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 성경읽기
창세기 15, 마태복음 14, 느헤미야 4, 사도행전 14
묵상구절
18: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18: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일러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다.
18:3 너희는 너희가 살았던 이집트 땅의 풍속대로 하지 말고, 내가 너희를 이끌고 가는 가나안 땅의 풍속대로도 하지 말며, 그들의 규례를 따르지 마라.
18:4 너희는 내 법도를 행하고, 내 규례를 지키며 그것들을 따라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다.
18:5 너희는 내 규례와 내 법도를 지켜라. 사람이 이것을 행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나는 여호와이다.
18:6 너희는 누구든지 자기의 친족에게 접근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마라. 나는 여호와이다. / *히, '벌거벗음을 드러내다.'
18:7 네 아버지의 하체인 네 어머니의 하체를 범하지 마라. 그 여자는 네 어머니이니 너는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마라.
18:8 너는 네 아버지의 아내에게 접근하여 그 하체를 범하지 마라. 그 여자는 네 아버지의 몸이다.
18:9 너는 네 누이, 곧 집에서 태어났든 밖에서 태어났든, 네 아버지의 딸이나 네 어머니의 딸의 하체를 범하지 마라.
18:10 너는 네 손녀와 외손녀의 하체를 범하지 마라. 이들은 네 몸이다.
18:11 네 계모가 네 아버지에게서 낳은 딸은 네 누이니, 너는 그 여자에게 접근하여 그 하체를 범하지 마라.
18:12 너는 네 아버지의 누이의 하체를 범하지 마라. 그 여자는 네 아버지의 친족이다.
18:13 너는 네 어머니의 자매의 하체를 범하지 마라. 그 여자는 네 어머니의 친족이다.
18:14 너는 네 아버지 형제의 아내에게 접근하여 그 하체를 범하지 마라. 그는 네 숙모이다.
18:15 너는 네 며느리의 하체를 범하지 마라. 그 여자는 네 아들의 아내이니, 그 여자의 하체를 범하지 마라.
18:16 너는 네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마라. 그 여자는 네 형제의 몸이다.
18:17 너는 한 여자와 그 여자의 딸의 하체를 함께 범하지 마라. 너는 또 그 여자의 손녀나 외손녀를 데려다가 그들의 하체를 범하지 마라. 그들은 그 여자의 친족이니 그것은 악행이다.
18:18 너는 아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자매를 데려다가 그 하체를 범함으로 그 여자가 질투하게 하지 마라.
18:19 너는 생리로 부정한 가운데 있는 여자에게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하지 마라.
18:20 너는 네 이웃의 아내와 동침하여 설정하므로 그 여자와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지 마라.
18:21 너는 네 자녀들 중 누구라도 몰렉에게 주지 말며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마라. 나는 여호와이다.
18:22 너는 여자와 동침하는 것처럼 남자와 동침하지 마라. 그것은 역겨운 것이다.
18:23 너는 어떤 짐승과도 교접하여 자신을 더럽히지 마라. 여자도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 것이니, 그것은 타락이다.
18:24 너희는 이런 모든 일로 자신을 더럽히지 마라. 이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민족들이 이런 모든 일로 더러워졌고,
18: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땅의 불법을 벌하였고, 그 땅도 그 주민들을 토해 내었다.
18:26 너희는 본토인이든 너희 중에 기거하는 거류민이든 내 규례와 법도들을 지키고 이 모든 역겨운 일 가운데 어떤 것도 하지 마라.
18:27 이는 너희 이전에 있던 그 땅의 사람들이 이 모든 역겨운 일을 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18:28 그 땅이 너희 이전에 있던 민족들을 토해 냈던 것같이 너희가 그 땅을 더럽힘으로 너희를 토해 내지 않게 하여라.
18:29 이 역겨운 모든 일 가운데 어느 것이라도 하는 사람은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다.
18:30 그러므로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서 너희 이전에 그들이 하던 역겨운 풍속 중 어느 것도 하지 말며, 그것들로 너희 자신을 더럽히지 마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다."
매튜헨리/옥스퍼드
💡 **스페셜 리포트**
- 레위기 후반부 18장~27장: 실생활에서의 성결법.
- 중반부와의 공통점: 후반부는 일상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진정한 삶을 살아가며 세상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한 각종 기준과 지침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는 중반부의 정결법과 같다.
- 중반부와의 차이점: 그러나 중반부의 정결법 규례들이 근본적으로 상징적 규례들이었다면 이 후반부의 성결법 규례들은 실제적 규례들이다. 그리고 중반부가 전적으로 의식법 분야만을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는 의식법 분야뿐 아니라 시민법, 도덕법 분야도 함께 다루고 있다.
본 단락에서부터 시작되는 18:1-20:27 사이의 총 열 문단은 레위기 후반부의 성결법 중에서도 가장 첫머리로서 일반 백성들이 일상 생활 중에 지켜야 할 성결 규례 기사를 보도함. 이는 바로 다음에 이어질 레 21,22장의 제사장들이 일상 생활 중에 지켜야 할 성결 규례 기사와 대응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이상에 제시된 바 일반 백성들이 그 매일 매일의 일상생활 도중에 성결의 유지를 위해 지켜야 할 기본 규례에 대한 일련 기사는 선민의 바른 일상생활과 관련된 모든 원칙과 의무에 대한 총체적 규정이라기보다는 다만 그 기본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각종 규례들이 갖는 전반적 의의
하나님은 당신의 선민에게 무엇보다도 거룩함(Holiness)을 요구하셨다.
- 그런데 이 성결, 또는 거룩함이란 율법의 일부 조항의 준수 또는 어느 한때의 바른 행동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 전체에 대한 온전한 순복,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사랑의 꾸준한 실천에서만 우러나오는 신앙 인격의 전반적 특성이다.
- 또한 거룩함이란 위대함, 진실함, 아름다움, 고상함, 성실함, 선함, 자비로움 등 모든 덕목이 함께 어우러져야 비로소 드러나는 모든 덕목 중의 덕목이다. 즉 거룩함이란 최종적, 총체적 덕목이다. 따라서 이는 율법의 조항의 실천이라는 단절적 행동(Action) 이 아니라 근본적 인격 자체의 바탕(Being)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에게 이 같은 거룩을 요구하신 것은 결국 하나님은 선민에게 당신의 백성으로서의 마땅한 자세로서 특정한 행동 이전에 근본적으로 인격 자체의 바름과 선함과 아름다움을 요구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당신의 선민에게 이처럼 인격 자체의 최종적이고도 총체적인 근본 덕목을 요구하는 근거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거룩함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먼저 당신 자신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백성들에게도 당신과 교제하며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들 역시 거룩할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 같은 하나님의 요구는 정당하고도 필연적인 것이다. 즉 이스라엘이 거룩해야 하는 것은 정당성과 필연성에 근거한 신적 명령에 의한 절대적 의무였다.
실로 거룩함은 인생이 하나님과 만나 교제를 나누며 그 교제 안에서 그분의 평안과 축복을 만끽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요 조건이다.
하나님이 먼저 거룩하시며 또한 우리에게 거룩할 것을 다시금 명시적으로 명령하였는데 어떻게 우리가 거룩하지 못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 그분과 교제할 수 있겠는가?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왜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신자 생활을 하였는데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나 큰 축복을 체험하는 감격이 없는가 하고 묻는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이 바로 여기 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완전한 거룩을 요청하신 것이다. 우리는 신자로서의 종교적 의무의 이행 또는 교리의 고수 등에는 마음을 쓰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요구하신 내 영육의 진정한 거룩함에는 그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다(마 5:8).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해야 할 의무와 아울러 우리가 진정 거룩해질 때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벅찬 교제 속에서 온전한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활짝 열려져 있는 것이다.
