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역대상 9, 10, 히브리서 12, 아모스 6, 누가복음 1:39~80
묵상구절
15:10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5:1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15: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15: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니
15:14 사무엘이 이르되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라
15:15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15:1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 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말씀하소서
15:17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15:18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5: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15: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15: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15: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15:25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니
15: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15:27 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15:28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15:30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15:31 이에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하나님의 버림받은 사울(사무엘상 15:10-23)
사무엘은 아말렉을 진멸하는 문제에 대해 사울에게 명령한 그의 명령이 잘 시행되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사울을 방문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엄격하다는 것과 이에 반대인 인간의 마음은 배반하기 쉽고 속임수가 많다는 확실한 실례를 볼 수 있다.
Ⅰ. 이 문제를 두고 하나님과 사무엘 사이에 은밀히 말을 주고 받은 것을 볼 수 있다(10,11절).
-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이를 사무엘에게 알려 주었다.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느라."
하나님의 후회는 우리의 후회와 같은 마음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방법과 처분의 변화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변경하시지 않으신다.다만 방법의 교체를 원하실 따름이다. 그 변화는 사울에게 있었다.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은 이러한 말씀을 사울의 어지러진 복종과 지나친 욕심에 대해 내리셨다. 그리하여 사울은 스스로 하나님을 그의 적으로 만들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왕국을 맡기고, 왕국에 속한 영예와 권세를 그에게 주신 것에 대해 후회하셨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은 어떤 한 인간에게 지혜와 은혜 그리고 그의 두려움과 사랑을 주신 것에 대해 후회하시지는 않으셨다. 하나님의 이런 은사와 소명은 후회가 따르지 않는 것들이다.
👉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나함)하노니’
여기서 주목할 점은 ‘나함'의 수동형은 거의 대부분 하나님의 후회를 언급할 때 사용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후회를 표현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슈브’ 이다. ‘슈브’는 ‘죄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돌이키다’ 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여기에는 인간이 죄를 자각할 때 후희하며 진정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다는 사상이 담겨져 있다. 반면에 하나님의 후회(창 6:6; 출 32:14; 삿 2:18)는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거나 사람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후회는 그의 성품에 어떤 변화가 있음을 전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후회는 사람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고통을 나타내는 신인동형동성적표현이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이를 가리켜 ‘하나님께서 마치 극악한 죄악이 치명적인 고뇌로 자신의 마음을 찌르는 것 이상으로 그것들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당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한편 ‘하나님이 후회하셨다’ 는 표현이 본절 외에 마지막 절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사무엘은 29절에서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변개치 않으시는 하나님' , 즉 후회하시지 않는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절과 35절의 ‘후회하시는 하나님’이란 묘사와 29절의 ‘변개치 않으시는 하나님' 즉 ‘후회하시지 않는 하나님'이란 묘사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가? 이는 또한 사울이 아무리 여호와의 명령을 어겼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우신 사울의 왕권은 결코 폐위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인가?
⇒ 이 말씀은 언약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언약을 신실히 지키시는 분이다. 그리고 인간과 한 번 맺으신 언약은 반드시 이루신다. 그러나 그 언약은 하나님의 일방적 언약이 아니라 인간도 언약의 조건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쌍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울에 대해서 후회하신 것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 자체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사울에 의해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파기된 데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사울의 본질적 죄는 무엇인가?
1.그가 돌이켜서 나를 쫓지 아니하였음
본문을 통해 볼 때 사울의 죄는 표면적으로 그가 제사장의 권한을 깨뜨리고(13:13), 아말렉을 철저히 진멸하지 못한 데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을 쫓는 것으로부터 돌아서 인본주의적 삶을 추구하는 그의 잘못된 삶의 방향' 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더 이상 여호와를 따르는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려고 하지 않고 여호와를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절대적인 통치자가 되려고 한 것이다. 그 결과 그는 교만해졌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떠나게 만든 중요한 원인이 된 것이다.
2.‘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여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였음.
⇒ 말씀을 통한 명령은 하나님이 직접 주시지만, 그것을 실천하여 현실 속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인간 사울의 몫임을 시사하고 있다. 사울은 13절에서 사무엘에게 자신이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했다’ 라고 당당히 말했다.
↔ 그러나 사울의 주장과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울의 행동은 당신의 명령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삶의 방향을 바꾸어 자신의 욕심을 따르기 위해서 여호와의 명령을 고의로 어긴 것이다.
⇒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통해서 신앙의 세계에는 중립이 있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즉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만을 따르는 순중의 삶과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신의 의지를 따르는 불순종의 삶 사이에서 인간은 한쪽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 사무엘은 애통하였으며 그런 일이 없기를 원했다.
