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11월 14일 월요일 삼상14:24-46 사울의 맹세와 요나단의 실수

Jeehyun 2022. 11. 15. 11:19

맥체인성경읽기

역대상 3, 4, 히브리서 9, 아모스 3, 시편 146, 147

묵상구절

14:24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모든 백성이 음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14:25 그들이 다 수풀에 들어간즉 땅에 꿀이 있더라

14:26 백성이 수풀로 들어갈 때에 꿀이 흐르는 것을 보고도 그들이 맹세를 두려워하여 손을 그 입에 대는 자가 없었으나

14:27 요나단은 그의 아버지가 백성에게 맹세하여 명령할 때에 듣지 못하였으므로 손에 가진 지팡이 끝을 내밀어 벌집의 꿀을 찍고 그의 손을 돌려 입에 대매 눈이 밝아졌더라

14:28 그 때에 백성 중 한 사람이 말하여 이르되 당신의 부친이 백성에게 맹세하여 엄히 말씀하시기를 오늘 음식물을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피곤하였나이다 하니

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14:30 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서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라면 블레셋 사람을 살륙함이 더욱 많지 아니하였겠느냐

14:31 그 날에 백성이 믹마스에서부터 아얄론에 이르기까지 블레셋 사람들을 쳤으므로 그들이 심히 피곤한지라

14:32 백성이 이에 탈취한 물건에 달려가서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끌어다가 그것을 땅에서 잡아 피째 먹었더니

14:33 무리가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백성이 고기를 피째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믿음 없이 행하였도다 이제 큰 돌을 내게로 굴려 오라 하고

14:34 또 사울이 이르되 너희는 백성 중에 흩어져 다니며 그들에게 이르기를 사람은 각기 소와 양을 이리로 끌어다가 여기서 잡아 먹되 피째로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지 말라 하라 하매 그 밤에 모든 백성이 각각 자기의 소를 끌어다가 거기서 잡으니라

14:35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제단이었더라

14:36 사울이 이르되 우리가 밤에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동틀 때까지 그들 중에서 탈취하고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 무리가 이르되 왕의 생각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할 때에 제사장이 이르되 이리로 와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하매

14:37 사울이 하나님께 묻자오되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되 그 날에 대답하지 아니하시는지라

14:38 사울이 이르되 너희 군대의 지휘관들아 다 이리로 오라 오늘 이 죄가 누구에게 있나 알아보자

14:39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하되 모든 백성 중 한 사람도 대답하지 아니하매

14:40 이에 그가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너희는 저쪽에 있으라 나와 내 아들 요나단은 이쪽에 있으리라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왕의 생각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하니라

14:41 이에 사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되 원하건대 실상을 보이소서 하였더니 요나단과 사울이 뽑히고 백성은 면한지라

14:42 사울이 이르되 나와 내 아들 요나단 사이에 뽑으라 하였더니 요나단이 뽑히니라

14:43 사울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가 행한 것을 내게 말하라 요나단이 말하여 이르되 내가 다만 내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14:44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14:45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하여 백성이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

14:46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 추격하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본절부터 46절까지는 믹마스 전투의 막바지에 있었던 한 불행한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적극적 개입으로 파죽지세의 승리를 이어가던 시점에서 사울의 어리석은 금식 명령으로 인하여 굶주린 이스라엘 군사들이 짐승의 고기를 피째 먹음으로 범죄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은 피곤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장시간의 전쟁으로 인해 지쳤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사울의 강압적인 맹세로 인해 그 괴로움이 가중되었음을 나타냄.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혔던 주체는 블레셋이었지만, 본문에서는 사울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는 장본인이 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울의 경솔한 맹세(사무엘상 14:24-35)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승리의 날에 당했던 어려움에 관한 기사가 있다. 그러한 잘못이 기쁜 일에는 항상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되어 갈 때 우연이긴 하겠지마는 잘못된 처리로 말미암아 언제나 방해가 있게 마련이다.

Ⅰ. 사울은 사람들에게 그 날 중에는 아무 것도 먹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며, 먹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24절).

👉 원어 성경은 사울의 명령이 여호와를 향한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날이 저물기 전까지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 ‘자기의 명에'를 드높이고자 한 데서 비롯된 것임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물론 성경에서는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면서 부부 관계를 금하거나(삼하 11:11)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가운데 서원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삿 11:30). 하지만 백성들이 피곤에 지쳐 있는 상황에서 내려전 사울의 맹세는 그런 경우들과 달리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된 어리석은 열성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짐작할 수 있다.