한편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도 성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스스로 거룩해야 할 의무는 계속 요청된다(요 17:19; 롬 6:22; 엡 4:23; 벧전 2:9). 나아가 이제 하나님의 구원 계시가 완비된 신약 시대에 사는 성도에게는 그 스스로가 거룩할 뿐만 아니라 이제 그처럼 거룩한 자로서 이웃과 사회에서 행해야 할 하나님의 증인으로서의 역할까지 강조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빛과 소금(Light and Salt)의 비유를 통하여 ‘사람들로 너희 하는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우리 주님의 명령(마 5:13-16)에 응축되어 있다.
사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기독교와 하나님에 대하여 접하고 또 평가하게 되는 가장 실질적 기준은 기독교의 교리나 전통 이전에 기독교 신자인 우리 각자의 행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은 성도의 거룩함은 무엇보다 더 웅변적인 기독교 신앙의 산 척도가 될 것이다.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는 자신들과 똑같은 성정의 사람들을 이토록 거룩한 차원으로 승화시킨 하나님과 성경 진리에 대한 살아있는 선교적 중언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거룩함 자체가 아니라 기독교의 종교적 체제와 전통, 신자로서의 관습과 신앙생활의 매너리즘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인가?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시 16:10).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4).
●이방인의 관습을 좇지 말라 (레위기 18:1-5)
여러 가지 제도를 백성들에게 주신 다음, 하나님은 도덕적 계율의 공포에로 들어가셨다. 전자의 율법(의식적 용법)들은 우리들에게 지금까지 하나의 모형으로서의 유용성을 지니며, 후자의 율법은 여전히 법으로서의 구속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 중요한 단락이 새롭게 시작될 때마다 사용되는 레위기에 자주 나오는 관용적 문구이다(1:1 ; 4:1). 17장이 1-16장에서 언급된 제사법을 중심한 각종 예식법과 본장부터 설명되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한 삶을 위한 각종 규례들 사이를 이어 주는 다리였음을 살펴보았다.
- 이에 이어 나오는 본장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지향해야 하는 각종 성결 규례를 다룬 첫번째 장으로서 이방 풍속을 추종하지 말고 우상 숭배를 금지할 것과 더블어 성적 순결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 이 교훈 역시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접적으로 계시를 주시고 있다.
- 여기에는 이러한 제 율법을 공포하는 신성한 권위가 나타나 있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1, 4, 30절), 또다시 "나는 여호와니라" (5, 6, 21절)*고 하셨다. 즉 "만물을 다스릴 권리를 가지고 계신 여호와이니라. 그리고 너희를 다스릴 특별한 권리가 있는 너희 하나님이니라"는 것이다.
여호와는 존재의 터전이시므로, 또한 권세의 터전이요, 우리는 그의 소유이요, 우리는 그를 섬겨야 되며, 그는 모든 불순종하는 자를 벌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께 최고의 의무를 다하리라고 동의하였고, 그분께 대한 책임이 있으며, 너희의 모든 행복은 그분 안에서 발견되느니라"는 것이다.
💡 **서언**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밝히는 것은
- 앞으로 언급할 명령들이 다름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이며, 이는 너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 서두에서부터 강조하기 위해서.
결언에서도 완전히 동일한 문장으로 수미상응.
- 다시 한번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밝힘으로써 형식적 완결미를 더해 주고 있다.
그러나 언약 준수의 촉구만을 위해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는 말을 쓴 것이 아니다.
-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라는 자신의 이름의 의미를 모세에게 드러내실 때에, 이 계시와 함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실 것이란 약속을 함께 주셨다(출 6:6.7).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이 표현을 들을 때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속된 자신들의 과거를 돌아보게 되며(11:45; 19:34.36; 23:43 ; 25:38.55; 26:13, 45),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기준이 될 세부적인 규정을 말씀하시기에 앞서서 이처럼 규정 준수의 동기가 되는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 것은 그 분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언약 백성의 삶의 동기가 될 수 없으며, 그 분만이 언약 백성의 삶 속에 약속을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 ‘예수’ 란 제 2위 하나님의 이름도 바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이루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게 하며(마 1:21), 그 이름을 힘입어 살아가는 자에게 생명을 주신다(요20:31).
이와 더불어서 언약 백성의 삶에 있어 ‘너희 하나님’으로 번역된 ‘엘로헤켐’ 이란 표현은 또 다른 의미를 준다.
- 이제까지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소개하셨지만(출 3:6.15), 이제는 ‘엘로힘’ 이란 하나님의 이름에 ‘켐’ 이란 2인칭 복수 접미어를 붙여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으로 당신을 소개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는 표현에는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하신(창 17:8)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궁극적으로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이다.
- 즉 ‘너희의 하나님’ 이란 이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을 보호하고 지키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해주셨다(마 22:37; 막 12:30; 요 20:17). 이는 이스라엘에 임한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혈통과 지역의 장벽을 넘어서 바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 성도의 것이 됨을 말하며 우리의 삶의 동기 또한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는 약속에 있음을 알려 주신 것이다.
-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생명과 창조의 하나님께서 친히 너희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누가 그 앞에서 어깨를 늘어뜨릴 수 있겠는가? 그 분 앞에서 사는 백성은 모든 일에 자신감이 넘치며 모든 하나님의 율법을 기쁨으로 행할 수 있는 동기가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생겨 삶을 사로잡는 것이다.
- 애굽에서 보았던 우상 숭배의 유적을 삼가라는 엄격한 경고가 주어졌다.
이스라엘인들은 애굽에서 살았었다. 또 가나안 인들의 우상 숭배에 영향을 받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바로 그 가나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3절).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당신의 규례들을 그 백성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저들의 풍속 중에는 잊어버려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상 숭배로 유명한 애굽에서 젖을 먹으면서 함께 빨아먹었던 바로 그런 것들이다. *"너희는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라"* 고 했다.
💡 ‘좇지 말라’ 는 명령은 일차적으로 과거 애굽에서의 습관을 버리라는 명령이지만, **적극적인 면에서 볼 때는 지금부터 하나님께서 세워 주실 규정을 행동 지침으로 삼으라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음.
특별히 본장에서 다루는 성적 순결에 대한 규례와 관련해서 생각할 때에 애굽의 왕실에서는 형제자매들 간에 결혼이 행해졌으며 짐승과 교합하는 일이 있었다(23절). 심지어 애굽의 동쪽 델타 지역에서는 여자들과 염소들이 같이 살며 수간하는 종교 집단이 있었고 실제로 출애굽 당시 애굽의 바로로 알려진 라암셋 2세는 자신이 염소의 형상을 가진 프타(ptah) 신의 자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이 종살이하던 땅의 풍속을 따른다면, 신앙적으로 그들의 지배를 다시 받는 것이므로, 그 종살이하던 땅의 풍속을 삼가라는 것 자체가 지극히 큰 부조리이다. 또한 그것은 그토록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그들을 구해 주신 하나님께 대하여는 지극히 큰 배신 행위이다.