👉 사무엘은 ‘두려움으로 인해 마음이 불타올라’ 근심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 크게 소리를 지르며 하나님께 기도하였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사울의 불순종의 죄를 사죄받기 위해서 중보 기도하였다.
사무엘이 이와 같이 부르짖은 이유가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운명이 어스라엘 백성 전체의 운명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사무엘의 부르짖음은 사울의 범죄로 인한 징벌이 이스라엘 전체에 미치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였을 것이다. 이러한 기도 중에 사무엘은 사울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계시받는다(16절).
사울에게 내려졌던 하나님의 은혜가 몰수당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기로 결심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사무엘은 근심하고, 그러한명령이 사울에게 실현되지 않도록 그를 위해 중재의 기도를 드리기 위해, "온 밤을 새워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다른 사람들은 침상에 누워 잠자고 있을 때, 사무엘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며, 하나님께 매어 달렸다. 사무엘은 그 자신이 정권에서부터 밀려 나온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려고 하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들처럼 그의 뒤를 이은 사울이 그처럼 속히 물러나게 되었다고 은근히 좋아하지도 않았다. 반면에 사무엘은 사울의 안정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으며, 그에게 비참한 날이 이르지 않기를 원했다. 죄인이 버림받은 것을 선인들은 슬퍼한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Ⅱ. 사무엘과 사울 사이에 공공연히 말을 주고 받은 것을 볼 수 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이 무거운 소식을 가지고 길가로 갔다. 아마 사울이 출전하기 전에 길갈에서 만나기로 악속했던 것인지 모른다. 사울이 길갈로 내려 갔다(12절). 그 곳은 사울이 왕으로 등극한 곳이다(11:15).
이제 사울은 자기가 순종을 잘했다는 것이 인정 받음으로써, 다시 한 번 그 곳에서 왕위가 더욱 확고해지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은 사울이 유다 산지에 있는 도성인 갈멜에,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 보다는 자기 영광을 구해서 승전비를 세웠다는 말을 들었다. 사울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념비를(혹은 손을) 세웠다. (사실 그는 자신의 승전을 과시하는 일보다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이 더 급선무였다). 그가 화려한 행렬을 지어 길갈로 "돌이켜 행하여 내려갔다" 는 표현을 보아서 위세 당당하게 길갈로 개선 행진해 들어간 것 같다. 그러한 곳에서 사무엘은 사울을 만났다.
👉 사울의 행위는 그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울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서 자신의 영광을 기렸던 것이다.
‘기념비’
‘야드’ → 본래 ‘손, 능력, 힘’ ⇒ ‘손을 새긴 한 석비’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짐(삼하18:18; 사56:5).
이 석비들에는 우상을 향해 기도하기 위해 높이 쳐든 양손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사울도 갈멜에 이르러 자신을 높이기 위한 석비를 세웠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승리를 여호와의 공로로 인정하지 않고(14:23), 이번 승리를 자신의 것으로 백성들에게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기념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손' 으로도 번역되는 ‘야드' 란 단어가 사용된 본문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여호와의 손'을 인정하지 않고(5:6,9), 자신의 손을 자랑하기 위해서 기념비를 세운 사울이 결국 ‘여호와의 손'으로 심관받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12:15).
1. 그리고 거기서 사울은 사무엘에게 자기의 순종을 자랑했다. 이것을 사울은 다음과 같은 인사로 표시하였다(13절).
"원컨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당신이 보내온 전갈을 나는 성공적으로 온수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 사울이 사무엘을 보자마자 이처럼 다정한 인사를 건넨 것은 그의 죄의식을 숨기기 위함이었을 것. 사울은 사무엘이 어떤 말을 건네기도 전에 자신이 여호와의 명령을 이행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말이 사실인가?
사울에게 주어진 ‘여호와의 명령’은 분명 아말렉에게 속한 모든 것을 진멸하여 하나님께 ‘헤렘’으로 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에 부분적으로만 순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온전히 이행한 듯 버젓이 사무엘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돌이킨 자’의 뻔뻔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즉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눈가림으로 자신의 죄를 은폐하는 데 급급하고 있다. 하지만 사울이 잊고 있는 것은 ‘죄’ 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자신과의 문제라는 점이다. 단지 인간의 눈을 피하는 데만 급급한 사울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의 볼신앙의 단면을 발견하게 된다. 진정한 신앙인은 사람의 눈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이다.
그때 그는 철면피가 되지 않았다면 자기가 손종했노라고 주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울은 사무엘의 책망을 막아보려고 하였다. 이처럼 죄인들은 그 자신을 정당시함으로 "여호와의 심판" 을 피해 보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직 여호와의 심판을 피하는 길은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길 뿐이다. 자기의 신앙을 극구 자랑하는 자에게는 편견과 위선이 없지 않다고 보여진다.