  1. 왕으로서 사울은 병사들에게 이러한 금령을 내리며, 그들을 저주로 묶어 놓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명령에 복종하였다. 그리고 요나단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랬지만) 저주 받은 물건을 건드려서 범법자가 되었을 때, 제비라는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가 범법하였음을 찾아내면서도, 그 때까지는 이 일에 대해서 사울이 하나님께 한 번도 여쭈어 보지 않았다.
  2. 사울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것은 곧 한동안 굶주렸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의 버려진 진영에서 많은 음식을 보고, 너무나 탐내어 배불리 먹다보면, 적을 추격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그날의 일을 망칠 우려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막기 위해서 그는 어떤 음식도 입에 대지 말라고 명령했으며, 자기도 역시 같은 제약을 지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혹한 명령을 내리는 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잘못을 사울은 저질렀다.

(1) 그 계책이 졸렬했으며, 지혜롭지 못했다. 왜냐하면 시간을 얻기는 했겠지만 적을 추격할 만한 힘을 잃어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것은 백성들에 대해 너무 가혹하며 인정이 없는 처사였다. 그것은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는 것" 보다 더 가혹한 처사였다. 큰 잔치를 벌이지 말라는 명령은 내릴 만한 것이라고 보여지지만, 맛도 보지 말라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였다.

(3) 그러한 금령을 내리면서 저주를 선포하고 맹세를 시킨 것은 경건치 못한 처사였다. 그가 만일 저주 이외에는 벌을 줄 수가 없었다면 어떻게 그의 군사들을 훈련할 수 있었을까? 그러한 죄에 대해 죽음을 선포하며, 더우기 죽음이라는 저주를 내리는 것은 지나친 처사이다. 높은 사람들은 꾸짖고, 시정하게 할 수 있어도 낮은 사람들은 저주할 수 없는 법이다. 우리의 원칙은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는 것이다. 다윗이 저주하기를 좋아하는 그의 원수를 말했을 때 아마 그것은 사울을 의미했을 것이다(시 109:17, 18).

 👉 ‘내가 내 원수에게…’
블레셋을 ‘내 원수’ → ‘사울 왕 자신’, 자기 개인의 원수로 묘사함.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전쟁을 하나님의 백성과 할례 없는 이방 민족과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힘을 의지했던 것과 반대로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개인적 감정 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느새 여호와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채고 있었다. 금식에 대한 맹세도 하나님에게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전쟁의 승리가 자신에게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밝힘과 아울러 이 전쟁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유능한 통치자인지를 확증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와 같은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 즉 악한 영들에 대항하여 영적 싸움을 하고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받은 능력으로 인해 승리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공적이나 능력으로 승리한 것처럼 여길 때가 많다. 그러나 그러한 자는 결국 사울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사울의 금식 명령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짐승을 피째로 먹는 사건을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입증된다. 사울의 금식 명령은 아무런 현실적 유익을 발휘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는 배치된 인간적 열심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한편, 사울의 금식 명령의 그릇됨을 지적한 요나단의 바른 현실 인식을 통해 하나님이 배후에서 사울과 함께하시는 것이 아니라 요나단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Ⅱ. 백성들은 사울의 명령을 준수했지만 많은 불편을 겪었다.

  1. 군사들은 애가 많이 탔다. 왜냐하면 그들은 적을 추격해 가면서 꿀이 많은 수풀 속을 지나 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블레셋 사람들이 쫓겨 가면서 벌집을 떨어뜨렸기 때문에 벌꿀이 나무에서 떨어져 땅에 많이 흘렸던 것으로 보여진다. 가나안은 꿀이 넘쳐 흐르는 땅이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 그 증거가 있다. 그들은 반석, 굳은 반석에서 꿀을 빨았다(신 32:13). 하지만 그들은 저주받을까 두려워서 꿀을 맛보지조차 못했다(25,26절).

그들은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가지기에 합당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극도의 굶주림속에서도 자기 자신과 식욕을 극복할 수 있었다. 우리도 이런 경우에 두려움 없이 먹어서는 안 되며, 잔치를 벌여서도 안 된다.

