나단어 가졌던 믿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세상의 악한 세력들과 싸워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없어 살아가는 이 ‘세상파의 전쟁’ 이 바로 ‘여호와의 전쟁׳ 임을 믿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때, 성도는 소수이지만 하나님의 험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요 16:33).
우리가 비록 아직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나타나신다는 희망을 가질 때, 우리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활동적인 믿음은 어떤 "가능성" 만을 보고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다.
요나단의 병기를 든 소년은 마치 그의 병기만 아니라 그의 마음도 들고 따라다닌 것 같으며,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의 곁에 따라 가겠노라고 약속하였다(7절).
👉이와 같은 병기 든 소년의 말에는 요나단이 어떠한 결정을 내리든지 그를 따르겠다는 순종의 자세가 담겨져 있다. 객관적으로 절대 열세의 상황에서도 그가 본문 처럼 요나단의 말에 흔쾌히 순종한 것은 자신둘이 수행하게 될 블레셋과의 전쟁이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싸우실 ‘거룩한 전쟁’ 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 모험에 자신을 내맡겼다고 보여진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사환의 찬동의 말을 듣고 용기를 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위험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데로 빠져 들어갔을 것이다. 그는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을 빌어서 한(신 32:30)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라" (수 23:10)란 말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본문에서 요나단의 병기든 자는 다시 한번 요나단의 신앙적 결단에 기꺼이 동의하고 층성을 맹세하고 있다.
아마 이러한 순종의 자세로 인하여 요나단은 더욱 용기을 얻어 블레셋 진영으로 뛰어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 사단의 세력과 더불어 영적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신앙인들이 본받아야 할 자세이다. 요나단을 향한 병기 든 자의 충성된 고백처럼, 우리의 대장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우리들 또한 몸바쳐 충성을 맹세하고 따르는 자세가 필요하다(엡 6:12).
요나단의 작전은 적진에 몰래 숨어 들어가 기습 공격을 가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요나단은 자신의 병기 든 자와 함께 적의 전지로 나아가 정면 대결을 하려는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이는 인간의 관점으로 볼 때 너무나 무모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요나단이 이렇게 결단을 내리게 된 배경에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비록 단 둘이서라도 수많은 블레셋 군사들을 능히 물러칠 수 있다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무할례자들이 이스라엘을 전멸시키려고 위협을 가하고 있는 그 때에, 하나님 왕국의 수호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이를 따르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는 이 일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가운데 (시 32:8) 그를 인도하시리라 믿었으며, 그리하여 조심하여 그 뜻을 따르며 거기서 하나님의 방향 지시를 받으리라고 결심하였다.
그는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기초로 하여 어떻게 결심하였는가 보자. 그는 그의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을 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그들에게 우리를 나타내 보이자. 그런데 그때 그들이 조심스럽게 우리를 대하여 우리더러 거기 섰으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격하지 말라고 지시하는 것인 만큼 우리가 그 이상 더 가지 말 것이며(9절), 만일 그들이 주제넘게 우리에게 도전해 오며, 맨 처음에 만나는 파수병이 우리더러 앞으로 나오라고 하면, 우리에게 공격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만큼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공격하여 앞으로 나가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10절).
👉만약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과 병기 든 소년을 발견하고 자신들이 내려가기를 기다리라고 말하면 그 전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포기하겠다는 뜻이다. 사사 기드온도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심을 확신하기 위해서 이러한 방범의 표정을 간구한 바 있다(삿 6:37-40). 본문의 요나단도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확인하기 위하여 마지막 결정적 순간에 표징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요나단은 이처럼 확신을 가지고 이 일을 밀고 나갔다. 우리도 요나단처럼 그래야 한다.
(1)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마음과 혀를 주관하신다. 심지어 하나님은 하나님을 모르며, 그를 존중하지 않는 자들의 마음과 혀까지도 주관하심으로 그것들을 가지고 당신의 뜻을 펴시는 분이시다. 비록 그 혀가 다른 뜻의 말을 하며, 그 마음이 다른 것을 생각한다고 하여도 마찬가지다. 요나단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제사장의 입을 통해서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블레셋 사람의 입을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알려 주신다고 믿고 있었다.
(2) 하나님은 여러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들이 밟아야 할 길을 지시하여 주시며, 온 마음을 다해 그 길을 따르도록 만들어 주신다.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기대하지 못했던 힘에 의해 인도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위로하는지 모른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이시다.
4.하나님의 섭리는 그가 기대하였던 표시를 보여 주었으며 요나단은 그 표시에 응답하고 나섰다.
요나단과 그의 병기를 든 소년은 블레셋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에 그들을 불의에 습격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낮에 그들에게 자기들의 모습을 나타냈다(11절). 그때 블레셋의 파수병은 다음과 같이 행동하였다.