2.사무엘은 사울의 명백한 불순종의 표시를 가지고 그에게 죄가 있다고 선포 하였다.
"당신이 여호와의 명령을 완전히 준행하였나이까? 그렇다면 저 양들의 소리를 어쩜이니이까?" (14절).
👉 사울의 범죄는 ‘하나님의 목소리’와 ‘백성들의 목소리’ 사이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결과였다.
사울이 처음 하나님에 의해 왕으로 선택되었을 때 보여준 겸손함(10:22)을 잃고 ‘사람들의 소리’ 에 더 귀를 기울인 결과 범죄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처음에 하나님을 만나 고백했던 그 순수한 신앙의 고백들을 잃고 사람들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사울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도 그의 행한 바에 의해 크게 신세지는 바가 많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은 하나님이 사울의 신세를 져야 할 분이 아니시라는 것과 사울이 하나님께 거스리는 행위를 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증거로서 "양들과 소들의 울음 소리" 를 내세웠다. 아마 사울은 자기의 승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그 짐승을 행렬의 후미에 붙여서 이끌고 왔을것이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것들이 그를 해하는 증거품들이라고 호소하였다. 그것만을 가지고도 사무엘은 사울의 거짓을 완전히 반증한 셈이다. 짐승들의 울음소리는 (금과 은의 녹과 같이, 약 5:3) "그를 반박하는 증거" 가 되었다.
그럴 듯한 거짓이나 위선은 언제나 그리고 여러 번 가장 뚜렷하고 거절할 수 없는 증거에 의해 반박받고 반증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잘 순종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증거를 반박하고 있는 그들의 육체에의 탐닉과, 세상에의 사랑과 그들의 욕정과 무자비 그리고 거룩한 의무에 대한 태만 등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3. 사울은 이러한 책망에 대해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였다(15절).
아말렉 사람들의 양과 소들을 그가 끌고 왔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하였다.
(1) 그것은 자기의 잘못이 아니요, "백성들이 남긴 것" 이라고 하였다.
👉공로는 자신에게 돌리고 허물은 백성들에게 돌림으로서 백성들의 왕으로서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냄.
그것은 사무엘의 특별한 명령인 줄을 알면서도 사울의 특별한 명령이 없이 백성들이 감히 그런 일을 하였다는 투로 말했다. 자기 자신을 정당화 하려는 사람들은 흔히 다른 사람을 비난하며, 그 잘못을 자기 탓으로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린다. 죄란 자기의 자식이면서도 누구나 자기 집 문 앞에 세워두기는 싫어한다. 그 잘못은 유혹자나 동료나 또는 단순히 일한 사람들의 탓으로 돌리고 자기의 죄과로 고백하지 않는 것은 자기의 회개치 않는 마음을 속이는 것뿐이다.
👉 이와 같은 본능적인 죄성의 시초는 아담과 하와 때부터..
저자는 이미 9절에서 ‘사울과 백성들’ 이 여호와의 명령을 함께 어겼음을 언급하였다. 이처럼 공동 범죄였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나타난 사울의 변명하는 모습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이 하와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파렴치한 모습과도 일맥상통한다(창 3:12).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사울의 명령을 두려워하여 절대적으로 복종하였을(14:24-26) 것을 감안해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의 허락을 받지 않고 그와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사울은 13절에 이어 사무엘에게 계속해서 거짓말을 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은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말을 들은 사울이 어떤 마음 품기를, 어떻게 하기를 원하셨을까?
하지만 이 모습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사울은 하나님의 선민을 책임지는 왕으로서 범죄 사실이 드러났을 때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자신의 죄를 남에게 전가하려는 죄된 인간의 본능적인 속성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 좋은 계획이 있어서 그랬다고 이를 정당화하였다.
"그것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그랬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일은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인 만큼 당신은 이 일에 대해서 나무라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짐승들을 남겨놓은 사울과 백성들의 궁색한 어리석은 짓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도둑질한 것으로 번제를 드리는 것을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짐승들을 전쟁터에서 그에게 제물로 바치라고 지시하셨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제단에서 제물로 드리려고 가져왔다고 하여서 고마워 하실 것이 없으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방법과 하나님 자신이 지시하신 법대로 섬김을 받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잘못된 방법을 정당화하여 주지 않으신다.
👉15절에서 사울은 하나님을 ‘당신의 하나님’ 이라 칭함 ⇒ ‘나의 하나님’ 이나 ‘우리의 하나님’이란 표현 대신 ‘당신의 하나님’ 이라고 표현한 것은 사울과 하나님 사이의 소원해진 관계를 드러낸다.