👉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에게 두려움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사울 왕에게 두려움을 가졌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이미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왕정 제도를 허락하시면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무엇보다 여호와를 ‘경외할 것을 명령한 바 있다(12:14).

그러나 사울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이기적 욕심에서 기인한 맹세를 강압적으로 하게 함으로써 여호와가 아닌 자신을 두려워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15장에서 사울이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청종함으로써(15:24)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는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이어진다.

2.요나단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저주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내린 명령은 듣지 못했다. 그는 용감하게 일선에 나가 뛰며, 적을 추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 명령을 꼭 지켜야 할 의무가 면제된다고 보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그런 저주가 의당한 것으로 보고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무런 괴로움이 없이 지팡이 끝으로 벌꿀을 찍고, 그것을 빨았다(27절). 그리고 그것 때문에 생기를 얻었다. 굶주림과 피로때문에 희미해 오던 "그의 눈이 밝아졌다." 그 때문에 그의 얼굴에 희색과 생기가 돌았다. 옆에 있던 사람들도 그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29절). "보라,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다" 고 그는 말한 바가 있다.

👉 요나단은 고의로 사울의 맹세를 어긴 것이 아니라 모르고 어긴 것. 저자는 요나단어 아버지의 맹세를 몰랐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이후에 요나단이 사울의 어리석은 맹세로 인해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을 암시한다.

사울은 아들 요나단이 자신의 맹세를 듣지 못했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한 채 ‘요나단이라도 죽을 것이다’ 라는 말로 자신의 맹세틀 더욱더 공고히 하고(39절), 결국에는 요나단이 죄인으로 색출되자 그에게 죽음의 저주를 내린다(44절). 저자는 사울의 맹세에 대해 요나단이 몰랐다는 사실을 통하여 오히려 사울의 어러석음을 밝히려고 한다.

‘눈이 밝아졌다'

‘신체적으로 기력을 회복했다'라는 의미인 동시에 ‘지적 판단력과 영적 판단력을 회복했다’ 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본문은 요나단이 사울의 맹세를 어기고도 회복의 상태로 접어들었음을 역설적으로 밝히고 있으며, 오히려 사울의 눈이 흐려져서 왕으로서의 판단력을 상실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본서 저자는 이러한 일화를 통하여 관단력이 흐려진 사울보다는 눈이 밝아진 요나단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옴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백성 중의 한 사람이 그 명령을 알려 주기 전까지는 조금도 해가 되며 두려움이 되는 줄을 몰랐다. 그 소식을 듣고서야 자기가 올가미 속에 빠진 것을 알았다. 생각 없는 아버지들의 경솔함 때문에 많은 좋은 아들들이 여러모로 괴로움을 받고 시달림을 받게 된다. 요나단 편에서 볼 때 그는 아버지의 어리석음 때문에 그가 상속받을 수있었던 왕관을 놓쳤다. 이것도 그런 나쁜 징조중의 하나였다.

👉 전쟁 중 음식 먹는 것을 중단하라는 사울의 명령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실한 왕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다. 하지만 요나단은 상황 판단을 못하고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사울을 바로 보고 그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또 다른 측면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시기도 하지만,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상황을 배제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셔서 효과적으로 섭리하시는 것이다.

여호와의 대리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혜롭게 다스려야 할 사울은 이러한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어리석은 맹세를 하는 종교적 요식 행위에 빠져 있었음을 본문은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3.군사들은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기에 지쳤으며, 점점 더 맥이 빠지고 있었다.

요나단은 그런 결과가 나올 것을 미리 알았다. 영양실조에 걸려서 그들의 정신은 축 늘어지고, 그들의 힘도 빠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새로운영양 보충이 없으면 우리는 즉시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인간의 육체가 가진 자연법칙이다. 날마다의 양식이 떨어지면 날마다의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날마다 우리에게 우리의 양식을 은혜로 주신다. "떡은 인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요나단은 "그들이 임의로 먹었다면 그 살륙함이 더욱 많았을 것이다" 고 바르게 생각할 수 있었다(30절).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이 매우" 굶주렸으며 피로에 지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보다는 고기에 마음이 더 쏠려 있었다.

 👉 믹마스에서 아얄론까지 …

본문은 당시 그들이 얼마나 피곤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한 경로를 밝힌다.