뿐만 아니라, 모순의 영에 의해서 지배받는 자들처럼,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그러한 제 규례를 받은 후에도 가나안 인들의 사악한 관습을 따르거나 그 땅의 악습을 물려받을 위험에 놓여 있었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규례도 따르지 말 것.**
- 하나님꼐서는 가나안 땅을 ‘내가 인도하여 들일 땅’ 이라고 새롭게 규정해 주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 땅을 이방인의 땅으로 바라보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소유로 주실 거룩한 땅으로 바라보게 하신다.
-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미래의 약속을 미리 보여 주시며(요 14:2.3), 현재 우리 곁에서 동행하여 주심으로 더 확실하게 그 소망을 바라보
게 하신다(마 28:20). ‘가나안 땅의 풍속과…행하지 말고’ 는 앞서 설명한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와 동일한 표현으로서 가나안 땅의 이교적인 풍습에 오염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함을 상실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 규례를 따르지 말 것: ‘너희는 걷지 말라’는 엄격한 금지.
- 규례(훅카): 여기서 규례는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의 활도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 규범인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삶의 반경에서 그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규례들 안에서 걷는다’ 는 말은 철저히 그 규례들의 체제 안에서 생활을 유지해 나간다는 표현.
- 4,5절의 하나님의 법(훅카): 가나안의 법과 하나님의 법을 대조해서 보여 주는 것으로 이처럼 동일한 단어로 두 개의 상이한 법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 영적인 것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사람의 삶을 다스리는 법임을 말해 주기 위함.
- 즉 사람은 영적인 법과 육적인 법을 따로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나안 사람들의 법과 하나님의 법이 동일한 단어로 소개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가나안 사람들의 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법을 소유해야 하는 선택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기준으로 삼는 법은
—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기준으로 삼고 세상에서는 세상의 법을 기준으로 삼고 있지는 않은가? 보통의 경우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의 법을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법을 우선 순
위로해서 세상의 법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롬 13:1).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 세상의 법이기 때문에(롬 1:25),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가지지 아니하고 세상의 법을 맹종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을 부인하는 죄에 빠지게 되고 세상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것.
이러한 위험 때문에 저들에게 경고가 내린 것이다. "너희는 그들의 규례를 행하지 말라" 고 했다. 그러한 악행이 관습화 되어, 저들의 관행을 규례라고 불리게 된다. 그래서 그들의 관행은 하나님의 규례와 적수가 되고,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한 그의 백성들조차도 그것들에게서 법을 배울 위험에 빠져 있는 것이다.
- 그들에게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라"는 엄숙한 책임을 맡겼다(4, 5절). 다윗은 시편 119편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관하여 기도하고 고백을 올릴 때에, 이러한 분부나 이와 비슷한 여러 가지임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 법도(미쉬파트) : 재판장이 선포하는 ‘판결’, 즉 ‘법적인 결정’을 의미. (신17:11; 19:6). 이 단어는 거역하여서는 안되며 반드시 그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권위적인 뉘
앙스를 지니고 있다. 뚜렷한 한계가 있기에 그릇될 수 있는 인간의 판결에도 이처럼 권위가 주어진다면 전지 전능하신 절대자 하나님의 그릇됨이 전혀 없는 ‘판결(미쉬파트)’ 이야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나의 법도(미쉬파타이)’ 를 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법에 절대 복종하라는 엄중하신 명령. - 규례: 3절의 이방인들의 규례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여 — 두 규례 사이에 존재하는 극명한 차이를 더욱 두드러지게 대조하기 위함. 이방인들의 규례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결국 파멸과 죽음을 가져다 주지만(29절) 하나님의 규례는 그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5절 하반절).
- 지키다: 실천을 강조하는 동사 ‘아사’(3절)와는 다르게, 계명이나 명령을 행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부각시키는 동사. 하지만 ‘아사’와 ‘솨마르’는 근본적으로 서로의 의미를 보완해 주며 함께 짝을 이루어 ‘지켜 행하다’란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 새로운 삶의 터전이나 환경에 직면할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가치 체계를 수용할 것에 대한 강한 도전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것의 수용 여부가 곧바로 자신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인 양 생각되어지기 때문이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할수록 오히려 하나님의 법을 더 굳게 붙들라고 말씀하시며 그것이 유일한 생존의 길임을 분명히 해 주시고 있다(26:3-13; 신 28:1-14). 불
변의 진리만이 우리 삶을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한다. 반면 가변적인 인간의 가치를 중심에 두고 사는 자는 새로운 환경에 직면할 때마다 두려움과 동요를 겪을 수밖에 없는 것. - ‘그대로 행하라’ : ‘그것들 안에서(나의 법도와 나의 규례 안에서)’. ‘~안에서 걷다’라는 본문의 표현은 그 법도와 규례가 실제적으로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한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 안에서 생활하도록 하라’ 란 의미를 갖는 본문은 ↔ 3절의 ‘이방인들의 규례 안에서 생활하지 말라(우베훅코테햄 로 텔레쿠)’ 는 의미를 나타내는 문장과 정반대되는 것으로 선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제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하나님의 법도를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
우리도 "하나님의 법도 안에서 향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도를 책 속에 간직하고 우리의 손안에 간직하여,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그것이 실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계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라" (시 103:18).* 우리는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행로를 가야 하며, 그 법도를 우리의 법칙으로 삼아 일해야 하며, 우리의 보물처럼 지키고, 우리의 눈동자처럼 지극히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2) 순종하면 우리에게 큰 유익이 온다.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살리라" 고 했다. 즉 "그는 이제부터 행복하여지리라"* 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다.
[1] 그것은 매우 은혜스러운 교훈으로서, 아직도 유효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성실히 지킨다면-물론 죄 없는 완전에 이르지는 못하겠지만-우리는 의무를 다하는 길이 우리의 안위가 되는 길이요,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경건은 "금생과 내생에 약속" 이 있는 것이다(딤전 4:8). 지혜는 이르기를, "내 계명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또 "영으로써 몸의 행실(이것과 우리의 관계는 이스라엘인에 대한 애굽인의 관습과 같다)을 죽이면, 살리라"는 말씀이 있다(롬 8:13).
[2] 또한, 비록 가장 작은 죄를 범하여도 그 죄가 우리를 이생에서 영원히 축출하리라는, 그런 계약의 성질은 지금 유효하지 아니하다는 이유에서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두 번씩이나 인용하면서, 그것은 복음이 계시하는 신앙과는 반대된다고 했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행하는 자는" —그 안에서 곧 "그 의로 살리라" 고 설명한 것이다(롬 10:5). 그러한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고 했다(갈 3:12).
복음이 성취한 변경 사항은 그 마지막 말속에 있는 것이다. 여전히 "그것을 행하는 자들은 살 것이지만, " 그로 인하여" 사는 것은 아니다.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이지 율법 그 자체가 나빠서는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써 살리라.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삶을 얻는 것이요, 자기들의 공로로 삶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갈 3:21, 22 참조). "의인은 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써" 살 것이요, 저들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힘입어 사는 것이다.
💡 **5절,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 그 사람이 마땅히 행할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
- 우리는 여기서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여야 한다. ‘사람(아담)’ 이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 안에서 살아갈 때 생명이 보존된다는 사실이다.
‘살리라’
- 단순히 ‘살다, 거주하다’라는 뜻을 지닌 ‘야솨브’ 동사와 달리, 본문의 ‘하야’ 동사는 “생명을 가지다”란 의미를 기본적으로 지니는 말이다.