4.사무엘은 그의 변명을 무효화 내지 무시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심판을 내렸다. 사무엘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만을 전했다(16절).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도저히 그처럼 심한 책망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목사가 자기에게 너무 심한 말씀을 한다고 불평하는 자들은 이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즉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는 한 그는 다만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며, 그에게 주어진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기서 사울이 만한 것과 같이 다만 "말씀하소서" 라고 말해야 한다. 사무엘은 그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하였다.
👉 사무엘은 강한 의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 하고 있다. 참된 선지자로서 14절의 ‘양과 소의 소리,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아닌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자였다. 또한 사무엘은 사울의 변명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으로 설득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 그대로를 사울에게 전하려 하고 있다. 사무엘이 사울처럼 하나님께 버림을 받지 않고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을 받은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음성만을 듣는 자였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17-19절에서 ‘왕'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는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입장에서 그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울에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자리에서는 왕이라는 신분도 아무런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1) 사무엘은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그를 왕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기억하게 하였다(17절).
하나님은 그의 상태가 낮을 때 그를 기억하여 주셨고, 그의 심령이 낮은 것을 보시고 그에게 보응하여 주셨다.
귀하게 되거나 부하게 된 자들은 때로 그들의 비천한 출발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처럼 귀하게 되었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그를 그처럼 귀하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알아보아야 한다.
👉 본문의 ‘스스로 작게 여길 때' 란 사울이 사무엘로부터 왕적 소명을 받았을 때 취했던 겸손한 자세를 가리킨다(9:21). 그러나 사울은 왕위에 오르고 권력을 갖게 되자 비천한 자신을 들어 사용하신 여호와의 명령까지 불순종하는 등 이방의 절대 군주와 같은 왕이 되고만 것이다.
이처럼 ‘권력’ 이라는 것은 하나님보다는 나 자신을 높이는 데 사용되어, 결국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높게 여기는 교만의 죄로 빠지게 하기 쉽다. ‘권력'의 자리에 있을수록 그것을 허락하신 하 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더 신중하며 끝까지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본문은 가르치고 있다.
(2) 사무엘은 사울이 실시하여야 했던 하나님의 명령이 얼마나 쉬운 명령이었던 것인가를 밝혀 주었다(18절).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셨다" 고 하였다. 그 일이 그처럼 쉽고 그 성공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 일을 전쟁이라고 하지 않고, 길로 보낸다. 즉 여행을 보낸다는 말로 표현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를 멸절시키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다. 사울이 만일 그 자신을 거부하고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아말렉에 속한 모든 것을 진멸하였다면 그는 실패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이 싸움 때문에 비난을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3) 그러므로 사무엘은 이 싸움에서 스스로의 이익을 도모하였으며, 스스로를 부하게 하고자 하였던 것이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일인가를 보여 주었다(19절).
"어찌하여 탈취하기에만 급하였으며, 왕자신을 위해 기를 쓰고자 하는 다른 마음을 지님으로 하나님의 명예를 손상시켰나이까?"
돈을 사랑함이 악의 뿌리가 됨을 보라. 그리고 또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하는 것은 가장 큰 죄가 됨을 보라. 그것은 불순종이다.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 하셨나이다."
👉 1절에서 하나님의 분명한 ‘목소리로’로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짐승들의 우는 소리’ 와 백성들의 소리’ 에 판단력을 잃고 범죄하였다. 하나님이 사울에게서 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목소리에 대한 순종이었다. 그래서 사무엘은 범죄한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제사를 드리는 행위보다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은 더 기뻐하신다(22절)고 말하였던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사울이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눈에 그것은 고의적 불순종이었다. 여호와의 눈은 사울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었고, 그의 숨겨진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5.사울은 자기에게 내려질 단죄를 모면하기 위해 여러 번 자신에 대해 변명하였다(20,21절).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였으며, 내가 하여야 할 일을 다했읍니다." 고 변명했다. 그는 자기 생각으로 볼 때 자기가 하여야 할 일을 다했다고 보았다. 그처럼 그는 자기 자신이 볼 때 하나님보다는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그에게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렇지만 그는 명령을 수행하면서 아각을 살려 두었다. 그는 아각을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처럼 육체에 속한 악한 마음은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의 생각과 같은 정도로 생각한다.
사울은 그 싸움의 주요 목적이었던 "아말렉 사람들을 완전히 진멸하였다" 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탈취함으로 "완전히 진멸하여야 할" 것들을 자기 것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의 뜻" 을 알고 있었으며, 그 명령을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두 진멸한다는 것은 지나친 허비라고 생각하였다. 모세의 때에 미디안 사람들의 짐승을 가지고 기도의 제물로 삼은 일이 있다(민 31:31 이하). 그런데 이제 와서 아말렉 사람들의 짐승으로는 왜 안 된단 말인가라고 생각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도하는 것을 좋은 일이라고 보고 그는 백성들이 그것들을 가져오는 것을 보고도 묵인하였다. 그것은 백성들이 한 일이지 그가 한 일이 아니었으며, 더우기 여기 길갈에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기 위한" 것이며, 그래서 여기로 이끌고 왔다고 하였다. 불순종의 자식들에게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들이 입은 무화과 나무잎을 벗겨주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보라.