‘믹마스’ 는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 예루살렘 북동쪽 약 12km의 지점에 위치한 계곡 및 험준한 고개들로 연결되어 었는 군사 요층지이다. ’아얄론 은 덴호론 바로 아래 볼레셋과의 경계에 었는 골짜기를 가리키며, 예루살렘에서는 23km, 믹마스에서는 25~30km 정도 서족으로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 정도의 거리를 이스라엘 군사들이 해지기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적과 싸우며 추격했다는 사실은 병사들이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를 능히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그들의 피로는 24절에서 피곤했던 상황보다 훨씬 더 가중되어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피곤이 가중되고 있음으로 비록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지만 사울의 경솔한 맹세로 인하여 마치 전쟁에 패배한 것과 같은 상태에 있다. 이는 곧 불미스로운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한다.

4. 죄악의 결과는 저녁에 나타났다.

그 제약이 풀려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너무나 허겁지겁 정신 없이 먹어댔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에서 금한 것도 잊어버리고, 고기를 그 피째 먹었다(32절).

두 끼를 굶으면 소를 통째로 먹는다는 말이 있다. 이들이 바로 그런 꼴이었다. 그들은 소를 격식대로 도살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들은 소를 땅에 쓰러 뜨리고 보통 때와 같이 피를 모조리 뽑아내도록 그것을 거꾸로 매어 달지 않았다. 또 제대로 요리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채 끓이거나 굽기도 전에 고기에 매달려 집어 먹었다(32절).

👉 이들은 생명의 상징인 피를 먹음으로써 생명의 주인이신 여호와를 모독했다. 그리고 그들은 송아지와 더불어 그 어미인 암소도 함께 잡아 먹었을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 잡지 말라는 율법(레 22:28) 또한 어긴 것이 된다.

이렇게 율법을 어기고 본능적으로 행동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언약과는 상관없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 없다.

본문은 판단력을 상실한 어리석은 왕의 무모한 맹세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를 저지름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을 알게 되자 사울은 그들의 죄를 꾸짖었다(33절). 그는 "너희가 범죄하였도다" 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마땅히 여호와의 백성들로 하여금 범죄케 한 사실에 대해 반성하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반성은 하지 않았다.

👉본문에서 사울은 자신의 과오는 생각하지 않은 채 당장 범죄한 눈앞의 백성들만 책망하고 있다. 이 역시 상대방 눈 속의 티끌은 보고 자신의 눈 속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는 사울의 어리석음을 증명한다(마 7:3-5). 사울의 이러한 발언 역시 그가 하나님의 백성을 지도할 왕으로의 자질이 부족함을 반영한다.

이러한 불법을 시정하기 위해서 사울은 큰 돌을 자기 앞으로 굴러오게 하고, 자기가 보는 앞에서 소와 양들을 죽이게 하였다(33절).

👉본문의 ‘큰 돌'은 단지 양, 소, 송아지를 잡을 때 짐승의 피롤 땅으로 흘러내리게 하기 위한 받침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사울의 이러한 조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범죄를 저지른 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백성들은 그의 말을 따라서 그대로 하였다(34절). 그들은 그들의 왕이 바로잡아 주는 데 따라서 쉽사리 자기들의 잘못을 고치고 개선해 나갔다. 통치자들이 제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면 백성들을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다.

Ⅳ. 이때 사울은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단을 쌓았다(35절).

그것은 그들이 얻은 승리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 위한 것이 아니면, 그들이 범한 죄에 대해 속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그것은 사울이 "처음으로 쌓은 단" 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마 짐승들을 죽이기 위해 굴러오게 한 그 돌을 보고 그것을 단으로 바꾸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도저히 그런 일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리 떨어지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 단을 쌓았는데, 하나님의 능력을 거부하면서도 외양적으로는 가장 열심인 척 나타내는 것과 같다.

호세아 8장 14절을 보면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은 자를 잊어버리고 전각들을 세웠다" 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은 "그가 단을 쌓기 시작하였다" 라고 읽는다. 사울은 단을 쌓기 위한 초석을 가져다 놓았지만, 싸움에 승리하는 일에만 도취되어 그 단이 완성되는 것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 사울의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그는 율법 준수 및 종교 행위를 위하여는 자신을 드러내기 신앙적어지 못했을 뿐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행위 위한 외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사실은 이후 사울의 행동이 전혀 신앙적이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도 거러가 먼 것이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요나단에게 내린 사형선고와 구명(사무엘상 14:36-46)

Ⅰ.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에 대해 교만을 떨었다. 그는 군사들이 저녁을 먹자마자 밤새어 블레셋 사람을 쫓아가서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 고 제안하였다(36절).