- 인류의 시조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그 사람(하아담)’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생명 나무가 있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창 3:22,24).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그 사람(하아담)’ 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 안에’ 바로 그 생명의 길이 있는 것이다.율법을 지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풍성히 베푸시는 복을 받는 길이다(26:3-13 ; 신 28:1-14). 하지만 율법은 사람에게 진정한 생명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온전한 영생을 가져다 준 분은 바로 율법을 완성하는 분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시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새로운 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찾아왔으며, 그것을 지키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마19:1; 요 8:51) - 따라서 ‘살리라’ 란 본문의 약속의 말씀은 그저 가나안 땅에서 목숨을 연명하는 생존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는 건강, 자녀, 산업 등을 인간이 누리며 살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 안에서의 영생을 누릴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근친상간을 금함 (레위기 18:6-18)
이 율법은 제7 계명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며, 복음 아래 있는 우리들도 지킬 의무가 있는 법이다. 그 율법은 인간의 본성(자연) 자체의 빛과 법에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 조항 중의 하나. 곧 자기 아버지의 아내와 상관하는 행위는, "이방인 중에서도 그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그러한 죄라고 사도 바울이 말했던 죄이다(고전 5:1).
이방인들 중의 어떤 특정한 사람들은 여기에서 금지된 어떤 근친상간을 습관처럼 여겨 왔지만, 천박한 욕심에 사로잡힌 잔인한 민족들 외에서는 그러한 근친상간이 허락되지 않았고 오히려 증오의 대상이 되었었다.
다음 사항을 관찰해 보자.
Ⅰ. 여기에 명시되어 있는 근친상간의 금지는, "그들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6절).
💡 본절은 남자가 가족 구성원과 성적 관계를 가지는 것을 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결혼 상대자가 될 사람이 가족 가운데 있어서는 안됨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명령.
근친상간을 금한 일차적인 동기는 바로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한다. 법을 정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기 때문에 성적 관계의 범위를 정하신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에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 탄생의 통로가 되는 신성한 성이 근친상간에 남용됨으로 해서 세대 간의 구분에 있어 혼란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이 법을 제정하신 것이다.
8절,
- 계모이든 첩이든 아버지에게 속한 그 여자와 성적인 관계를 갖는 것은 부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볼 수 있으며 가정의 질서를 파괴하는 범죄와도 같은 것이었다. 고대 근동에서 다른 사람의 첩을 취하는 것은 그 사람이 지녔던 권위를 자기 것으로 삼은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삼하16:21,22; 왕상 2:22) 아들이 아버지의 첩을 취한다는 것은 그 아버지의 지위를 빼앗겠다는 도전과도 같은 것이었다.
- 이런 경우 주어지는 형벌은 죽음이었다(20:11). 이처럼 부친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생명 탄생의 통로가 되는 신성한 성을 욕망 충족의 도구로 전락시켰으며 신약의 말씀도 동일한 금지명령을 주고 있다(고전 5:1-4).
9절,
- 8절에서 앞서 나온 경우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중 어느 한 편을 공유하는 남녀간의 성관계가 금지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경우는 친누이와 의붓누이의 경우이다. 따라서 본절은 두 경우를 다루는 것이다.
10절,
- ‘벌거벗음’ 이라는 단어는 매우 가까운 관계.를 나타낼 때 쓰는 말.
- 특별히 부부 사이에서는 남자의 벌거벗음과 여자의 벌거벗음이 하나로 여겨졌다. 본문에서 손녀나 외손녀의 하체를 그 사람의 하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혈연적 후손으로서 자신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과 성교하는 것은 자기의 하체를 드러내는 것과 같고 자기 스스로에게 수치를 주는 일과도 같은 것이었다.
11절,
- 8절의 ‘네 아버지의 여자’. 계모가 아니라 비공식적인 성관계의 대상자인 첩이나 하녀를 의미함. 본문은 아버지와 관계를 맺은 첩이나 하녀에게서 낳은 딸도 아버지의 딸로 여겨야 하며, 그녀도 누이인 것을 분명하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
12절, 13절,
- 고모와 성적인 관계를 갖는 것은 아버지의 하체를 범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형제는 아버지와 같은 핏줄을 가지며, 아버지의 수평적인 연장이기 때문.
- 이모는 어머니와 혈육 관계에 있는 자로서 어머니의 수평적인 연장이기 떄문에 이모와 성적 관계를 갖는 것은 어머니의 하체를 범하는 것과 같았음.
14절,
- 비록 아버지의 형제의 부인 즉 ‘백숙모’ 는 아버지와 직접적인 혈연 관계를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본문에서는 ‘아버지의 형제의 하체를 범치 말라’ 는 명령을 먼저 제시함으로써 백숙모를 아버지와 연결시켜 주고 있다.
- — 다시 말해서 아버지의 형제와 그의 아내는 한 몸이며, 아버지의 형제는 아버지의 수평적인 연장이기 때문에, 백숙모를 범하는 것은 곧 아버지의 하체를 범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규정하였던 것.
15절,
- 아비된 자는 자부와 성관계를 가짐으로 자기와 가장 가까운 후손으로 더불어 불화를 일으키지 말아야 했다. 아들의 아내와 성교를 갖는 것은 아들의 결혼 때에 그들에게 행한 아버지로서의 축복을 스스로 깨뜨리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이에 대한 형벌은 죽음이었다(20:12).
- 이것은 주로 친족 간의 결혼을 금지하려 했던 것이다. 결혼이란 참으로 신성한 제도이다. 결혼이란 제도와 안식일 제도는 모든 제도 중에서 가장 오래된 제도이요, 지상의 모든 인간에게 한결같이 뜻을 주는 제도이다.
또한 그것은 인생의 위안을 의도한 것이다. 또한 결혼은 인종의 품위 있고 존귀한 번식을 의도한 것이다. 이 점이 동물과는 달리 인간성의 뛰어난 존엄성이 된 것이다. 인생은 "만물의 영장" 이요, 여기에 나타난 율법들은 인간의 존귀를 뒷받침해 주기 위한 것이다. 신성한 규례는 신성한 규제에 복종해야 한다고 요청되고 있다. 특히 이러한 규례는, 타락된 인간 본성에 깃들어 있는 것(죄)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자칫하면 그 타락한 본성의 고집을 따르고 그 욕망에 사로잡혀 법의 견제를 박차고 나아가기 쉬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금령은 저항할 수 없는 권위로 공포된 것들이지만, 거기에는 지극히 큰 타당성과 공정성도 깃들어 있다.
(1) 결혼을 하면 두 사람이 한 육체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어느 의미에서이든 이미 본성적으로 둘이 아니라 하나인 육체들끼리라면 결혼이란 제도를 통하여 둘이 한 육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지극히 큰 부조리이다. 결혼이란 제도는 이전에는 연합되지 아니한 것을 연합시키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2) 결혼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평등을 부여한다. "네 갈빗대(옆)에서 네 배우자를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전에는 우열의 차이가 있는 자들이 서로 결혼한다면(본문에서 언급된 관계는 바로 이런 관계이다), 본성에 의하여 있던 질서가 한 적극적인 제도에 의하여 사라지고 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것은 결코 허락될 수 없었던 것이다. 주인과 종, 고귀한 자와 비천한 자 간의 불평등은 사회적 동의와 관습에 기초한 것이다. 그런 것들은 결혼이라는 평등성에 의해서 사라져 버린다고 해도 아무런 피해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 그리고 삼촌과 질녀, 숙모와 조카들 간의 불평등성은 혈통으로 된 것이든지 결혼으로 된 것이든지, 인간의 본성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불평등은 영속적인 것이요, 결혼이라는 제도의 평등성에 의해서 사라진다면 큰 혼란이 생길 것이요,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태고적부터 내려온 제도이지만 본성(자연)의 질서에 맞는 것이다.