👉 사울 왕의 인본주의적 불신앙의 면모
: 자신의 왕권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해석.
사울은 아말렉 족속을 에외없이 진멸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한 증거로 아각을 포로로 데려온 것을 들고 있다. 즉 사울은 아각을 살린 행위를 전혀 죄로 인정치 않고 오히려 아말렉과의 전투를 수행했다는 그 실제적인 증거로서 아각을 사로잡아 왔다는 식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인간적인 교만을 드러내는 것.
6.사무엘은 사울의 변명에 대해서 철저하게 반박하기 위해 이렇게 주장하였다(22,23절).
사무엘은 그의 양심에 호소하였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사울이 비록 아무리 신앙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고 하여도 다음과 같은 사실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1) 번제와 희생 제물과 그리고 수양의 기름보다 순종이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우리가 어떤 일에 힘써야 하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면 우리는 행복하다. 그리고 우리는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한다" (사 1:11).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겸손과 성실과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우리의 양심적인 순종을" 모든 번제와 기타 제사" 보다 하나님께서 더 기쁘시게 받으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배웠다. 윤리적인 생활 규범을 준봉하는 것이 모든 의식에 참예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하나님께 가까이 인도하여 준다(미 6:6-8; 호 6:6).
순종은 영원한 자연 법칙에 의하여 부과된 명령이며, 제사는 다만 하나의 실정법에 의한 명령일 따름이다. 순종은 무죄 시대의 법이며, 제사는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을 전제로 한 법이다. 그리고 제사는 능히 순종으로 막을 수 있었던 죄를 없애고자 할 때 필요한 차선책이다. 제사보다는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 더 영광을 돌릴 수있으며, 자신을 거부할 수 있다.
황소와 어린양을 제단에 가져다가 번제를 드리는 것이 "모든 고상한 생각을 하나님께 순종시키며",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보다 훨씬 쉽다. 순종은 천사들의 송축이요(시 103:20), 우리의 송축이 될 수 있다.
👉 여기서 사무엘은 번제와 다른 제사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단지 제사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과 비교하여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칼빈(Calvin)이 말한 바와 같이, '제사는 단지 첨가물이고 예배는 항상 순종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제사의 힘과 가치는 하나님의 교훈에 순종하는 것만큼 훌륭하지 않다'라는 말과도 잘 부합한다.
예수께서도 이에 관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번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더 낫다' 라고 말씀하셨다(막 12:33).
하나님께서 제사를 명하신 본질적 목적이 무엇인가?
제사의 가치에 대한 사무엘의 이러한 평가는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선지자들의 비판과 일맥상통한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에서는 제사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는 사실이 아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사무엘은 당시의 통념을 깨고 단지 동물을 드리는 행위 자체에 제사의 의미가 있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제사라는 제도를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은 그들이 ‘자신의 말씀에 순종하는지의 여부를 보기 위함’ 이었다. 따라서 사무엘은 제사 제도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제사 제도의 근본 정신을 밝히 드러냄으로써 사울의 껍데기뿐인 형식적인 제사관을 비관하고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합당한 예배의 근본 정신
본문에 나타난 정신은 사무엘 이후 많은 선지자들에 의해 여호와에 대한 합당한 예배의 기본 자세로 거듭 강조되었으며(시 50:8-15 사 1:11-17 렘 6:20 호 6:6 미 6:6-8),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 사실이 다시금 확증되고 강조되었고(마 9:13), 사도 바울에 의해서도 예배의 근본 정신으로 계승되고 있다(롬 12:1, 2).
(2) 불순종은 가장 하나님을 노엽게 하여 드리는 것이며,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경쟁시키는 것이다. 불순종을 여기서는 "거역" 과 "완고" 라고 하였으며, "사술의 죄와 우상 숭배의 죄" 와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23절).
참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생활은 다른 거짓 신에 따라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이다. 자기의 타락된 성품의 지배를 받는 자들은 우상이나 점쟁이에게 모든 것을 묻는다. 불순종은 우리 모두를 죄인으로 만든다(롬 5:19). 죄의 악독은 율법을 범하게 하며, 종말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한다(롬 8:7). 사울은 왕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치 않으면 그의 왕실의 권위와 권세를 가지고도 거역과 완고의 죄를 면할 길이 없다. 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백성들이 그들의 왕에 대해서 거역하는 것이 아니다. 한 왕이 하나님께 대해 거역하는 것이다.