사울은 열심을 보여주었지마는 재량을 베풀 줄을 몰랐다. 군사들은 극도로 피곤하였기 때문에 먹을 것에 굶주렸던 만큼 잠도 모자랐다. 그러나 성급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들의 사정은 몰라 준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알고,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생각하여 주지 않는다.

하여간 백성들은 그들의 왕의 말을 복종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감히 반대를 하지 못하고 최선을 다해 그 명령을 따르기로 결심할 수밖에 없다. 왕이 가기를 원하면 자기들도 따라가겠노라고 말했다. "왕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소서."

👉 본문은 40절에서 다시 반복되면서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던 사사 시대의 혼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사사기 저자는 그 시대틀 한마디로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고 규정하고 있다.

본서 저자는 이스라엘에 사울이라는 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사 시대와 같이 질서가 없는 혼란한 상태임을 암시하기 위하여 이러한 백성들의 말을 기록하겠다고 볼 수 있다. 즉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정한 왕이신 여호와의 소견을 따르지 않고 사울 왕의 인간적인 소견에 동의하고 있음을 부각시커는 것.

다만 제사장만이 갑자기 중단되었던(19절) 의식을 계속하여 신탁을 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리로 와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라고 말했다. 제사장이 그러한 제안을 했을 때 사울은 부끄러움 때문에 그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내가 블레셋 사람을 쫓아 내려 가리이까? 내가 속히 가리이까?" 라고 묻기를 원했다(37절).

👉 최종적인 결정을 자의적으로 내리려는 사울을 저지하는 아히야의 모습. 결국 제사장 아히야는 블레셋을 진멸하자는 사울의 이번 결정이 백성을 금식시킴으로 곤궁에 빠뜨렸던 결정처럼 경솔한 것이 아닌지를 염려하였으므로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자고 한 것이다. 어떠한 일을 시행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자신의 결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사울의 불신앙적 태도가 본문에서도 드러난다.

Ⅱ. 사울은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죄를 알게 되었다.

나머지 기사는 전부 그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사울이 요나단을 문책하는 동안 블레셋 사람들이 도망쳤다. 성급한 결심이 어떠한 위험을 가져올는지 모른다.

1.하나님은 불쾌함을 표시함으로써 사울로 하여금 저주받은 사건을 찾게끔 하였다. 사울이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신탁을 구했을 때, 하나님은 "대답지 아니 하셨다" (37절).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대해 응답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어떤 죄가 하나님을 노엽게 하여 드렸는지 찾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 사울이 우림과 둠밈을 통해 합법적으로 하나님께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전혀 응답하지 않으셨다. 일반적으로 긍정이나 부정의 대답이 주어져야 하는데, 아무런 대답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사울의 물음이 전혀 신탁의 성격을 지니지 못했음을 입중한다.

또한 이러한 결과는 요나단어 표정을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긍정적으로 응답하셨던 장면(10,12절)과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하나님이 요나단과 함께하셨지만 사울과는 함께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결국 사울의 물옴에 대한 하나님의 첨묵은 사무엘이 죽은 후 블레셋의 침공이 있었을 때 다시 재현되어(28:6) 사울을 버리셨음을 나타내는 증거로 사용되고, 아말렉의 침로를 막으려는 다윗에게는 응답하심으로 다윗을 하나님의 마옴에 든 사람으로 선택하신 증거로 사용된다(30:7,8).

"이 죄가 뉘게 있나 알아 보자" (38절).

하나님은 귀가 멀어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못하신 것이 아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 놓은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밀어 놓으신다면, 우리의 마음 속에 어떤 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 내어서 제거해 버리고, 없애버려야 한다.

사울은 금단의 과실을 먹음으로써 이스라엘 진영을 괴롭힌 아간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누구든지 간에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나님을 두고 맹세했다. 그는 비록 요나단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했는데, 말하자면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죽으리라고 한 말은, 요나단이 바로 그 사람이란 것은 도무지 알지 못하고 한 말일 것이다(39절). "반드시 죽으리라" 는 저주는 요나단에게 임하여 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요나단이 그런 명령을 어긴 사실을 감히 그에게 고하지 못하였다.