(1) 그들을 멸시하였으며, 그들의 백성들이 겁쟁이라고 하여 비난하였고, 그들을 보기를 겁쟁이 군대의 일원으로 깔보았다. 그리하여 "보라, 히브리 사람들이 그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고 말했다. 만일 그리스도의 병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비겁한 행동을 한다면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2) 그들은 요나단을 얕보았다(12절).
그들은 마치 그를 쳐다보기 위해서 가까이 오는 어린이처럼 생각하여 "우리에게로 올라 오라. 너희에게 한 가지 일을 보여 주리라" 고 말했다. 아마 골리앗의 말처럼 "고기를 공중의 새에게 주리라" (17:44)는 뜻이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들을 잡아버릴 수 있다고 믿고 그들을 가지고 희롱하였다.
👉 ‘우리에게로 올라 오라’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일행을 우습게 생각하고 자신감 있게 내밸은 말이다. 그러나 요나단의 입장에서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승리의 확답을 주는 소리로서 10절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였다. 즉 블레셋인들은 요나단과 그의 병기 든 자를 얄잠아 보고 이같이 말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통해서 하나님 의 뜻을 계시하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때로 인간의 행위틀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드러내고 계시하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와 인간의 사고 및 행동거지를 주관하시므로 당신의 뜻을 이러한 인간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도 나타내실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매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고자 했던 요나단의 태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성급하게 행동으로 옮겼던 사울의 태도와 비교된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블레셋이 자신에게 ‘내려와’ 공격을 할까 두려워 자의적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변명했지만(13:12), 요나단은 블레셋의 입을 통하여 ’올라오라’고 자신의 뜻을 밝히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행동하였다.
이것 때문에 요나단은 크게 용기를 얻고 더욱 담대해졌다. 그리고 그의 사환에게도 용기를 얻고 더욱 불어넣어 주었다. 처음에 그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라고 하여 어떤 가능성만을 가지고 말했다(6절). 그러나 여기서는 확신을 가지고 (12절)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의 손이 아니라(그는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요나단이 그의 병기든 자에게 블레셋 진지를 향해 돌격할 것을 명령하게 된 이유는 바로 여호와께서 블레셋을 이스라엘의 손에 맡기셨다는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구한 표징대로 블레셋 군대가 반응을 보인 것(10절)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나타난 섭리임을 요나단은 굳게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요나단의 확신은 그가 블레셋 진영으로 을가가 블레셋 사람들을 닥처는 대로 도륙함으로써 진정한 믿음에 기초한 것임이 입증되었다.
그는 오직 이익만을 구했다. 그의 신앙이 이처럼 강하여졌기 때문에 그는 어려움 없이 파수병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는 아무런 가려 주는 것이 없는 바위를 네 발로 기어 올랐으며(13절), 다만 그의 사환이 그를 따라 올라갔다. 그들 앞에는 아무런 인간적인 가능성이란 없었으며, 다만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 이 모험이 놀랍게도 성공하였다.
블레셋 사람들은 요나단을 베거나 그를 붙 잡으러 뛰어 내려온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그의 휘두르는 칼에 단번에 쓰러졌다(13절). 그들은 엎드러졌다.
(1) 그들의 상당한 수가 요나단과 그의 병기든 소년의 칼에 쓰러졌다(14절). 블레셋 사람 20명이 당장에 쓰러졌다.
어떤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공격하였던 일이 있기 때문에(13:3) 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요나단의 이름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처럼 맥없이 쓰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를 승리하게 한것은 오직 하나님의 오른손과 오른팔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2) 나머지 사람들도 놀라서 서로 충돌하였다(15절). "들에 있는 진에 떨림이 일어났다."
그들이 두려워하여야 할 눈에 보이는 원인은 없었다. 그들은 그 숫자도 많고, 기세도 당당했으며, 유리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그들 앞에서 멀리 도망치고 없었다. 적이란 한 사람도 얼굴을 내미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한 사람의 용사와 그의 사환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들은 포플러 나무 잎처럼 떨었다. 그 놀라움은 모두에게 있었다. 그들 모두가 떨었다. 심지어는 가장 대담하였던 "노략군" 들마저도 함께 떨었으며, 그들의 허리가 빠지고 그들의 무릎이 서로 부딪칠 정도로 떨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무엇 때문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원인을 알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원어에 의하면) 이는 "하나님의 떨림" 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이 다만 커다란 떨림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그 원인을 알 수도 없으며, 그것을 막을 길도 없는 떨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부터 직접 내려진 초자연적인 떨림이었다. 인간의 마음을 지으신 분은 그 마음을 떨게하는 방법도 아시고 계신다. 그 혼란을 극도에 달하게 하고 자 하여 땅도 그들을 삼킬 듯이 떨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은 그들을 두려워하게 만들 수 있으시다(잠 21:1; 사 33:14 참조).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하여 ‘용사’ 로서 전쟁에 개입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모든 일을 항상 여호와 하나님께 고하고 의뢰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