👉‘거역’과 ‘완고함’ 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불순종하는 행위를 뜻한다. 이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로 격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는 우상 숭배나 진배없는 큰 범죄가 되는 것이다.
- 사무엘은 사울에 대한 판결문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선고하였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멸시하였으므로(아람역), 무시하였으므로 (70인역), — 하나님도 왕을 버렸으며, 왕을 멸시하고 무시하여,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나이다.”
그대를 왕으로 만드신 분이 다시금 하고자 하지 않는 자들은 사람들을 다스릴 만한 자격도 없고 가치도 없는 자들이다.
👉 사울은 이미 과거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다. 이에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 사울의 왕권은 세세토록 이어지지 않고 머지 않아 끊어질 것을 예언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한 것은 당신을 ‘버리고’ 당신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라도 밝히셨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언급된 여호와에 대한 사울의 배신은 결국 이스라엘 전체가 여호와를 배신했던 결과이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궁극적 통치자가 누구인지를 밝히 보여준다. 즉 신정 왕국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궁극적 주체는 백성들이 선출한 왕이 아니라, 왕을 통해 자신의 뜻을 개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 왕의 책임
이스라엘 왕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대로 이스라엘을 다스려야 할 책임이 있었다.
사울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
그를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은 것, 그가 여호와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 따라서 사울이 여호와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열방과 같은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사울의 불철저한 회개(사무엘 상 15:24-31)
사울은 회개하는 척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만 행동뿐이요, 또 불철저한 회개임이 분명하였다.
👉 사울이 본문에서 ‘범죄하였나이다(하타)' 동사를 사용하여 자신이 지은 죄를 시인한 것은 지금까지 핑계와 변명을 일삼던 그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죄를 시인을 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하는 문제이다.
즉 사울이 정말로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하나님께 회개하기 위해서 이러한 고백을 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사무엘이 사울의 폐위에 대한 경고를 두려워하여 그것을 모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그러한 고백을 했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하지만 이어지는 사울의 말로 볼 때 사울의 범죄 사실 시인은 후자의 의도를 가지고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사무엘을 통해 이차로 왕위 폐위 에언을 듣고 두려워하여 곧바로 자신의 범죄 사실을 시인한 것이다. 이는 앞절에서 인간적인 변명이 실패한 이후 종교적 접근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위기틀 모면하려는 시도였다.
Ⅰ. 사울은 너무나 천박하게 회개하였다.
그는 그의 잘못을 아노라고 법석을 떨기는 하였지마는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을 무서워하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아니하였다. 사무엘이 그에게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 는 말을 낳은 뒤에야 사울은"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라고 말했다(24절). 그의 고객은 자유롭고도 솔직한 것이 못되었다. 고문이나 폭력에 의해 강제된 고백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그의 회개가 위선적이었다는 표시를 몇 가지 찾아 볼 수 있다. 아합의 경우도 그렇게까지 심한 것은 아니었다.
- 사울은 사무엘에게만 좋게 보이려고 하였으며 그의 덕을 보려고 하였다.
그는 백성들의 평판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사무엘을 신처럼 떠받들었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사무엘이 선지자이며 사울을 왕으로 발탁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울은 사무엘을 기쁘게 하고, 그에게 좋게 보이기 위해서, 그의 고백 속에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겼나이다. "라고 말했다(24절). 그것은 마치 사무엘을 하나님 대신인 것처럼 여기는 말투였다.
다윗은 비록 나단의 책망을 들었지마는, 그의 고백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하였지 결코 나단을 의식할 일이 없다. 그래서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나이다" 라고 고백하였다(시 51:4).
그러나 사울은 무식하게도 그의 죄가 사무엘의 말을 거역한 것으로 고백하였다. 그때의 그의 말은 "여호와의 명령" 을 나타내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또 사무엘에게 용서를 빌었다.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25절). 하나님만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말투였다.
자기를 속이는 자들은 소문이 흔히 좋지 않게 난 죄를 범했을 때, 눈에 보이는 그럴 듯한 회개의 모양을 하는 것으로 교회와 그리고 목사하고만 화해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성실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려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사울에 대해 가장 관대한 해석을 내린다면, 그가 사무엘을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중보자라고 여겨서, 사무엘을 통해서 모든것을 호소하고자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그것은 매우 약하다.
👉 사울의 잘못된 회개1
동기, 대상: 하나님에 대한 무지, 경외함이 없음. 잘못된 초점으로 현실 파악이 안됨..
본문에 나타난 사울의 말은 진정한 회개를 하는 사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사울이 진정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면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죄 용서를 구했어야 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하는 대신 사무엘에게 죄 용서를 구하고 있다. → 이 사실은 사울이 자신이 지은 죄의 성격과 죄의 경중 유무에 대해 올바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관심이 오로지 제사장이었던 사무엘과의 관계 개선에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 이러한 사울은 인본주의적 군주의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는 사무엘이 이미 자신을 위해서 기도를 드렸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11절), 사무엘의 중재를 요구하고 있으며, 그 중재를 통하여 자신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2.사울은 고백을 하면서도 자기의 잘못에 대해 변명하였다(24절).