(3) 형제자매 사이를 제외하고는, (촌수상) 평등한 친족은 결코 금지되지 아니했다. 그러한 평등성은 물론 혈통에만 의해서나 또는 절반 정도만 혈통에 의해서가 아니라 결혼에 의해서 생긴 평등성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전자의 경우와 같은 본성적인 부조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아들들은 자기들의 친누이들과 결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평등성은 어떤 실제적인 율법에 의해서 지원되고 있으므로 범하거나 저항할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은 그들(형제자매)이 젊은 시절에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그들 간에 죄악적인 다른 관계가 생기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결혼의 어떤 의도를 파괴하지 않고는, 서로 결혼할 수 없는 자들이다. 만일 모든 남자들이 자기의 친누이와 결혼한다면(그것도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전해지면 합법적인 것으로 되기 쉽다), 각 가정은 그 나름의 한 세계를 이루게 될 것이요, 그때는 "우리가 모두 서로 한 지체이니라"는 것은 잊혀지고 말 것이다.
이러한 근친상간은 다소라도 건전한 이방인들에게는 가장 파렴치한 짓이요,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여겨 왔던 바이라는 것이 아주 확실하다. 또 이러한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 사람들도 저들이 스스로 그것을 금하는 법을 지켰던 것이다.
근친상간적인 혼합을 변호하기 위하여 결혼이라는 의식을 이용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요, 그들의 죄책을 조금도 완화시킬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규례를 모독하는 죄책을 가중시키는 것이요, 가장 고상한 목적의 제도를 가장 비열한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이용하는 죄책을 더한다.
💡 16절, 형제의 아내와 그 형제는 한 몸이기 때문에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는 것은 곧 그 형제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 규정에 대한 예외가 형사취수법(levirate marriage 어떤 이가 자녀가 없이 죽었을 경우 그 죽은 자의 형이나 아우가 그 미망인과 결혼하는 관습)이었다. 이는 죽은 형제의 이름과 기업을 이스라엘 가운데 영속시키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었다(신 25:5-10).
- 그러나 근친상간 금지에는 전자와 같은 의도 외에도 다음과 같은 의도가 있는 것이다.
- 즉 결혼을 빙자하여 친척 중의 어떤 사람을 범하는 부정한 짓을 금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모든 음탕한 몸가짐, 방탕한 희롱, 악마의 모양을 뒤집어쓴 모든 행동을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악마는 "친족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서로 마음껏 친밀히 교제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 간에 되어지는 모든 일은 순결한 것이다"라고 속삭인다. 그러한 행동이 타인들에게서 별로 악한 것으로 의혹을 받지 않으면 않을수록,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고후 2:11) 더 많은 관심을 그 사람들에게 기울여야 한다. 사탄은 매우 교묘한 원수요, 기회만 있으면 우리를 삼키려고 찾고 있기 때문이다.
Ⅱ. 금지된 친족 관계가 명백하게 기술되어 있다. 거기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법칙은 이러하다.
남자의 친족과도 결혼이 금지되어 있듯이, 자기 아내의 친족과도 결혼이 금지되어 있다. 그들은 둘이 아니라 하나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형제의 아내와 결혼을 금한 율법(16절)은, 유대 나라에만 있는 특정한 예외를 규정하고 있다. 즉 그들은 자식이 없이 남자가 죽으면, 그 남자의 형제나 다음으로 가까운 친족이 그 과부와 결혼하여 그 집안에 자식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해야 한다는 예외 규정이다(신 25:5). 그것은 그 사회에 유익을 가져온다는 이유에서만 허락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유가 사라졌으므로 그러한 예외도 필요 없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남자는 결코 그의 형제의 과부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이 발효되고 있는 것이다.
" 그녀(아내)의 형제를 취하지 말라" 고 한 금령(18절)은 일부다처제를 묵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당시의 어떤 율법들은 그런 것을 인정했다(출 21:10; 신 21:15). 그러나 한 남자가 (야곱의 경우처럼) 자매를 취하여 결혼하는 것은 금하고 있다. 만일 한 남자가 자매를 같이 아내로 취하면, 이전에는 그렇게 가깝지 않던 (자매지간이 아닌) 관계의 두 여자가 한 남자의 아내들이 되었을 경우와 비교해 볼 때, 보다 큰 질투심과 적대심이 일어나기가 쉽기 때문이다. 즉 이전에 평등했던 자매가 한 남자의 아내들이 된 경우이다. 아내의 여자 친형제가 그 남편의 첩이나 둘째 아내가 된다면, 아내가 살아 있는 한, 일생 동안 다툼이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 **17절,**
- 딸, 손녀, 외손녀. 이들과 성적 관계를 맺는 것은 생명 탄생의 통로가 되는 신성한 성을 쾌락의 도구로 악용한다는 잘못 뿐만 아니라 각 세대간에 뚜렷한 구분이 이루어져야 할 가족 관계를 혼란스럽게 하여 가족간에 반목과 질시가 생겨나게 하며 하나님이 제정하신 가족과 가정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다.
- ‘취하다’, — 본문은 단순히 일시적인 성적인 접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의미하는 것.
- 이는 악행이다: 지금까지 앞에서 언급한 ‘하체를 범하는 행위’ 는 충동적인 성적인 욕구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는 범죄였던 것에 반해 본절에서 말하는 결혼의 관계는 악한 계획에 의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음행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하게 제정된 결혼을 음란의 온상으로 바꾸어 버린 죄에 대한 형벌은 화형이었다(20:14). 특별히 불로 그들을 살라 버린 것은 음란의 모습을 태워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할 수 있다.
18절,
-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내와 그 자매를 동시에 취해 결혼 관계를 맺는 것을 금지하신 말씀으로 동일한 남편을 둔 자매가 서로 남편의 애정을 얻기 위해 경쟁하고 투기함으로써 스스로를 괴롭게 하고 나아가서는 가정의 화목을 깨뜨리는 불행을 초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한편 이 경우 어떠한 구체적인 형벌이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자매의 우정과 사랑에 금이 가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금하신 것이다.
- 단 이러한 규례는 아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구속력을 갖는 것이다. 야곱을 사이에 둔 레아와 라헬의 싸움(창 29:28-35; 30:1,2,14-24)이 이 규례가 주어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 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수간과 우상 숭배를 금함 (레위기 18:19-30)
Ⅰ. 부부 생활의 존귀성을 보존하기 위한 율법이 나타나 있다. 즉 부부 생활은 때맞지 않게 부당하게 이용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했다(19절). 또한 음행자에 의해서 침해받아서도 아니 된다고 하였다(20절).
💡 **19절, 너는 생리로 부정한 가운데 있는 여자에게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하지 마라.**
- 부정: 정결법상의 부정(uncleanness).— 즉 출혈 중에 있는 여인과의 동침을 금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정한 것과 부정한 것 사이에 분명한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가르치기 위한 것.