2.요나단이 범법자라는 것이 제비에 의해 밝혀졌다. 사울은 요나단과 자기를 한편에, 그리고 백성들을 한편에 두고 제비를 뽑게 하였다. 아마 사울은 요나단도 자기처럼 죄가 없으리라고 확신하였던 모양이다(40절).

백성들은 사울이 너무 열중한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왕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소서" 라고 묵인하였다. 사울은 제비를 뽑기 전에 "하나님이여 실상을 보이소서" 라고 기도하였다(41절). 그것은 사건이 분명히 밝혀지기를 바라며 동시에 자기의 무죄가 밝혀지기를 바라는 심정의 토로이다. 그 때의 그 분 위기는 공평무사한 것이었다.

판단은 그 때문에 누구가 해를 받든지 간에 진실한 것이어야 한다. 제비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기게 반드시 기도하고 뽑아야 한다. 우리는 제비를 통해 하나님께서 지시하여 주시고, 결정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여야 한다(행 1:24). 그러한 까닭에 어떤 사람은 거룩한것을 가지고 나쁜 일에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며, 제비를 가지고 놀음을 하는 것을 비난한다. 드디어 요나단이 뽑혔다(42절).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하여 합법적인 권위를 도와주고 지지하여 주신다.

3.요나단은 솔직하게 사실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사울은 그에게 저주하고 죽음을 선언하였다.

요나단은 사실을 거부하지도 않고 이를 은폐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기는 "죽어야 한다" 고 생각하니 그것이 아쉬웠다(43절). 요나단은 정말 그 법을 몰랐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으며, 자기의 공로를 내세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관대한 마음으로, 그 결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하나님과 나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고 그는 말했다. 요나단은 자기가 죽음의 사자들을 불러서 사람들에게 보낼 때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자기가 받아들일 때에도 용감하였다. 싸움에 용기가 필요한 것같이 굴복당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사울은 아버지의 정 때문에, 또는 그 처사가 가혹하다는 생각때문에 처벌을 약화시키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하더라도 자기의 말, 더우기 자기의 맹세에 충실하여야 하는 사람처럼 행했다. 사울은 다른 저주를 첨가하면서 요나단에게 판결을 굽히지 않았다.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내가 그 법을 너에게 실행치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그 이상의 법을 내리시리라" (44절).

👉 사울은 이전까지 ‘내 아들 요나단’이라고 부르다가 (39,40,42절), 본문에서는 ‘요나단아 네가’ 라고 바뀌었다. 이것은 사울이 자신의 맹세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아들 요나단과 거리를 두고 있음을 나타낸다.

결국 사울은 39절에서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한 것으로 인해 자가당착에 빠지고 말았다. 사울 은 자신의 맹세가 경솔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지만,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맹세였으므로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결심한 듯하다. 이러한 사울의 모습은 삿 11:30, 31의 업다의 경우와 매우 흡사한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아비의 경솔한 맹세로 인하여 자녀가 죽음에 처해지는 곤경에 처해지게 된 것이다.

물론 입다의 딸의 경우와 달러 요나단의 경우는 백성들의 중재로 말미암아 요나단이 죽음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큰 혼란이 발생하였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는 신중한 가운데 결정할 사항이며 결코 경솔히 행해서는 안된다(마 5:33-37).

(1) 사울은 하나님께 여쭈어 보지 않고 너무 서둘러 선포하였다.

요나단은 자기에게 내린 판결에 대해 항변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요나단이 행한 것은 "악 그 자체" (malum in se)가 아니었다. 그는 알지 못하고 그 금령을 어겼다. 그러므로 반역이나 불복종이 죄로 다스려지지는 않을 수도 있었다.

(2) 사울은 격노한 가운데 그 일을 행했다.

요나단이 비록 죽을 만한 죄를 범했다고 하더라도, 더우기 아버지로서, 부드러움과 동정심을 가지고 판결하여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모든 인간적인 감정과 자연적인 애정을 모조리 벗어던진 사람 모양으로 기고 만장해서 판단을 내렸다. 정의는 진노와 가혹함을 가지고 시행될 때 그 가치가 떨어진다.

(3) 그 선언이 시행되지 않을 때 사울은 그 저주를 자기에게로 돌렸다. 그리하여 그 저주가 그 자신에게로 돌아갔다.