그것은 결코 참다운 회개의 방법이 될 수 없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라고 하였다. 그와 같은 행동은 그 자신의 행동이지 결코 백성들의 행위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백성들이 아무리 그런 일을 하고자 하여도, 전에 읽어본 바에 의하면,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할 권세가 사울에게 있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그의 변명은 거짓되고 경박한 것이었다. 그가 무엇이라고 말하든 그는 사실 백성들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죄인들은 그들의 잘못에 대해 변명하면서, 그것은 그 자신의 마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변호한다. 왜냐하면 마음의 생각에 대해서는 아무도 반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까지 살피시는 분이심을 잊어버리고 있다.
👉 사울의 회개2
동기: 심판에 대한 두려움, 거짓을 모면하려는 의도
죄의 원인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백성들에게 돌리는 사울의 태도 속에서 우리는 그의 회개가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그것을 모면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거짓 고백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후 사울이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왕권 수호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한 것을 볼 때도 그의 회개는 거짓된 것이 분명했다. 이처럼 사울은 자신에게 내려진 왕위 폐위 선언을 무마하기에 급급하여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죄를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살펴보지도 않온 채 무조건 형식적으로 자신의 범죄 사실을 시인한 것이다.
3. 사울이 관심을 가진 것은 명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며, 백성들 사이에서의 자기의 이권을 그대로 간직하는것이며, 백성들이 그를 반역하거나 기만하지 못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 백성들을 두려워하였다는 사울의 변명은 그의 취약한 왕권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사울은 백성둘의 요구에 의해 세워진 왕이었고 아직 사울의 통치가 12지파 전체에 완전하게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어찌보면 사울의 이러한 변명은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이기조차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므로 이를 순종하는 데에는 어떤 조건이나 이유가 있을 수 없다. 결국 사울은 백성들의 소리와 왕권을 강화하려는 자신의 욕심에 의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사울은 그처럼 열심히 사무엘에게 자기와 함께 가서 공적인 승전 기념제를 도와 달라고 매어달렸다(25절).
👉 하나님을 자기 왕권에 이용하려는 기회주의적 태도.
참된 회개할 마음이 없는 사울.. ‘나로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사울은 이처럼 간곡한 표현을 통해 하나님께 경배드리고자 하는 자신의 의중을 사무엘에게 전했다. 그러나 이러한 여호와께 대한 ‘경배’의 요구는 사울이 하나님께 회개하는 기회를 얻기 위함이 아니었다. 30절에서 사울이 ‘나를 높이사’ 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통해 볼 때 자신의 왕으로서의 권위를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도 인정한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의도로 사무엘에게 함께 제사를 드리러 가자고 요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 편에서 접근하는 사무엘과 정치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사울은 이미 근본적인 시각 차이를 갖고 있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하려는 사울의 모습은 하나님의 법궤를 이용하여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했던 이스라엘 장로들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인정하지 않고 인간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까지도 이용하려는 사울의 태도가 본문 속에 드러나고 있다.
이런 사울에게 사무엘은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라고 하며 → 그가 여호와께 돌이키지 않았으므로 자신도 사울에게 돌이키지 않겠다는 사무엘의 의지를 표현했다.
사울이 사무엘을 붙잡아 그 겉옷자락이 찢어지도록까지 성가시게 한 것은(27절), 사무엘을 중요시한 것이 아니라, 사무엘이 자기를 버릴 때 백성들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를 버릴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사울이 신적 에언의 취소를 얻어내려고 사무엘의 걸옷을 붙잡고 매달렸을 때 사무엘의 옷이 찢어진 것은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하에 사울의 왕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게 될 것을 알리는 일종의 징표.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는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다만 그들 자신들의 이익과 명성을 위해서 훌륭한 목회자들이나 교인들에게서 열심히 영향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수가 있다. 그러나 사울이 "내가 범죄 하였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들 앞에서 나를 높여 주소서" (30절)라고 한 것은 매우 천하고 야비한 표현이었다.
이것 회개하는 자의 말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그 정반대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부끄럽게 여겨 주소서. 내게 속한 것이 모두 부끄러운 것뿐이옵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미워 하나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도 얼마나 많이 사울의 위선을 따르고 있는가? 유죄의 판결을 받은 사람들일 수록 사람들 앞에서의 그들의 명예를 걱정하는 것이 흔히 있는일이다. 순결하다는 명예를 잃어버린 자는 다만 회개의 모양을 함으로 그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하는데 그런 자의 회개는 그에게 오히려 부끄러움을 더 가져다 줄 뿐이다.