- 따라서 부지중에 이 규례를 범하면 단지 칠 일 동안 부정해지는 것이지만(15:24), 본문의 규정을 경히 여기고 출혈 중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교를 하는 자는 하나님의 법을 경멸한 패역한 자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끊어지는 형벌을 받았다(20:18).
- 이 표현은 본문의 규정이 보건상의 정결 문제도 물론 나타내고 있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의식적인 관점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20절, 이웃의 아내와 동침하여 자신을 더럽히지 말 것
- 본문의 ‘통간’ 단어는 구약에서 오직 4회만 사용됨. 2번은 남편 있는 여자와 간통을 묘사할 때(본절, 민5:20), 2번은 짐승과의 교합을 묘사할 떄(23절, 20:!5).
- 원어는 ‘정상적인 부부 관계가 아닌 비정상적인, 특히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부정하고 가증스러운 성관계를 언급할 때’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왜 죄로 여기시는가?
한글 성경은 번역을 생략했지만, 히브리어 원어 성경에는 ‘씨’(창1:12), ‘자손’(창12:7)을 뜻하는 단어와 결합되어 ‘자손을 위한’ 이란 뜻을 갖는 단어가 뒤따라 나온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자손을 위한 성교를(이웃의 여자에게) 주다’란 뜻이 있다.
그런데 ‘자손’은 하나님께서 언약에 의해 베푸시는 복의 증거였다(창15:5; 16:10).
그러므로 그러한 자손을 얻기 위한 신성한 의미를 지니는
성교를 쾌락을 얻기 위하여 이웃의 아내와 행하는 것은 부정함에 불신앙을 더하는 매우 크나 큰 범죄가 아닐 수 없다. 즉 이는 성을 통하여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복주심을 경시하고 파기하는 것이다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는 부정한 자이고 그러한 부정을 저지른 남녀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20:10).
이는 하나님께서 한 몸으로 만들어 주신 연합을 깨뜨리는 죄였을 뿐만 아니라 한 가정의 파괴를 불러일으키며 더 나아가서는 거룩한 공동체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가증스러운 악행이었기 때문에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죄였던 것이다.
Ⅱ. 또한 자기 자녀들을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하는" (21절) 가장 수치스러운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율법이 있다.
몰렉 신이란(어떤 자들의 생각에 의하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불인 태양을 예배하기 위해 만든 우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를 예배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자녀를 그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 그 우상 앞에서 불태워 죽이든가, 그 우상에 귀의한 광신자로 삼았다. 그래서 그 자녀들은 두 개의 불 사이를 통과하게 하든가, 어떤 자들이 생각하는 데로, 하나의 불 위에 던져 버렸던 것이다. 이것은 이 거짓된 신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한 행위들이었다. 그들은 그러면서 자기들의 자녀들 중의 하나를 이런 식으로 하여 몰렉 신에게 성별하여 바치면, 나머지 자녀들 모두에게 행운이 온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우상 숭배자들은 자기들의 친자식을 거짓 신들에게 그렇게 아낌없이 바치었는데, 우리에게 참 하나님을 위해 바치지 못할 만큼 아까운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죄악(이러한 율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그들은 그러한 죄를 짓는다)이, 자신들과 자기들의 자녀들을 하나님께 향하도록 보호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자행되었고, 그들과 그들 자녀들이 그런 죄로 인하여 어떻게 악화되었는가를 살펴보자.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자녀를 가져 그들(우상)에게 드려 제물을 삼았도다" (겔 16:20).
그러므로 본문 중에는, 그러한 행동은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불리워졌다. 그들은 여호와보다는 몰렉 신에게 더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자들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의 가축만 드리는 자들이 몰렉에게는 자기들의 자식까지도 드렸기 때문이다.
💡 **본문에 언급된 ‘몰렉’이 무엇인가?**
- 가나안인들이 섬기던 우상. 베니게 사람들, 카르타고 사람들 사이에서 멜카트, 바알멜렉, 말곰 등으로 불림. 어린 아이의 희생을 드려서 섬겨야 했다.
- 청동상으로 만들어진 몰렉의 신상은 우묵해서 불을 지필 수 있었고, 소의 머리 형상을 가졌으며, 팔이 앞으로 뻗어 있어서 희생으로 드려지는 어린 아이를 받아들 수 있었다.
- 아하스 왕 시대에 힌놈의 아들이 골짜기에서 아이들을 죽여 뻘겋게 불에 달아 오른 오른 우상의 팔에 놓아 태워 몰렉에게 제물로 바쳤다(왕하23:10; 16:3; 17:17; 21:6; 겔16:20, 21; 30:31; 렘32:35). 본절과 신12:31을 볼 때 이미 몰렉에게 행하는 이같은 제사가 가나안에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에 몰렉에게 드리는 제사 의식을 묘사하는 표현이 나온다. ‘너는 ~불로 통과케’.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자녀를 불태워 죽였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몰렉에게 ‘건너가게 하기 위하여(레하아비르)’ 자녀를 주지 말라고 말할 뿐이다.
여기서 ‘건너가게 한다’ 는 것은 곧 자녀에 대한 소유권의 이양을 말한다. 즉 몰렉에게 자녀를 건너가게 한다는 것은 그 자녀에 대한 소유권을 몰렉에게 이양한다는 것이다. 그 자녀를 불에 태워 죽여 제물로 삼지 않았다면 아마 이 말은 곧 몰렉을 섬기는 이방 사제에게 그를 준다는 말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이방 사제 아래로 들어가게 된 그 아이는 몰렉을 섬기는 이교적 의식에 참여하여 우상 숭배 행위를 했을 것이다. 원어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보면 이처럼 몰렉을 섬기는 제사장에게 넘겨 주었다고 번역하는 것도 가능하다. 어쨌든 자녀를 이방의 우상에게 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것. - ‘자손’: 자손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주어지는 축복의 증거이며(창15:5; 16:10), 그 후손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창17:7) 하나님의 소유이다(출19:6).
- 따라서 그 ‘자손’ 중에서 어느 누구라고 몰렉에게 주는 것은 자손 대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하나
님의 언약을 파기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복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소유권에 도전하는 죄인 것이다. 그래서 20장에서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상세히 다루게 된다(20:1-7).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마라. 나는 여호와이다.
-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네 하나님의 이름’으로 소개됨. 이것은 하나님의 명예와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 ‘욕되게 하지 말라’ : 원형의 의미는, 거룩한 것을 거룩하지 않게 만든다는 의미. 하나님의 이름은 직접적으로 더럽혀지기보다는, 대부분 하나님께서 용납치 아니하는 것, 예를 들어 우상 숭배(겔 20:39)나 언약을 깨뜨림으로써(렘 34:16) 간접적으로 더럽혀졌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그 백성 가운데 두셨기 때문에 백성들의 거룩치 못
한 삶은 곧 열국 중에서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히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겔 36:20,21).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를 홍보하기 위해 보냄받은 대사들이다. 대사는 자기 명예를 위해 사는 자들이 아니라 나라의 명예를 지키고 대표하기 위해 일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왕 되신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가 좌우되는 것이다. - ‘나는 여호와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땅히 영예롭
게 해야 할 하나님의 신분과 이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나는 이방 신과 같지 않은 유일하고 스스로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며,너희를 애굽의 종 되었던 곳에서 구원하려고 모세를 통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타났던 그 언약의 하나님이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것을 명심하고 여호와란 이름을 결코 이방 중에서 더럽히지 말지니라’ 라는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Ⅲ. 또 부자연스러운 정욕 곧 남색과 수간을 금하는 율법이 있다.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치욕적인 이름의 죄들이다(22, 23절).