요나단은 이를 피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이 이를 피하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파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그런 악담의 저주를 하지 말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말에 동하게 하시지 말며, "우리의 혀가 우리의 해함" (시 64:8)이 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그가 굴린 돌이 스스로에게로 돌아 올 것이다. 하지만 요나단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보였을 때 그것을 자기에게로 돌린 것을 보면 사울에게 요나단에 대한 연민의 정이 없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하나님은 사울로 하여금 그의 성급한 선포가 너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었다. 그 때문에 사울은 그와 같은 죄를 범할는지 모른다는 것을 두려워하게 하였다. 하나님은 이 모든 성가신 사건들을 통해서 사무엘을 제쳐놓고 제사를 드린 그 오만함을 시정해 주려고 하셨다. 잘못 시작된 원정은 책망이 없이는 정지될 수 없다.

4.백성들은 요나단을 그의 아버지의 손에서부터 구출하여 주었다(45절).

지금까지 그들은 사울의 눈치를 살펴가며 그의 뜻에 가납할 말만을 해 왔었다(36,40절). 그러나 이 때 요나단의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러서는 사울의 말이 그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했다. 이제 그들은 열심을 다해서 사울의 선언에 반대 의사를 표시하였다.

"나라를 위해 그렇게 사랑하고, 축복을 가져온 - 요나단이 죽어야 합니까? 그는 나라를 위해 용감하게 자기 생명을 내던졌으며, 우리의 생명과 승리가 그로 말미암아 보전되었는데, 그의 생명이 법과 명예의 겉차림 때문에 희생되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가 그런 처분을 받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강한 반대를 표현한 것은 사울의 잘못된 맹세에 대한 불만의 표출임과 동시에 전쟁 영웅인 요나단을 살리고자 하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사울은 이미 암몬 족속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자신을 멸시하여 왕으로 인정하지 아니한 비류들을 죽이라는 백성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살려준 적어 었다(11:13). 사울은 그 날의 승리를 이스라엘에게 주신 여호와의 구원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대적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큰 승리를 이끈 주도적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에게 사형을 언도한다는 것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여호와의 구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또한 본문에서는 사울과 백성의 입장이 뒤바뀌어, 정작 요나단을 구해야 할 사울은 요나단의 죽음을 주장하고 오히려 백성들어 요나단의 구원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맹세를 끝까지 지키려는 어리석음 때문에 사울 왕은 잘못된 판단과 결정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백성들이 요나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사울 왕에게 항의한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목숨을 바치는 행위와 같았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즉 백성들은 왕의 명을 거슬러 목숨이 위태로움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을 보호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한 사업에 그릇으로 사용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처럼 열성인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마땅한 일이다. 사울은 요나단을 죽이겠노라 맹세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맹세하여 그의 맹세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만이 아니라,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들은 폭력으로 사울을 구하지 않고, 정당한 사리와 그들의 결단으로 그를 구하였다.

조세푸스(Josephus)는 말하기를 그들은 하나님께 그를 그 저주에서 풀어주기를 기도하였다고 했다. 그들은 요나단을 위해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사하였다" 고 변명하여 주었다. 이 말은 곧 "그가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했으며, 하나님은 그의 열심을 사셨다. 그러므로 그의 생명은 귀하기 때문에 함부로 저버릴 수 없다" 는 내용이다. 사울은 요나단과 자기 사이가 부자관계라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지 않았으며, 요나단이 구명되기를 속으로는 원했을는지 모른다. 그래서 자기 자신으로서는 발설하지 못하지마는 요나단의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였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자는 그를 나무랄 수 없다.

5.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블레셋 사람들에 대한 추격은 파기되었다(46절).

"사울이 블레셋 사람 따르기를 그쳤다." 따라서 완전한 승리의 기회는 놓쳤다. 이스라엘의 방패가 서로 충돌하는 동안 그것 때문에 나라의 안전이 손해를 받았다.

👉 사울의 철군은 블레셋에게 다시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훗날 더 큰 비극을 초래하는 원언이 된다. 즉 블레셋의 재침공(28:4,5)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큰 타격을 받고 그 전투에서 사울과 요나단은 전사하고 말았다(31:1-13).

이처럼 사울은 요나단어 여호와의 이름을 힘입어 벌인 여호와의 전쟁 을 끝까지 완수하지 못하고 자신의 만용에서 비롯된 잘못된 맹세로 언해 블레셋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만 것.

이는 사울의 모든 행동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 되시는 여호와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는 데 기인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