👉본문에서 사울은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한다. 즉 종교적 권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세우려고 한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사울의 말을 통해서, 사울이 13장에서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드렸던 제사가 왜 망령된 것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13:13). 그는 왕으로서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이용한 것이다. 또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든 것을 멸절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어겼을 때에도 사울은 백성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고 했기 때문에 남겼다고 변명함으로써, 또 한번 여호와의 제사를 자신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본문은 죄 용서를 위한 경배가 불가능하다면, 자신의 왕권이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경배를 드리자는 사울의 불순한 의도를 드러낸다.
하지만 과연 여호와께 버림받은 상태에서도 여전히 정치적 권위가 보장될 수 있을까?
이러한 사울의 모습은 하나님보다는 인간의 눈을 의식하고 왕권을 세우기에만 급급한 그의 인본주의적 비신앙을 다시 한번 표출한 것이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사울의 회개가 거짓된 것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Ⅱ. 이러한 천박한 회개의 모양으로 사울이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한 회개를 통해 사울이 얻은 바가 무엇인가?
- 사무엘은 앞서 말했던(23절) 선포를 되풀이 할 뿐 그 선언이 취소될 수 있는 희망을 조금도 보여 주지 않았다(26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한다" (잠 28:13).
사무엘은 사울과 함께 돌아가기를 거절하고, 자기 갈 곳으로 "가려고 돌이켰었다" (27절). 왜냐하면 사무엘이 우선 볼 때, 하나님께서 내친 사람을 따라가서,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사울의 탐욕을 만족시켜 준 그 승전을 위해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나중에 사무엘은 사울을 따라갔다(31절). 그것은 아마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다른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무엘은 백성들 사이에 폭동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그 제사가 사울에게 영광을 돌리는 제사가 되지 못하게 또 나가서 아각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를 실시 하고자 하였기 때문에(32절) 돌아 갔을 것이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였지마는 31절, 사무엘이 그 예배를 주관하였다는 말이 없다).
👉 본문은 사무엘과 사울이 같이 가고는 있지만, 서로 ‘동상이몽’ 의 상태에서 함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울은 사무엘과 함께 제사에 참여함으로써 백성들로부터 왕권의 건재함을 과시하기를 원했고 사무엘은 비록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이 등극할 때까지 정치 질서를 유지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사울을 따라간 것이다. 또한 사울과 함께 가서 아말렉의 왕 아각을 죽임으로써, 사울이 완수하지 못한 여호와의 ‘헤렘' 명령을 완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울과 함께 동행한 것이다.
2.사무엘은 그의 선언의 내용에 알맞는 하나의 상징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그 상징은 사울의 난폭함이 계기가 되어 나타났다. 사무엘이 그를 떠나가려고 할 때 그는 사무엘을 붙잡으려고 하다가 사무엘의 옷을 찢었다(27절). 사울은 그만큼 선지자와 헤어지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 사건에 대해 선지자만이 내릴 수 있는 해석을 내렸다. 사무엘은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왕국을 그에게서 떼어 내리라" 는 것을 의미하며, 더욱이 그것이 사울 자신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라고 말했는데, 그 사람이란 다윗을 의미하였다. 그 후에 다윗은 사울의 겉옷자락을 베어내게 되었는데(삼상 24:4), 이에 대해서 사울이 말하기를 (삼상 24:20),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아노라" 고 하였다. 아마 사울은 자기가 사무엘의 겉옷자락을 찢어지게 하였던 것을 기억하였을 것이다.
3.사무엘은, 하나님의 선언은 변개치 못한다는 말을 통해 그 준엄함을 재천명하였다(29절).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말이 없으시다" 고 말했다. "이스라엘의 지존자" 란 말이 영어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의 힘(Strength)" 이라고 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이스라엘의 영원하신 자 또는 승리하신 자" 라고 읽는다. 아랍어역에서는 "거룩하신 분", 시리아역에서는 "가장 고귀하신 분" 이라고 번역했다. 패트릭(Patrick) 주교는 이 말을 "이스라엘의 승리의 왕" 이라고 읽었다. "하나님은 그대를 내치시기로 결심하셨는데, 그는 결코 그의 뜻을 변개치 않으시리이다.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그래서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인간들은 변덕이 많아서 쉽사리 그들의 마음을 변개시킨다. 또 연약하여서 그들의 목적을 끝까지 밀고 가지 못한다. 그들의 방법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그런 사건이 일어나는데도 이를 예견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때로 죄인의 회개를 보시고, 그에게 내리려고 하셨던 벌을 돌이키시기도 하신다. 그러나 여기 사울에게서는 회개의 빛이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하나님도 저를 거들떠 보시지 않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