다른 죄들은 인간을 짐승의 수준 정도로 떨어뜨리지만, 이 죄들은 인간을 짐승 이하로 몰락시키고 만다. 도대체 이러한 율법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율법이 수립된 이래로 그러한 율법이 범해진 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인간성에 대한 영원한 수치요 치욕이다. 인간이 이렇게 부끄러운 욕정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은 흔히 인간이 우상을 숭배한 데 대한 처벌로 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도 그렇게 말했다(롬 1:24).
💡 동성애는 죄악의 도성 소돔에서 성행하던 죄였고(창 19:5), 여러 이방 민족들이 빠져든 죄였으며(롬 1:27),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었다(삿 19:22). 이처럼 동성애는 과거에 존재했던 범죄였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인본주의와 성의 해방이라는 이름 아래 급속도로 번져가고 있으며 심지어 특정 교단의 교회에서는 동성연애자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실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죽이라고 하신 사악한 범죄인 동성애는(20:13) 남녀 간의 역할 구분을 무시하고 생명 탄생의 신성한 통로인 성을 단지 동물적인 쾌락 본능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가 점점 더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은 인간의 타락상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보여 준다.
‘가증한 일이다’
- ‘혐오스러운 것’, ‘질색인 것’. 매우 강한 거부를 나타내는 말. 주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행위를 가리킬 때 쓰였다(잠6:16; 11:1).
- 태초의 창조 때에 질서 있게 창조된 모든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보시고 좋아하셨던 하나님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왜 동성애를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지 명백히 깨달을 수 있다. 즉 이는 생육하며 땅에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벗어난 것이며 창조의 질서를 파괴하는 죄로서 하나님이 극히 미워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창조의 질서를 혼란, 변질시키는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20:15,16).
23절, 동물 성교(수간)를 금함
- 수간(bestiality)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경멸하는 태도로 자신이 부정하게 되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롬 1:32).
- 고대 근동 지방의 신화와 종교에서수간의 예
- 이스라엘이 얼마전까지 머불렀던 애굽의 멘데스(Mendes)에서는 수염소 형상의 ‘판(Pan)’ 신 숭배의식의 하나로 인간과 동물간의 수간 의식이 있었다(Krebs).
- 또한 가나안의 신화에는 폭풍의 신인 바알이 죽음의 신인 모트의 촉수를 피하려고 암소와 성교를 가지는 얘기가 나온다(Cassuto).
- 수염소를 경배하던 애굽에서는 여자들이 수염소 앞에 엎드리어 수간을 행했던 것이 역사서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Herodotus).
- 이런 의미로 볼 때 수간을 금한 것은 애굽과 가나안의 그릇된 종교와 사상을 따르는 것에 대한 강력한 경고의 말씀인 것이다.
- 그리고 보다 근본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수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자신의 특권을 버리고 동물과 같은 수준으로 낮아지는 자기 비하이며 생육하고 번성케 하기 위하여 주어진 성을 쾌락 추구의 도구로 사용하여 사람과 동물을 엄격히 구분하신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무시하는 신성 모독의 범죄.
Ⅳ. 이러한 죄와 그밖에 가증스러운 사악 행위를 금하는 말씀이 나타나 있다. 우리를 훈계할 수 있는 명백한 권한을 가진 분께서-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사람으로 대접하시려 하시고 또 "사랑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이끌려하시는" (호 11:4) 분이신고로- 겸손한 자세로 우리와 변을 펴신다.
- 죄인들은 이러한 혐오스러운 짓으로 자기 자신들을 더럽힌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라" 고 하셨다(24절). 모든 죄는 양심을 더럽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죄들은 그 자체가 특별한 배덕의 요인을 품고 있는 죄들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고맙게도 우리에게 스스로를 정결케 하라고 요구하시며, 더러움에 빠지지 말라고 권고하시고 계신다.
💡 24절, 그와 같은 종류의 성행위는 한 번의 행위만으로도 죽음의 형벌을 받는 것으로서 두 번 이상 경고할 필요가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법적 성관계로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 것을 경고하신 하나님께서 그 이유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가나안 족속들의 현재 모습이다.
이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민족들이 이런 모든 일로 더러워졌고,
- 본문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을 ‘너희의 앞에서’ 즉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쫓아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죄를 저지른 자들의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 이스라엘에게 시각적으로 보여 주시겠다는 것이다.
- 따라서 이스라엘은 그러한 죄악을 저지른 자들에게 현재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을 보면서 미래의 자기들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를 다짐해야 했던 것.
-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의 백성이 직접 보고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역사를 이끌어 가심으로 그 백성을 현장 교육시키신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 성도들 역시도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모든 현상들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말씀에 비추어 보며 삶의 방향을 설정해야 할 것이다.
- "무릇 이 가증한 일을 하나라도 행하는 자는 끊쳐지리라(죽으리라)" (29절). 또 그렇게 되어야 당연하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힌 자는, 하나님께서도 그를 파멸시킬"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3:17). 육체의 정욕은 영혼을 거스른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아니라면, 영혼은 육체의 정욕으로 인하여 파멸되고 말 것이 확실하다.
- "그 땅도 더럽다" 고 했다(25절). 이러한 죄악이 자행되고 묵인되면, 그것으로 인하여 그 땅은 하나님의 회막이 들어서기에는 부적합한 곳이 되어 버린다. 순결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스러운 임재를 나타내는 표시(회막)를 그러한 땅에서는 거두어 가실 것이다.
또한 그 땅에 사는 주민들에까지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그러한 죄에 감염되거나 같이 빠져 버릴 위험에 처하는 것이다. 정말로 선한 사람들로서는 그 땅에 살기조차 역겹고 증오스럽게 되는 것이다. 소돔의 악행이 의인 롯의 영혼에 미친 영향과 같은 것이었다.
💡 **우상이 가져다 준 결과는 풍요가 아니라 땅의 더러움.**
- 이는 실제로 땅이 위생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더러워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땅은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물이며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25:23), 땅이 더러워졌다고 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땅을 평가하신 것이다.
- 가나안 땅은 가나안 족속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어떤 우상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 살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세심하게 그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을 더럽혔던 이방인의 가증스러운 행실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결과로 그 땅을 축복하셔서 그들에게 풍요를 베풀어 주시는 것.
‘내가 그 땅 위에 있는 그 땅의 죄악을 감찰하여 벌할 것이다
- 이 말씀은 그 땅에 사는 족속들의 죄악과 땅의 죄악을 동일시한 표현으로 비록 죄를 지은 것은 그 땅 거민들이었지만 그 땅 거민을 몰아내기 위해 그 땅에 먼저 심판을 행하셨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 즉 하나님께서는 비를 멈추시고 온역을 일으키시고, 곡물을 마르고 시들게 하심으로 그 땅에 살던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에 직면하게 만드시거나 나아가 전쟁을 그 땅에 일으키셔서 그 땅을 떠나게 하시는 것이다.
그 땅도 그 거민을 토해낼 것
- 가나안 땅을 의인화 한 표현.모든 소유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먼저 깨닫지 못하고 죄악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는 어떤 기업이 손에 쥐어진다 해도 결국 그 기업에 의해 자기가 토하여지는 종국을 맞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정립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사는 인간에 대한 형벌을 그 땅 위에 내리심으로 더러워진 땅을 정결케 하시기 때문에 정결한 땅 안에 있는 부정한 백성은 그 땅을 모독하는 것이며 이는 결과적으로 땅으로 하여금 부정한 것을 밖으로 토해내게 하는 것이다.
- 이러한 죄악 때문에 (가나안 땅의) 이전 주민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스럽게 되었다(24,27절). 그러므로 이러한 율법이 필요했던 것이니, 그것은 전염병이 나도는 지역에 우리가 들어가려면 그 병을 예방하는 예방 주사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런 짓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런 짓을 행하던 제 민족들은 이제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고, 불원간 이스라엘의 칼에 의해서 멸망해 버릴 운명에 놓이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하여 이러한 진흙탕에 빠져서 자신을 더럽힌 자들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인가를 저들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고, 모든 선한 자들의 콧구멍에서도 얼마나 악취가 나고 있는가를 알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이스라엘인들처럼 이미 성화되고 존귀케 된 사람이 다시금 자기들을 더럽혀서야 말이 되겠는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추악한 죄악을 보게 되면, 우리는 그것으로써 우리의 정결을 보존하려는 지극한 관심과 조심을 지녀야 하는 장신구로 활용해야 한다.
- 이런 따위의 죄악으로 인하여 가나안 인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죄악이 아모리 족속의 죄악의 분량을 채우게 되자(창 15:16). 그렇게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들이 파멸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은 당시로서는, 당분간, 그들의 나라를 도구로 써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악을 인하여 벌하리라" 고 말씀하신 것이다(25절).
대범하게 신성을 모독하는 무신론적인 자들 위에 내려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들은,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에게 신성 모독과 무신론을 좇는 조그마한 겉모양을 닮는 것조차도 철저히 조심하라는 경각심을 주기 위한 것임을 명심하라. 가나안 인들의 패망은, 이스라엘인들이 그들을 닮지 못하게 하려는 경고의 사건이었다. 아니 그 보다도, 창조주께서 그러한 가증스러운 일에 분노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 세계가 그러한 죄악으로 짓눌려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다. "그 땅 스스로도 그 땅의 거민들을 토하여 낸다" 고 했다(25절). 말하자면 그들이 밟는 그 땅이 그들의 발 밑에서 신음하고 아파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대적" (사 1:24)들이 그 땅에서 물러나기까지는 그 땅도 평안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죄악이 지니고 있는 극도의 증오스러움을 말해 주는 것이다. 죄악의 사람은 참으로 "악을 행하기를 물 마시듯이 한다" (욥 15:16). 그러나 무해한 피조물들조차도 그들을 대하여 파도치고 있다. 많은 집과 마을이 사악한 주민들을 토하여 내었다. 말하자면 그들이 그 사람들을 혐오한 것이다(계 3:16). 그러므로 "그 땅이 너희로 토하여 낼까" 조심하라고 경고했다(28절). 그 땅은 그들에게 보장되고 권리가 양도된 땅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 인들의 악행을 답습한다면 그 땅은 그들에게 같은 운명을 안겨다 주리라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가나안인 들과 마찬가지로 사악한 이스라엘의 자녀들도 똑같이 가증스럽게 보신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아니 오히려 더욱 가증스럽게 보셨다는 사실 명심해야 된다.
바울 사도는 여기에서 이스라엘인들에게 주어진 것과 같은 종류의 경고를 개종한 이방인에게 해 주었다. 그것은 하나님께 거부당한 유대인을 두고 한 경고이었고, 이제 이방인들이 그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말았다고 했다(롬 11:19 이하). 그러므로 그들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본을 받지 말라" 고 하는 경고를 들어야 했다(히 4:11). 이러한 경고는 더욱 일반적으로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되었는가를 생각하면서 온갖 죄악에서 실제로 떠나야 하는 것이다. 무저갱의 문에서 나는 소리에 신앙의 귀를 기울이자. 그리하여 저주받은 죄인들의 슬픔에 찬 비명과 부르짖음을 들어보자. 그들은 땅이 토하여 내고 지옥이 삼켜 버린 자들이다. 저들은 자기들의 죄로 인하여, 이제는 영원히 멸망되고 만 자신들을 뉘우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최후 운명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자.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을 깨달아 우리는 죄에서 떠날 줄 알아야겠다.
Ⅴ. 본 장은 이러한 죄악의 물결에 대한 강력한 방파제를 주시는 것으로써 결론짓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가중한 풍속은 하나라도 좇지 말라" (30절). 이것이 처방이다.
다음 사실을 명심해 두자.
- 죄악적 풍속은 가증스러운 풍속이다. 속되고 유행어도 악한 풍속은 결코 그 자체가 경건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것이 조금도 가증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유행되는 속된 풍속은 더욱 가증스러운 것이다. 보다 관습에 깊이 물들어 있으면 있을수록 그만큼 그러한 악은 더욱 위험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 안에는 생명이 있지만(15절), 이방인의 규례 안에는 스스로를 더럽혀 죽음으로 인도하는 가증함만이 있을 뿐이다.
- 죄악 된 풍속을 하나라도 용납하거나 인정하는 것은 치명적인 해독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하나의 악은 많은 악으로 통하는 관문이 되기 때문이다. 단 한 가지의 부조리를 용인하면 당신은 곧 수천(부조리)을 불러들이게 된다. 죄악의 길은 저절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언덕길이다.
- 하나님의 규례에 언제나 굳게 서는 것이 거대한 죄악의 파멸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제방이 된다. 거룩한 규례의 달콤한 맛을 더 잘 알고 그 규례의 권능을 그만큼 잘 느낄 수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에게는 죄인들의 가증스러운 풍속이 주는 금지된 쾌락에 흐르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 더 적게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를 안전하게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뿐이요, 그 은총은 은총의 방편(규례들)을 활용하는 가운데서만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과의 제도들을 버리지 아니하는 한, 하나님은 결코 먼저 우리를 죄악 된 욕정에 버려두시지 않으신다.
💡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만이 가증한 풍속을 행치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제시해 주시는 것이다.
- 명령: 내 명령을... 의 원형은, 하나님께 적용될 때는 ‘(하나님의) 명령’(창26:5; 민9:19; 왕상2:3)을 뜻하며 인간에게 적용될 때는 ‘(하나님이 지키라고 명하신 인간의) 직무’(민3:8), ‘책임’(민1:53)등 인간의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 여기서 ‘내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만 하는 하나님의 명령.’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 동일한 표현이 본장 시작 부분에 쓰여서(2절) 처음부터 이 모든 규례의 근거가 무엇인지 분명히 나타내 주었다. 그런데 본장 마지막에도 동일한 표현이 쓰여서 이 말이 본장의 모든 규례의 결론 중에 결론임을 나타낸다.
- 즉 이 표현은 그들이 이제껏 애굽에서 보아왔던 신들이나 앞으로 들어가서 볼 이방 사람들의 우상이 그들이 따라야 할 신이 아니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그들이 경배하고 따라야 할 대상임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자신을 연결시켜 보여 주시는 것만큼 이스라엘 백성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은 없다.우리 성도 역시 우리의 주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가슴 깊이 새기며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모든 것을 과감히 버리고 오직 그분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 “너는 그들을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신 7:21).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신 것은 당신께서 그들을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섬겨야 할 대상이 다름아닌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 란 사실을 본장 전반부와 후반부에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란 표현을 중복하여 사용함으로써 백성들에게 분명히 인식시키시고 있는 것이다.